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지난 가을에 열렸던 불교미술 전시회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을 정리한 글이다. 그 전시회란 사단법인 불교문화산업기획단이 주최한 〈아름다움과 깨달음―한국 근현대미술에 나타난 불교사상〉(다음부터는 ‘아름다음과 깨달음전’으로 줄여서 부르기로 한다)이란 이름 아래 열린 미술전시회이다. 전문 기획가(企劃家, curator)에 의해 기획된 전시회로서는 불교계에서 처음 열리는 전시회였는데, 이 전시회는 서울(평창동 가나아트센터, 2002. 10. 17∼28.)을 시작으로 경주(선재미술관, 11. 2∼19.), 속초(11. 22∼12. 1, 속초시 문화회관), 광주(12. 5∼15,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순회전시가 열렸다.

또한 전시를 주최한 측에서는 전시기간 중에 같은 장소에서 학술발표회를 갖고 전시회의 의의와 현대 불교미술의 문제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불교미술계로서는 아니 불교 문화계나 일반 문화계에서도 매우 유익하고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이 주최한 〈제19회 불교미술전람회〉(10. 12∼20, 예술의 전당 제4전시실)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현재 격년으로 열리고 있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불교미술작품을 공모하여 그 가운데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여 시상(施賞)하는 공모전(公募展)으로 불교계에서는 전통을 지닌 유일한 미술전람회이다. 이 전시회는 크게 전통적인 불교미술을 잇는 전승미술(傳承美術) 부문과 새로운 창작미술 부문이 공존하고 있으나, 지금까지는 대체로 전승분야가 주류를 이루어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1)

이렇게 두 전시회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이들 두 전시회를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열린 두 전시회를 관람하고 보니 필자로서는 자연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전시회의 내용을 살피면서 우리 나라 불교미술의 현황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불교미술의 나아갈 방향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동안 불교미술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온 필자로서 이들 전시회를 현대 불교미술을 모색하는 화두(話頭)로 삼고자 하였다. 특히 〈아름다움과 깨달음전〉은 필자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불교문화를 새롭게 가꾸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화두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2. 〈아름다움과 깨달음전〉을 보고 나서

이 전시회는 〈아름다움과 깨달음전〉이란 타이틀이 말해주듯이 우리 나라 근현대미술에서 불교사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70여 점의 전시작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 전시회였다.2)

1) 기획의도
먼저 이번 전시회의 기획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기획 당사자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자.

오늘의 불교미술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이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이번 전시회를 기획했다. 냉정하게 말해,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일 따름이다. 과거의 찬란한 불교미술 전통은 접어두고 20세기의 한국미술, 그 중에서도 불교사상이나 소재를 기저로 창작한 작가와 작품을 점검의 대상으로 삼았다. 기초자료의 조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획원칙이 정리되었다.

몇 가지 핵심단어를 열거한다면 대충 이렇게 정리된다. 전통과 창작, 종교성과 예술성, 장인과 작가, 미술계와 비미술계, 소재의 차용과 사상의 용해, 구상과 추상, 깨달음과 아름다움 등등이다. 한마디로 불교사상을 작품의 기저에 담기는 했으되 창의성 있는 예술품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따라서 전통적 기능에 주안점을 두고 작업하는 장인들의 경우는 논외로 했다. 기능의 단순 계승보다는 창의성을 기본으로 한 우리 시대의 미술작품을 집중 조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찰에서의 불사(佛事)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장인들의 작업은 고려의 대상에서 일단 배제하기로 했다.3)

이 전시회를 기획한 뜻은 20세기에 이루어진 한국미술 가운데 불교사상이나 소재를 기저로 창작한 작가의 작품을 선정하여 우리 시대의 불교미술을 집중 조명하되 불사(佛事)란 이름 아래 이루어진 장인들의 작품은 제외하였다고 한다. 기획자는 ‘사찰에서의 불사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장인들의 작업은 고려의 대상에서 일단 배제’하기로 한 구체적인 이유는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즉 그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진정 불행하게도 20세기는 과거의 불교미술을 살피는 데 급급했지 새로운 불교미술을 창출하는 데 활기에 찬 시대는 아니었다. 불교미술이란 용어가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미술의 새로운 창작이 가장 저조한 시대였다는 기록은 참으로 역설적인 사항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불교계에서 이루어졌던 숱한 불사에 대하여 ‘시각적 공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세기 불교미술,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불사(佛事)라는 용어가 떠오른다. 1960∼70년대 이후 하나의 붐을 이룬 불사는 한국 사찰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 불사라는 명목 아래 바람직한 조형활동이기보다 오히려 부정적인 사업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날 불사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것 가운데 시각적 공해로 지목되는 사례는 없는가? 시각적 공해에 해당하는 조악한 ‘물건들’은 향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이름도 좋은 불사의 결과물 가운데 우리 세대에 철거해야 할만큼의 수준미달 ‘작품’은 없는가? 만약 수준미달의 작품이 산재해 있다면 이 문제만큼은 후손에게 넘길 일이 아니라고 본다. 특히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은 사항은 이런 것이다. 사찰의 불사 현장과 미술계가 상호 무관한 사이였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계의 역량을 활용하지 않은 불교계의 태도, 정말 연구의 대상이다.4)

“조악한 ‘물건들’”이란 수사(修辭)를 쓸 만큼 기획자의 불사에 대한 시각이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리고 사찰의 불사현장과 미술계가 상호 무관한 점이나 미술계의 역량을 활용하지 않은 불교계의 태도를 질책하고 있다. 이 전시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또 학술발표에 발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여 〈현대 불교미술의 과제〉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 평론가 최태만은 “심지어 현대 불교미술의 부재를 통탄해야 할 지경이다.”고 까지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론 불교미술은 여전히 이른바 장인으로 분류되는 작가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으나 문제는 그 작품들이 현대성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데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힘들게 제작한 불교미술품들이 무가치하다거나 ‘장인’이란 신분적 분류 속에 어떤 위계를 설정해 놓고 그들의 업적을 폄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전통의 전승 못지 않게 이 시대에 부응하는 양식의 창출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전승 속에서 소극적인 변화의 시도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단히 미안한 표현이지만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기술적 숙련성이 탁월한 공예적 회화나 조각은 발견할 수 있을지언정 현대 불교미술이라고 내세울 만한 그 어떤 근거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나로서는 무척 당혹함을 느낀다.5)

그는 ‘장인으로 분류되는 작가’들이 지닌 ‘기술적 숙련성이 탁월’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대에 부응하는 양식을 창출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 전승미술인을 현대 불교미술작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작품 또한 현대 불교미술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하겠다.(필자는 이 글을 계기로 앞으로는 전통 불교미술을 전승미술이라 명명(命名)하고 전승미술을 하는 작가들을 전승미술인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한편 새로운 불교미술을 창작하는 작가들을 창작미술인, 그들이 창작한 작품을 창작미술이라 일컫고자 한다.)

이들의 견해대로 20세기 전승미술 그리고 전승미술인의 역사적 평가가 그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지는 이 글에서는 주제에 벗어나고 또한 지면의 여유가 없으므로 논의는 줄이기로 한다. 다만 필자로서는 설사 전승미술인에 대한 평가가 낮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이 모두 그들만의 책임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6)

2) 전시회의 내용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가와 작품을 선정한 기준에 대하여 기획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작가 선정의 기준이다.

대개의 작가는 해탈을 의식하고 않고 작업을 할 것이다. 조형성에 우선하는 작업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 나름대로 불교를 보는 시각의 층차 역시 클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신앙활동은 작가선정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종교 혹은 신앙생활의 유무에 앞서 불교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작업을 했다면 선정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미술 행사이지 종교 행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교의 특성으로 원융회통과 같이 폭넓은 포용력을 꼽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신앙생활은 커녕 불교에 대한 피상적 이해수준의 작가에게 차원 높은 불교적 작품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7)

다음으로 작품 선정의 기준에 대하여 기획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제는 작가의 신행활동이 아니고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다.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불교사상이나 소재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한 것이다. 하지만 근현대의 미술가 가운데 어떤 작가가 이 경우에 속하는지 선뜻 헤아리기 쉽지 않다. 이는 종교성, 예술성, 시대성 그리고 독자성이라는 과제와 직결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생각해 본다. 사찰의 외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화를 과연 불교미술로 볼 수 있는가. 당연히 대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사찰경치의 단순 재현은 위에서 언급한 종교성, 예술성, 시대성 등의 기준과 거리가 멀 가능성이 많다. 마찬가지 논리로 작품의 소재로 불교를 차용한 경우, 작품에 따라 평가의 잣대가 바뀌어지겠지만, 걸작의 반열에서는 논위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사항은 외형이 아니라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치장을 잘한들 불교사상이나 예술성과 거리가 멀다면 좋은 평점을 줄 수 없다. 여기서 불교소재의 차용과 종교적 혹은 예술적 승화의 문제가 대두된다.

권진규<춘엽 바구니>1960만해 한용운의 시는 불교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불교의 심오한 사상을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작은 생경한 전문용어의 남발로 대중을 학대하지 않는다. 미술작품 역시 맥락은 마찬가지이다. 이중섭의 〈피난지〉 이후의 작품에서 필자는 연기론(緣起論)과 더불어 범생명주의를 읽어낸다. 이중섭의 작품에서 불교사상을 해석해 낼 수 있다고 본다.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가운데 불교를 소재로 한 것도 있다. 불교가 초현대적 미디어와 만나 예술의 원천으로 부상된 예이다. 문제는 예술가의 몫이다. 불교라는 엄청난 사상은 창작의 무궁한 자원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8)

이어서 기획자는 출품작의 유형을 크게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오른쪽 작품 권진규<春葉 바구니>1960

근현대미술 가운데 불교적 요소가 깃든 작품은 대략 네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일반 미술가의 작품이면서 사찰 봉안용 작품이다. 둘째, 불교 소재를 기본으로 한 창작품 가운데 구상적인 작품이다. 셋째, 불교(사상)가 작품의 내면으로 녹아든 추상작품이다. 넷째,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불교사상을 형상화한 입체작품이 그것이다.9)

3) 전시회의 의의와 그 한계
전시회의 의의에 대하여 기획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계의 무관심 속에서 창작미술을 진행해온 창작미술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 검토하게 된 점에 두고 있다.

송영방 <윤필암 사방불>2000불교계의 관심과 무관하게 불교 사상과 소재로 작업을 수행한 미술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한 자리에 모아 검토해 본 일은 찾아내기 어려웠다. 이 또한 반성을 요하는 부분이다. 하여 한국 근현대미술에 나타난 불교사상 전시는 만시지탄의 기획이면서 의의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왼쪽 그림 송영방 <윤필암 사방불>2000

급격한 변화와 다양한 양상을 초래한 시대에 불교를 기본으로 제작한 미술작품은 각별한 의의가 스며 있다고 믿어진다. 미술가에게 있어 불교는 무엇인가. 이같은 물음의 상관 관계는 20세기 한국문화의 단면을 파악하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10)

이어서 현재 사찰에 봉안된 성물(聖物) 가운데 당시 일반 미술계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해 공개한 점, 그리고 현역 작가 가운데 불교적 성향의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조명하여 현대 창작미술이 진로를 모색하는 하나의 틀을 만드는 기초작업을 마련하고자 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본 전시는 불교사상을 기저로 제작한 현대 미술품을 한자리에 모아 대강의 윤곽이나마 설정하려는 데에 일차적인 의의가 있었다. 더불어 근대미술의 경우, 사찰 봉안의 미술가 작품을 발굴하여 미술계에 공개한다는 역점도 있었다. 하여 김복진, 정종여, 오지호 등과 같은 거장들의 빼어난 불교미술품을 소개할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더불어 현역 작가 가운데 불교적 성향의 작업을 한 작가에게 조명을 맞추어 하나의 틀을 만드는 기초작업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11)

한편 이번 전시회가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을 스스로 지적하고 있다.

창작의 원천으로 삼은 불교사상 가운데 보다 구체적으로 사상의 내역까지 파고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의 한계로 남는다. 이번 불교미술전을 계기로 보다 본격적으로 불교미술의 현대화 작업에 박차가 가해졌으면 한다. 더불어 현대 불교미술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요구된다.12)

이러한 한계는 기획자나 주최측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는 그 동안 이러한 일에 무관심하고 기초적인 작업을 해오지 않은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돌려야 마땅하다.
사실 이번 전시회를 열게 된 배경에는 이 전시회를 주최한 사단법인 불교문화산업기획단의 출범을 기념하는 첫 사업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준비기간의 부족, 귀중한 작품을 대여 받아 공개 전시하는 데 따른 어려움 그리고 예산과 전시공간 확보 등 여러 가지 여건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3. 근대 불교미술 관련자료의 발굴 그리고 보존

‘근현대 불교미술에 나타난 불교사상’이라는 부제(副題)에서 볼 수 있듯이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초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활동했던 작가, 20세기에 태어나 후반기까지 활동하다 이미 고인이 된 작가 그리고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 시대구분을 ‘근현대’라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에서 근대를 언제부터 어느 때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나 대체로 18세기 후반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 시대구분의 문제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논외로 하고, 여기에서는 편의상 18세기 후반에서 일제 강점기까지를 근대로 설정하고, 1945년 8·15 광복을 현대의 기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근현대 가운데 특히 일제 강점기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시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조선시대의 전통을 근대에 이어준 가교자(架橋者)들이 마지막으로 활약한 시기이며, 또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화의 유입에 따라 그 흐름에 동화되어 가는 이들도 있고, 간혹 주체적으로 이들 새로운 요소를 수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자 한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근대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은 우리 나라 미술사나 우리 불교미술사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 작업이 된다. 일반 미술 분야에서는 최근 들어서 근대미술사학회가 결성되는 등 활발하게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연구성과도 거두어지고 있다.13) 이에 비해 우리 불교미술계의 활동은 매우 미미하다. 다만 사단법인 성보문화재연구원이 전국에 산재한 조선시대 불화를 조사하여 《한국의 불화》를 간행하고 있다.14)

이러한 현장조사 과정에서 각 사찰에 봉안 또는 소장된 근·현대 미술자료가 발굴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진주 의곡사의 괘불이 가장 두드러진 경우에 해당된다. 이밖에도 연구자들이 개인적으로 오랜 탐사를 진행하거나 또는 관련자의 제보 등에 힘입어 묻혀 있던 자료들이 발견된 사례가 있다. 계룡산 신원사의 암자인 소림원에서 김복진의 작품을 발견한 것도 그러한 좋은 사례라 하겠다.

근대 미술작품과 그와 관련된 자료의 발굴과 보존이 얼마나 주요한 일인가를 인식시키기 위해 김복진의 경우를 소개하기로 하겠다.(다음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모두 최열, 《힘의 미학 김복진》, 재원미술작가론1(도서출판 재원, 1995)의 내용을 그대로 또는 필자가 편의대로 간추린 것이며, 몇몇 용어는 필자가 임의로 변경하였음을 밝힌다.)

현재 소림원에 봉안되어 있는 김복진의 작품은 본디 금산사 미륵전의 주존불을 조성하기 위한 마케트(maquette, 縮小模型)로 제작된 것이다.금산사 미륵전에는 소조미륵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1934년에 불이 나면서 불행하게도 중앙에 모셨던 주존 여래상은 불타버렸다. 그 무렵 가뭄과 홍수로 매년 흉년이 들었고 농민의 마음이 흉흉하였다. 이에 금산사 주지인 임성렬(林成烈) 스님이 미륵대불을 조성하고자 발원하였는데 대시주로는 전북 태인의 지주인 김수곤(金水坤)이 동참하였다.

1935년 가을 무렵에 사찰에서는 조성할 대불의 1/10크기로 축소모형을 석고로 만들고 그 가운데서 가장 잘된 것을 뽑아 그 사람에게 미륵대불 조성을 맡기기로 했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유명한 화사와 석공이 모여들었고 김복진도 초청을 받아 이 일에 참여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경연대회가 열렸으며, 경연 결과 김복진이 당선되었다. 1936년 8월 말, 높이 38척(약 11.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미륵대불이 완성되었다. 미륵대불은 흙으로 조성하고 그 위에 순금을 입혔다. 그 무렵의 보도에 따르면 제작 기간은 모두 270일이었으며 불사에 들어간 총 비용은 14,000원으로 그 가운데 도금을 위한 순금 값만 6,000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이 이 미륵대불을 ‘은진미륵의 아우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금산사의 임성렬 스님은 이 축소모형을 절에 보관하다가 1936년 5월 조선미술전람회 공모전에 응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임성렬 스님은 도반인 심원호(沈圓昊) 스님이 암자를 짓고 사는데 불상을 모시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축소 모형을 모셔 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암자가 바로 계룡산 신원사 옆에 자리잡고 있는 소림원이다. 이런 인연으로 금산사 미륵대불을 조성하기 위해 김복진이 제작했던 축소모형이 오늘까지 소림원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법주사의 미륵대불도 1937년 초에 조성계약을 맺고 1939년 3월에 가서 본격적으로 조성 작업에 들어갔다. 이 법주사 미륵대불은 앞서 금산사 미륵대불 조성에 시주했던 전북 태인 사람 김수곤이 당시 법주사 주지였던 장석상(張石霜)의 권화(權化)를 받아 재산을 헌납하여 미륵대불을 조성하기로 발원한 것이 인연이 된 불사이다. 높이 33미터에 이르는 이 대불은 당시 새로운 건축자재인 시멘트를 사용할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단 한 개의 철근도 사용하지 않고 안에 돌을 채워 조성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40년 8월에 김복진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였던 좌중삼삼(佐仲三森)이 이어 받아 작업을 계속하였다. 마침 전쟁 중이라 자재가 부족하던 때인데도 충북 지사, 보은 군수 등이 나서서 물자를 구해준 덕분이었다. 1943년 8월 무렵, 완공 예정기한인 가을을 눈앞에 두고 물자 공급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 이상 불상 조성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광복이 되고 얼마 뒤 김복진의 제자 윤효중이 다시 ‘미륵대불’ 완성을 꾀하고자 속리산에 들어갔고 이 때 후배 조각가인 백문기가 참가했고 그 뒤에 권진규도 참가했다. 6개월 동안 땀을 흘렸지만 그 이상 진행은 불가능했다. 두 번째 작업이 중단되고 6·25동란을 비롯한 격동의 세월이 흘렀다. 장기은, 임천, 신상균 등이 불사에 참여하여 1963년 3월에 드디어 완공을 보았다. 이 과정을 ‘미륵불상 조성 기념비문’이란 이름으로 돌에 새겨 미륵대불 곁에 세웠다.

이 기구한 역경을 겪은 미륵대불은 시멘트로 만든 데다가 비바람에 씻겨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그 대신 ‘미륵대불’을 원형으로 삼아 이번에는 청동으로 똑같이 만들어 그 옆자리에 세웠으니 1990년 4월의 일이다. 김복진론을 쓴 최열은 이 청동대불을 ‘미륵대불의 그림자’라고 일컫고 있다.

장황하게 두 미륵대불의 조성과정을 서술한 까닭은 우리에게 있어 불사와 관련된 관련자료의 기록, 정리, 보전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한편 진주 의곡사에 있는 정종여가 그린 〈괘불탱화〉에는 화면(畵面) 아래쪽에 적힌 화기(畵記)에 의해 괘불탱화 조성에 동참한 이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떤 인연으로 새로운 형식의 괘불탱화가 조성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물론 정종여가 월북작가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자료를 보관해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4. 새로운 불교미술의 전개를 위해서

글을 시작하면서 이미 말하였지만 이 전시회를 화두로 삼아 ‘지금, 여기’에 필요하고 나아가 앞으로 올바르게 전개되어야 할 새로운 불교미술15)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크게 몇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1) 불교미술학의 정립-〈깨침의 미학, 가꿈의 미학〉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불교미술이란 말은 매우 낯익은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미술이란 말과 더불어 불교미술이란 말은 서구에서 사용한 개념이 근대 일본을 거치면서 한자문화권에 보급된 용어이다. 다시 말해 불교미술이란 우리 전통문화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며, 용어였던 것이다.16)

옛 문헌자료나 당시의 조성된 금석문 등에 의하면,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조성하는 일을 표현하는 말로서 ‘건탑’ 또는 ‘조탑’ 그리고 ‘조상’ 등의 예를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예술을 창조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신앙의 한 방편으로 공덕(功德)을 짓는 일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불교미술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며, 선정(禪定)과 지혜를 닦아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의 방편이었다.

불교미술은 불교와 미술이 만나서 이루어진 예술의 한 분야이다. 불교와 미술의 만남 다시 말해 불교와 미술이 서로 인(因)과 연(緣)이 되어 이루어진 불교미술은 처음에는 갈등도 있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왔다.

이왈종 생활속의 중도 1995오늘날 불교와 미술의 만남은 크게 두 가지 입장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불교가 인(因)이 되고 미술이 연(緣)이 되어 만나는 경우와, 그리고 미술이 인이 되고 불교가 연이 되는 경우이다.

오른쪽 그림 이왈종, 생활속의 중도 , 1995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 곧 사부대중(四部大衆) 가운데서 출가자 또는 재가자들이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조성하여 전각에 모시고 향이나 꽃을 올리는 등 구체적인 조형활동이나 의례(儀禮)를 통하여 표출되는 경우가 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작가가 창작 활동의 하나로 불교라는 이름 속에 포함된 다양한 내용 중 어떤 것을 주제나 소재로서 선택하여 작품을 제작하게 된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대체로 불교가 주체가 되고 미술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단지 기능적인 역할을 다할 뿐이다. 여기에서는 종교행위의 동기나 그 진행과정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는 조형물의 미적 판단은 종교와는 분리되거나 거의 관련이 없다고 하겠다. 이른바 서양 중세기에서 ‘예술이 종교의 시녀’라 부르던 것은 이 극단적인 예라 하겠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는 어떤 한 개인이 지닌 체험이나 조형의지에 의해 조각이든 그림이든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작품으로 나타나며, 그 작품에 대한 미적 판단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 후자의 경우는 전자와는 달리 보다 다양한 내용으로 불교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작가 자신이 불제자로서 돈독한 신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작가는 종교로서 불교를 믿지는 아니하나 불교가 갖고 있는 가치관 또는 진리에 공감하거나 또는 우연히 사찰을 찾거나 사적지에서 탑이나 불상 등을 보고 어떤 감흥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 등이다. 불교미술의 역할 또는 기능 가운데 하나가 교화의 방편으로 활용되는 것이라 한다면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불교미술의 풍요한 세계는 바로 이들 작가들의 창작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된다.

불교와 미술이 만나 이루어진 불교미술은 종교와 미술이라는 양자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그 양자를 포괄하고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인간의 존재와 삶을 우주적으로 확대한데 참된 의의가 있다.

먼저 새로운 불교미술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교미술은 무엇이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불교미술이란 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미술이란 무엇인가’라고 학문적으로 묻는 일, 다시 말해 불교미술학(佛敎美術學)의 정립이 요청된다. 그렇다면 불교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불교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 안팎에서 불교미술에 관한 개설서가 여러 가지로 출간되었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특히 새로운 불교미술의 전개를 위한 문제에 대해 적절한 자료를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불교미술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길, 다시 말해 불교미술학 정립을 위해 몇 가지 접근방법을 생각하여 본 일이 있다.17) 아직은 다듬어지지 못한 시론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불교미술의 전개를 위한 시금석(試金石)으로 삼기 위해 다시 간추려 보기로 한다.

첫째로 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불·법·승 삼보(三寶)의 개념으로부터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성보론(聖寶論)이라 이름 부르기로 하겠다. 둘째로 불교미술을 불타론(佛陀論) 또는 불신론(佛身論)에서 접근하면 탑파와 불상이란 결국 부처님의 참모습을 조형적 형상으로 빌어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이러한 접근방법론을 진영론(眞影論)이라 이름 부르기로 한다. 셋째로 불교미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 그것은 바로 깨달음의 세계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라 이해하고자 한 방법론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장엄론(莊嚴論)이라 이름 부르기로 한다.

이 가운데서 필자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장엄론이다. 불교의례 뿐만 아니라 불교문화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 말로 장엄(莊嚴)18)이란 말이 있다. 일반 사전에서는 장엄이란 말을 ‘규모가 크고 엄숙함’(이희승편, 국어대사전)이라 풀이하고 있으며, 장식이란 말은 ‘치장하여 꾸밈’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사전을 보면 ‘장엄하다’라 하여 형용사는 올라 있으나 ‘장엄한다’라는 동사는 표제어로 올라 있지 않다. 그러나 불가(佛家)에서는 ‘장엄한다’라는 말을 쓰고 있다.19) 한편 《불교사전》(운허 용하 지음, 동국역경원)에 따르면 장엄(莊嚴, vyuha)이란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과 꽃을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것들’이라 한다.

이들을 정리하면 넓은 의미에서 불교에서 장엄이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20)

첫째는 불상호장엄(佛相好莊嚴)이요, 둘째는 보살영락장엄(菩薩瓔珞莊嚴)이요, 셋째는 불국토장엄(佛國土莊嚴)이다. 첫째, 불상호장엄이란 불신(佛身)이 32상 80종호의 장엄을 나타내는 것은 육도를 떠도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둘째, 보살영락장엄이란 보살이 선행과 덕성으로써 자기를 치레하는 것이니, 보살상을 형상화할 때 영락과 같은 것으로 치레를 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발전하여 모든 불교 존상(尊像)을 그 존격(尊格)에 맞게 위의(威儀)를 갖추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셋째, 불국토장엄(佛國土莊嚴)이란 부처님이 머무시는 국토 곧 불국토의 장엄함을 의미한다. 불국정토의 장엄함에 대하여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비롯한 많은 경전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이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은 물론이고 이들을 모신 가람이나 또는 전각은 불국정토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가람이나 전각을 아름다운 물건으로써 꾸미는 것을 일러 ‘장엄한다’고 말한다. 《대승의장(大乘義章)》 권9(大正藏 44, p.835 하)에서는 삼장엄(三藏嚴)이라 하여 불국토를 화려하게 꾸미는 세 가지로 사장엄(事莊嚴)·법장엄(法莊嚴)·인장엄(人莊嚴)을 말하고 있다.

이 장엄론은 기본적으로 진영론과 같은 개념이다. 다만 진영론이 부처님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일, 곧 부처님이란 무엇인가 하는 내용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다면, 이 장엄론은 바로 부처님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하는 형식에 보다 무게 중심을 둔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미술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이 예토(穢土)를 부처님이 계신 정토(淨土)로 장엄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계는 깨침의 세계(悟界)와 헤매임의 세계(迷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깨침의 세계는 엄격한 의미에서 깨친이(覺者)만이 볼 수 있는 세계이나 대승불교에서 정토신앙이 꽃피면서 범부중생도 선업을 지으면 그곳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불교미술에서 깨침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일은 정토를 형상화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하겠다. 정토신앙을 설한 경전, 예컨대 정토삼부경 등에는 극락세계에 대한 서술이 풍부하여 정토를 조형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상징적으로 정토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다. 글쓴이는 정토의 이미지를 상징화하는 일―정토장엄(淨土莊嚴)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를 불교미술학에서 ‘깨침의 미학(美學)’이라 이름 부르고자 한다.

한편 헤매임의 세계는 바로 우리 범부중생이 사는 이 사바세계를 상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티끌세상을 벗어나 부처님 나라에 나고자 바람(厭離穢土 欣求淨土)’하는 우리의 간절한 서원은 이 티끌세상을 바로 불국토로 가꾸는 일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티끌세상을 불국토로 가꾸는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글쓴이는 ‘가꿈의 미학’이라고 이름 부르고자 한다. 따라서 장엄은 크게 정토장엄-깨침의 미학과 예토장엄(穢土莊嚴)-가꿈의 미학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국 정토장엄과 예토장엄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간추려 설명할 수 있다.

2) 전문가의 양성과 관리
불교미술의 새로운 전개를 위하여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란 무엇보다도 전문가를 길러내고 이들을 활용하는 일이다. 불교미술학이나 불교미술사학을 전공한 학자를 비롯하여 평론가, 전시를 기획할 수 있는 전문가, 미술관이나 화랑을 운영할 수 있는 큐레이터, 그리고 작품을 전시하는데 필요한 각종 전문인력―예컨대 조명, 디스플레이, 전시 디자인 등―그리고 작품의 수복(修復)을 위한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력이 효율적으로 양성되고 또한 관리,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전문성을 활용하고 또 생업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활동 공간 즉 미술관이나 연구소 같은 전문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계 내의 신문 방송 등 언론 매체에서도 그 활동 영역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3) 불교미술 활동을 위한 공간 마련과 그 운영

이번 전시회에서도 절감하였지만 불교미술만을 전담할 수 있는 불교계의 시설이나 공간은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등 비교적 여건을 갖춘 곳도 한두 곳 있기는 하나, 드물게 유물전시관을 지닌 몇몇 사찰의 경우 그 규모나 여러 가지 설비 면에서 전시활동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본사(本寺)를 비롯하여 전통 있는 사찰에는 소규모이지만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산사를 찾는 이들에게 늘 열려 있고 친근한 미술공간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전시공간은 반드시 내부 공간을 가진 건축구조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산사(山寺)가 지닌 수려한 환경을 이용하여―예컨대 사찰의 진입공간 등―환경 친화적인 야외(野外)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본격적인 불교미술 활동을 위해서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물론이고 지방의 중요 도시에는 적어도 소규모의 상설전시 공간과 시설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술활동을 위한 공간의 활용과 그 운영을 효율화하기 위하여 협의체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분야별로 분담하여 작품을 수집함으로써 전문성을 확보하며 중복되는 투자를 피할 수 있다. 나아가 작품의 교류 전시, 지원, 전문인력의 활용, 기타 장비나 시설의 활용 등 여러 면에서 상호 협력이 필요하며, 이를 적절하게 운영할 때 보다 예산을 절감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4) 창작활동을 위한 지원

순수 불교미술의 창작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미술을 공부하는 학생 중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기성 작가에게는 창작에 소요되는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거나, 창작품을 사주거나 또는 창작활동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책을 펼쳐야 하겠다.

이러한 직접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제의 전시를 기획하여21) 동참케 함으로써 창작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창작의 기회를 부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들 작가들에게 때때로 참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직접적인 수행체험의 기회를 마련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거나 또는 감흥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5. 나오는 글

알맹이도 없는 글이 장황해졌다. 아직 화두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미술의 새로운 꽃핌을 기원하는 간절한 뜻은 전달되었으리라 믿고 싶다. 마무리 글은 원측(圓測) 스님의 가르침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대저 지극한 이치는 깊고 고요하며 오묘히 있고 없음의 경지를 끊고, 법체의 모습은 심히 깊어서 말의 표현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진리로 나아감에 방편이 없으니 이장의 말씀을 개진하고 교리를 베풀음에는 의거할 바가 있어 삼신이 감응 두루 나타난다. 샘물이 맑으면 달빛이 홀연히 나타나고 모든 대상이 조용히 움직이면 하늘의 북은 스스로 울린다. 그렇다면 사물의 대응에는 때가 있어 기틀을 따라 서로 인접한다.22)

이기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미술학과 졸업.동대학원에서 미술사 전공. 문화재관리국,호림박물관 , 동국대학교 박물관을 거쳐 사단법인 성보문화재 연구원 연구실장을 역임. 현재 불교 조형연구소 소장. 저서에 <지옥도><불단장엄>(공저)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불화의 도상배치 형식에 관한 시론><한국 불교미술학의 정립을 위한 시론><금동탄생불에 관하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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