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기획특집
     
천태교판론의 한계와 현대적 의의 / 이병욱
[ 특집 ] 대승불교의 경전 찬술 어떻게 볼것인가
[11호] 2002년 09월 10일 (화) 이병욱 lbw3@chollian.net
1. 서론

대승불교 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전하신 가르침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말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서 실증적인 방법에 기초해서 인도불교사가 어느 정도 밝혀짐에 따라, 대승경전은 적어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대승경전의 권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닌데도, 경전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신행활동을 해나가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해결법은 대승경전이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처님과 같은 경지의 사람이 남긴 것이므로, 그 내용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도 이런 평가에 찬성하는 쪽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점은 중국불교의 위상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중국불교의 특징의 하나는 교상판석(敎相判釋), 줄여서 교판(敎判)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에서 초기불교 경전인 《아함경》과 대승불교 경전을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 틀이다. 그런데 그 전제가 무너졌으므로, 교판론도 이제는 모래 위에 쌓은 건축물이 되고 말았다. 교판론의 이론이 아무리 화려하고, 정연하다고 할지라도, 그 전제가 잘못된 것이면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한때는 교판론이 불교를 바라보는 눈의 위치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제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뒷방에서 밥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뛰어난 축구감독은 2군에서 빌빌거리는 선수를 발굴해서 훌륭한 선수로 키워내듯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물 간 것이라고 냉대 받는 이론에서도 현대적 의미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이런 취지에서 낡은 이론체계라고 평가받는 천태교판론에서 어떤 현대적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천태교판론이 왜 잘못된 전제 위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 형성과정을 검토하고, 나아가 현재 천태종의 교판론으로 알려져 있는 5시8교는 천태지의(天台智확; 538∼597)의 주장과는 다른 대목이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천태지의가 원래 주장한 것 속에는 정형화된 5시8교의 이론보다는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좀더 많기 때문이다.

2. 5시8교의 교판론의 내용과 그 한계

천태종의 교판론은 5시8교이다. 이는 천태지의의 주장에다 후대 제자들의 견해가 첨가되어서 형성된 뿌리깊은 나무이다.

‘5시’는 부처님이 가르침을 전한 것을 5시기로 구분한 것인데, 그것은 화엄시(華嚴時), 녹원시(鹿苑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이다. 첫째, ‘화엄시’는 부처님이 도를 이루고 나서 21일 동안 《화엄경》을 가르친 시기이다. 둘째, ‘녹원시’는 부처님이 《화엄경》을 말하고 나서, 12년 동안 소승의 가르침인 네 가지 《아함경》을 가르친 시기이다. 셋째, ‘방등시’는 녹원시에서 《아함경》을 말하고 난 다음에, 8년 동안 《유마경》 《사익경》 《승만경》 등의 대승경전을 가르친 시기이다. 넷째, ‘반야시’는 방등시에서 대승경전을 말하고 난 다음에, 22년 동안 반야부(般若部)의 경전을 가르친 시기이다. 다섯째, ‘법화열반시’는 부처님이 최후 5년 동안 《법화경》을 가르치고, 열반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루 낮과 밤 동안 《열반경》을 가르친 시기이다. 이 내용은 오랫동안 역사적 사실로 받아졌던 부분인데,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8교’는 화법사교(化法四敎)와 화의사교(化儀四敎)로 구분된다. ‘화법사교’는 중생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부처님이 가르친 내용을 4가지로 구분한 것인데, 그것은 삼장교(三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이다. 먼저 예를 통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지만, 그 내용은 같지 않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려운 내용을 가르친다. 중1 수학의 내용보다는 고3 수학이 내용이 어렵고, 이는 질적으로 차이가 진다는 말이다. 이처럼 같은 불교 안에서도 내용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화법사교이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

첫째, ‘삼장교’는 소승의 가르침인데, 3승(三乘)의 사람을 위해서 《아함경》 등을 가르친 것이다. 둘째, ‘통교’는 대승의 가르침인데, 통교의 ‘통(通)’은 공통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3승에게 공통적으로 가르친 대승의 가르침을 ‘통교’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 ‘별교’는 보살을 위한 가르침인데, 별교의 ‘별(別)’은 구분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2승과는 함께 하지 않는 대승만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넷째, ‘원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 것인데, 원교의 ‘원(圓)’은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조화되고 융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화의사교’는 부처님이 중생에게 설법하고, 중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4가지로 구분한 것인데, 그것은 돈교(頓敎), 점교(漸敎), 부정교(不定敎), 비밀교(秘密敎)이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

첫째, ‘돈교’는 처음부터 부처님이 자신의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인데, 여기에 《화엄경》이 속한다. 둘째, ‘점교’는 내용이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점점 그 수준을 높여서 가르치는 것인데, 앞의 5시 중에서 녹원시·방등시·반야시, 법화열반시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 ‘부정교’는 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가르침을 전하지만, 중생은 근기에 따라 달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같은 가르침을 듣고서도 달리 이해하는 것이다. 넷째, ‘비밀교’는 부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교를 말해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점교를 전해주지만, 당사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내용 중에서 돈교와 점교의 의미를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해 보자. 초등학교 학생에게 영어독해를 가르친다고 하자. 아마 대부분은 영문법도 모를 테니까, 그 수업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 혹시 천재가 있어서 영문법의 도움 없이도 영어문장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것이 돈교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영문법을 가르친다면 몇 년 뒤에는 영어문장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점교이다.

이러한 내용의 천태교판론에는 인도불교의 전개과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대승불교는 기원전 1세기 즈음의 인도에서 힌두교가 서서히 일어나는 경향에 대응하기 위해서 새롭게 일어난 불교혁신운동이었고, 따라서 이는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 인도불교가 소개되었을 때는 이러한 역사적 전개과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모두 동일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 사람의 가르침에 내용이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으므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체계화한 것이 바로 교판론이고, 천태교판론은 교판론의 대표적 유형의 한 가지이다. 천태교판론의 이러한 한계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교판론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3. 천태교판론의 형성과정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하자. 그 일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 사람이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았고,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고, 급기야 가난을 이기지 못해 그런 짓을 했다는 과정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비판보다는 동정이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 점은 천태교판론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천태지의가 소설 쓰듯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천태교판론이 역사적 진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모든 비난을 천태지의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태의 교판론은 그냥 단순하게 천태지의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선배 학자들의 교판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단점은 비판하고 장점은 수용한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천태교판론이다. 따라서 천태교판론이 형성된 과정을 검토하면, 천태교판론이 왜 잘못된 선입견 속에 물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천태교판론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 천태교판론이고, 그래서 오랫동안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중국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과 북쪽이 그 문화적 배경을 달리한다고 한다. 남쪽이 이론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면, 북쪽은 실천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남쪽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교판론은 돈교(頓敎)와 점교(漸敎)와 부정교(不定敎)이다. ‘돈교’는 《화엄경》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는 보살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점교’는 단계를 마련해서 그 수준을 높여가면서 가르친 것이고, ‘부정교’는 돈교와 점교에 속하지 않는 가르침이다.1)

여기서 점교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하나는 점교의 내용을 3가지로 구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4가지로 나누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5가지로 분류하는 것이다. 먼저 점교를 5가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유상교(有相敎)·무상교(無相敎)·포폄억양교(褒貶抑揚敎)·동귀교(同歸敎)·상주교(常住敎)이다. ‘유상교’는 유(有)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가르침이고, ‘무상교’는 공(空)를 깨달아서 진리에 이르는 가르침이고, ‘포폄억양교’는 소승을 꾸짖고 대승을 찬양하는 가르침이다. ‘동귀교’는 모든 가르침을 일승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가르침인데, 이는 《법화경》을 지칭하는 것이고, ‘상주교’는 모든 중생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인데, 이는 《열반경》을 일컫는 것이다.2)

이 분류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자. 이것은 소승과 대승의 가르침을 크게 유(有)와 공(空)으로 구분한다. 소승에 분류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현상세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데서 유(有)라는 용어가 소승불교를 대표한다고 본 것이다. 그에 비해,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의 유(有)를 비판하고 공(空)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이 대승불교를 더욱 자세히 구분한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 중에서도 더욱 비중이 있는 것을 구분해낸다. 그것은 대승의 경전 중에서도 소승을 꾸짖고 대승을 찬양하는 가르침, 모든 가르침이 의미 있다고 인정하는 조화의 가르침,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평등의 가르침이다. 이 3가지는 대승불교에서도 그 의미를 더욱 인정해야 될 가르침이라는 것이 이 분류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포폄억양교가 빠지면, 4가지 분류가 되고, 다시 여기서 동귀교를 삭제하면, 3가지 구분이 된다.3)

천태지의는 이러한 돈교·점교·부정교의 구분에 대해 일일이 비판하고 나서, 그냥 근거 없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천태지의도 돈교·점교·부정교의 구분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이러한 비판을 거치고 재해석하여 다시 수용한 것이다.4)
한편, 양자강 북쪽에서의 구분은 조금 더 복잡하다. 이것은 크게 3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한 종류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종류로 구분하는 쪽이고, 세번째는 4종·5종·6종으로 나누는 경우이다. 순서대로 살펴본다.

우선, 일음교(一音敎)를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는 부처님이 한 가지 가르침인 일음(一音)으로 법을 말하고 있는데, 중생들이 각기 달리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다.5) 요즘의 감각으로 보자면, 국민의 뜻은 하나일 터인데, 각 정당마다 자신이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도 이런 예가 될 것이다.

둘째, 2종류로 구분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대승을 2가지로 구분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유상대승(有相大乘)과 무상대승(無相大乘)이다. ‘유상대승’은 공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10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는 가르침이고, ‘무상대승’은 수행이 익어 가는 과정에는 단계가 없고, 모든 중생이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가르침이다.6) 다시 설명하면, 암기력이 좋은 사람이 한 번 보고 다 외울 수 있는 것은 무상대승의 의미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눈으로 읽고, 이해하고, 충분히 숙달된 뒤에야 겨우 외울 수 있는 것은 유상대승의 의미이다.

또 이와 비슷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2가지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편과 진실의 가르침으로 구분하는 것이다.7) 다시 설명하면, 어린 아이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외국에 출장 갔다고 둘러대는 말은 방편의 가르침에 속하고, 그 어린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아버지는 출장간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진실의 가르침에 속한다.

셋째, 4종(四宗)·5종(五宗)·6종(六宗)으로 나누는 경우이다. 먼저, ‘4종’부터 살펴보면, 이는 인연종(因緣宗)·가명종(假名宗)·광상종(쮱相宗 : 不眞宗)·상종(常宗)이다. ‘인연종’은 소승불교의 하나인 비담(毗曇)의 6인(六因)과 4연(四緣)으로 정리되는 가르침이고, ‘가명종’은 《성실론(成實論)》의 3가(三假)로 대표되는 가르침이고, ‘광상종’은 《반야경》과 삼론(三論)의 가르침이다. ‘상종’은 항상 머무는 불성(佛性)이 본래부터 있고, 그것이 고요하다는 가르침인데, 이는 《화엄경》과 《열반경》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다.8) 다시 설명하면, 인연종과 가명종은 소승의 가르침에 속하고, 광상종과 상종은 대승의 가르침에 속한다.

소승의 가르침 중에서 인연종과 가명종을 나눈 것은 《성실론》이 소승의 논서이면서도 대승의 공(空)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실론》이 소승이라고 분류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어서 대승과 소승의 중간적 위치에 놓은 것이다. 마치 박쥐가 새와 같은 날짐승도 아니고, 육지에서 걸어다니는 동물도 아닌 중간적인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대승의 가르침에서 광상종과 상종을 나눈 이유는 공(空)의 가르침을 중시하면서도,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불성(佛性)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종의 내용에다 법계종(法界宗)을 추가한 것이 ‘5종’인데, ‘법계종’은 《화엄경》의 가르침이다.9) 5종을 주장한 사람은 대승의 가르침 중에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4종의 내용에다 진종(眞宗)과 원종(圓宗)을 더한 것이 ‘6종’인데, ‘진종’은 모든 선(善)이 궁극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는 《법화경》의 내용에 근거한 것이고, ‘원종’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모두 원융하게 한다는 《대집경(大集經)》의 내용에 기초한 것이다.10) 다시 설명하면, 6종을 말한 사람은 대승의 가르침 중에서 《법화경》에 나타난 조화의 정신과 《대집경》에 묘사되어 있는 원융의 정신을 높이 보고 있다고 하겠다. 천태지의는 북쪽에 유행한 교판론을 두루 접하면서 이것들을 비판하였고, 동시에 자신의 교판론에 수용하였다. 그래서 천태의 교판론은 천태보다 앞서 활동하던 선학의 교판론에 대한 비판과 종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4. 천태지의의 교판론

지금 전하는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그의 제자 바울의 사상이라는 주장이 있다. 원래의 창시자의 견해보다 그것을 보완한 사람의 입김이 더 많이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점은 단지 기독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데, 천태교판론도 이런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말해, 5시8교로 대표되는 천태의 교판론도 천태지의의 주장이라기보다는 후대에 그의 뒤를 이은 제자들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든지 간에 내용만 좋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삼는 이유는 천태지의의 주장은 여러 가지로 탄력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틀인데 비해서, 뒤에 정형화된 5시8교는 그런 요소가 적기 때문이다.

천태지의의 교판론은 《법화현의》 1권과 《법화현의》 10권과 《유마경현소》 1권에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서, 《유마경현소》 1권에 소개되어 있는 교판론만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유마경현소》 1권의 교판론은 5시8교의 선구적 모습을 띠고 있을 뿐이지, 5시8교의 완성된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유마경현소》 1권에 나타난 교판론을 간단히 소개하면, 그것은 4실단(四悉檀)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는 4실단에 근거해서 3관(三觀: 空·假·中)과 4교(四敎: 삼장교·통교·별교·원교)와 돈교·점교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3관은 실천의 관법을 의미하고, 4교와 돈교·점교는 가르침을 분류한 것이므로 이는 이론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4실단을 중심으로 하는 교판론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는 모습을 취하게 된다. 또 4실단은 중생을 가르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는 방편의 의미가 강한 것이다. 이렇게 4실단이 방편의 성격이 짙은 것이라면, 그 기초 위에 세워진 이론과 실천의 체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방편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교판론의 체계를 해체해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1) 4실단의 의미
《유마경현소》에서는 4실단이 교판론의 중심에 서게 된다. 4실단에 의거해서 3관과 4교와 돈교·점교를 일으킨다. 우선 4실단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이는 중생을 가르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세계실단·위인실단·대치실단·제일의실단이 있다.

첫째, 세계실단(世界悉檀)은 중생이 세계를 바르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중생이 세계를 바르게 알지 못하여 잘못된 집착을 일으키므로, 세계의 바른 모습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 원인 없이 세계가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삿된 인연(邪因緣)으로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중생이 즐겨 듣고자 하는 내용에 근거해서 바른 인연(正因緣)의 세계를 말해준다.11) 이것이 세계실단이다.

둘째, 위인실단(爲人悉檀)은 중생에게 따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한 반응도 중생마다 각각 달라서, 어떤 사람은 그 일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그 일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각각의 중생에게 맞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12)

셋째, 대치실단(對治悉檀)은 중생에게 악을 끊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 몸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관(不淨觀)을 닦게 하고, 화를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자비의 마음을 품도록 하고,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에게는 인연(因緣)의 이치를 살피도록 한다. 이렇게 그 사람에게 맞는 대안을 제시해서 그 사람의 허물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대치실단이다.13)

넷째,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은 불교의 궁극의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경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면서 동시에 언어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언어를 빌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깨달음의 세계를 전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언어의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가르침을 듣든지 간에 집착을 하면 수행에 도움이 안 되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고, 어떤 가르침이든지 간에 듣고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은 제일의실단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제일의실단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한 제일의실단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제일의실단이다.14)

4실단의 의미를 비유를 통해 알아보자. 어떤 방황하는 청소년이 있다고 하자. 이 청소년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는 공자님 말씀과도 같은 금과옥조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언제나 지당하신 그런 말씀보다는 그 청소년의 입장에서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세계관에 기초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실단의 의미이다. 그런데 이 청소년만의 특별한 고뇌가 있을 수 있다. 아버지가 술주정뱅이고, 어머니는 춤바람이 났다든지 하는 그런 문제로 고심할 수 있다. 이때는 그 청소년만을 위한 대안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위인실단의 뜻이다. 만약 이 청소년이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마약을 끊기 위한 특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대치실단의 의미이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서, 그 청소년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하는 일꾼으로 성장하였다면, 이것이 제일의실단의 뜻이다.이제 다시 4실단의 내용을 정리하면, 중생의 능력과 형편에 따라 거기에 맞는 처방책을 제시하는 것이 세계실단·위인실단·대치실단이고, 이것들이 무르익어서 깨달음의 세계로 비약을 하면 제일의실단이 되는 것이다. 제일의실단의 경지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전달할 방법이 없으므로, 세계실단·위인실단·대치실단은 제일의실단에 포섭된다.

2) 4실단에 의지해서 3관이 일어남
여기서 말하는 3관(三觀)은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중도제일의관(中道第一義觀)이다. 이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공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의 힘에 근거해서 현실세계로 들어와서 중생을 구제하고, 마지막에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도 집착이 될 수 있으므로 이것마저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도를 닦는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원래 수행이라는 것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혹과 욕망의 대상에서 멀리 벗어나서, 자신의 불순물을 녹이는 작업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우선 그 어린아이에게는 욕심낼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 가지고 수행의 힘이 어느 정도 생기면, 이제는 다시 현실로 내려와야 한다. 조금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이제는 중생을 교화하면서 부족한 자신을 다스려 나간다. 이런 수행이 점차 익어가면, 궁극에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때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긍정만 하는 것도 아닌 중도의 감각이 생겨난다.

이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종가입공관’은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가(假)를 초월해서 공(空)을 깨닫는 것이고, ‘종공입가관’은 공(空)을 체득해서 현실세계에 응용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세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현실세계인 가(假)에 뛰어들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중도제일의관’은 공(空)과 가(假)의 중도를 깨닫는 것이다.

공(空)을 강조하는 종가입공관에서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치열한 구도의지는 있지만 세간을 구제하려는 의지는 적다고 할 수 있고, 가(假)를 강조하는 종공입가관에서는 공을 깨달아서 세간에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지만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심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이 두 가지 관(觀)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중도제일의관은 이 두 가지 관을 방편으로 삼아서 중도(中道)로 나아가는 것이다.15) 이때 공(空)을 추구하지만 현실세계를 무시하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현실세계에 뛰어들지만 거기에도 집착하지 않는 균형 감각이 생기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수행의 완성이다.

그러면 4실단에 근거해서 종가입공관이 일어나는 것을 살펴보자. 세계실단은 중생이면서도 올바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그 내용을 말해주는 것이고, 위인실단은 공(空)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맞는 수행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고, 대치실단은 마음이 들뜨거나 가라앉거나 할 때 거기에 맞는 수행법을 닦는 것이다. 이렇게 3가지 실단을 통해서 번뇌가 엷어져가고, 지혜가 익어가면 공(空)을 깨닫는 것이 제일의실단이 된다.16) 다시 말하자면, 세계실단·위인실단·대치실단을 통해서 공을 깨달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그를 통해서 공의 세계로 비약하는 것이 제일의실단이라는 것이다. 종공입가관과 중도제일의관에 대해서는 천태지의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있으므로 종가입공관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3) 4실단에 의지해서 4교와 돈교·점교가 일어남
필자가 오래 전에 설악산 오색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마셔본 적이 있는데, 그 맛은 다른 곳의 약수에 비해서 확실히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필자의 능력 부족 때문인지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일상생활에서도 벅찬 감동을 경험한 것은 말로 전달하기 어렵다. 그곳에 같이 있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심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이 점은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적용된다. 부처님의 경지는 말로 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말로 전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아주 없게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말을 사용할 뿐이다. 4실단에 의지해서 가르침이 생겨났다고 천태지의가 말하는 대목도 마찬가지이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중생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 4실단에 의거해서 가르침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자.

우선, 여기서 말하는 4교는 앞에서 말한 화법사교인 삼장교·통교·별교·원교이다. 이 4교가 4실단에 근거해서 생긴다. 앞에서 제일의실단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중의 하나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에 근거해서 4교가 일어난다. 그리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도 4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인연법을 말하는 단계, 공(空), 가(假), 중(中)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세계가 이루어져 있는 이치인 인연에 대해서 말하고, 그 다음 단계로 인연의 이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공(空)을 자각하고, 그 다음 단계로 공(空)을 깨닫고서 현실세계인 가(假)에 내려와서 중생을 교화하고, 마지막으로 수행을 완성하여 중(中)을 깨닫는 것이다. 이 4단계의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생생불가설(生生不可說), 생불생불가설(生不生不可說), 불생생불가설(不生生不可說), 불생불생불가설(不生不生不可說)이다.17)

이 4가지 말할 수 없는 것에 근거해서 4교가 생긴다. 이것의 의미는 진실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중생을 위해서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이고, 그것도 4단계로 나누어서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우선, 생생불가설에 대해 4실단을 사용해서 삼장교를 일으키고, 그 다음 생불생불가설에 대해 4실단을 이용해서 통교를 일으키고, 그 다음 불생생불가설에 대해 4실단을 활용해서 별교를 일으키고, 마지막으로 불생불생불가설에 대해 4실단을 사용해서 원교를 일으킨다.18)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삼장교, 통교, 별교, 원교의 4교는 인연법(因緣法), 공(空), 가(假), 중(中)의 이치와 상응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4실단에 의지해서 돈교와 점교가 일어나는 것을 살펴보자. 여기서 말하는 돈교와 점교는 화의사교 중에서 돈교와 점교를 지칭하는 것이고, 부정교와 비밀교는 아직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유마경현소》에서는 돈교와 점교를 원돈교(圓頓敎)와 원점교(圓漸敎)로 구분하고 있다. ‘원(圓)’자를 붙인 이유는 궁극의 관점에서 보자면, 각각의 가르침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하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여기서《화엄경》은 원돈교에 속하고, 《법화경》과 《열반경》은 원점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원돈교와 원점교는 5시를 의미하는 것이다.19)

5. 천태교판론의 현대적 의의

앞에서 천태교판론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을 서술하였고, 또 천태지의가 말한 교판론은 현재 천태종의 교판론인 5시8교와 그 내용이 약간 다르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렇다면, 천태교판론이 오늘날의 시대에 가지는 의의는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이 아니므로 이제는 버리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필자에게 한국 불교학의 과제를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의 3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교판론의 형성, 비교철학의 모색, 구체적 실천론의 확립이다. 천태의 교판론을 비롯해서, 중국불교의 여러 교판론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져서 이제는 불교학자에게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새로운 유형의 교판론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문화권, 티베트불교 문화권, 동남아시아불교 문화권을 어떤 선입견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해석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불교 안의 이론 정리가 새로운 교판론의 형성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면, 불교와 다른 철학·종교와의 비교를 모색해서 새로운 불교철학을 이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불교철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불교철학은 새로운 사상의 조류와 만나서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자기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당시의 주류 철학·종교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주류 철학·종교는 서양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이것과 어떤 형태로든 대화를 시도해서 현대 한국의 문화 지형에 부합하는 새로운 불교철학이 나와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그 철학적 이론에 근거해서 지금의 한국 사회에 적절한 수행방법이 제시되리라고 기대한다.

이렇게 한국 불교학의 과제를 정리하면, 그 맨 위에 서 있는 것이 새로운 교판론의 형성이라는 점을 알 수 있고, 이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연구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태의 교판론이 단순한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당시에 유행하던 여러 교판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내용은 버린다고 해도, 그런 내용을 만들어 낸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천태의 교판론을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유마경현소》 1권에 나타난 4실단을 중심으로 하는 교판론은 방편의 정신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천태의 교판론이 절대적인 체계를 가진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고, 얼마든지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예를 제시한다. 화법사교의 경우, 삼장교, 통교, 별교, 원교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물론 삼장교보다 통교가 우월하고, 통교보다는 별교가 우위에 있고, 별교보다는 원교가 뛰어나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등급을 나누는 방식을 제거하고 수평적으로 대등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화법사교의 분류는 새로운 교판론의 형성에 하나의 빛이 될 수 있다.

삼장교는 초기불교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통교는 모든 불교에 공통적인 분모가 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도불교, 중국불교 문화권, 티베트불교 문화권, 동남아불교 문화권에 공통적 토대가 무엇인지 검토하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별교는 불교 문화권마다의 독자적 모습이 무엇인지 그려내는 작업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미 통교에서 공통적 분모를 발견해 내었으므로, 그것에 기초해서 차이점을 분명하게 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통교와 별교는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통교의 내용이 분명해지면, 자연히 별교의 내용도 드러나게 되고, 반대로 별교의 내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면, 통교의 내용은 선명해질 것이다. 원교는 특정 국가의 불교의 독자적 특징을 밝히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놓고, 회통(會通)불교가 특징이다, 아니다라는 논쟁이 있었는데, 이것을 원교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이는 삼장교는 초기불교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불교의 근본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그 기초 위에 불교 문화권의 각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나아가 국가 단위로 구분해서 불교의 독자성이 무엇인지 분석하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론적으로 각 나라의 불교의 특징을 거론하면, 중국은 일승(一乘)불교라는 지적이 있고, 한국불교는 회통불교가 중심에 서 있고, 일본불교는 밀교가 주류를 차지하고, 티베트불교는 중관불교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어떤 잘못된 선입견에도 물들지 않은 채, 불교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불교문화의 진정한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

고전의 내용은 그냥 죽은 시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죽은 시체로 둘 것인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은 현재 이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불교인들의 몫이다. ■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및 고려대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현재 고려대 강사.논저서로 <천태지의의 철학사상 연구><천태사상 연구>등이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