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상좌부 불교의 이해

1.용어의 정리

한국 불교 1600년의 역사에서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지극히 일천하다 할 수 있다.

상좌부 불교와 관련이 있는 언어인 파알리어에 대한 연구와 또 차자(借字)를 통하여 파알리 발음으로 기록된 경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최근이라 할 수 있다.1)

논자는 작금의 한국 불교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몇몇 테마들에 관한 연구물들을 접할 때 그 테마들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에서 심한 혼돈을 느낀다. 각자 나름대로 충분히 연구 검토하고 스스로 타당하다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면이 있어 ‘불교’라는 말로 끝나는 복합어들 중에 혼돈을 줄 수 있는 몇몇 용어들에 대해 일차적으로 간단히 정리를 하고자 한다.

한국어에서 복합어의 생성 과정을 보면 서술 방법의 특징 중의 하나는 a쭻b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a쭻b의 형태란 우리(a) 나라(b), 백두(a) 산(b), 고등(a) 학교(b)처럼 수식어가 앞으로 가고 수식을 당하는 말이 뒤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근거로 할 때 ‘불교’라는 말로 끝나는 복합어들 중에 혼돈을 주는 단어들로는 ‘원시 불교’ ‘근본 불교’ ‘초기 불교’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소승 불교’ 등을 들 수 있다. 중국쭻불교, 한국쭻불교처럼 각국의 이름이나 지명이 앞으로 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앞의 경우처럼 심각한 문제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1) 원시 불교와 근본 불교
일반적으로 원시 불교란 초기 인도 불교를 가리킨다. 시기적으로는 석가모니 붓다가 정각을 득하고 전도생활을 하다가 열반에 든 후부터 처음으로 부파가 분열한 때까지의 약 200년 내지 300년간을 의미하는 것으로,2) 붓다의 시기부터 아쇼카 왕의 시절까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이 하쿠쥬(宇井伯壽)는 석가모니 붓다에게 직접 출가하였던 스님들의 시절까지를 포함하여 이를 근본 불교라 하였다.3)

그러나 문제는 원시 불교이건 근본 불교이건 그 시절을 바로 알려줄 수 있는 원천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원시 불교가 지녔을 내용을 가능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시 불교 시대 이후에 전개된 각 부파들의 공통된 내용들을 가지고 원시 불교 시대의 가르침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내용에 있어 엄밀함을 요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초기 불교를 포함하여, 원시 불교와 근본 불교에 대해 크게 차이를 둘 필요는 없다.

2) 상좌부 불교,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Therava?a Buddhism)는 장로(長老) 또는 상좌(上座)들의 불교라는 뜻이기 때문에 장로 불교라고도 한다. 상좌부 불교는 불교의 온전한 한 부파(部派)로 스리랑카를 위시한 몇몇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있으나,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는 지역적으로 어느 특정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없으며 나아가 불교의 한 부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부 불교의 경우처럼 불교의 한 부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부파의 승단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조문(條文)인 바라제목차(Pa?imokkha)가 있어야 하지만,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는 별도의 특정한 바라제목차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는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라는 용어가 어떤 불교적 흐름을 나타내는 어휘로는 사용될 수 있으나 특정 부파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증거이다.4)

특히 소승, 즉 작은 수레(Small Va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히나야나(H沖naya?a)나 대승, 즉 큰 수레(Great Ve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마하야나(Maha?a?a)는 상좌부 불교의 파알리 문헌은 물론 그 주석서 또는 《도사(島史, D沖pavam.sa)》나 《대사(大史, Maha?am.sa)》 같은 불교 역사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는 대승이나 소승이란 말이 적어도 파알리 불전 이후에 시작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소승 불교와 상좌부 불교를 혼용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다.5)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어의 복합어 생성 과정에서 볼 때 소승 불교라는 말이 소승(a)쭻불교(b)라는 형태, 즉 어떠한 경우에라도 불교의 한 부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동안 소승 불교를 폄하한 이들에게는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비수행자적인 행동을 마구 일삼았던 일부 대승 지상주의자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비법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대승이므로 괜찮다는 식으로 합리화하였다.

그리고 소승 불교가 확실히 불교의 한 부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동조해 주지 않는 것을 소승이라는 말로 폄하하고 홀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즉 소승 불교가 지극히 잘못된 것처럼 비논리적 방법으로 해석한 흔적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의 이러한 몰이해는 대승 불교만이 진정한 불교이며 소승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처럼 인식하게 하였다.

소승 불교 역시 붓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소승 불교를 폄하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했던 것이 사실이며, 나아가서 이것이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모독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별 저항 없이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설사 소승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궁극적인 뜻에서 나쁘게 표현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역사

1)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
붓다 입멸 이후 인도에서는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는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했고, 하란캬·싸이슈나가·난다의 뒤를 이어 나타난 마우리야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 나갔다. 기원전 4세기경 페르시아를 멸하고 인도에 침입해 펀잡 지방을 점령했던 알렉산더가 죽자 인도에서는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에 자극 받아 국민의 자주 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이때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군대를 내몰고 펀잡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야(B.C.324∼297)는 난다 왕조의 계보에 속했었으나 그의 어머니 무라 데위의 이름에서 공작(孔雀)이라는 뜻을 지닌 마우리야(Mauriya)를 국호로 택했다.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국도 정복했으며 기원전 322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찬드라굽타는 인도의 마키야벨리라는 신하 까우띨리야의 보필에 힘입어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마우리야 왕조가 인도 대륙을 통일한 것은 아리안의 도래 이후 선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들과 아리안들의 갈등에서 아리안들의 완전한 승리와 외세에 대한 인도인의 독립을 뜻하고, 이를 계기로 아리안들이 완전히 인도 대륙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 왕(B.C.273∼232)은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아쇼카 왕은 남부 타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북쪽으로는 카시미르·네팔, 동쪽으로는 칼링가까지 정복하는 등 마우리야 왕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아쇼카 왕은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했다. 기원전 261년 칼링가 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전쟁의 잔인함을 직접 경험하게 되어 정복전쟁 포기 선언을 했다. 이로서 아쇼카 왕은 이민족이나 다른 국가를 공격할 만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롭게 지낼 것을 자발적으로 선언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6)

집권 초기에 자이나교 신자였던 왕은 불교에 귀의해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인도 역사상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최초의 왕이 되었다. 왕은 자신이 신앙하는 진리를 국민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 법칙을 발표해 암벽이나 석주에 새겨 놓았다.

법칙의 내용은 깊은 사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살생 금지, 수렵 폐지 같은 국민에 대한 도덕적 훈계들이었으며, 특히 법대관(法大官)을 설치해 종교적으로 평등정책을 펼쳐서 불교뿐만 아니라 브라만교·자이나교·아지비카 등 다른 종교들도 동시에 보호하였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한 중요한 치적으로는 불전의 제3차 결집과 전도사의 파견을 들 수 있다. 제3차 결집의 내용에 대해서는 파알리어로 기록된 남전의 자료들과 한문으로 기록된 북전의 자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남전으로 전하는 불전의 제3차 결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쇼카 왕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승가에 6만의 외도가 들어와 7년씩이나 포살을 하지 않는 등 불교 교단이 크게 타락하자, 아쇼카 왕이 이런 혼란을 막고자 아호강가에서 목갈리풋타티사를 초청해 분별설 이외의 비정통들을 모두 교단에서 추방하고 천 명의 아라한을 모아 《논사(論事, Katha?atthu)》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북전에는 근본분열을 대천(大天, Maha?eva)과 관련된 승가의 논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된 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 세계화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된 전도사의 파견이다. 아쇼카 왕은 외국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작업을 한 최초의 왕이었다.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해당 지역의 전설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기록에 의한 것이든 남방 상좌부 불교가 성립되는 최초의 사건들은 이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과 관련이 있다. 전도사의 파견은 아홉 차례에 걸쳐 있었다. 여덟번째는 미얀마, 아홉번째는 스리랑카와 관련이 있다.

여덟번째로 파견된 소나 스님은 웃따라 스님과 함께 ‘황금의 땅’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저지 미얀마인 수완나부미에 갔다. 당시 미얀마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궁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바다에 있는 공포의 여신이 죽였다. 그들이 저지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저들은 공포의 여신의 친구들 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죽이기 위해 무장을 하고 왔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그 여신의 친구가 아니고 불법을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입니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이 함께 말했다. 그때 바다에서 공포의 여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스님은 그 여신과 부하들의 두 배가 되는 수의 신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 나라는 필시 이 사람들의 소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하늘로 날라 갔다. 스님들은 그 자리에 성을 만들고 《범망경(梵網經, Brahmaja?a sutta)》을 설했다.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하였다. 육만 명이 불법을 믿기 시작했고 삼천오백 명에 달하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야의 아들과 천오백 명의 딸들이 출가하였다.7)

2)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의 역사
아쇼카 왕이 아홉 번째로 전도사를 파견한 곳이 스리랑카이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주로 전설에 기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접근하는 것이다. 전설에 기초하는 스리랑카의 불교는 그 섬의 주인으로서 싱할라(Sinhala, 사자의 후예라는 뜻)족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 지향적인 생각이다. 이에 대한 내용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나, 《소사(小史)》나 《대사(大史)》 같은 역사서들에서 전하는 스리랑카의 개국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탐바파니(Tambapan.n.i, 銅常島라 번역되며 항상 보물이 있다는 뜻)라고 불리던 곳에 싱할라들이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543년이다. 이 기원전 543년이 전설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그 연도를 남방 불교국가에서 주장하는 석가모니 붓다의 입멸 연대와 같은 해로 함으로써 싱할라 자신들이 붓다의 후예라는 사실을 내외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즉 스리랑카의 조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스리위자야가 일단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인도로부터 스리랑카 섬으로 건너감으로써 시작되는 스리랑카의 역사가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한 해와 일치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스리랑카 인들에게 아주 강하게 각인되어 정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정체성을 찾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은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은 마히앙가나·켈레니아·스리파다라고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의 일생을 볼 때 스리랑카를 방문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하지만 이 주장을 통하여 싱할라들은 석가모니 붓다가 특별히 자신들에 대해 친근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음은 역사서에 입각한 정통 불교 교리 발달 및 불교 전래의 입장이다. 아쇼카 왕이 스리랑카에 파송한 전도사는 마힌다 장로이다. 그는 아쇼카 왕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4명의 비구·우바새와 함께 스리랑카의 최초의 수도이고 2600년 고도인 아누라다푸라에서 약 13Km 떨어진 산정상의 조그만 석굴에서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후에 마힌다 장로를 받아들인 곳이라는 의미의 미힌탈레(Mihintale)라고 이름지어졌다.

당시 축제기를 맞이해 그곳으로 사냥을 나왔던 스리랑카의 왕 데와남피야 티싸는 숲속에서 수행하는 이들을 보고는 사냥을 포기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게 되니, 이 날이 포손 포야(Poson Poya)인 양력 유월의 만월일(滿月日), 즉 음력 5월 15일이다. 마힌다 장로 일행을 맞아들인 데와남피야 티싸는 아누라다푸라에 마하위하라(Maha?ihara, 大寺)를 지어 수행 장소로 제공하고 포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으며 동시에 많은 이들을 귀의시키니,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다.

이듬해 마힌다 장로의 누이인 상가미타 비구니가 인도의 붓다가야에서 보리수 나무를 가지고 와서 아누라다푸라에 심으니 그 보리수 나무는 살아있는 붓다로서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힌다 스님의 도래에서 비구 승단이 시작되었으며 상가미타 비구니의 도래에서 비구니 승단이 시작되니 명실공히 제 모습을 갖춘 승단의 활동이 스리랑카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순조롭게 시작된 스리랑카 불교는 토착화에도 성공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ara, 無畏山寺)의 스님들이 왕이 자신들을 총애하는 것을 기회로 그 동안의 스리랑카 불교를 이끌어 왔던 대사파(大寺派)와 다른 방법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정법이 아닌 비법적인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별도의 부파가 발생하자 이런 상황을 염려했던 대사파의 스님들이 기원전 1세기에 구전되던 불전의 문자화를 통하여 교의의 왜곡을 방지하고자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알루위하라(Aluviha?a, 새 절이라는 뜻)에서 종려나무 잎에 파알리 경·율·논 삼장을 문자로 새겼다. 이것이 현존 상좌부 불교의 소의 경전인 파알리 삼장의 완성이다. 이는 당시의 왕이었던 왓타가마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승단의 의지와 일부 재가자들의 보시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인도로부터 넘어온 독자부(犢子部) 계통의 담마루치 장로는 무외산사에서 불법을 폈으며 이들에 대해 대사파는 상좌부의 분별설부(分別說部)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스리랑카 불교의 정통 맥을 이어왔다. 서기 3세기 인도에서 건너온 또 다른 계파인 대승계통의 방광파(方廣派)의 스님들이 다시 무외산으로 들어와서 머물다가 일부가 그곳을 떠나 다른 파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기타림사파라고 한다. 기타림사파가 완성된 것은 4세기 초이며,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대사파·무외산사파·기타림사파의 세 개의 파로 나뉘어진다.

그 후 지속적으로 대사파와 무외산사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8세기 전반 인도로부터 대승 불교 특히 밀교가 전래되기도 하였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였다. 굽타 왕조가 쇠퇴하면서 다시 세력을 구축한 드라비다인의 촐라 왕조는 지속적으로 스리랑카를 침입하였고, 이 침입으로 고도 아누라다푸라는 폐허가 되고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겼다. 이때는 스리랑카 내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불교의 발전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런 혼란 때문에 승단 역시 쇠퇴하였다.

하지만 남인도의 촐라인들을 격퇴한 위자야바후 1세(1059∼1113)는 11세기 말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스님을 초빙하여 스리랑카의 승단을 부흥시켰다.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는 대사파·무외산사파·기타림사파의 타락한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대사파를 정통으로 삼았으며 승단이 대사파의 계율을 따르게 했다. 이로 인해 무외산사파와 기타림사파는 부정되고 그 세력을 잃었으며, 10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계파간의 갈등은 완전히 끝이 나고 현재의 정통 상좌부 불교로의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말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는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에 의해 전해졌던 모습 그대로라고 하기에는 다소간의 무리가 있다. 중간에 무외산사파나 기타림사파 스님들에 의해 비법이 자행된 경우가 많으며 그런 것들을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방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은 정통 상좌부 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3)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역사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역사도 그렇지만 미얀마에 불교가 전래된 것 역시 실증적인 면과 전설에 의지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9세기에 석가모니 붓다의 종족인 석가족의 아비라자가 석가족의 근거지였던 카필라바스투에서 미얀마로 건너와 미얀마 최초의 국가인 타가웅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 후 고타마 싯다르타가 득도하여 석가모니 붓다가 된 후 미얀마의 레가인, 슈세트, 프롬 등의 지역을 돌며 설법하였다고 한다.8)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에 인도 이외의 나라를 방문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전설은 스리랑카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얀마인들에게도 석가모니 붓다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심어 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교가 전승되어 올 수 있는 것은 물론, 인도에서 굽타 왕조 이후 힌두교의 부흥으로 인하여 불교와 사원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아주 긴 기간 동안 미얀마의 왕실이 인도에 있는 사원과 승단을 위하여 각종 물질적인 것들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버마족의 영웅 아노라타 왕(1044∼1077)이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미얀마는 스리랑카와 유사하게 대승 불교는 물론 밀교까지 들어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노라타 왕은 통일을 이룬 후 불교 혁신 운동을 펼쳤다. 1057년 아노라타 왕은 몬의 수도 타톤을 공격하는 데 타톤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는 바른 승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타톤을 정복하여 몬의 왕이었던 마누하까지 포로로 삼았던 아노라타 왕은 몬의 고승이자 아라한과를 증득했던 싱의 협력을 받아 파알리어 삼장은 물론 주석서들을 파간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라한 싱을 따르던 500여 스님들도 파간으로 받아들여 파알리어 삼장을 중심으로 불교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파간 왕조 시대에 뿌리를 내린 미얀마 상좌부 불교는 그 주변 특히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와 빈번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힌두 중심의 촐라인들을 내몰고 불교를 부흥시켜 상좌부 불교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위자야바후 1세(1059∼1113)의 스리랑카와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때 미얀마에서는 파알리 삼장은 물론 흰 코끼리 1마리를 기증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붓다의 전골사리(全骨舍利)를 받았다. 1180년 웃다라지와 스님은 직접 스리랑카로 가서 정통 상좌부를 수학하고 미얀마로 돌아왔으며 그는 파간 북부 냐옹유에 스리랑카 양식의 사원을 건립하고 새로운 승단을 설립하였다.

1287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파간 왕조가 멸망한 후 약 2세기 가량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되었다. 이 군웅할거의 시대는 산 족이 중심이 되어 페구와 아바를 각기 수도로 하는 두 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이때 페구를 수도로 하였던 라만야데사의 담마체띠 왕(1472∼1492)은 출가 경력을 지닌 왕으로 ‘붓다라자(Buddharaja, 불교왕)’라 불리웠다. 1475년 담마체띠 왕은 차트라두타와 라마두타 2인의 정부 각료와 목갈라하나, 마하시발리 등 22명의 장로로 구성된 대규모의 파견단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이 당시의 파견단은 불치(佛齒)에 공양할 선물과 미얀마의 왕이 스리랑카의 장로들에게 올리는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 이들은 스리랑카의 켈레니야 강의 선상에서 스리랑카의 망갈라 장로를 전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며, 스리랑카에서 제공하는 불치의 모조품, 보리수 나무의 가지·잎·종자, 스리랑카 불교 정화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 스리랑카 장로들의 편지, 게송 등 많은 선물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특히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의 율법을 가져왔다.

이들이 귀국하자 담마체띠 왕은 도성의 근교에 여법한 도량을 갖추고 미얀마 내의 많은 젊은이들을 득도시켰다. 이 도량의 이름을 ‘켈레니야 도량’이라 하였고, 그 수계작법을 라마냐데사 수계작법이라 하였는데 그 수계작법을 이용하였던 파를 ‘라마냐파(Raman?? Nika?a)’라 하였다. 라마냐파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한 종파로서 지금까지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의 스리랑카에도 라마냐파가 존속하고 있다.

4) 타이 상좌부 불교의 역사
그 기원이 뚜렷치는 않으나 타이의 역사는 수코타이 왕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대승 불교와 힌두교 등 여러 종류의 종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스코타이 왕조는 미얀마의 아노라타 왕이 채택했던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여 상좌부 불교 중심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상좌부 불교가 타이에서 뿌리내린 것은 14세기 후반 라마디파티 1세를 시조로 하여 기존의 수코타이 왕조를 병합한 아유타야 왕조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4백여 년을 유지했던 아유타야 왕조의 시리스리야반살마 왕은 1361년 스리랑카로 사신을 파견해 스리랑카 대사파의 가르침을 이어 받았다. 이때 스리랑카로부터 장로가 될 만한 스님은 물론 파알리어 불전과 스리랑카 불교의 각종 의식 및 예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국교로 삼았다. 이것이 타이의 상좌부 불교의 진정한 효시라 할 수 있다.

특히 1750년 스리랑카에서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비불교화로 인한 승단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과 외부적으로는 스리랑카의 일부를 지배했던 네덜란드와 가톨릭 세력에 의한 탄압으로9) 승단의 법맥이 끊기자 타이의 상좌부 불교 교단의 스님들이 스리랑카로 가서 스리랑카의 법맥을 부활시켰는데, 그 승단의 이름이 당시 타이의 국명이었던 씨얌파(Siyam Nika?a)이었으며 현재 스리랑카 최대의 승단이다.

3. 남방 상좌부 불교의 기복 의식, 피릿

최근 기복 불교를 논하는 과정에서 일부 논자들은 스리랑카를 위시한 남방 상좌부의 불교는 기복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기복적이라 함은 어느 절대적인 것에 의해 신행이 좌우되지 않으며 또 그 신행의 결과 또한 철저히 자주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기복(祈福)은 ‘복을 빔’ 또는 ‘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하는 일’이며 기복과 상대가 되는 말이라 할 수 있는 작복(作福)은 ‘스스로 복을 만든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면 상좌부 불교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남방 상좌부 불교에도 분명 기복적인 요소와 의식이 있다. 일부의 주장대로 상좌부 불교가 기복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상좌부 불교를 수행하는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이미 붓다의 경지를 증득했거나, 그 경지에 가까이 가 있는 이들이 되어 있거나,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법이나 윤리 도덕이 필요없는 지역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권의 국가에도 살인과 도둑질, 간음 등 도덕적 해이는 있으며 여느 일반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회 일반적인 요소 말고 파알리 경전 내부에도 역시 기복적인 요소가 설해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피릿(pirit) 의식이다.10) 피릿은 ‘보호’ ‘안전’ ‘수호’ ‘주문’ ‘부적’ ‘호주(護呪)’ ‘호경(護經)’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파알리어 파릿따(paritta?나 싼스크리트어 파리뜨라(paritra) 또는 파리뜨라아나(paritra?a)가 변한 말이다. 이 의식은 브라만교의 락샤나 만트라(Rakshan.a Mantra)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파알리 경전에서 유일하게 타력적인 방법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석가모니 붓다가 인정한 의식으로 붓다 역시 이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붓다 생존시 인도의 리차비(Licchavi) 족이 살고 있던 베살리 지방에서 질병과 기근이 성하고 많은 사람들이 악령에 시달리고 있을 때, 붓다가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피릿 의식의 경전들을 암송하여 이 지역의 사람들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였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미얀마나 스리랑카에 비하여 덜 성행하는 의식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제사 대신으로 이 의식을 시행하기도 하고 각종 사업을 시작할 때나 먼 여행을 할 때에도 이 의식을 행하고 있다.

피릿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는 파알리 불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으나 다른 의식들에 비해 많이 소개되는 편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상좌부 불교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자력을 통한 궁극적인 삶에 도달하는 것이 우선이어서 이 의식에 관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과,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경우 설사 재가 신도라 하더라도 구과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피릿 의식은 파알리 율장(律藏, Vinaya Pit.aka) 《소품(小品, Culla Vagga)》11)에 ‘개인적인 보호(personal protection)’라는 구절과 율장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n?a)》12)에 ‘만일 수행자가 보호를 위한 주문을 배운다면’이라는 구절로 소개되어 있다. 경장(經藏, Sutta Pit.aka)에서는 《앙굿따라 니까아야(Anguttara Nika?a)》에 ‘보호하는 주문’13)과 ‘쌓임, 즉 온(蘊, Khandha)을 보호하는 주문’, 즉 ‘온호주(蘊護呪)’라는 뜻의 ‘칸드하파릿따(khandhaparitta)’가 나오며 《쿠타카 니까아야(Khuttaka Nika?a)》의 《자타카》에는 ‘주문에 의한 보호’14)와 ‘벽지불을 통하여 그들을 보호하게 한다’15)는 내용이 나온다.

파알리어로 쓰여졌으면서도 5부(五部) 니까아야에는 속하지 않는 《밀린다팡하(Milinda-panha)》에 의하면 ‘사마(死魔)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피릿 의식이 필요하다고 설해져 있다.
이외에도 피릿에 관한 기록은 《위수디막가(Vissudhimagga)》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4. 나오는 말

지금까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남방 상좌부 불교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불교 전통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에서 기원한다. 그만큼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리랑카를 포함한 남방 상좌부 불교가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다르지 않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 또한 수많은 역사적 질곡을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때로는 그들 국가나 불교의 내적인 문제 때문에, 때로는 이슬람이나 서구 제국의 침입같은 외적인 원인 때문에 그 원형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원형의 복구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남방 상좌부 불교 또한 변형과 왜곡 그리고 전통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을 기원해서 성립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강점이다. 한자문화권의 북방 대승 불교보다는 훨씬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운 불교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처음 수용한 원형의 보존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북방 대승 불교보다 훨씬 더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에 기복은 없고 작복만이 있다는 식의 현실을 도외시한 일부 연구자들의 일방적인 옹호론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동시에 단순히 대승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소승이라는 식으로 폄하했던 일방적인 단견도 수정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진정한 대승적 관점을 통해서만이 현대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불교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송위지
한국 외국어 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현재 서울 보건대 교수. 논문으로 <팔리 사티파타나 숫타와 한문 염처경에 대한 비교 연구><존재의 분석으로서의 염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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