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을 시작하며

지난 6월 말 조계종 포교원 주최로 불교학자들의 ‘산사의 만남’이 있었다. ‘불교학의 실사구시’1)에 대하여 토론해 보기 위한 자리였다. 조계종 포교원의 활동 및 정책과 관련하여 건의하고 제안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우리 불교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는 자리이기도 했다.2)

‘불교(학)에 웬 유학의 실사구시일까’라고 생각되겠지만 이 말은 나름대로 우리 불교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에 들어 오늘의 문제의식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유학의 노력은 그다지 사회의 요청에 예민하지 못한 우리 불교학에 대한 하나의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맥락에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식을 담론화하는 데 적극적인 유학의 모습은 아직까지는 답보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지 못한 우리 불교학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유학보다도 더 철두철미하게 이론/학 이전에 실천을 전제하고 그 진리성을 현실에 근거하여 확보하는 불교지만 정작 그 사상을 오늘의 맥락에서 역동적인 힘으로 분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실사구시’의 실용성, 유용성, 혹은 대 사회적 실천의 의미가 되새겨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교의 실용적 특징과 불교학의 실용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런 후에 실용적 불교학에 대한 최근의 주장을 살펴보고 실용적인 불교학을 위해 무엇을 시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불교’라는 가르침의 실용성

불교는 어떤 사상보다도 실사구시적 실용성을 전제한다. 불교는 경험에 근거하고 경험에 호소하는 가르침으로서, 그 가르침의 의미는 그것이 성취하는 실용성에서 완결된다.

현재의 고통(dukkha)에 대한 자각, 자각된 고통에 대한 해결방법의 모색, 그리고 모색된 방법에 따른 고통해소라는 코드로 이해되는 불교의 모든 교설은 실용성을 전제·지향하고 있다. 모든 가르침은 고해(苦海)의 바다를 건너는 땟목 혹은 방편이라는 비유, 고통/증세에 따라 다른 약을 준다는 응병여약의 비유, 그 무엇보다도 독화살을 빼는 것이 시급하다는 독화살의 비유, 가르침의 수용능력 혹은 ‘근기’에 대한 고려 등은 불교의 모든 교설에 전제된 유용성, 도구성, 혹은 실용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모든 교설에 전제된 이와 같은 실용성은 불교의 반절대주의적 혹은 실용주의적 입장에 근거한다.

불교의 연기, 공, 무아의 가르침 자체는 절대적인 진리성을 갖지만 진리인식이나 실천에 있어서는 반실재, 경험성, 가변성, 융통성을 전제하고 상황의존적, 구체적, 개체고려적일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절대주의 입장과는 달리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고정된 실재, 선험성, 불변성, 법칙성 등을 전제하거나 탈상황적, 추상적, 탈개체적이지 않다. 불교의 이와 같은 상황, 구체, 개체를 중요시하는 반절대주의적 입장을 우리는 실용주의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시비를 가리는 것은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맥락에 대한 고려를 요청한다. 그것은 어떠한 행동이나 사건도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는 없으며 특정의 시공간이 전제된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지 모든 것은 ‘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 무관한 사건이나 행동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것이 바로 연기, 공, 무아의 한 의미이며, 불교에서 자비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한 이유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교의 입장을 반절대주의적이라고 하든지 실용주의적이라고 하든지 이것이 ‘선’이나 옳음이 임의적(arbitrary)이라거나 불가지하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다만 ‘선’이나 옳음이 상황/맥락/관계, 구체, 개체를 떠나 있지 않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을 뿐이다. 승가 공동체의 규칙의 제정원칙인 수범수제(隨犯隨制)는 이를 보여 주는 하나의 좋은 예일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반절대주의적/실용주의적 태도는 불교의 방편성이 요구하는 태도로서 불교로 하여금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개념들과 설명방식들, 그리고 다양한 신행형태를 발전시키게 했다고 생각된다. 달/열반을 가리키는 다양한 방식들과 거기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들이 인정된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 유식, 중관, 화엄, 천태, 정토, 선 등의 불교, 염불, 간경, 좌선 등의 수행, 그리고 한국불교, 티베트불교, 중국불교, 태국불교 등 ‘불교’라는 이름 하에 발전되어 온 그 다양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불교의 실용주의적 태도는 불교 이해의 방식과 실천에 있어서 시대, 상황, 근기차 등에 따른 다양성을 인정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교가 다양한 개념들과 다양한 설명방식, 그리고 다양한 실천형태들을 인정하고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자신 안에서 똑같이 존중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사에는 종의를 둘러싼 논쟁은 있을지라도 이단은 없으며, 주류와 비주류는 있을지라도 주류가 비주류를 억압한 경우는 없다. 오히려 불교의 역사는 다양한 불교를 ‘일미(一味)’라는 전제 하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켜 왔다. 서로 다른 근기에 따른 다양한 소리(一音)들이 곳곳에서 동일한 의미의 원음(圓音)으로 존재하듯이, 다양한 개념과 다양한 설명 그리고 다양한 실천형태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기치 아래 똑같이 존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반절대주의적/실용주의적 태도가 허용하는 다양한 개념과 다양한 설명방식, 그리고 다양한 실천형태는 불교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하는 원천이면서도 불교의 이해와 실천에 있어서 어려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상황과 구체적 사실과 무관하게 옳음과 그름이 규정되어 있고, 흑과 백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그리고 정통과 이단이 항상 분명하게 판정되어 있는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불교인은 직면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우리와 다른 불교 해석, 신행, 관습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어려움은 반절대주의적, 실용주의적, 혹은 방편적 관점에서 다양한 형태의 불교 이해, 신행, 관습이 허용·인정·존중되더라도 그것이 무한정 그리될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즉 불교인은 다양한 불교 이해, 신행, 관습을 허용·인정·존중하면서도 그것의 불교성, 즉 ‘그것이 부처님의 참 가르침’인가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다양한 불교 이해와 실천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그것들에 대하여도 불교성을 묻고 검토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성을 묻고 검토해야 하는 어려움은 불교의 실용주의적 태도와 그 가르침의 절대성 사이에 내재된 긴장으로부터 야기되는 예정된 어려움이라고 생각된다. 예컨대 연기, 공, 무아와 같은 가르침의 절대성은 그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불교 이해와 실천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경전들, 다양한 해석들, 다양한 수행법들, 그리고 다양한 불교들이 우리에게 알려진 시대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와 다른 불교 이해, 신행, 관습 등에 대하여 풍부하고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불교는 물론 우리 불교 자체에 대한 불교성 검토라는 문제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몇 해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논의되고 있는 수행법을 둘러싼 논쟁, 선불교에 대한 비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기복불교, 다불다보살, 천도재 등에 대한 찬반논쟁 등도 불교성 검토의 과정에서 발생된 논쟁들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불교의 반절대주의적/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우리는 다양한 불교 이해, 신행, 관습을 허용·인정·존중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불교성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이러한 어려움은 궁극적으로는 우리 불교를 더욱 발전시키는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어려움을 우리는 우리 불교의 불교성과 정체성을 확인·확신하고, 우리 불교를 보다 여법하게 발전시키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교성에 대한 검토는 불교가 요청하는 자유탐구정신의 실천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불교의 자유탐구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칼라마(Ka?a?a?경》은 우리가 어떤 것이 참(sacca)이고 어떤 것이 거짓(musa)인지 도무지 식별할 수 없으며 혼동스러울 때, “보고, 전통, 소문, 경전의 권위, 추측, 그럴듯한 추론, 지속되어 온 견해에의 편애, 그럴듯해 보임, 혹은 ‘저 사문은 우리 스승이다’라는 생각 등에 이끌리지 말라”3)고 한다. 불교성에 대한 검토는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자유탐구정신의 실천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 대한 불교성 검토는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우리 불교의 불교성과 탁월성을 확인·확신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겠지만 우리 불교 안에 내재해 있을 수 있는 비불교적 요소를 찾아내고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에 대한 불교성 물음은 때론 우리 불교에 대한 불완전성에 대한 인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겨왔던 부분을 버릴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특히 우리 불교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역사가 길면 길수록, 또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은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성에 대한 검토는 비록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바람직한 것이며 요청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절대성과 그 실천에 있어서 실용주의적 태도 사이의 긴장에서 유발되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무한히 열린 시대는 일시적 회피를 허용하지 않으며 무한한 자기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보다 설득력 있는 불교는 부단한 자기점검에 충실하고, 이에 의거하여 과감하게 스스로를 쇄신하는 자기쇄신의 불교일 것이다.

3. 불교학의 실용성: 불교학자, 불교인, 사회일반에 대한 불교학의 실용성

그러면 불교에 전제된 실용성 혹은 반절대주의적/실용주의적 태도는 ‘불교에 대한 탐구/공부’라고 할 수 있는 불교학에서도 전제되는 것일까? 즉 불교학은 실용적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인으로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불교학 자체가 자신은 물론 다른 불교인과 일반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단지 학문으로서 불교학을 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유용성과 무관한 순수한 불교학을 지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으로 생각하고 지향하는 불교학은 여타의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유용한 불교학일 것이다. 즉 우리가 바라는 불교학은 불교학자 자신뿐만 아니라 불교인과 일반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삶을 좋은 삶으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하는 불교학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학의 이념은 불교의 이념과 다를 바 없이 ‘자리이타(自利利他)’, ‘상구보리(上求菩薩) 하화중생(下化衆生)’, 혹은 원효 스님의 표현대로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이 될 것이다.

사실 불교학뿐만 아니라 동양에서의 학문은 모두 실용성을 전제한다. 우리 문화권의 대표적 학문의 하나인 유학을 예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유학에서의 ‘심성닦기’로서 ‘수신(修身)’의 이념, 그리고 덕/인품에 의해 타인을 교화시켜 이롭게 한다는 ‘치인(治人)’의 이념은 학문의 실용적 목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학문의 목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실용성에 있으며, 이는 실현방법은 다르지만 ‘자리이타’라는 불교의 학문이념과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불교의 학문이념이 갖는 실용성은 편의상 세 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불교학은 불교학자 자신, 불교인, 그리고 일반 사람에 대하여 실용성을 가지며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 불교학이 불교학자 자신에게 실용성을 갖는다는 것은 불교학이 불교학자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불교학자에게 세계관과 올바른 삶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불교학이 불교학자에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불교학이 불교학자로 하여금 불교와 마음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대화하는 과정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즉 불교학자는 불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텍스트, 사상, 혹은 가르침의 맥락에 자기자신을 이입시키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는 과정을 요청받게 된다. 설령 타종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불교에 접근하는 불교학자라고 할지라도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가르침과 불교적 삶에 대하여 성찰하고 음미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특히 불교는 그 핵심에 있어서 늘 ‘나 자신’의 심성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불교학이 불교학자에게 세계관과 올바른 삶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교가 연기, 공, 무아의 세계관과 이에 합치하는 삶을 사는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이는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하고 이에 근거한 삶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불교학은 불교인의 불교이해의 지평을 넓혀주며 올바른 신행을 확립·확신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불교인에게 실용적일 수 있다. 불교이해와 신행에 도움을 주는 과정은 불교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포함하며,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잘못된 신행 형태에 대한 교정도 포함한다.
불교 이해와 실천에 도움을 주는 실용적인 불교학은 무엇보다도 불교의 교설을 현대적 맥락에서 오늘의 언어로 설명하고, 불교인으로 하여금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불교의 원리를 따를 수 있는 방법을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불교학이 단순한 교설 해설에 그치지 않고, 불교 원리를 현실의 크고 작은 문제에 적용하여 불교적 입장과 불교적 행동지침을 구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인에게 실용적인 불교학이 관여해야 할 범위는 넓다. 즉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교적 분석 내지는 해석, 국내외의 사건들에 대한 불교적 평가, 사회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결책 제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 혹은 생태계 파괴시대에 대응하는 불교적 원칙과 전략의 제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해답 제시 등 그 범위는 거의 무한하다.

셋째, 불교학은 불교를 신앙으로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 불교적 관점과 불교적 해법들을 제시함으로써 실용적일 수 있다. 일반인에 대한 불교학의 실용성은 그것이 불교인의 신행에 대한 직접적 도움을 제외한다면 불교인에 대한 실용성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즉 불교학은 불교이해를 도움으로써 일반인에게 실용적일 수 있으며, 불교적 세계관에 의한 역사해석, 세계의 사건들에 대한 불교적 평가, 발생하고 있는 인류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해법 등을 제공함으로써 일반인에게 실용적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불교적 해석, 평가, 해법 등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더 많은 치밀함과 신중함이 요청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반인의 사고방식, 삶의 양식, 가치관 등에 대한 이해를 필수적으로 요청하며, 이것들을 반영하는 그들의 언어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인은 불교인과 달리 불교적 세계관, 개념, 용어 등을 공유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불교적 해석, 평가, 해법 등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도 탈불교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이해도와 설득력을 보다 높일 수 있을 것이다.

4. 현대 불교학에 대한 최근의 인식

불교학은 이상적으로는 이상과 같은 실용성을 가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문학처럼 불교학은 불교학자 자신은 물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의 인식이다. 즉 불교학은 불교학자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지도 않으며 불교인이나 일반 사람들의 삶에 별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불교학, 특히 현대의 불교학은 거의 무용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근·현대 불교학은 방법론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연구영역도 넓다. 예컨대 문헌학적, 고증학적, 언어학적, 문화사적, 철학적, 응용적, 비교사상적 방법 등 그 연구방법이 다양하다. 연구 내용 또한 경전의 번역과 주석 내지는 해석, 주제에 따른 정리 및 체계화, 불교 역사 혹은 문화사에 대한 정리, 불교 사상사에 대한 정리, 불교사상에 대한 철학적 분석 및 탐구, 연구방법론에 대한 탐구, 불교텍스트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 등 광범위하다.

근·현대 불교학의 그 연구방법의 다양성과 영역의 광범위함은 그것의 실용성의 유무와 내용에 대하여 한 마디로 단언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그것의 비실용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특정의 연구내용과 연구방법을 지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일반의 평가처럼 그것이 불교학자, 불교인, 그리고 일반인에게 실용성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서구 영어권의 불교학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서구의 불교학에 대한 우리의 평가태도가 종합적이고 합리적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자주 평가자들이 서구 영어권의 불교연구나 불교학자들에 대하여 막연한 선입견 내지는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영어권의 불교연구나 불교학자를 평가할 때 종합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지극히 단편적인 검토나 지엽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전체를 평가하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서구의 불교학 연구 초창기의 저명 학자의 불교이해나 그 어려움에 대한 토로를 예로 들어 그들의 불교이해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고, 한문도 모르는 서양인은 불교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서구의 어떤 학회에 가니 서구 학자들은 오직 문헌학적 불교학을 추구하여 실제 삶과 유리된 불교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평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고려 사항, 즉 다양한 모든 연구들을 고려하여 ‘현재’ 서구에서 ‘어떠한 연구’가 ‘얼마만큼’ 진행되어 왔으며, 그것들이 그들의 ‘어떠한 문제의식’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해 내고 있는가에 관한 고려는 없다. 물론 그들의 불교이해가 어떻게 교정되고 발전되어 왔는지에 대한 검토도 없다.

또한 서구의 불교학자들 중에는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이 시대에 불교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도 없다.

서구 불교학의 연구결과들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 없이 우리는 그것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불교학’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필자는 때로 이러한 의문도 가져 본다. 즉, 서구의 불교학의 성과와 불교학자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왜 우리는 공정하지 못하고 인색하며 속단하는 것일까? 우리 전통에 대한 우월감 때문일까? 아니면 ‘완전’을 지향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서구에 대한 대항의식 때문일까? 아직도 우리는 ‘중심과 주변’ 혹은 ‘지배와 종속’이라는 이분의 덫에 우리를 가두고 심리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서구 불교학에 대한 맹목적 경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침소봉대식 평가절하나 무시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주체적 관점, 즉 ‘우리 불교학의 역사와 현재 우리의 삶의 조건 속에서 포착한 불교학의 과제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서구에서의 근·현대 불교학은 불교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서부터 사회문제의 불교적 대처방식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이룩하고 있는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서구에서 불교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 수행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출가수행자에 의한 포교와 전파 미디어의 역할 등도 중요했지만, 불교학자의 역할 또한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불교학자들에 의한 체계적이고 다양한 불교사상의 소개와 이해의 심화작업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유일한 삶의 기준’이었던 세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물음표를 던져 왔다.

불교를 소개하고 이해시키는 일은 어느 때 완성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 요구와 함께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불교학의 서구에의 소개와 함께 현대 서구불교학이 이룩하고 있는 성과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응용윤리학적 연구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금세기 인류의 사고 방식과 삶의 방식,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불교적 성찰을 촉구하고 불교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은 서구 불교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의 일부를 들어 본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고려하더라도 서구의 근·현대 불교학이 사회 일반에 기여해 온 바는 높게 평가할 만하다. 또한 그것은 일반인에게 뿐만 아니라 불교학자 자신과 불교인에게도 실용적으로 기여해 왔다.

그러면 실용성의 관점에서 현재의 우리 불교학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필자는 현대의 국내 불교학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쉬운 말 불교학, 대중을 위한 쉬운 불교서적들의 출간, 수행법과 그 효과를 둘러싼 최근의 연구와 논쟁, 우리 불교를 둘러싼 최근의 학문적 논쟁,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과 문제상황에 대한 불교적 대응책 모색, 다양한 불교 응용윤리학 분과들의 출현, 현대 사조와 불교의 접맥 시도,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교적 분석 등은 실용적인 불교학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는 좋은 지표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양의 근·현대 불교학이 실용적으로 기여해 온 바를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불교학 또한 실용적인 불교학의 요구에 다양한 방식으로 부응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행해지고 있는 최근의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에 대한 비판과 경계의 소리는 매우 높다. 특히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중생들을 불교적으로 살도록 인도하는 불교학도 아니며 불교인의 신행에 도움이 되는 불교학도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종범 스님과 김성철 교수는 현대 불교학의 문헌학적 연구성과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현대 인문학적 불교학이 불교인으로 하여금 불교적으로 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으며 불교인의 신행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두 분은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오히려 무용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 한다.

종범 스님은 근대 이후, 특히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중생을 불교로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의와 수행을 드러내지 못한” “불교가 없는 불교학”이라고 본다. 스님은 일반 인문학적 불교학이 “불교를 신봉하게 하고, 불교를 수행하게 하고, 불교의 이념으로 중생계를 인도하게 하는 불교학”이 아니라고 본다.4)
김성철 교수는 현대불교학이 다수 불자들의 신행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본다. 그의 최근의 발표에 의하면5) 현대불교학 앞에서 전통불교는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서구의 인문학적 불교학의 여러 이론들 앞에서 불자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훼불”의 여지까지 있다고 우려한다.

그런데 두 분의 현대 불교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과 초점은 같지만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종범 스님은 현대의 불교학이 ‘교의와 수행’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고, 김교수는 현대의 불교학이 전통불교의 가르침과 상충됨으로써 불교인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두 분이 각각 일반 대중에게 도움이 되고 불교인에게 도움이 되는 불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우리 불교학계에 주는 의미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교의와 수행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나 ‘현대 불교학이 불교인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비판은 좀더 꼼꼼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서구 불교학에 의해 이룩한 불교 경전과 논서에 대한 번역 및 심층적 분석과 해석, 더 나아가서는 불교의 현대적 적용은 불교의 교의를 이 시대에 맞게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환경, 생명, 여성, 빈부격차, 자본주의, 인권 등의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불교의 입장을 드러낸 것은 ‘교의의 현대적 드러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불교에 대한 교의의 해설 차원을 한 단계 넘어선 교의의 드러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행과 관련하여 불교의 명상에 대한 분석, 수행법에 대한 학적인 정리, 심성과 자비 수행에 대한 해설 등은 학적인 차원에만 국한된 성과가 아닐 것이다. ‘수행’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가 문제가 되겠지만 이러한 작업은 불교를 수행(론)의 관점에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수행’ 자체는 사람을 통해서만 드러나고 ‘학’을 통해서는 오직 설명될 수 있을 뿐이라고 본다면, 수행 자체를 드러내는 것은 불교학의 과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불교학자 자신이 불교를 자신의 몸으로 드러내는 ‘수행자’가 되기 이전에는 수행 자체를 드러내는 일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현대불교학의 여러 이론들 앞에서 불자들의 신행지침이 되어왔던 전통불교는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불자들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비판적 우려 또한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6) 우선 우리는 ‘우리 불교가 현대 불교학의 연구결과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지에 대하여 물어야 할 것’이다.7) 설령 우리 불교가 현대 불교학의 연구결과에 민감하다고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우리 불교에 대한 불교성에 대하여 확신한다면 그 연구결과는 우리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오히려 우리 불교의 불교성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현대불교학의 연구결과가 우리 전통불교의 가르침과 상치되어 불교인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우리 불교가 ‘추호의 의심도 할 수 없는 불교성’을 확보하고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문제삼아야 할 것은 현대 불교학의 연구결과에 의해서 우리 전통불교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필자로서는 흔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지만), 즉 ‘우리 불교의 허약성’ 혹은 ‘우리 안의 허약성’일 것이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이러한 허약성이 혹시라도 우리 불교 안의 비불교적 요소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5. 실용적 불교학을 위한 몇 가지 생각

1) 바람직한 불교학에 대한 최근의 주장
바람직한 불교학으로서 종범 스님은 ‘승가학’을 제시하고 김성철 교수는 ‘체계불학’의 정립을 주장하고 있다. 이분들이 주장하는 ‘승가학’이나 ‘체계불학’에는 ‘실용적 불교학’이라는 말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불교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불교학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학의 실용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범 스님이 말하는 “승가학은 전통불교학을 승계하고 근대 이후의 불교문헌학 및 불교역사학을 참고하여 새롭게 수립하는 불교학”으로서 “승가로 입문하게 하고, 승가로 성장하게 하고, 승가가 신봉하는 불교이념으로 중생계를 인도하게 하는 불교학”이다.8)

이에 비하여 김성철 교수가 말하고 있는 ‘체계불학’은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성과에 토대를 두고 불전의 가르침을 유기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수미일관한 하나의 신행체계로 구성해 내는 불교학”으로서 “불자들로 하여금 불교적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불교학”이다. 환언하면 “체계불학은 승속을 포괄한 모든 불자들에게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제공해 주는 불교학이며, 불자들의 일상생활과 신행생활 전체가 불교적으로 영위될 수 있도록 지침의 역할을 해 주는 불교학이다.”9)

‘승가학’과 ‘체계불학’은 전자가 보다 포괄적인 불교학을 지칭하고 후자가 불교학의 한 영역 내지는 방법으로서 제안되고 있다는 점에서, 즉 전자가 일반인까지 포함한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하고 후자가 일차적으로는 불자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나란히 비교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현대 불교의 문헌학적 연구성과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불교인으로 하여금 불교적인 삶을 살도록 돕는 불교학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불교학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불교적으로 살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본다면 ‘승가학’은 불교학의 방향을 잘 설정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 불교학이 불교인의 신행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체계불학’은 현재 우리 불교학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승가학’과 ‘체계불학’이 실용적 관점에서 각각 불교학이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히 하고 우리 불교학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가학과 체계불학은 모두 ‘불교적 진리의 절대성’과 ‘불교적 삶에 대한 당위’를 전제하고 있어서 불교인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불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 특히 불교를 믿지 않으나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이러한 호교적 접근은 부담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신학이나 조직신학이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폐쇄성을 전제하고 기독교적 진리의 절대성과 기독교적 삶에 대한 당위를 전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가학’과 ‘체계불학’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특히 ‘승가학’의 경우는 호교성과 불교학자 자신의 신앙성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학을 ‘승가학’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 내지는 귀속시키고 있다고 이해되기 때문에,10) 불교학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만일 ‘승가학’이 ‘체계불학’처럼 불교학의 한 영역으로만 주장된다면 이러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제 필자는 지금까지 살펴본 ‘승가학’과 ‘체계불학’이 내포하고 있는 불교학의 실용성의 주장에 원론적으로 공감하면서 이제 실용적인 불교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다양한 불교학 방법론에 대한 열린 태도와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 모색
전통적인 불교학 방법론이든지, 근대 이후의 서구의 불교학 방법론이든지, 아니면 이 양자의 절충이든지, 불교학자는 현재의 다양한 불교학 방법론들을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불교학자는 새로운 방법론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할 것이다.

주로 강원이나 선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전통적 불교학은 이미 불교에 입문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즉 불교신앙을 전제하고―그들의 수행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에 어떤 불교학보다도 그들로 하여금 불교적 삶을 드러내게 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 불교학은 불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이 지대했겠지만 불교 밖의 일반 대중에게는 그렇지 못했을 수 있다. 게다가 전통적 불교학의 한 방법으로서 ‘교판(敎判)’은 불교 공동체 내에서도 특정 공동체/종파의 입장에서의 다양한 불설들에 대한 자리매김과 평가를 의미했기 때문에 다른 공동체/종파에게는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한계를 가졌을 수 있다.

이와 달리 근·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은 불교학자의 탈신앙적 접근에 의한 불교이해로 인하여,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보다도 일반인에게 더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것은 특정 종파의 입장에서의 교판이 아니기 때문에 초종파적으로 보편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은 그 설득 대상에 있어서 보다 광범위하고, 설득에 있어서 보다 보편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는 타종교인이나 불교를 (아직) 신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앙을 전제한 전통 불교학적, 승가학적, 또는 체계불학적 접근보다도 오히려 근·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보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다양한 불교학 방법론의 장단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방법론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앞으로의 불교학은 전통적 불교학의 방법론에 국한되어서도 안되며 근·현대 불교학의 방법론에 국한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불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불교적 삶에로의 인도, 불교사상의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이해, 불교사상의 현대적 재해석, 불교사상의 현실 문제에 대한 적용 등의 불교학의 다양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불교학 방법론과 근·현대의 불교학 방법론 이외에도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와 이에 따라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의 출현에 대처하여 불교학은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모색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오늘 여기에서’의 보편언어
서두에서 논한 것처럼 불교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까닭에 시대성과 상황성을 배제하고 생각될 수 없다. 이는 불교학에 있어서도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불교가 말해지고 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학자가 ‘현시대에 이 땅에서 사는 이들’의 문제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이를 불교적 관점에서 보편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학은 불교인에게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며 신행을 위한 것만도 아니다. 불교학은 불교 밖의 사람도 대상으로 하며 독단적 사유에 대한 계몽의 역할도 한다. 그래서 표현에 있어서도 불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말과 어법, 즉 보편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4) 불교학자 자신의 경험과 문제의식
다른 한편, 불교 밖의 사람들까지 대상으로 하는 보편언어가 호소력 있으려면 불교학자 자신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대인과 공유될 수 있는 경험과 문제의식은 우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과 관점을 통해 느끼는 문제의식이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 체험과 구체적 문제를 떠난 추상적 불교 설명은 나름대로 가치를 갖지만 일반인의 가슴에 다가가지는 못할 것이다. 구체적 삶의 현장으로서 ‘오늘 여기’를 반영하지 못한 불교 설명은 불교학자 자신을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살아 다가가지 못한 죽은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학자는 어떻게 하여 자신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불교학 속에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체험하는 삶을 불교학과 결부시키려는 노력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불교학자는 ‘이 시대와 이 상황’이라는 공통된 삶의 조건을 갖지만, 그것은 각 불교학자가 경험하는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따라 다르게 지각될 수 있다.

어떤 문제는 어떤 불교학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하고 간과될 수 있으나 다른 불교학자에게는 포착되어 절실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불교학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포착된 문제들을 불교학 안으로 가져와 불교적 답변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불교 밖의 일반인을 위한 불교학자의 역할
오늘날 다수의 불교학자들은 학문적 연구활동 이외에 불교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설법이나 불교 관련매체를 통한 사회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불교학자의 활동영역은 불교 공동체 안에 국한되지 않고 불교를 신앙으로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로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학자에 의한 불교 공동체 밖에서의 활동은 불교 안에서의 활동보다도 더 중요하다. 특히 불교 밖의 일반인에 의한 불교 오해 정도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종종 ‘불교에도 철학이 있냐?, 불교에 무슨 윤리가 있냐?, 불교는 세속의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등의 말을 접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불교는 ‘세상을 등져야 하는 탈속의 가르침’이나 ‘출가하여 도를 닦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의 책임은 불교인 모두가 져야겠지만 불교학자 또한 그 책임의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까닭에 일반인의 불교 이해를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도 불교학자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6. 글을 마치며

불교 자체는 실용성을 본질로 한다. 우리의 삶을 좀더 행복한 삶으로 전환시키는 데서 불교의 참 의미가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학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이상적으로 불교학자 자신, 불교인, 그리고 모든 중생을 보다 행복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불교학이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실용성 혹은 불교의 반절대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 태도는 그 가르침의 절대성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시대와 상황, 즉 인간의 삶의 조건에 따른 방편은 허용될 수 있으나 그것은 불교성을 전제해야 한다. 환언하면 가르침의 절대성과 실용성(혹은 방편성) 사이에는 늘 긴장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다양한 불교 이해, 신행, 관습을 인정·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불교성 검토를 요구받는 것이다. 우리 불교와 관련해서도 우리 불교의 고유성이나 정체성은 지켜져야 하겠지만, 그것은 불교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불교성 검토를 요구받는다. 그리고 불교성 검토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그러하듯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바람직하고 건설적인 일이기에, 최근 우리 불교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불교가 실용성을 전제하듯이 불교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불교학과 서구의 근·현대 불교학은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특히 불교인의 신행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불교학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불교학, 특히 영어권의 불교학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평가하여 ‘무용하다’고 말 할 만큼 비실용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양한 관점에서 불교 이해를 심화시키고 현대적 맥락에서 불교를 재해석하면서, 불교의 실용정신을 발현시키는 데 지속적이면서도 도전적인 방식으로 기여해 왔다. 필자는 실용적 불교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불교학의 최근의 움직임 또한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서구의 불교학에 대한 맹목적 경도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부분적 관찰에 근거한 무시나 평가절하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서구 불교학과 우리 불교학, 지배와 종속, 중심과 주변 등의 이분을 넘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성과와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우리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최근 국내에서의 실용적 불교학에 대한 주장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구체적 내용이나 함의에는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어떤 불교학을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냐는 결국 불교학자 각각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다양한 목적과 다양한 동기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불교학의 한 모습은 ‘실용적인 불교학’이라고 생각되며, 그것은 불교의 이념인 자리이타, 상구보리 하화중생, 귀일심원 요익중생 등의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불교학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지향하는 불교학은 이상과 같은 이념에 충실한 실용적인 불교학이라는 소박한 믿음에서 필자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필자의 공부의 한계 내에서 필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임을 실감하게 된다. ■

안옥선
전남대 심리학과,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하와이 주립대 철학박사.현재 전남대 강사.저서 및 논문으로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화이트 헤드의 종교와 신 개념에 대한 고찰><21세기를 위한 윤리의 모색:불교윤리의 관점에서><여성성불 불가설의 반불교성 고찰><불교의 인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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