[ 쟁점 ] 제 3의 수행법 어떻게 볼 것인가

1. 제3수행법에 대한 문제제기의 경위 및 그 의미

1)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경위

필자는 불교계에서 오랜 동안 공인(언론계 기자, 종무원 혹은 포교사 등등)으로 활동했던 재가불자나 현재 승적을 가진 스님들이 제3수행법의 전도사(?)가 되어 일반 불자나 스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현상과 일부 제3수행법이 공공연하게 ‘부처님 의식’ 체험 운운하는 광고 등을 보고, 과연 불자에게 제3수행법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 제3수행법 전도사들의 주장대로 그것을 수련하면 부처님의 경지 혹은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를 누구나 빠르고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제3수행법은 불자들의 불심을 고취하고 자비행을 강화시켜주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불자들에게 그 의미는 긍정적인 것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답해보고자 필자는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각종 제3수행법의 실수자(實修者)들을 만나보고 그들이 펴낸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 중간 평가의 일환으로 필자는 〈불교와 문화(2001년 1,2월호)〉에 ‘불교에서 보는 제3수행법, 왜 문제인가’라는 글을 통해 문제 제기를 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필자는 강도 높은 비판보다는 불자이면서 제3수행법을 실수하고 있는 이들과 공개 토론을 통해 문제제기 자체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제3수행법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보고자 했다. 어쩌면 필자의 문제제기는 제3수행법의 오해 내지 몰이해에서 비롯된 기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본인의 문제제기는 적지 않은 불자들의 관심과 호응을 불러 일으켰지만, 정작 한마디 해줬으면 하고 바란 제3수행법 전도사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일체 함구를 했다. 제3수행법 전도사들의 함구는 일종의 전략적 대응으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자면 불교와 자신들의 관계를 스스로가 먼저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과정 중에 스스로 자신들의 입지를 좁히거나 부정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수행법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자와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작금의 공론화가 유야무야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창 유관 논의가 진행되고 있던 기간에 뜸하던 일부 제3수행법 광고들이 다시 하계 수련회 철을 맞이하여 여러 교계신문에 등장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 불교의 조직적 대응력을 한참 무시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일회성의 문제제기와 피상적인 토의로 그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전략에 휘말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불자로서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주는 불성(佛性)으로 통일되어 있다. 즉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원칙적으로 불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자란 3보에 귀의하고 각종 계를 수지하고 현존 3보를 수호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정등정각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이를 말한다. 불자에게는 이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론(三學)이 부처님을 통해 설해져 있다. 그런데도 제3수행법은 과연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불자의 목표 달성을 더욱 쉽게 해주는 것일까, 즉 불법(佛法)의 보조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이 제시한 무상정등정각보다 더 높은 깨달음의 단계를 제시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일까?

먼저 제3수행법을 불법의 보조 수단 등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 논리상 3학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물론 외도는 이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자가 이러한 입장을 가진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종교의 논리는 자기완결적인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제3수행법을 용인하는 것은 일견 열린 정신(open mind)을 지닌 훌륭한 인격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불교의 수행체계를 확신하지 못하는 자의 변명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 ‘훌륭한 인격자’는 곧 ‘얼치기 불자’인 셈이다.

이 얼치기 불자들은 자못 불교 수행법의 현대화 등등에 관한 문제에 많은 관심과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바람에 언뜻 사려 깊은 불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가진 기회주의적 속성의 또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재미있게도 일단 ‘제3수행법’을 향해 구도의 길을 떠난 자들은 한 곳에 정주하기보다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그들에겐 어느 정도 일정한 동선(動線)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말로는 불자임을 포기하고(본질적으로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표면적으로 굳이 그 사실을 밝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하다) 직업적인 명상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무상정등정각과는 다르거나 더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이는 불자로 남아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 자가 불교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이미 불자라고 할 수 없는 이상 성불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불자가 그리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는 없는 듯하다.

사실 형식 논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제3수행법에 관한 문제는 따로 제기할 필요도 없이 그 결론은 부정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형식 논리로 현실을 재단할 수는 없고, 그것을 불자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동일한 결론에 이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만, 신행 활동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는 적지 않은 불자들을 위해 우리는 수고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불자가 제3수행법을 수행해도 괜찮은 것일까? 전면적으로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한계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제3수행법을 불교 집안 안에서 가르치고 배운다면 그것은 곧 정법(正法)을 훼손하거나 불자로서의 자기 동일성(identity)의 상실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불자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답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라고 할 수 있다.

3)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룰 것인가?

이미 말했지만 이 문제제기는 불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 당위성을 가지고 또한 그 안에서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불자가 아닌 사람, 이미 불교를 떠난 사람(背佛者)에게 이 문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 논의를 끌고 나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불교적 당파성이다. 이 말은 우리의 논의는 그 척도로 중립적이고 무가치한 객관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불교적 세계관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제3수행법 자체의 내적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논리적이며 과학적이고 상식적인가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즉 그들의 이데올로그(ideologue)나 교주 등이 논증하고 변호해야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해 줄 일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세계관과 방법론이 불교의 그것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의 초점일 뿐이다. 논의 결과 양립 가능성이 있다면 수용의 한계만 따지면 될 것이고, 불가능하다면 철저하게 배격하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2. 제3수행법의 개념규정과 그 실체 파악을 위한 논의

1) 논의의 편의를 위한 개념규정

먼저 제3수행법의 개념 정의를 해보자. 우선 필자는 불자이기 때문에 불교를 제1수행법에 배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북방불교의 간화선이나 묵조선 그리고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그리고 티벳불교의 여러 가지 명상법 등 소위 불교적 전통에 위배되지 않고 그 연장선상 내지는 발전선상에 있는 불교의 모든 수행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2수행법은 도교, 힌두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유교 등 역사적으로 확연한 전통과 실체를 가지고 있는 여러 종교의 수행법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른바 제3수행법은 제1수행법과 제2수행법의 정의를 벗어나거나 혼합되어 그 전통이나 전승이 확실하지 않고 주로 20세기에 와서 창안된 수행법들을 광범위하게 불러본 이름이다. 이 명칭은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나 자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공통성을 추출해서 일반화한 것으로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동시에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일반화가 논의를 성립하지 못하게 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아래에서 그 전반적인 공통성을 찾아보자.

2)작금 유행 내지 기반을 넓혀가고 있는 제3수행법의 전반적인 공통성과 특징

① 전승의 불확실성:
소위 제3수행법의 창시자들은 자신들의 행법의 연원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밝히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가야산 마음수련회의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방법론을 서울에서 온 양복을 입은 말끔한 신사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또 아봐타의 해리 팔머 역시 그 수행자들의 말에 따르면 불교의 위빠사나를 상당히 응용하고 기독교의 묵상법, 여러 심리학적 기술들을 종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전승 내지 행법의 구체적인 형성 과정은 적어도 외부로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또한 파룬궁의 리홍지 역시 불교와 도가의 여러 스승들을 열거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실존성 여부는 아마도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는 한계가 있다.

② 수행법의 단순성:
대부분의 제3수행법이 자신들의 수행법이 가장 쉽게 깨달음 혹은 어떤 정신적 목표로 인도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룬궁의 경우 아주 단순한 형태의 기공 체조식의 동작을 연마하는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③ 목표의 빠른 성취:
그들에게는 석가모니 붓다가 억겁의 보살행을 통해 성불한 것은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행법을 통하면 단시일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마음수련회의 경우 최고 경지라는 전인완성의 단계까지 최소 7주 최대 11주 정도 걸리는 것으로 고시하고 있다. 아봐타의 경우 최고 단계인 위저드 코스를 마치는 데 최소 36일 최대 40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④ 비공개성:
모든 제3수행법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들은 자신들의 수행법 전반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고 있다. 따라서 그 실제 내용을 알고자 한다면 입문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공개된 자료나 설명은 처음부터 그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그것만으로 전반적인 과정을 추론하기는 매우 힘들다.

⑤ 세속적 이익:
대부분의 제3수행법이 겉으로는 깨달음 같은 정신적인 목표를 힘주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행복한 인생, 건강 같은 실익을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⑥ 깨달음의 상품화:
제3수행법은 제1과 제2 수행법의 전통적인 ‘사자상승(師資相承)’보다는 대체적으로 깨달음을 일종의 패키지 상품화하고 있다. 즉 일정한 수련비를 내고 일정 기간 수련하면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고 수행법에 따라서는 아프터 서비스도 꾸준히 해준다고 한다. 단 파룬궁의 경우는 교재비 이상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⑦ 불교와의 관계:
적지 않은 제3수행법이 불교를 폄하하거나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는 불교와 무관함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가야산으로의 7일 간의 초대〉의 저자 권기헌은 109쪽에서 “단적으로 말해 지금까지의 수행법에서는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을 닦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제1과 제2 수행법 모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파룬궁의 경우 자신들의 공법이 불가기공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불교 그 자체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3. 제3수행법과 불교와의 관계

1) 제3수행법의 가치관과 수행목적은 과연 불교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먼저 위에서 열거한 순서대로 불교와 비교해 보자.

① 연원의 확실성 :
부처님은 출가 이전에 세속의 모든 학문을 배우고 출가 후에는 아라라 칼라마에게서 무소유처정을 그리고 웃다타 라마풋타에게서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우고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셨다. 즉 무상정등정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정확하고 세세하게 밝혀져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나아가는 도정에 부정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정주의(修定主義)와 고행주의는 부처님의 체험 과정을 통해 우리 불자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양극단으로 알려져 있다.

② 수행법의 다양성 :
불교에는 지극히 번쇄한 유식의 수행법에서 지극히 단순한 간화선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수행법이 있으나 단순성을 최고로 삼지는 않는다. 불교는 단순성보다는 각 개인의 근기에 알맞는 것인가 하는 적합성을 더 중요시한다.

③ 속도에 집착하지 않음 :
선불교에서는 당장 이 자리에서 깨칠 수도 있다고 말하고 그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근기에 달려 있으므로 모든 이가 당장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다. 그리고 불교는 깨달음의 빠른 성취보다는 깨달음을 이루기까지의 성실한 정진 과정과 이타행을 더욱 강조한다.

④ 공개주의 :
불교에는 원론적으로 비공개적인 가르침이 따로 없다. 부처님 스스로도 숨겨놓거나 감춰둔 가르침이 없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다.

⑤ 비세속성(非世俗性) :
물론 계율을 잘 지키고 올바르게 수행하면 건강해지고 재가 불자의 경우 행복한 세속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결코 불교 수행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수행의 부수 효과일 따름이다.

⑥ 비상품성 :
불교의 가르침에는 조건이 없다. 상품을 사려면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상품이 아니므로 돈을 위시해서 일체의 조건이 필요 없다.

⑦ 교수완비(敎修完備) :
불교에는 실천적인 수행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교학도 있다. 교학은 수행법과 불교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대부분의 제3수행법은 이 부분이 상당히 미약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기존 종교나 학설에서 이것저것 따와서 자기들의 이론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에서 빌려간 것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불자들이 비적대적인 혹은 우호적인 입장을 갖기 쉬운 것이다. 그들 스스로도 이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지 불교의 개념을 모호한 현대어로 바꿔놓고 독창적인 것처럼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불자들이 비적대적인 혹은 우호적인 입장을 갖기 쉬운 것이다.

2) 불교와 제3수행법은 양립할 수 없다

제3수행법의 특징을 살펴보면 한눈에 그 반불교 내지는 비불교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최고의 깨달음은 대체적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관의 근저에는 아트만(제아무리 다른 용어로 표현한다 해도 그 본질은 실체로서의 영혼 또는 眞我임이 분명하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속적 이익의 은연한 강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상견(常見)에 치우쳐 있다. 사실 단견(斷見)은 허무주의로 귀결되기 쉬우므로 이렇게 해서는 추종자들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즉 상견을 취하지 않으면 상품성이 없어진다. 따라서 그들이 상견을 취하는 데는 선택의 여지 혹은 철학적 고민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행복, 건강 등의 말에는 ‘나의’라는 말이 괄호 속에 숨겨져 있다.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바로 무아론이다. ‘나’라는 망상이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건강, 행복 등의 세속적 가치는 결국 물거품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을 얻고 누리려면 ‘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으니 따로 구할 게 없다는 말이다.

제3수행법은 앞서 이미 지적했듯이 불교의 개념을 여러 형태로 차용하고 혹은 변용하고 있고 또한 깨달음을 운운하는 등 언뜻 보면 불교와 매우 유사하게 보일 우려가 있다. 따라서 불자는 그 겉모습에 현혹되기보다는 무엇보다 3법인을 위시한 불교의 교리를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앞으로 상당한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 제3수행법에 속하는 행법들이 다양하고 그것들 서로가 상이한 주장들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불교 학자와 교계 유관 전문가들의 각론을 통해서 철저하게 분석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각론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우리 교계의 상황이 심각하다. 작금 승적을 가진 스님들과 재가불자 중에서 직업적인 제3수행법 전도사로 나서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활동은 안 하고 있지만 제3수행법 유경험자로서 다른 불자들에게 권유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 개인의 능력으로 이 정확한 수치를 규명하고 발표하기에는 너무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종단이나 종회 차원의 조사위원회를 꾸려 그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재가불자 쪽은 차치한다 해도 승단의 실태는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뚜껑을 열어 보면 놀랄 만한 사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두는 것으로 그치겠다.

각론을 통한 정확한 실체 파악은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 당장 그 실천적인 면을 보면 과연 불교와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면 마음수련회의 경우 그 스승에게 4배를 한다고 한다. 우리 불자는 부처님께 3배를 한다. 이 경우 불자이면서 동시에 마음수련회 회원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또한 파룬궁의 리홍지는 자신의 저서에서 분명히 파룬궁을 다른 행법과 혼용해서 수련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곧 전일(專一)해야 한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거사로서 불교 수행을 하면서 파룬궁을 연공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룬궁의 창시자가 그렇게 말했는데, 어떤 불자가 동시에 수행해도 상관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불교에서도 파룬궁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봐타의 경우 최고 깨달음의 경지는 창시자인 해리 팔머 만이 인가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적어도 분명 공식적으로 불자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불자가 아봐타 수련을 해서 그에게 인가를 받는 것은 불교의 선사들에게 인가를 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자임을 자처하면서 제3수행법을 다른 불자에게 적극 권장하고 전수하는 일은 반불교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불자가 아닌 사람, 즉 제3수행법 수행자로서의 자기 동일성이 분명한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문제 삼을 수는 없고 또한 그럴 권리도 없다고 본다. 우리가 자체 교육이나 홍보를 통해 불자들에게 제3수행법의 반불교성 혹은 비불교성을 알림으로써 경계심을 갖게 할 수는 있겠지만, 시장 경제의 논리상 그들의 영업 활동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제3수행법이 배울 가치가 전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수행자로서 여러 가지 수행법을 접해 보는 것 역시 공부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접해 본 결과 반불교성 혹은 비불교성이 확인되면 그것을 버리든지 아니면 불교를 떠나든지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제3의 길은 있을 수 없다. 있다고 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수련비 혹은 추종자를 탐해서 불교라는 가면을 쓴 마구니로 남는 길뿐이다.

필자는 제3수행법 자체가 틀린(wrong)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와 다른(different) 것이 분명한 이상, 불자가 불교와 동시에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필자가 정말로 경계하는 것은 제3수행법 그 자체가 아니라 불자임을 자처하면서 제3수행법이라는 상품을 들고 절집 주위를 배회하며 불자들을 현혹하는 불교의 배신자, 즉 배불자들인 것이다.

4. 제3수행법에 대한 불자의 올바른 대응

필자는 제3수행법을 대함에 두 가지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첫째는 무조건적 수용주의다. 즉 불교는 열린 종교이고 자비의 종교라는 전제 아래 소극적으로는 다른 종교나 수행법을 비판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수수방관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갖거나 적극적으로는 절집에서 직접 교수하려는 태도 말이다. 대개 이 세상에 불법(佛法) 아닌 것이 뭐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주의를 가지고 있기 쉽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굳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셔서 정법을 세우셨을까 하는 것에 답해야만 한다.

둘째는 무조건적 배타주의다. 제3수행법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외도의 견해로 치부하고 백안시하는 태도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외도의 견해가 확실하다 하더라도 일부 불자 혹은 일반인(이들은 잠재적인 불자이므로 논외로 해서는 안 된다)들이 관심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 현상을 분석하고 현대 한국불교 자체의 문제점을 돌이켜 보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무조건적 배타주의는 현실을 무시하는 교조주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조건적 수용주의와 배타주의를 넘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작금의 상황을 불교적 당파성 혹은 정법에 근거해 이해하고 비판함으로써 올바른 대응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1) 제3수행법에 경도된 일부 불자의 문제

재미있는 것은 초창기에 제3수행법에 경도된 불자들이 결코 초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앞서 말했듯이 승적을 가진 스님이거나 교계의 공인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이 제3수행법에 일자 무식의 소위 기복 불자들보다 먼저 경도된 것일까?

첫째는 불교를 머리로만 섣부르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불교적 당파성의 생성과 유지에는 수미산 같은 신심이 요구된다. 둘째 섣부른 합리성과 과학성에 현혹되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제3수행법은 나름대로 단순성, 합리성 그리고 과학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어설픈 자신의 지식 정도에서 그것이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 고학력자가 많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셋째는 불교에 비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대에 전통적인 불교는 대중들을 이끄는 데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런 상태에서 불교계 내부에서 불자로 살아가거나 불교 관계자로 일하는 것은 별다른 재미도 의미도 없고 무엇보다도 세속적인 이익의 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사실 사찰의 종무원이나 각종 불교 단체 내지 기관에서 급여를 받는 불자들의 경제적 상황은 정말 열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행법을 가르쳐 주고 돈도 절집에서 일하는 것보다 많이 벌 수 있다고 한다면 의미도 있고 실속도 챙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 중 상당수가 직업적인 제3수행법 전도사가 된 것을 보면 세번째 이유가 가장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2) 제3수행법에 경도되는 것과 무관심한 것에 대한 율장에 근거한 비판

옛날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다인이란 자가 사리불에게 불법을 가르친답시고 열변을 토하며 온갖 비방과 폄하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때 그 곁에 있던 아난 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를 불러 이렇게 꾸짖으셨다고 한다.

“아난아, 장로 스님을 비방하고 소란을 피울 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일이냐? 너에겐 한 가닥의 자비심도 없느냐?”

무관심은 자비가 아니다. 일부 불자 아니 배불자들이 절집을 배회하며 제3수행법 전도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고서 소가 닭보듯 한다면 부처님께 꾸중듣는 아난 존자의 모습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불자에게 호법(護法)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① 출가자의 경우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승적을 가지고 있는 스님이 제3수행법을 수업료를 받고 불자들에게 전수한다면 그것은 대망어계를 범하는 바라이죄가 성립할 수 있다.

이 대망어계는 부처님께서 비사리에 계실 때 제정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비사리는 몇 년 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임에 따라 비구들이 걸식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각각 흩어져 아는 이를 찾아가 안거정진을 할 것을 명하셨다. 나중에 안거가 끝나고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 대부분은 몸이 깡마르고 파리해 보였는데, 유독 바구말하 강변으로 갔던 비구들만은 살이 찌고 얼굴에는 기름기가 흘러 부처님께서는 그 연유를 물어보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비구들은 걸식이 어렵자 서로 머리를 짜서 서로를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로 선전하고 다님으로써 많은 보시를 얻을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흉년에 굶주리던 백성들은 자기 먹을 것을 아껴가며 성자들에게 보시하여 복덕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차라리 돌을 구워 먹고 구리를 녹여 마실지언정, 거짓말을 하여 신심으로 보시를 하게 하는 탐욕을 부렸단 말이더냐’하시며 크게 꾸짖으시고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도 이득을 위해 그것을 얻은 양하는 것은 바라이죄를 범한 것으로 승단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어떤 스님이 부처님 의식 운운하며 제3수행법을 수업료를 받고 전수한다면, 먼저 자신이 얻었다는 경지가 과연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것인지를 스스로 입증하거나 선방의 책임 있는 스님들의 인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스스로의 입증이 다른 이를 설득하지 못하거나 선사들의 인가를 받을 수 없을 때면 어쩌겠는가? 그러면 바구말하 강변으로 갔던 비구들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② 재가불자의 경우
재가불자 역시 같은 경우 불망어계를 범한 것이고, 범망경의 10중 48경계 중 특히 후자의 다음과 같은 항목에 저촉된다(아래의 숫자는 고유번호).

8. 대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 대승의 경과 율을 저버리고 외도의 사견을 받아들인다면 경죄를 범하는 것이다.

15. 다른 법으로 교화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대승경전과 계율로 중생들을 가르쳐 보리심을 일깨워 줘야 한다. 그럼에도 외도의 교법을 가르친다면 경죄를 범하는 것이다.

18. 아는 것 없이 남의 스승이 되지 말라.
-정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며 스스로 깨달은 듯 속이는 자는 경죄를 범한 것이다.

24. 불법을 잘 배워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외도의 속전(俗典) 따위를 배운다면 불성이 끊어지고 도에 마장이 생기게 된다.

34. 잠시라도 소승을 생각하지 말라.
-보살은 금강과 같이 대승계를 지키고 마치 부낭(浮囊)에 의지한 채 대해를 건너는 듯한 긴장감 속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대승의 믿음을 가지고 자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승이나 외도의 견해를 취한다면 경죄를 범하는 것이다.

48. 불법을 훼손하지 말라.
-명예나 이익을 위해 국왕이나 관리 앞에서 불법을 설하는 것은 불법을 스스로 해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수계받은 자는 외아들을 아끼듯, 부모를 섬기듯이 정법을 지켜야 한다.

불망어계는 10중계의 하나로 곧 보살의 단두죄(斷頭罪)이므로 출가자의 바라이죄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에 비해 48경계는 비록 가벼운 계목이라 하지만, 불자로서의 자기 동일성(identity)를 유지하는 데 많은 항목을 설정하고 있음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3) 작금 제3수행법의 불교 내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방법론 모색

앞으로도 제3수행법은 더욱더 늘어갈 전망이다. 그런데 특히 우리 불교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교이므로 제3수행법의 입장에서 볼 때 아주 좋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타력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보다는 불교처럼 자력신앙을 강조하는 종교가 제3수행법의 공략 대상이 되기 쉽고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바로 이 때문에 배불자들이 공개적으로 불자임을 포기했다고 말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난 이제 더 이상 불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면 이론적인 차원의 문제만 해결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 커다란 불교 시장을 포기하랴? 그들의 고심도 이해는 간다. 어찌 되었건 배불자들이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는 이상 우리도 현실적인 방법론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① 교육과 신행활동 그리고 홍보의 강화 :
교리학습과 신행활동의 강화로 불교적 당파성을 함양해야 한다. 또한 불교학자와 교계 유관 전문가들의 공동 연구에 근거한 제3수행법에 대한 종단의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고 각종 매체를 통해 적극 홍보해야 한다.

② 배불자들의 폭로와 차단 :
배불자들은 기존의 불교 인맥을 십분 이용해서 영업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고리를 끊으면 일시적이라 해도 적지 않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신행단체의 지도자나 스님들은 각종 법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배불자의 본질을 폭로하고 그들을 불자로부터 차단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방기하면 단위 법회나 사찰이 가장 먼저 물심양면에 걸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③ 한국불교의 수행법의 다양화 및 현대화 :
배불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불교의 깨달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방법론이 영 형편없다는 것이다. 즉 간화선만 전가의 보도처럼 떠받들고 있어서 일반 불자들과 소위 하근기 중생들의 수행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의 본질을 모르는 헛소리지만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불교에는 수많은 수행방편이 있으므로 어려울 것이 없다. 수행에 일가견이 있는 스님과 불자들이 모여 기초적인 수행 이를테면 수식관에서 최정상의 간화선에 이르기까지 단계를 세분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면 된다.

배불자들의 자기 합리화에 이용되고 있는 간화선 논의에 일침을 가함

제3수행법을 가르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거나 수용주의에 경도된 배불자들은 흔히 간화선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은 간화선을 수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작금 제3수행법을 불교에 부가하거나 그것을 응용하는 것 또한 간화선의 태동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 지금 형태의 간화선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화선의 주안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의심(大疑心)은 이미 출가 전의 싣다르타의 정신 세계에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부처님과 전혀 관계없이 어느 날 중국에서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인도의 선법이 중국에 들어와 나름대로 전개되어 나가다가 달마 스님의 來華 이후 급속하게 발전해서 하나의 수승한 방법론으로 정립된 것이 간화선이다. 간화선은 어디까지나 불교의 발전 도상에 있는 것으로 佛祖의 설에 반하는 것이 없다. 간화선을 주창한 선사들이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했다 해서 오늘날 제3수행법 전도사들, 즉 배불자들마냥 절 바깥으로 나가서 ‘종교를 초월하는 혹은 종교와 무관한’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무슨 명상이나 수행학원을 차린 적이 있는가?

예를 들자면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도관(道觀)에 가서 그들과 다름없는 道士가 되어 버린 적이 있는가? 아니면 불교를 표방하지 않거나 불교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는 무슨 새로운 종교단체라도 만들어 활동했는가? 도리어 당시 선사들의 자세를 보면 새로운 방법론을 계발하는 원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디 한때나마 佛門에 있었다면 祖師님들을 매도하는 망발을 그치기를 바란다.

④ 대응 전략상 주의할 사항 : 배불자들은 제1수행법, 즉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리고 티벳 수행법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정립하려 하는데, 일부 불자들이 그 간계에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한국불교는 북방불교로 특히 간화선을 정통으로 보기 때문에 당연히 간화선을 최고라 할 것이고 남방불교는 위빠사나를 그리고 티벳 불교는 자신들의 명상법을 으뜸으로 여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작금 간화선이 최고네 위빠사나가 낫네 하는 논의가 조금 진행되는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물론 불교 수행법의 내적 발전을 위해서 불교의 3대 수행법이 서로 논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적대적 모순의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대 수행법은 모두 불교의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는 각자 속한 지역 혹은 상황에 따라 3대 수행법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지 절대적인 우위를 논하는 공론을 일삼을 필요가 전혀 없다. 배불자들이야말로 불교의 3대 수행법이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기를 바라고 있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우리의 내전을 조장하여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불교의 인적 물적 자원을 야금야금 챙겨가려고 하는 것이다.

5. 맺는 말

불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열심히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대비심이다. 결국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깨달음과 자비심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자대비심이 결여된 깨달음―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 한참 낮은 수준의 각성에 불과함―에 혹하는 것은 이미 불자의 길에서 십만팔천 리나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나마 얻으면 이 사바세계에서 자기 혼자만이라도 사고팔고(四苦八苦)를 벗어나 뜻대로 살 수 있을성 싶은가?

억조창생이 사고팔고로 울부짖는 이 우주에서 혼자만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는 것은 단연 불교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화경을 설하실 적에 깨달았다고 자만하는 5천 명의 사부대중을 쫓아버리셨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즉 요즘 깨달음을 상품화해서 팔아 먹는 자들이 대중을 현혹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진정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뜻대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우리 같은 속인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최후의 삶을 정리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 이후에 어떻게 윤회의 마지막 삶, 45년을 보내셨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성도하신 후 왕위를 이어받아 전륜성왕이라도 되셨는가?■

진현종
성균관 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도서출판 법등의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불교철학 및 중국철학을 비롯한 동양사상 관련 전문 번역가로, 칼럼리스트로 그리고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노자의 웃음》 《공자의 열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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