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서구불교의 가능성과 과제

1. 머리말

필자는 지난 1986년부터 98년까지 10여 년을 미국에 살다 온 경험이 있고, 그 동안 유럽에 여러 번 다녀오고 관련된 글을 읽어 왔지만, 주어진 제목에 대한 글을 씀에 있어 미국적 경험과 인식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서양 불교의 지도자들’이란 말은 서양, 즉 유럽과 미주를 포괄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위한 불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바, 그 가운데는 다양한 부류를 포함한다. 이를테면, 출신과 성장으로 보아 동양, 즉 아시아 불교 지도자이지만 서양에 왕래하거나 머물면서 양쪽 모두에게 지도자 역할을 하는 이들과, 서양 출신이지만 동양에 가서 소양을 갖추고 돌아오거나 서양에서 불교를 배우고 익혀 불교 지도자가 된 이들이다.

불교적 신분으로 분류해 보더라도 출가 지도자, 즉 승려와 재가 지도자로서 법사와 교수 등을 포함한다. 서양인들은 일반적으로 지도자들의 신분과 외모보다 실질과 내면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으므로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그들의 실제적 자질과 삶을 중시하고 평등하게 존중한다. 불교 신자들의 성분도 동양에서 이주한 이민들과 그 후예들인 아시아계가 있고, 본래 서양인으로서 불교인이 된 경우를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아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불교 지도자를 종교 지도자의 범주에서 존중하는 일반인 내지 타종교인들의 인식도 고려해야 될 줄 안다.

여기서 필자는 편의상, 서양 불교 지도자의 자질과 이상을 논의하기보다 현실적으로 근래 서양에서 불교 지도자로 인식, 존중되며 그 영향력이 현저한 몇 분을 신분과 성별을 고려하여 대표적인 예로 소개하고 그분들의 개괄적 자질과 인품 및 사상과 활동 행적을 통해 서양인들이 인정하는 불교 지도자상을 살펴보아, 한국 사회의 불교 지도자들과 대조해 볼 수 있는 생각거리를 제공하려 한다.

이미 우리 귀에도 익은 저명한 인물로서 먼저 출가 지도자로 달라이 라마(Dalai Lama),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틱낫한(Thich Nhat Hanh), 시셍옌(Shih Sheng-yen, 釋聖嚴), 시쳉옌(Shih Cheng-yen, 釋澄嚴), 카르마 렉세쏘모(Karma Lekshe Tsomo) 스님과, 재가 지도자로 아리야라트네(A. T. Ariyaratne), 이케다 다이사쿠(Ikeda Daisaku), 로버트 에이트켄(Robert Aitken), 슐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 쥬디스 심머브라운(Judith Simmer-Brown) 선생의 면모를 살펴보겠다. 이 가운데 몇몇 인사는 정치적 망명자이고, 어떤 이는 테러와 체포의 위협 속에서 사회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기도 하지만, 공통점은 이들 모두 본국이나 서양인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으며 추종자도 많고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마음과 삶에 강렬한 감동과 영향을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인들에 대한 믿음과 실망 혹은 존경과 증오를 일으킬 수 있다. 독특한 상황과 조건에서 다양한 반응을 일으키며 종교는 분열 또는 화해, 전쟁 또는 평화를 조장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불교 지도자들도 불교도들은 물론 비불교도들에게도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주며, 불교 및 사회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그들은 불교도들을 포함하여 현대사회인들에게 종교 지도자로서 삶의 모범이 되고 교훈과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어느 종교라도 그 교리와 믿음은 문화적으로 제한되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변모해 왔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연기설에 입각하여 모든 것에 집착이나 증오를 버리고, 상호의존적 존재임을 깨달음으로써 동체대비를 실현하고자 한다. 수도승과 평신도를 막론하고 누구나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며 윤회로부터 해탈하고자 하고 불국정토 사회를 추구한다. 개인의 인격 완성과 아울러 공동체 대중의 복지를 위해 불교 지도자들은 솔선수범하고 있다. 각각의 문화권마다, 다양한 불교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성의 용인은 관용과 비폭력의 덕성에서 비롯된다.

근래에 세상이 복잡 혼탁해지고 분쟁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모든 이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이 더욱 새롭게 인식되면서, 불교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과 덕목으로서 평화에 대한 지도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서양인들은 개인적 수행의 성취보다도 세상의 평화를 이루는 데 솔선 수범하는 지도자를 더욱 존중하며 불교 지도자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도 그러한 맥락에서 불교 지도자를 바라보고 그들의 사회 평화를 위한 노력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서양 불교의 지도자들

1) 달라이 라마
본명은 텐진 갸쵸(Tenzin Gyatso)이고, 달라이 라마는 직함이며 그는 제 14대(the XIVth Dalai Lama)이다. 그는 1935년 티베트의 동북부 시골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고, 네 살 때 티베트의 수도인 라사에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1950년 종교 및 정치적 지도자로서 중국 공산당의 침략에 평화적 저항을 하다가 1959년 민중봉기 과정에서 87,000여 명의 희생을 당하고는 인도로 탈출하여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국을 포함하여 ‘국제분쟁과 인권문제, 지구적 환경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제안’ 및 평화 활동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관용과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세계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과 티베트 문화유산의 보존을 주창해 오고 있다. 그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인의 종교 및 정치적 지도자로서 숭앙, 추종되고 있으며, 서양인들에게는 세계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타종교인들로부터도 큰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의 사상과 견해의 일부를 들어본다.*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모든 인간은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해왔다. 고도의 물질적인 개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모든 사건에는 문제의 존재와 관련된 과정과 상황이 있다. 승려로서 본인은 인간의 동기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기보다는 결과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 모두 책임을 함께 져야 하며, 종교인은 솔선 수범할 책임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내면적 무장해제’라고 자주 표현하는 단계에서는 증오, 분노, 질투, 극단주의, 탐욕 등의 부정적 감정을 줄이고 자비, 인정, 관용 등을 함양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훈련과 교육을 통해 무지와 분노와 증오를 결국에는 줄일 수 있고, 자비와 관용을 개발할 수 있다. 여러 종교는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기여하는 데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불교인이고 수행에 제약이 많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 수행을 많이 하려고 한다. 내 종교를 통해 인류를 위해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어떻게 불교를 선전할까가 아니라 나의 수행과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얼마나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종교를 가짐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다양한 종교 전통들은 모두 개성 있게 훌륭한 수행 방법과 메시지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모든 주요 종교는 나름대로 인류에 봉사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다양한 종교들이 좀더 효과적으로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간의 관계가 원만해야 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피를 흘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경향으로서 종교다원주의를 다양한 종교 공동체에서 볼 수 있다. 세계평화를 위해 여러 종교간의 참된 화합은 필수적이다. 서로 만나고 대화하며 협조해야 한다. 환경문제 해결은 인류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 종교인들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2) 마하 고사난다
1924년 캄보디아의 중남부에 태어나 1943년 승려가 되었고, 1969년 나란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태국과의 국경 지방에 있는 난민수용소에 불교사원을 창건했고, 미국에 최초의 캄보디아 사찰을 세웠으며, 1975년부터 1978년까지 4년 동안에 31%의 인구가 살해된 캄보디아에서 공포와 불안이 만연했던 시절, 평화와 화해를 위한 행진인 ‘담마예트라’를 아홉 번 주도했다.

윈저성 평화위원회의 창설자이며, 지뢰제거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1994년 이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어 오고 있다. 불교 생활의 기본적 원칙을 강조하며 그를 사회적 봉사와 활동의 근거로 삼고 있는 그의 사상을 보자.

우리 불교도들은 우리의 절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세계를 절로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증오는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 증오는 증오를 부를 뿐이다. 화해는 우리의 권리와 조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협상 속에서 사랑을 사용하는 것이다. 티베트,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등지에서 많은 불교신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우리 불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인류 가족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인간 정신의 해방을 도모하는 것이다. 종교 유산을 살아 있는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며 인류가 처해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 향상시키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불교의 가르침을 찾아보자.

부처님의 가장 용감한 행동 중의 하나는 싸움을 중지시키기 위해 전장에 걸어 들어간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갈등 해소’라 부른다. 간디는 비폭력운동의 핵심은 적이 아니라 적개심의 종식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적까지도 존경한다. 이들의 인간성을 신뢰하며 악의는 무지에 의해 야기된 것임을 확실히 믿는다.

상대방의 최선에 호소하여 우리 모두 평화의 기쁨을 성취하자. 우리 모두는 중재자가 되는 것이다. 간디는 이를 ‘양자간의 승리’라고 불렀다. 부처님이나 예수, 간디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난민촌, 교도소, 빈민촌, 전장이 바로 우리의 사원이 될 것이다.

아시아인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승가에 의존하도록 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들이 이러한 새로운 역할에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 승려들은 점차 커지고 있는 사회적 고통의 소리에 답해야 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원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사원인 것이다. 사랑은 마음이 고결하거나 비열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마음이 고결하고 착한 이들은 자연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악한 마음을 가진 이들도 마땅히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이들이야말로 자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속에 있던 선의 종자가 성장에 필요한 온기가 부족하여 죽어 버렸을 것이다. 자비가 없는 세상의 냉기로 사라진 것이다. 보복과 증오와 복수는 되풀이될 뿐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사랑과 정념(正念)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개개인의 구원과 행복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봉사를 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봉사는 다름 아닌 중생을 향한 사랑이며 무지를 빛으로 밝히는 것이다. 승리는 증오를 낳고 패배는 고통을 낳는다. 현자는 승리도 패배도 원치 않는다. 이기심은 관용이란 무기로 대응한다. 무지에는 지혜라는 무기를 써야 한다. 증오는 자비라는 무기로 대처한다. 우리는 평화의 기술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불법을 따라 생활할 때 평화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외적 기술과 내적 평화를 개발하게 된다. 모든 종교의 중재자들과 함께 우리는 승리가 아닌 평화만을 받아들일 것이다.

개인적인 명예나 직함, 영광은 필요하지 않다. 생전에 부처님은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힘쓰셨다. 인권은 모든 인류가 형제, 자매가 될 때 참으로 서로를 위할 때 비롯된다. 우리는 인류 가족의 일부이며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 알라, 예수의 본질을 갖고 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앉아서 대화하고 화해하고 인류는 최고로 번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생전에 평화를 실현하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해내기를 발원하자. 화해는 삶의 중심이다.

평화를 만드는 우리는 가능한 한 자주 만나서 나 자신과 내 나라와 온 세상과 화해해야 한다. 평화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된다. 화해가 바로 우리의 삶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 여행에 초대해야 한다. 내 나라와 나 자신을 위해 화해하듯이 세상을 위해 화해하는 것이다.

3) 틱낫한
선사이며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1926년 월남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에 승려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사이공에서 ‘참여불교’운동을 주창하고, 청년사회봉사학교, 불교대학, 출판사, 평화운동잡지 등을 창설하였다. 1966년 망명하여 1982년 프랑스에 플럼 빌리지(梅村, Plum Villiage)를 세우고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다.

월남 전쟁 중에 ‘불교평화대표단’의 의장이기도 했던 그는 미국의 인권ㆍ평화 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는 등 불교 평화운동의 선구자이다. 미국 등 서양 여러 곳에 다니며 강연과 참선 지도를 하고, 망명객이나 빈민들을 돕는 한편 많은 작품을 쓰고 있다. 그의 기본 사상은 다음과 같다.

범어인 아힘사는 주로 ‘비폭력’으로 번역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해치지 아니 함’을 뜻하는 말이다. 아힘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이를 실천해야 한다. 우리들 내면에는 어느 정도의 폭력과 비폭력이 존재한다. 마음 상태에 따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더욱 폭력적이 될 수도 비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야채를 삶는 물에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완전한 비폭력은 있을 수 없지만 채식주의자가 됨으로써 비폭력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실을 폭력과 비폭력의 두 진영으로 나누고 한 진영에 서서 다른 진영을 공격한다면 세상은 절대로 평화로워질 수 없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을 알지 못하고 전쟁과 사회의 부조리를 초래했다고 느껴지는 이들을 탓하고 비난하게 될 것이다.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면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들에게도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 이들이 비폭력의 길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분노하는 마음으로 평화를 위해 일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평화는 결과가 아니다. 평화롭지 아니한 방법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불상에는 천 개의 팔과 천 개의 손, 그리고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관세음이라 불리는 보살이 있다. 천 개의 손은 행동을 나타내며 천 개의 눈은 이해를 나타낸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이해해야만 우리의 행동이 도움이 되고 더 큰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들어야 한다.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자신과 가족 및 지역사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다. 생각은 모든 것의 기본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에 의식이란 눈을 두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의 생각은 오도되거나 혼돈, 절망, 분노, 증오를 낳을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우리의 과제는 정확한 통찰력을 기르는 것이다. 공존의 본성, 즉 모든 것들이 ‘상호 존재함’을 깊이 깨닫는다면, 비난과 논쟁과 전쟁을 멈추고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타인들을 향한 온화함과 자비심과 기쁨과 평정이 필요하다. 참된 평화는 통찰력과 이해를 기초로 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비폭력이 폭력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이에 대한 이해가 지적인 것일 뿐 자신과 하나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비폭력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일상생활에서 비폭력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화해의 씨를 뿌릴 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고 이렇게 해서 다음에 올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진짜 적은 태만이다. 매일 정념(正念)을 키우고 우리 주변과 안에 있는 평화의 씨앗에 물을 준다면 다가올 전쟁을 방지하고 위기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4) 시셍옌
상해 근교의 농촌에서 출생하여 열세 살에 승려가 된 후, 전통적인 수행을 해오다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국외로 추방당했다. 대만에서 징집되어 병역을 마친 후 제대하여 깊은 산중에 들어가 6년간 결제 정진하였다. 그 후 일본에 가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중화불교문화연구소’를 세워 불교학 연구와 확산을 일으키고 미국에도 선원을 세웠다.

임제종과 조동종의 전법을 받고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참선지도와 학문 및 포교에 열중하고 있다. 성운(星雲) 스님이 주재하는 불광산(佛光山)과 유각(惟覺) 스님이 주도하는 중대선사(中台禪寺)와 아울러 대만의 3대 불교 그룹의 하나인 법고산(法鼓山)을 창도한 법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교적인 평화 조성 방법은 참선을 통해 계발되고 수승한 가르침과 본보기가 되는 행동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지혜로부터 나왔다. 불교는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 우리 내면에 있음을 가르친다. 또한 갈등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성향을 건설적으로 조절하는 법도 가르쳐 준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사회의 평화가 개인의 평화로부터 시작된다는 불교적 사상이다.

이런 내면적 평화의 계발은 우리 모두가 세계적이면서도 국지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한다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평화를 강화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때로는 효과가 있지만 많은 희생이 따른다. 이렇게 얻은 평화는 보잘것없고 일시적이다. 곧 더 큰 전쟁이 재발한다. 역사 전반에 걸쳐 이런 식으로 인간은 평화를 찾지 못했다. 부처님은 덕과 자비로 나라를 통치하라고 가르쳤다.

불교는 사회적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개인의 내적 평화를 강조한다. 아울러 재가 수행자들에게 부모, 자녀, 배우자, 동료들을 이해와 자비로 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한 개인이 사회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며 각각의 역할은 특정한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고 가르친다. 부처님은 종교적 의식이나 예배를 맹신하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책임과 의무를 정성껏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세상은 지속적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최초의 ‘참여불교’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와 모든 중생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헌신함으로써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보살도를 주창하고 권면한다. 우리 마음이 자비롭다면 사회 상황에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하며 행동을 통해 이를 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80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 부처님은 쉬지 않고 다니면서 가르침을 폈다. 열반 직전까지도 부처님은 중생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일생을 바쳐 평화의 가르침을 폈다. 평화를 가르치는 이 전통은 모든 불교 공동체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5) 시쳉옌
1937년 대만에서 출생하여 23세에 출가 비구니가 되었고 1963년 인순(印順) 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매우 검소하게 살며 빈민을 구제하고 부자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해오다가 1966년 ‘자제재단(慈濟財團)’을 설립하였다. 이는 대만에서 가장 큰 자선사업기구이며, 미국을 포함한 20여 개 국가에 지부를 두고 수백만의 회원을 두고 있다. 대만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및 병원을 세웠고, 해외에까지 무료 이동진료 활동을 벌여 온갖 환자 치료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국내외 재난사고에 구조활동을 펴오고 있다. 아울러 케이블 TV 방송과 신문 잡지 등 각종 출판물을 통해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자비와 평화를 일깨우며 저술활동도 해오고 있다. 1991년도에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노벨상 후보에도 추천되고 있다.

20세기를 돌이켜보니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질수록 우리는 더욱 더 방황하게 된다는 자명한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정신적, 영적으로는 진전이 없었다. 전례가 없는 기술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탐진치의 소용돌이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자연재해가 인간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점차 잃게 되면 자연은 홍수와 가뭄 등 수많은 재난으로 이에 답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재해들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배고픔과 추위로 고통받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를 경멸하며 감사와 만족과 선의와 이해심을 잃는 이유는 사랑의 부족, 즉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임을 잊지 않는다면 이기주의를 놓아 버리고, 상호간의 오해를 풀고, 이기심을 벗어버리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진실하고 순수한 인간성의 본질로 회귀할 수 있을 것이며 마음속에서 중생을 향한 경건한 사랑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평화와 기쁨의 정토가 되기를 희구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고, 탐욕과 증오를 제거하고, 인간 본연의 자비심을 일깨워야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양심을 일깨우고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본연의 사랑을 찾아내고 선의의 씨를 뿌려야만 악을 선으로, 재난을 행복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정화하고 내 가족의 행복과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 그래야 관심과 보살핌을 지역과 사회로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회가 조화로이 살아갈 때 재난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이끌어 주는 지침들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자선사업을 시작했고 점차 그 활동을 자선, 의료, 교육, 문화, 국제원조, 골수기증, 환경보호 그리고 지역사회 봉사활동과 같은 여덟 가지 분야로 확대해 나갔다. 우리는 “일을 통해 배우고 배운 것을 다시 실천”하며 “마음엔 부처님, 말속엔 그 가르침, 행동에는 사랑”이라는 훈계의 의미를 체득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뿐 아니라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보다 베품과 봉사가 더 값있는 일임을 보여줌으로써 있는 자들도 교육한다. 음식, 의복, 보살핌, 그리고 친구하기 등 오래 동안 우리들의 보살핌을 받아온 이들은 물론 재해 피해자들에게도 감사 드린다. 그 이유는 이들의 불행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봉사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빈궁하고 고통받는 이들은 도움을 받고, 행복하고 가진 자들은 사랑을 펼침으로써 양측 모두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6) 카르마 렉세쏘모
미국 출생으로 티베트 전통에서 득도한 비구니로서, 하와이 대학에서 종교학 석사와 비교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캘리포니아 주립 샌디애고 대학 교수로 있다. 국제불교여성협회인 ‘사캬디타(Sakyadhita)’를 주도하며, 인도 히말라야 지방의 여성교육을 위한 불교교육 프로그램인 ‘쟘양 ?링(Jamyang Choling)’의 책임자이다. 《사캬디타: 부처님의 딸들(Sakyadhita: Daughters of the Buddha)》 《미국 여성의 눈을 통해 본 불교인(Buddhist Through American Women’s Eyes)》 《고독한 자매들: 여성을 위한 두 전통의 수도윤리(Sisters in Solitude: Two Traditions of Monastic Ethics for Women)》 《문화를 넘어서는 불교 여성 : 달성(Buddhist Women Across Culturs: Realizations)》 《흐름을 거스르는 수영: 혁신적 불교 여성(Swimming against the Streams: Innovative Buddhist Women)》 등 많은 저술이 있으며 불교 여성계를 활성화하는 선도자이다.

불교의 수행이란 현명하고 도덕적이며 자비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증오가 아닌 사랑만이 증오를 없앨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그의 황금율은 ‘네가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미얀마·캄보디아·중국·스리랑카·티베트 등지의 불교 국가들에서 폭력과 만행이 자행되고 있음에 주목하고 각성해야 될 줄 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좀더 긴밀한 통신, 기술, 경제적인 유대로 연결되어 있듯이 지구촌의 구성원들과 이들의 행복 또한 상호 연계되어 있다. 이런 긴밀한 관계는 대단히 유익할 수도 있는 한편 문제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지구 일부의 탐욕과 소비주의가 지구상의 가장 외진 곳에까지 기아, 사회 부조리, 정치 불안정을 가져올 수도 있다. 평화로운 인간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에 없는 많은 이해와 존중과 자비가 필요하다. 진정한 대화와 남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긴장이 고조되어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폭력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은 평화로운 사람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인 인내, 만족, 관용 그리고 내적 평화의 계발을 위한 실천적인 기법이 세계평화를 위하여 불교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공헌이 될 것이다. 평화의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건설적으로 대응하게끔 마음을 훈련하는 정신수양 체제가 필수적이다. 정념과 지혜와 자비심을 일깨우는 불교의 참선기법은 어려운 상황이나 감정의 갈등에 대처하는 소중한 자원이다. 이런 실용적인 기법은 분노를 삭이고 욕망을 제어하며 스트레스와 폭력과 경쟁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도전들에 건설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를 닦는 데 도움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부처님이 생존했던 시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지혜와 덕목을 갖춘 불교 지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새로운 문화환경에 맞춰 부처님의 평화로운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불교는 현재의 부, 권력, 폭력의 미화에 대처할 수 있는 아주 실질적이고도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는 참선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과 조화로운 대인관계 그리고 윤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지침도 포함된다. 도덕성·공정·자비·화합 등의 이상을 구현함으로써 효율적인 정신적, 사회적 지도력을 제시하기 위해 불자들은 노력하고 있다.

불자들은 지역 사회에서 늘 스승으로 상담자로 치료사로 활발한 활동을 펴왔으나, 이제는 인종주의·성차별주의·환경파괴·생명윤리·경제적 부정·증오·분노 등과 같은 문제에도 불자들의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세계인구의 10%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지금 불자들은 정신적 변혁과 사회적 변혁의 통합이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참선과 기도는 물론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한 불자들의 헌신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2,500여 년 전 부처님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동등한 영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혁명적인 생각을 분명히 하고 비구니 교단을 세움으로써 이를 실천하였다. 인도의 초기불교 공동체는 세계 최초의 민주기구의 한 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부분이 남자들인 소수의 손에 권력과 재원이 집중되었다. 여성은 의사결정에서 자주 무시되었고 교육과 종교교육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불교 내부에 있는 성별 불균형부터 바로잡고 불교단체들이 불교 본래의 평등주의 이상에 부합하도록 하여 불교계가 솔선수범하여 다른 부분을 포함하는 세계 평화에 공헌하여야 될 줄 안다.

7) 아리야라트네
스리랑카 출생으로 모든 이들의 복지를 지향하는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을 창설하고 현재까지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40여 년을 공동체 교육가로 일해 오고 있다. 스리랑카 안에 약 2,000개에 달하는 자생적 마을공동체를 조직하여 불교사상에 입각한 자조 자립하는 민중운동을 펼쳤다. 한국에서도 그들의 선례를 본받아 새마을 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많은 저술과 연설을 통해 민중을 일깨우고, 건전한 경제개발을 포함하는 평화운동의 공로로 ‘간디 평화상’ 등을 받았다. 미국을 포함한 서양에도 사르보다야 운동 지부가 설립되어 있고, 불교적 경제사회 건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사회에 평화가 없다면 그러한 상황을 가져온 다양한 관련 요인들이 있다. 이 모든 요인들에 대해 동시에 도전하여 제거하여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평화를 앗아간 모든 과정들을 바꾸고 평화문화를 재건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자신과 다른 이들의 깨우침을 위한 노동과 자원의 자발적 공유 또는 기탁이 필요하며, 모든 이의 복지를 보장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난이나 과잉의 부가 없는 모든 이를 위한 평화와 정의가 보장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종교적 가르침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일상생활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하며, 가르침과 실천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개인과 가족, 집단, 공동체의 모든 인간들은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 욕구는 먼저 정신적 욕구가 만족된 후, 건강한 환경, 맑은 물, 적당한 의복, 적절한 음식, 보건, 건강, 에너지 공급, 의사소통, 교육 문화와 관련된 것이다. 세계 평화는 오직 우리 내부의 끝임없는 갈등을 종식시킴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과 다른 존재, 식물세계, 심지어 우리의 신체적 환경에 영향을 주는 우주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탐욕과 악의, 이기주의 같은 내적 더러움을 극복하고 축복·공유·도덕·깨우침이 발전하기 위한 내적 정신 성장을 도모하도록 인간과 인간 집단을 지원해야 한다. 불교도와 다른 종교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세계에 정신적 인식의 대중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 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8) 이케다 다이사쿠
1928년 일본 도교 출생으로 19세에 창가(創價)학회에 참여하였다. 회장인 조세이 토다의 훈련생으로 조직의 평화, 문화, 교육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10년이 넘게 일하였다. 1958년 토다의 죽음 이후 회장직을 계승하였고 1975년 국제창가학회의 회장이 되었다.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였고 유엔평화상과 시몬위센탈센터의 국제관용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의 평화 제안서는 SGI 설립기념일에 매년 발행되며 세계 각국을 검토하여 불교철학에 기반을 둔 실천적 기획을 제안하고 있다.

지금껏 60여 개국을 방문하고 내가 깨달은 것은, 외관이나 사상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일하고 모든 인류의 평화를 지속시키겠다는 공통된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우애와 신뢰에 바탕을 둔 결속의 장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실천은 자비에 기반을 둔다. ‘진정한 우정’과 ‘공유된 동감’을 의미한다.

그것은 보편적 인간의 자세에서 타인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고 진정한 우애와 신뢰의 고리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창가학회는 불교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평화, 문화 그리고 교육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구이다. 휴머니즘에 대한 불교 정신의 기저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고유한 불성을 타고난 것이라는 것이다.

자비는 문화를 육성하기 위한 정신이다. 인간 내부의 감정을 키움으로써 우리는 동정, 믿음, 우애와 같은 긍정적 감정들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각 문화가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할 수 있다. 미래에 우리는 서로의 차이점과 독특성을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서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인으로서 보살은 지속적으로 이기주의에 도전하는 사람이고, 탐욕·분노·우매함을 변형시키는 데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현시대의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지지 않는 보살은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삶 속에서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모든 종교가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우리의 현재 물질주의 삶을 고매한 정신적 인간적 문화로의 기본적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세계의 종교들이 대화를 통해 인간성의 존립을 위협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평화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인간성에 대한 사랑,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외, 비폭력, 자비로 인간 이외의 자연까지도 상호 이해적으로 공존하기 위한 것들이다.

9) 슐락 시바락사
1933년 태국 출생으로 영국에서 교육받았다. 1961년 고국으로 돌아가 탐마삿과 출라롱콘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1963년 《사회과학평론(Social Science Review)》를 창간하고 6년간 편집자로서 일하였다. 이 잡지는 학생들의 의식을 깨우쳐 1973년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민주와 인권, 적합한 정부가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태국의 NGO운동을 시작하고, 서구적 소비 발전 모델을 지양하며 인간 삶의 정신적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는 데 온 노력을 다하였다. 근래에‘국제불교참여연대(INEB)’ 창설을 주도하고, 소비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국제적 연대를 전개하고 있으며, 태국에서 주류 교육에 대한 다른 선택적 접근을 하는 새로운 대학을 만들고 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뭔가를 공표하고 선언하는 종교가 아니고 실행을 강조하였다. 교사는 길을 안내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 그 여행을 해줄 수는 없음과 같다.폭력과 멸시, 압박에 대한 거부감이 없이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거부는 글자 그대로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의 신체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대분분이 정신적 과정이며, 지금의 신분에 대한 깊은 실망이며 바꾸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다.

육체의 현실을 포함하여 물질적 삶을 물리치는 명상을 통해 확장되기도 한다. 사상을 가진 우리의 마음은, 경험을 통해 봤을 때 가장 보잘것없는 것을 근거로 하는 공포감과 거부감을 몰아낼 수 있다. 현재 신분에 대한 불만족은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 인습을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궁극적으로 평화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중용이다. 일반적으로 극단주의 경향은 세계의 갈등에 불을 지피고 있다. 각국 간의 공평, 전 세계적인 공평, 기본 인권을 보호함에서의 공평 그리고 지구의 자원을 이용함에 있어서의 공평이 필요하다. 도덕적 적합성의 부족은 갈등을 유발시킨다. 사회구조의 비폭력적 개혁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박식하게 문제들을 논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는 전쟁의 부재가 아니다. 평화는 개방된 의사소통을 통해 공동의 기초를 발견하고 무해(無害)의 철학을 실천하고 원천들을 공유하는, 순향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사회를 더 정의롭게 하기 위해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정신적 성장을 위한 개인적 비전을 추구하도록 할 수 없는 사회는 무의미하고, 물질적 상품이나 정치적 힘을 위해 끝없이 다툴 수밖에 없다. 형제애의 정신은 우리들, 우리 공동체, 우리 사회를 진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됨을, 우리의 삶을 공동의 장 발견을 위해 바침으로써, 그 목표가 한없이 심오해짐을 서서히 현실화시킴으로써 깨우쳐지는 것이다.

10) 로버트 에이트켄
미국 태생의 선사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는 세계 2차 대전 중 일본의 포로로 있는 동안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 하와이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일본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50년대와 60년대에 일본을 자주 여행하였고, 1974년에는 일본의 야마다코운 선사로부터 교사로 임명되었고, 1985년에는 법을 받아 선사가 되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금강승단(Diamond Sangha)’를 설립하여 선수행을 지도해오고 있고, 서양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불교평화단(Buddhist Peace Fellowship)’의 창립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사회와 연관된 선 수련과 저술로 유명하다. 또한 평화와 사회적 정의활동, 하와이 원주민들을 위한 일, 동성애자들과 여성의 권리 문제에 관한 활동들을 펼쳤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간의 대화를 주창해 왔다.

중생들은 무한하나 맹세코 그들을 구제할 것, 욕심·증오·무지 등 번뇌는 끝이 없으나 맹세코 끊을 것, 법문은 무수히 많으나 맹세코 깨우칠 것, 부처님의 길은 위없으나 맹세코 이룰 것 등 전통적 사홍서원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개인과 집단의 위험한 자아 중심주의의 오류에서 국수주의가 발생하고, 여기서 집단적 오만과 착취가 생기게 되며,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폭력, 인종주의, 성차별, 신분제도가 생기고, 해양과 우림, 습지대, 그리고 가족 농장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가 벌어진다. 이러한 결과 지구 전체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상호 연관이 인드라망이고, 그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보살은 이러한 우주적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고 가능하게 한다.탐욕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매우 견고하게 그 입장을 지키고 있고 그것의 욕심은 결코 과대 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만드는 데 좀더 관대한 힘을 개선하고 있다. 소매·도매·농업·임업·신용과 저축·에너지·산업·보험·주택 등에서 일련의 조합적 프로그램이 번성하고 있다.

이것은 위험에 처해 있고, 부당한 해를 당하고, 생활 수단을 잃은 사람들과, 동식물을 위한 대체적 운동과 함께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자비 프로그램과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인 수준에서 가지는 감각인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 양심은 매우 미개한 통치하에서의 조직적인 저항과 더 나아가 불복종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서원으로 동기화되고 힘을 가진 불교도들은 이러한 종류의 운동이나 프로그램에서 선도자, 조직가와 그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불교도 공동체는 인종 문제·여성 문제·노인 문제·동성애자 문제·청소년 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더욱 조직화되어야 하며,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 데 솔선수범해야 한다.

11) 쥬디스 심머브라운
미국 출생으로 1970년대 초반부터 티베트불교 수행을 해오고 있으며, 북미, 유럽, 아시아의 불교도 센터의 연대인 ‘국제샴발라(Shambhala International)’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콜로라도 보울더에 있는 나로파 대학의 종교학 교수로 학장을 역임했으며, 불교-기독교학회에도 일하고 있다. 그녀는 티베트불교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하고 있다.

보살도의 전통에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바꿔보는 명상은 개인적 사회적 변화의 중심이 되어 왔다. 이것은 평화 문화의 육성을 위한 필수적인 시작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의 존엄성을 타락시키는 요소는 체계적, 환경적, 복합적이서 개인적으로는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

티베트의 전설적 무사인 샴발라와 같은 폭력과 악을 극복하는 계몽된 무사 정신이 필요하다. 묵상의 개인적 실천과 서예와 문예 등 아시아의 진정한 무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슬픔과 기쁨의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들도 계발해야 한다. 모든 인간들과 공유할 수 있는 열려진 마음과 타고난 존엄성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어떤 형식을 취하든 간에 매일 생활의 실천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사회의 인간적 경향을 잘 파악하고, 그 사회가 표방하는 종교적 실천, 민족성, 인종적 기원, 성, 또는 경제적 수준이 어떠하든 모든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이것을 격려하고 증진시키는 것을 도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 인종적 또는 민족적 다양성 그리고 평화를 도모하는 데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육아, 노인 복지, 병원, 정신 상담과 공동체 건설을 위한 묵상적 접근을 발전시켜야 한다. 각종 교육기관을 통해 세계의 다양한 지혜로운 전통들을 세속적 정신에 적용시켜 계몽된 전사 정신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 현재에 대한 인식, 의사소통, 비판적 지식, 인격적 소양과 효과적인 행동, 인문-사회 과학, 예술에 대한 연구는 지식과 영감을 융화시키고 학생들이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 봉사할 준비를 하도록 고안되어야 한다. 묵상적 실천과 사회적 참여를 상호 보조적인 것으로 육성하여 평화 세계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3. 맺음말

앞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달라이 라마, 마하 고사난다, 틱낫한 스님은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불리듯이 동·서양을 넘어 세계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 지도자들이다. 남방과 북방의 불교전통을 대표하며, 세계적으로 삶 속에서 평화 구현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있다. 시셍옌 스님은 중국불교를 대표해서 소개했다. 한국의 숭산 스님도 외국 선불교인들에게 유명하나 이미 국내인들이 잘 알고 있으므로 생략했다.

비구니 스님으로는 관음보살의 화신처럼 자비행과 보살행을 하는 대만의 시쳉옌 스님과 미국의 카르마 렉세쏘모 스님을 통해 여성불교계의 현실과 활동을 짐작케 했다. 재가 불교 지도자로 아리야라트네, 이케다 다이사쿠, 슐락 시바락사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방면에 불교정신을 적용하고 실현시키려 함을 보았다. 로버트 에이트켄 선사와 쥬디스 심머브라운 교수를 통해서는 수행과 교육 및 사회참여를 통해 불교가 평화 사회 구현에 공헌함과 미국 출신의 불교적 소양 및 지도력을 조감했다.

그들은 이미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거나 후보자로 여러 번 추천된 경력자로서 불교계 나아가 종교계 내지 세계 인류의 지도자로 존중되고 있다. 그들의 특징은 개인이나 그들이 속한 민족과 국가 및 종교의 영역을 넘어 세계 인류와 중생을 걱정하는 보편적 관심으로 세계 문제에 민감하며 동체대비의 보살행을 솔선수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과 글로 불교를 가르치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 몸으로 살아내며 감동을 주고 있다. 필자는 각종회의나 행사 등으로 이들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었는데 그들로부터 받은 느낌을 전달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아무튼 한국의 불교지도자들이 그들로부터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줄 안다. ■

진월
1968년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고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해인강원을 거쳐 통도사 극락선원, 조계총림 수선사 등 제방선원에서 참선 정진. 동국대학교와 서강대학교를 거쳐 하와이 주립대와 캘리포니아 주립 버클리 대학에서 종교학과 불교학 전공. 철학박사. 현재 조계종 국제교류위원.세계종교연합 한국 대표 및 세계위원회 이사.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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