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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선(禪)의 철학적 해명 / 이병욱
-변상섭 지음, <禪, 신비주의인가 철학인가>
[9호] 2001년 12월 10일 (월) 이병욱 고려대 강사

1. 들어가는 글

   

선, 신비주의 철학인가
변상섭 지음,

한국 불교학계의 과제를 들라고 한다면 새로운 교판론의 형성, 비교철학의 모색, 구체적 실천론의 확립을 말할 수 있다. 새로운 교판론이 필요하다는 것은 1000년 이상 군림해 오던 중국불교의 교판론이 20세기에 접어들어 인도불교의 대체적 모습이 드러나자 완전히 무너졌고, 그것에 대신할 새로운 불교 해석의 틀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의 사상을 어떤 선입견 없이 일관성 있게 바라보는 해석의 틀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불교학계에서는 이것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비교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불교철학의 흐름은 당시의 주요사상과의 만남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혁신과 갱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현대 한국에서는 그 주류의 흐름이 서양철학이므로, 이것과 어떤 형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새로운 불교사상이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현대 한국 불교철학이 성립될 것이다.

구체적 실천론이 확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돈점논쟁, 간화선과 위빠사나 논쟁, 최근의 제3의 수행법에 대한 논의 등에서도 다시 확인되는 것이다. 한국 전통의 수행법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이것이 도전받고 있고, 흔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이라는 지평에서 어떤 수행법이 더 적실하게 와 닿는 것인지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불교학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되고, 최소한 해결의 단서라도 마련해야만 불교학이 불교계에 그 존재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나온 변상섭의 《禪, 신비주의인가 철학인가?》에서 이런 종류의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변상섭은 선(禪)수행이 가장 뛰어난 수행방법이라는 확신 아래, 선의 이론적 기초를 교학불교에서 구하고, 더 나아가 서양철학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2. 선(禪)의 근거로서 교학불교

불교의 경전과 논서들이 선의 정신이론이라는 주장을 변상섭은 펴고 있다. 석가모니가 설산(雪山)에서 6년 동안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그 내용을 설명한 것이 경전이므로, 이는 경전이 바로 깨달음의 정신이론이라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고 규봉종밀(圭峰宗密)도 《선원제전집도서》에서 “경전은 먹줄과 같아서 선의 올바름과 그릇됨을 바르게 정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의 정신이론을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로 변상섭은 구분한다. 세속제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사유방식을 연기설에 기초로 해서 설명하는 정신이론이고, 승의제는 선을 수행하여 도달하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세속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미인선발대회를 예로 들어보자. 미인대회에서는 미인을 선발한다. 그런데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관념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이는 사람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육감적인 여자를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청순한 사람이 미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중생은 이러한 관념의 노예가 되어서 그것에 집착하고, 그 집착으로 인해서 번민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다. 연기설은 이렇게 작동되는 인간의 정신현상과 작용을 밝히는 것이고, 이것에 기초해서 허구적인 의식작용을 끊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심어 주는 기능도 하고 있다.

승의제는 세속제에서 설명하는 허구적 의식작용을 끊고, 존재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유식학파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분별적 사유가 끊어진 뒤에 얻어지는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할 수 있다. 또 화엄종에서는 이것을 성기(性起), 또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말하고 있고, 선종에서는 적조현전(寂照現前)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변상섭은 2제(二諦)를 가지고 불교이론 전부를 해명하려고 한다. 2제는 중관학파의 이론이지만, 이것을 유식의 3성3무성에 적용할 수 있다. 분별성이 사라지고 진실성이 드러나는 경지가 바로 승의제이고, 이것은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경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진실성은 고정된 성품이 없다고 하는 것이고, 여기서 화엄종과 선종을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화엄종은 유식의 3성3무성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고, 선종은 이러한 경지를 증득하기 위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변상섭이 불교이론을 해석하는 틀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책 내용의 커다란 줄기는 선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서 교학불교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학파 또는 종파간의 차이점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저자가 해석하는 단편만을 주어서 모을 수 있을 따름이다.

3. 불교와 서양철학의 비교

변상섭은 교학불교를 해석하면서 동시에 비교철학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현상학의 에드문트 후설과, 그의 제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하이데거의 제자 막스 뮐러와 불교를 비교하고 있다. 저자는 서양철학과 불교에서 찾고 있는 진리가 같다고 하는 입장을 취한다. 동양과 서양을 가릴 것 없이, 철학에서 찾고자 하는 진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식과 존재하는 사물의 정합적 일치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5온(五蘊)의 작용을 끊어버릴 것을 말하고, 유식불교에서는 의타성을 진실성으로 전의(轉依)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점을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존재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직관하는 순수의식을 주장하고 있고, 하이데거는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설명하고 있다.

후설의 위대성은 순수하게 직관할 수 있는 의식작용을 밝혀낸 데 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가 주장한 순수의식에 대해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후설의 순수의식에 대해 학문적으로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지 회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비해, 불교에서는 2,500년 전에 이미 순수의식의 정신세계에 도달할 것을 지적하고 있고, 그 뒤로도 수없이 많은 선각자들이 이 순수의식을 입증하였다. 동양의 신비롭고 깊은 정신세계는 바로 이 순수의식의 세계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변상섭이 서양철학과 불교가 무조건 같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 차이점의 핵심은 서양철학에서는 ‘주체론’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각과 의식을 일으키는 심층의식에서 어떠한 작용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해 유식불교의 8식설(八識說)이 없다는 것이다. 의식의 물결 뒤에 항상 작용하고 있는 8식을 유식불교에서는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6식이 파도라고 한다면, 8식은 파도를 일으키게 하는 바닷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8식은 의식의 선험적 주관성을 가능하게 하는 중앙기억장치이고, 훈습한다는 것은 선험적 주관성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물을 마시거나 물 속에 논다고 하자. 그 아이가 물에 대해 얻게 되는 의미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8식에 훈습되고 저장되어 있다. 이것이 유식학파가 말하는 종자설(種子說)이다. 이렇게 물의 존재가 8식에 훈습되어 있기 때문에 오성적인 사유나 이성적인 사유를 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불교와 서양철학의 용어를 섞어서 쓰게 되면 오히려 혼란만 초래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변명을 제시한다. 일반 대중이 이미 학교에서 서양의 학문체계로 지식을 쌓아왔기 때문에 서양철학의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것이 일반인에게 더 다가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이러한 내용을 읽고, 서양철학과 비교연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불교가 현대인의 정신적 의지처로서 합당한 것인지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변상섭은 간화선(看話禪)이 여러 가지 선정 수행법 중에 가장 완성된 형태이고, 그릇된 선정 수행에 빠져들지 않고, 바르게 선정을 닦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붓다도 간화선에서 중시하는 ‘화두’ 없이 선정수행에 전념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중국에서도 간화선이 아닌 묵조선(默照禪)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많은데, 다른 여러 가지 수행법을 무시하고, 간화선만을 강조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 변상섭은 간화선만이 갖는 장점을 드러낸다. 우선,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선정을 닦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간화선은 화두에 대한 의심을 일으켜서, 그것에 사무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선정을 닦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게 된다. 어느 때건 어느 일을 하건 간에 화두를 참구하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묵조선은 고요한 곳을 찾아 단정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묵묵히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여, 분별적인 사유를 일으키는 의식의 작용을 끊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로 앉아서 수행하게 되고, 이것은 바쁜 일상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묵조선을 닦으면 선정을 조금 얻을 수는 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면 곧 선정이 흩어지고 마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된 것이 바로 간화선이라는 것이다.

간화선의 다른 장점은 그릇된 선정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선정을 닦아나가다 보면 그릇된 선정에 들어갈 수 있는데, 화두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런 경계가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묵조선은 잘못된 경지에 들어가기 쉽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보조적 수단을 익혀야 하지만, 간화선에는 여러 가지 보조적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간화선에는 이상의 2가지 장점이 있으므로, 붓다가 직접 설명한 수행법이 아니고, 그 수행법과 다르다고 해서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간화선은 붓다의 가르침을 벗어난 새로운 사상이 아니고 인간의 인지능력이 발달해 감에 따라 더욱 효율적인 방법이 제시되는 것이므로, 간화선을 버리고 원래의 묵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아도 좋다고 변상섭은 주장한다.

그리고 간화선에 대한 변상섭의 또 다른 강한 주장은 화두를 해설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선사들이 수행자에게 던져주는 질문과 대답은 일상적인 언어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언어는 의식의 작용에 근거한 개념의 언어이고, 선사들이 던져주는 언어는 체험의 언어이다. 이것은 실제로 수행을 해서 체험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지, 그냥 머리를 굴려서 이해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다. 그런데 선불교를 서구에서 붐이 일도록 한 장본인 스즈키 다이세쯔처럼 화두를 친절하게 해설해 준다면, 후학들이 의심을 일으키지 않게 되고, 이것은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바른 간화선 수행을 봉쇄해 버리는 역효과를 내게 된다. 이런 경향이 교토학파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변상섭의 주장이다.

물론 선사의 어록 가운데, 논리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사변적인 해석을 막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대목에 대해서는 더 쉬운 설명이 요청된다. 그러나 화두에 대해서 해설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5. 비판적 검토

사실 변상섭의 이 책은 깊고 중요한 내용을 치밀한 논증 없이, 선언적 형태로 주장하는 대목이 많았다. 더구나 저자의 오랜 사색이 스며 있는 대목도 적지 않아서 이 방면에 공부한 일천한 평자가 이해하는 데는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이 유려하고, 쉬운 보기와 예화를 들어 설명하고 있어서 우선 이 책을 읽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에서는 소략한 설명으로 인해서 과연 이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저자의 주장이 맞는 것이라면, 그 논증이 빈약하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학술적인 성격보다는 대중에게 가깝게 가려는 의도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기는 하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대중적인 계몽서도 아니고, 전문적인 연구서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계몽적 성격도 띠면서 동시에 학술적인 글이라는 평가도 가능한데, 평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평자만의 편견인가?

평자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책의 문제의식을 3가지로 구분해 보았다. 이제 각각의 문제제기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본다. 우선,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불교 해석의 틀에 대해서이다. 저자는 중관의 2제를 중심으로 불교이론을 바라보고 있다. 2제가 유식의 3성3무성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고, 이것이 화엄과 선으로 연결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주장에 대해 평자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 이유는 아직 이것만으로는 불교이론에 대한 해석의 틀이 정비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적용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유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해 두어야겠다.

초기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5온 중, 색온(色蘊)에 대해 유식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목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 주장이 유식학파의 입장에 선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인도불교를 바라보는 시각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유식불교를 해석하는 것도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이 책의 주장과 전혀 정반대의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일관된 해석의 틀이 제시되어야 한다.

불교와 서양철학의 비교부분을 검토해 보자. 사실 평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문제의식만큼은 정당한 것이고,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문제는 이 책의 주장이 모두 타당한가인데, 평자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이 방면의 선학의 연구와 그 주장에서 상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고형곤의 《선의 세계》도 후설·하이데거와 선을 비교한 글인데, 여기서는 후설은 좀 부족한 점이 있고, 하이데거에 와서 그 부족한 점이 채워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이 책에서는 후설의 순수의식이 정당한 것이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문제가 있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어느 주장이 옳은지 평자가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이미 나와 있는 선학의 연구를 참고하지 않았고, 그 견해와 자신의 주장이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점이 문제라는 것 정도는 지적할 수 있다.

덧붙여 비교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보면, 엉성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분야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데 두 분야를 연구해서 비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엄밀성만을 내세워서 너무 위축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 시대의 불교학의 과제가 비교철학에 있다고 하는 점에 동의한다면, 성급한 일반화도 곤란하겠지만, 우리 학계에 퍼져 있는 지나친 엄격주의는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간화선이 가장 뛰어난 선정 수행법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해도, 간화선만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론에서는 동양과 서양을 융합하려고 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실천 수행의 문제에서는 간화선 한 가지만을 고집하려는 자세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평자는 무엇이 최고라는 데는 관심이 없다. 대신 사람이 여러 종류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비록 간화선이 훌륭한 수행법이겠지만, 그것이 안 맞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불교학의 과제는 이런 사람에게 알맞은 수행방법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려는 데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 문제는 불교이론을 바라보는 눈과 관련이 있다. 이 책에서는 불교이론을 선의 실천수행의 근거로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교학불교가 가지는 다른 역동성을 놓쳤다. 교학불교는 선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수행법이 제시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학불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선도 하나의 수행방법으로 자리잡을 수 있고, 동시에 다른 수행방법도 인정해 줄 수 있는 다원적 수행방식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화두를 풀어서는 곤란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은 하지만, 이미 설명되어 있는 책을 거두어서 다 없앨 수 없다면, 이 주장은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비판의 화살을 내부로 돌려야 한다. 과거의 화두는 이미 정답이 있고, 그것을 해설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독창적인 화두가 나온다면, 그것에 대한 모법답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화두에 대해서 설명하는 기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지 못하는 불교계에 화살을 던지는 게 더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화두도 개개의 선사가 독창적으로 만든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판하기는 쉽고 쓰기는 어려운 법이다. 행간에 담겨 있을 저자의 땀과 불교에 대한 애정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강사. 논저에는 〈천태지의 철학사상 연구〉 《천태사상연구》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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