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승사상의 요체

원효, 지눌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의 전통은 대승적 전통을 갖고 있다. 대승(大乘), 즉 자신의 깨달음보다는 중생의 제도를 우선으로 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전통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대승사상은 몇 가지의 골자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중생과 나, 타자와 주체의 관계에 있어서 ‘개인 자아’는 중생을 지향하고 있다.

중생의 덕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나 홀로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우선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며 한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수행하여 중생의 덕을 교화시키자.(《화엄경》 〈십행품〉)

나는 일체 중생을 대신하여 일체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모두 열반을 얻게 할 것이다.(《화엄경》 〈십행품〉)

나는 수없는 세계의 하나하나의 중생을 위하여 지옥의 고통을 받으리라. 또한 여러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중생에게 기쁨을 주어도 나는 지옥의 고통을 두루 떠맡은 후에야 비로소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리라.(《화엄경》 〈십행품〉)

대승적 견지에서 보면 불교란 나만의 깨달음을 위한 종교가 아님을 알수 있다. 나의 성취는 곧 타인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세를 떠났다 해도 속세의 중생을 생각하면 벗어날 수 없는 공간으로서의 속세가 존재하며, 소위 세간과 출세간의 법은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는 것이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세간의 법은 부처님의 법과 일치하며 부처님의 법은 세간의 법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부처님의 법과 세간의 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화엄경》 〈십행품〉)

세간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세간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세간을 분명히 통달한 이는 이 둘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세간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세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세간과 세간 아닌 것은 이름만 다를 뿐이며 삼세와 오온을 말하여 세간이라 하고 그가 멸한 것을 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

세간적이라느니 출세간적이라느니 하는 것을 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간의 본성이 공하다면 굳이 그로부터 출세간으로 나올 것도 없고 그 안에 들어갈 것도 없으며, 갈 것도 없고 가지 않을 것도 없습니다. 결국 나올 것도 없고 들어갈 것도 없으며, 갈 것도 없고 가지 않을 것도 없는 그것이 바로 불이(不二)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유마경》 〈입불이법문품〉)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는 세간을 벗어남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육조단경》 22 〈수행〉)

세간과 출세간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정각을 얻는 것도 중생 제도와 병진하므로 둘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둘이 아니라는 세상의 진리를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승사상을 가장 잘 요약한 주제라고 볼 수 있다.

하나(一)는 많은 것(多)이며, 많은 것은 하나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의하여 가르침을 알며, 비존재는 존재이며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는 것이 모습이며, 모습이 모습을 갖지 않는 것이며, 본성이 아닌 것이 본성이며, 본성이 본성이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화엄경》 〈보살십주품〉)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면 동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바라건대,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으라.(《육조단경》 22 〈수행〉)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육조단경》 21 〈서방(西方)〉)

그 중생들은 중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생 아닌 것도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래가 설명한 중생이라는 말은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깨치지 못하면 중생이기 때문에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니라.(《금강경》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불이법문을 잘 이해하면 중생과 나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깨달음과 미혹, 속세와 출가의 의미가 서로 하나의 관계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도 한국불교의 대승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수도승의 구도 행위를 이와 같은 대승사상의 골자들을 갖고 논쟁적으로 그리고 있다.

단지 불교적 소재를 교훈적인 측면에서 소화한 그간의 작품들과 달리 임권택의 〈만다라〉 이후 불교 소재 영화는 이러한 대승적 주제가 대중적, 사회적으로 어떻게 전달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그럼으로써 불교 영화는 단지 불교적 고유한 소재를 떠나 현대인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실존적 문제를 파헤치는 진지한 영화 양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여기선 그러한 발전의 양상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한국의 불교 영화를 짚어본다.

2. 계율과 욕망의 변증법

‘속세가 싫어서 절에 갔더니 그곳 또한 속세더라’는 인식이 의미하는 것은 세속과 비속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믿음, 즉 불이법(不二法)의 한 연장적 사고이다. 절에서도 속세에 대한 집착이 계속 발생하고 그로 인해 불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면 그건 인간적으로 수행자들에겐 여간한 곤경이 아닐 수 없다.

승/비승, 세간/출세간에 대한 불이법문을 다루고 있는 영화 〈만다라〉(임권택, 81)가 제기하는 문제는 승려의 구도적 삶을 다루되, 그들을 둘러싼 여타 중생들에 대한 인식을 처음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주어진다. 석가모니 6년 고행의 결과가 정각(正覺)이라면 한국에서 승려 6년 수행의 결과가 아직도 대오각성하지 못한 가운데 밀려드는 회의라면 그 문제의 심각도가 어떠한가에 대한 문제 지적은 일반인들의 관심사를 넘어선 수행자들 고유의 심각한 고민이다. 영화 속에서 토로하는 수행자의 고뇌는 수행방식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승단 전체의 체제에 대한 힐난으로 연속된다.

산천수려한 곳의 고색창연한 산사에서 밤새워 용맹정진에 몰두하는 선방의 스님들을 묘사한 영화의 첫 장면이 암시하는 장엄함은 즉물적 엄숙함, 신비함의 대상으로서의 한국불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풍자적 대상으로 소개하기 위해 대중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불교적 신비함의 특권 의식을 영상화한 것으로 읽혀진다. 이미 소설에서부터 체제 비판에 대한 독설과 야유로 인하여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던 원작의 정신은 영화 속 곳곳에 그대로 전승되어 나타난다. 그 비판의 요체는 그렇다. 정각이란 계율과 마음속 욕망이 갈등하고 지양하는 변증법적인 지점에서 비로소 달성될 것이란 문제제기이다.

법운 수좌는 노스님으로부터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전달받고 6년간을 참구하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병 속에 새를 넣어 키우다가 새가 병만큼 자라나 그 병을 나와야 할 때 병을 깨지 않고 새를 꺼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영화는 불교의 수행 방식인 화두 참구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펼친다.

화두란 것이 몰입 잠심하여 풀어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자신만의 침잠 그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연결된 것이며 그 마음의 착종을 해지해야만 비로소 자명해진다는 사실이 비판의 요지로 등장한다.
‘병 속의 새’ 화두는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의미를 지니겠지만 일단 그 병이 세상이고 새는 마음이라는 의미는 영화 속에서 암시된다. 사랑하는 애인을 뿌리치며 떠나온 속세에 대한 미련이 6년이 지나도록 법운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은 병 속에 새가 여전히 갇혀 있는 형상인 것이다. 그를 가두고 있었던 세상은 혈육의 정에 대한 미련, 즉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자신과 아버지와 가정을 버리고 가출해버린 무정한 어머니라는 증오감 때문에 인생의 환멸을 느꼈고 그걸 기화로 출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증오는 곧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동일한 지점으로 환원되어 그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무책임한 행위를 용서한다는 일이 곧 그에게서 어머니의 짐을 벗어던져 마음의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길이다. 그럼으로써 중생제도라는 서원이 곧 중생에 대한 강박증을 초월하여 중생을 제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같은 입장의 고통받는 중생이라는 포용력과 이해력을 통해 깨달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거렁뱅이, 땡초, 파계승으로 보이는 지산을 청정비구인 법운이 우연히 조우하게 된 사건은 법운으로 하여금 수행에 대한 전혀 다른 이면을 보게 함으로써 깊은 각성을 유도해 낸다. 감독은 지산의 파계적 행동을 통해 수행승의 만행(萬行)에 대한 고정된 시각을 파괴한다. 참선과 만행으로 대표되는 수행의 진지한 과정을 감독은 규율을 벗어나 인간의 본성으로 되돌아간 타락의 모습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관습적이며 고정적인 불교적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술과 여자, 고기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파계를 일삼는 지산의 행각은 법운에게 불법에 좀더 솔직하게 접근해야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지산을 만나기 전까지 법운은 자신의 내면에서 내내 괴롭혀온 육친의 정에 대한 고통으로 인하여 편안치 않은 마음 상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산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통해 육중하게 걸려 있던 마음의 빗장을 개방하게 되고 만 것이다. 법운은 지산을 마음껏 비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 자신을 구속하던 불교적 엄숙주의와 본성의 억압에 대한 고민을 서서히 방출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산은 법운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선지식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 되었다.

지산이 무당의 청에 의해 불상의 점안식을 할 때 불상을 평범한 나무쪼가리라고 말하거나 자신의 부자격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바랑 안에 자신이 깎은 조악한 목불(木佛)을 지니고 다니는 등 숭배의 대상에 대한 신성모독을 보여주는 대목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불교의 세속화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진다. 탑이나 불상 등을 조성하거나 기도, 염불회를 조직하는 각종 불사(佛事)의 과정에서 본래의 취지와는 훨씬 일탈되어 극히 세속화되고 속물화된 의미로 진행되는 일은 곧 깨달음의 파행적 행위로 풍자된다. 외적으로 세련되고 공들여진 불상의 이미지 대신에 지산이 손수 깎은 조야한 목불상이 대비되어 제시되는 의미는 중생의 마음에서 멀어진 불교의 본령이 다시 중생의 품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에 대한 실질의 회복 메시지는 소지(燒指)공양을 하느라 고통을 감내해 가는 한 스님의 참회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처음엔 묵언수행을 하던 그 스님은 영 깨달음이 오지 않자 노스님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손가락을 두 개씩이나 태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실패한 그는 문득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술회한다.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해 신심을 회복하려 했던 방식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승려들이 자신의 몸과 정신을 극한 상황 속에 몰아넣고 이 세상과 단절함으로써는 결코 깨달음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는 이와 같은 다소 영화적이지 않고 설명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인간적 욕망을 절제하라는 불교적 인욕 수행에서 가장 감내하기 어려운 욕망으로 대두되는 것이 성욕이다. 성욕은 억제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불교적 규율은 잘못된 견해가 아닌가라는 반문이 이 영화에서 감독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비판이다. 지산이 파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절에 쫓아온 한 여인과의 정분 때문이고 법운 역시 성욕에 의해 한 남자와 달아난 어머니로 인해 영향받은 인물로 그리고 있다. 법운은 어머니의 사건으로 인해 성욕을 불결한 대상으로 금기시하게 되고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오히려 금욕적으로 멀리하게 되었으며 결국 출가까지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현재 불교가 견지하고 있는 관습과 상식에 대해 전복적 견해를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한 역설적 전복성은 법운과 지산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에서부터 드러난다. 구름은 떠돌아다닌다는 뜻에서 절에서 거주하지 않는 선객을 의미하며, 산이란 고정되어 있다는 뜻에서 절에 상주하며 수행하는 스님을 흔히 일컫는데, 파계를 일삼는 자유분방한 지산과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수행승 법운을 등장시키면서 그 이름이 본래 의미하던 바를 혼동시키는 상징을 구사하고 있다. 지산은 법운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비꼬면서 “산을 안다, 내가 산을 알긴 뭘 아나”라는 자조적인 대사를 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도된 것임을 알수 있다.

이 작품이 그 동안 다뤄온 여타의 불교 소재의 영화에 견주어 불교적 구도의 의미를 불교 내부 차원의 고민으로 처음 본격적으로 다뤘다는 사실은 괄목할 만한 계기를 이룬다. 억압적 계율과 자유분방한 본성, 주체와 타자, 세간과 출세간의 이분적 갈등의 지양, 극복의 변증법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주제의식의 일단이다.

3. 비천한 세간을 출세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세간/출세간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방법, 즉 정각을 달성하기 위해 이 속세를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 영화가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이다. 정각이 산사 수행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 자체가 도량이라는 의미는 영화의 큰 줄거리를 이루는 주제이다. 따라서 감독은 세간은 비천하며 고통이고 환영이며 출세간은 성스럽고 고결한 것이라는 이분법을 시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견해를 설득시켜 나간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이 세상의 온갖 미천한 인간들의 모습은 결코 미천한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 입장으로 수긍된다. 넝마주이였던 아버지의 비천한 삶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넝마 한 조각만을 아들 선재에게 남긴다. 물질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채 장례 비용조차 없어 화장하고만 아버지의 죽음은 선재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근거의 소멸로서 의미를 갖는다.

선재는 물질적 죽음을 통해 정신적 탄생의 욕구를 갖게 되고 그러한 심적 상태는 정신적 각성의 출가를 의미하는 어머니의 추구를 통해 나타난다. 그는 현실에서 일탈하여 정신의 이상세계로 구도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아버지의 동료였던 넝마주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비천하게 등장하나 길을 떠나는 선재에게 없는 돈을 털어 여비를 마련해 주는 넝마주이 동료의 모습을 통해 혈육의 정 이상의 깊은 인간주의적 온정을 느끼게 한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리는 그 현장까지 따라와 꽃값을 비싸게 쳐서 받아내려는 소녀 고아 이련은 돈에 찌들어 동심까지 말라버린 처참한 인간성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비참한 밑바닥 인간들의 처절한 삶의 모습은 이면의 모습을 통해 다시 전복된다. 표면은 모리배나 다름없이 비천하게 살아가지만 속마음은 인간적이라는 느낌은 소녀 이련이 성장하여 성인이 된 후 순박하고 착한 여성의 모습으로 재등장함으로써 설득되어진다.

이련과 나중에 살림을 차리게 되는 트럭 운전사 역시 무식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저류의 인간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 그의 이미지는 전복되어 평범한 서민의 한 전형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된다. 밤에는 다리 밑에서 자고 낮에는 다리 위에서 연꽃을 만들어 파는 거지 여인과의 만남 역시 선재에게 남자에 의해 버림받은 불행한 여인의 삶을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형성한다. 그녀는 남자의 포악성 때문에 눈이 멀고 심지어 성기마저 거세당한 처참한 여인이지만 결코 자신을 가해했던 그 남자를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성녀와 같은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

평생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감방 노인을 만나기 위해 선재는 처음 감방이라는 곳을 가보게 되며 처음 입소한 죄수를 집단 구타하는 감방 속 풍경을 통해 어둠의 자식들의 비천함을 느끼게 한다. 마치 비전향 장기수를 상징하는 듯한 감방 노인의 이미지는 백주의 인간이 어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각성하게 만든다. 억울하게 갇혀 있는 온갖 죄수들의 세계는 법이라는 등불이 결코 비추지 못하는 이 세상의 어두움이며 눈앞에 보이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인간들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하게 만든다.

인생의 허무를 절감한 나머지 자살한 선재를 구해 준 등대지기 노인과의 만남은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늙고 무기력한 노인이지만 인생의 등불과 같이 인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전달해준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 널려 있는 무수한 비천한 인간들의 삶이 보이는 그대로 비참하고 천박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 이면에 따뜻한 인간주의와 소박한 인정이 넘실대고 있다는 견해를 보이는 감독의 시각은 이 영화가 극복하려 하는 기존 가치에 대한 전복적 의미로 차용된 장치들이다.

그와는 거꾸로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어 있고 물질적으로 안정된 인간은 또한 얼마나 속물적인가 하는 견해가 동시에 대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속에서 가장 성스러운 이미지로 존경받는 부류인 스님의 이미지는 파계승, 걸승, 장사꾼의 모습으로 둔갑되어 나타난다. 처음의 만남부터 술과 고기를 먹으며 나중에는 해변가에서 생선의 내장을 훑어내는 천박한 직업인으로 변해 있다.

이련과의 동침을 권유하여 선재로 하여금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함으로써 성욕을 금기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러한 모든 모습은 승려의 청결한 이미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파계적 행동의 의도적 전복이다. 〈만다라〉에서의 지산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멀리는 한국 고승 열전에서의 경허(鏡虛) 선사의 행각을 이어받는 대승적 자취를 보인다. 어촌 마을에서 의술을 펼치는 의사 역시 세속적 의미의 의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질이 괄괄하고 어른에게도 경어를 쓰지 않고 반말을 지껄이는 모습은 의사가 아니라면 그대로 막되먹은 천박하고 비루한 계층의 인간으로밖에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가난하고 약값도 없는 불쌍한 노인들에게 인술(仁術)을 펼치며 명예와 물질적 대가를 멀리하는 헌신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전형적인 지식인 학자의 모습인 천문학자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들치거나 술에 취해 있고 아내의 눈치에 주눅이 들어 있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에게서 고상하고 어려운 학문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학자연하는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처럼 고결한 이미지의 세속적 평가를 갖고 있는 인물들에게서 그러한 고상함의 요소를 삭제하고 대신 천박하고 비루한 속물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표피와 내면의 전도를 통해 기존의 지배적 가치 개념을 혼융시키고 나아가서 숨겨진 본질적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한 의도적 혼동의 장치란 것을 알 수 있다.

선재는 종반에 꿈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그 꿈에서 깨자 자신이 오물더미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고 절망감에 휩싸인 채 오열한다. 선재가 목숨을 내걸다시피 극력 추구한 어머니의 존재는 영화의 끝까지 현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구도적 이상은 꿈이요, 환영(幻影)이고, 현실은 쓰러기더미며 오물이라는 진리를 드러내 준다.

어머니를 추구한다는 것은 출세간의 구도 행위를 의미하는데 그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현상은 세간의 진리인 비천한 인간의 조건들이다. 어머니를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다는 구도적 절망감은 깨달음이 이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환원적 사고를 지칭한다. ‘세상은 자기를 잃어 비로소 세상이 된다’라는 영화의 마지막 표제는 그런 점에서 대승사상의 핵심적 원리로 부각된다.

자기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진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선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고아 한 명을 데리고 원래의 출신지였던 넝마주이로 돌아간다. 깨달음을 얻은 선재의 모습은 이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환속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마(維摩)거사의 ‘중생불국토설’이 이 영화의 메시지와 연관되는 이유는 높은 것을 낮추고 낮은 것을 높이는 평등사상, 자기 헌신 사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 역시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혹시 모든 사람들이 병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제 병도 씻은 듯이 낫겠지요. 문수보살이시여, 보살이 기꺼이 윤회 가운데 뛰어든 것은 오직 중생을 위해서이며 제가 아픈 것도 사실은 저 윤회가 원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병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비로소 보살의 병도 씻은 듯이 낫겠지요…… 보살의 아픔은 바로 대자비가 그 원인입니다.(《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文殊舍利問疾品)〉)

구도자, 즉 보살과 중생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법문은 대승사상의 요체로서 영화 〈화엄경〉을 견지하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4. 세간/출세간의 대립 지양

출가한 스님들의 불도 수행과 속인들의 일상 생활이 결국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라는 것은 박철관 감독의 〈달마야 놀자〉(2002)에 와서 명확히 드러난다. 더 이상 불도 수행의 은밀함이나 신비함, 엄숙주의 등은 사라지고 대신 스님들이 지향하는 타자, 중생에 대한 삶이 그대로 불도 수행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이야기로 전환된 것을 보여준다. 가장 가까운 중생의 삶을 멀리하고 독거 수행에만 정진한다고 해서 정각은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이 영화는 스님들의 수행 정진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다. 인간에 대한 외형적 평가는 여기에서 부정된다. 조폭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견해는 영화가 진행하면서 서서히 불식되는 것이다. 일단의 조폭들이 절로 쫓겨 들어오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조폭들의 언행은 스님들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다. 일단 절에 머물게 된 이들은 음식 공양을 하는 자리에서도 속세식의 조폭적 천박함을 보이면서 사찰 예절식으로 공양을 하는 스님들의 식사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횡포를 물리치고 결국 사찰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청명을 위시한 스님들은 계략을 내어 그들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여기까지 관객들은 스님들의 입장에 동화되고 그렇게 조폭들이 혼이 나서 쫓겨나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위기의식에 몰린 조폭들은 역시 계략을 내어 스님들을 이기기 위해 승부 근성으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마침내 청명은 조폭 두목 재규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제압하고 그들을 쫓아내는 데 일단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부분에 오게 되면 감독은 조폭과 스님이 결국 같은 입장이 되고 만 것을 알려주게 된다. 속세의 조폭 세계에서도 같은 과정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구역을 점유하기 위해 조폭들은 실력 행사를 하게 되고 상대방을 폭력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입장만이 다를 뿐이지 과정이나 목적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정법을 수호하는 입장이든, 이권을 취하려는 입장이든 폭력을 동원하여 구역을 지켜내려는 목적은 결국 동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조폭 대 스님들의 한판 승부인 것처럼 구성되는 영화적 전개는 감독이 불교라는 집단적 아집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한다. 둘의 싸움을 보다 못한 노스님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시합을 제안하고 결국 승리한 조폭들의 손을 들어준다. 이에 반발한 청명은 노스님에게 항의하게 되고 노스님은 청명에게 따가운 일갈(一喝)을 던지게 된다. 승려가 되어서 따뜻한 마음으로 조폭을 대하지 못한 데에 대한 옹졸한 마음을 비판한 것이다. 아무리 미천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중생은 다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리라.

노스님의 입장에서 스님이나 조폭이나 평등하게 비춰졌을 것이며 청명 말대로 스님들을 내치고 조폭을 두둔한 섭섭한 처사를 행한 것은 아니다. 그 시험은 눈에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 진실한 속마음을 내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일종의 불교적 시험이기도 한 것이다.

조폭과 스님의 평등한 입장은 둘의 일상을 통해 점점 닮아가는 모습으로 묘사해낸다. 조폭들은 속세 옷을 벗어버리고 사찰 옷으로 갈아입은 후 공놀이를 하며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며 공을 차는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결코 사악한 것이 아님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대승의 가르침에 그대로 부합되는 그 장면은 미천한 중생일지라도 부처의 종자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인 것이다.

스님과 조폭간의 간격을 좁히고 이들의 동질성을 조명한 것은 감독의 의도적인 방향이었고 이들의 동일한 지점을 파고 들어와 불법의 본질을 강하게 전달한 인물은 노스님이었다. 청명과 재규를 같은 인물로 만들어 놓고 그들에게 깨달음의 요체를 전달하는 노스님은 각자에게 깨달음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조폭들이 떠나기로 한 마지막 밤에 노사는 부엌에서 손수 밥을 지으면서 청명에게 한 마디의 일침을 놓는다. 스님들은 수행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을 도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문득 청명은 자신이 조폭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노사가 지적한 말임을 문득 깨닫는다.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만약 이 세상의 모든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 아님을 안다면 곧 내면에 숨겨진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는 말은 노사가 청명에게 요구하는 공관(空觀)을 설파한 것이다.

다음날 배신한 조폭들에게 재규 일행이 사지(死地)에 놓이게 되고 의리를 지키다가 당하게 된 재규 일행을 관객들은 동정하게 된다. 노사가 마음속에 수용한 재규의 본모습은 바로 그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의 모습은 자신을 위해 남을 죽이는 흉악한 조폭이 아니라 밥도 못 챙겨먹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의리 지킨답시고 남을 위해 헌신하다가 스스로 함정에 빠져 억울하게 죽을 처지에 놓인 불쌍한 일개 중생의 허망한 몸짓이었던 것이다.

자기 편을 들어준 것에 대해 감동한 재규는 노스님에게 자기를 도와준 이유를 질문한다. 그에 대해 노스님은 반문의 형식으로 대답을 한다.

“너는 왜 밑빠진 독을 안고 물에 뛰어 들었어?”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래. 나도 밑빠진 너희들을 그저 내 마음속에 던졌을 뿐이야.”

이 평범한 대화는 고승들에게서 내려오던 케케묵은 어려운 화두가 아니라 현대 일상인들도 쉽게 수긍이 가면서도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살아 있는 화두인 셈이다. 밑빠진 독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집중된 일념으로 자신의 온 몸을 내던져 물 속에 뛰어든 재규의 심정은 불교에서 높이 사는 살신적 구도자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라고 노사는 생각한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조폭의 옷을 입었다 해도 그는 이미 보살인 것이다. 노승 역시 조폭을 수용하는 마음의 자세를 폭넓게 보여 준다. 조폭을 받아들이기에는 젊은 청명과 같이 번뇌가 많이 생기는 일이긴 하나, 일단 자신을 죽이고 포용력을 가지면 수용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독을 안고 물에 뛰어든 재규가 목숨을 건졌듯이, 자신의 바다에 재규를 수용한 노사도 재규의 참회를 통해 생명을 얻은 셈이다. 이렇듯 자기를 죽이고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는 석가의 본생담(本生談)에서부터, 달마(達摩)와 혜가(慧可)의 법맥 전수 일화에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불교의 전통이다.
노사가 깨달은 자라는 암시는 노사가 재규를 처음 대면하던 장면에서부터 나타난다. 비장하게 마치 상대편 조폭 두목과 협상을 하러 온 듯 험악하게 긴장된 얼굴로 질문하는 재규에게 노사는 손주를 대하듯이 편한 마음으로 문득 뜬금없이 “밥은 먹었냐?”고 질문함으로써 재규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노사의 동문서답은 선사들의 일화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서 “밥은 먹었냐?” “네.” “그럼 양치질 해라”와 같은 유명한 화두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화두를 해석하는 입장은 흔히 ‘평상심이 곧 도이다(平常心是道)’라는 말로 정리되곤 한다. 노사는 열반함으로써 재규에게 더욱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한다. 이러한 장치 역시 불교적인 것으로 해석되는데 단순히 노사의 신비함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인생의 무상함을 각인시키기 위한 의도로 적합하게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은 때를 정해 놓고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순환은 모든 것을 흘러가게 만든다. 노사는 그렇게 이 세상을 간 것이다.

정각은 타자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 내적 수행이 병행되는 것이란 교훈이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이다. 이 영화에 와서 세속과 탈속은 더 이상 거리감이 없어진다. 세간/출세간의 법은 동시에 추구하는 깨달음의 방편으로서 서로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요소이므로 상구보리(上求菩利), 하화중생(下化衆生)은 병진되어야 함을 전달하고 있다.

5. 종교를 초월한 현대인의 실존적 사상으로서의 불교 영화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대승사상은 한국의 불교 영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다라〉에서 본격 시작된 구도자의 내적 고민과 방황은 불교적 대승사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스님들의 고뇌이기도 하면서 대중에게 있어서는 현대인의 실존적 자각을 사유하기 위한 개인/사회의 이분법적 갈등을 또한 암시하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사회적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기 때문에 그러한 실존적 의식이 부여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란 생각이 든다. 불교 사상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불교적 문제도 같이 수반되어 진전되는 느낌이 든다. 1980년대는 사회적으로 한국의 격변기를 대표하는 시기로서 개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욕구는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잡았고 공동체적 고통을 개인적 고통의 깊이로 아우르려는 예술가적 창조 행위는 이처럼 불교 소재 영화의 한 갈래로 표출되는 것이 새삼스런 일은 결코 아니다.

불교적 소재의 영화는 위에서 거론한 영화 외에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꿈〉 〈아제 아제 바라아제〉 〈우담바라〉 〈업〉 〈산산히 부서진 이름〉 등 같은 시기에 많이 생산되었다. 이들 영화가 모두 대승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가운데에는 개인의 각성에 초점을 맞추거나 ‘인생은 일장춘몽’식의 도피적 세계를 불교에 빗대어 묘사한 영화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불교가 은둔적이며 반사회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점이 있지만, 그러한 종교성을 초월하여 사상적으로 고찰할 때 이와 같은 화엄적 대승사상의 맥락 속에서 불교는 결코 사회와 개인이 분리될 수 없는 철저히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기능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대중성과 불교의 사회성이 서로 접목될 수 있는 지점도 바로 그곳이다. 영화가 단순히 도피, 오락의 매체가 아니라 공허한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개조하고 각성을 주는 매체로 작용한다면 대승사상적 메시지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을 각성케 하는 도구로 차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정재형
뉴욕 시립대 석사. 중앙대 영화학 박사. 현재 동국대 영화영상제작학부 부교수. 저서로 <뉴시네마 감독론><정재형 교수의 영화강의><한국 초창기 영화이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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