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재가 불교운동의 현황과 전망

1. 머리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는 1963년 9월 창립되어 이제 40년 장년의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대불련은 창립 초기 구도불교·지성불교·민족불교·대중불교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여 각종 사상강연회, 수련대회, 청련제, 정기법회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대불련은 창립 직후에 제기된 전근대적인 불교로부터의 탈피와 80년대의 민중불교운동, 90년대의 재가불교운동, 90년대 이후의 통일운동 등과 함께 하는 길을 걷는다.

이 글은 대학생 불교운동의 어제와 오늘을 올바로 평가하여 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나가는 반성의 기초자료로 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대불련의 조직적·이념적 문제를 중심으로 40년의 역사 속에서 각 시기마다의 사회적 상황과 문제해결을 위한 대불련의 지향을 중심으로 논해보고자 한다.

2. 대불련 창립과 이념

1) 창립과 이념
대불련은 1963년 9월 22일 동국대학교 중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정식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에는 동국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한양대, 동덕여대, 서라벌예대, 성균관대, 경희대, 중앙대, 수도사대, 덕성여대, 건국대, 서강대, 서울여대 등 서울의 17개 대학과 삼군사관학교가 참여하였다.
대불련 창립 취지문에 나타난 주요 이념은 ‘지성’ ‘정신수양’ ‘민족’ ‘대중불교’였다. 창립 취지문에서나 이후 활동과정에서나 대불련은 민족의식과 기복불교에 대립항을 형성하는 대중불교를 주요 이념으로 전개한다.
대불련은 ‘현대 지성의 이성에 맞는 인본주의 종교인 불교를 신앙하여야 함은 신세기적 요청이 되었다’고 인식하였고, ‘불타의 사무량심에 입각한 우주관과 인생관을 확립하여…, 불안한 한국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의 터전이 형성되어져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대불련이 추구한 불교는 ‘기복불교에서 구도불교로,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로’의 전환이었다.

대불련은 창립과 동시에 주1회 법회, 정기적 수련회를 통하여 대중불교를 만들어 나갔으며, 사상강연회 등을 통하여 대학생·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포교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1965년 사업계획의 주내용은 ‘중앙의 10개 대학과 지방의 9개 대학에 매주 정기법회를 갖는 것’이었다. 일상적 의례와 활동으로서 법회 개최가 중요 목표였으며, 새로운 포교 방법의 일환으로 사상강연회가 봄·가을 2회씩 서울과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사상강연회의 주제는 ‘5대 종교의 비교’였으며, 이 강연회에서 감명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불교사상강연회를 갖는다고 계획한 것이 특이하다.

이 시기에 대학생들이 모여서 불교단체를 꾸리는 것은 사건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다는 사실이 생소한 상황이었기에 지성인의 상징이었던 대학생들이 불교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신선하고 불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창립 과정과 이후 활동에 당대의 불교 명망가들이 대불련을 지원하고 지도하였다.

1964년 9월 22일 대불련 창립 1주년을 기념하여 ‘기념좌담회’를 가졌다. 종단을 대표하여 이청담(종회의장)·이행원(총무원 교무부장)·이석호(대학선원장)가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한상(대한불교신문 사장)·이기영(동국대)·서돈각(서울대)·박성배(동국대)·조병일·손석우·김한천 등 당시 대표적인 불교지식인이 자리를 함께 했다.

2) 조직 강화와 주요 활동
대불련은 창립과 동시에 지부·지회 설립을 통한 전국적 조직으로의 성장을 도모하였다. 65년 조직 사업의 일환으로 미조직 상태에 있던 부산·대전·전주·춘천 등의 지방조직을 강화하고 이를 위해 회장단이 방문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당해년도 대의원 총회에서 지부 결성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1965년 3월 대의원 총회에서 지부 설립을 결의한 이후, 서울지부(66. 4. 30), 충남지부(66. 9. 18), 강원지부(67. 4. 15), 경남지부(68. 3. 16) 전북지부(69. 7. 15)가 창립된다. 1967년 10월 현재 전국 56개 지회가 가입되어 있었다. 1967년 3월 대의원 총회에서는 대불련 회기, 마크, 회가를 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7년 10월에는 대불련에서 활동한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학사불교회’가 창립한다.

3. 70년대, 명실상부한 전국 조직으로의 확대

1) 대불련, 전국 조직으로의 강화
대불련은 창립과 동시에 전국 조직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사업상으로나, 제도상으로 명실상부한 전국 조직으로 확대된 것은 창립하고 7∼8년이 지난 70년대 초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첫번째 사례가 1972년 8월에 개최된 ‘화랑대회’였다. 제1회 화랑대회는 72년 8월 17일부터 22일까지 6일간 전북 무주에서 개최되었는데 전국 17개 지부, 83개 지회의 간부 12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화랑대회의 의의는 이전까지 대불련 각 지부별로 실시하던 수련대회를 전국적인 대회로 개최한 데 있다.

처음 실시된 화랑대회는 ‘신라 화랑의 정신을 고취하여, 화랑과 같은 올바른 사관 및 종교관·생사관의 확립, 국가 사회 전체에 참신한 윤리관을 제시하겠다’는 의도에서 기획됐으며, 대회의 소분과위원회를 ‘죽지랑 무리’, ‘기파랑 무리’, ‘원술랑 무리’, ‘호세랑 무리’ 등으로 나누었다.

전국적 통일 수련대회의 성격상 대회는 대불련 운동의 통합과 진로를 모색하는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주제 발표는 ‘대불련 연합운동의 강화(홍윤식 교수 발표)’였다.

여름에 실시된 화랑대회와는 별도로 73년 1월에 실시된 겨울 수련회 역시 ‘지구별 연합수련대회’로 개최하였다. 이 수련대회는 대불련 본부가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개최하였으며, 영남권·호남권·중부권·북부권으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전국 조직으로의 강화는 헌장 개정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73년 2월 8일에 개최된 ‘제10차 대표자 총회 및 지부장 회의’에서 헌장 개정을 하였는바, 종래 지역별로 33인의 대표자를 뽑던 것을 각 대학지회별로 83명의 대불련 연합회 대표자를 뽑도록 하였다.

화랑대회는 이후 매년 진행되었으며, 대회 초기 참석인원이 120∼150명을 유지하다가, 70년대 중반 300명을 상회하게 되었다. 대불련은 70년대 말에 이르러 130개 대학에 지회를 두게 된다.

전국 조직으로의 변모를 확립한 대불련은 여름방학 중의 화랑대회, 겨울방학 중의 지도자 수련회, 가을 창립기념 주간의 청련제라는 일상적 행사를 개최하였다. 또한 전국 대의원 총회를 규모에 맞게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조직 안정을 꾀하는 등 대불련 활동의 전형이 이루어진 시기가 70년대이다.

70년대 초반부터 대불련은 일본 학생들과 정기적인 학술토론회를 갖는다. 73년 6월 개최된 ‘제4회 한일학생불교회의’에는 서경수 교수를 단장으로 대불련 회원 등 6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개최한다.

73년 대불련 주요 사업의 하나로 ‘만해 한용운 스님 동상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2월초 대의원 총회에서 사업을 결의하고, 2월 22일에는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0년대 중반 만해 한용운 관련 사업은 대불련 역점 사업의 하나였다.

2) 대불련 정체성의 확립을 위한 노력―화랑대회를 중심으로
대불련 화랑대회는 대불련 역사에서 ‘민중불교론’의 제창으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화랑대회의 취지나 주요 성격이 ‘민중불교’라는 성격으로 제시된 것은 기록으로 보건데 1∼2년 정도의 세월이었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대불련 조직 활동의 성과로서의 화랑대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랑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1972년의 시대적 상황이나, ‘화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 있어서나, 또한 대불련 창립 이후 대불련인들이 가졌던 인식에 있어서나 화랑대회는 ‘민중’이라는 개념보다는 ‘민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민중불교론’을 제창한 1976년의 제4차 화랑대회는 대불련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 분명하다.

제4차 화랑대회는 76년 8월 12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이때 주제 발제를 한 사람은 이항령(민중불교운동), 전재성(민중불교운동서론), 이선주(불교의 사회성과 민중불교운동론), 전보삼(만해에 있어서 민중불교), 배춘상(한국 사회에 있어서 민중불교), 최주홍(대불련으로서의 민중불교)이었다. 당시 화랑대회가 대불련 운동의 좌표를 모색하고 실천하는, 또한 전국단위 대불련 운동의 이념을 공유하는 자리였음을 감안할 때 대불련 운동의 사회성,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의식적으로 도모하는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70년대 대불련은 전국 조직으로의 자기 강화와 대불련 운동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4. 80년대 대불련과 민중불교운동

80년대의 대불련은 ‘민중불교운동’으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념과 사상이 그러했으며, 조직활동의 근간이 그러했다. 더불어 대불련은 내부적으로 이전 시기와 다른 내적 문제가 있었다. 대불련 창립이 종단 유력인사들의 관심과 지원 속에 있었고, 그 이후의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80년대는 그러한 후원 없이 자력갱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시기였다.

대불련 활동의 가장 큰 지원자는 덕산 이한상 거사였다. 덕산 이한상 거사는 비단 대불련뿐만 아니라 불교계 여러 단체 및 기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70년대 초반까지 대불련이 총회 등 여러 회의와 청련제를 풍전호텔에서 진행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한상 거사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여러 상황으로 이한상 거사가 도미한 이후 안정적 지원구조가 없어졌으며, 대불련 역시 물질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 아니 지금까지도 대불련의 재정적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다.
1979년 당시 박용환 대불련 회장의 글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1)

대불련은…… 그 첫번째 문제는 정기적 보조지원의 불가능으로 빚어지는 재정적인 타격으로 말미암아 활성화된 행정적인 면을 갖출 수 없다는 점, 두번째 문제는 지도단의 부족으로 조직적 근본이념 달성이 불가능한 점을 크게 들 수 있다.

위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의 대불련의 상황은 창립 직후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1) 민중불교운동과 80년대 대불련 활동
앞서 거론하였듯이 80년대 대불련 활동은 ‘민중불교’를 거론하면서 출발하여야 한다. 민중불교운동의 조직적 출발을 ‘사원화 운동’으로 보는 데 이견은 없다. (명칭을 ‘사원화 운동’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하지만 사원화 운동은 대불련과 직접적이고 조직적인 연결은 없었다. 오히려 대불련에 있어 민중불교운동의 조직적 활동은 사원화 사건이 있었던 81년에서 1∼2년이 지난 82∼83년 전후이다.

대불련 활동의 변화의 출발은 ‘10·27법난과 이에 대한 규탄·항의’ ‘청년불교도연합’ ‘한국불교 1600년대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운동가들이 공개조직으로서의 대불련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사원화 사건 이후인 1982년부터이다.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화랑대회’가 ‘한국불교 1600년대회’로 개칭되어 진행되었으며, 한국불교 1600년대회는 이후 대불련 내의 민중불교운동 이념의 전파지로서의 성격으로 환골탈태한다.

대불련의 조직적 운동 참여는 ‘청년불교도연합’으로 귀결되었고, 1983년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회’를 기화로 대중운동으로서의 모습을 띄게 된다. 대불련 운동은 1985년 이후 ‘민중불교운동연합’ 창립, ‘해인사 승려대회’와 같은 불교 내적 운동 영역의 확보, 외부적으로는 공개적인 학생운동의 활동 등과 같은 시기에 대중화된다.

80년의 광주항쟁과 10·27법난은 대불련 운동의 주요 출발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80년의 광주가 한국 사회에 준 충격만큼이나 10·27법난이 불교계에 준 충격은 대단하였거니와 불교운동 대중화의 주요 계기로 작용한다. 1984년 10·27법난 규탄성명을 필두로 하여 대불련은 초기에는 독자적으로, 86년부터는 제 불교단체와 함께 ‘10·27법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를 진행한다. 이는 ‘불교자주화 운동’의 중요 동기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운동은 초기에는 시의적이고, 때로는 비공개적인 운동의 양상으로 전개되다가 87년 이후에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불교운동체를 건설하게 된다. 86∼87년 ‘민주헌법쟁취불교운동본부’로 시작하여, 88년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로 이어지는 불교운동 조직체의 주요 동력으로, 민중불교운동의 인력 재생산의 토대로서, 운동의 이념 전파지로서의 활동을 대불련은 담당하게 된다.

2) 80년대 대불련 운동의 특징
80년대의 대불련은 운동의 지향으로서 ‘민중불교운동’에 대한 평가와 많은 부분 중첩될 수밖에 없다. 민중불교운동의 전 영역이 대불련만의 것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80년대 중·후반까지의 영역에서 대불련의 역할은 다른 부분에 비하여 과소 평가할 수 없다.

또한 80년대 변혁운동이라는 거시적 틀 속에서 마르크시즘이 불교 내적으로 소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 중의 하나로 80년대 민중불교운동 진영에서는 ‘근본불교’를 불교적 이념의 출발로 삼게 된다.

(1) 민족불교, 민중불교
대불련에서 70년대 핵심 이념이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었다면 80년대 민족 문제의 중심은 ‘반외세 자주화’의 문제로 기록된다. 주지하듯, ‘민족’이라는 단어의 발견과 우리 내부에 뿌리 박힌 ‘민족주의’는 19세기 근대 후반의 일이다. 서구 열강과 일제 침략 시기에 ‘민족’이라는 근대의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민족주의는 지난 100년의 세월을 통하여 ‘한민족’이라는 뿌리깊은 무의식 구조를 형성하였다.

민족의식의 성장은 1600년 전에 한반도에 도입된 불교의 역사를 발판으로, 서구 침입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 문화와 대립항을 형성하며 ‘민족 불교’라는 의식을 무리 없이 형성하였고, 불교인들은 이 같은 근대 민족의식을 받아들인다. 80년대 운동진영에서 갖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반외세 자주화’였다.

대불련이 민중불교운동을 지향하였지만 ‘민중’이라는 개념은 ‘민족’ 만큼 큰 흡입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민중이라는 계급적 범주가 불교 내에 익숙한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계급 운동에서 종교는 변혁운동의 주요 동력이 될 수 없었으며, 최선을 다한다면 보조동력으로 연대운동의 한 층위를 차지할 뿐이었다. 실제로 초기 대불련 운동의 지도 그룹들은 대불련 운동을 불교운동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변혁운동의 전선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대불련 운동의 지위를 규정하기도 하였으며, 이 같은 흐름은 일부에서는 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기도 하였다.

(2) 사상으로서의 마르크시즘과 근본불교의 강조
80년대 대불련 운동을 ‘민중불교운동’이라는 개념으로 규정짓는다면, 사상적으로 이를 뒷받침한 것은 ‘마르크시즘’이었다. 불교운동의 주요 동력으로 대불련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80년대 중·후반에 ‘참여불교’ 대 ‘순수불교’의 대립항이 있었고, 참여불교의 중심은 변혁운동의 동참자로서 자기를 규정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르크시즘’이 있었다. 불교사상의 해석틀의 주요한 기준이 변증법이었고, 부처님을 사회운동가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 당시에 발간된 여러 책자에 담겨져 있다.

마르크시즘의 불교 내 인입은 ‘근본불교의 강조’로 나타난다. 근본불교의 강조가 꼭 80년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또한 근본불교의 강조가 불교운동 진영의 공으로만 돌리기 어렵지만 그 한 영역을 차지한 것은 분명하다. 근본불교는 마르크시즘의 틀로써 불교를 해석할 수 있는 주요한 텍스트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5. 90년대 이후의 대불련 활동

1) 90년대 이후의 대불련
9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은 80년대의 ‘변혁운동’을 대신하여 ‘시민사회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칭해진다. 시민사회운동이 변혁운동만큼 개념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운동의 내용과 형식을 달리하여 통칭된다. 80년대 운동의 연장보다는 단절의 성격이 크다.

90년대의 사회운동은 부문의 강화,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대를 지향한다. 80년대의 거시적인 혁명을 대신한 자리에 부문과 구체성이라는 미시적인 부분이 자리한다. 불교운동진영에는 종단 내적인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은 ‘종단개혁’이라는 운동의 지향성과 불교사상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 재가불교운동의 독자성 확보 노력과 조계종과의 제도적 관계 설정
94년 조계종 개혁운동은 대불련에 새로운 고민을 제기한다. 사실, 대불련 창립 이후 조계종단과 제도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던 적은 없었다. 대불련 창립과정에서, 이후의 지도 그룹에 조계종 스님들이 결합하였지만 종단 내에서 대불련의 위치가 제도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었다. 83년 신흥사 사건을 계기로 ‘청년불교도연합’을 형성하였지만 일시적이고, 사건 중심적인 틀이었다. 94년 개혁운동 과정에서 대불련은 ① 재가불교운동의 독자성, ② 종단과의 제도적 관계 형성을 고민하게 된다.

94∼95년 조계종단 개혁과정에서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의 모색’이라는 거시적 측면에서의 접근과 종단 내에서의 재가불자 지도력 확보가 현안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고민은 98년 조계종 사태까지 대불련 운동의 주요 현안으로 등장하였다. 94년 ‘한국재가불자연합’, 98년 ‘재가연대’라는 한시적 틀이 구성되었고 대불련도 이에 참여하게 된다. 1999∼2000년을 지나면서 ‘참여불교재가연대’라는 상시적인 틀로서 재가불교운동의 독자성과 영역은 강화되고 있다.

94년 종단개혁운동과 관련하여 대불련 활동에 나타난 또 다른 측면은 조계종단과의 제도적 관계 형성이다. 조계종의 종무행정이 정상화·구체화되면서 대불련은 조계종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다(최초 3000만원으로 시작하여 2001년은 1억으로 증가, 2002년 예산은 다시 3500만원으로 감소되었다). 한편 대불련은 조계종 신도법에 의한 조계종 등록단체이며, 조계종 중앙신도회 전국신행단체로 있으며, 대의원으로 참여한다.
대불련 역사에서 조계종단과의 관계를 제도적으로 설정한 적은 없었다. 과거에도 조계종단은 대불련을 ‘조계종’이라는 틀에서 묶고자 하였지만, 대불련은 반대로 그 틀 속에 자신을 규정짓고자 하지는 않았다.

(2) 수행을 통한 불교의 발견
90년대 대불련 운동의 변화는 새로운 가치관의 전개로부터 출발한다. 불교 내적으로 수행이라는 대중의 잠재적 욕구는 항상 있어 왔지만, 그것이 중심적 사업 내용으로 자리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80년대 이후 (사회 변화와는 독립적인 영역을 갖는) 개인의 수행, 불교적 깨달음의 문제가 대불련 활동에서 제도화된 것은 92년 이후 실시된 ‘수행학교’와 ‘교화단 활동’이다. 수행학교는 현재까지 매년 초 실시되고 있으며, 지금은 대불련 지도 인력 교육의 중심내용으로 자리잡혀 있다. 이외에도 대불련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 교육 시스템인 ‘KBUF 불교 아카데미’가 초기 ‘교화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진행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대불련 운동의 큰 특징이다. 7∼80년대의 소그룹 단위의 교리교육, 혹은 법회·수련대회를 통한 학습 구조가 중앙과 지부 단위에서 형성된 제도적 틀로 나타났다. 외형적으로는 다양한 학습기제의 흡입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지만, 내적으로는 ‘불교사상의 새로운 발견(?)’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급격한 ‘마르크시즘으로부터의 이탈’은 새로운 대안적 사상의 고민을 요구하였고, 당연하게도 불교운동 진영에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고민’들을 전개한다. 이 같은 고민이 대불련 단위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사상과 운동의 새로운 실험은 대불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사회운동가로서의 부처님보다는 이념과 가치로부터 해탈한 부처님이, 이를 위한 구체적 과정으로서의 ‘수행’이 일상생활에서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교육과 훈련이 대불련 1년 사업의 핵심 사업으로, 주요 캐치프레이즈로 등장하였다.

서울과 부산·대구·대전 지역에서는 새로운 공동체 운동이 모색되거나 진행되었으며, 특히 지역적으로는 ‘정토회’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생태주의 사상’이 특히 강조된 곳도 있었다.

(3) 통일운동
90년대 대불련이 진행한 사회운동은 역량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통일운동에 집중되었다. 통일운동은 90년대 초까지는 사회운동의 흐름과 함께 했다면, 96∼97년 ‘북녘동포돕기운동’이 통일운동의 주요 사업으로 전개되면서부터는 불교 운동으로 집중되었다. 대불련은 북녘동포돕기운동을 위한 사업의 일상적 참여, ‘통일 순례단’ 형성 등을 통하여 자체 교양과 실질적인 모금 사업을 진행하였다.

2) 2000년의 새로운 틀
1990년대와 2000년의 대불련을 현재에서 구분짓는 것이 무리이지만, 지금의 대불련 활동을 부분적으로라도 파악하기 위해서 편의상 2000년 전후로 대불련 내의 새로운 모습을 살펴보겠다. 9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사회와 대학 사회의 변화, 불교 내의 변화는 대불련 사업의 변화로 나타난다. 현재 대불련 사업에 나타나는 변화의 주요 부분만을 거론한다.

(1) 대학 사회를 거점으로
대불련은 수행과 포교로 압축되는 신행 활동을 중심 사업으로 전개하고 있다. 불교사상의 학습과 수행은 대불련 교육의 일상적 커리큘럼으로 자리잡혔으며, 조직 사업의 주요 역량도 이 부분에 집중되고 있다.
또한 ‘대학 단위 내에서의 포교와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신입생 포교를 위한 찬불가 테이프 보급, 홍보버튼 제작, 일상적 홍보자료의 배포 등은 과거와 비교할 때 적극적 방법이다. 또한 지회 지부 단위의 법회와 수련회를 강화하기 위한 지도법사 및 강사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또한 지회 단위에서 ‘생명나눔실천운동’, ‘생명 연등 달기 운동’을 지원하는 등 ‘불교 친화적’ 사업에 비중을 높이고 있다.

대불련은 2000년 기준 23개 지부, 173개 지회, 8개의 가등록 지회로 조직되어 있다. 지부·지회 활동의 강화는 대불련 조직 사업에 있어 항상 최우선적 순위를 가져온 부분이지만 ‘대학 사회’를 대불련 활동의 주요 거점으로 인식하는 것은 최근의 변화라 할 것이다. 대불련 할동의 주요 거점이 ‘지회’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간의 활동 중심이 ‘사회’ 혹은 ‘불교계’였음을 상기할 때 중요한 인식 변화라 할 것이다.

(2) 인터넷의 활용
2000년에 들어 나타난 최대의 변화는 사회 각 영역의 ‘디지털화’이다. 조직운동에 있어서도 인터넷을 필두로 한 디지털식 접근 방식은 필수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대불련 역시 마찬가지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으며,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대불련 홈페이지(www.ikbuf.org), 대불련 인터넷 방송국(www.ikbuf.net)의 공식적인 사이트 외에도 ‘대불련 법우들과(cafe.daum. net/kbuf/)’와 같은 카페 형식의 사이트는 대불련 활동의 일상이 되고 있다. 카페가 활성화된 다음 사이트(www.daum.net)에서 ‘대불련’으로 검색하면 총 55개의 카페가 검색되며, 특히 ‘대불련 법우들과’의 카페는 1511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어 종교 카페 중 최상위 그룹을 형성한다.

대불련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정토통신 사업을 주요 역점 사업으로 정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하여 첫째 중앙·지부·지회간의 의사소통 기반 확보, 둘째 인터넷을 통한 포교, 셋째 인터넷 공간에서의 대불련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3) 연대 운동의 변화
대불련이 80년대 이후 사회운동을 분명히 지향한 이후 대불련 연대 운동은 불교 내(內) 연합운동체를 통하여 진행되었다. 불교연합운동체는 대불련을 주요 근거로 삼아 자기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때로는 불교연합운동체와 대불련의 관계는 지도-피지도의 관계가 설정되기도 하였다. 민중불교운동연합-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전국불교운동연합으로 이어지는 불교 내 연합운동체와의 관계가 90년대 초반까지 주요 연대 운동이었다 한다면, 90년대 중반 이후 ‘북녘동포돕기 불교추진위원회’와 ‘재가연대’라는 틀로 연대 운동을 전개한다. 연대 운동은 대불련 사회활동의 중심 영역이었다.

그러나 현재 불교 내 연대 운동은 대불련 운동의 중심이 아니며, 대불련 역시 불교 내 연대 운동의 중심에 서있지 않다. 대불련은 오히려 2000년부터 ‘한국종교대학생연대’를 구성하여 이웃 종교와의 이해와 연대라는 대불련 특성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대불련 40여 년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창립 초기에 해당하는 60년대의 대불련은 지성불교·대중불교·민족불교를 그 이념적 지향으로 삼았다. 이 시기에 대불련은 대학생과 젊은층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포교방법들을 모색하였으며 조직의 기초를 다듬었다. 70년대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한 시기다. 화랑대회 등을 통해서 대불련 운동의 이념을 모색하는 등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시기로 볼 수 있다. 특히 76년의 제4차 화랑대회는 민중불교의 개념이 처음 제기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80년대에는 민족·민중 불교가 대불련의 주요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80년대의 변혁운동을 대신하여 시민사회운동이 전개되면서 대불련 또한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걸맞은 대안적 사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90년대 대불련의 지향점은 재가불교운동·수행의 강조·통일운동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90년 중반 이후, 특히 2000년에 들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대학 사회를 주된 활동 무대로 하여 ‘대학 단위 내에서의 포교’ 등에 중점을 두는 한편, 새로운 정보매체인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연대 운동 또한 ‘불교 내부에서의 연대 운동’보다는 ‘한국종교대학생연대’와 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나타나 주목된다.

대불련 역사 40년을 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직 운영이나 구체적인 신행 및 이념 등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물론 이것은 대불련만의 한계라 할 수 없다. 우리 불교인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문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실하고 아쉬운 것은 재정적 어려움이다. 대불련 본부의 사무실마저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오래 전 필자가 대불련 사무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 대불련은 현재 조계사 청년회 사무실로 쓰는 공간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이후 청소년교화연합회 사무실, 지금은 철거된 교육원 건물 4층으로 전전하였다. 그리고 건물이 철거된 현재 조계사 건너편 2층 사무실을 쓰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향후 4∼5년 뒤, 10년 뒤의 대불련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학생 조직이 갖는 독특함이며, 민첩함이라 생각한다. 학생 조직의 특성을 살려 대불련이 확고하게 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불련에게 특정 주체로서 자기를 규정짓고―선배·법사·법사·스님·조직·종단이라는 자격으로, 또는 운동·민족·민중·수행·재가불교라는 이름으로―해왔던 많은 말들을 겸손하게 거두어들이고,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섣부른 평가나 모색은 대불련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판과 평가에 앞서 아낌없는 애정과 후원이 우선될 때 대불련은 한국불교 지성의 산실, 한국불교를 짊어질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김남수
대불련 서울시 지부장 및 간사. 전국불교운동연합 사무국장 역임. 현재 조계사 포교계장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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