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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바라보는 종교 다원주의 / 이희재
[특집] 왜 종교 다원주의 인가
[10호] 2002년 03월 10일 (일) 이희재 jrhee@hosim.kwangju.ac.kr

1. 한국의 다(多)종교상황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인구는 50.7%이며 그 가운데 불교신자가 23.2%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개신교 19.7%, 천주교는 6.6%로 전 종교 인구의 97.5%를 차지하고 있다.1)

이 통계에서 불교가 많다고 하지만 사실 개신교와 천주교를 종합하면 기독교 인구가 불교 인구보다 많고, 그 활동의 강도로 보자면 통계수치 이상으로 기독교가 강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종교통계 가운데 유념할 점은, 자신의 종교가 유교라고 하는 사람은 1% 미만이지만, 한국인의 유교적 행동방식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종교 인구인 49.3%는 민간신앙이나 유교적 전통의 영향 하에 있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인구가 한국의 다종교상황에서 갈등을 완화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지역에 따라 편차를 들어내는데 수도권인 서울과 인천, 경기, 그리고 호남지방은 기독교가 우세하고, 부산광역시를 비롯한 경남, 대구·경북 등 영남지방은 불교가 우세하다. 예컨대 부산의 경우는 3명 중의 1명이 불교신자인 반면 전북에서는 8명 중 1명만이 불교신자이다.

전통 농업사회에서 도시화·공업화를 겪으면서 도래한 종교다원 사회의 도래는 한국인이 맞고 있는 기회이자 위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단순한 빛만이 아닌 그림자도 따르고 있다.

현재 종교인들이 자신들이 소속한 종교단체나 종교인들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갤럽이 조사한 설문 가운데 “대부분의 종교단체는 종교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있다”라는 견해에 응답자의 72.2%가 ‘그렇다’(아주 그렇다: 13.3% + 약간 그렇다: 58.9%)인 반면 20.3%만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2) 더 구체적으로는 “대부분의 종교단체는 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교세를 확장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절대 다수인 79.6%가 긍정적으로 응답했다.3)

이 통계가 말해주는 것이 바로 한국의 다(多)종교상황의 빛이 아닌 그림자의 면이다. 곧 종교 본래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적 확장에 열을 올림으로써 종교간의 갈등상황을 유발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 한국 불교도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인식

필자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불자들의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재가불자 100명의 설문을 받았다. 설문조사방식은 인터넷의 불교게시판에서 추출한 불자들의 전자우편, 불교단체 종사자, 새벽예불에 참석한 불자, 혹은 전화 면담 등을 통해 설문을 수집했다.4)

물론 이 문항은 필자의 주관적 선입견이 반영되어 있고, 응답의 내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재가불자들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이 문항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① 한국사회의 종교적 갈등은 개신교의 배타적 신앙심에서 유래
한국에 들어온 서양의 선교사들은 불교나 무속을 미신 혹은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동등하게 함께 공존해야될 인류의 문화가 아닌 타파되어야 할 폐습처럼 취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러한 가르침은 오늘에도 이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상숭배나 국조(國祖) 단군상의 파괴 등도 기독교 이외의 신앙을 우상으로 보는 관점은 아직도 사회적 마찰로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불자 100명 가운데 52명이 기독교의 이러한 공격적인 선교가 종교적 갈등의 제1 원인이라고 응답했으며, 12명은 기독교 자체의 교리라고 대답했다. 4명은 불교계의 세속적 이권 다툼으로 인한 비리(非理), 12명은 훼불사건 등에 대한 불교 자체의 미온적 대응이 종교적 갈등을 제공했다고 보았다. 불자들은 종교적 갈등에 대한 원인이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가 가장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② 종교간의 평화는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
종교간의 평화는 중요한가라는 물음은 어쩌면 우문(愚問)이 아닌지 모르지만, 일단은 종교 평화에 대한 불자들의 견해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100명 가운데 88명(매우 중요: 50명 + 중요: 38)이 중요하다고 응답했으며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대신 무응답은 10명이었다. 무응답의 의미는 아마 무작정 평화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도 또한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수 있겠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다.

③ 불자는 개신교에 대해 관용적임
이 설문에 대해서는 그 응답이 가장 궁금한 사항이었다. 응답자의 대다수인 79%가(전혀 배타적이지 않다: 17명 + 배타적이지 않다: 34명 + 보통: 28명) 배타적이지 않거나 보통이라고 했고, 배타적이라고 한 사람은 13%(배타적이다: 8명 + 매우 배타적이다: 5명)였다.

배타적이라고 대답한 사람들 가운데 배타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문했는데, 응답자의 대부분이 개신교의 공격적인 선교를 그 이유로 꼽았다.(18명)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와 ‘불교를 사랑하기 때문’에는 각각 4명이었다. 이 설문에 대한 무응답이 74명이었는데 이 설문은 배타적이라고 한 사람만 응답을 요구했기 때문에 무응답자인 74명은 개신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 설문으로만 보자면 한국의 불자들은 대부분 종교다원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에 대해 왜 배타적이지 않은가를 묻는 설문에는 50%가 종교적 화합을 불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17%는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이 배타성에 대해 포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이 배타적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5%에 머물고 있으며, 74%인 대다수가(매우 그렇다: 18명 + 그렇다: 56명) 불교의 교리는 종교간의 화합을 가르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면 그러한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은 자비가 50%를 차지하였고 화쟁이 23%, 공사상이 11%, 불살생·비폭력이 10%를 차지하여 주로 자비의 정신이 종교다원주의를 긍정하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지목하였다.

굳이 개신교의 배타성을 수용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문에서는 불교에 대한 신심(21%), 비진리에 대한 불신(18%)과 외도비판(10%) 그리고 불교교단의 수호(7%)였지만 44%는 이 범주의 응답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종교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설문에 대해 개신교와의 대화를 53%가 응답했고(교류 및 친선도모:37%+ 개신교 이해하기:16%), 불교를 제대로 이해시키는 적극적 포교(33%)를 다음으로 들었다.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은 1%에 머물러 한국의 불자들이 종교간 갈등해소를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설문은 재가불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설문의 내용도 적절하지 않은 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불자들이 종교다원사회에 있어서 다종교적 상황을 인정하고 종교평화를 원하고 있는 일면을 읽을 수 있었다.

3. 불교교리의 측면에서 보는 종교다원주의

1) 종교다원주의에 비판적인 불교의 입장
불교는 역사적으로 포교된 지역의 토착신앙 등을 수용하였던 역사적 사실과 동시에 그러한 다양한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타종교와 다른 불교라고 하는 종교의 정체성을 언제나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선(善)과 악(惡),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에 대한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간과한다면 불교라고 하는 종교적 정체성은 상실되었을 것이다.

① 외도(外道) 비판
불타 석가모니의 재세(在世) 당시에 그가 지적한 진리가 아닌 외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으며 이를 비판했다. 소위 삼종외도(三種外道)가 그것이다.

가) 숙작인론(宿作因論): 과거의 업에 의해 삶이 결정된다는 자이나교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의 노력이나 나태와 관계 없이 운명이 결정된 것이라면, 선에 대한 노력이나 악에 대한 경계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의 정진과 노력, 자유의지에 관계 없이 운명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은 비진리인 외도였던 것이다.

나) 존우론(尊祐論) 또는 자재신화작설(自在神化作說): 일체가 신(尊祐)에 의해 창조·지배된다는 바라문교의 가르침을 비판한다.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신에 해당하는 범천(梵天)과 자재천(自在天) 등의 존우(尊祐)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러한 최고 존재들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숙작인론(宿作因論)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수행노력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외도로 비판했다.

다)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 또는 우연론(偶然論)5): 인과(因果)와 업보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세 가지 외도를 보면, 불교는 일체가 모두 운명이고 숙명(宿命)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거나,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거나 또는 아무런 인연이 없이 어떤 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갖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세상의 선행과 악행의 책임이 인간에게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나 과거의 업보나 신에게 돌려버린다면 인간은 스스로 ‘마땅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할 자주성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또한 당시의 사상계의 잘못된 가르침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하여 역시 비판했는데 여섯 인물은 아래와 같다.

가) 도덕부정론의 푸루나 카샤파(Puruna Kasyapa): 악을 행해도 과보가 발생하지 않으며 선을 행해도 과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과업보를 부정하는 설이다.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말할 수 없다.

나) 유물론의 아지타 케사캄발리(Ajita Kesakambalin): 사대(四大; 地·水·火·風)의 요소만을 인정하고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소멸하며, 현재뿐이며 내세는 없으며, 선악에 대한 과보도 부정했다. 유물론이면서 현세적 쾌락주의사상이다.

다) 유물론, 7요소설의 파쿠다 캇챠야나(Pakudha Kaccayana):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사대(四大)에 고(苦)와 락(樂) 그리고 영혼을 첨가했다.

라) 숙명론의 마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 인과를 부정하는 숙명론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결정된 숙명에 따른다는 운명론이다.

마) 상대주의의 산자야 나타풋타(Sanjaya Nataputta):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자이다.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의 입장이다.

바)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 불교와 유사하나 고행 등이 극단적이었다.

이들 여섯 명의 사상가는 오늘날 동서양 철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철학이며 종교사상이다. 당시에도 전통적인 바라문교에 비해서는 참신한 사상가였으나 불교에서는 이들을 정당하지 않은 외도로 비판했다.
그렇다면 외도라는 말의 의미에는 불교인 정도(正道)와 대립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태도이고 타종교와 다른 견해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볼 수 있다.

② 정도(正道)의 제시
불타 석가모니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수행의 길을 선택했다. 이 역사적 사실은 그의 가치관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세속적 가치가 아닌 보다 영원한 어떤 가치를 찾기 위한 행위였으며 그의 깨달음은 세계종교로서 불교의 출발이었다.
석가모니 재세시 많은 사상과 종교가 있었지만 외도(外道)를 비판했던 것처럼 올바르지 않은 삿된 사상에 대해서 그는 경계했고 정도로서 불교를 제시했던 것이다. 바름과 그릇됨에 대한 게송을 소개하는 것이 수다하지만 대표적으로 다음의 게송을 음미해 보자.

만약 사람이 백 년을 살더라도
불을 섬기고 이상한 술법을 닦는다면
올바름에 귀의하여 받들어
그 밝음이 일체를 빛내는 것만 못하다.

만약 사람이 백 년을 살더라도
삿된 것을 배우고 선하지 않은 것에 뜻을 둔다면
단 하루를 살더라도
바른 진리를 받아들여 정진함만 못하다.6)

올바르지 않은 가르침을 신앙하여 백 년을 사는 것보다도 올바른 가르침을 신앙하여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무엇이 삿된 길이며 무엇이 정도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저들의 도는 불교와 다르다. 저들은 스스로 삶을 탐하고 희망하는 생각으로 삿된 길을 걷는다. 첫째는 사견(邪見)으로 금세와 후세에 지은 것을 스스로 받는 줄을 아지 못하고 점치고 제사 지내는 것으로 복을 구한다. 둘째는 사사(邪思)다. 생각이 애욕에 있고 성내는 마음에 있다. 셋째는 사언(邪言)이다. 허위로 아첨하고 간사하게 속이고 꾸미는 말을 한다. 넷째는 사행(邪行)이다. 산 목숨을 죽이고 도둑질하며 음란하고 방탕하다. 다섯째는 사명(邪命)이다. 이익과 옷이나 먹을 것 따위를 구할 적에 바른 도로써 행하지 않는다. 여섯째는 사치(邪治)다. 나쁜 짓을 끊지 않고 좋은 짓을 하지 않는다. 일곱째는 사지(邪志)다. 뜻으로 늘 즐거움을 탐하고 이 몸을 깨뜻하다고 한다. 여덟째는 사정(邪定)이다. 세속의 욕망을 채우려 하고 초월의 길을 보지 못한다.7)

이러한 삿된 길을 설명하고 나서 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은 다른 여타의 스승의 가르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월성(秀越性)을 가진 것이다.8)
불교는 선악(善惡)과 시비(是非)와 혹은 정사(正邪)가 애매모호한 가르침이 아니라 이처럼 그 가치관이 분명히 제시된 종교이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③ 귀의(歸依) 삼보(三寶)의 신앙
오늘날 불교의 사찰에서 법회를 볼 때 가장 기본적인 의례가 삼귀의례다.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대한 신앙의 맹세라고 할 것이다. 《열반경》에서 삼보신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부처님께 귀의한 자를 진정 우바새라고 이름하니
마침내 다시는 그 나머지 천신(天神)에게는 귀의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자는 살해(殺害)를 떠났으며
거룩한 승가에 귀의하는 자는 외도를 구하지 않으니
이같이 삼보에 귀의하면 두려운 바 없음을 얻는다.
가섭이 부처님께 말하기를 나 역시 삼보에 귀의하오니
이것이 올바른 길이며 여러 부처님의 경계다.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에게만 귀의하지 다른 천신(天神)에게는 결코 귀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승가에만 귀의하지 외도의 집단에 귀의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불성을 주장하고 선종(禪宗)의 경우 무신론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예불에 있어서 여전히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의 대상은 삼보인 것임에 변함이 없다.
이런 신앙의 대상에 있어서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귀의의 대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불교

① 인도의 관용적 문화의 계승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인도의 종교문화적 배경인 힌디즘 속에서 성장 발전하고 그를 지양(止揚)함으로써 세계종교로 퍼질 수 있었다. 불교의 중요교리인 업(業)과 윤회(輪廻) 그리고 해탈의 사상은 불교의 고유사상이 아니라 힌디즘의 계승인 것이다. 불타 석가모니 재세시에도 많은 종교단체들이 난립했으며, 오늘의 종교다원주의적 상황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불교는 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힌디즘은 유일신을 신앙하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비해 포용적이다. 인도인들이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는 힌두교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았지만, 배타적 이슬람이 인도에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인도의 전통종교의 정체성을 인식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힌디즘은 배타적 종교라기보다는 인도인들의 습속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는 인간의 생래적인 계급제도를 기정사실화하는 차별적인 면이 있는 데 비해 불타 석가모니는 인간의 생래적 계급을 부정하고 평등을 주장함으로 인해 보편적인 세계종교로서 아시아 제국에 전파될 수 있었다. 동아시아에 전파된 불교는 자신의 교세확장을 위해 종교전쟁이나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토착신앙을 포용하고 관용하는 힌디즘적 사상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정신
힌디즘과 다른 불교의 일면 가운데 하나가 사성계급제도를 부정한 점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는 불교의 상징인 대자대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의 사랑이나 유교의 인(仁)과 같은 보편적 가치로 통하지만, 자비(慈悲)의 경우는 그 적용 범위가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자비의 자(慈)는 ‘우정’을 뜻하며, 비(悲)는 남의 괴로움을 ‘슬퍼함’의 마음이다. 경전에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하여 자비와 더불어 희사(喜捨)를 첨가한다.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가지 마음은 몇몇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고 일체 중생에게 파급된다. 윤회를 설하게 된 이상, 일체 생류와 윤리적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사찰에서는 공양이 끝나면 공양간의 주춧돌에 헌식(獻食)을 하는데 이는 쥐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었다. 쥐를 인간의 먹이를 빼앗아 가는 악(惡)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존해야 할 생명체로 보는 것이다. 불자들에게 제시되는 오계(五戒)의 제1의 원칙은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 것이며, 생명체인 동물을 음식으로 먹는 것도 자비심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한다. 곤충에서부터 동물에까지 적용되는 대자대비의 정신이 종교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타종교인에게 적용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랑(愛)’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랑의 이면에는 미움(憎)과 집착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인들의 사랑에는 배타적인 마음이 깔려 있어서 사랑에 부응하지 못할 때는 심각한 미움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는 그런 배타성이 없어서 연인끼리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친구간의 ‘우정’과 유사하다.

이런 정신에 비추어보자면 설사 불교를 반대하며 폄하하고 공격하는 타종교인에 똑같이 대응하여 미워하고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은 자비의 정신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교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자비가 아니다.
불타 석가모니의 경우도 자신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집단에 의해 공격을 당했지만 한결같이 대자대비의 정신으로 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를 살해하려 했던 경쟁자 데바닷타,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오히려 용서하고 또는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한 실례이며 불교를 비방하고 공격하고, 욕설과 폭행을 일삼는 바라문에게도 미움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람이 음식을 제공했는데 받아먹지 않으면 다시 음식을 제공한 사람의 음식으로 남듯이 미움과 비방도 응대하지 않으면 다시 비난하는 상대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함경》에 나오는 몇 가지 대화를 들어보자. 석가모니에게 적대적인 바라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라문이여, 지금 당신은 나에게 갖은 욕설과 악담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욕설과 악담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로 대하면 그 분노가 자기에게 돌아오고,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로 대하지 않으면 사람은 두 가지의 승리를 얻는다.

타인의 분노를 받고
정념(正念)으로 자기를 진정시키면
자기를 이기고 또 타인에게도 이기는 것이다.10)

불교에서는 세 가지 독(毒)을 탐욕(貪), 성냄(瞋) 그리고 어리석음(痴)이라고 하여 증오와 배타적인 마음에 대해 경계한다. 이것을 자기에 대해 설사 원한과 나쁜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도 평등하게 적용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법구경》에서는 복수를 금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들은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잘 다스렸느니라. 그리하여 자기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에 대해 반대하거나 저항하려는 나쁜 감정을 다 없애버린 아라한들이니라.

원한을 품을 만한 자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폭행하는 자들을 용서와 평화로 대하며
집착된 자들 속에서 집착이 없나니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11)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티베트의 승왕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독립을 위해 비폭력과 자비심을 견지하면서 나라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의 위상을 크게 높이고 있고, 대자대비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스님이다.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과도 열린 대화를 하면서 종교평화에도 기여하는 인물인데, 그는 진정한 자비심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평등과 무집착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자비심이란 집착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마음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느 정도 자비심을 느끼더라도, 그 자비심이 깊은 평등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여전히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자비심은 집착과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12)

단순한 사랑과 자비의 다른 점은 사랑이 일종의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성향을 가졌다면 자비는 자기 중심적인 애증, 집착 그리고 편견을 떠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심은 자기 집착과 편견을 넘었을 때 지닐 수 있는 정신이지, 자기집착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평등하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불자들끼리는 자비로운데 다른 집단이나 타종교인에 대해 미움과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진정한 자비심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대자대비의 정신이야말로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③ 공(空)과 무집착
원시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무아(無我)의 사상이야말로 종래 인도의 종교의 설을 뛰어넘은 불교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무아야말로 불교가 보는 인간 존재의 실상이다.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한 범부는 자아를 망상하고 자아에 집착한다. 범부란 다름 아닌 ‘자아에의 집착(我執)’이 있는 자인 것이다. 삼법인의 제1 법인인 ‘제행무상(諸行無常)’ 곧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고정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명백해진다. 무아란 자기에게는 고정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숙명이나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연에 의해 생기고 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연기(緣起)의 세계관의 근저에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 없이 어떤 조건에 따라 존재하고 소멸한다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있는 것이다. 자아라고 하는 개념도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을 영원한 것으로 집착하는 데서 나온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무아와 연기를 근거로 한 공(空)사상은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예컨대 《금강경》의 논리는 공이라는 말은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무집착의 공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진정한 구도자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집착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뗏목의 비유로 설명한다.13) 이것은 불교라고 하는 자기 종교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것을 설파하는 것이다.

또한 자비심과 인내의 근거도 자기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살은 당연히 그러한 인욕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14) 더 나아가서 자신이 지은 선행과 공덕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한다.15)
물론 여기에서 공과 무집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바로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가르침을 설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의 사상은 불교가 배타적 일신교와는 달리 불교와 진리 인식을 달리하는 다른 종교와 사상을 얼마나 잘 포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자신의 주장만 있을 뿐 상대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종교간의 대화란 성립할 수 없으며 종교의 평화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공과 무집착의 사상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견지하는 포용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④ 화쟁(和諍)의 논리
불타 석가모니는 당시의 수많은 사상체계들이 서로 대립, 충돌을 일으켰던 형이상학적 논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는 형이상학적 논의는 모두가 상대적인 것으로 진실한 실천적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교에 있어서 화쟁과 중도의 논리는 실천을 중시하는 불타 석가모니에게서 그 싹이 나타난 셈이고, 그 후 대중교화에 뜻을 둔 대승불교에 그대로 지속된 정신이다. 불교사를 보면 대승과 소승, 성(性)과 상(相), 선(禪)과 교(敎), 혹은 돈(頓)과 점(漸) 등 수많은 대립적 논쟁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중국에 수입된 대승불교만 하더라도 수많은 경전이 도입되면서 어느 경전이 중요한가에 따라 여러 종파들이 생겨났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중국의 경우, 유교와 도교의 토착사상의 바탕 위에 불교가 수용되었다. 불교는 충효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에 부응하기 위해 《부모은중경》과 같은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는 경전이 소개되었고 실제로 호국불교의 면을 강조해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도교의 무위자연의 장생불사의 논리를 통해 공사상을 이해시켰고 장생불사의 양생법과 선종의 호흡법은 서로 모순이 없었다. 이것이 타종교와 불교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포용하는 불교적 화쟁의 논리를 증명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사상 가운데 화엄의 사상은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잘 표현한 것으로서 현실을 초월하기보다는 바로 현실이 이상이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강조했다.
한국불교사에서도 원효에 의해 각종의 종파적 대립을 통합하는 화쟁의 논리가 강조되었고, 그러한 논리는 국민을 통합하는 논리로 그리고 토착종교를 포용하는 화해의 논리로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불교의 논리는 역사적으로 계승된 이 같은 화쟁의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한국사회는 다종교사회로서 종교간의 평화가 필요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불자들은 종교간의 평화를 중요시하고 있으며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이다. 또한 불교의 교리가 타종교에 대해 관용하는 자비의 정신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가 발생했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불교는 타종교와 다른 분명한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외도(外道)나 사도(邪道)가 아닌 정도(正道)라고 하는 인식 하에 불교의 가르침은 전파되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거룩한 존재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삼보(三寶)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불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와는 다른 자력신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타 석가모니와 그의 가르침을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가르침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곧 이러한 신앙을 포기한다면 종교간의 대화는 불필요하고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불교는 타종교와 대화할 수 있는 개방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선 불교가 포용적인 종교문화를 가진 인도에서 발생한 데서 기인한다.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이 대자대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불살생·비폭력의 정신과 더불어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차별적인 동정심을 의미하며, 자기 중심적이 아닌 상대를 배려하는 그런 태도다. 곧 자기에 집착하지 않는 무아(無我)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타종교에서 불교를 배타적이고 적대적으로 대접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적대감이나 증오심을 가지고 복수나 살생을 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공이란 자기 중심적 집착과 편견을 떠나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물론 자기 종교에 대한 이기적 집착을 떠날 것을 가르치는 이러한 공사상이야말로 대립과 논쟁을 지양하는 논거가 되며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논리가 된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불교는 타종교와 접촉하면서 종교전쟁을 수행한 적이 없고, 언제나 토착의 종교와 신앙을 존중하며 대화해 왔다는 점은 불교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종교임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타종교와 공유할 수 없는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상치되는 여러 종교를 포용해 왔으며, 앞으로도 다른 타종교들과 교류하고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

이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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