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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불교학의 과제와 해결방향 / 김성철
[9호] 2001년 12월 10일 (월) 김성철 동국대 교수

    이 글은 중앙승가대학교의 ‘승가학 제1회 학술세미나―승가학풍 수립의 전망과 과제(2001. 11. 30)’에서 발표된 것(원제 : 향후 불교학의 바람직한 방향)이다. 논문 게재를 허락해준 중앙승가대학교에 감사드린다.

1. 문제의 제기

우리에게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 하나의 ‘국가사회’를 구성하는 데 근간이 되는 규약집인 법전은 물론이고, 교육제도와 내용, 행정제도, 산업시설, 주거시설 모두가 서구의 것들이 수입되어 우리의 삶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서구화는 외적, 제도적, 물리적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세계관과 인생관은 물론이고 가치관조차 서구인들의 그것이 그대로 이식되어 우리의 삶의 좌표로서 기능한다.

현재 우리의 삶은 속속들이 서구화되어 있다. 헤어스타일, 의복, 식사예절, 미적 감각…….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우리 삶의 서구화의 정도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서구화된 영역을 하나하나 조사해보는 것보다, 아직 말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우리의 전통이 무엇인가 검토해보는 것이 보다 빠른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 중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는가? 물질적인 것으로는 고궁, 문화재, 골동품 등이 남아 있다. 제도적인 것으로는 유교적 제사의식이 남아 있다. 정신적인 것으로는 효도나 충성과 같은 덕목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두 내장을 제거하고 방부 처리한 박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건축물이나 생활용구와 같은 전통은 유형문화재라 불리며, 종교의식이나 기예와 같은 전통은 무형문화재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문화재는 대부분 우리가 쓸고 닦고 만지며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나 도구가 아니라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감상물로 전락하였고, 무형문화재는 의미는 사라진 채 형식만 흉내내는 꼭두각시놀음과 같이 되고 말았다. 무형문화재라고 부를 수 있는 유교식 제사의식 한 단계 한 단계에 과거와 같은 의미를 담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 될 것이며, 황해도별신굿을 재현하는 현장에서 과거와 같이 ‘신내림’의 체험에 진정으로 감복하는 무형문화재 전수자가 도대체 몇 명이 될 것인가? 효도나 충성과 같은 과거의 정신적 덕목은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공허한 ‘소음’으로 들릴 뿐, 그 진정한 의미는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서구적 감각문명에 의해 물질적으로 파괴되고 정신적으로 세뇌된 현재 우리의 삶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유형, 무형의 전통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불교 전통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진실한 구도심으로 인해 삭발 염의한다. 행자 생활을 거치며 출가심을 확인하고 하심(下心)을 배운다. 그 후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을 배우며 이를 통해 터득된 조망을 많은 대중들에게 회향한다. 범종·운판·법고·목탁과 같은 불구(佛具)들은 박물관 속의 문화재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함께 하는 종교의식의 도구들이다. 법당은 나날이 쓸고 닦고 사용하는 살아 있는 기도의 현장이다. 계·정·혜 삼학은 우리의 심성을 향상시키는 실질적 공부 방법이다. 무형의 것이든 유형의 것이든 불교 내의 모든 것들은 우리 불교인들과 함께 살아 있다.

그런데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서구문화의 오염에서 초연하던 이러한 불교 전통의 한 귀퉁이에서 수십 년 전부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서구의 불교학 방법론이 도입되면서 불교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서슴없이 편다. ‘천태의 오시교판(五時敎判)은 허구다’ ‘대승불전은 모두 후대에 편집된 가짜 불전들이다’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능엄경》과 《원각경》 《대승기신론》은 모두 중국에서 조작된 위경(僞經)들이다’ ‘원효 스님은 자신이 저술한 《금강삼매경》에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삼론종의 길장은 공사상을 오해하고 있다’ ‘하택 신회는 자신의 종파적 이익을 위해 《육조단경》의 내용을 조작하였다’ ‘선종의 초조 달마는 허구의 인물이다’ ‘《우빠니샤드》의 아뜨만론과 무아설은 그 의미가 같다’ ‘십이연기설에 대한 태생학적 해석은 후대 아비달마 논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조작이다’ ……. 그리고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교육과 포교의 현장에서 중구난방으로 불교 신행자들에게 전달된다. 현대 불교학자들의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할 경우 과거의 스님들은 대부분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며, 우리가 신봉하는 불교 교리는 모두 가짜가 되고 만다. 신앙으로서의 불교가 망실되는 것이다.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어째서 이러한 훼불의 불교학에 종사하게 된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 그 원인은 서구에서 발생한 인문학적 방법에 의해 불교가 연구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연구하고,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사용되는 문헌학,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조망을 토로하는 철학,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현재의 시각에 의해 탐구하는 역사학 등과 같은 인문학의 경우 위와 같이 다양한 학설이 난무하는 것은, 그 학문이 활력 있는 학자들에 의해 열렬히 연구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기에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학의 경우는 인문학과 다르다. 어떤 새로운 이론을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이 전문학자들 간의 얘깃거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교학은 그 배후에 수많은 신도 집단을 가지고 있는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학문이다. 영향력 있는 불교학자가 어떤 새로운 주장을 내세울 경우 그 파장은 일반적인 인문학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따라서 현재와 같이 인문학적 방식만으로 불교가 연구되고, 현대학자들의 갖가지 학설들이 불교 신행의 지침이 될 경우 앞으로 많은 불교신도들은 방황하게 될 것이다. 아니 이는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현재 불교 신행과 수행의 현장에서도 대부분의 불자들은 교리의 혼란을 호소한다. 계속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될 경우 불전(佛典)이 마치 《논어》나 《도덕경》 《희랍신화》나 ‘파스칼의 《팡세》’와 같이 인문학적 교양을 위한 참고서 정도로 취급될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 종교로서의 불교가 망실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필자는 현대 불교학에서 소홀히 취급했던 새로운 불교학의 영역을 발굴 또는 개설할 경우 이런 혼란이 정리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먼저 현재 불교학계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인문학적 불교학의 형성 과정과 그 한계에 대해 조망해 보자.

2. 인문학적 불교학의 형성과 한계

현대 불교학은 서구의 인문학적 방법론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서구의 인문학이란 그리스 시대에 연원을 둔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문법학·수사학·변증학’을 백과사전학(encyklios paideia)이라고 부르며 전문교육을 위한 예비적 학문으로 삼았는데, 로마시대가 되자 이런 기초 학문은 ‘산술·기하·천문·음악·건축·의학’과 함께 묶여 자유예학(artes liberales)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 후 기원 후 5∼6세기경 ‘문법학·수사학·변증학’의 3학과 ‘산술학·기하학·천문학·음악학’의 4학을 합하여 총 7가지 분야가 기초적인 학문으로 정리된다. 3학 중에는 문학, 역사학이 포함되고, 4학 중에는 지리학과 물리학이 포함된다.

13세기경 유럽 각지에 대학이 창설되면서 이런 7개의 과목을 가르치는 학부를 자유예학부(faculty of liberal arts)라고 부르게 되는데 여기서는 법학부·의학부·신학부에서의 전공교육을 위한 예비적 기초교양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르네상스 이후 실증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유예학 중 3학을 가르치는 학부는 문과대학으로, 4학을 가르치는 학부는 이과대학으로 분리되고 교과목도 세분화, 다양화되기에 이른다.1) 1) 신오현, 〈서구의 전통사회와 인문학〉, 《새로운 인문학을 위하여》, 백의, 1993, pp.74∼75.

이때 비로소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분리되어 단일한 학문 분야로 묶여진다. 그리고 딜타이(Dilthey, 1833∼1911 C.E.) 이후 인문학은 정신과학(Geistes Wissenschaft)이라는 이름 하에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연구된다.

자연과학은 관찰과 실험에 의해 연구되지만, 정신의 산물을 탐구하는 인문학은 해석학을 그 방법론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학적 도구의 대표가 바로 문헌학(philology)이다. 문헌학이란 르네상스 이후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연구하려는 동기에서 성립한 인문학 연구 방법으로, 문헌학자들은 필사본이나 판본을 교정하고, 주석하는 일에 주력한다. 그 결과 얻어진 결론을 통해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학설을 내세운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인문학, 문헌학적 연구 방법은 불교학에도 그대로 도입되었으며, 이렇게 형성된 인문학적 불교학은 우이 하쿠쥬(宇井伯壽)와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 야마구치 스스무(山口益) 등과 같은 일본의 불교학자들에게 전수되어 서구와 일본은 물론 우리 나라를 포함한 전세계 불교학의 보편적 연구 방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서구인들이 불교학을 연구하게 된 애초의 동기는 선교적, 정치적인 데 있었다. 초창기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본의는 아닐지 몰라도 식민주의 시대의 전초병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불교에 대한 이들의 논조는 폄하적·비판적이었다. 1895년에 출간된 《티베트불교》에서 저자인 L. Austine Waddell은 악마(demon)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티베트의 존상(尊像)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2) 2)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 ‘Its tutelary demonical Buddha is Vajra-bhairava supported by Samvara and Guhya-ka?a? And its Guardian demons are “The Six-armed Gon-po or Lord”’: L. Austine Waddell, Tibetan Buddhism, Dover Publications, 1895, p.62. 이 이외에도 저자는 지금까지 600여 년간 티베트 불교인들의 신행지침서가 되고 있는 《보리도차제론(Lam rim)》의 저자 쫑카빠가 그 당시 티베트를 여행하던 로마 카톨릭 신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역시 종교적 교만심에 토대를 둔 악의적 해석이다(同, p.61).

혹 점잖은 학자들의 경우 이러한 악의적 표현은 자제한다고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신봉되던 불교의 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는 데 있어서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불교라는 종교 밖에서,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듯이, ‘지적인 호기심에 의해 촉발된 학문적 욕구’3)를 갖고 불전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야스퍼스, 《대학의 이념》.

이들에게 있어서 불교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 이루어지는 인문학적 탐구’의 대상일 뿐이었다.

사실 현재에도 서구에서 불교에 대한 연구는 남(南)아시아학이나 동(東)아시아학·우랄알타이학 등 지역학의 일부나, 언어·문화·역사에 대한 연구 중의 일부, 혹은 신학대학에서의 타종교에 대한 연구 중의 일부로 연구되고 있을 뿐이며,4) 불교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도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불교학이 지금과 같이 인문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연구될 경우 신앙으로서의 불교, 종교로서의 불교는 위협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적 불교학 연구를 중단할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4) Jose Ignacio Cabezon, Buddhist Studies as a Discipline.

3. 기독교 신학과 대비한 현대 불교학의 문제점

향후 불교학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경우, 서구의 종교 즉 기독교의 신학이 연구되고 있는 방법과 현대 불교학의 연구 방법을 비교해 보는 것이 문제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인문학 형성 과정을 약술할 때 말한 바와 같이 과거 서구의 인문학은 신학을 위한 기초학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즉 신학과 인문학은 분리되어 연구되고 있었으며,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르네상스 이후 문헌학(philology)이 발달하면서 신학의 연구에도 인문학적 방법론이 도입되긴 했지만, 인문학적 연구는 기독교 신앙의 들러리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었고 신학의 중심부에 놓여진 적은 없다. 다시 말해 인문학적 연구는 기독교 신학을 위한 예비학 또는 보조학으로서의 역할만 해 왔다.

기독교 신학의 연구 분야는 ‘성서신학(聖書神學)’과 ‘조직신학(組織神學)’5) ‘실천신학(實踐神學)’과 ‘역사신학(歷史神學)’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성서신학’6)에서는 성서 자체가 가진 신앙 내용을 연구하며, ‘실천신학’7)은 기독교의 목회와 설교 및 선교의 방법에 대해 연구하는 응용신학이며, ‘역사신학’8)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연구에 주안점을 두는 신학이다. 5) ‘체계신학’이라는 번역어가 그 의미를 더 올바르게 나타낸다. 6) 기독교 계시의 원천인 성서의 내용을 역사비평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성서의 저자와 성서 각서를 만들어 낸 신앙집단의 신앙원리 자체의 해명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 이를테면 성서 자체가 가진 신학 내용을 연구하려는 학문이다(백과사전). 7) 교회활동의 실천부분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분야로 원래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이른바 임상적인 일을 연구하는 신학으로 이해되었으나, 근래에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까지도 이 신학으로 확대 이해되고 있다(백과사전). 8) 기독교 신학의 역사성, 즉 기독교의 역사적 연구에 주안점을 두는 신학의 한 분야. 오늘날에는 교회사, 교리사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신학이 그리스도교를 역사현상으로 간주하고 연구대상으로 삼아 역사연구의 방법으로 처리하는 경우에는, 성서나 신앙의 체계적인 사고, 그리고 신앙적 실천도 모두 역사적 고찰의 대상이 되며, 성서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등도 그 일부 내지는 전체가 이에 포함된다. 요는, 역사와 신학에 각각 의의를 부여함으로써 역사신학의 내용과 범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백과사전).

그리고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9)이란 ‘계시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인간 이성의 수단으로 보고 신학을 전체적인 관련하에서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신학’이다.10) 즉, 기독교의 신앙 내용을 조직적으로 정리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 조직신학의 역할이다. 조직신학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①신론(神論) ②인죄론(人罪論) ③기독론 ④구원론 ⑤교회론 ⑥종말론으로 나누어진다.11) 기독교 신자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한 체계적 조망을 토대로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9) 성서신학, 역사신학 등이 과거성을 중시하는 데 반해, 조직신학은 실천신학과 더불어 현재성을 중시한다. 조직신학은 계시진리 그 자체의 직접적, 적극적인 증명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시진리를 다른 계시진리에 따라 해명하고, 또 계시진리에 대한 반박이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 온당하지 않은 것을 논증하여 계시진리를 옹호한다. 조직신학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용어이며, 가톨릭 신학에서는 사변신학이 이에 해당한다(백과사전). 10) 전성용, 《기독교신학개론》,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87, p.15. 11) 오병세 외, 《神學事典》, 개혁주의신행협회, 1978, p.622.

그런데 기독교 신학의 경우 위에 열거한 네 가지 분야 중 ‘조직신학’이 신학의 구심점으로서 역할한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을 제공하는 신학이 조직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신학에서는 신에 대한 규정(신론), 에덴동산에서의 원죄(인죄론), 대속자로서의 예수(기독론), 믿음을 통한 구원(구원론),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교회론), 최후의 심판과 세상의 종말(종말론) 등의 의미에 대한 조망을 말하고 있는데 이 중 그 어떤 분야에도 ‘객관성과 과학성을 표방하는 인문학’이 들어설 틈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신학적 조망은 ‘성서신학’과 ‘실천신학’ ‘역사신학’의 방향을 조절하는 지침으로 기능한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에서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조직신학’이다. ‘조직신학’은 그 비합리성, 비과학성으로 인해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 문화가 쇠퇴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꾸준히 그 내용을 변모시키며 현재까지 계승, 보급되고 있는 신학의 한 분야이다.

그러면 현대 불교학을 보자.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는 기독교의 성서신학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 불교학에서는 실천신학과 역사신학에 해당되는 연구는 물론이고 신앙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조직신학’에 비교되는 연구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역사적 연구, 비교철학적 연구 등 분과적(分科的) 연구만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을 뿐 그 모든 연구 성과들을 하나의 체계로 엮어 불교신자들에게 제공할 신행체계, 신앙체계로 구성해내는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독교는 계시(啓示)의 종교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불교는 자각(自覺)의 종교라고 한다. ‘초월적 계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 신학이라면, 불교학은 ‘내재적 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12) 12)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계시’에 대한 체험을 불교적으로 해석할 경우 삼계(三界) 내 중생신과의 ‘접신(接神)의 체험’이라고 격하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기독교와 불교를 동등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구문명이 세계사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이 시대에 불교가 기독교와 동등한 방식으로 연구되고 있지도 못하기에, 본고에서는 잠정적으로 대등한 종교로 간주하고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따라서 불교학은 원칙적으로 일반 인문학과 차별되면서 기독교의 신학에 비견될 수 있는 각학(覺學〓佛學)이어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신학을 포용하는 각학이어야 한다.13) 13) 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기독교의 신학을 규봉 종밀이 《도서(都序)》에서 말하는 ‘인천교(人天敎)’의 학(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물론 과거에는 각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불교학의 분야가 있었다. 각 종파에서 구성한 ‘종학(宗學)’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불교학계에서 새로운 종학을 구성하는 일은 학문 외적인 작업으로 간주된다. 대부분의 현대 불교학자들은 불교학 연구의 장에 ‘불교신앙’이 개입되면 불교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한다.14) 14) 그 예로 Lopez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티베트의 학승인) Jam yang shay ba와 Jang gya는 불전(佛典)을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으로 간주하기에 그들에게서 현대학자의 질문과 분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Lopez, A Study of Sva?antrika).

만일 불교학이 인문학의 한 분야에 불과하다면 이는 지극히 정당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신학과 비교해 볼 경우 이는 불교학자들의 자기비하적 연구태도임을 알 수 있다. ‘성서신학’의 경우, 즉 문헌학적으로 성경을 연구할 경우 신학자들은 대체로 인문학적 방법을 따른다. 그러나 그 이외의 신학 분야에 객관적·과학적·합리적 연구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신학의 주류는 인문학적 신학인 ‘성서신학’이 아니라, 인문학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신앙적 신학, 즉 ‘조직신학’이다. 불교학자에게 ‘당신은 불교인이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칼뱅이나 부루너, 폴 틸리히와 같은 조직신학자에게 ‘당신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당신이 연구한 신학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조직신학자들에 있어서 이와 같은 비판은 ‘꿈에도 생각해볼 수 없는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불교신앙을 갖고 있는 불교학자들에 대해, ‘기독교 신학에서는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는’ 비판을 당연한 듯이 퍼붓는다.15) 15) 수년 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불교학대회에 참석했던 어느 스님은, 그때의 분위기가 ‘불교에 대한 신앙적 연구는 물론이고 철학적 연구조차 불교학의 범위 내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한다.

물론 불교라는 종교현상에 대해 역사적·문헌학적·인류학적·비교철학적으로 연구할 경우 이런 비판은 타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가 하나의 신앙체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인문학적 방법에 의한 불교 연구는 불교학의 들러리로 머물러야 하며, 그 핵심에는 신앙적 연구가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불교학자의 층이 가장 두터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불교학 연구자들은 대부분 서구 인문주의의 최면에 빠져, 기독교의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신앙적 불교 연구’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4. 인문학과 불교학의 공통점과 차이점

앞에서 필자가 신학에 비견되는, 또는 신학을 포용하는 불교학의 필요성을 말하긴 했지만, 신학과 비교할 때 불교학은 인문학적, 과학적 연구방법에 대해 보다 호의적이다.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우리가 인간과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 탐구할 경우 결국 불교적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아인슈타인(Einstein) 역시 자신의 회고록인 《만년의 회상(Out of my later life)》에서 불교는 과학에 대한 연구를 격려해 주는 우주종교적 요소가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는 종교라고 말하며 극찬한 바 있다.16) 16) 아인슈타인, 곽복록 역, 《만년의 회상》, 상서각, pp.342∼346.

‘불교에 대해 아는 바는 없으나 꽃이 지는 모습 등에 대해 관찰하여 연기의 법칙을 터득함으로써 깨닫는다’는 벽지불(퇳支佛, 緣覺 또는 獨覺)의 진리 접근 방식과 ‘전제 없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인문학자’의 진리 접근 방식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서구인들의 인문학적 불교 연구 중 문헌학적 연구가 불교 연구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 수많은 원전들을 발굴·교정·번역·주석하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불전들을 대조함으로써 모호한 불교 술어의 의미를 생동감 있게 살려내는 작업들은 모두 서구인들에게서 시작된 철저한 문헌학적 연구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서구나 일본에 비해 범어나 빠알리(Pa?i)어 불전 연구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 나라의 경우는 앞으로 문헌학적 연구가 한층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는 중시되었다. 송판 대장경과 거란본 대장경 등을 대조하면서 정본(正本)을 선택하고 오자와 탈자를 수정하는 치밀한 문헌학적 작업 이후 판각된 고려대장경은 과거 동아시아에서 출간되었던 대장경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대장경으로 칭송되고 있다.17) 17) 그 교감 기록서인 수기 스님의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이 현존한다.

이렇게 ‘전제 없이 발견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믿음과 ‘엄밀한 문헌학적 연구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불교학의 연구 방법은 공통된다. 그러나 문헌학적 연구 결과에 토대를 두고 철학적, 역사적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 인문학과 불교학의 방법론은 구분되어야 한다.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는 불교에 대해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경우 ‘원시불교에서 발달(發達)불교까지를 일관하는 불교사가 성립한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만이 불교학의 범위 내에 들어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18) 18) 平川彰, 〈佛敎學と宗學〉, 《東洋學術硏究》, 東京, 東洋哲學硏究所, 1981, p.9.

‘각 시대의 불교사상에는 불교의 일미성(一味性)이 구현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연구만이 불교학의 범주 내에 포함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불교연구자들은 이와 달리 불교사상사의 흐름을 서양철학사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반동(反動)의 역사로 기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인문학적 불교연구자들은, 후(後)시대의 불교사상은 전(前)시대의 불교사상을 부정하며 탄생했다고 간주한다. 부파불교를 실재론으로 규정하고, 중관불교를 비판적 절대론으로, 유식불교를 관념론으로 규정하는 무르띠(Murti)19) 등의 시도는 신앙이 배제된 인문학적 불교연구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자칭 군웅’이 할거하는 서양철학사에 대해 기술할 때, 각 시대의 사상을 이렇게 차별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적 견지에서 불교를 조망할 경우 ‘일불소설(一佛所說)’에 연원을 두는 불교사상사는 반동이 아니라 계승의 역사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 전개과정은 ‘불교의 일미성의 회복을 위한 외피적 변모의 역사’라고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19) T.R.V. Murti,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다시 말해 불교의 근본 취지가 망각될 때 이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외피를 갖는 불교사상이 탄생했던 것이지, 전시대의 불교를 부정하기 위해 다음 시대의 불교사상이 출현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에서 불교사상사가 해석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설법이 대기적(對機的) 설법이었던 것과 같이, 각 시대마다 출현한 불교사상들은 대시대적(對時代的) 사상들일 뿐 서로를 부정하는 이질적인 사상들일 수는 없다. 이는 ‘신앙적 불교사’ 연구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전제’이다.

인문학의 경우 독창적 학설을 발표하는 학자일수록 높은 영예를 얻는다. 따라서 인문학적 방법에 의해 불교를 연구할 경우 불교학자는 불교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상치되는 학설을 발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고마자와(駒澤) 대학의 비판불교(Critical Buddhism) 운동가들20)은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서슴없이 편다.21) 20) 《緣起と空》을 저술한 마츠모토 시로(松本史郞), 《批判佛敎》를 저술한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 이들의 주장과 이에 대한 비판이 ‘Pruning the Bodhi Tree’라는 이름의 책으로 묶여 하와이 대학에서 출간된 바 있다. 21) 이 운동의 정치적 의도와 문헌학적·교학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비판불교의 파라독스》(고려대장경연구소 刊)를 참조하기 바람.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대승기신론》의 사상에 감복하여 많은 저술을 남긴 과거의 불교인들은 모두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인문학적 불교학자들의 치기에 찬 ‘독창적 학설’은 본인 한 사람만의 불명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불교신행자들을 오도하는 무간업(無間業)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인문학적 방법에 의한 불교학 연구를 모두 금지시킬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불교신행자에게 제공되는 ‘신앙으로서의 불교학’과, 다양한 담론이 허용되는 ‘인문학적 불교학’을 분리시킴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5. 향후 불교학의 바람직한 방향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의 문제점은 ‘신앙으로서의 불교학’이 연구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기독교 신학의 경우,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대에도 ‘신앙으로서의 신학’, 즉 신앙체계로서의 ‘조직신학(또는 체계신학)’이 신학 연구의 구심점 노릇을 한다. 그러나 현대 불교학의 경우 이렇게 신앙체계로서의 불교에 대한 연구가 망실되어 있으며, 불교는 문헌학적·철학적·역사학적 연구의 대상일 뿐이다. 혹 여기서 더 나아간다고 해도 불교 교리 중 일부를 채취하여 사회·인문·자연현상의 해석에 적용해 보는 응용불교학 정도의 연구가 고작이다.

대소승을 포괄하여 불교를 신행, 또는 신앙체계로 묶어내는 연구는 학계의 중심에서 연구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불교학은 기독교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體系神學)에 비견되는 불교학으로 체계불학(體系佛學, Systematic Buddhology)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22) 22) 김성철, 〈Systematic Buddhology와 보리도차제론〉, 불교학연구회, 2001년 추계 학술대회 자료집 참조.

기독교에서 칼뱅·웨슬리·폴 틸리히·부루너 등 수많은 조직신학자가 출현하였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조직신학자들이 출현하듯이, 앞으로 불교계에서도 수많은 체계불학자들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인문학적 불교학은 ‘체계불학’을 위한 자료실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며, 인문학적 불교학의 다양한 연구성과들이 현재와 같이 불교신행의 장에서 무분별하게 가르쳐져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신행자에게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인문학적 연구성과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취합하여 재조직한 이러한 체계불학이 가르쳐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적 불교학 분야에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도출되었을 때 타당한 내용은 언제든지 수용될 수 있도록 체계불학은 열린 체계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불교학 연구에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이라는 분야가 개설될 때, ‘인문학적 불교 연구자’도 자신의 신앙성에 대한 번민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고, 일반 불교신행자도 ‘체계불학’에 의거하여 신심 가득한 불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체계불학의 내용은 어떠해야 할까? 체계불학에는 인생과 세계 전반에 대한 불교적 조망도 담겨 있어야 하지만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모든 신행자를 진정한 불교인으로 만들어내는 불교신행의 구체적인 방법이 담겨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불교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체계를 넘어서 ‘불교신행자의 심성을 향상시키는 체계’이어야 한다. 즉, 진정한 ‘각학(覺學)’이어야 한다.

기독교 조직신학의 경우는 하나의 신을 우러르며 신앙생활을 하는 동질적 신자집단을 위한 신앙체계로서 구성되기에 그 내용이 평면적이다. 조직신학의 여섯 가지 주제인 ①신론 ②인죄론 ③기독론 ④구원론 ⑤교회론 ⑥종말론에 대해 공부할 경우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이에 대해 동일한 조망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나 아라한 등이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와 아울러 수행을 통해 성취해야 할 궁극적 목표가 되기도 한다. 신행의 수준과 수행의 깊이에 따라 불자들의 추구하는 바가 달라지며, 인간과 세상을 보는 안목 역시 달라진다. 따라서 불자들의 신행 지침이 될 체계불학을 구성할 경우 그 내용은 입체적이어야 한다. 즉 불보살 등의 성중(聖衆)과 인간과 세계 등에 대한 평면적 모습도 제공되어야 하지만 그와 함께 성불을 향한 수직적인 향상체계도 제시되어야 한다.

또, 현대적인 체계불학을 구성할 경우 과거의 종학과 비교하여 보다 증광(增廣)되어야 할 부분은 재가자의 신행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들이다. 불전의 내용 대부분은 전문 수행자를 위해 설해진 것들이다. 오랜 시간 동안 깊은 사색을 거쳐야 이해되는 심오하고 방대한 교리, 좌선 수행……. 이에 대한 공부와 수행은 생업에 분주한 대부분의 재가자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의 체계불학에서는 불교신행과 일상생활이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활기차며 지혜롭고 선량한 불자로 살아가게 해주는 재가자의 신행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야 할 것이다.

6. 체계불학의 한 예 : 티베트의 《보리도차제론》

마치 기독교의 조직신학이 그러하듯이, 체계불학은 불교학자의 학문적 역량과 안목에 따라 여러 가지 체계가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기독교의 조직신학과 달리 체계불학은 출가자를 위한 체계불학23)과 재가자를 위한 체계불학으로 구분되어 연구될 수도 있을 것이다. 23) 종범 스님께서는 이를 ‘승가학’이라고 명명하며 오래 전부터 그 필요성을 역설하신 바 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체계불학들은 자연히 다른 불교학자의 교리적 검토와 전문수행자, 재가불자들의 실천적 검토를 받게 될 것이고, 그 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체계불학만이 보편적인 불교 신행법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불교학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불교학, 또 불교신행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불교학, 즉 체계불학을 구성하는 것은 불교를 신앙하는 모든 불교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숙고하며 풀어내야 할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백년 동안 티베트 불교인들의 강력한 신앙심의 원천이 되어 온 쫑카빠(Tsong kha pa, 1357∼1419 C.E.)의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Lam rim)》24)에서 이러한 ‘신앙으로서의 불교학’, 즉 체계불학(Systematic Buddhism)의 전형적 모습이 발견된다. Lopez가 말하듯이 쫑카빠는 《보리도차제론》을 저술함으로써 인도에서 저술된 불전의 내용을 체계화(Systematization)하였던 것이다.25) 24) Lam rim(道次第): 《보리도차제론》에 대한 약칭이다. 쫑카빠는 대본(大本)인 《보리도차제광론(Byang chub Lam rim chen mo)》, 중본(中本)인 《보리도차제약론(菩提道次第略論)》, 소본(小本)인 《보리도차제섭송(菩提道次第攝頌)》의 3본(三本)을 저술하였다. 《보리도차제광론》은 중국의 법존(法尊) 스님에 의해 1927년 한역된 바 있으며, 1978년(상사도 지품, 관품), 1991년(상사도, 보살도), 2000년(하사도, 중사도)에 서구의 학자들에 의한 영역본이 출간되었다(총3권). 법존 스님의 한역본은 중국의 조선족 불교학자들에 의해 한글로 중역되어 국내에 보급된 바 있다. 현재 부산 광성사의 주지인 체링 초펠 스님이 《보리도차제론》을 요약하여 《깨달음으로 가는 올바른 순서》(여시아문 출판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한 바 있으며, 최근 《보리도차제론》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강연집이 국역되어 《깨달음의 길》(부디스트닷컴 출판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5) Lopez, A Study of Sva?antrika, p.29.

《보리도차제론》은 티베트에서 저술된 ‘회통적 불교신행서’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러면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앞으로 한국적 체계불학이 구성될 경우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불학을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26) 26) 이하 《보리도차제론》의 내용에 대한 개관은 ‘김성철, 《Systematic Buddhology와 보리도차제론》(불교학연구회)’에 실린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다.

쫑카빠의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불학은 서력 기원후 1038년 입국한 인도의 고승 아띠샤(Atis첺, 980∼1052 C.E.)의 교학에 연원을 둔다. 아띠샤는 무분별한 밀교행법으로 인해 타락한 양상을 보이던 당시의 티베트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 Bodhipathapradl?a)》을 저술하게 된다. 《보리도등론》에서는 불교신행의 길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선업을 지어 윤회의 세계 내에서 향상을 추구하는 범부의 길로 하사도(下士道)라고 부르고, 둘째는 깨달음을 추구하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승적 수행자의 길로 중사도(中士道)라고 부르며, 셋째는 중생의 제도를 위해 윤회의 세계 내에서 살아가는 발보리심한 대승 보살의 길로 상사도(上士道)라고 부른다. 이렇게 아띠샤에 의해 제시된 불교신행의 체계는 그 후 약 350년이 지나 티베트 불교의 대학장(大學匠) 쫑카빠(Tsong kha pa, 1357∼1419 C.E.)의 출현에 의해 완성된다.

쫑카빠는 1402년 《보리도등론》의 신행체계에 입각하여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은 《보리도차제론》을 저술하게 되는데, 쫑카빠 이후 현재까지, 달라이 라마(Dalai Lama27))28)가 소속된 겔룩(Dge lugs)파에서는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를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보리도차제론》의 출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티베트에서는 그에 대한 수백 권의 해설서와 강의록, 요약집이 출간되었다.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불학은 티베트 불교인들의 강력한 신앙심의 근원인 것이다. 27) Dalai(바다) Bla ma(스승): 바다와 같이 드넓은 지혜를 갖는 스승. 1578년 몽고의 Altan Khan왕자가 겔룩파의 제3대 종정에 대해 부여한 경칭. 제5대 달라이 라마 시대에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전체의 통치권을 갖게 된 이후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된다(The Encyclopedia of Eastern Philosophy and Religion, Shambhala, Boston, 1994, p.83). 28) 쫑카빠의 조카이며 직제자인 게뒨둡(Ge dun dub)은 1439년 겔룩파를 창시하며 제1대 달라이 라마로 취임한다.(L. Austine Wadell, 앞의 책, p.63) 그 후 현재의 제14대 달라이 라마에 이르기까지 환생을 되풀이하면서 겔룩파를 이끌고 있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불교입문에서 마지막 보살행에 이르기까지 불교 신행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수행방법에 대해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 할 지식

    ① 《보리도등론》을 저술한 아띠샤의 전기
    ② 본 교법의 장점
    ③ 교법을 배우는 자의 자세
    ④ 교법을 가르치는 자의 자세


    1. 하사도―삼악도를 벗어나 내생에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길

    ① 죽음과 무상에 대한 사유 : 명예욕과 재물욕에서 벗어나 진정한 종교심이 발생함.
    ② 삼악도와 천상의 고통에 대한 사유 : 인간의 소중함을 자각.
      삼악도의 고통: 지옥·아귀·축생의 세계의 고통에 대한 상세한 설명.
      천상(天上)의 고통: 공포심(恐怖苦). 사고(死苦) 등.
    ③ 삼보에의 귀의.
    ④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
    ⑤ 선행과 악행의 기준을 제시한다 : 십선계(十善戒).

    2. 중사도―번뇌를 끊고 삼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고자 하는 출리심(出離心)의 성취.

    ① 사성제 중 고성제에 대한 사유 : 출리심을 강화한다. 생로병사의 사고와 팔고에 대한 생각을 체화한다.
    ② 사성제 중 집성제에 대한 사유 : 고의 원인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삼독심을 끊을 것을 다짐한다.
    ③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대한 사유 : 윤회의 과정과 해탈의 이치에 대해 이해한다.

    3. 상사도―대보리심을 발하여 불과(佛果)를 위해 보살행을 닦는 길

    ① 보리심을 발생시킨다.
      7종인과(七種因果): 지모(知母)→염은(念恩)→보은(報恩)→자심(慈心)→비심(悲心)→강화(强化)→대보리심(大菩提心)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 나와 남을 바꾸어 봄으로써 자비심을 훈련함.
    ② 보살행의 실천.
      육바라밀: 자신의 불성(佛性)을 성숙시킴.
      사섭법: 다른 중생을 섭수(攝受)하여 그 불성을 성숙시킴.
    ③ 육바라밀 중 선정 바라밀에 해당하는 사마타(s첺matha, 止) 수행에 대한 상세한 부연 설명.
      오정심(五停心): 부정관·자비관·연기관·계분별관·수식관.
      관불(觀佛)수행: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수행.
    ④ 육바라밀 중 반야바라밀에 해당하는 비파샤나(vipas쳙ana? 觀) 수행에 대한 상세한 부연 설명.
      아공과 법공에 대한 자각(淸淨見)을 지향한다.
      사마타(止)가 성취된 경안(輕安)의 상태에서 《중론》에 대해 귀류논증(歸謬論證)적으로 이해함(觀). 관이 깊어져 지가 흩어지면 다시 지로 들어간 후 관을 닦는 지관 쌍운(雙運)의 수행을 함.

불교 입문자는 먼저 하사도의 신행부터 철저하게 터득해야 한다. 하사도의 신행에서는 ‘죽음에 대한 명상’과 ‘삼보에 대한 귀의’와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을 중시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게 되어 진정한 ‘종교심’이 발동하게 된다. 삼보는 우리를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이며, 인과응보의 이치는 우리로 하여금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지어 향상하는 삶을 살게 해주는 지침이 된다.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품었거나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경우, 우리는 그 자리에서 즉각 참회해야 한다. 하사도에서는 내세에 초래될 악업의 과보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계행을 지키는 도덕적 삶을 살게 만든다. 즉 하사도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 강력한 ‘도덕성’이 각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하사도의 삶은 재가자나 출가자가 공통적으로 닦고 익혀야 할 수행으로 이런 수행이 체화된 사람만이 전문 수행자의 길인 중사도로 들어설 수 있다.

중사도에서는 ‘출리심(出離心)’을 가르친다. 하사도에서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더라도 우리는 기껏해야 하늘나라(天上)에 태어날 뿐이다. 하늘나라 역시 윤회의 세계에 속하기에 자신이 지었던 선업의 과보가 소진되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고 만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하늘나라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늘나라에도 고통이 있다.

자신보다 공덕을 많이 쌓아 지위가 높아진 천신에 대한 공포와 하늘나라에서 사망할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 등이다. 하늘나라에 태어난 자는 신통력을 갖기에 죽은 후 자신이 태어날 곳을 미리 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며 자신이 지었던 복을 모두 탕진하였기에 다시 태어날 때는 대개 축생이나 아귀, 지옥과 같은 삼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천신은 죽을 때 내생의 자신의 출생처를 보고 극심한 공포에 떤다.

따라서 우리가 선업을 짓고 공덕을 쌓는 하사도의 삶을 살더라도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윤회의 세계 내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장소는 없다. 이때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하겠다는 ‘출리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중사도는 한마디로 소승적인 수행자의 길이다. 중사도의 수행자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번뇌를 다스려 윤회로부터의 출리, 즉 해탈을 지향한다. 그리고 중사도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와 같은 소승의 교학에 입각해 닦는다.

그러나 해탈을 지향하는 중사도가 불교신행의 종착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윤회의 세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다른 중생들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수행자는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성불(成佛)을 서원하는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된다. 그래서 해탈을 유예하고 윤회의 세계 내에서 살아갈 것을 다짐한 후 상사도인 보살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러한 보리심을 발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모든 중생을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생각(知母)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7종인과에 대한 관찰(觀察)’을 닦을 것을 권한다. 무시겁(無始劫) 이래 우리가 윤회해 오는 동안, 지금 눈앞에 보이는 벌레와 같은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 나의 어머니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知母).

어머니의 은혜는 지대하다(念恩). 그렇다면 우리는 전생에 언젠가 나의 어머니였던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다(報恩). 이렇게 계속되는 ‘분별을 통해 자비심을 키우는 수행’이 7종인과의 수행이다. 또 보리심은 ‘나와 남을 바꾸어 보는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의 수행에 의해 강화된다. 이렇게 보리심을 발한 자는 계속 윤회하며 보살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데, 발보리심 이후 육바라밀과 사섭법에 의거해 보살의 삶을 살 경우 삼아승지(三阿僧祇, asam.khya: 無數)겁이 지나면 성불하게 된다. 그리고 사마타(s첺matha, 止)와 비파사나(vipas쳙ana? 觀)의 쌍운(雙運)에 의해 얻어지는 ‘청정견(淸淨見)’, 즉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대한 지혜는 올바른 보살행을 위한 좌표가 된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하사도는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반드시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共同道)이고, 중사도는 소승과 대승이 모두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이며, 상사도는 일반적 대승 수행자와 밀교행자가 모두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밀교행자의 경우는 상사도까지의 수행이 완성되고 나서 선지식에 의해 대관정(大灌頂)을 수지한 후 밀교수행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밀교수행은 삼아승지겁이 걸릴 성불까지의 기간을 현생에서의 즉신성불(卽身成佛)로 단축시켜 주는 수행이라고 하는데29) 밀교수행의 차제에 대해 쫑카빠는 《비밀도차제론》이라는 저술을 통해 별도로 설명한다. 29)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렇게 성불의 기간을 단축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시급히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보리심, 즉 대자비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사도의 마음가짐이 체득되지 않은 중사도의 소승 수행자나, 하사도와 중사도의 마음가짐이 체득되지 않은 대승 수행자는 결코 상사도의 지관 수행이나 그 이후의 밀교 수행에 들어갈 없다고 쫑카빠는 말한다. 이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덧셈을 익혀야 곱셈을 배울 수 있고, 곱셈에 익숙해져야 인수분해 문제를 풀 수 있으며, 인수분해 문제를 능란하게 풀 수 있어야 미분학을 공부할 수 있듯이…….
지금까지 《보리도차제론》에 제시되어 있는 불교신행과 수행체계에 대해 간략히 조망해 보았다. 《보리도차제론》은 단순한 불교이론서도 아니며, 한 종파의 교리를 선양하기 위한 종학서(宗學書)도 아니다. ‘재가불자와 출가수행자’ ‘소승불교도와 대승불교도’ 모두의 신행과 수행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보편성을 띤 체계불학서로서 저술되었다. 그리고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 수행법에 단계를 매겨 제시한다.
    ② 앞 단계의 수행을 통한 심성이 체화되지 않은 자에게 다음 단계는 허용되지 않는다.
    ③ 모든 수행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여 자발적 수행이 되게 한다.
    ④ 매 단계의 수행 방법과 그 결과, 또 경계해야 할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⑤ 수행의 대부분이 ‘관찰수(觀察修)’라고 불리는 ‘분별과 반복된 생각을 통한 익힘’이다.
    ⑥ 재가와 출가, 소승과 대승 모두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보편적 수행 체계를 제시한다.

앞으로 그 어떤 불교권에 소속된 학자든 현대 불교학의 연구성과에 토대를 두고 새로운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을 구성하고자 할 경우 《보리도차제론》의 체계가 그 골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리도차제론》적인 각학, 즉 체계불학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불교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불교인으로서의 심성’이다.

    ① 종교심: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출가의 마음’
    ② 도덕성: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어진 ‘지계의 마음’
    ③ 출리심: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탈의 마음’
    ④ 보리심: 모든 생명체를 어머니와 같이 대하는 ‘자비의 마음’
    ⑤ 청정견: 지관(止觀) 수행에 의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체득한 ‘지혜의 마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①종교심 → ②도덕성 → ③출리심 → ④보리심 → ⑤청정견’의 순서로 공부되어야 이런 다섯 가지 심성이 수행자에게 진정으로 체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이 중 어느 하나의 심성이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성불을 지향하는 보살행자일 수 없다.

이러한 《보리도차제론》의 수행체계는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한국적 체계불학을 구성하는 데 좋은 참고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첫째, 《보리도차제론》은 티베트에서 만들어진 교학이긴 하지만, 밀교 수행 이전에 갖추어야 할 심성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그 내용이 특정 종파의 색채를 띠고 있지 않으며, 둘째 대승경론에 토대를 두고 조직된 교학이기에 우리 불교의 전통에 위배되지 않으며, 셋째 저술된 이후 지금까지 600여 년간 티베트인들을 강렬한 불교신앙인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종교적 위력이 검증된 체계이기 때문이다.

《보리도차제론》을 참고하여 한국적 체계불학을 구성할 경우 현재 수행자들 사이에서 ‘즉신성불의 밀교수행’에 비견된다고 평가되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선(禪)수행’은, 티베트에서 밀교 수행이 그러하듯이 다섯 가지 심성의 체화 이후에만 허용되는 최정상의 수행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불교교육은 이렇게 하여 구성된 한국적 체계불학의 지침에 의거하여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성철
서울대 치의학과 및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논문으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 〈역설과 중관논리〉, 역서로 《중론》 《회쟁론》 《불교의 중심철학》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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