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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와 배척의 대상, 묵조선을 되살리다 / 이덕진
-김호귀 지음,<묵조선 연구>(민족사)
[9호] 2001년 12월 10일 (월) 이덕진 고려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묵조선 연구
김호귀 지음. 민족사

이 책은, 한국 불교 연구의 중심지인 동국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해서 현재 강의(선학과)와 연구활동(불교문화연구원)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소장학자 김호귀 박사가 그의 학위 논문 〈묵조선에 관한 연구〉(동국대학교 대학원, 1998)를 수정·보완하여 《묵조선 연구》(서울: 민족사, 2001)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저자가 묵조선(默照禪)에 빠져들게 된 최초의 계기는 “왜 간화선(看話禪)이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묵조선과의 비교를 통해서 간화선의 구조와 특징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원래는 묵조선 비판자이자 간화선 옹호자였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저변에는, 묵조선이 간화선과 더불어 선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했던 선법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조선에 대하여‘삿된 선(邪禪)’이라는 비판을 해왔던, 지금까지의 간화선 일색의 배타적 선 풍토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묵조선에 대한 연구가 깊고 넓어짐에 따라, 저자는 묵조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얕고 피상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간화선의 시각에서 묵조선을 연구하는 종래의 입장을 벗어나, 묵조선 본래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궁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묵조선 연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1) 1) 김박사의 묵조선에 대한 천착은 10년을 훨씬 넘은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석사학위 논문(〈대혜선사의 묵조선 비판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1991)이 박사학위 논문과 거의 동일한 주제인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이 책은 묵조선을 올바로 소개함으로써 이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며, 더 나아가서는 간화선이 일부 수승한 수행자들의 전유물처럼 돼버린 현재 한국 불교계의 상황에서 대중을 지향하는, 어떻게 보면 새롭고 쉬운, 묵조선이라는 선수행관을 제시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나라에는 불교 연구 인력이 아주 부족하다. 현재 우리 나라의 불교 연구 인력은 모든 지역, 시대, 인물, 주제를 다룰 만큼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그 충분하지 못한 연구 인력마저 몇 가지 한정된 주제에만 천착한다. 왜냐하면 불교학(인문학)에 대한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학을 해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호흡이 길고 평생을 바쳐서 연구할 만한 주제를 골라내지 못하는 것이다. 설혹 골라냈다 하더라도 위에서 말한 주변 여건들이 연구자를 평생의 주제에 천착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학(先學)들의 연구가 많으며,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것처럼 보이는 주제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2) 2) 졸고, 〈인도·불교학 연구의 명암〉, 《오늘의 동양사상》 5호(서울: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1), 274쪽.

우리 나라의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김호귀 박사는 아주 돋보이는 인물이다. 전도가 아주 무망(無望)한 상태에서 끈질기게 ‘묵조선(默照禪)’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할 수 있는 끈질김은, 그것은 마치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같아서, 모든 학자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이면서도, 사실상 대부분의 학자가 갖추지 못한 고귀한 품성이다.

간화선·묵조선·위빠사나·지관(止觀) 등 다양한 선적 수행법이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의 경우 선수행은 물론이거니와 선에 관한 연구도 거의 대부분 간화선에 치우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연구를 제외하면, 우리 나라에서의 묵조선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전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묵조선 연구》는 척박한 인문학의 풍토와 묵조선에 대한 무시와 배척이라는 이중의 산고를 혹독하게 겪고 태어난 옥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평자는 어렵게 얻은 훌륭한 묵조선 연구서를 독서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되었음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우리 학계에서는 아주 귀한 이 묵조선 전문가가 앞으로도 계속 묵조선의 계승형태와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주변여건이 마련되어지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연구자 개인의 의지나 열의에만 의존하는 학계의 풍토가 언제나 개선되어질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 이 책의 구성과 내용

《묵조선 연구》는 전체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서론에 이어서, 제2장은 ‘심법(心法)의 전수와 조동종지(曹洞宗旨)’라는 소주제로 선법의 전수형식인 사자상전(師資相傳)의 심법이 전해지는 이심전심의 흐름을 살펴보고 있다. 즉 묵조선이 지니고 있는 선의 실천방법이 이전의 조동종(曹洞宗)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나 하는 점을 살피고 있다. 제3장은 ‘굉지정각(宏智正覺)과 묵조선’이라는 소주제로 굉지의 생애와 그가 주창한 선법으로서의 묵조선의 성격을 파악한다.

우선 묵조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특히 굉지정각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서 묵조선의 성격을 설명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다음으로는 묵조선 특히 굉지정각의 실천적인 좌선관의 특징과 묵조선의 논리적인 기본을 형성하고 있는 오위사상(五位思想)과의 관계를 논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점이 명쾌히 논구되어야만 묵조선의 좌선 실천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해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제4장은 ‘조동선법(曹洞禪法)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라는 소주제로 나말여초에 중국의 조동선법이 해동에 전래되는 과정을 입당(入唐) 유학승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제5장은 ‘일본 도원선(道元禪)의 성립과 특징’이라는 소주제로 도원(道元)이 남송에서 여정(如淨)을 통하여 얻은 가르침과 깨달음의 성격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일본 도원선에 대해서 논구하고 있다. 제6장은 결론 부분이다.

저자가 동아시아 묵조선 전체에 대한 광범위한 고찰을 하고 있음을 제목만 살펴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도 토로하듯이 우리 나라 학계의 조동선법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일천하다. 그 결과 제4장의 주제인 우리 나라의 묵조선에 대한 저자의 연구는, 주로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또한 제5장의 주제인 일본 도원선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에서 방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저자가 기여할 바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아무래도 제2장과 3장, 그 중에서도 3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서평자는 3장을 주(主)로 하고 2장을 종(從)으로 하여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논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1) 묵조선의 형성 기반과 조동종지의 성립
선종은 좌선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종파이다. 이 점에서 선종의 역사는 좌선관의 변천과 그 궤를 같이해 왔다. 그것은 또한 항상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집단적으로, 기성 사원으로부터 선종사원으로 옮겨가는 수도형태상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선자(禪者)의 선풍(禪風) 형성의 기본이 그 자신의 실천생활로부터 생겨났으며, 또한 수도 그 자체는 각각의 선풍에 의해 내면적인 것의 표출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종의 내부에도 다양한 수행방식이 표출되었다. 이것을 크게 지관법과 위빠사나와 간화선과 묵조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저자는 묵조선에 끼친 초기 선종의 영향을 3가지로 들고 있다. 우선 우두종(牛頭宗)에서의 좌선관 곧 절관(絶觀)에 기초한 본래자연(本來自然) 내지 본래본연(本來本然), 그리고 무심(無心)에 기초한 무물(無物)의 영향이 그것이다. 이때 무물은 본래 해탈해야 할 어떠한 속박도 없고 얻어야 할 어떠한 깨달음도 없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능가종(楞伽宗)의 수행에서 소위 수일심(守一心) 내지는 수본진심(守本眞心)의 영향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좌선 자체를 종(宗)으로 삼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무생(無生)을 간(看)하는 방편으로서의 좌선이다. 마지막으로 신회(神會)의 염불기(念不起)와 견본성(見本性)을 내세운 좌선의 영향이 그것이다. 신회는 특히 반야바라밀을 강조하여 지(知)를 통한 정(定)의 수(修)가 혜(慧)를 초래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정으로부터 혜를 얻는 단계적인 수행이 아니라 불지(佛智)의 작용이 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후 묵조선의 본증사상(本證思想)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말오대(唐末五代)에 들어 소위 선종5가(禪宗五家)가 형성된다. 이 가운데 동산(洞山)과 조산(曹山)을 중심으로 하는 조동종은 석두희천(石頭希遷)의 《참동계(參同契)》에 바탕한 회호(回互)와 동산의 《보경삼매(寶鏡三昧)》에서의 회호(回互)와 불회호(不回互)의 순환원리, 그리고 오위사상(五位思想)의 원류인 《오위현결(五位顯訣)》의 등장으로부터 조동종지의 기본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조동선법의 전승은 조동종 제10세에 해당하는 진헐청료(眞歇淸了)에 이르러서 묵조적인 선풍으로 등장하게 된다. 진헐의 사상은 현성공안(現成公案)의 현창과 묵조적인 사상의 고양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등장하게 되고, 새로운 ‘묵조의 선풍’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선풍은 당시의 대혜종고(大慧宗┳)가 묵조선을 향해 비판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대혜의 간화선 측에서는 묵조선을 향하여 적묵(寂默)으로 고좌(枯坐)하여 하등의 활용도 없고 아무런 지견도 없다 하여 암증선(暗證禪)이라 비판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깨달음을 시각문적(始覺門的)인 입장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본각문적(本覺門的)인 입장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될 것이다.

2) 굉지정각의 묵조선
굉지정각이 태어나던 무렵에는 선종5가 가운데 임제종의 양기파(楊岐派)가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때 묵조라는 말을 가지고 당대의 선풍을 고취시킨 인물은 굉지정각이다. 굉지가 묵조라는 말에 의해서 드러내려고 한 것은 묵(默)에 있어서의 무분별과 조(照)에 있어서의 지(知)에 대한 자각이다. 굉지의 〈묵조명(默照銘)〉에 나타나 있는 ‘묵조’는 마땅히 ‘묵’과 ‘조’를 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서로 일여(一如)하게 될 때가 바로 묵조선의 현성(現成)이다.

이것은 본증(本證)의 현성 내지는 자각의 의미이다. 때문에 묵조선의 구조는 본증자각(本證自覺)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중점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 곧 불(佛)의 세계에 맞추어진다. 본증의 자각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으로 이끌어 나아가는 방법과 수행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묵묵하게 좌선을 할 때에 그대로 투탈(透脫)된 깨달음의 세계가 현현한다는 것이다. 그 세계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부터 도달해 있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묵조에 있어서 굉지선법의 특색은 ‘묵(默)’으로서의 좌선의 수(修)와 ‘조(照)’로서의 현성한 증(證)을 달리 보지 않고 증(證)이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음을 밝힘에 있다.

굉지에게 있어 묵조는 다양한 어구로 나타나면서도 본래의 묵조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묵조는 묵묵한 좌선으로서의 수행을 가리키는 묵과 광겁에 두루 비추지 않음이 없는 증상에서의 공능(功能)인 조를 상징한다. 이때 ‘묵조’란 ‘묵’은 ‘조’가 상정된 묵으로서의 작위의 현성이라면, ‘조’는 ‘묵’을 수반하는 조로서의 무작위의 현성이다. 또한 묵과 조는 다름 아닌 신(身)과 심(心)이다. ‘묵’이 신상에서 올올하게 좌선일여한 상태로 지속되는 동중정(動中靜)이라면 ‘조’는 심상에서 무한한 묘용(妙用)을 뿜어내는 정중동(靜中動)이다.

이것은 신(身)이 묵(默)한 상태로의 좌선과 함께 심(心)이 조(照)한 상태로서의 좌선이다. 이러한 좌선일여야말로 바로 심(心)의 증(證)은 신(身)의 수(修)를 통해 표현되고 신의 수는 심의 증을 통해 이미(離微)에 철저해진다. 이 묵과 조의 관계는 바로 수와 증의 회호(回互)와 불회호(不回互)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편정오위(偏正五位)의 사상적인 양태를 실천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부각시킨 사유의 실천이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이미’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이’는 일체의 계박을 벗어난 것이라는 뜻으로부터 번뇌와 작위적인 행위를 활달하게 떨쳐버린 것이다. ‘미’는 만물 속에 감추어져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자타의 구별이 달리 없으면서도 묘용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곧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서 주(主)와 객(客)인 인(人)과 경(境)이 탈락한 대오(大悟)의 경계를 말한다. 이것이 동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것이 편정(偏正)의 회호라면 정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이미(離微)’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굉지가 그의 묵조선의 성격을, 오위의 회호와 불회호의 원리에 의해서 ‘이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좌선에 있어서의 마음의 자세와 몸의 자세에까지 폭넓게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굉지는 일체가 깨달음의 표현이라는 현성공안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굉지의 경우 일체의 작위적인 행위를 벗어나 있는 수행이 묵이고 그 속에서 청정을 구족하는 것이 조이다. 그래서 생과 사가 원래 뿌리가 없으며 출몰의 흔적도 없는 것임을 자증하는 것을 강조한다. 천지가 그대로 하나의 대해탈문임을 묵조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공안(진리)이 현성되어 있지 못하는 경우는 자증(自證)이 현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본증자각(本證自覺)이라는 묵조의 묘용이 요구되고 있다. 진리의 현성 그대로는 무엇하나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 본체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몰종적(沒縱跡)이고 조도(祖道)이며 무위진인(無位眞人)처럼 당당하여 ‘묵묵하게 노닐고 여여하게 설한다’는 입장에 서 있는 현성공안이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공겁 이전의 자기가 전체적으로 탈락할 것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원래부터 공겁 이전의 자기는 곧 그 자리에 있는 현재의 자기였을 뿐임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성공안이 굉지에게 있어서는 ‘전시각(全是覺)’으로서 무언적묵의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으로서 등장해 있다.

한편 묵조선의 대표적인 교의인 오위(五位)에 대하여 굉지는 오위와 묵조의 관계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주도면밀한 본증의 현성을 강조하는 종래의 묵조선에 있어서 조동오위(曹洞五位)는 하나의 기관이고 논리였다. 그 논리적인 성격이 강한 오위설은 그 근본사상인 겸대사상(兼帶思想)이 나타내고 있는 실천성과 회호의 특징에 있어서 묵조선설과 오위는 종래부터 밀접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만큼 성격에 큰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드물다.

곧 묵조의 실천과 오위의 논리는 실천과 논리의 관계로서 현상적으로는 합치될 수가 없다. 여기에 바로 실천적인 논리와 논리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이것이 굉지에게 있어서는 ‘묵조의 실천성’에 ‘오위의 논리성’을 수용하여 그 당위성을 부여하고, 오위의 논리성에 회호와 불회호의 겸대(兼帶)를 되살려 묵과 조의 의미를 확대함으로써 오위와 묵조의 한계를 극복하여 승화시켰다. 묵조선이 지니고 있는 종래의 한계는 그 실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유무에 떨어진다든가 임제문하의 단계성에 상대한 본증적·논리적인 특질을 지적하는 데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오위사상이 지니고 있는 종래의 한계라는 것은 묵조 속에 들어 있는 분석력이 부족하여 그 실천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양측의 상관관계 내지는 대치성을 어떻게 해결하여 그 일치점에 도달하는가 하는 것이 굉지의 과제였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우선 묵조선설이 지니고 있는 한계성을 오위의 논리성으로 극복하고, 오위가 지니고 있는 한계성을 묵조의 지유적(至遊的)인 선으로 극복하고 있다.

또한 묵조의 심리에 대하여 굉지는 이전의 비사량(非思量)의 의미를 한 차원 끌어올리고 있다. 좌선에 있어서의 의식의 존재방식으로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비사량은 단순히 사량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호간의 의식이나 무의식의 정신작용이 완전히 없어진(非) 상태의 순수한 의식활동(思量)이기 때문이다. 이 비사량에 철저한 것이 좌선의 요체이다. 그래서 비사량은 좌선을 전제한 비사량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좌선 속의 비사량이야말로 사량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의 사량, 탈락의 사량, 불염오의 사량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비사량의 경지는 믿는 주체의 신(信)과 믿어야 할 객체의 심(心)이 원래 불이일체(不二一體)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지식과 작위로는 헤아릴 수 없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이기도 하다. 이것이 굉지에게 있어서는 비사량이 그 작용뿐만이 아니라 그 의의를 충분히 되살려 그 행태와 현성공안으로서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이 무분별의 사량으로서 묵조의 심의식(心意識)에 등장한다. 그래서 공안이라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심의식(心意識)이 무의식을 통해 의식화되어 가는 견성의 과정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공안선의 행태라면, 비사량이라는 무분별한 사량의 전체 속에 그대로 내맡겨 버리는 가운데서 궁극적으로는 다시 사량을 벗어난 탈체현성(脫體現成)의 의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묵조의 심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사량의 사상은 좌선에서의 내면적인 마음의 준비로서 파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언설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서 굉지는 ‘사량에 대한 비’뿐만이 아니라 ‘언설에 대한 비’와 ‘신체행위에 대한 비’의 소식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굉지에게 있어서는 비사량의 의식상태가 절대무심의 순수의식을 근저로 하는 인법불이(人法不二)와 주객원융(主客圓融)의 전일의식으로 나타나 있다. 그 전일의식은 바로 ‘지유(至遊)’로서의 풍모를 나타내며, 생각을 잊고, 말을 끊으며, 행동이 떠나 생사거래에 그대로 맡겨두는 곳에서 비로소 비사량의 몰종적한 자취가 현성한다. 그래서 굉지의 비사량은 절대무심이라는 순수의식의 발로가 좌선을 통하여 현성한 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굉지는 〈묵조명〉에서 좌선을 통한 묵조의 현성이 다름아닌 깨달음의 현성이고 본증의 자각임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굉지는 다양한 오위의 겸대를 내세워 그 논리성 속에 묵조의 실천적인 분석의 의미를 포함시킨다. 이와 아울러 그 묵조가 지향하는 실천적인 내용에 지유선적(至遊禪的)인 의미를 가미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묵조의 정태적(靜態的)인 측면에다가 지유삼매(至遊三昧)라는 동태적(動態的)인 묘용까지 포함시켜서 묵조선을 완성했다.

3. 나가는 말

대혜종고의 경우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으로서 수행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수단이다. 그러나 굉지정각의 경우는 수행(좌선)이 있는 곳에 반드시 깨달음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체험은 달리 특별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자기가 현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상의 모든 사사물물이 다 본래의 자기체험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일상행위 그대로의 좌선이 진정한 좌선인 이유는 그 근저에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본각사상이 깔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묵조선은 인간의 존엄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모든 인간은 본래 타고날 때부터 깨달음을 갖추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마음을 내어 앉아 있는 그 자체가 부처임을 자각하는 행위가 된다. 즉 ‘1시간 앉아 있으면 1시간 부처고, 2시간 앉아 있으면 2시간 부처’라는 묵조선의 경구처럼, 온갖 감각기관을 닫아두고 화두에 집중하는 간화선과는 다르게, 앉아서 온갖 감각을 느끼는 것이 묵조선이다. 일반대중의 경우 화두선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얘기를 듣기 어렵다. 그만큼 높은 근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묵조선은 전통적인 수행법이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나 할 수 있고,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현대적인 수행법이기도 하다.

《묵조선 연구》는 이상과 같은 묵조선의 핵심을 요령있게 서술하고 있다. 한마디로 여러 가지 장점을 골고루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결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너무 어렵다. 물론 잘 정리된 체계와 일관된 서술, 그리고 정확하고 유연한 원문 번역 등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쉽게 읽혀질 수 있는 요소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문가로서의 학문적 입장과 주체적 관점을 조금도 잃지 않고 저술된 책이므로 그 내용을 충분히 습득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좀더 쉽게 서술할 수 없었을까 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으로 이 문제와 연관하여 전체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전문 술어가 너무 많다.

글의 내용을 저자의 논지에 맞추어서 설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평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물론 묵조선에 대해서 무지한 탓이기는 하지만, 이 전문술어들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해낼 수 없을까 하는 문제의식이었다. 물론 이 문제는 저자뿐 아니라 한국에서 학문을 하는 모든 이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다. 마지막으로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문장이 의외로 많다. 다시 말해서 비문(非文)이 많은 것이다. 이 문제는 저자가 한문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주술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문장의 서술방식이 선명하지 못하여, 그 문장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너무 자주 보이는 것은 이 책의 가치를 그만큼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몇 가지 지엽적인 문제가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에서도 말했듯이 김호귀 박사에게는, 모든 학자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이면서도 사실상 대부분의 학자가 갖추지 못한 고귀한 품성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부디 이 품성을 잃지 말고 학문에 더욱더 매진하여 우리 나라의 묵조선 연구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이덕진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예문동양사상연구원 인도·불교철학 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논저서에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보조지눌의 선사상 연구〉 〈간화선의 구자무불성에 대한 일고찰〉, 〈지눌 선사상에 있어서 돈오의 함의〉, 〈보조지눌과 규봉종밀 사상의 동처와 부동처〉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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