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언

지난 겨울 양심적 병역 거부의 문제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군대체 복무가 불교계의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교NGO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오태양 씨는 12월 17일 불자로서는 처음으로 군 입영 대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했다. 그는 “불살생과 생명존중의 불교적 신념과 평화·봉사의 인생관에 따른 양심적 결단을 지키고자, 총검술을 비롯한 군사훈련을 거부한다.”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국민적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민간대체 봉사활동을 통해 비전투 분야에서 병역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구제해 줄 것”1)을 요구했다.
지금까지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특정 종교 신자들의 일로만 여겨진 양심적 병역거부가 불교계의 당면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사람은 모두 1만여 명인데,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들로 현재도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집총훈련과 병역을 거부해 1600여 명이 실형을 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에게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둘러싼 문제라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인 생명을 바라보는 불교적 입장과 이의 사회적 실천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해 준 것이다.

2. 불살생과 자비의 가르침

1) 불교의 생명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이론이 없을 것이다. 생명은 한 존재가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 나가는 모든 존재의 총체적 활동양상이다. 흔히 몸이 없는 마음은 귀신이고, 마음이 없는 몸을 시체라고 하듯이 우리는 몸과 마음이 하나로 조화되어야만,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면서(見聞覺知)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육도집경》에 생명의 소중함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비둘기를 잡아먹으려는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가 날아와 살바달(薩波達)왕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대왕님 보살펴주십시오, 제가 죽을 지경에 있습니다.’ ‘내 너를 살려주리라.’ 매가 곧 뒤쫓아와서 …… ‘만약 임금님께서 인자하신 마음으로 중생을 건지시려면 임금님의 살을 베어 비둘기 무게만큼 주십시오.’ 이에 왕은 그러마 하고 스스로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비둘기 무게와 같게 하였다.”2)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모든 생명은 평등하며,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법구경》에서는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를 자신의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3)고 한다. 또한 《열반경》에는 “모든 생명은 칼과 몽둥이를 두려워하며 목숨에 애착하지 않는 것은 없다.”4)고 한다. 이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생명은 폭력과 죽음을 거부하고 평화를 사랑한다.

2) 율장에 나타난 불살생과 자비의 가르침
불교에 입문하려면 누구나 5계를 지켜야 한다. 이 5계의 첫번째 조목이 불살생계이다. 이는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윤리적인 가치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불교는 생명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먼저 출가 수행자가 지켜야할 계율인 《사분율(四分律)》의 4바라이(波羅夷, pa?a?ika)5) 가운데 ‘3. 사람을 죽이지 말라(不殺生戒)’를 보자.
어떤 비구가 고의로 제 손에 칼을 들고 남의 목숨을 끊거나 남에게 칼을 주고 죽음을 찬탄하거나 죽음을 권하기를, ‘딱한 남자야, 이렇게 나쁘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거나, 이런 생각을 하여 갖가지 방편으로 죽음을 찬탄하고 죽음을 권장한다면 이 비구는 바라이죄이니, 함께 살지 못하느니라.6)

이처럼 출가수행자는 자기가 손수 하거나, 남을 시키거나, 남에게 권유하거나 어떠한 방법이든지 살생에 대하여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다.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는 불살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살생하지 않는가. 만약 길을 가다가 개미·지렁이·누에나비·두꺼비나 풀벌레 그 이외의 곤충을 보더라도 그것들을 피해 먼 길로 돌아가는데,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업과 과보를 믿어서 생사의 허물을 알고 생멸법을 관하는 것이다. 이를 불살생이라고 한다.7)

여기에서 우리는 ‘불살생’이 바로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원리가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불살생은 곧 자비이며, 이는 자기와 남이 하나되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살생을 떠나 세상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줌으로써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이다. …… 모든 존재는 목숨으로 근본을 삼고 사람은 모두 제 목숨을 보호한다. 불살생은 곧 그 목숨을 주는 것이며, 만약 목숨을 준다는 것은 모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 가는 보시는 목숨을 주는 것이니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 가장 훌륭한 계율은 목숨을 주는 것이다.8)

이렇듯 가장 훌륭한 계율은 곧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서로를 살생하여 자기의 목숨을 부지해 나가지만, 진정한 생명은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히 여겨주어야 한다. 곧 대승적인 삶의 전환으로 다른 생명을 아끼고 죽이지 않는 것이 바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불살생의 가르침은 곧 자비(慈悲)에서 나온다.

이 불살생은 가장 위대한 업이고 정법의 종자이다. 생사에 헤맬 때에는 오직 불살생만이 귀의할 곳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다. 생사의 어둠 속에 들어간다면 이 불살생을 등불로 삼아야 한다. 불살생을 자비라고 이름하니, 올바른 마음으로 불살생의 선을 생각한다면, 마음에 늘 기쁨이 생겨날 것이다.9)
대승의 계율사상을 담고 있는 《범망경》의 십중대계(十重大戒) 중 첫째가 불살생계이다.

만일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이나 찬탄으로 죽이거나, 그러한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죽이는 원인과 죽이는 조건, 죽이는 방법 및 죽이는 행위 등을 통해서 내지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일부러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살은 마땅히 자비로운 마음과 효순하는 마음에 항상 머물러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구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기꺼이 살생하는 자는 보살의 바라이죄이다.10)

법장은 《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에서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제1계(戒)로 제정한 뜻을 열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①생명을 끊는 것은 업도(業道)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고, ②대비심을 어겨서 해치기 때문이며, ③육도의 모든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인데, 길러준 은혜를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고, ④수승한 연(緣)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⑤일체중생은 불성이 있어서 모두 장래에 법기(法器)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⑥보살의 무외시(無畏施)를 어겨서 잃기 때문이며, ⑦사섭행(四攝行)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고, ⑧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며, ⑨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고, ⑩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삼세제불의 가업(家業)의 법이 그러하니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까닭이다.”11) 여기에서 모든 중생을 모두 내 부모로 여긴다는 것 등은 바로 연기론적 생명관의 입장에서 모든 존재를 여실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아울러 대승의 계율정신의 근본은 바로 자비사상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비구의 90바일제(波逸提, Pra?ascittika)12) 가운데 생명관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을 가려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0. 땅을 파지 말라(掘地戒)
    어떤 비구가 손수 땅을 파거나 남을 시켜 땅을 판다면 바일제이니라.13)

    11. 살아 있는 나무를 꺾지 말라(壞生種戒)
    어떤 비구가 살아 있는 나무(鬼神村)를 파괴한다면 바일제이니라.14)

    19. 벌레 있는 물을 사용하지 말라(用蟲水戒)
    어떤 비구가 물에 벌레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진흙과 풀에 뿌리던지 남을 시켜 뿌린다면 바일제이니라.15)

    48. 군대를 보러 가지 말라(觀軍陣戒)
    어떤 비구가 군사의 진지에 가서 구경한다면 특별한 인연이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바일제이니라.16)

    49. 군대 안에서 기한이 지나도록 일을 보지 말라(軍中過限戒)
    어떤 비구가 일이 있다면 군대 안에 가서 두 세 밤을 자도록 허락하겠지만, 지나치면 바일제이니라.17)

    50. 전쟁하는 것을 구경하지 말라(觀軍陣 戰戒)
    어떤 비구가 두 밤, 세 밤 동안 군대 안에 자면서 때로 군인들이 진치고 싸우는 것을 구경하거나 군대, 코끼리, 말 등의 세력 형편을 구경하러 다닌다면 바일제이니라.18)

    61. 고의로 축생들의 목숨을 빼앗지 말라(故殺畜生命戒)
    어떤 비구가 고의로 축생의 목숨을 끊는다면 바일제이니라.19)

    62. 벌레 있는 물을 마시지 말라(筮飮用戒)
    어떤 비구가 벌레 있는 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신다면 바일제이니라.20)

여기에서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축생을 비롯한 유정물은 물론 무정물까지 절대로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환경문제에 대한 계율적 입장의 단초가 여기에 있다. 둘째는 군대와 관련된 기본적인 입장이다. 48, 49, 50조에서 보면 출가수행자는 필요에 의해 일을 보러 가는 경우가 아니면, 병영에 가서는 안 된다. 일을 보러가더라도 2, 3일을 넘기면 결코 안되며, 군사훈련이나 군인들의 전투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생명존중을 실현하는 대자비의 실천의 입장에서 전쟁뿐만 아니라 병영까지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군포교를 위한 군법사의 법회활동을 비롯한 포교활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다.
《범망경》의 제10경계인 ‘중생을 죽이는 도구를 쌓아두지 말라(畜殺生具戒)’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불자들이여, 모든 칼·몽둥이·활·화살·창·도끼 등 싸우는 도구를 쌓아두지 말 것이며, 아울러 그물망 등 살생하는 기구 일체를 쌓아두어서는 안 된다. 보살은 부모를 죽인 이에게도 오히려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다른 중생을 죽일 수 있겠는가. 만약 일부러 모든 칼·몽둥이 등을 쌓아두는 자는 경구죄(輕垢罪)를 범한 것이다.21)

위 조문에 따르면 살생하는 도구를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대승정신에 어긋난다. 백제의 29대 법왕은 즉위원년(599) 12월에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종류들을 놓아주게 했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불태우게 한 일에 주목해야 한다.22)
다음으로 《범망경》의 제11 통국사명계(通國使命戒)를 보자.

불자여 이익을 얻으려는 모진 마음 때문에 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군진에서 회합하고, 군대를 일으켜 서로 치고 무량한 중생을 죽이지 말라. 그리고 보살은 군진 속에 들어가서 왕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일부러 국적(國賊)이 됨에 있어서랴. 만일 일부러 행한다면 경구죄(輕垢罪)를 범한다.23)

불자는 결코 군대를 일으켜 중생을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아울러 군진에 들어가 생명을 죽이는 일에 협조하거나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3. 불교의 국방문제

1)전륜성왕 사상에서 본 국방의 문제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정치는 바로 정법(dharma)을 통한 통치이다. 이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륜성왕은 정법의 바퀴(cakka)를 굴려서 온 누리를 통치하는(vatti) 이상적인 왕이다. 전륜성왕은 수명·건강·용모·재산의 네 가지의 덕을24) 가지고 있다.
전륜성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보물(七寶)은 ①金輪寶(cakka-ratanam.), ②白象寶(hatthi-ratanam.), ③紺馬寶(assa-ratanam.), ④神珠寶(man.i-ratanam.), ⑤玉女寶(itti-ratanam.), ⑥居士寶(gahapati-ratanam.), ⑦主兵寶(parin.a?aka-ratanam.)이다.25) 이 가운데 일곱번째 주병보는 4병을 모으고 군사를 지휘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오늘날의 국방과 치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륜성왕 사상에서 본다면, 정법에 의한 정복(dharma-vijjaya)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고대 인도의 전통적인 군대조직인 4병을 거느린다26)는 것이다. 아울러 7보를 시험하고, 온 천하를 정법의 통치로 다스릴 때 이 4병을 집결시키는 것이다. 전륜성왕은 이상적인 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물심양면을 모두다 구족한다.27) 전륜성왕은 7보를 다 갖추고 천명의 자식들을 구족하며,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진리(dharma)로써 모든 땅과 큰 바다까지 다스린다.28)
7보 가운데 주병보는 군대를 통솔하고 지휘하는 군의 통수권자를 의미한다. 《기세경》에서는 전륜성왕이 주병보에게 4군을 이끌며 무기를 갖추어 군대를 통솔하게 한다. 하지만 4병은 전륜성왕을 호위하고 금륜보를 뒤따르는 내용으로 나타난다. 이는 금륜보는 보편적인 진리인 정법을 뜻하는 것이며, 금륜보가 천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그의 정법의 이상정치가 온 누리(四天下)에 울려 퍼진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전륜성왕은 결코 4병을 동원해서 살육을 통한 무자비한 전쟁으로 온 누리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바탕으로 한 법치(法治)와 자비를 기본으로 한 덕치(德治)로 온 누리를 다스리는 것이다. 전륜성왕의 군대는 침략전쟁을 주목적으로 하는 군대가 아니라 법치와 덕치를 지키기 위한 군대다.
전륜성왕의 정법에 의한 정치이념을 더 살펴보자. 먼저 《증일아함경》의 〈예삼보품〉에서는 선왕이 “대개 성왕(聖王)의 법에는 아비의 소유를 믿는 것이 아니다. 네가 스스로 법을 행하여 그것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왕의 통치의 덕목은 정법의 수행을 통해 이어지는 것(相繼)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법을 공경하고(敬法) 법을 존중하며(重法) 법을 생각하고(念法) 법을 기르며(養法) 법을 자라게 하고(長法) 법을 성하게 하며(熾法) 법을 크게 하는 것(大法)”29)이라고 한다. 이 일곱 가지 법을 행하면 성왕의 다스림에 알맞고 또 7보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의 모든 전륜성왕이 배우고 실천했던 상계법(相繼法)을 배운다면 국토와 인민이 갈수록 번성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왕이시여, 마땅히 법을 법답게 관찰하고 바르게 행하소서. 그리고 태자·후비·채녀(?女) 및 모든 백성·사문·바라문과 내지 곤충까지를 위하여 법재(法齋)를 받들어 행하며, 매달 8일, 14일, 15일에는 보시를 행하되, 모든 궁핍한 사문·바라문·빈궁자·고독자, 멀리서 온 거지들에게 음식·의복·수레·꽃다발·흩뿌리는 꽃·바르는 향·집·침구·털담요·보배갓·급사·등불들을 보시하소서. 만일 나라 안에 웃어른이고 높으며 명예와 덕망이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거든 때때로 그에게 나아가 법을 묻고 배워야 합니다.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하며,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복이며, 어떤 것이 나쁘고 어떤 것이 옳은가.’ 또 나라 안에 빈궁한 자가 있거든 재물을 주어 구제하여 주소서. 이것이 상계법(相繼法)입니다.30)

《증일아함경》의 제46 〈결금품〉에서는 국왕으로서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열 가지 법을 말하고 있다. 이는 국왕의 개인적인 수행의 덕목을 밝히는 것으로 통치자가 지녀야할 덕목을 말한다. 요컨대 통치자가 덕을 쌓아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가를 이상적으로 이끄는데 그 목적을 둔다고 하겠다.

①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으며 또 조그만 일로 해치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 ②신하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말을 거스르지 않는 것, ③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해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 ④법으로써 재물을 거두고 그른 법을 쓰지 않는 것, ⑤남의 여자를 탐하지 않고 항상 자기 아내를 보호하는 것, ⑥술을 마시지 않아 마음이 거칠거나 어지럽지 않는 것, ⑦국왕으로서 실없지 않고 외적을 항복받는 것, ⑧법을 따라 다스려 교화하고 비뚤어짐이 없는 것, ⑨신하들과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⑩병이 없고 기력이 강성한 것이다.31)

이와 같이 국왕으로서 열 가지 법을 성취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오래 보존하지 못하고 또 나라에는 도적이 들끓고 적이 많을 것이라고32) 한다. 아울러 “왕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그 필요한 물건을 주고 모든 생업을 꾸려 가는 자에게는 마땅히 그 재물을 주고 모든 농사를 짓는 자에게는 마땅히 그 소와 송아지와 종자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경영하게 하십시오. 왕이여, 백성을 핍박하지 않으면 곧 인민은 안온하여 그 자손을 기르면서 서로 즐겁게 지낼 것”33)이라고 한다. 이것은 백성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먼저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편안할 수 있는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불교정치철학의 근본 출발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정치의 이상은 전륜성왕 사상에 나타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정법에 의한 통치이며, 백성을 평안하게 잘 살게 이끄는 덕치를 통한 다스림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불교에서 군대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침략과 정복이 아닌, 정법의 통치와 덕치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차원의 군대라고 할 수 있다.

2) 불교의 호국사상
불교에서 말하는 호국사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호법사상이다. 정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호해야 국가가 보호되는 것이다. 《금광명경(金光明經)》에는 이러한 사상이 유포되지 않은 나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우리 사천왕(四天王)과 모든 권속과 야차 등은 이와 같은 일을 본다면 그 국토를 버려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나이다. 다만 우리만 이 왕을 버릴 뿐만 아니라 국토를 수호하는 무량한 모든 선신(善神)들도 모두 버리고 떠나갈 것인데, 이미 버리고 떠나가고 나면 그 나라에는 마땅히 갖가지 재앙이 있고 국위(國位)를 상실할 것이며, 모든 중생은 모두 착한 마음은 없고 오직 번뇌(繫縛)만이 있고, 살해와 다툼과 서로서로 헐뜯음과 무고함만이 있을 것입니다.34)

정법이 행해지지 않을 때 모든 선신들이 지켜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잃을 것이고, 백성들은 피폐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법은 불법(佛法)으로, 연기론적인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 자비와 평등의 실현을 말한다. 평등한 입장에서 일반 백성을 위해 봉사할 때 나라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는 “재가보살로 만약 자재롭게 대국왕이 되었다면, 민중과 백성들을 옹호하기를 외아들처럼 해야 하고 모든 악을 떠나고 선법을 수행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악을 행하는 자를 보면 치고 때리고 욕하더라도 끝내 마지막으로 목숨을 끊지는 않는다.”35)고 한다. 설사 왕이라도 백성의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그 어떤 경우도 불살생의 기본적인 입장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군비확장과 무력만이 국가를 지킬 수 있는 것인가? 그것에 대한 답을 우리는 《유행경(遊行經)》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행경》에서 보면, 부처님이 왕사성(Ra?agr.ha) 기사굴산(Gr.dhraku?.a)에 계실 때, 마가다국(Magadha)의 왕 아사세(Aja?asattu)가 밧지국(Vajji)을 치고자 했다. 왕은 우사(Vassaka?a)를 시켜서 부처님께 조언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때 부처님은 우선 ‘일곱 가지의 쇠퇴하지 않는 법(七不退法)’을 설하였다.
이것의 내용을 살펴보면, “①서로 자주 모여 정의를 강론하고, ②위·아래가 화합하여 서로 공경하고 순종해 어기지 않으며, ③법을 받들어 금기할 바를 알고 그 제도를 어기지 않고, ④비구들이 힘써 많은 스승과 벗들을 보호하고 당연히 존경해 섬기며, ⑤바른 생각을 지키고 지녀 효도와 공경을 으뜸으로 삼고, ⑥음욕을 떠난 깨끗한 행을 닦아 본능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며, ⑦남을 우선으로 하고 나를 뒤로 하여 이름과 이익을 탐하지 않고”36) 등이다.
아주 작은 나라 밧지국을 큰 나라가 정벌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첫번째는 바로 서로 자주 모여서 정의를 강론하는 것이다. 밧지국은 사회구성원의 합의에 의해 공동체가 운영되는, 사회정의가 실현된 사회라는 것이다. 아울러 두번째에서 보는 것 같이 사회구성원의 상호 화합이 중요하다. 사회 전체를 위한 이타적,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그 바탕에는 바로 자비의 실천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이상적인 형태로 보는 사회 정치적 단면을 볼 수 있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으로 하면서도 탐욕과 소유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나누면서 돕고 함께하는 자유로운 사회 윤리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흔히 한국불교는 호국불교라고 한다.37) 그리고 주로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창과 칼을 들고 나라를 지켰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는 매우 단면적인 이해다. 조선의 의승군 스님들이 지키려고 했던 ‘호국’의 그 ‘나라’는 백성들을 남겨두고 의주로 도망치듯이 임금을 모시고 피난을 가는 무력한 기득권 세력의 나라가 아니다. 여태껏 탁발의 목탁소리에 두손 모아 부족한 살림살이 함께 나누며, 정성스러운 보시와 신심으로 도량을 지켜오던 모든 백성들의 나라이며, 정법이 실현될 불국정토인 것이다. 그래서 호국불교가 아닌 호민불교(護民佛敎), 호법불교(護法佛敎)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살생의 과보를 받더라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하고, 불국정토로 만들어야 할 삼천리 강토를 지켜내기 위한 의승군들의 뼈를 깎는 아픔과 눈물의 참회를 함께 바라보면서 호국불교를 논해야 한다.
의상(義湘) 스님이 문무왕의 축성을 중지시킨(680) 일을 보자. 문무왕이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고 관리에게 명령하자 이 소식을 들은 의상 스님이 글을 보낸다. “왕의 정사와 가르침이 밝다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고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를 못할 것이고, 재앙을 깨끗이 씻어내 복이 될 것이며, 정사와 가르침이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고 해도 재해를 소멸하지 못할 것입니다.”38) 백성들이 성곽을 쌓는 데 동원되어 핍박을 당하게 하기보다는 정사와 가르침을 밝게 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국방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참다운 호국의 실체를 보는 것이다. 결국 지켜낼 것은 지배계층의 특권이나 기득권이 아니고 일반백성의 이익과 안락이인 것이다. 여기에 대자비의 실천을 위한 불교 호국사상의 기본적 흐름이 있다.

3) 어떻게 지킬 것인가
지킨다는 것은 곧 정법에 근거한다는 것이며, 연기론적 세계관의 사회적 실천이다. 나와 남이 결코 상대적인 차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나와 남을 가르는 모든 차이와 차별의 본질이 모두 공(空)함을 바로 보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사상이다. 이것이 대승적 자비의 실천인 것이다. 이는 곧 사섭법의 동사(同事)로 이어진다. 함께한다는 것의 실천은 섭수(攝受)와 절복(折伏)이라고 할 수 있다. 《승만경》의 제2 〈십수장(十受章)〉에서는 온갖 고난에 빠진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이러한 윤리적 관점에서 중생을 올바르게 제도하겠다고 발원한다.

(여덟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부모 없는 아이, 자식이 없는 노인, 죄를 짓고 갇힌 이, 병든 이 등 온갖 고난으로 괴로움에 처한 중생을 보면 끝내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편안케 하겠습니다. 재물로써 이익되게 하여 모든 고통을 벗어나게 한 뒤에야 내버려두겠습니다.
(아홉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동물을 잡아 기르는 등의 갖가지 올바르지 못한 생활 방편(惡律儀) 및 계를 깨뜨리는 것을 보게 되면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제가 힘을 얻게 될 때는 어느 곳에서든지 마땅히 잘못을 꺾어 항복받아야(折伏) 할 사람에게는 항복받으며 마땅히 감싸 안고 용서해 줄 사람은 용서하겠습니다. 왜냐 하면, 때로는 항복하고 벌함으로써 때로는 용서함으로써 (대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오래도록 머물게 되면, 천신들과 다시 사람들의 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늘어나고 나쁜 곳(惡趣)에 가는 사람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여래께서 굴리는 법륜(法輪)에도 따라서 부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을 얻기 위하여 (중생을) 구제하여 거두어들임(攝受)을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39)

절복(折伏)은 잘못을 꺾어서 항복시키는 강제적인 수단이요, 섭수(攝受)는 감싸 안고 용서해 보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실천은 곧 보살의 대자비의 실천인 것이다. 대승정법이 세상에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절대적 명제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대사회적인 실천을 불국정토 건설이라 한다. 《유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보적이여!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러한)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그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 곧 불국토가 청정해지느니라.40)

보살의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 국토가 청정해진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상사회 건설의 출발은 인간 존재의 내면인 마음의 정화로부터 시작된다. 다름 아닌 올곧은 마음(直心)이 이상사회의 전제조건이다. 불의에 아첨하지 않고 항상 진리와 함께하는, 정법과 하나되는 삶에서부터 정토는 건설되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면 세계가 바뀐다. 그 올바로 바뀌어진 마음이 세상을 바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킴이야말로 참다운 지킴이다. 결국 이러한 내면의 정화를 바탕으로 현실을 불국정토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호국은 바로 정법을 지키는 것이고, 백성들의 이익과 안락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대승적 자비의 실천의 한 방편인 것이다.

4. 결어

민주주의란 다수에 의한 지배를 기본속성으로 한다. 그러나 소수자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는 다수의 지배는 또 다른 형태의 독재이고, 다수자의 횡포이다.
오태양 씨는 비폭력과 자비의 실천을 위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택했다. 우선 그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면서 한편으로 아쉬움과 회한이 자리잡는다. 분단이라는 특수상황과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의무라는 것을 내세워 병역기피로 몰아가는 여론몰이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상 현재 군이 담당하고 있는 영역은 전쟁의 기능을 수행한다기보다는, 국가 방위와 대국민 지원과 질서의 유지 등으로 다양화되어 있다. 특히 공익근무요원 등은 대사회 봉사활동을 담당하는 차원의 비군사요원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그렇다면, 오태양 씨와 같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을 범죄의 굴레를 씌워 사회에서 격리시켜 낙오자로 점찍어버리는 것은 다수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과 스님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체복무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우선 스님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불살생의 계율을 실천해야 하는 출가수행자나,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의 사제와 목회자들에게 군대에서 집총훈련과 전투·사격훈련, 흡연과 음주문화의 강요 등을 일방적이고 통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군대가 갖고 있는 일부의 역기능으로 인해 겪는 고통과 좌절은 심각한 것이다.41) 성직자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총을 들고 일반 사병들과 똑같은 군생활을 하는 것보다 다른 형태로 그들의 따뜻하고 자비로운 손길이 필요로 하는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계기가 주어진다면 훨씬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는 종교계가 우선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40여 개국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있고, 이들은 비전투 부분이나 사회복지시설을 비롯한 봉사기관에서 대체복무를 하고 있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용인하고 대체복무를 시행하면, 자칫 국방의 의무를 등한시하고 병역 기피 풍조가 만연할 수도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종교적 신념을 실천하려는 삶의 자세가 앞서는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먼저인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수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른 몸짓들을 용인하며,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교가 말하고 있는 불살생의 가르침의 근본은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보는 연기론적 세계관의 사회적 외화이며, 그 사회적 합의와 실천은 바로 평화라는 것에 주목하였다. 불교는 다툼과 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갈등과 번민이 있는 곳에는 화해와 협력을, 아픔과 눈물이 있는 곳에는 함께 나누려는 자비의 마음을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사회의 모든 곳에서 힘없는 소수자들이 소외받고 힘들어 하는 신음소리에 귀기울이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재수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응용불교전공. 조선대 회계학과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석사학위논문으로 《유마경에 나타난 사회사상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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