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이슬람은 오늘날 약 10억의 신자를 가지고 있는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이다. 중동 지역은 어디를 가든지 기도 드리는 이슬람 신자와 사원에서 울려 나오는 기도를 들을 수 있다. 이슬람은 회교(回敎)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이슬람을 동쪽으로 전파한 회흘(回訖) 민족이라 붙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적 기원으로 보면 이슬람은 뛰어난 교조를 가지고 있는 종교 가운데 하나요, 지리적 분포로 보면 기독교, 불교와 함께 3대 세계 종교 가운데 하나며 신학적으로 보면 기독교, 유대교와 함께 3대 유일신교 가운데 하나다. 시대적으로는 세계의 종교 가운데 늦게 나타난 종교에 속한다.

이슬람(Islam)이란 이름은 ‘신에 대한 복종(Submission to God)’을 뜻하며 무슬림(Muslim) 혹은 모슬렘(Moslem)이란 말은 ‘복종하는 자(Those who submit)’의 뜻이다. 이러한 무슬림의 신조는 신앙증언문 “라 일라하 일라 알라, 무함마드 라술 알라(la illa ila?Alla? Muhammad rasu? Alla?: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신의 사자이다.)”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무슬림의 신조에 볼 수 있듯이 알라 이외에는 어떤 우상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슬람은 ‘종교와 세속을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를 바탕으로 이러한 그들의 신조에 반하는 무리들은 ‘성전(聖戰, jihad)’이라는 이름으로 가차없이 파괴하였다. 무슬림이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지로 세력을 넓히면서 그곳에 수용 발전하고 있던 이질적인 문화, 특히 불교나 힌두교 등의 불상이나 신상을 모시는 종교에 대해 갖가지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이슬람은 지난 3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원리주자 집단인 팔레반 정권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얀의 마애대불 파괴사건과 9월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진 미국 폭파테러를 자행함으로써 세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렇게 세간의 주목을 끈 이슬람은 역사 속에서 불교와는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양자 사이는 순연(順緣)의 역사였을까 아니면 악연의 역사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순연의 역사라기보다는 악연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슬람과 불교는 어떤 악연의 역사였을까?

우리는 이슬람과 불교와의 악연의 역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서도 자료의 부족으로 그들의 불교에 대한 만행의 실상을 낱낱이 다 밝힐 수는 없으나 가능한 사실적 근거에 의거해 인도, 동남아시아 그리고 최근에 파불(破佛)사건을 일으킨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악연의 역사 등의 셋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이슬람 세력의 성장과 인도 침입

1) 이슬람의 발생과 성장
이슬람의 교주 모하메드(Mohammed, 570∼632)는 AD. 570년 메카(Mecca)에서 쓰러져 가는 명문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메카는 아라비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나 사막 지방의 미신과 우상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은 ‘높이 존경받다’라는 뜻으로 남자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여졌던 이름이었다. 그의 생의 비극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압둘라(Abdullah)는 그의 탄생 며칠 전에 죽었다. 그가 여섯 살 때 어머니 아미나(Amina)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아홉 살 때 그 할아버지마저 죽자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 밑에서 자라며 그가 속한 코레이쉬(Koreish) 부족들과 똑같이 가축을 치고 장사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충실하고 진실했으며 열두 살 때 삼촌과 함께 대상 틈에 끼어 시리아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 전기가 된 것은 그가 25세 때에 메카의 부유한 과부인 15세 연상 하디자(Khadijah)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오직 딸 파티마(Fatima)만이 모하메드보다 오래 살았다. 모하메드는 하디자를 만나 경제적 안정을 얻고 명상과 종교적 관심을 더 가질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메카 근교 히라 산에 있는 동굴에서 며칠이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가 종교적인 각성을 경험한 것은 40세 되던 때였다. 히라 산의 동굴에 있는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알라(Allah)신의 계시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다. 3년 후 다시 두번째 계시를 받은 후 그는 알라가 유일한 신이며 그의 예언자임을 자처하였다.

모하메드의 후계자인 칼리프(Caliph, 교주)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이며 군사령관이고 동시에 입법자이기도 하였다. 역대의 칼리프들은 손에 ‘쿠란(Quran)’과 칼을 들고 동서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제5대 칼리프인 우마야(Umaya)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 때는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사라센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들의 지배영역은 사방으로 확대되어 동서로는 대서양에서 인더스 강, 남북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나일 강에 이르는 세계 제국이 되었다. 그 뒤 아불 압바스(Abul Abbas)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압바스 왕조를 수립하였다. 또한 우마야 왕조의 일파도 스페인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으므로 사라센 제국은 동서 칼리프 국가로 분열되었다. 인도에 수립된 무슬림 왕조도 이론상으로는 동 칼리프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였다.

2) 이슬람 제국의 인도 침입
인도는 굽따 제국이 쇠퇴한 뒤 11세기까지 외부로부터 침입이 없었다. 따라서 외세의 위협 아래서 성장하게 되는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은 점차 상실되어 갔다. 오랫동안 평화롭게 부를 축적하며 여유 있는 경제생활을 하였으나 반면에 정치조직은 미약하였고, 또 지배계층의 반목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렇게 몇 세기가 지나면서 인도는 무력한 상태에서 무슬림의 침입을 맞게 되었다.

무슬림은 인도로 공격해 오기 전에 인도의 서해안 지역과 빈번한 교역을 추진해 왔으며 그들의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인도 안의 영토를 갖겠다는 야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무슬림의 인도 침입도 이슬람 제국의 강력한 영토확장의 정책의 하나였지만 거기에는 이슬람을 전파하려는 종교적 열정과 함께 오랜 무역을 통해 알게 된 풍요로운 인도의 재화를 약탈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슬람 세력들은 712년에 발루치스탄까지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인더스 강 하류 신드 지방을 병합하였으나 일시적이었다. 그 뒤 아프가니스탄의 터키계 가즈니(Ghaznl? 왕조는 986년부터 인도 정복을 시작하여 먼저 폐샤와르를 점령하고 987년 왕위에 오른 마흐무드(Mahmu?)는 1001∼1027년 사이에 17회에 걸쳐 북인도를 원정하여 물탄, 타네스와르, 마투라 등 북인도 서쪽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마흐무드가 인도를 원정한 주요 목적은 노예와 물자의 약탈이었지만 불교와 힌두교 사원과 성지를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하고 스님들을 학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 원정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도시는 인도인 노예와 약탈물로 흘러 넘쳤다고 한다.

마흐무드가 죽은 뒤 가즈니 왕조는 서쪽의 살주크(Salju?) 세력에 밀려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뒤이어 일어난 고르(Ghu?) 왕조의 기야스 우드 딘 무하마드(Ghiyas-ud-dl? Muhammad)에게 멸망당하였다(1173∼1174). 그러나 가즈니 왕조의 마흐무드는 아프가니스탄, 신드 및 펀잡 지방을 그의 영토에 병합시켰지만 마치 폭풍처럼 몰려와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나가는 데 그쳐 지속적인 영향은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인도의 서북 국경지방을 장악한 일은 다음의 무슬림 침략자들이 인도에 들어오는 길을 쉽게 만들어 놓은 셈이 되었다.1) 1) 曺吉泰, 《인도사》, 민음사, 1995, pp. 180∼182 참조.

고르 왕조는 가즈니와 헤라트 사이에 있는 고르 지방에 살고 있던 터키계 무슬림으로서 고르 왕인 무하마드는 1173년에 가즈니 왕조를 그 본거지로부터 쫓아내고 동생 무하마드(Shihab-ud-dl? Muhammad)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1175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펀잡과 구자라뜨 지방을 정벌하고, 또 1191∼1192년에 델리 북쪽 따라인에서 두 번에 걸친 전쟁 끝에 인도 연합군을 무찔렀다. 두 차례에 걸친 따라인 전투는 무슬림들이 인도를 지배하게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2) 이들의 인도 침략 목적은 가즈니 왕조와 달리 약탈보다는 이슬람 왕국을 세우는 데 있었기에 1202년에는 벵갈만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2) 조길태, 위의 책, pp. 182∼184 참조.

무슬림 군대는 수백 년 동안 번영해 왔던 날란다 대학을 파괴하고 나아가 벵갈 지방까지 공격하였다. 그들은 인도에 침략해 들어와서 아프가니스탄과 간다라 등의 서북 인도에서 불상의 얼굴을 깎고 머리를 부수는 일을 자행하였다. 북인도에 들어와서는 인도의 각 종교 사원과 조각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13세기초에는 벵갈과 비하르 지방의 주요 사원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3. 무슬림의 인도불교에 대한 만행의 역사

1) 날란다 대학의 파괴
날란다 절은 왕사성 북쪽에 위치하며, 부처님의 제일 제자였던 사리불(S첺?iputra)과 목건련(Maudgalya?ana)의 고향으로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지 몇백 년이 지나 이곳에 거대한 불교대학이 세워져 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곳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절이 몇 년경에 건립되었지는 분명치 않으나 날란다가 대학촌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 무렵으로 추측된다. 5세기 초엽에 인도로 여행간 중국의 법현(法顯, 399∼416?) 스님은 빠딸리뿌뜨라에서 대·소승의 절이 번영하고 있음을 적고 있으면서도 이 날란다 절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법현 스님이 인도에 건너갈 당시에는 아직 이 절이 존재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아직 큰 가람으로 발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뒤 현장(玄?, 602∼664) 스님이 중국 장안에서 출발한 지 3년째 되는 해인 631년에 이곳에 도착하여 5년 동안 계현(戒賢, S쳊?abhadra, 529∼645)으로부터 유식학에 대해 직접 강의를 들었으며, 그때 이 절의 모습은 아주 아름답고 매우 큰절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마도 현장 스님이 유학했던 그 당시가 날란다 대학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그의 《대당서역기》 권9에 따르면 당시 날란다에는 재능과 학식을 겸한 수천 명의 스님들이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었다. 상주하는 스님들과 객승들을 합치면 1만여 명이나 되었고 가르치는 교수들이 2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처럼 큰 대학이 이방인들과 외도들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법난(法難)을 당하였다.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 제19장에 따르면, 일찍이 쉬리 짠드라(S쳑l?candra) 왕의 아들인 다르마 짠드라(Dharma-candra) 왕이 불법(佛法)을 신앙하였는데 그때 까쉬미르에는 투루슈카(Turus.ka)라는 터키계 왕이 살고 있었다. 그는 100년 동안 살았으며 매우 종교적이었다. 다르마 짠드라 왕이 중인도 아빠란따까 국(Apara?taka)을 지배하는 동안 반데로(Bandhero) 왕, 별명이 쿠니맘쁘타(Khunimampta)인 페르시아 왕이 몰라딴(Molata?, Multan?)과 라호르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페르시아 왕과 다르마 짠드라 왕은 여러 차례 전쟁을 하기도 하고 강화를 맺기도 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동맹을 맺고 있는 동안 두 나라에서 몇 명의 스님들을 각각 사절단으로 보냈다. 그때 페르시아 왕은 말과 보석 등을 중인도의 왕에게 선물하고, 중인도의 왕은 페르시아 왕에게 코끼리와 아름다운 비단을 선물하였다.

그 뒤 언젠가 다르마 짠드라 왕은 페르시아 왕에게 바느질 자국이 없는 아주 귀하고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선물하였는데도 불행하게도 허리 부분의 직물에 발자국과 같은 모양이 있었다. 이것은 악주(惡呪)라는 의심을 낳게 하였다. 또 언젠가 다르마 짠드라 왕은 페르시아 왕에게 과일을 선물로 보내고 싶어했는데 어떤 바라문이 자작나무 껍질에 많은 주문을 써서 그것들과 함께 과일을 상자에 넣어 페르시아 왕에게 보냈다. 페르시아 왕은 이것은 반드시 사악한 주문을 사용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투루슈카 군사들에게 마가다 국 전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때 많은 가람을 파괴시키고 날란다 절이 심하게 파괴되니 많은 스님들은 멀리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3) 3) TA?ANA?HA’S HISTORY OF BUDDHISM IN INDIA (translated from the Tibetan by LAMA CHIMPA ALAKA CHATTOPADHYAYA), Calcutta, K. P. Bagchi & Company, 1970, pp.137∼138.

또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 제20장에 따르면, 언젠가 붓다빡샤 왕(Buddhapaks.a)의 대신이던 까꾸다싱하(Kakudasin?a)가 날란다 대학에 가람 하나를 세우고 개당식을 거행하려 할 때 외도의 교리를 지지하는 두 명의 수행자가 걸식하러 왔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 젊은 수행자들이 그들에게 구정물을 뿌리고 널빤지로 만든 문안으로 집어넣고 사나운 개를 풀어놓자 그 두 사람은 크게 분노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먹는 양을 줄이고, 다른 사람은 일상관(日相觀, su?ya-sa?hana?을 성취하고자 땅 속에 굴을 파고 9년 동안 수행을 하였지만 그때까지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자 그 굴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때 그의 친구가 “그대는 진언을 성취하였는가,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는가?”라고 묻자, 그가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온통 기근 상태에 빠져 있는 데도 나는 그대를 위해 난행으로 음식물을 얻어왔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언을 성취하지 못하고 나온다면 언제든지 그대의 목을 잘라 버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리한 칼을 휘두르며 위협하였다. 그는 이것이 두려워 다시 3년을 더 수행하여 12년 만에 진언을 성취하였다. 그는 호마(homa) 의식을 행하고 그 마법에 걸린 재를 사방에 흩뿌렸다.

그런데 그 재는 곧장 기적적으로 발화되어 가람 82개를 완전히 태워 버렸다. 그 불은 날란다 대학의 다르마간자(Dharmaganja)에 소장되어 있는 불전(佛典)들을 태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많은 불전을 소장하고 있는 큰 사원인 라뜨나사가라(Ratnasa?ara), 라뜨노다디(Ratnodadhi)와 라뜨나단다까(Ratnadan.d.aka) 등 3대 가람이 불에 탔는데, 그들 안에는 대승장부(大乘藏部)의 모든 경권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때 9층으로 된 라뜨노다디 가람 상층에 소장되어 있는 어떤 경권에서 큰 폭포수가 쏟아져내려 불을 끄고, 그 폭포수는 계속 흘러내려 모든 경권들에 미쳐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나중에 그 경권을 조사해 보니, 비전(秘典)의 탄트라 5부 경전이 들어 있었다. 어떤 것에는 비밀집(秘密集, Guhya-sama?a)에 관한 것만이 있었고, 또 어떤 것에는 무상탄트라부(無上坦特羅部, Anuttara-tantra)에 속한 경권들이 있었다.4)4) 같은 책, pp.141∼142.

그러나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 제21장에 따르면, 그 뒤 여러 곳으로부터 학식 있는 스님들을 소집하여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항과 경전을 넣어둔 함에 보관된 것들을 모두 문자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붓다빡샤 왕, 바라문 샹꾸(S첺n?u)와 브리하스빠띠(Br.haspati), 그리고 많은 재가 신도들이 화재로 손상을 입은 사원들을 복구하였다.

여러 왕들과 불교신도들에 의해 번영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던 날란다 대학은 그러나 1200년 초 아프가니스탄의 고르 왕조의 무하마드가 북부 인도에 침공해 들어 왔을 때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스님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먼 곳으로 달아나 버렸고 대학은 6개월 동안이나 계속해 불탔다고 한다. 그 이후 날란다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한다.5) 5) 같은 책, pp.142∼143.

그 후 날란다가 다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861년부터였다. 커닝햄이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를 근거로 해서 날란다의 가람터를 확인해 냈고, 1916년 인도 고고국과 영국 정부에서 체계적인 발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때의 원형을 다 발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슬람의 불교에 대한 박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뒤 인도에서 불교교단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2) 벵갈과 비하르 지방 불교 사원의 파괴와 승려 살상
8세기 초(730∼740년 무렵) 고빨라(Gopala) 1세가 벵갈 지방의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빨라(Pa?a) 왕조가 시작되었다. 빨라 왕조의 역대 왕들은 독실한 불교도로서 열렬하게 불교를 지원하였다. 그 때문에 인도 주변에서 불교가 점차 소멸해 가고 있었는데도 왕가의 지원으로 벵갈과 비하르 지방에서는 불교가 마지막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시대에 발견된 많은 비명(碑銘)에서 알 수 있다. 《빨라시대비명목록》에 따르면, 비명은 서쪽의 사위성, 꾸시나가라, 보디가야 등에서 많이 발견되고, 그 비문에는 고빨라, 데바빨라, 라즈야빨라, 비그라하빨라, 마히빨라 등 10명 이상의 빨라 왕조 왕들의 이름이 보인다.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 제28장에 따르면, 초대 고빨라(Gopa?a) 1세는 날란다 절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오단따뿌리 큰절(Odantapurl?mha?iha?a)을 세웠고, 제2대 다르마빨라(Dharmagopa?a) 왕은 마가다의 북쪽 갠지스 강 남쪽 연안에 위치한 높다란 언덕에 쉬리비끄라마쉴라 절(S쳑l?ikramas쳊?a?viha?a)을 세웠는데 이는 그 시대 중심도량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 왕은 이 밖에도 50여 개의 절을 더 세웠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비끄라마쉴라 절이 가장 큰절로서 이 절 중심부에는 커다란 불전을 짓고 주위에 53개의 진언사(眞言寺)와 54개의 일반 절을 지어 총 108개의 절이 있었다. 그 주위에는 장벽이 둘러져 있고, 108명의 학승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 베야빨라 왕 제위 때 이 절에는 여섯 명의 현문(賢門)이 있었다. 그들은 경론에 통달한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승들이었고, 이 6현문 다음에 여러 명의 좌주(座主)들이 있었다고 한다. 제3대 데바빨라(Devapa?a) 왕은 동 벵갈 지방에 소마뿌라 큰절(Somapura-maha?i ha?a)을 건립하였다.6) 6) 같은 책, p.258.

《빨라왕조비명목록》에 따르면, 이 절은 ‘소마뿌라의 다르마빨라 왕의 큰절’로 불렀으며, 이 절의 넓이는 사방 1마일로서 중앙에 177개의 승방이 있는 큰 가람이 있었고 주위는 장벽으로 둘러져 있었다고 한다. 또 제14대 라마빨라 왕(Ra?apa?a, 1100년 무렵)은 자갓달라 큰절(Jagaddala- maha?iha?a)을 건립하였다. 이 절은 동 벵갈 지방의 바렌드리에 위치하며, 인도불교의 마지막 학승인 목샤까라굽따(Moks.a?aragupta, 1050∼1202)가 거주하던 절이라고 한다. 이처럼 빨라 왕조 시대에는 많은 절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 불교연구와 수행의 중심지는 날란다, 오단따뿌리, 바즈라사나(Vajra?ana; 金剛寶座, 곧 보디가야) 그리고 비끄라마쉴라 등 그 당시 인도의 4대 절이다.

빨라 왕조 시대에 번영했던 이 절들은 무슬림이 중인도에 침입하기 전까지 존속하였다. 1203년 비끄라마쉴라 절이 무슬림들의 약탈로 파괴되었다. 그때 수많은 스님들이 살해되고, 위기를 면한 나머지 스님은 네팔이나 티베트 등지로 피난함으로써 인도불교는 본토에서 그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4대 절의 나머지 오단따뿌리, 날란다, 바즈라사나 등의 절도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 제37장에 따르면, 세나 왕조의 4번째 왕 라티까세나(Ra?hikasena)가 죽은 뒤 라밤세나(Lavam.sena)가 나와 왕국을 수호했기 때문에 몇 년 동안은 평화로웠다. 그 뒤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에 사이에 안따라비다(Antarabhida) 국의 터키계 월왕(月王)이 나왔다. 어떤 비구는 왕의 사신이 되어 재앙을 일으키고, 안따라비다는 방갈라 등 다른 나라들과 다른 곳에 머무는 터키계의 여러 작은 나라 왕들이 연합하여 마가다 국을 전역을 정복하였으며, 오단따뿌리 절의 많은 스님들을 살상하고, 오단따뿌리와 비끄라마쉴라 절을 태웠다.

특히 오단따뿌리 절터를 대식국(大食國)의 요새로 만들었다. 또 비끄라마쉴라 절의 마지막 좌주였던 까쉬미르 출신의 샤끼야쉬리(S첺kyas쳑l?는 동 벵갈의 오디비샤 국의 자갓달라 절로 피신했다가 3년 만에 티베트로 건너갔고, 라뜨나끄쉬따(Ratnaks.ita)는 네팔로 갔으며, 즈냐나카라굽타(Jn?na?karagupta) 등 대학자와 소장학자 100여 명은 인도 서남쪽으로 갔고, 대학자 붓다슈리미트라(Buddhas쳑l?itra)와 다샤발라(Das첺bala)의 제자 바즈라슈리(Vaj- ras쳑l?와 그 밖의 많은 소장학자들이 멀리 남인도로 도망갔다.

학자 상가마슈리즈냐나(Sam?hamas쳑l?n??a), 라비슈리바드라(Ravis쳑l?hadra), 찬드라카라굽타(Candra?aragupta) 등 16명과 소장학자 2백여 명은 멀리 동쪽 푸칸과 미얀마 그리고 서인도 카쉬미르 부근의 캄보자 등 여러 나라로 도망감으로써 마가다에서 불교는 거의 절멸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7) 7) 같은 책, p.319.

또 1234∼1236년에 인도에 왔던 티베트 스님 ? 제 뻬(Chos-rje-dpal, Dharmasva?in)는 무슬림에 의해 박해당하였던 스님들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보디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절(Maha?odhi-viha?a)에서는 대부분의 비구가 도피하고 마지막 남은 네 명의 비구가 불상을 모신 집의 입구를 기와로 막고 철 입구의 문도 흙으로 발라놓고 피난하였으며, 17일 뒤에 무슬림들이 물러간 다음에 돌아와 절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켰다고 한다.8) 8) G. Roerich, Biography of Dharmasva?in, Patna, 1959; 平川彰, 《印度佛敎史》 下, 3rd.; 東京, 春秋社, 1985, p.26 참조; 奈郞康明, 《佛敎史》 1 《世界宗敎史叢書》 7, 東京, 山川出版社, 1979, p.400; 정호영 역, 《인도불교-문화사적 탐구》, 서울, 民族社, 1990, p.314.

그리고 그가 1236년 귀국 길에 올라 비끄라마쉴라 절을 들렀을 때는 이미 그곳은 잿더미가 되어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그 당시의 학문불교의 중심지였던 비크라마쉴라 절 등이 소실됨으로써 인도에서 불교의 학적 연구는 티베트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인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뒤 라훌라 쉴라바드라(Ra?ula s쳊?abhadra)는 날란다에 거주하였는데 법을 청하는 자가 7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 제37장에 따르면, 세나 왕조는 쁘라띠따세나 왕을 끝으로 멸망하였지만, 그 뒤 100년쯤 지나 방갈라에 차갈라 왕이 나타나 터키인을 정복하였다.

왕은 원래 바라문교 신자였지만 왕비의 감화로 불교로 개종하고 불교를 부흥시켰다고 한다. 그는 우선 보디가야의 금강보좌를 공양하고 불전들을 보수한 다음 대학자 샤리뿌뜨라를 그곳으로 모셔와 살게 하였다. 또한 날란다의 많은 불전도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끄라마쉴라 절이 파괴된 뒤에도 마가다에서 불교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9) 9) 타라나타, 앞의 책, p.320.

4.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불교와 이슬람과의 인연

1)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군도의 불교 전파와 전개상황
2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의 《지리학》이나 빠알리 어 불전 《마하니데사(Maha?idesa)》에 따르면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군도에 인도문화가 전해진 것은 대략 1∼2세기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미 5세기 이전에 불교도 전해져 널리 유포되었던 기록도 있다.10) 10) 이와모도 유다까 外 3인(홍사성 역), 《동남아불교사》, 서울, 반야샘, 1987, p.31.

수마트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비문 가운데 하나인 타란트워 비문(684년)에서 서원(誓願)·선지식(善知識)·보리심(菩提心)·삼보(三寶) 등의 불교술어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특히 금강신(金剛身) 등 밀교 계통의 술어가 발견돼, 당시 이 지역에는 대승불교 특히 밀교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당나라의 구법승 의정(義淨)은 671년 말부터 인도로 가기 전에 쉬리비자야 국에 6개월 동안 머물며 산스끄리뜨 어를 배웠고 다시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685∼695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약 400여 권의 불교서적을 수집하고 번역하였다고 한다.11) 11) 다둑 지아니라 아비딘 빈 압둘 와히드 편저(소병국 편역), 《말레이시아사》, 서울, 도서출판 오름, 1998, pp.30∼31 참조.

의정이 번역한 《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 권5 주기(注記)에 의하면 쉬리비자야 국은 1천여 명의 승려가 있어 학문과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 뒤지지 않는 고도의 불교문화가 번창하고 있어 인도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자 하는 자는 이곳에 1∼2년쯤 머물러 그 법식을 배우고 인도로 가는 것도 좋겠다12)고 기록하고 있다. 12) 大正藏 24, p.477c 26; 此佛逝廓下 僧衆千餘 學問爲懷 多行 所有尋讀 乃與中國不殊 沙門軌儀 悉皆無別 若其唐僧 欲向西方 爲聽讀者 停斯一二載 習其法式 方進中天 亦是佳也.

쉬리비자야 불교는 벵갈 지방의 빨라 왕조의 불교와 접촉을 가졌다. 그 근거는 날란다 대학과 접촉이 있었던 데서 찾을 수 없다. 쉬리비자야 지배자들은 날란다에서 공부하는 자들을 위해 숙박 및 편의시설을 알선해 주었다. 또 쉬리비자야 국에는 11세기에 유명한 다르마끼리띠(Dharmakl?ti)라는 승려학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인도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배우러 왔다. 그 가운데는 티베트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아띠샤(Atis첺)도 있었다.13) 또 쉬리비자야 국에서는 14세기 중엽까지도 불교가 흥성하여 국왕이 즉위할 때마다 왕의 등신대와 같은 크기의 불상을 조성해 모셨다는 기록도 있다.14) 13) 다둑 지아니라 아비딘 빈 압둘 와히드 편저(소병국 편역), 《말레이시아사》, p.31.14) 趙汝适, 《諸蕃志》 卷上 ‘三佛齊傳’ 참조.

한편 자바섬에도 사이렌드라 왕조 때인 8세기에 보로부드르 불탑이 건립되었으며, 대승불교 특히 밀교 계통의 불교가 행해지고 있었다. 또 14세기에 마자빠히트 왕조의 창시자 크리타라자사 왕은 크리타나가라의 사당을 짓고 아촉불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에는 승려를 식민지에 파견하여 주로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을 하게 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자바의 불교에 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이 무렵부터 무슬림들이 자바의 해안지대를 왕래하고, 이슬람 상인들이 마자빠히트 왕가의 지배력을 잠식하며 서서히 이슬람화가 시작되어 불교는 그 세력을 잃고 이웃 발리 섬으로 옮겨가게 되었다.15) 15) 홍사성 역, 앞의 책, pp.309∼310 참조.

2)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불교와 이슬람의 관계
인도네시아는 외형상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이다. 이 나라의 이슬람에는 힌두교와 불교적 요소와 기타 토착문화적 요소가 적지 않게 가미되어 있다. 이처럼 이슬람이 인도네시아 군도에 전파된 것은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동양의 주요 무역항로에 따라 전개된 평화적인 경제영역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이 지역 사람들의 이슬람으로 개종도 토착 인도네시아인들이 이슬람에 직접 접촉하였거나 다른 아시아인들의 토착인들과 결혼하여 그 지역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16) 16) 양승윤 외 8인,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서울, 한국외국대학교 출판부, 2000, p.99 참조.

베네치아의 여행가 마르코 포로의 여행기록에 따르면 그가 1292년 중국으로부터 귀국하다 수마트라에 기착했을 때 뻐를락이라는 이슬람 도시가 발견되었다고 하므로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이슬람의 통치는 적어도 13세기 말부터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 후 14세기 말에 힌두교와 불교를 바탕으로 해서 크게 융성했던 마자빠히트 왕국의 전성기에 높은 신분의 일부 엘리트들은 이슬람을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힌두교와 불교의 비밀스러운 신비적인 교리(tantrism)에 식상했던 자바 지방의 마자빠히트 왕족들에게 이슬람의 신비주의자인 수피(Sufi)들의 초자연적인 신비주의에 대해 상당한 매력을 가졌었다. 이 점은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무역이 가져다주는 진기한 서양문물을 만족하였던 것 같다.17) 17) 양승윤 외 8인, 위의 책, p.102.

말레이 반도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1402년에 말레이 반도의 거대한 무역국인 말라카(Malaka) 왕국이 성립하였다. 말라카 왕국 이전의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문화적 영향권 안에 있던 말레이 반도의 군소왕국들은 674년 아랍의 무슬림과의 접촉을 시작하여 말라카 왕국을 세운 빠라메스와라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이름을 술탄 무함마드 샤로 개명하면서 공식종교로 인정하였다. 이슬람은 15세기 중반 이후부터 말레이 반도 전체에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불교와 힌두교와의 종교적 갈등과 문화적 융합을 동시에 이루어 나갔다. 말라카 왕들의 이슬람로의 개종은 술탄제의 정치구조의 도입과 법 체제, 문화와 사회구조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동시에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들과 토착신앙의 우상들은 파괴당하는 수단을 겪었다.18) 그러나 그 실태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것은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다. 18) 양승윤 외 8인, 위의 책, p.67. 19) 위의 책, p.111.20) 위의 책, p.113.21) 《대당서역기》 권1(大正藏 51, p.873b).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이후에 힌두교와 불교에 의해 정착된 인도문화의 일부는 현재까지도 말레이인들의 관습에 그 일부가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시기에 유입된 중국인과 인도인에 의해 다시 불교와 힌두교가 복원되어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종교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이슬람화는 말레이 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제무역이 필수적인 요인 때문에 상당히 평화적 과정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불교와 힌두 문화를 꽃피운 왕국들조차 이슬람 문화의 전파매체인 무슬림들의 무역행위를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동남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전파과정은 위에서 아래로, 왕궁으로부터 일반 백성들에게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많은 종교적 관습에 불교와 힌두적 요소와 이슬람적 요소가 이 지역에 혼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3∼14세기에 들어온 이슬람은 기존의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토속신앙의 문화를 토대로 하여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의 전파되는 과정에서 무력에 의한 정복도 있었으나 종교적인 이유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고 전략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원인이 더 컸던 것 같다.19) 인도네시아 군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은 이 지역에 먼저 자리한 불교와 힌두 문화의 터전 위에 전래되었기 때문에 이슬람은 불교나 힌두교를 핍박하기보다는 문화적 융합을 통한 이슬람화로 이행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종족적 문화적 지리적 배경이 다양하여 동질적 요소에 비해 이질적 요소가 너무 많은 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인도네시아는 비록 절대인구가 무슬림 국가이지만 빤짜쉴라(Pan?as쳊?a, 원래 의미는 5戒)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는 하는 세속 국가임을 분명히 하여 이슬람, 불교, 힌두교, 카톨릭, 기독교 등 다섯 종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있으며, 다른 어떠한 신앙도 거부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인도 빤자쉴라를 인도네시아가 추구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아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추구하고 있는 나라이므로 비록 많은 인구가 무슬림이긴 하지만 종교간의 조화와 융화를 추구해 오고 있다.20)

그러나 1978년 인도네시아에 소재한 불가사의라고까지 표현하는 불교 유적의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원이 난폭한 무슬림의 폭탄 테러로 인해 일부가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무슬림의 테러에 대해 비난하는 국제여론과 유네스코의 노력으로 현재 완전 복원되어 있기는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자행된 커다란 문화재 파괴의 하나라 할 수 있다.

5.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바미얀 마애대불 파괴

1) 아프가니스탄에서 불교와 이슬람의 첫 악연

이슬람이 지배하기 이전 아프가니스탄은 불교의 학문과 예술이 꽃피어나고 동과 서를 연결하던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그러한 찬란한 불교문화 국가에 이슬람의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은 터키계 노예출신인 알프 테긴(Alp tegin)이 카불 지방을 점령하고 가즈니 지방에 이슬람왕조를 세운 962년부터이다.

977년 알프 테긴이 죽고 그의 사위인 사북 테긴(Sabuk-tigin)이 즉위하여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정복하면서 불교는 이슬람의 폭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997년 사북 테긴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는 매우 광신적인 무슬림 국가건설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불교승단은 마흐무드의 통치기간이 끝나는 1030년경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2) 바미얀 마애석불의 문화적 가치

탈레반(Taleban) 정권의 바미얀(Bamiyan) 석불 훼손 문제는 이미 1998년 11월 일부 지각 있는 불교인들에 의해서 국제 사회에 여론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투가 벌어지는 바미얀 지역을 성지 순례했던 태국의 순례객들이 바미얀 석불을 가지고 사격훈련을 하는 탈레반들을 보고 그 사진을 찍어와 방콕의 신문들에 제공하면서 바미얀의 문제는 불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내부적으로 지속적인 승리에 도취해 있던 탈레반들은 바미얀 석불에 대해 약간의 흠집을 내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리고 2년이 조금 더 지난 뒤인 21세기의 문이 막 열리고 얼마 안 되어 2001년 2월 26일,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원리주의 집권세력인 탈레반의 통치자들은 우상화 배격운동의 일환으로 비미얀의 거대한 석불상의 파괴를 지시했다.

바미얀의 대석불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단지 세계 최대 규모의 마애석불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옛날 바미얀은 불교문화사의 최성기를 이루었던 간다라 문화가 싹텄던 곳인 동시에 그 중심지였다는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형적으로도 바미얀은 힌두쿠시(HinduKush)와 코이바바(Koh-i-baba) 산맥이 가로지른 사이의 계곡에 자리하여, 동서 교역의 십자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다라 예술의 핵심적인 동인(動因)이 바로 불교였으며, 불교 예술은 간다라 시대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바미얀의 불교 유적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아주 깊은 것이었으며, 이들 불상은 세계 문화적인 측면에서 간다라 미술 양식의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간다라 지방은 인더스 강의 지류인 카불 강 하류에 자리한 평원지역으로 현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과거 인도의 꾸샤나 왕조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2세기경에 활약한 꾸샤나 왕조의 3대 까니쉬까 왕은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북 인도를 통일해 큰 위세를 떨쳤으며 대승불교를 흥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원 전후∼5세기경 간다라 미술이라는 불교문화의 번성기를 이루었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와 인도의 미술이 조화를 이룬 것으로서 이때 불상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교도들은 이전까지는 부처님을 보리수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지만 간다라 미술 시대에 불상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에서 성행했던 부조(浮彫) 양식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다는 바미얀의 석불들은 거대한 사암(砂岩) 벽에 대형 감실을 판 뒤에 입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전체적으로 초기 간다라 양식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불상의 주변 1,000여 곳에는 찬란한 색채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마애석불 양식은 아프가니스탄 바미얀과 가즈니 등지 외에 인도에서도 볼 수 있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경주 두대리의 마애석불 등 갖가지 석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벽화에 그려진 꽃을 뿌리는 천신들의 옷자락에서는 하늘의 향기가 금세라도 묻어날 듯하다는 감회를 전하는 기록들도 이제는 단지 환상 속의 유물로서만 만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3) 바미얀의 마애대불의 파괴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모하메드 오마르는 모든 불상들을 이슬람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파괴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오마르는 바흐타르 통신에 발표된 이 포고문에서 “신은 유일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인물의) 형상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 불상은 지금부터 신앙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거돼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포고령에 따라 수도 카불에서 서쪽으로 150㎞ 떨어진 아프가니스탄 중부 바미얀의 고대 불교 석불군들에 있는 높이 53m인 세계 최대의 사암 마애석불과 높이 37m의 대형 불상을 포함하여 서기 2세기경에 조성된 귀중한 문화재가 폭파대상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이미 아프간 내전 과정(1992∼1996년)에서 상당 부분 손상되었었다.

원래 아프가니스탄은 불교를 허용하는 나라였으며, 극도의 보수적인 회교원리주의를 추종하는 탈레반도 집권한 뒤 전국에 산재된 불상과 힌두교 유물도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으나 문화유적 보호의 차원에서 보존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폭파된 석불이 있는 바미얀은 아프가니스탄의 중앙부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제 1차 아프간 전쟁 때 영국인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던 장소이다. 바미얀에서는 한때 불교가 융성해 신라의 혜초 스님과 7세기 현장 법사가 방문해 이곳에 대한 기록을 그들의 여행기에 남기고 있는데 한때의 불교문화를 증거하듯이 사암절벽에는 승방과 사당들이 2km에 걸쳐 산재해 있다고 한다.21)

이 발표 이후 유네스코는 물론 유엔 189개 회원국이 불상 파괴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이집트, 터키,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들조차도 탈레반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국민도 정권의 유적 파괴에 비판적이어서 익명의 어느 관리는 “파괴된 도시는 새로 건설하면 되지만 불상은 파괴되면 그만”이라며 역사에 큰 죄를 짓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우리는 그저 돌과 바위를 부수는 것인데….”라며 태연한 모습만 보이며 이 같은 세계의 비난여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 3월 2일 바미얀 석불의 머리와 다리 부분을 로켓포와 전차로 파괴한 데 이어 3월 12일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몸통 부분을 완전히 파괴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이번에 파괴된 불상은 그 양쪽 끝에 있는 거대한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 초대형 불상이다. 동쪽 끝에 있는 불상은 36m, 서쪽 끝에 있는 불상은 53m에 달하는데 이들은 1.6km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시대적으로 동쪽의 불상은 서기 2∼3세기, 서쪽의 불상은 이보다 200년 정도 후대인 5세기경의 것이다.
또 파괴된 두 불상과 더불어 바미얀의 벽화들도 아프가니스탄의 군인들에 의해 오랫동안 과녁으로 사용되어 와서 많은 파손을 입어 왔다. CNN방송에 따르면 탈레반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미얀 석불이 파괴되기 2주일 전에 또 다른 불교 유적지인 가즈니 유적도 파괴된 것으로 밝혀져 문화를 애호하는 세계인들의 가슴을 저미게 하였다.

6. 남는 문제

지난 3월에 파괴된 바미얀의 대불은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에 벌어진 가장 대규모의 불교문화유산의 파괴, 인류의 문화유산 파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것뿐인가. 지금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이 테러와의 전쟁을 한답시고 아프카니스탄을 갖가지 현대무기를 퍼부어 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또 얼마나 많은 문화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슬람에 의해 파괴된 불교문화재들이 앞에서 말한 나라들로만 끝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들, 예를 들어 쿠챠, 투르판, 코탄 등과 같은 옛 불교왕국들이 언제 어떻게 이슬람의 물결에 사라져갔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또한 그 실태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962년 코탄의 불교도들이 이슬람을 등에 메고 온 카랴한 왕조로부터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41년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치르다가 소멸해 버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는 반드시 그것들의 실태를 낱낱이 밝혀야 할 것이다.■

문을식
동국대 인도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논저서로 <가우다빠다의 불살생과 용수의 중도설> <마야설의 불이일원론적 이해>, 《인도의 사상과 문화》, 역서로 《힌두교입문》 《인도철학의 자아사상》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