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암 이종욱을 중심으로

1. 친일파 명단 발표와 불교계의 반발

지난 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친일 논란이다.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이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고 명명한 708인의 인사를 확정해 발표했다.

현역 의원들이 친일행위자 명단을 공식 발표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로 사회·문화·종교·언론계에서 지도층으로 활약했던 인사가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 1차 명단이 발표되면서 즉각 반발에 나선 것은 역시 일부 언론사였다. 대다수 언론들이 이번 발표가 ‘친일행위의 역사적 단죄’라며 환영의 뜻을 밝힌 것과는 달리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인촌 김성수(동아일보) 등 창립자가 포함돼 있는 이들 신문은 그 명단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대신 그 발표 과정에 대한 반응과 분석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이번 친일명단이 역사적 심판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는 3월 5일 창간특집에서 “계초는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는 사업가”라며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켰고, 〈동아일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육-언론 헌신……독립을 준비한 선각자”(4월 1일 8면)라는 제목으로 인촌이 우리 겨레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선각자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일부 신문사측의 주장은 의원모임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계초 방응모를 “언론을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정책의 하수인”으로, 김성수를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친일자본가”라고 평가한 것과는 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친일명단이 발표되면서 일부 언론사뿐만 아니라 불교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원종 종정을 역임한 이회광을 비롯해 조계종 창건의 주역이자 초대 종무총장(현 총무원장격)을 지낸 지암 이종욱, 〈신불교〉 발행인 허영호, 〈불교시보〉 발행인 김태흡, 동국대 초대총장 권상로 등 불교계 인사가 5인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조계종 교육원은 이 발표와 관련해 3월 18일 광복회에 “이종욱 스님과 허영호 스님은 일제하에서 항일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종단 건설에도 큰 역할을 했던 스님들”이라며 이들을 반민족행위자로 포함한 사유 및 해명자료를 요구했다.

또 불교계의 한 주간신문에서도 김광식·박희승 등의 말을 빌어 “임혜봉 스님의 《친일불교론》 등이 해당 스님을 반민족적 친일파로 분류한데는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불교의 대표적 종단인 조계종을 창종하고 불교를 일제로부터 외호하는 데 이들의 역할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일제에 협력하는 듯 했지만 결국 두 스님(이종욱·허영호)의 마음속에는 한국불교의 부흥과 계승이라는 화두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크다.”1)는 논지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리고 조계종 교육원은 이어 6월 중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과 광복회가 지난 2월말 이종욱·허영호 스님을 친일파로 규정한 것과 관련해 이에 대한 ‘오류와 반론’을 담은 사유서를 광복회 및 반민족연구소측에 전달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처럼 의원모임에 언급된 불교계 인사들을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친일’이 맞지만,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독립·민족운동을 했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는 것이 편협한 시각이라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친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이종욱(1884∼1969)을 중심으로 일제하 불교계의 친일 행적을 살펴보고,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이 논쟁의 내용 및 문제점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2. 친일파의 정의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라는 말은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이거나,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구한말부터 쓰이기 시작해 100여 년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친일파’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느 역사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외세와의 친연성(親緣性)을 가지는 정치집단’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민족적 정서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한 매국노, 민족반역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호응, 협조해 식민지 체제를 구축하는 데 적극 협력한 자로, 제국주의 또는 강대국이 한국 근현대사를 파행으로 몰고 간 외적 기본인자라면, 친일파는 그것이 민족내적 추동인자라는 것이다.2)

해방 이후인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선포 직후 규정한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따르면 일본 정부와 협력해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를 비롯해 일본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 자, 일본 제국주의 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 일본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고의로 살상한 자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부문에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 등을 함께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앞서 1947년 3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제출된 친일파 규정안에서도 친일파의 범주를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으로 각각 나누고 부일협력자에 언론·예술·학교·종교 등 각종 문화기관을 통해 일제 통치를 찬양하고 혁명운동을 방해하며 내선융화·황민화운동을 추진시킨 자, 학병·지원병·징병·징용·공출을 권유하거나 강요한 자, 창씨를 수창(首唱)한 자·창씨를 강요한 자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민족반역자로는 민족운동에서 변절하고 부일 협력한 자, 외부 세력에 의부(依附)해 동포를 박해한 자를, 전범으로는 일본 군부에 1만 원 이상의 현금 또는 군수품을 자원 헌납한 자, 언론·문필 등으로써 전쟁 행위를 고취한 자 등도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다.3)

3. 불교계 친일 인사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 친일 명단에 오른 불교계 인사 5인 중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회광(1862∼1933)은 구한말 대강백에서 1908년 제국주의 불교의 앞잡이인 원종의 종정으로 탈바꿈하면서 죽는 날까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 시도했고, 결국 불교계에서마저도 축출당했던 친일불교의 거두였다. 또 이회광과 활동했던 권상로(1879∼1965)는 일제시대 최고의 학승으로 총독부가 주최한 각종 친일행사에서 연사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1938년 총독부가 지원병제를 실시하자 그는 스님들에게도 지원병에 나설 것을 외쳐댔으며, 1940년대에는 국민총력연맹 참사 등 친일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총동원정책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곡학아세의 절정인 《임전(臨戰)의 조선불교》(1943)를 통해 불교를 제국주의 이념 도구로 전락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불교시보〉를 발행한 김태흡(1899∼1989)은 일제의 조선민족 황민화 정책에 발맞춰 〈불교시보〉가 존속한 1935년부터 1944년 4월까지 수백 편의 친일 기사를 수록했다. 심지어는 그는 ‘대동아성전 완수와 조선불교의 진로’란 주제로 현상논문을 공모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들 3인은 친일·항일의 논란과는 전혀 무관하게 시종일관 친일로 일관했던 인물로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비판이 늘 뒤따른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허영호와 이종욱이다. 허영호는 이종욱과 마찬가지로 선항일 후친일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한용운의 뜻을 따라 김법린·김한기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가장 활발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던 범어사 뒤에는 허영호의 숨은 노력이 있었으며, 부산 동래읍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일경에 구속된 그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허영호는 3·1운동에 참여한 공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허영호 또한 30년대 말 친일로 급선회한다. 그는 1937년 〈신불교〉의 발행인이 되고, 또 이 잡지를 통해 노골적으로 황민화·황도불교 등을 역설하는 등 친일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 특히 조계종 초대 종정 방한암의 사서직을 맡으면서 종정 명의의 친일 논설을 썼다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한편 이종욱은 불교계 친일 논쟁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다. 허영호와 마찬가지로 3·1운동을 계기로 항일운동에 본격 투신해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뒤 일경에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계종 창건에 주도적이었던 인물로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기도 했다. 이종욱은 조계종의 행정책임자로 수많은 친일 행적을 남기고 있음에도 여전히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친일은 불교라는 전통문화를 유지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속으로는 항일운동을 접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영호의 경우 친일을 했던 부분이 있긴 있지만 공적이 크니까 친일파로만 규정해선 안 된다는 입장과 달리 이종욱은 친일 자체가 거부되고 있는 상황이다.

4. 지암 이종욱, 그는 누구인가

친일불교에 대한 연구는 70년대 말까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불교계 인사들이 그 당시에도 상당수 생존했고, 후학이나 제자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1980년 강석주와 박경훈은 《불교근대백년》 제3장 〈친일과 항일의 분종〉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으며, 특히 관심을 모은 것이 이종욱에 대한 언급이었다.

이들은 이글에서 이종욱을 항일운동가, 월정사를 구한 인물, 조계종의 산파자 등 긍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4) 이어 지암화상문도회에서는 《이종욱 평전》을 통해 지암 화상을 한평생 정법을 수호하고 민족과 민중을 위해 살았던 선지식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일반 사전류에서 그에 대한 설명은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표현돼 있다.5)

이들 자료에 따르면 이종욱은 1884년 1월 13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에서 태어나 13세 되던 1896년 양양군 명주사에서 출가했으며, 곧이어 월정사의 해천월운을 시봉하며 월정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다시 15세 되던 해인 1898년 명주사에서 홍보룡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1905년에는 송광사에서 이회광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범어사 청련암, 양산 통도사 취운암, 건봉사 보안원, 백담사 오세암, 대승사 강원 등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불교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약탈을 강행하던 중 월정사 또한 수십만 정보의 땅을 모두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30세의 젊은 이종욱이 ‘주지대리’가 되어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하며 폐사 직전에 있던 월정사를 구하게 된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3·1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이종욱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으며, 3월 3일 이탁 등과 27결사대의 일원으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이어 그는 4월 2일 인천 월미도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 불교계 대표로 참여했으며, 이승만을 집정관으로 하는 임시정부인 한성정부를 조직했다.

이종욱은 이후 상해로 옮겨가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해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서울에 파견됐다. 그는 안세홍·송세홍 등과 함께 상해임시정부의 외교활동 지원을 위한 청년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 동 단체의 건의서를 안창호에게 전달했다. 그의 눈부신 활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8월 그는 다시 국내로 파견돼 국민회를 조직했으며, 10월에는 대동단 단장인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도와주었다. 12월에 그는 상해임시정부 참사(參事)에 임명됐으며, 1920년 3월 연통제를 조직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들어와 이를 추진하는 동시에 정보 수집·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21년 6월 이종욱은 대구에서 일경에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인 1923년 그는 다시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과 관련돼 함흥감옥에서 3년 동안 복역했다.

이종욱과 관련된 이상의 활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이처럼 활동이 기록돼 있으며,6) 대다수 사전류에서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출옥 후의 행적에 대한 부분이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의 기록에는 “출옥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종욱은 출옥 후 총본산건설운동을 주도했으며 태고사 창건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31본산 주지 대표는 물론 1941년에는 조계종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종무총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럼에도 공훈록에 왜 ‘은거’라고 기록해 놓은 것일까.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종욱의 출옥 후의 행적이 ‘건국훈장 국민장’ 수여와 무관하거나 혹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닐까.

5. 이종욱의 행적, 무엇이 문제인가

1941년 11월 17일 조선불교 조계종의 총본사인 태고사(현 조계사)에서는 제2회 중앙종회가 열리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모두 기립한 가운데 일본식 국민의례로 궁성요배와 묵도, 황국신민의 서사제창 등 의식이 진행됐다. 이러한 일련의 의식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불교의식인 삼귀의가 시작됐고 종무총장의 개회사로 종회는 시작했다. 종무총장은 그 해 10월 3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종무총장으로 인가 받은 이종욱, 아니 히로다 쇼익(廣田鍾郁)이었다.7)

1940년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에 선임되기도 한 그는 이번 종회 결과를 가지고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 12월 4일 개최하는 조선임전보국단 전선대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중앙종회를 꼼꼼히 지켜봐야 했다. 이날 첫째 안건은 ‘황군에 대한 감사결의 및 전몰장병에 대한 경조(敬弔) 결의안’이었다. 논의 결과 황군이 미증유의 전과를 올리고 천황 아래 하나가 되어 국위를 선양하는 것에 감격한다며 이 난관을 극복해 성업(聖業)을 완수하길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안건은 경조결의안보다도 군용 비행기 헌납과 관련한 결의안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불교계가 태평양전쟁에 적극 나서주길 원했고, 불교계는 이를 외면해선 안 될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애초 예상했던 것처럼 “우리 조선불교종도들은 현재 나라를 초월한 비상시국을 맞아 황은에 보답하는 동시에 황군장병에 감사의 정성을 보이자”는 이유로 헌납 비행기 5만 3천 원을 전 조선 사찰과 불자들을 대상으로 모집할 것을 통과시켰다.8) 그리고 다음 해인 1942년 1월 30일 이종욱은 종무총장의 자격으로 용산에 있는 조선군사령부로 가서, 79식 전투기 대금으로 5만 3천 원을 헌납했으며, 초과액인 5,246원 80전은 국방헌금으로 제출했다. 이 육군전투기가 바로 ‘조선불교호’다.9)

다시 그는 약 두 달 뒤인 1942년 3월 25일 황군 무운장구 기원법요를 거행한 뒤 개최된 임시중앙종회에서 ‘전첩(戰捷)의 춘(春)’이란 제목의 연설로 개회한다.

대동아건설과 한가지 아제국(我帝國)의 전첩의 춘을 봉영하야 시시각각으로 세계인류로 하여금 시명(時命)의 시정(是正)을 하게 하고, 그 분(分)에 자안(自安)해서 신(神)의 대도(大道)와 불타의 본회(本懷)를 심체(深體)하게 하는 것은 우리 황도불교의 종도된 직분이며 또한 제국신민으로서의 보국에의 적성(赤誠)인가 생각합니다. 동아의 봄과 제국의 성절을 축하게 된 의의 다른 금춘(今春) 종회개회 벽두를 맞이하면서 삼가히 성도(聖禱)를 봉(奉)하야 마지않은 바입니다.10)

이종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사찰의 철, 동, 청동, 황동 등 금속류를 헌납할 것을 공식적으로 시달함으로써 수많은 사찰의 불구류(佛具類)가 전쟁을 위한 살상무기로 변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종욱은 ‘겉으로는 친일을 하는 척했지만, 속으로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은 인물’이라고 평가받아 왔다.11) 이러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소위 ‘불교학 대가’들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로 인해 80년대까지도 근현대불교사 분야는 학자들이 가장 기피하는 분야였고 그만큼 조명과 평가 작업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간혹 이 문제에 대해 논할 때면 몇몇 스님들의 기억이나 구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고 당연히 학문적인 신뢰도나 정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종욱에 대한 첫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것은 임혜봉이다. 그는 “친일불교란 주체적 조건을 몰각한 맹목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일본에의 예찬과 추종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이고, 나아가서는 매국·매종적이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불교”라고 규정하고, 반성이 없는 한국 종교계 풍토에서 선구적으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불교계의 친일행각에 대한 시기 구분을 토대로 일제시대 교단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친일파로 비판했다.12)

그는 지난 93년 《친일불교론(상·하)》(민족사)을 시작으로 《친일파 99인》(돌베개), 〈불교계의 친일인맥〉(《역사비평》 22호) 등 저술과 논문을 통해 일제하 친일불교의 실상을 소개했다. 물론 이종욱에 대한 평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종욱을 ‘항일투사에서 골수친일파로 전락한 인물’ ‘총독부 출입 잦았던 친일 전향자’ ‘일본천황에게 절대 충정을 바친 인물’ ‘조계종의 실권자 되어 친일파 주도’ ‘변절한 친일파가 건국훈장을 받은 불가사의한 존재’로 기술했다. 그는 일련의 연구 결과물을 통해 기존에 금기시 됐던 불교계의 친일 문제를 비교적 상세한 자료 분석을 통해 비판했던 것이다.

실제 이종욱의 행적에서는 쉽게 묵인,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친일 행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의 행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27년 월정사의 감무로 복직하였으며, 오대산 월정사 부채 문제를 일제 당국의 도움 속에 해결할 수 있었고, 1930년 대본산인 오대산 월정사 주지에 취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이종욱을 회유하고 조선불교에 은혜를 ‘베품’으로써 조선불교를 조정하려는 의도로 오대산 석존 정골탑묘 찬앙회를 구성했다.

이 단체에는 중추원 고문들을 역원으로 앉히고 조선총독 사이토(齊藤實)와 정무총감 등의 고관들과 이완용·최남선·이능화·이광수 등 열렬한 친일 명사, 친일 성격이 강한 31본사 주지들이 발기인과 회원으로 가입됐다. 이때 이미 일제는 이종욱을 조선불교계를 이끌어갈 인물로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이종욱의 행동에서도 친일적인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기존 종교를 이용해 조선의 민중들을 순화시키고자 했으며, 조선의 모든 종교 위에 일본의 국가신도를 상위 개념으로 설정했다. 신도 보급은 국가권력 스스로가 숭배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정책, 즉 정치권력을 모든 종교 위에 군림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민중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13)

총독부로부터 주목을 받던 이종욱은 1936년 8월 26일 미나미(南次朗)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자 종회의장 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경성역에 마중 나가 미나미의 총독 부임을 축하했다. 이후 그는 1937년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 선출돼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그 자신은 총본산건립위원회의 31본산 주지대표로 취임했으며, 총본산 건립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전시체제에서 일제 당국의 황민화 정책에 적극 호응·협조했다.14) 1941년 4월 23일 ‘총본사태고사법’을 총독부로부터 인가받은 뒤 종무총장으로 취임한 그는 권상로, 김태흡 등을 동반하고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및 시국대응강연회’를 개최했으며, 전투기를 비롯하여 금속 불구류를 지속적으로 헌납했던 것이다.

현재 이종욱이 황민화 정책에 부응하고 대동화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종용했던 친일 논설이 10여 편 이상 남아 있다. 1943년 8월 〈불교시보〉에 발표했던 ‘징병제실시에 대하야 검선일여(劍禪一如)에 투철을 바라노라’는 글도 그 중의 하나다.

사람이 그만한 힘과 그만한 책무를 가지고도 그것을 발휘할 기연(機緣)이 없어 초목과 더불어 덧없이 사라지고 만 일이 많이 있었다. 이제 우리 반도는 징병제실시로 황민 최고의 책무를 봉답완수(奉答完遂)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어찌 반도 청년 당사자인 청장년들만의 영예리오. 반도 노유는 물론 제불보살과 반도 산하가 다 함께 기꺼워하고 동시에 감읍하여 마지않는 일이다.

그러나 결코 감격 감읍에만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상응할 심신의 견고한 태도로 정의의 총검을 다투어 잡아야 한다. ……그리고 불교는 자비를 주지(主旨)로 삼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비는 검과 통하는 것이다. 이 전통과 검의 자비심을 가지고 7천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군문(勇躍軍門)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의를 다 하여야 할 것이다.

1944년 12월 7일에는 태고사에서 대조봉대(大詔奉戴)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총력연맹 임원들과 고위 관리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태평양전쟁 전몰장병 위령법요를 봉행할 정도로 총독부의 의도에 부합했던 것이다.
1930년대 이후 31본사의 대표로서 종단 행정수반인 이종욱의 이런 친일 행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잠깐 위기를 맞이했다. 일제하의 교단 집행부가 사직하고 새로운 과도체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도체제는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맡았다. 친일 행적이 없거나 비교적 친일 행적이 적은 인물들로 구성된 이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22∼23일 이틀 동안 태고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일제 사찰령 부정의 천명, 집행부 선출, 교헌 제정의 방향, 교구제 실시, 광복사업 동참 등이 결정됐다.15)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종욱은 부일협력자 제1호로 지목돼 승권 정지 3년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31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위원장 김동진)’의 강원도 대표가 됐으며, 다음 해인 1946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회장 이시영) 총무부장으로, 1947년 1월에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으로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돼 활동했으며, 동국학원 이사장으로도 취임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에서 일제의 손발이 되어 동족을 탄압했던 많은 사람들이 해방 이후 자신의 전력을 감추거나 오히려 독립투사가 되어 정계에 진출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종욱의 행적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반민족연구소에 따르면 친일 전력자의 상당수가 대한민국 국회로 진출했으며, 친일자들이 차지한 의석은 제헌국회에서 10명, 1958년 제4대 국회에서는 26명으로 정원 233명의 11.2%가 친일 권력자였다. 심지어는 독립유공자를 뽑는 심사위원회에 골수 친일파가 있을 정도로 해방 후 친일 문제에 대한 규명 작업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16)

결국 강정구의 지적처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반공, 건국 초기의 능률성, 인재 부족, 반민족분열주의 등의 논리를 앞세워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이라는 민족적 과제는 완전히 외면했다.17) 특히 1949년 1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검거를 시작으로 친일파를 척결하려 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마저 6개월만에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오히려 이들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씌워준 꼴이 돼버렸던 것이다

6. 이종욱에 대한 옹호 논리와 그 문제점

지난 3월 친일반민족 행위자 708인의 명단이 발표되면서 일부 교계 언론에서나 관계 기관에서는 “임혜봉 스님의 친일관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특정인의 논지만을 기정 사실화한 광복회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주간불교 4월 11일자 1·2면)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임해봉의 친일 주장은 확실히 자료 제시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다소 감정적인 평가까지 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임혜봉의 논리만을 근거로 이종욱 등을 친일파로 선정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찾아내고 제시한 친일 자료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리고 사실이라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종욱의 30∼40년대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민족주의자였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강석주·박경훈과 지암문도회에 이어 김창수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서 1945년 민족해방의 날까지 줄기차게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독립정신의 화신(化身)의 한 명으로 이종욱을 꼽았다.18)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다분히 심정적인 차원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지난 97년 8월 국가보훈처에서는 이종욱의 행적에 공적흠결혐의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이에 관한 의견서를 조계종 교육원에 보내왔다. 교육원은 이에 대한 회신을 보내는 동시에 98년 3월 《독립유공자 지암 이종욱 스님 조사보고서 자료집》을 펴냈다. 이종욱의 항일행적과 월정사 종무활동, 중앙종무활동, 일제협력활동 문제 등에 대해 자체적인 조사를 한 후 국가보훈처에 보고서를 보냈다. 조계종 교육원은 다음과 같이 해명을 하고 있다.

첫째, 30년대 이후 보이지 않게 독립운동을 한 것에 대한 문헌 근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를 인정하는 증언자들이 있다.

둘째, 당시 일제 행사 참석 및 협력 배경에는 조선불교의 전통 수호와 불교도의 염원이었던 종단 재건의 대서원이 있었다.

셋째, 불가피한 친일 혐의를 받고 있지만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친일 활동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단 1회 친일 강연에 참여한 것 제외, 친일 글은 방한암이 그랬듯이 대필했을 것임).

넷째, 1937년 2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발간된 〈불교〉 〈불교시보〉에서 이종욱과 관련된 340건 중 종단 관련 활동이 전체 71%인 242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친일 행사 참여 등 친일 관련 기록은 22%인 76건에 불과했다.

다섯째, 총독부 출입건을 집계한 결과 전체 43건 중 친일 행사 협의를 위한 7건보다 종무(총본산협의)를 위해 출입한 것이 23회로 훨씬 많으므로 이는 종무활동을 최우선시 했음을 알 수 있다.19)

이밖에 1950년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것과 1951년 조계종 총무원장 및 동국학원 이사장에 다시 취임했다는 점을 들어 국민과 불교계로부터 검증받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방 이후 친일파로 국회의원을 비롯한 행정부 고위간부를 지낸 이들이 수없이 많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검증받았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먼저 앞의 첫번째 주장부터 살펴보자. 교육원 스스로 밝히고 있듯 문헌적인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기억에 의존하는 구술은 사료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반면에 친일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30년대부터 해방 이전까지 수십 건에 이른다. 버젓이 있는 자료를 부정하고 구술에만 의존한다면 어느 누가 이를 공감하겠는가.

특히 일부 증언자가 있는 것과는 반대로 해방 직후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서 부일협력자 1호로 지목되고 3년간의 승권정지를 당했다는 것은 당시 대다수 스님들이 이종욱의 친일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전국승려대회를 주관한 조선불교혁신준비위에는 위원장 김법린을 비롯해 유엽·오시권·정두석·박윤진·김적음·최범술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불교계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으며, 고문에는 송만공·송만암·설석우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일부의 주장처럼 이들 대다수가 진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종단 재건과 항일이 아니라 친일이라는 사실이 명백한 것이다.일제하 친일 관련 인물들과의 관계가 해방 후까지 이어지는 점도 과연 이종욱이 일제 말기에 항일의식이 있었던가를 의심케 한다. 예를 들어 권상로의 경우 뛰어난 학승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독립에 대한 의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수많은 강연회와 논문·저술을 통해 황도불교를 주창했고, 스님들까지도 전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던 인물이다.

이런 권상로와 이종욱이 친일강연회에서 함께 하는 모습이 〈신불교〉 〈불교시보〉 등 곳곳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권상로의 이런 활동이 불교계 추천 강사라는 직분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일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권상로의 활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면(이 부분도 사실 납득하기 어렵지만) 해방 후에는 그를 멀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 일제의 앞잡이를 곱게 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8년 권상로와 공동으로 《고려보조국사법어》를 펴내기도 했으며, 특히 여러 우여곡절이 있지만 아무튼 이종욱이 동국학원 이사장을 지내는 시기에 김동화의 뒤를 이어 권상로가 동국대 초대 총장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권상로의 학적 권위와 불교계에서 차지하였던 지도력이 무언의 도움이 되어 재단측과의 유대도 더 긴밀해졌음”20)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이종욱의 의식에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의 ‘어디까지나 조선불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은 전반적인 일제하의 상황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김광식의 주장처럼 조계종 창종은 주체적인 종단 건설의 완성, 불교계 구성원들의 일체감 조성, 종지·종풍·신앙의 정비, 학문적 심화에 영향, 불교 대중화의 기반 마련21) 등 다소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분명 일제치하였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잃어갔으며, 농민 80%가 소작농으로 전락해 당장 한 끼 식사를 위해서라면 어떤 중노동도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1940년부터 강제적으로 시행된 공출은 일반 서민 가정에서 놋숟가락 하나 찾아보기 힘들도록 만들었고, 조밥 등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특히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던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국민징용령’을 공포하는 한편 ‘노무동원계획’에 따른 조직적인 인력 동원이 자행됐다. 그 결과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 송출 등 징용 인원이 총 751만 6,234명에 이르렀으며, 이중 612만 6,163명은 일본 내 탄광, 광산촌 등과 남방 각지로 끌려갔던 것으로 밝혀졌다.22)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끌려간 종군 위안부도 10∼20만에 이르고 있으며, 이중 80%가 조선 여성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마디로 일제는 조선을 거대한 군수기지로 간주했으며, 조선인을 군수품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1940년부터는 창씨개명을 강요해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했으며, 1938년부터는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어를 상용케 했다. 우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서들을 불태웠으며,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해 한국사를 조직적으로 왜곡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런 일제가 왜 유독 조계종은 인정했던 것일까. 불교라는 전통문화를 이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일본의 침략정책을 위한 효율적인 불교계 장악으로 총본산을 이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제의 요구대로 불교계에서 엄청난 양의 돈과 물품을 제공했으며, ‘성불(成佛)은 전승(戰勝)이다’ ‘계(戒)는 전투훈(戰鬪訓)이다’ ‘지계는 국방이다’ 등 전쟁을 위한 이념적인 논리와 합리화를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천황을 위해 기꺼이 전쟁터에 나갈 것과 우리의 성과 이름을 바꾸고 그들의 성과 이름을 쓰도록 종용했다.

또 1942년 5월 종무총장 이종욱은 일본어 상용을 종용하는 일제의 정책에 호응해 ‘국어(일본어) 전해(全解) 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에 발송했다. 이 때문에 처음 조선불교를 통제할 수 있는 불교기관이 필요했음을 강조했던 한용운은 총본산의 설립이 총독부의 불교계 통제기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불교계측이 오히려 총독부로부터 총본산을 인가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강하게 비판한다.

총본산을 최선의 방법으로 운용하여 조선불교를 빛내게 한다면, 후대 아손(兒孫)에게 예찬을 받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조선불교 통제기관을 악용하여 1500년의 찬연한 역사를 가진 조선불교에 오점을 찍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 중생에게 얼마만한 불행을 주는 것일까. …… (총본산의) 소위 법적 구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법령적으로 행정 당국의 인가를 얻는다는 의미인데, 총본산이 주식회사나 재단법인 같은 것이 아닌 이상, 법적 구성을 기다린다는 것은 실로 불가해의 이론이다. ……일부러 없는 법령을 제정케 하여서 스스로 구속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무슨 심리일까. ……그렇다면 총본산을 창설하는 것이 조선불교의 행이라고 하느니보다 도리어 불행이 되지 아니할까. 조선불교도는 각성하라.23)

일제하 조선불교가 한용운의 우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불교라는 전통을 위해 또 다른 전통과 문화를 버렸다면 누가 이를 긍정하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죽어 가는 현실을 외면한 불교가 정말 불교인가. 승려들이 일제의 야욕을 위한 전쟁에 총칼을 들고 나가고 5대에 이르는 전투기를 비롯 심지어 불상과 범종을 바쳐야 했던 것도 ‘조선불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조선불교계의 모든 행정을 총 책임졌던 종무총장의 행위에 대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민중을 외면하고 시대를 몰각한 단순한 ‘불교 지상주의’일 뿐이다.

세번째는 ‘불가피한 친일 혐의를 받고 있지만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친일활동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부분이다. 이는 친일 ‘혐의’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자료들과 행적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다만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친일 논설 상당수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대필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즉 국방자재 헌납운동에 적극 참여하라는 〈전첩의 춘〉(1942. 5월), 태평양전쟁에 나갈 것을 역설했던 〈개병주의(皆兵主義)〉(1942. 12월), 종도들이 황국신민화 선도에 전력하라는 〈연두감(年頭感)〉(1943. 1월·1944. 1월) 등 친일로 일관된 수편의 글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논리다. 한마디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고 해도 이는 전적으로 이종욱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글을 신문이나 특정 행사의 축사로 발표했다고 하자. 그가 직접 쓰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대통령의 글로, 그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글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이 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종무총장이라면 그가 직접 쓰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읽어보았을 것이며, 대필자가 이종욱의 뜻과 다른 글을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에 걸쳐 기고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책임회피를 위한 궁색한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모습은 초대종정이었던 방한암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아국충의장병(我國忠義將兵)을 위하야 수구감회(數句感懷)를 제송(提頌)하려 합니다. 천황폐하 솔사하(率士下)에 뉘 신자(臣子) 아니며 뉘 진충(盡忠)치 아니하리요만은 특히 만리새외(萬里塞外)에 성전완수를 목표하야 분전매진(奮戰邁進)하는 아국의 장병이야말로 참으로 참다운 신도실천(臣道實踐)이며 참다운 진충보국(盡忠報國)하는 신자(臣子)라 할 것입니다. 추호의 허위사왜(虛僞邪歪)가 없이 오직 국조가 만대에 융창하기를 서맹(誓盟)한 일편단성(一片丹誠)서 육해공계(陸海空界)에 긍(亘)하야 탄우(彈雨)를 무릅쓰고 신명을 받쳐 영세(永世)에 진호국가(鎭護國家)의 군신(軍神)으로 화(化)하심은 실로 감격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24)

이러한 글을 당대의 최고 선지식이었던 방한암이 썼을 리는 만무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령 몇몇 학자들의 주장처럼 허영호가 썼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허영호가 짊어져야 하는가. 오대산 산속에만 있던 한암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일까. 치열한 수행과 독립운동을 했던 종정과 종무총장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글이라 믿었을 것이며, 그 뜻에 따라 전쟁터로 나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실제 권상로의 글에는 설봉산 귀주사와 내금강 장안사를 비롯 이종욱이 주지로 있던 오대산 월정사 청년 승려 40∼50명이 지원병에 참여한 일을 찬양하고 있다.25)

또 혜화전문학교에 재학중이던 스님 23명이 조계종 태고사의 장행회(壯行會) 행사와 함께 지원병으로 출전하고 있는 모습도 나타난다.26) 출가 스님들까지 이러한데 당시 이들의 영향으로 출전한 재가불자들은 더욱 많을 것이라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누가 그 글을 썼건 간에 이들의 목숨을 누가, 또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결국 아무도 없다. 다만 친필이 아니라는 변명으로 그리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식의 공허한 논리만 거듭할 뿐이다.

네번째는 불교 기관지에 이종욱과 관련해 친일보다는 종무 관련 기록이 많다는 것과 총독부 출입의 명목 또한 친일행사 협의보다 종무행정과 관련한 것이 훨씬 많다는 기록에 대한 주장이다. 조계종 교육원의 보고서는 이를 통해 “이종욱의 행적은 총본산 건설 등 당면 조선불교 현안문제 해결에 헌신하면서 총본산의 합법적인 인가와 종무활동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협력하는 모양을 갖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른 판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7)

그러나 이는 논리의 비약을 넘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아무리 친일 성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불교 기관지에 불교 관련 기사가 더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며, 이 통계의 정확성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 해도 친일 관련 기록 76건(22%)과, 친일 관련 협의를 위해 총독부를 출입했던 7건(16.3%)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수차에 걸친 친일 기사와 총독부 출입이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이며, 이것은 곧 종무행정과 친일 행사가 서로 연결돼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지암 이종욱 연구》(동국대 불교대학원, 2000)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박희승은 지난 해 봄 이종욱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소개했다.28) 그에 따르면 2000년 11월 25일 발견한 〈초혼문〉은 1962년 7월 15일 백중을 맞아 주문진 동명사에서 이종욱이 백중 천도재 및 위국선열지사 천도재에서 봉독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내용에는 안창호 및 김가진 등과 항일 운동을 회상했던 일들이 언급돼 있으며, 특히 관심을 모으는 것은 백범 김구에 대한 회상 부분이다.

오호애재라 백범선생님이시여 해방되던 그 이듬해에 정월 2일에 이시영선생과 소납(笑納)을 자동차를 태워가지고 진관사에 가서 하시는 말삼 가운데 아(我)가 해외망명할 때에 원종(圓宗)이 종대사(宗大師)로 이 절 상판(上板)에서 49일간을 객승놀읏을 하였노라구 하시든 것이 기억에 남어 있슴이다.29)

또 ‘대동단 활동의 동기’는 “1965년 6월 28일 전진선(全眞善) 군 부탁으로 기록한 것”으로 1923년 3·1운동 직후 조직된 대동단지도부와 관련한 회고록이다. 이 자료를 소개한 박희승은 이에 대한 역사적 의의로 “이종욱이 해방 직후 비타협적인 항일 민족주의자였던 백범 김구와 교류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종욱에 대한 항일과 친일 행적 평가에서 좀더 객관적인 인식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해방 17년이 지난 이후 이종욱의 투철한 항일 민족의식과 국가관의 일단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30)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박희승의 거창한 평가와는 달리 이 내용을 보면 백범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지 김어수가 〈불교신문〉(1984. 8. 1)에 기고한 칼럼에서 “김구 선생이 귀국하여 찾은 사람이 이종욱 스님이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없었다”고 회고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만났다’는 것과 ‘임시정부를 도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사실이다. 한 사람이 16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구술한 내용이 얼마나 ‘신뢰성 있는 사료’인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백범과 관련된 어떤 기록이나 행적에서도 이종욱과의 만남을 찾아볼 수 없다.

이같은 사실은 불교계 잡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1946년 3월 출간된 종단 기관지인 《신생》 창간호에는 백범이 김법린을 만나 대화한 내용들이 수록돼 있다. 이 내용에는 백용성과 한용운이 해방 이전에 운명을 달리한 부분에 대해 애석해 하고 특히 한용운의 애국에 깊이 감동하고 있을 뿐 이종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0∼40년대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고, 그것으로 인해 정말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다면 불교계를 찾아 그 동안 노고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는 첫 자리에서 이종욱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 있을까. 이는 곧 김구가 이종욱을 정말 만났다고 해도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면식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이 자료를 통해 이종욱의 투철한 항일민족의식과 국가관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광식의 지적처럼 “이 부분을 확대 해석하여 1935년 이후 조계종단 창립의 당시와 일제 말까지의 그의 행적과 간단하게 연결시킴은 유의할 일이다. ……현실인식, 항일의식 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동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31)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처음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변절한 최남선, 최린, 이광수 등도 비판받아야 할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다. 즉 박희승 식의 논리를 거꾸로 적용한다면 이종욱의 30∼40년대 친일행적으로 볼 때 20년대 독립운동은 위선이었다는 주장도 가능한 것이다.

7. 이제라도 참회해야 한다

지난 2000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11세기의 십자군 전쟁·13세기의 종교재판 등과 관련한 가톨릭의 실수 등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겸허하게 용서를 구한다고 참회의 뜻을 밝혔다. 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도 같은 해 12월 천주교 도입과정에서부터 박해 시대와 일제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사회적으로 책임을 소홀히 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점을 참회하고, 새 천년에는 구원의 징표로 거듭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특히 일제 시대 교회의 친일행각을 인정하고 겨레 앞에 용서를 구했으며, 전국 각 교구와 본당에서는 참회예배를 가졌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라면 가톨릭의 역사에 대해서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했던 데에 대한 희망과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불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참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참회가 있어야 서원이 가능하고, 서원이 있어야 깨달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이종욱을 비롯한 일제 시대 불교계와 관련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반성의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으며, 시종일관 변명과 정당화를 반복할 뿐이다.

알다시피 이종욱은 구한말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누구 못지 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야 했다. 그 안에서 ‘독립’과 ‘친일’의 얼굴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친일파’ 이종욱이 아니라 이종욱의 ‘친일’이다. 그의 항일이 일제치하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면, 반대로 그의 친일은 수많은 민중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죽음으로 내몰았음도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종욱이 만약 속으로는 계속 항일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무총장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있었던 그의 ‘겉 친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이는 곧 그들의 희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종욱의 친일이 무엇보다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 일이 역사의 기준점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조계종은 소위 ‘정화’를 비롯해 숱한 종단분규 등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보다는 승자 위주의 일방적인 평가와 미화작업이 이루어져 왔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즉 대의를 위해서라면 과정은 어떠해도 괜찮다는 식의 논리였으며, 이로 인해 불교의 자주화 상실·불교 정신과 가치관의 희석화·승려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정말 불교적인 일이었고 불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친일 행적이 분명한 이종욱을 선각자·민족주의자로만 평가하는 것은 그 당시 암울한 일제하에서 평생 그 뜻을 굽히지 않고 투쟁했던 지사들에 대한 배반이고, 오늘날 다시 자행되는 역사 왜곡인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역사의 진실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이로 인해 특정 개인과 단체의 도덕성에 더욱 금이 갈 수 있다는 점과 지금 이 시대의 평가들이 훗날 역사의 심판대에 다시 오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이재형
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수료. 현재 <법보신문>학술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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