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키온과 안옥선, 그리고 서재영의 경우-

1. 시작하는 말; 이제 응용불교윤리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자!

우리 주변에서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들으면 그럴듯하고 읽어보면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재주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으면, 그리고 타고난 재주가 어쩌면 저렇게 나와는 다를까 하는 생각에 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윤리적 삶은 자신들이 한 말이나 글과 크게 다른 경우가 많아 곧 인격적인 실망을 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이처럼 말과 행동, 곧 이론과 실천이 어긋나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항상 있어왔던 일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의 경우는 문제가 있다는 정도를 넘어 말 그대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불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불교(학)계를 향해 이와 유사한 뉘앙스를 담은 지적을 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예컨대, “불교는 말은 화려하지만 실제로 하는 행동을 보면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라거나 “듣는 동안에는 참으로 그럴듯하지만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행동원칙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평가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불자인 나도 처음에는 이런 말들에 쉽게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의 말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는 아마도 불교교학에서 차지하는 불교윤리학의 비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말하자면 불교라는 위대한 종교가 다른 교학사상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교윤리학에 대한 연구와 적용을 소홀히 해온 결과가 이와 같은 사회적 평가를 초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너무 단정적인 표현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불교학 일반의 연구 경향은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출가불교 고유의 종교적 특성상 이의 달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계율 내지는 불교윤리의 현대적 해석이나 그 응용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계율의 준수나 도덕적인 행위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 정도의 역할과 기능만 인정받았을 뿐 더 이상의 교학적인 의미는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윤리와 관련된 쟁점들은 깨달음과 같은 고차원의 경지에 비해 깊이가 없고(?), 따라서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는 덜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가정을 해 본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1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가 고작 200여 년 남짓한 이웃 종교들에 비해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인 영향력 면에서 오히려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상황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면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외부와 접촉하고 정서적 공감대를 넓혀가는 과정에는 그 사상의 대사회적인 표현이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도덕)’라는 매개체의 선전성과 기여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는 곧 어떤 종교나 철학 사상의 수용 범위가 특정한 지역이나 계층을 넘어 광범위한 설득력, 즉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한국불교는 바로 이 점에서 적어도 인식의 부족을 드러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와 같은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근래 들어 서구의 일부 불교윤리학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지적 관심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예컨대, 키온(Damien Keown)이나 하비(Pr Harvey), 그리고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 등의 연구 결과물들은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종전의 불교학자들과는 달리 경전의 윤리적 언급들을 서양윤리학의 전통적 형식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맥락과 관련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응용하려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우리나라의 불교학계 내에서도 그와 같은 연구 동향에 자극받아 불교윤리를 서양윤리학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그 성과를 생명(생태)윤리 문제와 같은 도덕적 갈등 상황의 해결 방안 모색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계율의 반복적인 암송을 되풀이하던 ‘불교윤리’의 수준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 분과이자 생활불교의 이론적 토대가 될 ‘응용불교윤리학’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자 구체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 분위기의 성숙은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진정한 인문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여기서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필자는 종교의 윤리화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현명한 포교수단이자 전략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동안 불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깨달음’을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본질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 대해 무슨 얼토당토하지 않은 시비인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한국불교공동체의 사회적 인식도나 감각, 그리고 대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 본다면 이 말의 진정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윤리학의 최근 연구 동향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학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음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국 런던대학의 데미언 키온 교수와 순천대학의 안옥선 교수, 그리고 서재영 박사의 대표적인 저술을 중심으로 그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 비판적인 평가를 시도해 보기로 한다.

2. 데미언 키온의 응용규범윤리학적 접근

런던대학의 데미언 키온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불교윤리학자로서 우리나라도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유명 인사이다. 작년에는 동국대학교 개교 100주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여 환경윤리와 덕론의 관계를 다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인 관심은 불교를 서구인들의 가치관과 문화적 정서에 맞게 윤리학적으로 리모델링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의 불교윤리학적 입장은 보다 실용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논리는 단순명료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불교인들이 참고할만한 실질적인 행위지침이 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키온은 자신의 이러한 불교윤리학적 접근방법을 ‘응용규범윤리학(applied normative ethics)’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불교가 좀더 보편적인 진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현대사회가 야기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불교 고유의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지금까지 서양의 철학과 종교의 시각에서만 다루어져 왔던 낙태, 뇌사와 장기이식, 태아실험, 식물인간, 자살과 안락사, 성과 출산, 인공수정, 동물과 환경, 전쟁과 테러리즘 등과 같은 생명(생태)윤리 문제들에 대해서도 불교윤리의 견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윤리적 태도는 불살생계를 다른 어떤 계목보다도 앞세우는 불교윤리의 근본적 취지와도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본다. 여기서 그가 행위의 선악 및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으로 삼고자하는 세 가지 기본적 선인 ‘생명(life)’ ‘지식(knowledge)’ ‘우정(friendship)’은 불교적 덕목들의 현대적 요약이자 보편화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조심스러운 시도로 여겨지며 나름대로 설득력과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준을 적용하여 예컨대, 태아연구(embryo research)와 관련된 불교윤리학적 입장을 한 번 도출해 보기로 하자.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태아에 대한 파괴적 실험은 우선 ‘생명’이라는 기본적 선을 직접 공격한 행위이자 첫 번째 계율인 불살생계의 파기를 의미한다. 만약 이 연구의 목적이 이론적인 ‘지식’에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 ‘지식’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이는 곧 기본적인 선의 도구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는 -만일 그것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비심과 병을 낫게 하려는 순수한 욕구에 의해 동기부여 되었다면- 허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키온에 따르면 한 생명 존재에 대한 자비심은 다른 존재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개념은 보편적인 자비심의 예라기보다는 선별적 자비심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스토트(David Stott)의 다음과 같은 말은 키온 자신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노선의 논증은 붓다의 다르마와 명백히 모순된다. 붓다가 언제부터 다른 존재의 이익을 위해 한 존재를 죽이는 것을 옹호했는가?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자비심’은 스승 붓다가 가르치고 있는 차별 없는 무한한 자비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설사 태아연구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실험은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을 ‘우정’에 종속시키는 대가를 치루고 나서야 달성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선은 개인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본질적 선 및 육체적 선 모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생명’이란 선은 -어떤 공리주의자가 선이 ‘최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추상적으로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의 유익한 결과를 통해 다른 많은 생명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태아연구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실험과정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 연구가 가령, ‘치료적’ 실험과 같은 피실험자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태아의 초기 발달단계에서 그것에 대한 치료가 가능한 유전적 이상을 발견했지만, 그 치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실험이 행해져야만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아가 윤리적 판단능력이 있는 성인 환자가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실험절차에 대해 현명한 동의 절차를 거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여기서 이 상황은 이런 저런 이유로 현명한 동의를 할 수 없는 다른 환자들, 예컨대 어린 아이들과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환자들의 상황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충족되어야 할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 전형적이다. 즉, 그 절차는 환자들에게 치료와 관련된 실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 그에 따른 위험성과 혜택이 동시에 조심스럽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환자나 법적 대리인으로부터 현명한 동의를 얻는 과정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온은 이러한 기준들을 태아연구에 적용할 연구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말은 계속된다. 비록 이 단계의 태아가 완전한 의미의 인간생명을 부여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생에서는 생명을 부여받았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시신이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듯이 태아는 단순히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사용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거의 모든 태아실험들은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키온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키온은 ‘치료복제(therapeutic cloning)’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줄기세포를 얻는 실험과정에서 결국 파괴시키게 될 배아(인간생명)를 인위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아힘사(ahimsa), 즉 비폭력의 원리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는 치료복제 실험의 자비로운 동기와 상관없이 -그것은 또한 과학적인 호기심과 재정적인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불교는 죽음을 다루는 실험에 참여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다른 생명(더 많은 생명조차도)을 구하기 위해 하나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허용하는 공리주의적 사고방식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기술 자체를 둘러싼 문제들과는 별도로, 생명복제는 다른 모든 인간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는 동일한 일반적 도덕표준에 따라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관련된 사람들의 동기가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 건전한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개인과 사회 전체에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한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인간 존엄성의 침해로부터 1930년대와 40년대의 우생학 프로그램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이 있어 왔고, 이러한 우려는 결코 가볍게 무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배아의 치료복제가 가져 올 분명한 혜택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는 것이 키온의 지적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이 인간복제실험의 주요 동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의 불교인들은 인간생명을 파괴하면서까지 그와 같은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에는 회의적일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의 이른바 응용규범윤리학적 접근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살생계와 그것의 근본 취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윤리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키온은 세 가지 기본적인 선인 ‘생명’ ‘지식’ ‘우정’의 단계적 적용 내지는 우선적 적용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러한 키온의 견해는 생명윤리와 관련된 구체적 갈등상황에서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생생한 현장지식이라는 장점이 있다. 이는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정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윤리적 판단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키온의 견해는 나름대로 참신할 뿐만 아니라 유용한 측면이 적지 않은 것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생명윤리학의 시론적 성격이 강한 나머지 다소 작위적인 경전 인용이 없지 않다는 지적과 함께 팔리어 텍스트 및 붓다고사의 주석서에만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한계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키온은 불교윤리가 함축하고 있는 사상의 폭과 깊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양한 주제를 통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안옥선의 덕론적 접근

국내에서 불교윤리학을 연구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순천대의 안옥선 교수가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서울; 불교시대사, 2002)에서 초기불교윤리의 기본적 성격을 ‘탐진치 지멸의 성품형성’의 가르침, 즉 일종의 덕윤리 패러다임으로 보고 있다. 그는 초기불교윤리에 대한 덕윤리적 이해의 시각은 빈곤, 인종차별, 성차별, 생명/의료문제, 혹은 생태/환경문제와 같은 응용윤리학적인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는 덕윤리적 접근을 통해서 본 불교환경윤리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간단하게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에 따르면 불교환경윤리학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변화, 예컨대 의식의 변화, 행동의 변화, 습관의 변화, 삶의 양식의 변화 등에 호소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변화의 핵심은 바로 탐진치 지멸의 성품형성에 있다고 본다. 그는 이 탐진치 지멸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자비심의 배양과 확산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덕의 윤리의 관점에서 환경문제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는 것은 불교윤리가 덕의 윤리라는 원론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진치에서 비롯되는 환경문제가 탐진치 지멸, 즉 반탐진치의 성품형성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탐진치 지멸의 성품이 갖는 환경윤리학적 의미는 이러한 성품이 자연회복/보호로 귀결된다는 데 있다. 탐진치 지멸의 성품형성에 의해서 행동/생활방식의 변화가 초래되고 그 결과 자연도 오염상태에서 정화된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연회복 내지 청정의 정도는 탐진치 지멸의 정도와 비례한다. 탐진치 지멸의 성품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자연의 정화도도 높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탐진치 지멸에로의 성품형성은 자연적으로 정화된 자연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현재의 오염된 자연은 우리의 행동, 말, 생각의 산물이며 반영이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 말, 생각은 우리의 성품의 표현이므로 현재의 우리의 자연은 우리의 성품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탐진치를 지멸하는 성품을 형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안옥선은 “탐진치 지멸의 성품은 긍정적으로 서술될 때 자비의 성품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자신만을 위한 탐욕(탐)이 사라질 때, 대상에 대해 싫어하거나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진)을 버릴 때, 그리고 다른 존재에 대하여 관계단절적이거나 대립/배타적인 어리석은 마음(치)을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존재들에 대하여 자비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탐진치 지멸을 긍정적으로 서술할 때 자비의 마음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대답한다.

그와 같은 “자비심이 외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자비심이 나 이외의 다른 대상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심의 이러한 외화 과정은 자비심을 자신으로부터 타인에게로, 더 나아가서는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로 확산적용하여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자비심, 즉 다른 존재에 대한 동정심은 다른 종교윤리 전통에서와는 달리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체에게까지 적용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경전에서는 인간 또한 다른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생명체들-그것들이 약한 생명체이든지 강한 생명체이든지 막론하고-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라. 나는 그들과 같고 그들은 나와 같다. 나를 그들과 같다고 여겨 상해하지도 말고 그들로 하여금 상해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불교의 동정심은 어떤 종류의 생명체에 한정되지 않고 원칙적으로 모든 자연현상에까지 확산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근본교설인 ‘연기’와 ‘무아’ 및 ‘공사상’에 따르면 생명체와 무생물은 사실상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생물도 생물과 연기적 구조 속에 하나로 연계되어 있어서 생명을 구성하는 생명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비심의 확산원리로서 동정심은 무생물의 영역을 포함한 존재의 전 영역에서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생명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은 남과 전적으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종족은 여타의 동물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생각, 동물은 식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 구조를 갖는다는 생각, 생물은 무생물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생각 등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정관념이야말로 비불교적인 것이자 근거 없는 우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안옥선이 말하는 “덕윤리의 관점에서 본 불교환경윤리학은 환경문제의 근본원인을 탐진치라고 본다. 따라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탐진치 지멸에 있으며 불교환경윤리학은 탐진치 지멸의 성품형성을 통한 인간변혁, 그리고 인간변혁에 의한 자연보호를 목표로 한다. 그런데 탐진치 지멸의 성품형성은 긍정적인 말로 이해될 때 자비의 성품형성을 의미하며, 자비의 성품형성은 자비심의 배양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자비심의 무한 확산으로 귀결된다. 자비의 성품형성과 이에 따른 자비심의 무한한 확산이 바로 불교환경윤리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와 같은 자비심의 무한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는 물론 불교의 연기사상에 있다.

연기설에 따르면 생물이든지 무생물이든지간에 모든 존재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나의 연계된 생명 고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나 이외의 다른 유, 무형의 존재들에 대해서도 자비심의 발휘가 요청된다.

아무튼 이 책에서 안옥선이 보여준 치밀한 텍스트 분석과 진지한 학구적 자세, 그리고 불교윤리의 응용 영역을 확대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 등은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불교윤리는 결국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모두 끊고 없앤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불교문법의 맥락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말일지 모르나 그것은 곧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윤리라는 동어반복(tautology)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를 교학적 배경으로 삼되 이제부터는 좀더 과감한 접근과 발상의 전환도 고려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외에도 불교윤리는 다른 측면에서의 접근과 해석 가능성을 얼마든지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불교윤리는 다양한 설명과 응용이 가능한 종합 윤리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말하자면 아직 가공되지 않은 보석의 원석과 같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불교윤리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의 가능성을 안옥선이 이해하고 있는 ‘자리이타행의 원리’의 적용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서양윤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공리주의적 입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안 옥선의 덕론적 입장과는 이론적인 배경을 달리하고 있다. 불교윤리의 공리주의적 해석 가능성에 대해서는 필자도 서툰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4. 서재영의 선(禪) 생태학적 접근

응용불교윤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는 또 다른 학자로는 서재영이 있다. 그가 자신의 박사학위를 수정, 보완하여 출판한 『선의 생태철학』(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7)은 선불교의 입장에서 불교의 생명(생태)윤리를 재구성하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선불교의 매력에 흠뻑 젖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불살생과 자비의 생명윤리가 초기불교도들에게 중심적 윤리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증들은 계와 같이 불자들의 실천윤리를 담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불살생의 윤리는 불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실천윤리가 되는 오계와 사미승들이 지켜야할 사미십계의 첫 번째 조항으로 각각 제세되고 있다. 또한 매달 포살일에 불자들이 지켜야 할 8계와 열 가지 선업을 실천하라는 십선업에서도 역시 불살생계가 첫 번째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미루어 보아도 불살생을 통한 생명존중은 초기불교에서 중심적 실천윤리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불살생 전통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채식주의가 수행자의 도덕적 의무로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보살의 핵심 실천덕목으로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중국의 선종은 이 부분을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생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식육의 문화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식육을 포기한다면 박탈당한 동물들의 권리, 생명을 죽이는 살육의 야만성, 사육과정에서 발생하는 동물학대, 항생제 남용으로 인한 새로운 질병의 유발 등 식육문화에서 발생하는 온갖 부차적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바로 식육을 금지하거나 가능한 한 줄여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동물에 대한 선의 가치관과 선사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은 바로 이 본질적인 문제의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선사들의 삶은 “식육을 금하고 소박하고 검소한 식생활을 통해 고통의 사슬로부터 인간과 동물을 동시에 해방시킬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서재영은 『돈오입도요문론』에 나오는 대주혜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영화는 모두 헛된 속임수이니 헤진 옷과 거친 음식으로 굶주림을 채우노라.” 이는 선사들에게 음식이란 식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허기를 달래는 것이자 몸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약에 비유될 수 있을 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장 선사도 『조당집』에서 “비록 친하고 좋아하며 괴롭고 즐거운 것이라도 생각에 두지 말며, 거친 음식으로 목숨을 잇고 옷을 입되 추위와 더위를 막을 뿐, 우뚝하니 바위 같고 귀머거리 같이 되어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도와 가까워질 여지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수행자가 식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백장 선사의 수행정신은 그 이후 출가 수행자의 철저한 생활윤리로 정착되어 갔음은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백장 이후에 성립된 『선원청규』에는 한 방울의 물을 마시더라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미생물을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물속에 있는 작은 미생물조차 죽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 눈에 보이는 큰 생명체를 해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어서 서교수는『입능가경』에 나오는 “대혜여, 내가 보건대, 중생이 끝없는 과거로부터 고기 먹는 습관 때문에 고기 맛을 탐착하며 번갈아 서로 살해하여 현성(賢聖)을 멀리 떠나고 생사의 괴로움을 받는다.”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는 곧 다른 생명체를 음식으로 먹는 식육문화는 폭력과 전쟁 및 성욕 등과 같은 공격적인 성향을 조장할 수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식육의 문화는 불교적 가치관이나 수행자의 삶과는 본질적으로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살생의 연장선상에 있는 식육금지는 음식을 절제하는 수행방법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계속하여 서재영은『입능가경』을 인용하면서 인간이 먹는 음식으로 적절하게 은폐된 고기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함으로써 우리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대혜여, 내가 보건대 중생이 육도에 윤회하여 똑같이 나고 죽는 데에 있으면서 , 서로서로 생육하여 번갈아 부모, 형제, 자매가 되었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중간이건 밖이건 내외, 육친 권속이 혹은 다른 갈래인 선도, 악도에 태어나기도 하며, 항상 권속이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내가 보건대, 중생이 서로 번갈아 먹은 고기 중에는 친척 아닌 것이 없다.”

이를 통해 서재영은 식육은 자비심을 갉아먹는 것이자 생명을 살육하는 것이며, 또한 잔인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육도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인데도, 죽여서 먹는 자는 곧 나의 부모를 먹는 것이며 나의 옛 몸을 죽여서 먹는 것이니라. 모든 흙과 물은 나의 옛 몸뚱이요, 모든 불과 바람은 나의 본체이기 때문에 늘 방생을 해야 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았거든 방생이 상주하는 법이 되도록 다른 사람도 방생을 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세상 사람이 축생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마땅히 방편을 구하여 보호하고 그 괴로움에서 풀어 주어야 한다.” 이 말의 요점은 다른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서재영의 해석을 빌리면 “이렇게 나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이 한 가족의 생명이자 나의 생명이라면 다른 생명을 나 자신처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식육금지의 생명윤리는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른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방생의 윤리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에 대한 자비의 실천은 단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선사들의 생명존중은 식육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세세한 부분으로까지 확장된다. 선사들의 생명윤리는 ‘한 방울의 물’에도 무수한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통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찰에서 생활하는 승려들은 물 한 모금 마실 때조차도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격한 절차들을 세심하게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면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행위 규범을 담고 있는『선원청규』에는 물을 걸러 마시라는 ‘여수법(濾水法)’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살계경의 열여덟 가지 물건 가운데 여수낭(濾水囊)은 아홉 번째에 해당한다. 항상 이것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니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두타행자가 여름 결제와 제방으로 행각하는 달이면 모두 여수낭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행자는 반드시 여수낭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물을 걸러 마실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물까지 걸러 마시도록 한 것은 선불교가 철저하게 생명 중심적 윤리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 이유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동물이나 벌레는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의도적인 살생을 피할 수 있지만, 물속에서 살아가는 미세한 생물들은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으므로 무심코 마신 한 모금의 물을 통해서도 수많은 생명들을 죽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선원청규』는 물속에 있는 생명의 실상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모든 생명들의 가치는 부처님의 무게만큼 크다는 말도 덧붙인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한 방울의 물을 보니 팔만 사천의 생명이 있다.’고 했다. 범부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천안으로 보면 스스로 분명하다. 꼼지락거리는 모든 생명체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여수낭으로 걸러낸 벌레는 반드시 물 밖으로 떨어져 죽지 않도록 다시 물속으로 되돌려줄 것, 물을 거른 다음에 행여 벌레가 있는지 햇빛에 비추어 보고 벌레가 있으면 다시 몇 번이고 걸러 마실 것, 이미 거른 물일지라도 하룻밤 지난 물은 벌레가 생길 수 있음으로 다시 확인하라는 대목 등이 있을 정도로 선가에서의 생명윤리사상과 자비심은 철두철미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사들이 동물들과 공존공생했다는 이야기도 선불교의 생명윤리사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정설법(無情說法)으로 유명한 남양 혜충 선사와 한 제자가 나눈 문답을 보면 동물을 대하는 선사들의 마음가짐이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어떤 제자가 혜충 선사에게 묻기를 “산에서 맹수를 만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보아도 못 본 체하고, 와도 오지 않는 것같이 하라. 그렇게 무심하면 나쁜 짐승도 해치지 않는다.” 호랑이를 제자로 두었다는 혜충 선사나 선각 선사와 같은 스님들이 동물과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선사들이 동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동물들도 선사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입능가경』에서는 그 이유를 자신들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며, 그런 두려움이 없을 때 친구라는 생각을 내고 선지식이라는 생각을 내게 되어 서로 편안함을 느끼고 의지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라는 기틀이 마련된다고 한다.

무심하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곧 동물과 자연을 인간중심적 입장에서 조작하거나 이용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뜻이며, 자비심이란 동물을 인간과 똑같은 도덕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바라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에 해당한다. 몇몇 선사들의 삶은 이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공존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서재영의 선 생태학적 불교윤리는『선원청규』의 여수법에서 볼 수 있듯이 선종의 생명윤리가 동물해방론자들의 경우처럼 고등한 동물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생명체를 똑같이 동등하게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선의 생명윤리는 개체중심주의가 아니라 모든 생명 개체와 그 생명 개체를 있게 하는 연기적 관계성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생명윤리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인간과 동물은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공존공생의 윤리를 일깨워 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선불교의 생태학적 사고야말로 21세기의 환경윤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가 될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다.

그러나 실천 가능한 구체적 행위원리의 발견을 모색하고 있는 윤리학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동안 우리 사회 안팎에서 말 그대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생태(중심)’란 용어의 오남용에 적잖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불교생태학(사상)’이란 말도 예외는 아니다. 생태주의자들은 이른바 ‘인간중심주의’적 역사의 결과를 반성하고 질타하는 수준을 넘어 때로는 인류의 미래가 오직 ‘생태중심주의’적 사고와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지적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이 ‘현실’을 압도하고 ‘관념’이 ‘실천’을 능가하는 시대 분위기는 실천윤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제문제는 ‘이상’이고 ‘관념’에 앞서 직접 부딪혀야 할 ‘현실’이고 ‘실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경윤리 또는 생명(생태)윤리문제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인간이 배제된 생태환경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모든 문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주의’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좀 더 솔직하게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인간의 윤리적 자화상을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단순화시켜 본다면 인간 이외의 존재도 인간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인간 개체보다는 생태계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생태중심주의’의 관점은 일단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종종 현실과 동떨어진 결론을 낳을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서재영은 앞으로 서양 윤리학에서 말하는 ‘확장된 인간중심주의’ 개념, 즉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며 동시에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고려, 다시 말해 생태계 전반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의미심장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론적 정당화 근거를 찾기 어려운 ‘생태중심주의’를 고집하기보다는 ‘확장된 인간중심주의’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생태학적 사고의 실천을 오히려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  앞으로 응용불교윤리학의 미래는 밝다!

지금까지 살펴 본 세 사람의 불교윤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입장을 불살생계의 연장선상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필자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의 지렛대로 삼는 불자들은 특히 오계의 으뜸인 불살생계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머지 계율들도 불살생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이 불살생계에 있다고 믿고 싶다. 따지고 보면 불교가 유일신앙 계통의 다른 종교와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부분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불교의 평화 이미지를 상징하는 계목이자 생태위기에 직면한 오늘날의 세계적 상황과도 호응하는 측면이 적지 않다고 본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현대인들의 주요 관심사인 환경이나 생태 또는 생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종교보다도 풍부한 콘텐츠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그에 부합하는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안팎의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불교계 전반의 분위기가 ‘문법(교학)’으로서의 불교지식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이를 ‘언어(계율의 현대적 해석)’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탓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데미언 키온, 안옥선 및 서재영의 학문적 작업은 필자 개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는 그동안 불교가 다소 고답적이고 과거지향적인 종교라는 선입견을 가진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도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인 환경과 생명(생태)라는 주제도 21세기의 화두로서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여기에는 불교인들의 보다 능동적인 상황인식과 이에 따른 적극적인 실천행이 요구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불자들은 선망부모의 극락왕생과 가족의 세속적 복락을 위해 사찰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 앞으로 이와 같은 불자들의 신행태도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위대한 가르침의 잠재력을 손상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불살생계를 수지한 불자 가족의 낙태율이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것은 어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일 년에 수십만 명 이상의 태아가 영문도 모른 채 부모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있고, 그 부모들 가운데 상당수가 불교인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같은 영가천도제도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 우리 불교의 현주소이다. 이처럼 불살생계를 오계의 첫머리에 놓고 있으면서도 정작 생명의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 초목을 베거나 땅을 파는 것조차 금지시키지 않았던가? 풀과 나무도 엄연히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 속의 벌레조차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심지어 병난 경우가 아니라면 풀 또는 물 위에 대소변을 보거나 침을 뱉는 것조차 금하셨다. 그것으로 인해 풀이 죽거나 물속의 벌레가 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불자들은 이런 부처님의 생명 중시 사상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응용불교윤리학의 잠재성과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불교교학의 연구와 함께 실천분야에서의 응용적 측면도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불교학계 내부에서도 죽음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쟁점들을 응용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 상당히 고무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얼마 전 국방부 청사 앞에서 벌어진 이천 군민들의 군부대 이전 반대 시위현장에서 ‘아기돼지’가 능지처참된 보도를 접하고도 불살생계를 으뜸으로 삼는 불교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불교도 이제 그와 같은 소극적인 태도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말하자면 포교 전략의 일환이기도 한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불교의 틀 안에서 논의하고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응용불교윤리학에 남다른 기대를 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허남결
1999년 2월 동국대학교 대학원 윤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영국 더럼대학 철학과 객원 연구원 역임. 소로 공부한 바 있으며, 현재 모교의 윤리문화학과 강사로 있다. 논저서로《존 스튜어트 밀― 생애와 사상》《공리주의 윤리문화연구》와 《불교와 생명윤리학》《불교응용윤리학 입문》등의 역서를 비롯 다수의 논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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