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서양철학과 불교, 그 접점과 경계

1. 들어가는 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문화현상 내지는 상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후에 태어난다’는 니체 자신의 말처럼 철학·신학·심리학·문학 등 여러 분야의 역사가 니체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마르틴 하이데거,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자크 데리다·미셸 푸코가 그에게 빚을 졌으며, 철학과 문학에 있어서 실존주의와 해체주의가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폴 틸리히와 토머스 알타이저 같은 신학자들이 그들의 빚을 인정했으며, 유대주의 최고의 20세기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니체를 자기 일생 동안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영향들 중 하나로 손꼽았다.

칼 융·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이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프로이트는 니체가 과거와 미래의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꿰뚫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소설가 토마스 만·헤르만 헤세·앙드레 지드·앙드레 말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등이 그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에 관해 썼다. 니체는 확실히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니체 사후 101년 만에 ‘니체와 불교’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것은 곧 불교를 21세기라는 거대한 흐름의 한복판에 위치시킴으로써 불교의 위상을 새롭게 재조명함을 의미한다. 니체는 서구 최고의 불교통 쇼펜하워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주요 저작들은 실제로 매우 불교적인 발상들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그간 ‘불교적 니체 읽기’에서는 이와 같은 점이 간과되어 왔다. ‘니체와 불교’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으로 ‘니체와 불교에 관한 비교연구’들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는지를 개관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 니체의 불교관을 살펴보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로 알려진 니체의 포스트모던성이 무엇이며, 불교가 어떤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특히 해체철학과 만날 수 있는지도 살펴보려고 한다.

2. 니체와 불교의 비교연구사 개관

‘니체와 불교’라는 주제를 다루기 전에 그간 이 주제와 관련된 연구들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개관하는 것은 유익할 것으로 생각된다. 편의상 김종욱 박사의 〈불교와 서양철학의 비교연구 문헌목록〉에서 간추려 소개하면, 쇼펜하워와 니체의 사상에 나타난 불교의 영향을 검토한 벤자민 A. 엘먼의 〈니체와 불교〉1), 칸트·헤겔·쇼펜하워·니체 등이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다룬 하인리히 두모울린의 〈불교와 19세기 독일 철학〉2), 니체의 중심 사상과 불교의 사성제(四聖諦)를 비교하며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을 불교의 부정방식과 대비한 스티븐 하인의 〈디오니소스 대(對) 붓다: 니체의 “예스”와 붓다의 “노”〉3),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의 입장과 권력의지 등을 선(禪)의 관점에서 이해한 아베 마사오(阿部正雄)의 〈선과 니체〉4), 그리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 및 시간의 문제를 중심으로 니체와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의 선사상을 비교한 그래엄 파크스의 〈영원의 자아에 관하여: 니체와 니시타니〉5) 정도이다. 20세기 서양 철학의 중심적 화두였다 할 니체 철학과 불교 간에는 아직 핵심을 찌르는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 XLIV, no. 4. 1983. 2)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 XLII, no. 3. 1981. 3) Buddhist and Western Philosophy. Ed. Nathan Katz, Delhi, 1981.
4) The Eastern Buddhist. 6. no. 2. 1973. 5) The Eastern Buddhist, 17. no. 2. 1984.

‘니체와 불교’에 관한 박사학위를 쓴 바 있는 로버트 모리슨의 《니체와 불교》(1997, 1999)의 서지 역시 니체와 불교의 만남을 다루는 연구들이 매우 희귀함을 보여준다. ‘니체와 불교’ 관련의 위의 연구들 외에 모리슨의 저서의 서지에 수록된 ‘니체와 불교’ 연구들은 W. L. 해어의 〈니체의 불교 비판〉6)과 A.W. 루돌프의 〈니체와 불교: 허무주의 교의의 한 국면〉7)뿐이다. 그리고 그래엄 파크스가 편찬한 《니체와 아시아 사상》(1991, 1996)에 수록된 본격적인 니체와 불교 비교연구는 글렌 T. 마틴의 《니체와 나가르주나에 있어서의 해체와 돌파》 1편뿐이다. 니체와 불교의 만남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6) The Buddhist Review, 1916. 7) ITA Humanidades, 5, 1969.

이 밖에 그래엄 파크스의 서평 〈니체와 초기 불교〉8)는 이 글을 위해서 소개될 필요가 있다. 파크스에 의하면, 아마도 서구 최초의 ‘니체와 불교’ 비교연구서라 할 막스 라드너의 《니체와 불교》9)는 니체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담고 있는 저서로, 니체의 불교 관련 언급들을 추적하여 니체의 불교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라드너는 니체 철학의 성격도 파악치 못하고 있다고 파크스는 쓰고 있다. 또 인도 출신의 니체 전문학자로 독일에서 공부한 프레니 미스트리는 영어로 쓰여진 《니체와 불교》10)에서 니체의 사상과 초기 (소승) 불교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종합해 보여준다. 8) Parkes, Graham. Ed. “Feature Reviews: Nietzsche and Early Buddhism”. Philosophy East and West. Vol. 50, No. 2. April 2000, pp.254∼267. 9) Nietzsche und der Buddhismus: Kritische Betrachtungen eines Buddhisten, Zurich: Juchli-Beck, 1933. 10) Nietzsche and Buddhism: Prolegomena to a Comparative Study, Berlin & New York: W. de Gruyter, 1981.

1880년대 초 니체가 한 미발표 노트에서 “나는 유럽의 붓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인도의 붓다와는 반대이겠지만.”이라고 했던 말을 책머리에 인용하면서 그녀는 니체와 불타(佛陀)가 외견적인 “표현(expression)과 관점(perspective)에 있어서의 현격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 두 반대적인 인물들이 실제로는 놀랄 만큼 가까우며, 니체와 불타는 “자기 구원을 향한 보완적인 길들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의도임을 천명한다.11) 그리고 그녀는 니체와 불타가 모두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보다는 인간적 능력에 의존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파크스는 지적하고 있다.12) 11) Qtd. in Parkes, p.254. 12) Parkes, Graham. Ed. Nietzsche and Asian Thought.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255.

미스트리는 불타가 ‘나’ 또는 ‘자아’를 다섯 가지 요소(五蘊)로 해체한 것과 니체가 ‘나’ 또는 ‘주체’를 다양한 충동들(drives)로 분석한 것을 비교하면서 양쪽이 모두 살아 있는 인간의 육체를 강조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스트리에 의하면, 이때 사물(things)이나 실체(substances)는 불타와 니체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서의 존재, 실체(entities)가 아니고 인습적인 통일체일 뿐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어서 미스트리는 존재의 요소들이 ‘의존적 발생(dependent co-origination)’ 속에서 일어나고 소멸한다는 불교적 개념과 세계는 ‘권력의지’의 복잡한 놀이라는 니체의 개념 간의 유사성을 추적한다.13) 13) Parkes, Graham. Ed. Nietzsche and Asian Thought(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255.

파크스는 이와 관련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미스트리의 이와 같은 작업은 불교의 핵심교의인 공(空), 연기(緣起)사상과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권력의지 간의 심층적 비교연구를 가능케 하고, 나아가서 이 같은 비교를 해체철학 및 광범한 포스트모던 이론들과 연결시킬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일 것으로 생각된다.

3. 니체의 불교에 대한 오해

니체는 무엇보다도 불교적 특징을 “무(無) 가운데로의 동경”이라고 보았으며,14) 불교의 그것처럼 “순수하게 도덕적인 가치 정립”은 “어느 것이나 니힐리즘으로 끝난다.”15)고 쓰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불교에 관한 중요한 견해들을 시사해준다. 14) Nietzsche, The Will to Power, Trs. Walter Kaufmann and R. J. Hollingdale, New York: Vintage, 1967, 1. The Will to Power로부터의 인용들은 “WP ___ 절(section)”의 형식으로 표기함. 15) WP, 19절.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은, 온갖 욕정이나 피를 휘젓는 것은, 곧이어 행위가 된다’는 사상이 우세하며 …… 행위,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으며, 행위는 생존 속에 고착해 있으나, 하지만 모든 생존은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비존재(Nichtsein)에의 길이며, 이 때문에 그들은 욕정으로부터의 온갖 충동을 기피한다. ……불교의 이상(ideal) 가운데는 심지어 선악으로부터의 해방이 본질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기에는 완전성의 본질과 합치하는, 도덕의 세련된 피안성이 고안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선한 행위도 역시, 단지 수단으로서만, 즉 모든 행위에서 해방되기 위한 그것으로서만, 잠깐 동안만 필요로 하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16) 16) WP, 155절.

불교는 철저히 무욕망·무행위·비존재·해방의 교의로서 인식되고 있다. 니체는 근원적으로 불교를 잘못 이해했으며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을 다수 남기고 있다. 프레니 미스트리에 의하면17) 니체는 불타가 공(sunyata)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기 때문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던 사실을 모르고, 불교의 공의 교의를 소극적으로 허무주의적이라고 잘못 이해했으며, 불교가 고통의 제거를 목표로 삼음으로써 삶, 생명의 거부가 그 목표가 되었다는 이유로 불교를 ‘소극적 허무주의’의 한 형태라고 비난했다. 17) Parkes, Graham.ibid, pp.255∼256.

미스트리에 의하면18) 니체는 고(苦, dukka)라는 단어가 불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적절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불교가 고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잘못 이해했다. 이 단어는 기쁨, 심지어는 지복(至福)이라는 뜻까지 함축하기 때문에 단순히 ‘고통’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불타의 초점은 ‘이기적인 갈망·자기통제의 결핍·증오·적의·슬픔·게으름·타성·음욕·걱정·의심, 그리고 형이상학적, 개인적 자아-실체(ego-substance)’ 등등 고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 두어진다. 비슷하게 니체는 또 갈애(tanha)를 근절하고자 하는 불교적 노력이 생명, 삶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오해했지만, 미스트리는 갈애가 그 자체로서 욕망이 아니고 ‘불멸 또는 절멸에 대한 욕망, 형이상학적 믿음들과 영혼의 이론들에 대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무지로부터 발생하는 ‘자아, 자만에 사로잡힌 갈망’이라고 주장했다. 18) Parkes, Graham. ibid, p.256.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철저히 허무주의적인 “불교가 소리 없이 유럽 모든 곳에서 세력을 뻗어”19)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불교의 어떤 영향도 봉쇄하기를 원했다.20) 니체가 볼 때, 불타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병통치약인 니르바나(涅槃), 즉 모든 지상의 고통과 고뇌가 소멸되는 완전한 무욕망의 상태를 준다. 따라서 니체는 불교를 “문명의 종말과 피로를 위한 종교”21)라고 본다. 이 종교에서는 문화화된 그러나 피로한 이들이 “고통으로부터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저 동양적 무(無)”로22) 은둔할 수 있다. 따라서 니체는 불교가 연약해진 현대의 문화인을 대표하는 《차라투스트라》의 ‘궁극적 인간(Ultimate Man)’을 사로잡아 이 궁극적 인간이 그의 ‘초인(Overman)’보다 더 선호되게 될 것을 우려했다.23)19) WP, 239∼240절. 20) Morrison, Robert G. Nietzsche and Buddhism: A Study in Nihilism and Ironic Affinities, Oxford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21. 21) Nietzsche,The Antichrist, Trs. R. J. Hollingdale, Harmondsworth, 1968, p.22. 22) Nietzsche,The Gay Science, trs. Walter Kaufmann, New York, 1974. 서문. 23) Morrison, ibid, p.24.

니체에 있어서 허무주의는 기존의 세계관과 이에 수반된 가치들에 대한 신념의 완전 상실에 뒤따르는 절망의 상태이다.24) 니체는 유럽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의 상실에 대한 반동으로 허무주의적 혼란이 유럽을 뒤덮을 것으로 내다보았으며, 이와 함께 교육을 받은 교양인들 간에서는 이 같은 재난에 대한 문명적 반응으로 ‘유럽적 불교’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체가 볼 때는 그것 역시 여전히 하나의 허무주의의 형태, ‘소극적 허무주의(passive nihilism)’이다.25) 24) Morrison, ibid, p.4. 25) Morrison, ibid, pp.4∼5.

모리슨에 의하면26) 소극적 허무주의란 보다 건강한 관점으로부터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가로막는 심리적인 질병의 눈을 통해서 판단되고 해석되는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투사(projection)이다. 때문에 소극적 허무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행동적 허무주의(active nihilism)가 필요하다. 행동적 허무주의는 “정신의 증가된 힘의 표지”27) 우리의 종전의 종교적 목표들과 가치들과 이런 것들의 현대적 표현들과 관련하여 “파괴의 행동적 힘”28)이다. 행동적 허무주의의 결과는 허무주의 그 자체가 부정되고 인간이 해묵은 자기 기만을 벗어나서 세계와 자신을 신선한 눈으로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보기 시작할 수 있는 경지인 ‘완전한 허무주의’이다. 26) Morrison, ibid, pp.22∼3. 27) WP, 22절. 28) WP, 23절.

그러나 불교는 소극적 허무주의의 한 형태29)이기 때문에 이 같은 허무주의의 부정에 대한 위협이었다. 불타는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의 무의미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기(그랬더라면 행동적 허무주의가 되었을 것이다)보다 단순히 그들이 어느 정도의 쾌활한 자세로 그 무의미에 적응하도록만 도와주는 종교를 창건했다. 니체에 의하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쾌활함·적정(寂靜)·욕망의 부재이며, 이 목표는 성취되었다.”30) 29) WP, 23절. 30) The Antichrist, p.21.

니체는 허무주의에 대한 유일한 수용 가능한 반응은 유럽적 불교의 창건(founding)이 아니라, 제반 가치들이 허구적인 초절적 세계나 존재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인간의 유일한 세계인 자연의 세계 속의 삶에 토대를 두는, 그런 인간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창조라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유럽적 형태의 불교의 출현 가능성은 이 같은 비전을 흐리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적 불교는 여러 유형의 철학들이 가르쳐질 필요가 있는 것처럼 교육적인, 탐색적인 “망치”로서의 목적을 가질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했다.31) 31) Morrison, ibid, p.5.

4. 니체와 불교 그리고 해체철학의 만남

우리는 때로 밧줄을 뱀으로 오인한다(〈사승마의 비유〉). 미망(avidya)은 우리가 사물, 현상, 제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미망은 정신의 작용, 정신적 구축(ideal construction)이다. 불교, 특히 나가르주나의 희론적멸(戱論寂滅)이 가르치는 것은 이 정신적 구축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체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미 인간이 해묵은 자기 기만을 벗어나서 세계와 자신을 신선한 눈으로 볼 것과 인간의 유일한 세계인 자연의 세계 속의 삶에 토대를 두는, 그런 인간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창조를 촉구한 바 있다.32) 32) Morrison, ibid, p.23, 5.

불교, 특히 나가르주나와 니체는 정신적 구축(construction)을 ‘탈구축(de-construction), 해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결같이 해체철학의 선구들이다. 글렌 T. 마틴은 〈니체와 나가르주나에 있어서의 해체와 돌파〉에서, 니체와 나가르주나를 해체철학의 문맥에서 조우시키고 있다.

그러나 마틴은 ‘해체’의 문제를 매개 삼아 니체와 나가르주나의 대화를 주선했으나 결정적인 만남의 계기를 제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마틴의 논문은 1∼2절의 니체에 대한 논의와 3∼4절의 나가르주나, 불교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로서는 유익했으나, 5절의 상호 비교 논의에서 니체를 현대의 무신론, 허무주의, 근원적 개종, 변혁, 리오리엔테이션(reorientation) 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의 《종교와 무(無)》(1987)에 의존함으로써 불교, 나가르주나의 핵심 교의와 니체를 해체철학적인 관점에서 접목시킬 실마리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 또 마틴의 ‘해체’의 개념도 ‘기존의 철학을 해체적으로 새롭게 읽는다’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 ‘해석학적’ 해체에 한정되어, ‘해체’의 기본 개념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니시타니와 마틴은 다같이 불교의 공(空), 연기(緣起)사상이 해체적 사유의 근원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흔히 해체철학의 선구로 손꼽히는 니체가 불교와 만나는 지점은 다른 어디보다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서양 학자들의 해체철학적, 포스트모던적 불교(나가르주나) 읽기는 불교의 핵심인 연기, 공사상의 진수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또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십수년 간 불교, 해체론,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다수의 글을 발표해 오고 있는 데이빗 로이는 〈선과 악의 너머?: 불교의 니체 비판〉에서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고, 덧붙여지고 발명·조작된 것, 존재하고 있는 것 뒤에 투사된 어떤 것이다.”33)라는 니체의 주체(subject) 비판과, “하나의 사물의 속성들은 다른 ‘것들’에 대한 효과들이다……. ‘물 자체’란 없다.”34)는 실체(substance) 비판이 불교와의 대화의 문을 열어줄 공통적 관심사라고 지적하고 있다.35) 33) WP, 481절. 34) WP, 557절. 35) Loy, David. “Beyond Good and Evil? A Buddhist Critique of Nietzsche”, Asian Philosophy. Vol. 6 March, 1996. p.38.

그러나 로이는 이 글에서 일본의 도겐(道元) 선사의 망아(忘我論), 기타 해묵은 실존주의 및 정신분석 분야의 이론들에 논의를 치중하여, 니체의 핵심 사상인 권력의지 사상 및 관계론과 불교의 연기, 공사상 간의 관련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로이는 니체의 불교적 연기, 공사상에 근접하고 있는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니체 읽기의 중요성도 간과하고 있다.36) 36) Loy, ibid, p.56.

아마도 니체와 불교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접맥지점은 니체의 칸트적 ‘물 자체(thing-in-itself)’ 해체와 나가르주나의 파사(破邪)일 것이다. 과문이지만 그간 이 같은 접근방법은 희귀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매우 참신하고 유익한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접근법은 니체와 불교가 해체철학, 포스트 구조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칸트적인 선험적 ‘순수인식’을 공격37)하고 칸트적인 ‘물 자체’를 해체한다. 니체는 먼저 “어떤 것에 행동을 건네며, 어떤 것의 행동을 받으며, 어떤 것을 ‘소유’하고, 고유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견해”38)라고 선언, ‘나’라는 존재의 허구성을 해체한다. ‘나’는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순간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니체는 ‘나’를 해체한 뒤에 이를 주체· ‘물 자체’·객체·실체, 그리고 물질 및 정신의 해체로까지 확장시킨다. 37) WP, 530절. 38) WP, 549절.

‘주체’는 ……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리게 되면…… ‘물 자체’도 또한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주체 자체’를 구상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체는 허구된 것이라는 점이 알려져 있었다. ……우리가 결과를 초래하는 주체를 포기한다면, 결과로서 야기되는 객체도 역시 포기된다. ……우리가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실체’라는 개념도 역시 포기된다―따라서 이것의 다종다양한 변형, 이를테면 ‘물질’이라든가 ‘정신’이라는 등의 기타 가설적 본질, ‘질료(質料)의 영원 불변성’ 따위도 또한.39) 39) WP, 552절. 고딕체는 필자의 것.

주체, 객체 등은 독립적인 자존적·자족적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사건의 복합체일 뿐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물 자체’는 ‘의미 자체’ ‘의의(意義) 자체’와 마찬가지로 배리(背理)이다. 여하한 ‘사실 자체’도 없으며…… ‘본질’, ‘본질적 성질’은 관점적인 것이며, 이미 다수성을 전제한다.40) 독립 자존적이지 못하고 여러 요소의 복합으로 이루어지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의 개념은 불교의 연기, 공의 교의와 매우 근접한다. 40) WP, 556절.

하나의 사물의 속성들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효과들이다. 즉, 다른 ‘사물’들을 제거한다면 하나의 사물은 아무런 속성도 갖지 않는다. 즉 다른 사물이 없다면 아무런 사물도 없다. 즉 ‘물 자체’란 없다.41) 41) WP, 557절.

‘하나의 사물의 속성들(the properties of a thing)’이란 한 사물이 갖는 여러 가지 속성들인데 이것들은 그 사물의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다른 사물들에게 미치는 효과들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이 같은 견해는 칸트적인 ‘물 자체’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공격이자 해체이다. 그리고 ‘물 자체’의 속성들과 본질(이라 할 것이 있다면)이 자족, 자존적인 것이 아니라 의존적이라는 결과를 도출하는 니체의 해체방식은 용수의 자성(自性)해체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니체는 “그 자체 속에 하나의 구성(constitution)을 갖는 사물들”은 절대적으로 청산해야 할 독단적 생각이라고 선포한다.

이때 세계 역시 이들 “여러 작용의 총체적 협동의 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42) 세계는, 우리가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존재에로, 우리의 논리적 심리적 선입관들로 환원시키지 않은(인간에 의해 해석, 환원되지 않은, 본래적인,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관계들의 세계이다. 특정의 조건들 하에서는 그것은 모든 하나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다른 국면을 갖는다. 그것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모든 관점으로부터 다르다. 그것은 모든 관점을 압박하지만, 모든 관점은 그것에 저항한다. 그리고 이것들의 총계가 모든 하나 하나의 경우에 전혀 불일치적이다.43) 42) WP, 567절. 43) WP, 568절.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44)은 니체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쟁점들을 두루 내포하고 있다. ‘연기(pratl?yasamutpa?a, dependent origination, relational origination, conditioned arising)’란 문자 그대로 ‘상호 의존적인 발생’ ‘관계적인 발생’ ‘조건지워진 발생’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교의와 함께 모든 불교학파의 핵심적 가르침인 상호 의존적 발생의 교의는 개개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심리적 물리적 현상들이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적으로 서로를 조건지운다고 말한다. 반야계(般若系) 경전들은 연기가 모든 사물들의 본질적 상호 의존을 가리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44) Schuhmacher, Stephan & Gert Woerner. Ed. The Encyclopedia of Eastern Philosophy and Religion, Boston: Shambhala, 1994, pp.276∼77.

불교의 연기설은 관계성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45) 모든 존재는 뭇 인연에 의해 존재하며, 뭇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은 그 자체의 자성을 갖지 못한다. 때문에 인연으로 생겨난 것을 불교에서는 공하다고 말한다(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은 공하다.”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은 없다.”46)고 나가르주나는 쓰고 있다. 45) 나가르주나, 《중론송》, 황산덕 역해, 서문문고, 1976, p.185. 46) Nagarjuna: A Translation of His Mu?a-Madhyamaka-Ka?ika?with an Introduction Essay. Tr. Kenneth Inada. Buffalo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70, 24장 18∼19절. 이하‘MMK-장: -절’로 표기함.

나가르주나가 창건한 중관학파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47) 모든 현상들은 결정불가(決定不可)이고 정의불가(定義不可)이다. 또 모든 현상들은 그 자체로써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현상세계의 연기적(緣起的) 성격이고, 모든 것의 공성(空性)이다. 일체 현상의 미결정성/비결정성(indeterminacy)에 대한 불교의 인식은 고대희랍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만물유전(萬物流轉)의 사상을 연상시킨다. 자족, 자존하는 자아의 부정과 미결정성, 비결정성의 인식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의 공통적 전제들이다. 47) 마틸랄, 비말 K, 《고전인도 논리철학》, 박태섭 역, 고려원, 1993. p.256.

불교의 핵심교의를 수록하고 있는 나가르주나의 《중론송》은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공하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것은 또한 가설(假設)된 것이요, 이것이 즉 중도(中道)이다.”48)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곧 《중론송》의 공가중(空假中)의 중도사상이며,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중도사상은 불교의 핵심교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적 사상적 토대를 놓은 아버지49)로 알려지고 있는 니체는 그의 여러 저작들에서 불교 교의의 핵심인 공가중의 사상에 매우 가까운 사유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니체 사상에 드러나는 불교적 국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하나의 비교방법론이기도 하다. 48) MMK 24: 18.
49) Shapiro, Gary. Nietzschean Narrative. Bloomington & Indianapolis: Indiana UP, 1989. p.37.

“제반 현상들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이 니체의 “가장 핵심적인 견해들 중 하나”50)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니체 읽기는 흡사 불타의 공(空)의 교의에 대한 현대적 주석처럼 느껴진다. 네하마스에 의하면51) 니체에 있어서 제반 현상은 분명한 시작도 명백한 끝도 갖지 않는 긴, 복잡한 사건들로 구성되며, 이 같은 사건들의 부분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다. 니체는 사건들과 그들의 부분들이 서로 너무나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이들이 이 상호관계들을 통해 각각의 존재(성)를 실제로 결정한다고 믿는다. 50) Nehamas, Alexander. Nietzsche: Life as Literature. Cambridge &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 p.77. 51) Nehamas, Alexander. ibid, p.77.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자체 내에 하나의 구성(적 본질)을 갖는 사물들”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버려야 할 독단적 생각52)이라고 니체는 선언한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하나의 ‘사물’은 그것의 효과들의 합(合)”53)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네하마스에 의하면54) 니체의 ‘권력의지’의 개념은 일체 현상의 상호관계지워짐에 대한 그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권력의지는 세계 내의 모든 것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고 사실상 그 성격을 구성하는 하나의 활동이다. 니체는 《밀린다팡하》의 ‘이름에 관한 문답’55), 《노경(蘆經)》의 ‘갈대의 비유’56) 등에서 가르치는 불교의 관계적 상의상존의 원리와 공(空)에 대한 인식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계적 상의상존의 원리와 연기설은 자족자존(自足自存)적 실체의 허구를 드러내 보여주는 가장 근원적인 해체적 인식들이다. 52) WP, 559절. 53) WP, 551절.
54) Nehamas, Alexander. ibid, p.80. 55) 서경수 역, 《밀린다팡하》, 동국역경원, 1981. pp.41∼7.
56) 동국역경원, 《잡아함경》 (1), 1996. I: 제12권.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는 자크 데리다의 해체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텍스트이론은 불교의 연기설에 대한 주석으로 읽혀질 수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57) 57)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3. p.23, 26.

삼라만상은 하나의 텍스트, 하나의 거대한 상호 의존적 연쇄이다. 일체의 현상은 이미, 언제나 하나의 텍스트 안에 존재한다. “텍스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58)고 데리다는 말한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면, 일체는 인연이며 인연, 연기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데리다적 텍스트 안의 모든 요소들은 인연을 따라 끝없이 다른 요소들과 얽히며, 이 같은 얽힘, 관계짓기의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따라서 데리다의 텍스트의 세계에서는 어떤 개체에 대해서도 고정되고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구성적인 개체들은 실체로서 성립되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홀로 설 수 없고, 오직 상호 의존에 의해 태어나고 사라진다. 개체들의 주체성이나 자아성은 완전히 부정된다. 주체는 관계들의 일시적인 가화합(假和合)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58) Derrida, Jacques. Of Grammatology. Tr. G.C. Spivak.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6. p.158.

해체론의 주요한 비유들 중의 하나인 다발(sheaf)의 비유는 이 같은 가화합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해체론의 핵심적 통찰은 하나의 사건(event)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체계의 산물, 구축물이라면 그 구축물(construct)은 그 본성에 의해 이미 그 자신을 와해 또는 해체(de-construct)시켰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59) 이 같은 통찰은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의 교의를 현대철학에 재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9) Holman, C. Hugh & William Harmon. A Handbook to Literature. Sixth Edition.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92. pp.128∼129.

해체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요약하는 개념들 중의 하나가 ‘지움 아래(sous rature, under erasure)’ 두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들인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 ‘지움 아래’ 두기의 개념은 각기 지식과 정신 및 존재(Being)의 안정성을 회의하고 그것들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단어에 X표시를 하(여지우)는 것을 의미한다. 메이던 새럽에 의하면60) 하이데거는 ‘존재(Being)’를 ‘지움 아래’ 두었고, 프로이트는 ‘정신(psyche)’을, 니체는 ‘앎(knowing)’을 ‘지움 아래’ 두었다. 하나의 용어를 ‘지움 아래’ 둔다는 것은 하나의 단어를 쓰고, 그것을 X표 하여 지우고, 단어와 지움을 다같이 인쇄한다는 것이다. 단어를 X표 하여 지우는 것은 단어가 부정확 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60) Sarup, Madan. An Introductory Guide to Post-structuralism and Postmodernism. New York & London: Harvester Wheatsheaf, 1988. p.35, 41, 49, 56.

그러나 그 단어는 필요하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남겨진다. 하이데거는 가끔 불변적인 존재라는 뜻을 갖는 ‘존재(Being)’라는 단어를 X표 하여 지운 상태로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단어가 부적절하지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지움 아래 두기’ 장치는 지워진 항목의 다의적인 지위를 시사하며, 독자로 하여금 단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도록 경고한다. 이 지움 표지는 사용된 용어들의 부적절성과 매우 잠정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같은 용어들이 없이는 생각을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포스트모던적 존재론과 언어관의 주요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이 ‘지움 아래’ 두기의 개념은 여러 면에서 불교의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리문자(不離文字) 사상과의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움 아래’ 두기는 지식·정신·존재의 근원적 비결정성, 미결정성(indeterminacy)을 가리킨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가장 명쾌한 답변을 시도한 이론가 장-프랑소아 료따르가 최우선적인 ‘포스트모던적 조건’으로 손꼽은 급진적인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기를 가리킨다.61) 료타르의 자아 인식은 자아의 해체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어떤 자아도 하나의 섬이 아니다. 각각의 자아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유동적인 하나의 관계들의 짜임 속에 존재한다.”62)라고 료타르는 선언한다. 자아의 해체는 곧 플라톤 이래의 실체론적 존재론의 전복을 의미한다. 61) Bertens, Hans & Douwe Fokkema. Eds. Approaching Postmodernism. Amsterdam & Philadelphia: John Benjamins Publishing Company, 1986. p.31. 62) Lyotard, Jean-Francois.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Tr. Geoff Bennington & Brian Massu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p.15.

이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기의 시대에 있어서 ‘료따르의 중심적 테마’는, 핫산의 표현을 빌면,63) 부르조아 사회를 조직했던 ‘메타서사들’의 폐지이다. ‘메타서사’란 합리적인 철학들, 플라톤주의,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 궁극적 통일과 화해와 조화의 유토피아 등 지식과 인간 활동의 모든 사항들에서 궁극적 의미를 발견해내는 포괄적이고 토대적인 담론들이다. 이들은 사변적 모더니티(modernity: 근대성)의 정수들이다.64) 일체 현상의 관계지워짐에 대한 니체적, 불교적 사유는 하나의 일반적인 형이상학적·우주적·보편적 이론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차라리 그것은 세계와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의 성격에 관한 어떤 이론도 결코 주어질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한다. 상호관계지워짐에 대한 니체의 인식은 우리의 견해들과 이론들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확정된 세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그의 노력의 일부이다.65) 63) Hassan, Ihab. “Ideas of Cultural Change”. Innovation/Renovation: New Perspectives on the Humanities. Ed. Ihab Hassan and Sally Hassan. Madison & Lond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3. p.26.
64) Behler, Ernst. Irony and the Discourse of Modernity. Seattle & London: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0. pp.11∼2. 65) Nehamas, Alexander. Nietzsche: Life as Literature. Cambridge &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 pp.80∼81.

불교의 불립문자 사상은 이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인식소적 틀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불교의 언어철학의 밑바닥에는 근원적인 유전(流轉) 현상에 대한 헤라클리투스적 인식과 언어의 재현 기능에 대한 급진적 불신이 깔려 있다. 불교적인 언어 이론에 의하면 언어는 그것과 1대1로 대응할 대상을 실재의 세계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66) 불교의 불립문자 사상은 글과 말이 뜻을 다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글과 말을 세우고 전적으로 이에 의존함을 경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에 의하면67) 불립문자는 문자를 쓰지 않는다는 의미도, 모든 경전을 배격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66) 나가르주나, 《중론송》, 황산덕 역해, 서문문고, 1976. pp.116∼7. 67) 中村 元, 《中國人의 思惟方法》, 김지견 역, 동서문화출판사, 1971. p.144, pp.77∼78.

불립문자를 종지(宗旨)로 하는 선종(禪宗)은 ‘문자의 종교’라 할 만큼 문자에 의지하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또 중시했다. 문자를 세우지 않음(不立文字)이 문자를 떠나지 않음(不離文字)과 함께 간 것이다. 단지 불립문자는 “보편적인 명제를 세우는 형식으로 말하지 않으며 또한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음은 모르면서 글에만 집착하여 이름으로써 체(體)를 삼는 것을 끊음에 그 본래적 의미가 있다. 《장자(莊子)》의 〈지북유편(知北遊篇)〉은 “도(道)는 듣는 것이 아니니 들을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볼 수 없다. 볼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68)라고 기록하고 있다. 니체, 해체철학,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불교와 장자가 모두 함께 만나고 있다. 68) 김동성 역, 《莊子》, 을유문화사, 1976. p.176.

5. 맺는 말

동서철학에 두루 정통했던 철학자 출신의 모더니스트 시인·비평가 T.S. 엘리엇은 “인도 철학의 오묘함이 대분분의 위대한 유럽 철학자들을 학동들(schoolboys)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썼으며, “가장 전성기의 중국 문명은 유럽을 조악하게 보이게 만드는 우아함과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69)고 썼다. 69) Eliot, T. S. After Strange Gods: A Primer of Modern Heresy. London: Faber and Faber, 1934. p.40.

엘리엇이 공부했던 하버드 대학 철학과는 “아리스토텔레스 뒤에 공자, 그리스도 뒤에 불타”를 놓는 학풍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학풍을 주도했던 하버드 철학과의 대부(doyen) 조시아 로이스를 기념하는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엔젤러스 캠퍼스의 로이스 홀 입구 위에는 “세계는 발전적으로 실현된 해석의 공동체이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70) 70) Costello, Harry T. Josiah Royce’s Seminar, 1913-1914: as recorded in the notebooks of Harry T. Costello. Ed. Grover Sm0ith.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63. xvii.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본이 아니겠는가 싶다. 본론은 니체와 불교 그리고 해체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연구 가능성과 방법론을 탐색해 보았다. 이 같은 탐색은 동서 상생(相生)과 공존(共存)을 위한 대화의 장을 그만큼 더 넓혀줄 것이다. 양자간의 심층적인 유사성과 상이성은 다음 연구의 과제이다.■

박경일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수료. 영문학 박사. 현재 경희대학교 영어학부 교수·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회장. 논저로 “Poetics of Openness: A Study of T.S. Eliot’s Literary Thought” 〈엘리엇에 대한 브래들리적, 불교적/나가르주나적, 포스트-/모던적 연구〉 〈T.S. 엘리엇과 불교〉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철학의 선구들: 노자로부터 엘리엇, 데리다까지〉 《니르바나의 시학: “회전하는 세계의 정지점” 탐구》 외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