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재가 불교운동의 현황과 전망

1. 들어가면서

종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불교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여성불자들의 조직화는 21세기에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과제 앞에서 지난 역사 속 여성불자들의 활동과 운동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여성불교운동의 발자취를 다룬 논문마다 근·현대불교사에서의 여성불교운동은 활성화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보았다. 더구나 일반 여성운동이 여성의 자각과 자유 평등을 저해하는 사회 제도를 타파했지만 여성불자들은 이런 측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과연 여성불자들의 신행이 불교 외호에 대한 정성과 불우이웃돕기에만 국한됐던 것인지, 부족하지만 지난날의 모습을 통해서 굵직한 발자취를 점검해 보고 또한 분명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과제들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2. 일제하 여성불교운동

1) 조선말기에서 한일합방까지
고려시대까지 남녀 평등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 분위기 때문에 여성 차별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려말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전제왕권하의 남성은 왕을 섬기고, 여성은 남편을 섬기는 신하적인 위치로 변화되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구한말 인내천 사상을 지닌 동학의 “어린아이나 여성의 말이라도 하늘의 말씀으로 알고 배울 것은 배우고 스승 삼을 것은 스승 삼는다”는 정신 아래, 동학혁명 당시엔 수령으로 말 타고 총지휘를 하는 여성까지 탄생하였다.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유교사회 속에서도 동정녀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에 기독교는 성경과 함께 교육제도와 의료제도를 앞세우며 이 땅에 상륙했다. 여성의 복음을 위해서 교육이란 바탕 아래 절대절명의 소명의식으로 시작된 선교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교회 안의 여성들을 위한 야학과 강습회를 국한문 성경과 산술 등을 교육하는 기회로 삼았고, 이를 바탕으로 1886년 한 명의 여학생을 상대로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으며, 뒤이어 평양 정의여학교를 비롯해 기독교 여학교들이 줄지어 생겨났다.

그에 앞서 1876년 강화도 조약은 개항과 함께 열강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최고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였다. 그래서 현대적 교육기관인 원산학교, 동문학교, 육영공원 등이 세워졌다. 1896년 독립신문은 “계집아이 가르치는 학교는 없으니 정부에서 백성의 자식을 교육할 때 어찌 남녀가 층등 있게 하리오.”라는 논설을 통해 여성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관립학교를 세울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1907년 2월 일본은 이 나라를 예속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했는데 이로 인한 외채는 모두 1천3백만 원에 달했다. 나라 빚을 갚아 조선을 지키려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이 범국민운동에 4만여 명의 백성이 참여하여 230만원에 달하는 모금이 이루어졌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는 은비녀와 금가락지를 모으며 전국민의 호응을 받았는데 당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한 계층이 불교였고 바로 여성들이었다. 건봉사의 봉명학교 교직원과 스님들이 146원 76전을 성금으로 기탁했고, 주요 사찰이 이 운동에 동참해 모두 586명, 액수로는 476원 11전에 달했다. 이 안에 이름없이 보시하고 참여했을, 그리고 보도되지 않은 기탁 건수를 생각하면 실제 참여 인원과 액수가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이렇듯 국채를 갚고 국권만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여자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돼 남녀 동권을 찾을 것이니… ― 〈대구 부인들의 경고문〉 중에서

2) 일제하 여성불교운동
일제시대의 여성운동은 학교 교육을 받았던 지식인 여성, 해외 유학파 여성들이 중심이 돼 이끌어갔다. 초기에는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운동이라기보다는 투옥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에 대한 후원, 해외 독립 단체의 군자금 모금과 같은 보조적 차원의 민족운동이었다. 작은 규모로 시작된 이들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대규모 항일단체로 발전하게 됐고, 후에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단체가 대한애국부인회와 평양의 애국부인회 등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운동가들 사이에선 민족문제와 여성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군자금 모금보다 여성의 힘을 기르는 것이 절실하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인식 아래 조선여자청년회, 조선여자교육협회 등이 만들어졌고, 1922년에는 조선불교여자청년회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가 발족했다.
이에 앞서 조선불교청년회가 만해 스님의 주도하에 1920년 창립됐다. 비구 스님이 중심이 돼 불교개혁과 사찰령 철폐 같은 활동을 펼쳤다. 1922년 창립한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사간동의 회관을 임대해 능인여자학원을 운영했다. 이곳에서 강연회, 토론회, 부인강좌 등이 개설됐고 불교에 관한 연구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2년에 문을 연 능인여자학원은 가정부인들이 주된 학생층으로 4개의 반으로 나뉘어 2백여 명이 공부를 하는 불교계 유일의 여성교육기관이었다.

1923년 3월에 전국의 청년단체가 하나로 모이는 ‘전조선청년당대회’가 열렸다. 전국의 90여 개 청년단체가 참여했는데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이 대회의 주최 단체로 이름이 올라 있다. 단순히 계몽활동에 머물지 않고 조선청년들과 연대해 민족해방의 대열에 나란히 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 〈조선불교〉 12호에 실린 조선불교여자청년회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 여자 사회의 선진인 우봉운 여사는 자애롭게 감동하고 분투하여 동지를 규합시켜 불타의 진정신으로서 여성의 덕성을 함양시키는 지식계발을 위해 지난 대정 11년 4월 조선불교여자청년회라는 단체를 조직한 이래 4개 성상 동안 회장 우봉운 여사의 열성과 노력은 일시도 그치지 않아 그의 결과로써 백여 명의 회원을 가진 우리 불교 여자계의 유일무이하게 서있는 기관이 되었다.

우봉운은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계성학교 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회장을 맡으면서 활발한 대 사회운동을 펼친 여성이다.

중앙학림이 폐교되고 일제의 청년 단체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면서 불교청년운동이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자연히 불교여자청년회의 활동에도 제약이 뒤따르게 되었다. 1925년 능인여자학원의 경영권이 일본 사찰로 이관되기에 이른다. 운영상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중앙 교무원 평의원회에 조선여자청년회가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이 사안은 거부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체의 중심 여성들은 다른 여성 단체와의 교류 속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1924년 창립한 조선여성동우회에 우봉운, 김광호 등이 참여하고 있었고, 1925년에 창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의 발기인으로도 우봉운은 참여하고 있다. 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입각한 무산(無産)여성의 해방을 내건 선언을 발표하고 활동을 전개하던 단체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활동 중에 가장 두드러진 일로 ‘근우회’ 활동의 참여를 빼놓을 수 없다. 1927년에는 신간회와 근우회라는 단체가 잇따라 조직돼 가장 왕성한 민족운동을 펼쳤다.

각기 분산돼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합해서 독립운동의 역량을 높이고, 좌우익으로 분열된 민족 독립운동 노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대표적인 항일 단체로 1927년 2월 15일에 신간회가 발족됐다. 신간회가 남성 중심의 단체라면 근우회는 1927년에 창립하고 1931년에 해산된 여성 항일구국운동과 여성 지위향상운동을 해온 한국 여성사에 굵직하게 기록되는 단체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조직된 직후 자매단체의 성격으로 5월 민족주의 여성운동계의 김활란, 최은희 등과 사회주의 계열의 정종명, 주세죽 등이 손잡고 이념을 떠나 여성의 대동단결을 꾀하기 위해 창립한 단체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취지에 각자의 사상적 이념을 떠나 하나가 됐던 것이다.

발기인 모임에서 김일엽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일본인 유학파들이 함께 하고 있었던 모임이기도 하지만, 당시 김일엽은 출가 전이었으며 여권사상을 대변하던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의 주필로 활동 중이었다. 발기 총회에서 이들은 근우회 창립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여성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인간적 지위에 있지 못하였고 가정에 있어서까지 세상과는 벽을 쌓고 살아 왔으나 여성의 지위향상과 단결을 하자.

강령으로 조선여자의 확고한 단결을 도모하고 조선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한다고 했다. 분산돼 있던 여성단체들을 하나의 전선으로 모으고,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효율적인 여성운동을 펼치자는 것이 근우회가 내세운 정신이었다. 운동 목표로는 ‘봉건적 굴레’와 ‘일제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각지와 일본 및 만주에 지부를 뒀다.

근우회 회원 가운데 기독교 여성이 총 구성원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전체 집행위원 21명 중에 7명이 기독교 계열의 여성들이었다는 기독교 여성 단체의 기록으로 보아 집행위원이나 구성원 중에는 불자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근우회 초기 회장은 김활란이 맡았으며 각기 다양한 부서가 조직돼 활동했다. 이 가운데 낯익은 이름인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회장인 우봉운은 재무부의 집행위원 명단에 올라 있다.

이들이 초기에 주력했던 사업은 여성지도자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 재정 마련을 위한 기부금 모금 및 자체 수익사업, 지회 설립을 통한 전국 여성 단일 단체로서의 정비, 그리고 민족운동의 지원 등이었다. 이를 위해서 매월 15일을 근우회 선전일로 정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천하였다. 여성지도자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으로는 부인 강좌·토론회, 그리고 강연회 등이 있었다. 부인 강좌는 경제학에서부터 부인 문제, 회의 진행법 등 수준 높은 강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근우회 하기 강연회에선 ‘여성운동의 진로’ ‘환경과 인구의 관계를 논하여 조선 여성의 현상에 급함’이란 앞서가는 발표도 있었다.

근우회의 창립 이념을 여실히 드러낸 프로그램이었던 토론회가 1927년 10월 20일에 개최되었다. ‘조선여자 해방의 첩경이 경제독립이냐, 지식 향상이냐’라는 주제 아래 대 토론회도 열렸다. 여성 지위향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 하나 근우회의 활동 중 의미 있는 것은 민족운동의 지원이다. 각 학교 맹휴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지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가령 192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일본인 교사를 사퇴시키고 조선인 교원 채용을 증가시키라는 주장 아래 맹휴에 돌입하자 이 문제에 적극 관여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근우회는 1929∼1930년 사이에 지회 수가 70여 개로 크게 늘었으며, 회원도 1929년 5월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의 개최, 야학 실시, 문맹 퇴치 같은 당대의 여성 계몽사업과 함께 여공파업의 진상 조사, 광주학생운동 및 각종 항일학생운동 지도와 지원 등을 주된 활동으로 펼쳤다. 반제 반봉건이란 목표 아래 활동을 시작한 근우회는 실질적인 일들을 사회주의 진영에서 추진해 나가면서 민족진영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마침내 근우회는 신간회가 해체될 무렵에 해산되었다. 이후의 여성운동은 민족주의 계통 여성들이 주도하는 농촌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기반에 둔 여성운동으로 확연히 갈래지어진다.

장황하게 근우회를 정리한 것은,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소속 회원들과 여성불자들이 대거 근우회와 인연을 맺고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주의 계열에 소속된 활동이었든, 혹은 개량적인 민족운동이었든 비록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활동은 침잠 상태였다고 해도, 민족을 위한 대사회적인 활동에 쉼없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 같은 근우회의 활동 경험은, 또다시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재건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1929년 7월, 대자유치원 보모들이 중심이 돼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발기인을 모집한다. 대자유치원의 원장이 조선불교청년회의 핵심멤버였다는 점에서 자극적 요인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해 10월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재발족했다. 김광호 같은 초기 인물들이 임원명단에 보인다. 김일엽을 비롯한 신여성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주요 사업은 ‘불교 일요학교를 확장시키는 일’, ‘불교 부인 강좌를 개설하는 일’, ‘재봉학원을 경영해서 회원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일’ 등이었다. 이 결과 1930년 봄부터 재봉학원이 운영됐고, 재봉학원의 후신으로 명성여자실업학원이 설립된다. 명성여자실업학원은 대자유치원의 후신이라고 하는데, 양복과 자수·편물·염색과 세탁 등의 교과목을 이백 명의 학생들에게 본과·연구과·별과·전수과 등의 4개 과에서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회원들이 교사가 돼 가르쳤다고 전한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변화하면서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그 산하의 불교청년여자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아울러 김일엽, 박순덕, 김광호 등도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책임 위원으로 피선됐다는 점에서, 이들의 활동 역량이 불교 개혁과 불교청년운동의 중심에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1931년 가을에 불교청년여자동맹에서 명성여자실업학원이 경영난으로 비불교계 인사가 학교를 인수하는 것을 절대로 양여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있었다. 이로 인해 종회원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학원 운영에 31본산이 유지비 문제를 해결케 했다고 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학원은 1935년에 명성학교로 인가돼 보통과와 고등과를 두고 불교교리까지 교육했다. 1934년경까지는 어렵사리 불교청년여자동맹에서 학원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부터 불교청년여자동맹은 경성여자동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불교청년운동의 중심을 이루던 조선불교청년총동맹과 함께 활동이 침체되기 시작했으나, 1939년도에도 기사에 단체 이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는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3. 해방 이후 여성불교 활동

해방 직후 불교계에 혁신단체의 연합모임으로 불교혁신총동맹이 활동을 개시하면서 불교여성총동맹이 발족했다. 18살 이상의 불교를 신앙하는 부녀를 대상으로 하는 이 단체의 성격은 다음의 선언문에서 엿볼 수 있다.

시대의 요청이 또한 우리 여성으로 하여금 규중염불만을 허락치 않는 도다. 이에 우리는 영산회상의 유촉을 다시 상기하고 숙세선근의 본원력을 더욱 분발하여 불교여성동맹을 결성하노라. 우리의 신명재를 바쳐서 정법을 수호하자, 일어서라, 나아가자, 불타 군대의 행오에 들어서라. 인욕의 갑옥과 자비의 투구와 지혜의 칼로 굳게 무장하고 마군들을 분쇄하자.

격렬한 듯 여겨지는 선언문의 일부처럼 불교의 혁신을 내세운 이 단체는 대중불교를 건설하고 사회 사업을 진흥하며 민족단결을 촉진하고 남녀 동권을 확립하겠다는 강령 아래 활동을 펼쳤다. 이념의 갈등과 분열의 해방의 공간에서 불교가 민족이 국난에 처했을 때 극복했던 전통을 되살려 독립국가의 바탕을 다지겠다는 의지와 함께 생겨난 이 단체는 그러나 교단 집행부와의 갈등과 대립만을 낳고 말았다.

전쟁 이후 황폐해진 1950년대 이후 비구·대처 정화를 겪으면서 1957년 반야부인회가 결성됐다. 이들 단체는 정화불사의 재정적 지원에 적극 참여하면서 신도들을 모아, 절을 접수하는 행동대원을 도맡았다.

1965년 대각사에서 황이선이 발기한 대각회가 발족됐다. 여성이 중심을 이룬 이 모임은 후에 원각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65년 김인수가 이끈 관음클럽도 교리를 배우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자는 모임으로 교리공부를 중심에 두고 봉사활동과 장학사업을 전개했다. 이후로 무수한 여성불자 모임들이 생겨났다 사라졌으나, 대부분이 여성이 함께 모였다는 점 외에 여성단체로서의 성격 규정을 할 수 있는 성격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문을 열면서, 여대생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됐다. 유신 이후 암울한 독재가 시작되면서 대불련의 활동은 기존 청년회 활동과 달리 사회 인식과 신념을 바탕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모순 타파를 목적으로 대사회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1977년 〈대화〉지 10월호에 전재성이 민중불교론을 언급하면서 본격적인 운동이 펼쳐졌다. 1980년대에 칠보사와 묘각사를 중심으로 사원화 운동이 펼쳐졌으며 1980년 권력에 의해 빚어진 10·27법난은 청년 불자들을 대사회 운동으로 이끄는 촉매제가 되었다.

4. 1980년대의 여성불교운동

불교의 자주화, 사회의 민주화, 민족의 자주화라는 기치 아래 민중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된 것은 1985년 5월이였다. 여익구를 의장으로 인사동에서 시작된 민불련은 창립대회조차 전투경찰의 저지로 모두 연행될 만큼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 정국이 혼란스럽던 때다. 1987년 대선 이후 민불련 내부의 집행부도 노선 차이로 갈등을 빚어 조직이 대거 변화를 겪었고 1989년에 전면 탄압을 받아 조직의 지도부가 모두 구속되면서 공식적인 조직활동은 막이 내렸다.

민불련 산하 부서인 여성부는 민불련 발족과 함께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시작했다. 주된 활동은 사회 여성 단체와의 연계였다. 당시 여성평우회, 기독여성농민회,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여성부 등이 소속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산하 단체로 가입해 대 사회적인 여성문제에 주력했다. 성도어패럴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항의와 해고 노동자 복직운동에 적극 참가해 불매운동을 시작하고 항의시위를 벌였고, TV시청료 폐지운동 촉진대회를 여는가 하면,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 일어나자 부천경찰서 성고문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부천경찰서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이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87년까지 민불련 여성부 회원은 약 30여 명으로 대부분이 직장여성들이었다. 간호사에서부터 공장직공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부처님 가르침 안에 모여 사회 변혁을 시도했다. 보다 단단한 조직구성을 위해 사찰청년회와의 연계활동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는 이루지 못했다. 짧은 역사였지만 가장 역동적이던 시절의 조직적인 운동이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대 사회적인 문제 속에서 불교여성단체의 이름이 빠짐없이 들어가고 여성단체연합 안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각기 봉사활동과 교리공부에 주력하던 일부 여성불교단체들이 두 개의 연합체로 발족한 것이 1980년대의 일이다. 1980년 부산지역의 13개 신행단체가 모여 한국불교부인회를 결성했다. 또한 1981년 롯데호텔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고 기복불교 탈피와 여성불교회관 설립, 여성법률 상담소 운영, 국제 교류와 같은 목적 사업을 기획한 한국여성불교중앙회도 있었지만, 활동은 부진했다. 이후 1984년 전 한국불교여성회가 만들어져 청소년 교화와 고아·노약자 보호, 불우여성 구제 사업에 전력하겠다는 취지로 창립했지만, 검소한 혼례복 패션쇼 같은 활동과 영세민 무료 합동결혼식을 주선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1986년에는 조계종 산하에 여성불교 봉사회가 결성됐고 이 단체 역시 사회봉사활동, 군부대와의 자매결연 같은 활동에 머물렀다.

도리어 정토회의 전신인 중앙불교교육원에서 1988년에 7차례에 걸쳐 연 불교여성강좌는 ‘한국 사회의 여성 현실’ ‘불교의 여성 해방 사상’, ‘여성과 법률’ 같은 강의를 통해서 올바른 여성관과 사회 발전에 주체적으로 기여하는 여성불자 교육의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한국불교사회교육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민족여성학교를 개설해 농촌사회와 여성 농민, 여성 노동자의 현실, 빈민 여성과 빈민 아동 같은 기층 여성의 현실적 삶에 접근하는 내용을 다루었던 것은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5. 90년대 이후의 변화된 실천

암울하던 독재 시절에 온몸으로 참여했던 스님들과 정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스님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1994년 종단의 개혁 불사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고 대불련, 민불련 출신의 청년들이 종단의 곳곳에서 활동을 펼치면서 불교계의 대 사회적인 실천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시위와 집회가 중심을 이루던 1980년대와 달리 1990년대에 두드러진 활동은 도농 직거래를 통해 농촌과 도시 여성과의 연계를 시도한 일이다. 절 안에 유기농 재배 농산물을 판매하거나 지역 사찰과 연계해 직거래 매장을 연 일 등은 앞으로 불교여성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환경문제와 생태문제가 주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여성불자들의 실천은 눈에 띄게 많아진다. 1990년대 초반, 만인공존·만물공생·인권존중·정의구현 등을 기반으로 경제정의실천 불교시민연합이 창립하면서 경불련 여성위원회가 앞장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여성불교연합회, 대한불교부인회 등 불교계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여전히 자원봉사 활동에 머무는 차원이다. 다도강좌, 불교교리 강좌, 성지 순례 등은 굳이 여성단체에 가입하지 않고도 누구라도 어디에서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다. 불교여성단체만의 색깔로 정체성을 찾는 작업과 단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 지지부진한 것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요구된다.

여성 활동가들이 중심을 이루고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정토회의 경우 ‘(사)좋은 벗들’을 통해 북한동포돕기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고, JTS 활동을 통해 제3세계의 고통받는 이웃들과 자비를 나누는 일을 십년 가까이 하고 있는 것도 좋은 본보기로 여겨진다.

2000년에는 여성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자아실현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제시한다는 원력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이 문을 열었다. 여성단체들과 연계해서 호주제 철폐운동을 펼치는 등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 기대만큼 여성불자들의 지위 향상과 사회참여운동에 큰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 최근 불교인권위원회 산하의 불교여성회가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 단체로 발족해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펼치고 있다.

6. 여성불교운동의 흐름을 통해본 과제

무수한 불교 여성 단체들이 명멸했고 또 다시 맥을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찰을 외호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무수히 많기에 이 글에서는 대 사회적인 문제, 특히 여성의 현실을 불교 여성 단체가 어떻게 풀어왔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무엇보다 일제 치하를 거치면서 조선불교여자청년회를 시작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사회 운동의 모습은, 혼란의 시대에 여성불자들의 역량을 보여준 작업이었다.
불교 여성 단체의 조직화 문제는 십년 전이나 오십년 전이나 팔십년 전이나 한결같은 과제로 남아있다. 비조직화가 활동의 부진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근자가 많아서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반드시 숫자가 많다고 조직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을 영입해 사안마다 문제를 풀 수 있는 노력이 시급하지 않나 싶다.

오늘날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건재한 모습으로 상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장기적으로 정체성을 갖고 펼쳐온 작업에 기인한다. 또한 시대 속에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이슈를 찾아내고 문제제기 하고 대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순발력이 단체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북한산 도로 관통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 어떤 불교 여성 단체가 방문해서 문제제기를 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없다. 이제 불교계의 제반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지역사찰과 연계해서 지역주민의 삶을 고양시키는 불교여성 단체의 활약을 기대한다. 아울러 교단내의 완고한 남녀차별 문제, 특히 비구니 스님의 현실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발언하고 비구니 스님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추동해내는 불교 여성 단체의 역할이 절실하다.

단순히 가장 많은 신도를 갖고 있고, 그 중에 80%가 여성불자라는 식의 숫자 부풀리기 속에서 불교여성단체는 왜 조직화가 되지 않는가를 되묻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오히려 크게 상을 드러내지 않고, 개별적으로 신행하는 것에 만족하는 불교의 기존 성향 탓으로 보인다. 무수한 여성 단체가 제각기 존재하는 것도 어쩌면 불교적인 성향일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얼마나 여성 해방의 관점에 입각해 있는가를 역설하는 일보다 단체의 성격에 걸맞는 적극적인 실천을 보여주는 일, 여성불교회관 건립과 같은 하드웨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듯한 작은 사업 하나라도 꾸준히 지속해나가고 사회 속에 불교적 실천을 보여주는 일, 그것이 오늘의 현실 속에서 불교여성단체가 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

이윤수
월간 <대중불교>기자.민중불교운동연합 여성부장을 거쳐 현재 KBS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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