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우리는 일본학자들의 한국불교 연구를 식민주의사관이라는 전제를 갖고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 중에는 그렇게 해석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식민주의사관에 근거한 연구는 시대상황에 지배를 받던 일본 불교학자들이 한국불교를 보려 했던 해석방법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은 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주관하에 한국에 대해 다방면으로 조사 내지는 연구에 착수했다. 불교에 대한 조사 내지 연구 역시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고 해서 식민사관에 근거한 한국불교 연구만이 그들 연구의 목적이고 전부는 아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는 한동안 주춤하다가 70년대에 들어서서 다시 본격적으로 연구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인물로는 원효와 의상, 균여, 지눌 등 화엄 혹은 화엄과 관련 있는 인물이 중심이 되었으며, 분야로는 불교미술과 대장경 등의 서지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현대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는 아직 편협한 시각이 존재하긴 해도 이전의 연구 토대 위에서 결과를 축척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한국불교를 중국, 일본, 티베트 불교 등의 동아시아 문화권 내에서 공시적으로 이해하려고도 한다. 대체로 현재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자는 한국불교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도 식민사관에 기준을 두고 그들의 연구를 보는 시각을 벗어나, 학문적인 면에서도 공정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들의 연구를 넘어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에 본고는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성과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취지에서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일본의 한국불교에 대한 인식의 흐름을 학자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근대 이전 일본불교의 한국불교관

백제가 552년(혹은 527년)에 일본에 불교를 전래하고, 불교미술을 비롯하여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일본의 쇼토쿠(聖德) 태자(574~622)의 스승이 고구려의 혜자(慧慈)였다는 것도 상식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초기불교가 백제불교와 고구려불교의 영향하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일본에 이름은 남긴 한국불교의 승려들은 많다. 예를 들어 혜관(慧觀)은 일본에 삼론종을 전하였으며, 백제의 관륵(觀勒)과 도장(道藏)이 각각 삼론과 성실에서 일본에 이름을 전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선신니(善信尼)는 백제에서 정식으로 수계를 받고 귀국하기도 한다. 이처럼 당시 한반도는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제공하는 가장 가까운 문화적 선진국이었다.

일본은 나라(奈良)시대(710~784) 중기가 되면 중국에서 직접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사경(寫經)으로 나타나며, 나라시대 말기에서 헤이안(平安)시대 초기에 걸쳐서 활약한 천태종의 사이쵸(最澄 767~822)와 진언종의 구카이(空海 774~835)는 중국에서 직접 배우고 와서 일본적인 종파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화적으로 뛰어났던 신라불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본에서 한국불교를 보는 시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자료로서는 헤이안 초기 부안(豊安)의 《계율전래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천장육본종서(天長六本宗書)’의 하나로서 칙명을 받아 천장(天長) 7년(830)에 율종의 전통을 기입한 것인데, 여기서 부안 자신의 계율사관이 나타난다. 부안은 일본의 계율사를 전체를 4문으로 나누는데, 그 중 제3문이 <백제전왜(百濟傳倭 : 백제, 일본에 전하다)>이고 제4문이 <당전일본(唐傳日本 : 당, 일본에 전하다)>이다. 비록 부안은 중국에서 감진(鑑眞)이 도래한 후에 계율다운 계율이 성립했다고 서술하지만, 부안이 불교사를 보는 시각에 한국을 넣었던 것은 헤이안 시대의 한국불교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의 연구를 보면 실제로 어느 정도 한반도의 불교 문헌이 일본에서 중시되었으며, 얼마나 사경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에 사경된 한반도의 문헌은 대부분이 신라의 문헌이다. 신라불교는 일본불교가 성장하는 데 중국불교 못지 않게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신라불교를 중시했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9세기에 활약한 천태종의 엔친(圓珍, 814∼891)은 5년간 중국에 유학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가교상동이집(諸家敎相同異集)》에서 화엄의 고조(高祖)는 중국의 법장(法藏)과 신라의 원효(元曉)라고 명시한다. 이처럼 일본불교는 신라불교를 선진 학문으로서 인정하여 배우려고 하였다.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친 신라의 승려로서는 원효 이외에 법상종의 서명사(西明寺) 원측(圓測)과 분황사 현륭(玄隆), 정토종의 법위(法位)·의적(義寂)·경흥(憬興), 다양한 고적기(古迹記)를 저술한 태현(太賢) 등이 있다.

필자가 수업중에 들은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다이렉트로 문화를 수입하고자 견당사(遣唐使) 등을 보내서 불교 원전 등을 입수해 그것을 직접 이해하려 했지만, 견당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오히려 신라 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주석서가 없으면 원전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대체로 가마쿠라(鎌倉)시대까지 이어진다. 이와 같이 일본은 문화적 선진국인 한국을 통해서 중국문화를 이해하였던 것이다.

일본 불교학자들이 한국불교를 모범으로 삼은 예는 몇 가지 더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제일 많이 알려진 것은 가마쿠라시대의 묘에(明惠, 1173~1232)가 원효와 의상을 조사(祖師)로 모셨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120년에 가쿠쥬(覺樹)는 고려에서 수백여 권의 불교 전적을 수입하며, 또한 묘에의 스승이기도 한 인화사(仁和寺) 화엄원(華嚴院) 케이가(景雅, 1103~1189?)는 의천의 《원종문류(圓宗文類)》와 《교장총록(敎藏總錄)》을 갖고 있었다. 케이가는 묘에에게 《오교장(五敎章)》을 가르친 당시 유명한 화엄학장(學匠)으로서 제자에게 수계할 때에 보시로서 《원종문류》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고려의 문헌이 일본 승려 사이에서 존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가마쿠라시대까지도 일본불교는 한국불교를 선진문화로서 이해하였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가마쿠라시대가 지나고 아시카가(足利)시대에 들어서면 상호간의 학문적 소통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다만 일본에서는 조선왕조에 사신을 보내 고려대장경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들은 대장경을 얻어 가기 위해 심지어 단식투쟁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본의 연구는 이미 1911년 후루타니 기요시(古谷淸)에서부터 볼 수 있는데, 무라이(村井章介)의 연구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를 사칭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근대 이전까지 일본은 한국불교의 선진문화를 배우고 얻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3. 근대 이후 일본불교의 한국불교 인식

1) 한국 포교의 시대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한국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190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때부터 메이지가 끝나는 1912년까지 간간이 한국불교에 관한 글들이 나온다. 메이지시대의 일본은 국가의 에고이즘을 통해서 문명의 강국을 추구하던 시대이다. 요컨대 문명의 논리와 힘의 논리가 추구되던 시기이며, 무력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을 교화 내지 덕화를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던 시대이다. 이제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불교는 배워야 할 선진불교가 아니라 포교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에 쓰여진 가토 분쿄(加藤文敎)의 《한국개교론(韓國開敎論)》이 이러한 사정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팽창하는 선진국의 명예를 안고 우리 제국의 신민(臣民)으로서, 세계 불교의 중심인 우리 제국의 불교도로서 이웃 나라 한국을 포교할 필요가 있음을 일반 식자(識者)가 인정하는 바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은 일본에게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불교 문물·미술·기술·예술·건축 등을 전해주어 일본을 비익(肥益)하게 한 은혜의 나라인 만큼 그 당시 불교가 땅에 떨어지고 외교도(外敎徒 : 기독교)에 탈취되기 직전의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해내기 위해 일본의 불교도가 포교책을 강구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1902년부터 1910년 5월까지 한국에서 활동했던 미노와 세이치(三輪政一)는 한국에서의 기독교인의 종교활동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일본의 불교종파에게 한국 포교를 부추기는 글을 쓰며 구체적으로 한국 포교전략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한국 경영을 위한 제안인데, 1910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아오야나기 난메이(靑柳南冥)의 《조선종교사(朝鮮宗敎史)》에서의 불교 인식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대의 일본의 한국불교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즉 한국불교는 이미 쇠퇴하였으며, 한국의 승려들은 무지하고 교양이 없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에 의해 교화 내지 지도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의 포교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불교의 현상을 기준으로 한국 사찰에 고정적 신도집단이 없으며 장제(葬祭)를 관장하는 일도 없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이것을 불교의 사회성 부족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불교의 한국 포교전략은 당연히 정치적 논리와 맞물려 있었다. 아베(阿部金鼎)는 남인(南人) 계통이 한국을 지배해야 흥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조선은 북인(北人: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이 지배하였기 때문에 망하였으며, 옛날에는 신라이었고 당시는 일본인인 남인이 한국을 경영하는 것이 희망적이라는 망언까지 할 정도였다.

메이지시대의 한국 포교에 대한 흐름을 정리한 에다(江田俊雄)에 따르면 초기는 정토진종(淨土眞宗) 오타니파(大谷派) 본원사(本願寺)와 일연종(日蓮宗)이 활동한 시기이고, 중기는 청일전쟁 직후로서 혼파(本派) 본원사와 정토종이 활동한 시기이며, 말기는 러일전쟁 후에 진언종(眞言宗)과 조동종(曹洞宗), 임제종(臨濟宗)이 개교(開敎) 활동을 벌이며 합동해서 한국불교를 일본화하는 사건이 생기는 등 각 종파가 한국 개교를 더욱 활발히 전개하는 시기이다.

일본에서는 7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일본의 개교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미나모토 히로유키(源弘之)는 일본의 한국 개교는 그 발단부터 일본 식민지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따라서 한국인의 반발감을 해소하는 동화정책에 비중이 두어진 역사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이어 미토 료(美藤遼)와 다카하시 마사루(高橋勝), 엔도 하지메(遠藤一)의 연구도 일본불교의 한국 진출이 한국인을 차별화하며 황국신민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고, 침략적인 의도에서 발단되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최근에도 이러한 비판적인 관점은 유지되어 구도 에이쇼(工藤英勝)는 조동종이 조직적으로 일제강점에 관계했던 점과 한국 포교에서 한국 승려와 민중에 대해 차별의식을 가졌던 점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주목하였다. 일본불교의 한국 포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적지만, 근대 일본불교 흐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최근에 미국에서《선(禪)과 전쟁(Zen at war)》이라는 책이 간행되고 일본어로 번역되었으며,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가 이에 대해 서평을 발표하는 등 일본에서 그들의 근대불교사를 재고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한국불교 연구의 시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한국불교에 대한 관심은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 이해되고 추진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서 한국불교에 대해서 학문적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나타난다. 그러한 연구는 다이쇼(大正)시대에서 쇼와(昭和) 초기에 걸쳐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학자는 1929년에 《이조불교(李朝佛敎)》를 저술한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와 1928년 경성불교전문학교에 부임하면서 한국불교사에 관한 논문을 수십 편 남긴 에다 토시오(江田俊雄)이다. 그리고 1930년에《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를 완성한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과 1922년부터 한국을 답사하여 고려대장경과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대해서 방대한 저술을 남기는 등 고려불교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오야 토쿠죠(大屋德城)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 다카하시의 연구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享, 1877∼1966)는 1902년에 동경대 한학과(漢學科)를 졸업하고, 1904년에 대한제국정부 초빙으로 한국에 건너온다. 그 후 조선총독부 촉탁위원 등을 역임한 후에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개교에 즈음하여 교수가 된다. 동경대에서 한학을 전공한 다카하시는 한국사상 전반에 관해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 중 불교와 문학을 제외한 연구성과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권순철에 의해 이미 발표되었다. 그에 따르면 다카하시의 학문 연구는 식민지 한국의 지배·관리라는 정치적 목적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다카하시의 한국사상관은 전체적으로 한국사상의 종속성을 강조하며, 한국사상의 특징을 ‘고착성’과 ‘비독립성’으로 파악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분석은 다카하시의 불교관에도 기본적으로 상통한다. 다카하시는 1912년에 한국불교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다. 즉 그는 오대산사고(五台山史庫)를 조사할 때에 한국 산중(山中)사찰의 진면목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의 한국불교관에서 일전하여 본격적으로 한국불교 연구에 착수할 것을 다짐한다. 이때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종교사, 특히 신앙사로서의 불교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사대문 안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일본에 감사하며 총독부 정치를 칭송하는 한국의 승려들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할까 하는 문제는 정치가들 손에 달려 있다고도 한다. 이처럼 다카하시의 불교연구의 근저에는 역시 식민사관이 그 배경에 있다.

구체적으로 다카하시는 한국불교는 유학과 마찬가지로 중국불교의 하나의 분파라고 본다. 이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인적·자연적 관계, 그리고 학문적으로 맺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한국불교에 특히 독창적 자료는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은 다카하시의 한국 부재론(不在論)은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에 대한 전형적 가치판단이다. 그의 식민지 한국 통치의 이념은 《이조불교》 서언(序言)에서 볼 수 있다. 즉 그는 자신의 한국사상사 연구가 한국인의 정신적 사실을 찾아내는 작업이며, 이것은 단지 학문적인 연구에 머물지 않고 정신적 방면의 통치에 도움이 될 것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1917년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의 제목이 ‘조선의 교화와 교무행정’이었다는 데서도 그의 연구의 기본적 성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대산사고를 조사하던 중 한국의 산중사찰 승려들의 생활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은, 그가 한국불교를 학문적으로도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불교 연구에 관한 학문적 연구 성과는 1929년에 《이조불교》로 마무리지어진다. 《이조불교》는 다카하시가 구상했던 조선사상사 대계(大系)의 제1책에 해당하며, 그가 1912년부터 발표한 논문 내용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식민주의사관이라는 사유구조가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그의 이중적 해석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조불교》의 서언에서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사상 및 신앙사(불교사)는 전부 중국에 종속된다.”고 식민주의사관에 근거하여 한국사상의 실체를 명료히 정의하면서도, 내용과 구성면에서는 한국인의 사상 및 신앙사(불교사)에 중국과 다른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원리는 중국에의 종속성, 실제는 한국 독자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한국불교에서의 교리 발달은 다양한 학문을 겸하는 신라의 원효와 화엄학을 으뜸으로 하는 의상에서 그 정상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 발달의 독특성을 고려 제관(諦觀)의 천태학까지 인정한다. 이후 의천, 지눌에 이르러서는 일시 교관(敎觀)을 드날리긴 했어도 중국 조사(祖師)의 교와 관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대해서는 고려불교의 답습조차 힘든 상태여서 조선시대에 불교교리는 조금도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한편, 조선시대에 대해서는 종교사의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비록 교리발달사의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독특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구체적 종교사의 성쇠라는 측면에서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으로 보자면 조선시대 불교는 오히려 가장 톡특한 지위를 점한다고 해석하며, 따라서 일본의 불교연구자에게는 미지의 새로운 자료가 될 것임을 확신하였다.

이처럼 순수 종교의 입장에서 조선시대 불교의 사회적 기능의 변천과 종교현상 등을 서술하는 것이 다카하시의 관심이었다. 이 책에 대한 에다의 서평은 이와 같은 다카하시의 관점을 잘 정리하였다. 에다는 서평에서 《이조불교》의 의의를 4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한국불교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 주었으며, 둘째, 교리발달사와 교단사를 아울러 전개하는 문화사라는 점에서 불교사 연구방법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셋째, 본서가 당시 한국불교도에게 계몽적인 역할을 충분히 한다고 평가하며, 넷째, 문체에 대해서도 호평하고 있다.

이처럼 다카하시의 연구는 한국 통치를 위한 목적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한국불교를 보는 객관성도 견지하고 있다. 총독부에서 심전(心田)개발 확산에 주의를 기울일 때, 1936년 3월의 《조선》 250호는 심전개발 특집호로 간행되었다. 여기에 다카하시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의타성〉이라는 글을 쓴다. 여기서 그는 당시 한국불교의 무기력 내지 문란한 상황을 보면서, 그것이 한국불교의 의타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따라서 승강(僧綱)을 바로잡기 위해 율원을 일으킬 것과, 일반인들의 불교 인식을 확대하기 위해 지식인에게 불교학 지식을 보급할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 승려들이 일본에 유학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국불교 스스로가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유는 일본불교는 단지 학문적 지식만을 익힐 뿐 종교가로서의 수행과 정조가 완전히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카하시의 한국불교 이해는 식민주의사관에 의거하여 철저하게 한국불교를 폄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객관적 해석을 지향하는 이중성을 드러난다. 이것은 총론과 각론에 비유할 수 있다. 즉 다카하시는 총론에서는 식민주의사관에 철저하면서도, 각론에서는 학문적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본 조선불교의 정리가 가능했고, 이후 한국불교 연구의 중요한 학문적 토대가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에다의 연구
다카하시와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사관에 해석의 기준을 둔 학자로서 에다 토시오가 있다. 에다 토시오(江田俊雄, 898∼1957)는 1922년 조동종(曹洞宗)대학을 졸업하고 1926년에는 동북(東北)대학 재학중에 우이하쿠쥬(宇井伯壽), 스즈키 무네타다(鈴木宗忠)에게 수학하고, 1928년 경성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에 부임한다. 1932년 《불교연감》을 보면, 그가 불교개론, 불교서사학, 불교미술, 일본불교사, 인도철학사를 담당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한국불교사 전문이 아니다. 실제로 에다가 발표한 한국불교 관계 논문이 1933년부터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그가 한국불교에 관심을 둔 것은 조선불교사학회의 회원이 된 이후이다. 그는 고서를 수집하고 노사(老師)를 방문하며 사적을 답사하는 등 한국불교의 근본자료 수집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한국불교 연구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권상로(權上老) 함께 조선왕조실록에서 불교 관계 기사를 20권으로 정리하여 1935년에 출판한 것은 큰 업적이 되었다. 그의 연구 발표 및 미발표 논문이 1권으로 정리되어 1977년에 일본에서 간행됨으로써 그의 한국불교사에 대한 관심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에다는 기본적으로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종속적인 측면에서 결론을 내린다. 또한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의 서평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불교 연구는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그는 한국불교의 흐름을 특별한 근거 없이 부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눌의 실천방법에 대해 한국불교의 타협, 혼합, 잡란(雜亂)의 위기가 배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그렇다.

그는 미발표 원고인 〈조선불교 고찰서설〉에서 한국불교의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한국불교는 교리적으로나 종파적으로 단일적이면서도 혼합적이다. 에다에 따르면 여기서 단일적이라 함은 선과 교가 통합되어 구별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한국불교의 조화적 혹은 통합적 성격에 기인한다고 한다. 혼합적이라 함은 한국불교가 샤마니즘 혹은 도교신앙과 섞이어 절마다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는 혼합은 통일의 과정이긴 하지만, 힘을 잃을 때는 잡박하게 타협하고, 힘을 얻을 때 개성을 발전시켜 분열로 치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 사원 가람의 위치가 산림적이고 관광적이다. 에다는 절이 산에 있는 것은 동양적 명상의 장으로서는 어울리지만, 대중포교에는 부적격이라고 평가한다.

셋째, 은둔적이고, 여성적이다. 은둔적임은 조선시대의 불교 박해와 본래 주술적이고 기도적인 종교적 성격에도 기인한다고 하면서, 이럴 경우 독선적, 자기적, 소극적인 불교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는 여성의 신앙대상이었다고 한다.

넷째, 민족적, 국가적이다.

이러한 네 가지 평가 위에 에다는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와 마찬가지로 중국불교를 모태로 하나, 일본불교처럼 민족에 소화되어 독특한 색채를 띤 불교에 이르지 못하고, 언제나 중국에 의존하여 중국불교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이와 같이 그는 한국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많은 개별 논문을 남겨 한국불교 연구에 학문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불교를 모범으로 하여 한국불교를 인식하려 했으며, 그 배경에는 식민주의사관인 종속사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같은 시대에 활동하면서도 비교적 식민주의사관을 적게 투영하며 한국불교 연구에 몰두한 두 학자를 소개한다.

(3) 누카리야의 연구
《이조불교》가 출간된 다음해인 1930년에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 1867~1934)의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가 간행된다. 누카리야의 호는 불산(佛山)이고, 조동종(曹洞宗) 승려이다. 그는 1893년에 경응(慶應) 대학을 졸업하고, 1903년에 조동종 대학강사가 되어 영어를 담당한다. 1912년에는 3년 동안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遊學)하며 일본 조동종의 선풍을 구미에 알리는 영문서를 여러 권 집필하기도 한다.

1925년에는 동경대학에서 《선학사상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이것은 그의 명저가 되었다. 그가 한국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구택(駒澤) 대학에서 조선선교사를 강의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929년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한국 본산(本山)을 방문하여 사적과 사찰의 현상을 조사한 후, 1930년에 《조선선교사》를 간행하였다. 이후에도 구택 대학에서 조선선교사를 강의하였다.

그의 《조선선교사》는 선종사와 교학사를 아우르고 있지만 선종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방대한 《선학사상사》를 저술하기도 하는데, 이시이 슈도(石井修道)는 《조선선교사》에는 전자에 이용되어 있지 않은 《조당집(祖堂集)》이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은 오야 토쿠죠(大屋德城)의 해인사판 장경 연구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누카리야는 ‘조선선교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불교가 다분히 중국불교의 연장이기 때문에, 선종에 있어서는 중국의 선학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선학사상사》로 학위를 받고, 이듬해 출판한 누카리야가 ‘조선선교사’를 쓸 적임자임은 에다의 서평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알 수 있다. 누카리야의 《조선선교사》는 제1편이 교학 전래의 시대로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2편은 선도(禪道) 흥륭의 시대로서 신라말의 선(禪)까지를 다루고 3장으로 구성되며, 제3편은 선교 병립의 시대로서 고려시대 말까지의 선승(禪僧)을 중심으로 서술되며 12장으로 구성된다. 다음 제4편 선교 쇠퇴의 시대로서 일제강점기 전까기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한 시바타(柴田道賢)의 비평적 서평이 있다. 시바타는 《조선선교사》의 서술 순서대로 요점을 파악하여 정리하며 누카리야의 서술 태도에 대해서, ① 민간적인 토양에서 발생한 신앙을 소홀히 다루었으며, ② 논해진 승려들은 국사, 왕사 등 타협적인 종교가들만을 대상으로 하며, 중국의 《전등록(傳燈錄)》이나 《고승전》을 모방하여 표면적으로만 기술함으로써 한국의 독자적인 선학이 천명되지 못하였으며, ③ 오직 선학을 창도한 종교가의 입장에 진력함으로써 정확한 고증이나 학문적 의문 등을 소홀히 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편 이시이 슈도(石井修道)는 누카리야가 원전 자료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서가 한국불교사 전체를 다룬 고전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누카리야는 시바타의 비평처럼 선학을 창도하는 데 힘을 다한 조동종의 선학자로써 〈서(序)〉에서는 “다만 바라는 바는 불일(佛日)이 다시 해동(海東)의 하늘에 오르고 조사의 달(祖月)이 길이 청구(靑丘)의 밤을 비추는 것이로다.”라고 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식민사관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가 개인적으로 조선총독부와 관련이 없다는 것도 이유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의 일본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수 학문적인 관점에서 한국불교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학자로서 오야 토쿠죠가 있다.

(4) 오야 토쿠죠의 연구
오야 토쿠죠(大屋德城, 1882∼1950)는 진종(眞宗) 오타니파(大谷派)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에 와세다(早稻田)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부터 《망월불교대사전(望月信亨佛敎大辭典)》 등의 편집에 종사하며 주로 일본불교에 대해서 논문을 발표한다. 그가 한국불교 연구에 연을 맺게 된 것은 40세가 되던 1922년에 4개월 동안 한국을 방문하여 불교사적을 답사할 때부터로 보인다.

그는 1923년에도 4개월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불교 사적을 답사한다. 그 해 의천에 관한 논문을 처음 발표한다. 그리고 1926년에는 해인사 대장경에 관한 연구성과를 발표한다. 1931년에는 오타니(大谷) 대학 교수가 되고 당시 경성제국대학 등의 강사를 겸임한다. 그 후 16년 뒤인 1947년에는 65세라는 장년의 나이로 동경대학에 〈고려속장조조고(高麗續藏雕造攷)〉를 제출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처럼 오야는 고려대장경과 의천의 《교장총록》 연구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일본에서의 고려시대 대장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한국건축조사보고서에서 그 존재를 알리고 나서이다. 즉 일본 나름의 해인사 고려대장경의 발견 아닌 발견으로 충격을 받은 1904년 이후의 일이다. 이후 고려대장경에 대한 연구는 1920년 중반까지도 줄곧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야는 이전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해인사의 보판(補板) 및 잡판(雜板)에 관한 불교문헌학상의 가치를 논한 〈조선해인사경판고(朝鮮海印寺經板攷)〉를 1926년에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오야는 보판에 관한 각 문헌의 성격을 밝히면서, 문헌학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지엄(智儼)의 《수현기(搜玄記)》와 신라 및 고려의 제(諸) 문헌을 꼽는다. 마찬가지로 잡판 중에서도 가치 있는 문헌을 선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몇 개의 논문에서 고려대장경 연구 등 판본 연구에 몰두한 오야는 1937년에는 고려대장경과 관련이 깊은 의천의 《교장총록》을 방대하게 연구한 《고려속장조조고(高麗續藏雕造攷)》를 편리당(便利堂)에서 간행한다. 이 저술은 약 65년 전의 연구이지만 현재까지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에다 토시오(江田俊雄)의 비평이 있다. 에다는 우선 오야가 지적한 《교장총록》의 장단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선 장점으로는 거란과 송대의 찬술을 많이 채록한 것이 거론되었고, 단점으로는 채록의 순서 및 분류가 정리되지 않은 점과 당시 성행했던 선종(禪宗) 찬술이 전혀 채록되지 않았으며, 일본인의 찬술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에다는 선종에 대해 포용적이지 못하다는 《교장총록》에 대한 오야의 비판에 대해서, 의천이 활동할 당시에는 화엄과 선이 대립해 있었다는 고려불교계의 사회상황을 고려해서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고 비평적으로 논평하였다. 또한 천태에 대한 의천의 관심 역시 당시의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며, 오야가 화엄에 중점을 너무 둔 나머지 천태에 대한 언급이 소홀했다고 비평하고 있다.

비록 에다의 비평적 논평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남긴 대장경 연구에의 족적은 의천에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연구를 정리하면서 미비한 연구를 추가하여 집대성하는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고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오야 역시 한국불교에 대한 식민주의사관이 선입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고려속장경조조고》의 서론에서 고려 때 불교가 가장 극성하여 각 종이 발전하고 다투어 불교 연구를 했어도 대국적으로 보면 대개 중국불교의 지파로서 독자적 광채를 띠는 것을 볼 수 없으며 말하자면, 교와 선 모두 중국불교의 이식(移植)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창작성의 결여는 본래 한국인의 민족성으로 유래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오야는 다카하시와 마찬가지로 한국 민족의 고착성, 비독립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국적인 측면에 한정된 것이다. 오야는 뒤이어서 “그렇지만 오직 하나 대륙(중국)과 비교해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대장경의 조조(雕造)이다. 나아가 의천의 《교장총록》의 간행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공전의 뛰어난 불사로서, 고려 문화를 대표하고, 심히 사방의 제 민족을 압도하는 일이로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서문에서 식민사관을 배제한 채로 고려시대 문화는 여러 방편에 걸쳐 이채를 띠었으며, 대장경과 《교장총록》 조조에 이르러 그 정화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개별적인 불교 내용면에서만큼은 고려불교의 독자성을 인정했다고 보아도 부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오야는 당시의 한국불교 연구자들이 일본불교를 모범으로 삼아 한국불교를 진단하거나, 일본불교 연구자들의 한국과의 관련성을 깊이 다루지 않는 풍토에서, 그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불교가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에 영향을 미친 사실을 구체적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따라서 오야는 식민주의사관을 염두에 두고 연구에 임하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이상과 같이 4인의 한국불교 연구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네 사람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식민사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후자의 누카리야와 오다에 한해서는, 그들이 보여 준 한국 민족의 고착성 내지 한국불교사상의 부재론이 특별한 의미를 갖기보다는 비판 의식 없이 수용한 상식일 수도 있다. 해방을 맞이한 뒤 50년 이상이 경과한 지금에도 우리는 이러한 연구들을 이용할 뿐 적절히 평가하지 않고 있다. 위 4인의 연구를 넘어서는 이렇다 할 통사적(通史的) 연구 성과 등이 없는 것은 필자를 비롯하여 한국불교를 전공하는 불교 연구자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4. 현대 일본불교의 한국불교에 대한 인식

일제강점기의 학자들이 편협된 한국불교사관을 전제로 연구에 임했다면, 현대의 일본학자들은 어느 정도 불교가 인도·중국·일본으로 이어진다는 삼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사관은 일본 가마쿠라시대의 승려 교넨(凝然, 1240~1321)이 만년인 72세에 저술한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統緣起)》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원효와 현륭을 비롯한 신라의 유식학자를 다수 인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동대사(東大寺)에서 최초로 화엄을 강의한 심상(審祥)을 신라승으로 인식하는 교넨이 불교사관에서 한국을 제외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한국을 제외한 삼국사관을 발표한 이후 동시대에 활약했던 니치렌(日蓮, 1222~1281)이 이미 사용하는 것처럼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한 남도(南都)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은 사실이다. 다무라 엔쵸(田村圓円澄)가 증언하듯이 일본불교사를 전공하는 학자치고 한국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한국불교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더욱 드물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교넨의 삼국사관의 영향이다.

한국을 제외하는 삼국불교전통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한국불교가 중국불교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8년에 간행된 《강좌 중국불교》의 제4권에는 〈조선의 불교〉가 중국불교의 틀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1976년에 간행된 《아시아불교사·중국편 Ⅳ》에서 제1장 <한반도의 불교>가 역시 중국불교 틀에서 다루어진다. 1977년에 간행된 《인도·중국·일본불교통사》에서는 제4장에 〈한국불교〉가 독립되어 있으나, 8쪽의 짧은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시 교넨 이래의 삼국불법전통사관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국불교가 삼국불교전통 아래에서 제외되는 것은 각 종파의 통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1913년에 간행된 가메야 세케이(龜谷聖馨)·가와노 호운(河野法雲) 공저의 《화엄발달사(華嚴發達史)》와 그 2년 뒤인 유스기 료에이(湯次了榮)의 《화엄대계(華嚴大系)》에서 한국불교는 기본적으로 중국 화엄 흐름의 일부 속에서 서술되고 있다. 이후 유스키는 《화엄대계》의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평가되는 《화엄학개론(華嚴學槪論)》에서 교리사 부분 전 8장 중 제6장 〈조선의 제사(諸師)〉를 마련함으로써 진보된 화엄사관을 보여주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중국불교의 이식이라는 관점에 머물러 있다. 정토교리사를 정리하여 1942년에 간행된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의 《중국정토교리사》도, 같은 해 간행된 다카미네 료슈(高峰了州)의 《화엄사상사》도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불교사상을 중국불교 흐름 속에 편입시켰다.

물론 이상과 같은 삼국불법전통을 일찍이 타파한 연구도 있다. 1944년 후키하라 쇼신(富歸原章信)의 《일본유식사상사》와 1956년 사카모토 유키오(坂本幸男) 《화엄교학의 연구》가 그것이다. 먼저 후키하라는 일본 유식사상을 해명하기 위해 일본 유식과 관련된 신라·고구려·백제불교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유식사상의 원류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서에서 “종래의 유식 전통을 기록하는 연구들은 교넨의 《삼국불법전통연기》의 설을 답습하지만, 그러나 이 기술은 조금 부족하다.(중략) 일본에의 유식 전래에 대해서는 단지 중국에서 전래했다고 말할 뿐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역시 신라에서도 전래했다고 보여진다.”라고 하여 교넨의 삼국사관을 답습하는 연구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일본불교사의 학문적 객관성을 견지하기 위해 한국불교를 다루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한편 사카모토는 화엄교학 성립 문제에서 〈신라 의상의 교학〉이란 목차를 설정하고 지엄(智儼) 다음에 위치시킴으로써 ‘중국화엄사상사 속에서의 한국 화엄’이라는 틀을 벗어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화엄사상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어 한국 화엄이 그 해석의 열쇠로 떠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카모토의 연구를 전후로 통사적 연구에서 한국을 다루는 연구는 거의 볼 수 없으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불교를 중국불교 틀 안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은 70년대까지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이후 한국불교의 독립성이 강조되고 그 독특성이 인정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 사람의 연구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에타니 류카이(惠谷隆戒 1902∼1979), 다무라 엔쵸(田村圓澄 1917∼),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1927∼2001) 등이 그들이다.

에타니(惠谷隆戒)는 정토종 승려로서 신라 정토교와 천태교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1973년에 《정토교의 신(新)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논문에서 4개의 장에 걸쳐 법위, 원효, 의적, 경흥의 정토교를 다루고 있을 만큼 일본 정토교에서의 신라 정토교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였다. 그는 제자 아타고 쿠니야스(愛宕顯昌)를 원광대학교에 유학 보내면서 한국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제자가 한국에서 돌아오면 공저로 한국불교사를 출판할 계획을 세울 정도로 한국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에타니가 한국 정토교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58년에 의적의 《무량수경의기》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이다. 그가 복원한 신라 법위(法位)의 《무량수경의소》가 한국불교전서 2권에 실려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한국불교를 깊이 이해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무라(田村圓澄)는 1967년경부터 한일 불교교류사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유는 아스카(飛鳥)불교의 원점이 한국불교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수많은 저술, 공저 등을 저술하여 한일 불교교류사에 커다란 금자탑을 세웠으며, 현재도 활발히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그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불교연구자들이 한국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있는데, 다무라 자신은 일본불교사 전 6권 중에 제4권을 신라·백제에 할당할 만큼 일본불교사에서의 한국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다음으로 가마타(鎌田茂雄)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불교 전문가이다. 그가 한국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0년 한국 사찰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가마타의 한국불교 연구는 깊이가 있기보다는 개설적이다. 개설적인 내용이었기에 일본의 불교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한국불교를 접할 수 있게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교넨 이래의 삼국불법전통연기를 비판하며,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서 차지하는 한국불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한글 문헌을 해독하여 그 성과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지 않고서 한국불교사를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불교 연구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 세미나’를 주관하여 많은 일본학자들로 하여금 여기에 참여하게 하고 그 연구성과를 몇 권으로 간행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에 한국불교의 중요성 및 독특성을 인식시킨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 일부에서나마 한국불교의 독자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일본의 불교연구자는 교넨의 삼국사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자연히 식민사관도 멀리 하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그 성과가 요시즈 요시히데(吉津宜英)의 저술로 나타났으며, 1996년에는 교넨의 삼국불법전통관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중국·한국·일본에 걸친 화엄사상의 형성과 전개를 폭넓게 다룬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의 《화엄사상의 연구》로 이어진다. 나아가 이후의 관심은 동아시아 불교권으로 옮겨갔다.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와 기무라 키요타카(木村淸孝)가 함께 펴낸 《시리즈 동아시아불교》가 그 증거이다. 전 5권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인도불교와는 거리를 두고 중국·일본·한국·티베트 등을 하나의 문화권으로서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최근에 기무라 키요타카가 자신의 발표된 논문을 모아 《동아시아 불교사상의 기초구조》로 명명한 것도 이와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렇게 최근에 들어 일본의 한국불교사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불교에서의 한국불교에 대한 관심이 일본과 중국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2차적 수단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향은 일본에서의 한국불교 관계 논문의 편향성마저 낳았다. 즉 일본불교와 관계 깊은 한국불교만을 연구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측 연구, 화엄 연구, 정토 연구, 그리고 경전 간행에 관한 것이 많은 것은 이를 반영한다. 다카하시와 누카리야를 뛰어넘는 저술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경향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상대방의 불교를 전체적으로 연구하지 못하고 치우쳐 연구하는 경향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풍토는 어쩌면 한국을 제외한 삼국사관의 변형된 형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5. 맺는 말

이상과 같이 일본불교의 한국불교관을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별하였다. 무로마치(室町)시대까지 한국불교를 문화적으로 우수한 것으로 인식했던 일본불교는 메이지(明治)시대에 이르러 한국불교를 포교의 대상으로 간주하였으며, 포교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한국불교 연구를 서서히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이른바 식민주의사관에 기본을 둔 연구물이 나온다. 또한 해방 후에는 교넨(凝然)의 삼국불법전통연기관이 작용함도 보았다. 그리고 현재에는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와 중국불교를 해명하기 위한 2차적 수단으로 보는 삼국사관의 변형된 형태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한국불교 연구를 학문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 남긴 대작들이 아직도 빈번히 이용되고 있고, 현대에 남긴 업적들이 어느 면에서는 우리 연구를 앞지른다. 이를 무시하고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성과를 식민주의사관, 혹은 삼국사관 등으로만 해석할 때 우리는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에서의 중요한 학문적 성과를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연구를 넘어선 연구성과를 내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일본불교를 공정히 해석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쇼와(昭和) 초기에 활동한 일본의 연구자들이 남긴 대작을 꼼꼼히 읽어내고 분석하는 조그만 모임이 필요하다. 그 이전에 간행된 이능화, 권상로 등의 저술과 비교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한 시대를 뛰어넘는 한국불교사상사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일본불교를 연구해야 된다. 그럼으로써 상호의 불교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그들의 식민주의사관의 발상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왜 식민주의사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양국 불교의 동이(同異)도 점차 명백해지리라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한국불교학 결집이 있고, 일본인도학불교학대회가 동국대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그런 큰 대회에서야말로 일본불교를 독립부회로 설치하여 우리 연구자들과 일본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김천학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현재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박사과정(화엄학 전공).센슈(專修)대학 강사. 논문으로 <균여의 화엄일승의 연구-근기론을 중심으로><균여의 법화경관>,역서로 <화엄경문의요결문답역주>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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