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왜 종교 다원주의 인가

1. 들어가는 글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역사적 존재로 태어난 예수가 어떻게 보편적인 로고스, 곧 신(神)일 수 있는가를 논증하고 토론한 기간이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의 삶과 사상이 헬라 문명권으로 전해진 이래 역사성을 띤 구체적 존재인 예수가 로고스라는 보편적 담론 하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부터 기독교 교회는 특수성(역사성)이 곧 보편성이라는 역설을 말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이론화 작업이 소위 삼위일체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이론은 무수한 해석을 낳았고 수많은 학파를 형성했으며, 때론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어 그것 없이도 예수의 신성을 말할 수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도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의 문제가 신학의 장에서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신학적 명제에 비추어 볼 때 종교 다원주의를 논의해온 역사는 100년도 되지 않을 만큼 대단히 짧다. 19세기 말 동양 세계가 기독교 서구에 소개되면서 세계관을 달리하는 동양 종교들의 현존에 놀라워하며 그로부터 배움을 얻고자 했고, 그것을 기독교와 관계지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 생겨났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여 절대 종교임을 자처하던 기독교가 자신을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라 인정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자신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종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뭇 신앙인들의 공통된 모습일 터이지만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상대방의 종교를 인정한다는 것이 서구 제국주의 속에서 자라온 기독교의 입장에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1) 그럼에도 종래 기독교가 지니고 있던 배타주의(exclusivism)를 넘어 상대주의(relativism), 포괄주의(inclusivism)를 거쳐 다원주의(pluralism)의 시각에서 기독교와 타종교의 공존을 말하는 신학적 입장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2000년의 역사를 지닌 특수성과 보편성의 신학 논쟁이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듯이 절대적 신앙과 다원주의의 승인은 더욱 정교한 논의 구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든 지지하든 간에 어떤 형태의 신학적인 선언으로 성급한 결론을 맺기보다는 좀더 시간을 두고 서로의 종교를 알아 가는 일이 요청되어지는 상황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신학적 선언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교회 현장에서 당장 수용되기 어렵다면 좀더 인내하는 교육적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신학 자체의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음을 목회적 현장인 교회 역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같은 기독교일지라도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구조가 다름으로 해서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있으며, 종교다원주의 담론 가운데에서도 교회 현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론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본 논고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해 나가려고 생각한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를 바라보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시각차. 둘째는 종교다원주의의 이론을 제공하는 진보적 시각들. 셋째는 종교다원주의와 종교간 대화를 부정하는 교회 입장. 마지막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기독교.

2. 종교(다원주의)를 바라보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두 입장

불교의 입장에서는 동일한 기독교로 보여질지 몰라도 개신교와 가톨릭은 신학적인 기본 틀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면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이 둘이 기독교와 불교만큼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해석하는 세계관적 차이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로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다.2) 앞서도 말했듯이 초대 기독교는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 사상에 많이 의지하여왔다.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만이 본질이고 현실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로서 부정적으로 해석되었다. 이로부터 서구 기독교는 초월과 내재, 피안과 차안은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이원적인 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초월과 내재가 상즉상입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조를 영원히 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 신학은 이러한 기본 틀 속에서 신앙 유비(Analogia fidei)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자연, 인간의 세계와 현실 그 자체는 신(神), 초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타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즉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신앙 안에서만 자연적 인간과 초월, 곧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개신교 신학 원리 속에서 타종교, 타문화는 좀처럼 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그리스도 신앙과 배타적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자연 및 종교, 문화 일반에 대한 철저한 몰가치적, 비신앙적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면에서 개신교의 선교란 배타성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플라톤의 초월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physik)과 만나면서 형성된 토미즘이 가톨릭 신학의 기본 골격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지하듯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은 모든 변화하는 것 속에 불변하는 것이 있다는 사상이다. 현상(자연)의 세계 속에 신(초월자)이 있는 것이며 이 자연을 떠나서 이데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상을 종합하여 존재 유비(Analogia Entis)라는 신학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이로부터 가톨릭 신학의 정체성은 복음과 문화, 기독교와 타종교, 즉 초자연과 자연의 관계를 말함에 있어서 이원론적 분리가 아니라 양자간에 본질상 유사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가톨릭 신학은 초자연과 자연의 존재유비, 곧 어떤 문화와 종교라도 그것을 초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고 타종교, 타문화에 대한 열려진 긍정적 사고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의 배타성, 이원적 분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가톨릭의 존재 유비론, 곧 자연 신학 전통은 타종교의 실체를 긍정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그것의 궁극적 완성이 초자연, 곧 기독교의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진정한 다원주의 시각을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거칠게는 가톨릭 신학의 포괄주의적 음모라고 말하기도 한다.

논자는 개신교, 가톨릭을 막론하고 신앙인들의 모임에서 가끔씩 유교, 불교, 그리고 동학 사상의 요체를 설명하며 신자들의 이해를 구한 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개신교 신앙인들 모두가 그에 대한 승인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반면,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그런 좋은 생각들은 이미 가톨릭 교회 안에 다 있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었다.3) 신앙 유비에 익숙해져 있음으로써 자연적인 것, 종교 일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모든 좋은 생각과 이념들을 자신들이 모두 갖고 있으며 타종교들의 경우 그 일부를 실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대화의 더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간의 다름과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종교다원주의 논의의 시발점이 되는 것인바, 개신교와 가톨릭의 입장은 저마다 뚜렷한 관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종교다원주의 논의가 오히려 한국 내에서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호간의 차이를 종래와 같은 차별(배타성)이 아니라 구별로 인정하려는 새로운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의 명제는 종교간 대화의 황금률로 이해되어진다. “우리들의 관계들 속에서 대화와 독백 사이의 선택은 두 방법들 사이의 선택, 곧 우리들에게 좀더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 줄 어떤 것들 중의 선택이 아니다.

만일 대화를 위한 명령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칸트의 용어로 정언 명령인 것이지 가설적인 것은 아니다. 더욱 성서적 용어로 말하면 독백과 대화 사이의 선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 만약 인간이 된다는 것이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면 독백적으로 우리 자신을 공동체부터 소외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이다. 독백을 선택하는 것은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4)

3. 종교다원주의의 이론을 제공하는 진보적 시각들

종교간의 차이를 차별이 아니라 구별로 보며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수용하고 그 지평을 확장하고 있는 신학자들은 주로 감리교 사람들이다. 이는 같은 개신교라 하더라도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구조가 다르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5) 주지하듯 장로교는 독일 대륙에서 칼빈의 예정론을 근간으로 전개되었으며, 감리교는 영국에서 존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독일 대륙이 주로 연역법적 사유방식을 가지고 합리적 사상체계(이상주의)를 구축한 반면, 영국은 귀납법을 토대로 경험주의 철학을 발전시켜왔다. 연역법적 추론과정에서 배태된 것이 이중예정론이라면 아무리 불타고 있는 물질이라도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뜨겁다고 말하지 않는 경험론으로부터 자라나온 것이 선행은총론이라 할 수 있다. 이중예정론의 구조 속에서는 기독교 밖의 세계, 그들의 문화,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자리할 여지는 전혀 없다. 교회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은총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 밖으로 내팽겨진 사람이 없다고 보므로, 즉 어떤 사람의 행위에 선행하는 은총이 있다고 믿기에 직접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그가 발 딛고 있는 문화와 풍토를 알려고 하는 노력을 우선시 한다.

구원을 선정하는 장로교의 예정론과는 달리 구원에 관한 선판단을 거두고 사람 자체를, 그의 환경 및 문화적 총체에 대한 이해를 중시함으로써 감리교 신학은 종교다원주의의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또한 민족, 민중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 선교의 주제로서 세계평화에 관심을 가져온 기독교장로회측에서도 이런 주제에 다른 방식으로 공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신학적 논쟁은 무엇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진보 계열의 신학적 입장은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논의는 탈식민지 상황 하의 제3세계 민족의식의 발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독교 서구와 제3세계, 기독교와 이른바 동양 종교들이 주종 관계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관계로서 자리 매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서구인들에 의해 보여진 대로, 이해되어진 대로 존재했던 민족 및 종교들이 있는 그대로 새롭게 존재하려는 몸부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다원주의는 포스트콜로니안니즘으로서 민족주의 그리고 역사의 탈중심성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실재(reality)가 되어 버렸다. 피터 버거 같은 종교사회학자는 현재의 종교다원적 현실을 시장상황(market situation)으로 규정하였으며 진리 요구의 다원적 제시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종교인들은 특정 종교 전통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어느 한 종교를 귀납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소위 이단적 명령을 요청받고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6)

그렇기에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선험적으로가 아니라 역사적인 얼개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의 종교다원주의 논의는 다음의 두 방향으로 전개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 하나는 환경문제, 신자유주의 등 당면한 세계 문제의 범위가 너무도 크고 넓어서 특정 종교, 특정 이데올로기만을 가지고서 그 문제 해결이 어렵게 됨으로 해서 모든 종교들이 자기 자리, 자기 위치에서 자신의 본질적 에토스를 갖고서 세계적 단위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상황을 타개해 가자는 순수 윤리적 차원에서의 접근이다. 이는 《세계윤리구상(Weltethos)》의 저자 한스 큉과 같은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인바, 본 주제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진보,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크게 반발하지는 않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 주도권은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중심으로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곧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이며, 하느님은 당신의 일(평화)을 위하여서 비기독교인, 타종교, 심지어 다른 이념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신학적 견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진보주의 신학자들이 교회 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하나는 해석학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전혀 다른 세계관의 배경 하에 언표된 종교들을 상호 관계지어 볼 수 있는 해석학적 원리, 신학적 원리를 견인해 보려고 하는 시도이다. 예컨대 예루살렘과 비레네스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땅이 하나이듯 하늘도 하나이어야 하는데, 그런 초월적(신적) 존재들이 아시아에서, 유대 땅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면 이들을 근원적 하나됨의 관계 속에서 엮어낼 수 있을 만한 원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오래 전 칼 야스퍼스는 차축시대(B.C. 8∼2)를 말함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에토스를 가져다 준 위대한 종교들의 동시다발적 발생을 말하였으나 제2의 차축시대 곧 영성의 시대에 접어든 지금은 이전의 분화의 과정보다는 수렴의 힘에 의해서 모든 문명들이 하나의 세계화된 공동체 속으로 편입해 들어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7) 여기에서는 기독교의 절대성, 배타적 진리 주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궁극적 일자(근거)의 빛에서 볼 때 역사 속에 태동된 기독교 역시 참 실재(The Real)의 한 표현형식일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서 기독교의 배타적 진리 주장이 거두어지지 않는 한 종교간의 평화, 세계 내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기독교를 역사 속에 태동된 여럿 중 하나로서 이해하고 그것을 참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구원의 요체로 믿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케리그마화(Entkeryg-matizierung)시키는 작업을 의미한다.

더 이상 그리스도를 실체론적으로 하느님과 동격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그분을 유대기독교 문화전통에서, 더욱 희랍적 밀의 종교 전통 하에서 이해된 하느님의 한 은유(metaphor)로써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역사적 존재인 고타마 붓다 또한 신적 로고스의 아시아적 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렇듯 성육신의 다원성, 또는 은유적 기독론을 통해 나타나는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더 이상 절대적 종교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인습적 기독교 신앙인들에 의해 이단 및 악마적 존재로서 정죄되고 있는 중이다.

진보주의적 기독교인들의 종교다원주의는 다음처럼 요약 정리될 수 있다. “다른 종교들도 인류를 향해 구원 행위를 베푸는 신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이름을 갖고 있다. 기독교는 영원한 로고스, 우주적 그리스도, 성자 하느님, 성령 등 이것과 중복되는 여러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인류를 향해 행동하는 신을 로고스라 부른다면, 우리는 모든 구원이 로고스의 사역이며 다른 문화의 신앙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들 하에서 사람들이 로고스를 만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수의 삶은 로고스, 즉 인간과 관계하시는 하느님께서 활동하신 점이며 구원론적으로는 기독교와 관계된 유일한 점이었다.”8) 다시 말해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예수 안에서 실재를 전체로서 만날 수 없고 오로지 참으로, 자신의 방식대로 만날 수 있을 뿐이며, 구원 역시 자아 중심으로부터 실재(God) 중심으로의 자아의 변화로서 이해하고 기독교에 있어서 근본주의적 이단은 종교적 은유를 축자적인 형이상학으로 바꾸는 데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앞에 놓여 있던 배타적, 절대적이란 말 대신에 보편적(universal), 결정적(decisive), 필수불가결한(indispensable)이란 새로운 수식어를 붙여 놓고자 한다.9) 보편적이란 예수의 삶과 인격이 여전히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도 부름(calling)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결정적이란 인간의 시각과 행동을 바꿈에 있어서 예수가 여전히 규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필수불가결함이란 타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가 드러내는 진리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이런 새 수식어를 통하여 성서 안의 예수를 더 잘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종교들과도 더 많은 관계를 맺으며 세계평화가 그로부터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4. 종교다원주의의 다른 유형과 종교간 대화에 대한 보수 신학적 평가

기독교 신학자, 더욱 진보적인 신학자 중에는 이상과 같이 종교간의 공동 토대를 설정하며 그의 문화풍토적 전개로서 종교의 다원성을 말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 자체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신 내지 궁극적 존재 역시 여럿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종교들 간에는 사실상 공통기반이라는 것은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제될 조건이 아니라 서로로부터 배워 나가며 상호 변혁되는 과정에서 찾아질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10)

종교간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들 종교의 독특성을 포기하는 누를 범할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종교간 차이에 근거하여 자기 종교의 독특성을 끝까지 붙들려고 하는 점에서 이런 다원주의 이론은 전자의 경우와 비교할 때 다소 보수적 입장을 띤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공통기반을 강조하는 다원주의 이론 역시 개별 종교의 독특성을 포기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배타적 진리주장을 포기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이에 근거하여 자기 종교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이론은 그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배타성, 절대성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차이를 강조하는 종교다원주의가 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하에 있다.

자기 종교 전통에 대한 헌신(Commitment) 없이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으나 자신 종교의 독특성(예수 그리스도)이 배타성이 되어 남의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강요될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실제로 캅(J. Cobb)과 같은 신학자는 기독교 자체의 변화 내지는 변혁보다는 자신의 대화 파트너인 불교의 변혁에 대해 너무 많은 주문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역사적이지 못하고 너무 존재론적 지평 속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작 기독교의 변화의 방향, 변화의 정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채 기독교적 입장에서 불교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힘 있는 자의 간섭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에 근거한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기독교 내의 보수적 입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옳은 평가일 수 없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원하는 이들의 기본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서양과 동양의 종교 발전에 있어 그 극치를 보여주나, 현재는 모두 퇴보 단계에 와 있으며 그래서 어느 것도 다른 종교에 의해 보완되지 않는 한 그 활기를 회복할 수 없다.”11)(상호변혁 내지는 상호 불가결한 보충)

이상과 같이 자기 종교의 입장을 절대화시키지 않으면서 대화를 강조하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한국 교회의 대다수를 점하는 보수 신학자들의 비판과 반발은 대단하다. 이에 19세기말 트뢸치(E. Troeltsch)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함에 있어서 계시적, 도그마적 방법보다는 역사적 방법이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주장되었건만 보수 계통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기독교 종교만을 유일한 계시종교라고 이해하며 신앙 유비(Analogia fidei)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기독교 외의 타종교들에 대한 영문표기가 이념을 뜻하는 ∼ism으로 끝나는 것은 이들 모두가 계시종교인 기독교와 구별되는 인간의 산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통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점에서 하느님이라는 표현에 만족하지 않고 유일신을 뜻하는 하나님으로 표기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가톨릭이 전통적인 하느님 개념의 바탕에서 기독교의 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대조적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타종교 및 타문화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위에 있거나 그들을 변혁, 변화(회개)시키는 주체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종교다원주의의 대화 노력을 종교 혼합적인 현상으로 간주한다. 다른 종교들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렇게 되는 경우 기독교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린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형태의 혼합주의, 즉 종합적 혼합주의(Synthetischer Synkretismus)와 공생적 혼합주의(Symbiotischer Syn-kretismus)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12)

전자가 어느 특정한 종교문화체계에 압도되어 자신의 본래적 특성을 상실하는 경우라면 후자는 상호 본래성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지평이 확장되고 더욱 깊어져 가는 상태를 일컫는다.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이 원시기독교는 구약성서, 유대교, 헬레니즘, 스토아 철학, 밀의 종교 등에 의한 종교 혼합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시 후자적 의미에서이다.13)

동양 전통에서도 선진 유교가 불교(理)와 도교(氣)를 만나 우주 존재론의 형이상학인 신유학으로 발전된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보수 정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관계론적, 해석학적 사유 대신에 실체론적으로 사유하므로 나와 남, 내 종교와 남의 종교간의 대화를 원하지 않고 있다.

성서, 즉 기독교 경전에 대한 이해에서도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전혀 입장을 달리한다. 종교다원주의 이론에서는 성서를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원시 기독교를 성립시킨 당시 사회, 문화적 환경의 특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14)

당시는 현대의 ‘역사적 문화’와는 달리 진리는 하나요, 확실하며 불변하고 규범적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종말론적 묵시적 세계 안에서 예수의 신(神) 경험을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했고, 더더욱 로마제국 하의 소수자 위치에서 자신의 진리주장을 배타적이며 절대적 용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성서 안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절대적·규범적 언급들, 즉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 하느님의 중보자 등의 개념 및 명제들은 신약성서의 핵심 메시지가 아니라 신약성서에 의해 사용된 매체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종교다원주의 성서관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15) 성서란 인간의 결단을 추구하는 말씀 사건으로서 성서 자체를 우리에게 말하는 분(Der Redende)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16) 다시 말해 성서란 인간으로 하여금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것을 촉구하는 사건으로서 우리 밖에 있는 거룩한 책, 때로는 일점 일획도 잘못될 수 없는 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 편에서 제기되는 어떤 물음, 사유 가능성도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 곧 코기토(Cogito)로서의 사유는 하느님 진술, 더욱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 대한 진술을 위해서는 부적합할 뿐이다. 성서에 기록된 바 그대로, 예수의 삶, 죽음, 부활, 창조 사건 일체가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으로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분명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의 다음의 입장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신약성서 내의 기독론적 칭호와 언어들은 예수의 인물과 사역에 대한 결정적인 존재론적 진술을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비전(하느님 나라)에 힘과 매력을 느껴서 그와 같은 길을 걷고 행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17)

보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또한 AD 3∼4 세기경에 말해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논리에 근거하여 타종교인들의 신앙 및 자기실현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모든 종교인들이 저마다 자기식대로 구원의 길을 간다면 기독교 구원의 보편성, 곧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기독교 선교 명령이 무용지물이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만이 세계를 구원하는 방주이며 이 교회 안에 존재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교회라는 가시적 공간에 대한 강조가 종교다원주의의 이론을 거부하는 직접적 요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조직의 축소 및 교회 성장의 저해를 두려워하는 교회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기관이 될 수 있다는 율법적 고백의 강요,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 신앙인에게만 제한되고 구원이 기독교인에 의해 독점된다는 생각은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선한 사람에게도 햇볕과 비를 골고루 내리신다는 성서적 신관과 배치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지평을 인간 영혼 구원으로 축소시키고 죽음 이후 공간적인 장소로서 천국을 가는 것이 기독교 구원의 본질처럼 가르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구원관이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는 마치 오늘의 교회가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못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말했던 3∼4세기 가톨릭 교회관으로의 후퇴를 의미한다. 교회란 초대 공동체 안에서 임박하게 대망하던 하느님 나라가 도래치 않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사명 공동체였던 것인데 그것이 점차 제도적 은총의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렇듯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한 보수 신학적 평가가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면 종교다원주의 사고를 수용할 있는 기독교의 자기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 종교다원주의가 교회 밖으로부터, 즉 다문화 사회 속에서 생겨난 산물이라면, 성서 안에서 교회적 실천을 통하여 종교다원주의를 말할 수 있는 내적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기독교 : 역사적 예수 연구를 중심으로18)

교파를 막론하고 한국 내 기독교회의 대다수가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수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단지 교회성장의 둔화를 염려해서라면 그것은 부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되지 못한다. 교회의 존재 이유 및 선교가 무엇인지, 구원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는 것만이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인지를 진실되게 묻고 토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 곧 예수 출현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검토할 때 걸림돌처럼 여겨진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기독교 신학 및 교회의 발전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인습화된 고백 형태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선재성, 유신론적 하느님,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론 등은 현대 사회 속에서 자명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것들은 실제로 성서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물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인습적인 믿음 대신 성서학자들의 성실한 학문적 연구를 수용한다는 종교다원주의 논쟁은 지금처럼 그렇게 흑백논리식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주지하듯 기독교는 우리들에게 예수 자신으로부터 초대 교회의 예수 체험, 교회화 과정 그리고 교회적 전통에로 이어진 신앙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도록 가르쳐 왔다. 그러나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 작업은 이런 일련의 틀과 과정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는 것에 만족치 않고 역사적 예수로부터 직접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인습화된 당대 유대문화(율법)를 하느님 영의 시각에서 비판했으며, 하느님 영의 활동을 사회 내에서 재활성화시키려 했던 존재로서 예수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하느님 영을 받았고(마 1:10), 광야에서 시험받으며 하느님과 교제하고 연합하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 영의 현존 속으로 들어가셨으며, 그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불의한 일에 대해 채찍을 드신 분이었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죄인들, 여자들을 전적으로 사랑하신 분이었다.

즉 예수는 당대 문화에 대해 온몸으로 이의를 제기할 만큼 하느님 영의 실체와 하나가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우리가 이런 영 체험, 예수가 체험했던 영을 다시 경험함으로써만 역사적 예수와 직접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을 대상화하던 간접 종교로부터 그분을 아버지로 체험하는 직접 종교를 선포하였듯이 오늘 우리 역시 하느님이나 예수를 대상적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깨닫고 알며 그의 영을 체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현재적 직접성으로 신을 인식한 예수, 그의 영 체험은 분명 독특한 것이지만 그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절대적 유일성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연구의 주요 결과물이다.

이 점에서 마커스 보그(M. Borg) 같은 학자는 저 바깥으로부터 이 세상 속으로 예수를 보낸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유신론 하느님을 말해온 기독교 전통과는 달리 성서 속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은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인, 지금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영(encompassing spirit)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19) 성서의 하느님은 우주와 분리된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 계시며 사람 속에 계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자연, 그리고 삼라 만상이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감싸며 포월하는 영, 더 이상 초월적 유신론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범재신론적 하느님을 일컫는 이 영은 인간 속에서 탈자적, 초분별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해 이 하느님은 존재 증명을 위한 논리적 사고의 대상도 아니고, 신조의 차원에서 믿음의 객관적 대상도 아니며 오로지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이런 체험 속에서 우리는 예수가 체험했던 그 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영의 현존에 자신을 개방하였고, 그 영의 현존 속에 사로잡힌 예수를 우리가 신의 현현 내지는 육화로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의 인격과 삶 속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가 결정적으로 드러났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영의 힘에 의해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였고 대안적인 사회적 비전을 갖고 당시 지배체제에 도전했던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 체험이 독특한 것이기는 하되 절대적 유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가 지녔던 대안적 사회 비전, 예언자적 저항 활동 역시 이웃하는 선한 벗들과 함께 행할 수 있는 사명이라고 생각한다.20)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타종교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다원주의 이론과 생사를 건 투쟁을 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가 체험했던 하느님 영을 어째서 오늘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묻는 데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범재신론의 표상을 입은 성서 하느님을 재발견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하느님 영을 체험한 예수 체험의 현존, 하느님 영의 임재를 목말라 한다면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목조이는 불순사조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하느님의 선한 벗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제2의 차축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오늘, 우리는 오히려 자기 종교의 틀 속에 안주하여 머물러 있기보다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근거로 남의 종교로 넘어가서 배우고 다시 자신의 종교로 되돌아올 수 있는 영적 모험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하나만 알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종교학적인 명제를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종 교배의 체계 속에서 열등한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기보다는 이웃의 소리(이종 교배)를 들음으로써 뜻밖의 은총을 경험하는 기독교를 기대하는 것이 21세기를 맞는 우리의 소망이 아니던가? ■

이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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