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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특집] 서양철학과 불교, 그 접점과 경계
[9호] 2001년 12월 10일 (월) 김종욱 동국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산은 산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성철 스님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성철 스님이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옛부터 내려오는 선불교의 유명한 화두이다. 역대 조사들의 어록을 기록한 《속전등록(續傳燈錄)》(大正藏 51, 614c)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원 유신(靑原 惟信) 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노승이 30년 전 참선을 하기 이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山是山 水是水)’으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의 문턱에 들어서고 보니, 이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山不是山 水不是水).’ 그러나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山祗是山 水祗是水)’.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만일 이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노승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허용하리라.

이 설법에서는 완벽한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이것들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산은 산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산은 역시 산이다’의 세 가지가 된다. 첫번째 단계는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소박하게 긍정하는 태도를 말하며, 두번째 단계는 그런 긍정적 방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에 비해 세번째 단계는 그러한 부정을 통해 일체의 것이 있는 그대로 다시 긍정되는 대조화의 태도를 뜻한다. 필자는 앞으로 이렇게 ‘긍정-부정-대긍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이데거와 불교 사상간의 만남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통념 속에 잠복해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에 관한 좀더 바람직한 관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2. 산은 산이다

1) 하이데거의 존재자성
‘산은 산이다’라는 것은, 우리의 눈앞에 놓여져 있는 저것이 산이고 그것은 물이나 강이 아닌 바로 그 산이라는 뜻이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태도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일상적 태도 속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다. 첫째,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과 그런 인식의 앞에 마주 서 있는 대상 사이의 관계이고, 둘째, 그 대상에는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 있게끔 하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 있게끔 하는 어떤 것’이란, ‘어떤 존재자를 그 존재자로서 존재하도록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본질적인 규정’을 말하는데,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자성(Seiendheit)이라고 부른다. 이런 ‘존재자성’은 존재자를 바로 그 자신이게 하는 존재자의 가능 조건이나 보편적인 본질로서, 존재자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상존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변치 않고 존재자를 그 존재자로서 계속 보편적으로 규정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존재자의 존재자성은 ‘영속적인 현존성(die sta촱dige Anwesenheit)’으로 간주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영속적 현존성으로서의 존재자성은 변화와 소멸에 반하여 동일하게 항존한다는 점에서 가멸적(可滅的)인 사물 존재에 비하여 본래적인 존재이고, 또 이렇게 본래적인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참답고 본래적인 것만을 추구해야 할 사유에서 언제나 모범이 되는 것이며, 더욱이 변치 않고 고정적으로 남아 있어서 마음대로 처리하기에 용이하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존재자를 ‘처분할 수 있는(verfu촩bar)’ 장악 가능성의 근거(Grund)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산이 있다’는 것 또는 ‘존재자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수수께끼이자 경이로운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존재자가 존재한다는(da?Seiendes ist)’ 원초적인 사태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서, 그것을 단지 존재자 중심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근원적이고 역동적인 사건을 사물화하거나 실체화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을 찾아 떠나온 과정이 바로 서양의 전통적 사유 방식인 형이상학의 역사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idea)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ontos on)’ 어떤 모범적인 원형(paradeigma)을 뜻하는데, 이것은 한 사물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것을 현재의 그것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본질적 형상(eidos) 또는 본모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존재자성을 영속적 현존성으로 해석하는 효시가 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 세상의 사물은 본모양으로서의 이데아를 불완전하게 모방한 겉모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영속적 현존성은 기독교의 시대인 중세에 훨씬 강화된다. 비존재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신은 최대로 체류하고 최고로 충일하게 현실적인 존재자이며, 항구적인 지속성 그 자체인 것이다. 이에 비해 피조물은 신의 창조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에서 현실성(actualitas)은 곧 인과성(causalitas)을 의미하게 된다.

이처럼 현실성의 본질이 중세에는 창조주의 인과적 작용력에 있었지만, 신 대신 인간이 모든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으로서 유일한 주체(Subjekt)가 되는 근대에는 그것이 인식 주체의 표상적 작용력에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표상 작용(Vorstellen)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소박하게 수용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자기 앞에 몰아 세우는 것(Zustellen)이고, 앞으로 나가 지배하며 마주 세우는 것이며, 그렇게 세워진 것을 포착하여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적 대상화를 통해서 주체는 존재자를 자신의 통제하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Verfu촩bares)’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을 터놓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라는 기술 지배의 시대에 이르러 존재자의 대상화는 인간까지 포함한 존재자 전체의 부품화로 극단화된다. 그 결과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의 파악을 통해 존재자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인간조차도 얼마든지 효율성에 따라 대체 가능한 존재자로 전락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제까지 논의한 존재자성에 맞추어 ‘산은 산이다’를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산은 산이다’, 즉 ‘산은 산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산은 이데아의 불충분한 모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중세에는 ‘산은 신의 창조 작용에 의한 피조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근대에는 ‘산은 주체의 표상 작용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현대에는 ‘산은 기술적 지배를 위한 부품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2) 불교의 자성
‘산은 산이다’ 또는 ‘산은 산으로서 있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자성(自性)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불교 교학 체계의 핵심인 연기이론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로 pratl?yasamutpa?a인 것을, 조건이라는 뜻의 연(緣)과 발생이라는 뜻의 기(起)로 의역해 놓은 것이 연기(緣起)이다. 연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수많은 조건(pratl?ya, 緣)들이 함께(sam) 결합하여 일어난다(utpa?a, 起)는 ‘상호의존적인 발생’을 의미한다.

일체의 현상이 이런 ‘상호의존성(pratl?yasamutpannatva, 緣生性)’의 원리에 따라 성립한다고 할 경우, 무수히 많은 조건들이 서로에게 개입하여 끊임없이 변화해 갈 것이기 때문에 영원 불변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있을 수 없고(無常, anitya), 혼자만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게(無我, ana?man) 된다. 즉 연기이기에 무상이고 무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만의 동일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아(我, a?man)라는 것도 사실은 물질(色, ru?a)과 감수(受, vedana?와 표상(想, sam.jn??과 의지(行, sam.ska?a)와 식별(識, vijn??a)이라는 다섯 가지의 요소들이 인연 따라 일시적으로 결합된 잠정적 가합태(五蘊假合)에 불과할 뿐,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것이 여러 조건들과 요소들이 화합하여 연기한 것이고, 그래서 무상이고 무아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요소들 자체는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 부파(部派)불교의 일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astivada)의 자성 개념이다.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은 일체 존재의 궁극적 요소들로 75종의 다르마(dharma, 法)를 상정한 후, 이것들은 현상의 활동 면에서는 생성 소멸하지만, 그 궁극의 본체 면에서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는 마치 한편의 영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즉 설일체유부에게서 자아란, 요소들의 집합체인 명목상의 존재로서 실체적 자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순간적인 빛을 말하는 각 요소(다르마)들만은 마치 영화 필름의 각 컷트들처럼 실재한다는 것이다.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의 컷트 컷트는 다르마로서 실재하는 것이지만, 스크린에 비친 일체의 활동이나 나의 모습(자아)은 이 본체적 필름에 의해 드러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요소들의 복합체는 가합태로서 비실재이나, 요소들 자체는 실재라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75종의 다르마가 실재한다는 것은,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며, 무아는 곧 다르마의 실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설일체유부가 자아의 실재성을 부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의 순간적 요소들을 받아들인 결과 야기되는 지속성의 문제를 설명해야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항상 존재한다(恒有)’고 여겨지는 이면의 기체(基體), 즉 자성(自性)을 믿게끔 되었다.

그리하여 설일체유부에서는 현상적으로는 찰나적 생멸을 하지만, 본체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적 75법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자성(自性, svabha?a)이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있다(sva-bha?a)’는 측면에서는 ‘자기만의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을 뜻하고, ‘언제나 있다(sarvada?bha?a)’는 측면에서는 ‘삼세의 매 찰나마나 실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자기 존재’를 후자는 ‘지속 존재’를 뜻한다는 점에서, 자성은 독립적 개체(제1실체)와 보편적 본질(제2실체)이라는 양의성을 지닌 서양철학의 실체(substantia) 개념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자성 개념에 맞추어 ‘산은 산이다’를 살펴보기로 하자. ‘산이 산으로서 있다’는 것은 설일체유부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색법으로서 자성적으로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저 산은 매 찰나마다 변화해 가는 무상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특정한 모양과 색깔을 지닌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는 점, 다시 말해 색법(色法, ru?a-dharma)이라는 점에서는 삼세에 걸쳐 실유하는 자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상한 변화 과정을 인정하면서도 그 배후에 연속적으로 항유하는 기체적(基體的) 요소를 상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변화 현상 이면의 불변적 본체를 존재자성이라는 형식으로 찾고자 한 서양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발상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삼세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과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은 산을 산으로서 있게 하는 근거와도 같은 것들이고,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기에 ‘산은 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3. 산은 산이 아니다

1) 하이데거의 무
‘산은 산이다’를 ‘산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할 경우, ‘산은 산이다’는 ‘산은 이데아의 모사물이다’ ‘산은 신에 의한 피조물이다’ ‘산은 표상 작용의 대상이다’라는 식으로 변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특정한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확답을 내리기에 앞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신비스러운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는, ‘존재자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존재자의 존재자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왜 도대체 존재자는 있고, 도리어 무는 아닌가?’라고 묻고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엄청난 수수께끼에 대면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종래의 형이상학에서는 ‘왜 도대체 존재자는 있고, 도리어 무는 아닌가?’라는 물음을,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의 제일원인(causa prima)을 묻는 물음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이데거는 그 물음을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근원적인 사태를 원초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신비로운 수수께끼가 오히려 ‘존재자가 아닌 것’인 무를 실마리로 하여 해명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데 전적으로 존재자가 아닌 것으로서의 무(Nichts)는 존재자 전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자 전체와 먼저 대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개별적인 존재자만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뿐인 유한한 인간이 존재자 전체를 그 자체에서 파악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자 전체의 한가운데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존재자가 전체로서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며,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유없이 모든 것에 권태로움을 느낄 때, 특정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인 공포(Furcht)와는 달리, 왠지 모를 섬뜩함에 그저 모든 것이 뿌리없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인 불안(Angst)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안개처럼 드리울 때, 존재자 전체가 허물어져 내리면서 그 자리에 무가 입을 벌리고서 등장한다. 우리는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존재자 전체와 함께 무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안 속에서는 존재자 전체가 의미를 잃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체 존재자 그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무에 대한 단적인 타자로서 존재자 전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존재자 전체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지시하는 것을 무화(無化, Nichtung)라고 하는데, 이런 작용이 곧 무의 본질을 이룬다. 따라서 무화 작용을 본질로 하는 무는 존재자의 절멸(Vernichtung)이 아니라, 도리어 존재자의 개방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를 드러내주는 불안에는 혼란으로 허둥대는 공포와는 달리, ‘어떤 독특한 안정이 스며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자 전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인 무가 도리어 존재자 자체의 개방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는 것은, 무가 드러날 때 비로소 존재자 자체를 탐구할 수 있는 이상, 존재자만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자성을 추구하는 전통적 사고 방식으로는 오히려 존재자 자신도 또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원초적인 사실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존재자 전체를 부정하면서도 무는 존재자 자체를 개방시킨다고 할 때, ‘존재자가 개방된다’는 것은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면, 존재자가 존재의 빛 속에서 비은폐되어 드러난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존재자에게 빛을 던져 모든 존재자를 위한 개방된 장(das Offene)이 됨으로써, 존재자를 탈은폐된 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을 일러 하이데거는 ‘존재의 밝힘(Lichtung des Seins)’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밝힘이라는 이 개방된 장 위에서만 ‘존재자의 비은폐성(Unverborgenheit des Seienden)’은 가능하다. 그런데 존재의 밝힘이라는 개방된 장에서 존재자가 비은폐되어 드러날 때, 존재 자신은 스스로를 감추어 은폐하고 만다.

왜냐하면 만약 존재자의 비은폐성 속에서 존재가 이처럼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존재는 존재자적 표상의 대상이 될 뿐이지, 존재자와는 차이나는 존재 자체, 모든 존재자에게 빛을 주는 밝힘 그 자체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밝힘은 무조건적인 밝힘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자기 은폐로서의 밝힘’이며, 존재자의 드러남(존재자의 비은폐)은 동시에 존재 자체의 물러남(존재의 은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나기만 하는 존재 자체가 존재자 배후의 초월적인 근거와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근거란 영속적 현존성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존재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그 어떤 존재자도 아니기에 무이며, 이런 무에서는 그 근거가 더 이상 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무는 곧 심연(Abgrund)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존재도 분명 존재자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의 근거는 고정화된 영속적 현존성에 따라 인간이 장악하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자적인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무근거적인 심연이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는 우리가 존재자와 존재자성에만 매달릴 때에도 의연히 남아 있는 그런 ‘있는 그대로의 있음’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존재가 존재자의 비은폐성 속에서 자신을 은폐하자 존재자의 비은폐성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지만, 그럴수록 존재자에 주어진 밝음은 오히려 존재의 빛을 흐리게 하여 사람들은 은폐를 본질로 하는 존재 자체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도리어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시선을 존재자와 그것의 존재자성에 집중시킨다. 존재자를 넘어 이렇게 존재자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기존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존재자와 존재자성에만 매달릴 경우, 존재와 존재자 간의 비은폐적인 이중성의 사건은 망각되고 만다. 그렇다면 ‘산이 무엇이다’는 특정한 형이상학의 입장에 앞서서 ‘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원초적인 사태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산뿐만 아니라 일체의 존재자를 무로 보아야 한다. 즉 더 이상 존재자성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제 산은 산이 아니다. 산은 지배와 장악의 대상이 아니다. 산은 항상 처리 가능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려는 형이상학적 욕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2) 불교의 공(空)
불교적으로 볼 때,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말은 ‘산은 자성적으로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소위 반야의 통찰에 의해 얻어진다. 반야(般若)란 산스크리트 prajn?片?음역한 것으로서 ‘지혜’라는 뜻인데, prajn?愎?‘앞선’ ‘넘어선’을 뜻하는 pra와 ‘안다’는 뜻의 jn?彭?결합되어 ‘분명히 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반야란 단순히 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선 것이고, 그렇게 넘어섬으로써 오히려 더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는 점이다.

전자는 반야가 개념적 분별을 넘어선 직관적인 통찰이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반야란 있는 그대로를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a?hu?a-jn??a-dars첺na)이라는 의미이다. 분별을 넘어선 직관이기에, 반야는 주객 분리의 이원적 사고가 극복된 무분별의 지혜(無分別智)이며, 그런 무분별적 불이(不二)의 집중(sama?hi, 三昧, 定)을 통해 주어지는 근본적인 체험이다. 또한 반야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으로 본다는, 일체법에 대한 연생적(緣生的) 통찰을 의미한다. 즉 반야의 시야 한가운데서 일체법의 총체적 모습이 무상과 무아의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공(空)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이 공이 바로 자성(自性)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앞서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자성 개념을 중심으로 소개했는데,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공박한 반야계 경전들을 신봉한 용수(Na?a?juna, 龍樹)의 중관학파(中觀學派, Ma?hyamika)에서는, 초기 불교의 기본 정신인 연기설에 근거하여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역설적으로 해체하였다.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자성(自性, svabha?a)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성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하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성을 가진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긴 것이 아닌 것이며, 원인을 갖지 않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즉 설일체유부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항상하며, 그 자신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체라고 주장한 자성이란, 곧 연기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된다.

용수가 볼 때 자성이란 마치 붓다에게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개념처럼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에 불과했으며, 연기한다는 것은 곧 모든 다르마들이 상관적이라는 것, 즉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무자성의 다르마들은 그 자체의 궁극적 사실이 아니라 단순히 상상된 것이고, 헛되이 분별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설일체유부가 비록 연기는 하지만 다르마들은 자성적으로 실재한다고 본 데 반해, 용수는 바로 연기하기 때문에 다르마들은 무자성이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연기이므로 무아이듯이 연기이므로 무자성이고, ‘무상이므로 고정적 지속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 반야적 지혜의 내용이던 무상과 무아가 이제 대승불교의 개시와 더불어 무자성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성이 없음을 일러 공이라고 한다. 자성의 텅빔, 자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 그것이 공(空, s쳕?ya)이다. 연기한 모든 것에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는 모두 공이다(一切皆空). 이렇게 자성을 부정하여 ‘공을 설하는 목적(空用, s쳕?yata prayojana)’은 희론의 적멸에 있다. 희론(戱論, prapan?a)이란 문자 그대로 허위의 쓸모없는 이론을 말한다. 이처럼 지혜를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희론이란, 자성을 상정함으로써 일어나는 사유 구성, 혹은 결정화되고 대상화된 분별(vikalpa), 한마디로 자성적 분별심을 뜻한다. 이것은 ‘자성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에 자성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으로서, 연기하는 역동적 과정을 개념(na?a, 名)과 형상(nimitta, 相)으로 고정화시키거나, 주관(gra?aka, 能取)과 객관(gra?ya, 所取)의 도식으로 이분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분별하고 나서는 그렇게 분별된 것이 있다거나 없다라는 양자택일적인 판단을 내린 다음, 그 극단적인 판단 내용의 어느 하나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식의 판단에 대표적인 것으로 생(生)과 멸(滅), 상(常)과 단(斷), 일(一)과 이(異), 거(去)와 래(來) 등이 있다. 그러나 무수한 조건과 조건들 사이의 상호 작용하는 모습을 각 측면에 따라 이렇게 ‘생이다’ ‘멸이다’는 등의 여덟 가지로 나누지만, 그것들 자신이 어떠한 자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확정적으로 단정지을 만한 생과 멸의 상(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생과 멸에는 애당초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을 부정하면 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이 부정되므로 멸 또한 부정되어 불생 불멸이 된다. 따라서 연기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어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한 것이므로(八不), 양극단의 어느 하나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中道)이다. 자성을 세워 분별한 다음, 그것에 집착하여 온갖 쟁론을 일으키지만, 원래 무자성이므로 분별할 것도 집착할 것도 쟁론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자성(無自性, nih.svabha?a)이어서 무분별(無分別, nirvikalpa)이고 무집착(無執著, anabhinives첺)인 중도에 설 때, 희론은 종식된다.

불교적으로 볼 경우, 반야에 의해 직관된 공은, 상호의존적 연관관계인 연기의 역동적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자성을 상정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이데거적으로 볼 경우, 불안에 의해 경험된 무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원초적 발현 사태 속에 담긴 존재와 존재자의 비은폐적 교호 관계를 망각할 때, 존재자성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연기의 실상에 대한 불각(不覺)으로 생겨난 자성은 자기 존재의 고립성과 지속 존재의 항유성을 지닌 것으로서, 개념과 형상이라는 고정화와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화를 통해 일체법을 분별하는 태도로서 나타난다.

이런 분별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그것을 얻고자 하는 소유를 유발한다. 아울러 존재의 진리에 대한 망각으로 생겨난 존재자성은 영속적 현존성을 지닌 보편적 본질이나 존재자의 가능 근거로서, 형이상학의 역사의 시기마다 이데아, 실체성, 신적 현실성, 주체성 등으로 나타난다. 주체성과 대상성을 본질로 하는 표상은 항존하는 존재자성을 자신의 의지대로 존재자를 처리할 수 있는 장악 가능성의 근거로 삼아, 일체를 몰아 세우고, 이런 식의 대상화는 존재자 전체의 부품화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나 연기의 실상을 정각(正覺)할 경우, 본래 자성이 없는 것이므로 분별하여 집착할 만한 것도 없고, 얻어서 소유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존재의 진리를 회상할 경우, 진상은 존재자성에 담기지 않는 것이므로 대상적으로 표상하여 처분하려 하거나, 장악하여 지배하려 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무자성으로서의 공이 무분별과 무집착과 무소득(無所得)으로 이어지듯이, 비존재자성으로서의 무는 표상 불가성과 처분 불가성과 장악 불가성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이제 더 이상 산은 자성과 존재자성으로서의 산이 아니다. 산은 분별과 집착과 소유의 대상, 표상과 처분과 장악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은 산이 아니다.

4. 산은 역시 산이다

1) 하이데거의 존재
‘산은 역시 산이다’라고 할 때, 역시(亦是)는 ‘아무리 생각해도’ ‘늘 그렇듯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자성과 존재자성을 통해 아무리 분별하고 사유해도, 그런 분별적 사유 이전에 제 스스로 늘 그렇게 산은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분별되기 전과 같이’라는 뜻을 살리면 ‘산은 여전(如前)히 산이다’가 되고, ‘분별되기 전과 다름없이’라고 읽으면 ‘산은 의연(依然)코 산이다’가 된다. 어쨌든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차원은 자성과 존재자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통해 대긍정되는 존재와 진여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무로서의 존재는, 존재가 존재자적인 것일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존재는 인간의 표상적 대상화로부터 물러나 있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통제로부터 물러나 있을 때 도리어 존재자 전체의 진리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존재는 존재자와는 차이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es gibt)’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으로서의 존재를 주는 그것(Es)이란 무엇일까? 이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그것이 존재를 준다고 하더라도 존재를 초월한 상위의 어떤 것이 존재를 산출해 낸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존재를 준다’는 말은 ‘존재가 그것으로서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존재를 주는 ‘그것’이란, 존재가 주어지는 근원적인 방식 또는 존재가 본래대로 드러나는 ‘사태의 실상(Sach-Verhalt)’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발현(發現, Ereignis)이다. 발현이란 본래의 고유한 모습(Eigenes)을 허용하여(lassen) 내보이는(sich zeigen) 사건, 고유함(Eignen)에로 가져다 주는(erbringen) 일, 즉 각자 고유화되면서도 서로에게 귀속되어 드러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는 발현으로서 본현한다(Das Seyn west als das Ereignis)”고 말한다. 그런데 존재는 언제나 시간과 함께 주어져 드러난다. 존재는 일종의 현존(Anwesen)인데, 현존에는 현재(Gegenwart)와 존속(Andauern)이 작용하고 있으니, 존재 그 자신은 시간으로부터 드러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현은 존재와 시간의 공속(共屬)이다. 또한 존재는 사유와 함께 주어져 드러난다. 사유는 ‘존재자의 존재’라는 선행적 개현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존재를 ‘보살핌 안으로 수용하는 것(In-die-Acht-nehmen)’이고, 존재는 언제나 자기 개방의 장으로서 현존재의 수용 활동인 그런 사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현은 존재와 사유의 공속이다. 아울러 존재는 인간과 함께 주어져 드러난다. 존재는 자신의 본질을 그 진리에로 보존하기 위해 인간을 사용하는 자(Brauchendes)이고, 인간은 존재가 자신을 개현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요구하는 거처(Sta촷te)로서 존재의 목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현은 존재와 인간의 공속이기도 하다.

이처럼 발현을 존재와 시간,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의 공속이라고 할 때, 그 공속(共屬, Zusammengeho촵en)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동일자(das Selbe)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을 대비시켜서 그것들이 서로 같다고 하는 동등성(das Gleiche)이 아니라, 양자가 전체적으로는 하나를 이루면서도 그 속에서 각자의 고유함을 간직한다는 의미에서의 상호귀속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발현 속에서는 존재와 시간과 사유와 인간이 대비나 분열 이전에 이미 하나의 조화로운 결합 상태, 즉 미분화(未分化)된 공속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속성으로서의 발현 속에서 존재와 시간과 사유와 인간이 서로 근원적으로 속하면 속할수록, 서로는 각자의 본질에로 풀려남으로써 보다 더 고유한 것으로서 각자 본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고유함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상, 각자는 서로에게 귀속된 어떤 유한한(endlich)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유한성은 무한성의 반대 표시가 아니라 필연적 상호 귀속이라는 관계성의 표현이다. 그런데 각자는 이처럼 유한한 것이기에, 어떤 것이 고유하게 드러나게 될 때, 그렇게 되어진 것은 드러나지만 그렇게 되게 한 것은 뒤로 물러나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존재가 ‘역사적 운명(Geschick, 歷運)’으로서 각 시기마다 주어질 때 존재 자신은 물러나고, 시간이 기재(旣在, Gewesen)로서 건네질 때 현재는 유보되는 것과도 같다. 발현에는 탈현(脫現, Enteignis)이라는 독특한 성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탈현을 통해서 발현이 포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탈현은 물러남과 유보를 통해 역운성과 현존성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는 점에서 발현 자체의 고유한 특색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발현으로서의 존재에 담긴 존재의 유한성은, 존재가 시간과 인간의 사유와의 관계맺음 속에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존재가 적어도 초시간적인 영원성이나 인간 외적인 초월자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렇게 존재의 유한성을 시사해 주는 존재와 시간,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 등의 공속성은, 이들 양자가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조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원초적 발현 사태의 입장에서 우리는 자연을 달리 바라볼 수 있다.

존재와 인간 사유의 공속성으로서의 발현은 양자가 동일자로 합일된 상태로서 형이상학적 표상작용상의 주객 대립 이전의 근원 사태이다. 주객으로 분리되지 않은 존재와 인간 사유의 공속적 발현에서는, 자연도 인간의 마음대로 처리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본래 있는 그대로의 고유한 것으로서 비로소 드러난다. 즉 존재와 인간 사유의 공속적 발현은 존재자를 표상적 사유에 의해 장악 가능한 것으로 되게 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자를 하나의 고유한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한다. 이런 발현을 통해서만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모든 경이 중의 경이를 퓌지스로서 경험할 수 있다.

퓌지스(physis)란 마치 장미꽃이 제 스스로 피어나듯이, ‘스스로 피어나면서 본질적으로 자신을 개현하는 것’ ‘개방된 장 안으로 자신을 현출하는 것’ ‘밝힘의 개현’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개현하는 것의 개현함에는 개현자와 개현 자체가 함축되어 있듯이, 퓌지스에도 ‘전체에서의 존재자 그 자신’과 ‘존재 자체’가 이중성으로서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존재자의 존재’로서의 퓌지스는 존재자와 존재함이 갈라지기 이전의 상태,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으로 표상화되거나 주어와 술어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원사태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장미는 왜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꽃피기 때문에 꽃핀다.”고 하듯이, 퓌지스는 인간에 의해 처리 가능한 근거나 이유와 상관없이 제 스스로 드러나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퓌지스적 개현에 담긴 ‘존재자의 존재’라는 이중성이 망각될 때, 전체에서의 존재자는 자연적 존재자(physei onta)라는 영역 개념으로, 그리고 존재 자체는 존재자성(ousia)이라는 본질 개념으로 각각 축소 분화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발현이라는 원초적 사태 속에 담긴 중층적 상호 귀속의 성격에 따라 사물과 세계를 달리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설 때, 사물(Ding)이란 공간을 점유하는 불가침투적인 물질의 덩어리도 아니고, 속성을 담지한 미지의 X도 아니다. 즉 그것은 표상 주관에 의해 앞에 세워지기를 기다리는 고립적인 대상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과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 간의 복합적인 상호 관여물이다. 따라서 사물을 사물답게 하는 것은 그 사물에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근본 성질이 아니라, 저 사중자(四重者, Geviert)의 회집(會集)이다. 이런 회집 속에서는 사중자의 어느 하나도 자체만으로 존립함 없이 서로를 반영하며(spiegeln) 상호 귀속되어 있다.

이렇게 사물이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 중에 회집된 사중자의 통일이 바로 세계(Welt)이다. 다시 말해 세계란 대지와 하늘과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간의 겹침(Einfalt)이 일어나는 반영-활동(Spiegel-Spiel)이다. 따라서 세계는 단순히 우주 자연이나, 피조물의 집합이나, 존재자의 전체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사물로서 설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장으로서, 모든 것을 회집하여 상호 귀속시키면서도 그것들에게 각자의 고유한 체류를 부여하는 회역(會域, Gegnet)과도 같은 것이다.

회역이란 이렇게 일자가 타자를 통섭하면서도 타자를 타자로서 허용하는 식으로 ‘사물을 사물로서 물화시키는 것(Bedingnis)’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회역이 지평으로서 우리를 둘러싸면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내보이고 있고, 인간이 근원적으로 회역에 속해 있는 이상, 인간은 그 본질상 회역에 내맡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유는 ‘회역에로의 내맡김(Gelassenheit zur Gegnet)’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유는 사물을 대상적으로 마주 세우는 표상도 아니며, 이렇게 대상을 향해 나아가 달려드는 표상이 곧 의욕인 이상, 사유는 또한 의욕도 아니다. 따라서 내맡김은 의욕하기를 단념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를 자기 앞에 세워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자 의욕하는 표상적인 사유(das vorstellende Denken), 모든 존재자를 오직 주문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것의 형태로만 타당하도록 만드는 계산적인 사유(das rechnende Denken)에 대한 포기인 것이다. 이에 비해 회역에로의 내맡김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숭고한 마음(Edelmut)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면적으로 표상에 매달리거나 일방적으로 표상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 숙고하는 사유(das besinnliche Denken), 발현으로서의 존재에 담긴 풍부한 시원성을 회상하는 사유(das andenkende Denken)에 대한 수용이다.

아울러 이렇게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 역시 ‘회역에로의 내맡김’에 있게 된다. 인간이 이처럼 회역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내맡길 때, 그런 회역의 한가운데에서 비로소 사물이 사물로서 고유하게 드러날 수 있다. 또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회역이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존재의 비은폐적 진리인 이상,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진리 속으로 ‘나가 서 있음(Hinausstehen)’, 즉 탈존(Ek-sistenz)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의 본질은 동물성과 이성간의 기이한 합성태(이성적 동물)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에 봉사하고 회역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에서 찾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탈존을 자신의 본질로 할 때, 저 산도 퓌지스로서 제 스스로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인간과 존재가 원초적으로 공속하는 발현 사건 속에서는, 그 어떤 자연도 형이상학적 표상화에 의해 장악되지 않을 것이므로, ‘산은 역시 여전히 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2) 불교의 진여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것을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체를 철저히 공화(空化)시킴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 다시 말해 진공(眞空)이 곧 묘유(妙有)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하이데거에서 존재자 전체가 무화(無化)됨으로써 ‘존재자의 존재’가 존재의 진리로서 드러나는 것과도 유사한 이치이다. 이제 이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연기하는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의 모든 것은 공이다(一切皆空)’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연기한 것은 공이다. 따라서 모두 연기한 것인 ‘물질적인 것도 공이다(色卽是空).’ 색(色, ru?a)은 그 어원을 ru?(형태를 만들다)로 볼 경우, ‘형태를 지닌 것’이라는 뜻이고, 그 어원을 ru?파괴하다)로 볼 경우에는, ‘파괴되어 변화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색이란 형태를 갖고 생성 소멸 변화해가는 물질 현상을 의미하는데, 이런 현상은 수많은 인(因)과 연(緣)의 조건들간의 화합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서, 그 형성 과정에 있어서나 형성된 형태에 있어서나 ‘자립적으로 항유할 수 있는 것(自性)’은 아니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한 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심리적 현상에도 역시 그대로 적용된다(受想行識 亦復如是).
그런데 이처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모든 현상이 공한 것이라면, 일체를 허무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공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로서 다만 무자성의 연기를 의미할 뿐이다. 연기한 것을 공이라 하는 이유는, 연기한 것에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이 곧 연기한 것을 가리키는 이상, 공이야말로 모든 것을 연기적으로 성립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의 이치가 있음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 공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 곧 물질적인 것이다(空卽是色)’고 한다. 오히려 공이기 때문에 공허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이 이렇게 일체를 성립시켜 주는 것이라면, 공은 현상 이면의 절대적 본체가 아닐까 하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무자성의 공이 자성화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에 대해 용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응당 공한 것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공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어떻게 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즉 모든 것이 공이므로(一切皆空), 공 또한 역시 공하다(空亦復空)는 말이다.

공이란 연기하여 드러나는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분별하여 집착할 것도 없다는 깨우침을 주기 위한 ‘최소한의 표현(假名, prajn?pti)’일 뿐이다. 이런 공을 두고 실체화하여 집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공이 연기한 일체의 것을 성립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성을 지닌 본체로서 집착하여 얻어질 수 있는 근거는 아니다. 즉 공은 일종의 ‘근본 없는 근본(無本之本)’과도 같은 것이다.

일체가 공이어서 공 또한 공인 이상, 모든 것은 무자성의 공이라는 점에서 색과 공,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 advaya)의 것이 된다. 이 불이란 둘이 아니므로 하나라거나, 둘을 위시한 일체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자성적으로 분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라 하는 것도 자성이고 둘이라 하는 것도 자성인 이상, ‘둘이 아니라 하여 하나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無二而不守一).’ 불이란 무자성의 공을 통해서 일체의 대립과 분별과 분열을 즉(卽)으로서 해소시키는 것이다.

색과 공 모두 무자성의 공이므로 색은 곧 공이 되고 공은 곧 색이 된다. 그리하여 색은 곧 공이라 하여 일체를 철저하게 공화시키는 것(眞空)과, 공은 곧 색이라 하여 그렇게 공화됨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妙有)이 둘이 아닌 것이 된다. 즉 진공이 곧 묘유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정(眞空)을 통해 대긍정(妙有)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대부정(眞空)과 대긍정(妙有)에 차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공이기도 하고 묘유이기도 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과 긍정의 어느 하나로 고정적으로 분별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같고도(如) 같다(如)고 할 따름이다. 그저 ‘같고도 같은 것(如如, tathata?’은 ‘진실로 같은 것(眞如, bhu?a-tathata?’이며,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如實, yatha?bhu?a)’이다. 바로 이런 진여가 일체의 진상(諸法實相)인 것이다.

무수한 조건과 조건들이 상호의존적으로 화합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일러 연기(緣起)라 하고, 이렇게 모든 것이 생성 소멸하여 가는 과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조건이 고정적 항유성(自性)을 고수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연기를 무자성의 공으로 표현한다. 무자성의 공이기에 생과 멸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연기한 모든 것이 무자성의 공이라면, 연기한 것인 생과 멸 역시 무자성의 공이어야 한다. 끝없이 연기하는 과정의 일면을 잡아 생성이다 소멸이다 하지마는, 자성적으로 확정지을 만한 생성과 소멸의 상이 따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생과 멸에 애당초 자성이 없는 이상, 불생이고 불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성이 없어 생과 멸이 성립하지만, 생과 멸에 본래 자성이 없으므로 불생 불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하는 삼라만상의 참 모습(實相)은 생멸하기도 하고 불생불멸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생멸과 불생불멸이 불이적(不二的) 즉화(卽化)를 이루고 있는 것이 진여의 본성(眞如本性)이며, 일체법의 참다운 본성인 법성(法性)이다.

이런 진여본성으로서의 ‘법성이 분별을 떠난 지혜로운 마음 중에 현재하는 것’을 일러 성기(性起)라고 한다. 다시 말해 진여가 본래대로 드러나는 방식, 진여인 법성이 마음속에 현현하는 사태, 즉 법성성기(法性性起)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여로서의 법성은 생멸과 불생불멸의 불이적 즉화이므로 ‘생은 곧 불생의 생(不生生)이고, 불생의 생은 바로 부주(不住)의 뜻이니, 부주는 곧 중도라는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생과 멸, 생과 불생 그 어디에도 자성을 두어 머무르지 않는 무분별과 무집착의 중도가 진여의 참 모습이라는 뜻이다. 무자성(無自性)과 무주(無住)를 본성으로 하는 이곳에서는 어떠한 자성적 분별이나 집착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성기는 ‘일어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것(不起爲起)’이라고 한다. ‘무자성의 이치가 연기하는 곳마다 현현하니, 그 현현함을 취하여 다만 성기라고 이름하나’, 성기는 곧 불기(不起)인 것이다. 즉 진여로서의 법성의 드러남(性起)은 분별 집착하여 머무름의 드러나지 않음(不起)인 것이다.

그런데 진여인 법성은 인간의 마음에서 드러난다. 아울러 성기는 곧 불기이므로 성기에서의 마음은 무분별심이고 무집착심이며, 무주심(無住心)이다. 무주심이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내는 마음(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서, 분별 집착하여 머무르는 마음이 사라진 무심(無心)이며, 이 무심이 진정한 마음, 즉 진심(眞心)이다. 이런 무심으로서의 진심은 본래의 진여법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성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분별과 분열이 불이적으로 즉화된다. 이렇게 일체를 전일적인 총체로 수용하는 마음이 바로 일심(一心)이다. 이러한 일심 상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人)과 사물(法), 주관(能)과 객관(所), 물질(色)과 정신(心) 등으로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一乘法界)’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성기란 일승법계를 밝히는 것이니 연기의 극치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법계(法界, dharma-dha?u)라고 할 때, 그 계(dha?u)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야기하다’ ‘놓다’는 뜻의 dha貶【?유래한 dha?u는 ‘야기하는 근원(因, 性)’과 그런 근원에 의해 ‘야기되어 놓여진 것(分齊, 가지런히 나누어 가짐)’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모든 존재자의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으로서의 연기성이나 진여본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법성――법성 역시 원어는 dharma-dha?u이다――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에 비해 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연기라는 원리하에 마치 하나의 가족이나 종족처럼 공존하여 모여 있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연기한 제법(pratl?yasamutpanna?dharma?.)’, 즉 일체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법계란 법성을 본성으로 하여 드러나는 일체법인 것이다. 그런데 법성은 곧 진여본성인 이상, 법계는 불이적으로 즉화되는 전일적 총체성을 본성으로 하는 조화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화로운 총체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이다. 사사무애법계는 사법계와 이법계와 이사무애법계 다음에 오는 법계 연기의 궁극적 단계이다.

여기서 사법계(事法界)란 사건과 사물(事)이 서로 다른 독립적인 대상으로 드러나는 차이성의 세계이고, 이법계(理法界)란 사건과 사물 이면의 추상적인 보편 원리(理)가 발견되는 동일성의 세계이며,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란 ‘원리에 의해 사건이 이루어지고(依理成事)’ ‘사건을 통해 원리가 드러나는(事能顯理)’ 차이성과 동일성의 공존 세계를 말한다. 이에 비해 사사무애법계란 사건과 사건이 완전히 자재하고 융섭하는 총체성의 세계이다. 여기에서는 차이가 차별로 되지 않고 각자의 고유성이 발휘되면서도 전체와의 조화를 이룬다. 마치 인드라의 구슬 그물에서 각각의 구슬들 속에 모든 구슬이 반사되어 나타나고,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모든 거울들이 각각마다 불상 특유의 모습을 빠뜨리거나 비뚤어뜨림 없이 모두 반사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무한 반사를 통해서 부분과 전체가 상호 침투(相入)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하나의 사물은 고립된 부분이 아니라 전 우주와의 관계망 속에서 그 우주 전체를 반영한다(一中一切 多中一).

이와 같은 조화는 오직 일체를 전일적인 총체로 수용하는 일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일심은 곧 본래의 진여본성과 법성을 드러낸 것이므로 마음의 본질은 진여본성으로서의 법성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통해 진여본성으로서의 법성과 공성으로서의 연기성을 깨우칠 수 있다는 원초적 가능성 속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을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 내면의 본래적 성품을 바로 보아 단박에 부처가 된다는 것이 곧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고, 이것이 선불교의 기본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설명한 진여와 성기를 하이데거의 존재 및 발현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진여가 본래대로 드러나는 방식이 성기이고, 성기 속에서 진여는 인간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존재가 본래대로 드러나는 방식이 발현이고, 발현 속에서 존재는 인간의 사유와 공속한다. 따라서 진여가 인간의 마음 중에 현현한 것으로서의 성기는 일체를 전일적 총체로 받아들이는 일심의 구현태로서, 인간과 사물,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등으로 분열되지 않는 무분별의 경지이다.

또한 존재와 인간 사유의 공속성으로서의 발현은 양자가 동일자로 합일된 상태로서, 형이상학적 표상 작용상의 주객 대립 이전의 근원 사태이다. 그런데 성기에는 불기라는 독특한 성격이 포함되어 있지만, 불기는 무주와 무집착을 통해 오히려 진여 법성의 중도적 성격을 부각시켜 준다. 마찬가지로 발현에는 탈현이라는 독특한 성격이 포함되어 있지만, 탈현은 물러남과 유보를 통해 오히려 존재의 역운성과 현존성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이렇게 볼 때, 일체의 진상인 진여와 존재는 인간의 마음과 사유 속에서 하나가 되어 공속적으로 드러나며, 그렇게 드러난 근원적 현출 사태(성기, 발현)는 그 어떤 작위적 분열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작위적 분열이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자성적 분별과 존재자적 표상을 통한 집착과 지배가 배제될 것이므로 산은 산으로서 그 자신의 고유한 실상을 드러낼 수 있다. 이때에 비로소 우리는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본래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5. 맺는 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대상화시켜, 그것을 나의 소유로 삼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이러한 요구가 성공적으로 달성될 수 있으려면, 수시로 변화해가는 저 사물 이면의 불변적인 어떤 것을 붙잡아야 할 텐데, 바로 이런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이고 삼세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이다. 이런 존재성과 자성에 근거하여 산은 산으로서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산은 산이다’라는 것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존재자성과 자성에만 매달릴 경우,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원초적인 사태나 일체가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기적 사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게 된다. 사태의 진상과 실상이 이처럼 존재자성과 자성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충격 장치가 바로 무이고 공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무와 공으로 바라볼 때, 더 이상 산은 종래와 같은 그런 산이 아니다. 이제 산은 장악과 집착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이렇게 철저히 무화되고 공화되는 그곳에서, 산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산은 여전히 산인 것이다. 그런데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이런 근원적인 현출 사태가 장악을 위한 이원화나 집착을 위한 분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호귀속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총체적 관계성의 시각에서 일체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제 이런 시각에서 자연과 세계와 인간과 사유를 규정해 보기로 하자. 불교에서 법성이라는 전일적 총체성을 본성으로 하는 법계는,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키거나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시키거나 함이 없이, 부분과 전체가 상즉 상입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편 하이데거에서 존재자의 존재라는 근원적 이중성을 본성으로 하는 퓌지스는, 인간에 의해 처리 가능한 근거나 이유와 상관없이 제 스스로 드러나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법계와 퓌지스로서의 자연은 목적론적 섭리나 기계론적 법칙을 통해 장악될 수 있는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조화를 이루는 전일적 총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에서 사사무애법계는 사건들의 차이성과 원리들의 동일성이 서로 갈등하는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이 발휘되면서도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는 장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에서 사물(Ding)-세계(Welt)는 주관에 의해 표상되기를 기다리는 고립적 대상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중자들 각각이 끝없이 서로를 반영함으로써 상호 귀속되면서도 각자의 고유함을 누리는 복합적 관여물들의 만남의 장이다. 따라서 사사무애법계와 사물-세계로서의 세계는 차이가 차별을 낳거나 동일이 획일을 낳지 않는, 그래서 고유한 다양성과 총체적 통일성이 상호 균형을 이루는 열린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볼 때, 인간의 본질은 본능적 욕망(愛)이나 분별적 이성(識)이나 맹목적 의지(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 법성과 공성에로의 개방 가능성인 불성에 있다. 한편 하이데거에서 볼 때, 인간의 본질은 동물성과 이성간의 기이한 합성태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 속으로 나가 서 있는 탈존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과 탈존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한 지배의 화신이나 욕망과 의지의 노예가 아니라, 진여법성과 존재의 진리에서 발원돼 나오는 일체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자신이 중심임을 주장하지 않는 탈중심의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자 의욕하는 표상적이고 계산적인 사유를 포기한 채, 존재의 진리가 발현하는 회역의 광장에 자신을 내맡기며(Gelassenheit), 분별 집착하여 머무르는 마음을 내려놓은 채(放下著), 그 어디에도 머물거나 걸림이 없는 무심의 진심인 일심에서 살아간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탈존과 불성을 본질로 하는 인간이 내맡김과 일심의 태도에서 세계를 사물-세계와 사사무애법계로 이해하고 자연을 퓌지스와 일승법계로 수용할 때, 우리도 저 산도 고유하게 드러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산은 여전히 산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이런 대긍정과 조화의 경지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과 불교의 사상은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동국대 강사. 논문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 등이 있고, 공저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 역서로는 《불교사상과 서양과학》 《서양철학과 선》 《불교철학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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