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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선불교를 보다
박재현, <깨달음의 신화>(푸른역사,2002)
[13호] 2001년 03월 10일 (토) 최원섭 academy@songchol.net
1. 다른 사람에게 말 걸기

   
학문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장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왜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담이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 모두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야 한다는 당연한 몇 가지만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을 뿐, 학문을 하려고 책을 보는 일과 장사를 하려고 돈을 세는 일에는 고상함과 세속적이라는 선입견의 차이만큼이나 큰 무언가가 있다.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혹시 사람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닐까? 너무 뜬금없는 의문이라 나 스스로도 과연 그럴까 싶지만, 학문적인 책을 내는 사람들은 누가 읽을지 걱정이라며 도대체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책을 너무 안 읽는다는 불평을 해대고, 학문과 별 상관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조금 전에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그 사람들은 도대체 학문의 껍데기를 걸친 책들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한다고 불만인 것을 보면 어쩌면 사람 자체가 학문하는 사람과 장사하는 사람으로 구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올 초에 전해들은 ‘학술에세이’ 공모 소식에 나는 적잖은 기대를 했다. 주최측에서 에세이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고 잘못된 에세이의 의미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밝힐 만큼 학문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도 나는 바로 그런 주최측의 의지에 믿음이 갔다. 평저울의 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한쪽에 말을 건네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일들이 학문하는 사람들의 유행이 되면 ‘사람의 종류가 구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나의 막연한 의심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모 소식만큼이나 나에게 반가웠던 것은 그 결과였다. 최우수상으로 선정된 두 편의 에세이 모두가 불교를 다루고 있었다. 평소 안면이 있었던 이도흠 선생의 〈생태이론과 화쟁사상의 종합〉과 그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던 박재현 선생의 〈생명 : 중(中)과 소통의 생명성〉. 이도흠 선생의 에세이는 그의 지론인 화쟁기호학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고 박재현 선생의 에세이는 ‘중(中)’이라는 개념으로 생명을 다루고 있었다. 그것이 ‘박재현’이라는 이름을 나의 머릿속에 넣게 된 사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학술에세이를 통해 만난 이의 이름이 적힌 책 한 권을 들고 있다. 《깨달음의 신화》. 내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까지 저자와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다.

2. 다른 사람과의 공통점 찾기

누군가에게 말을 걸려면 그 사람이 관심 갖는 것이 내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내가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다 못해 지금은 소개팅이라고 불리는 맞선을 보더라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며 상대에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공통점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이야기는 급진전된다. 진도가 나간다는 말이다.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불쑥 튀어나와 “도를 아느냐?”든가 “얼굴에서 맑은 영이 비친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기 힘든 것은 그런 몇 가지 단어들 속에서는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것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저 “전 그런 거 관심없어요”라고 하면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하기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들과 장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만일 이들에게서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람의 종류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나의 걱정은 확신이 될 것이고 학술에세이 같은 것은 아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깨달음의 신화》에서 그런 공통점을 찾으려는 저자의 노력을 본다.

인문학이 학문의 영역으로 끝나지 않고 일반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쉽게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은 쉬운 우리말로 글을 쓰는 일이다. 가급적이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구어체 문장으로 적는 일 말이다. 더구나 한문이라는 장벽이 또 하나 서 있는 불교, 특히 선불교를 이야기할 때는 이것이 한결 어렵고 또 그런 만큼 제대로 하기만 하면 그 성과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할 것 같다.

《깨달음의 신화》는 그런 점에서 일단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논문투의 글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문장, 거기에 간간히 등장하는 생생한 구어 단어가 정말 읽는 재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할 때 쉽게 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의 틀을 만들어 재구성하는 일이다. 자칫하면 내용을 왜곡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따로따로 늘어서 있는 사실만을 전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내용을 전하는 데 이것보다 탁월한 것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매일매일 점심 시간마다 어떤 메뉴를 고를까 하는 고민을 하는 데도 이것저것 떠오르는 음식을 나열하기보다는 한식 메뉴에는 이런 것, 중식 메뉴에는 저런 것, 분식 메뉴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있다고 분류해서 생각한 다음에 고르는 것이 많은 메뉴를 빠르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매일, 정말 매일 느낀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의 신화》는 놀랄 만큼 훌륭하게 이런 틀을 잘 이용하고 있다. 선불교에 대한 이의 제기를 ‘가섭 살리기와 아난 죽이기’로 시작하면서 책을 쥔 나의 손을 떨리게 만들더니 ‘문의 이미지’로 이어 ‘중(中)의 이미지’로 펼쳐나가다가 회통과 일치를 ‘변방성’으로 풀어내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방편의 이미지’로 마무리를 짓는 저자의 솜씨란! 갑자기 연전에 교계 기자에게 했다는 어느 소장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불교학계에서 나오는 책 가운데 읽을 만한 게 있나. 전부 그게 그거고. 진부한 내용을 단어만 바꾸어 써 놓은 것 아닌가. 문제의식도 없고. 그러다 보니 내용에 참신하고 도움되는 것들이 들어 있지가 않다. 참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불교권 내에 있으면서, 불교적인 마인드가 풍부한 곳에서 공부하면서 불교에 대한, 아니 불교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렇게 박약하다니. 한 마디로 불교학권에서 나오는 책은 볼 게 없다.”

여기서 불교학권이란 게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노 코멘트’ 했다. 그러다 불교 집안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학계를 말한다고 내던졌다.1)

저 소장학자의 말과 정반대되는 책이 바로 《깨달음의 신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원형과 모방의 선불교사”라는 부제만큼 강력한 ‘문제의식’이 과연 존재할까? 이건 모두가 문제의식 덩어리이니 말이다. 어쩌면 저자가 ‘불교 집안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학계’에 있지 않아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기자가 이야기하는 ‘불교학권’의 병폐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인데… 나는 정말 고민된다.

불교학권에 있는 내가 선불교를 비판하는 이 책에 찬사를 보내면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지를 훼손하는 일에 동조하는 일이니 “오늘 이 글에서 한 말이 나중에 부메랑이 돼 나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조병활, 192쪽)야 하는 걸까?

3. 쉬운 것이 쉬운 게 아니다

나는 《깨달음의 신화》에서 펼치고 있는 내용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끼어드는 동서양 철학의 개념어들을 만나면서도 턱없이 모자란 나의 독서량을 탓하며 책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자의 이런 말을 만났다.

어려운 얘기를 쉽게 쓰는 것이 유행인 시대에, 작고 가벼운 말들이 어여삐 여겨지는 시대에, 쉬운 얘기를 어렵게 쓰는 것은 정말이지 모험이다. 서초동 어느 찻집에서 마주한 편집자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물었다. 왜 글의 중간중간에 개념의 지뢰밭이 포진하고 있냐고. 나는 몇 마디 생각을 엮어 변명 아닌 변명을 나열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막막하기만 하던지.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내게 세상은 ‘한 권으로’ 읽히지도 않고 ‘쉽게’ 읽히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 나의 화두는 언제나 내 발 밑에 있고, 알고 싶은 것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다.2)

내가 쉬운 글로 대중들에게 말을 거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저자는 정작 ‘쉬운 얘기를 어렵게 쓴다’고 한다. 물론 ‘언제나 내 발 밑에 있는’, 그래서 ‘이론보다 풍부한 현실’(조병활, 199쪽)을 몇 마디 말로 하는 일의 부당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이런 말은 내가 보기에 언제나 소통을 갈구하는 저자의 노력을 지나치게 겸손하게 에둘러 말한 감이 들지만, 실제로 그 많은 개념어들이 《깨달음의 신화》를 술술 읽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위해서 읽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저자의 곁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고갯길을 몇 구비나 돌다가 제자리를 찾아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저자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부분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라는 학자가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불교학권에서는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권을 살짝 벗어나면 그의 인기가 대단한 것 같다. 《불교(Le Bouddhisme)》와 《동양종교와 죽음(La Mort dans les Religions d’Asie)》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문고판 서적을 제외하고는 실제적인 대표작인 《정통의 의지 : 북종선에 대한 비판적 계보학(The Will to Orthodoxy : a Critical Genealogy of Northern Chan Buddhism)》, 《즉각성의 수사학 : 선불교에 대한 문화적 비판(The Rhetoric of Immediacy : a cultural critique of Chan/Zen Buddhism)》, 《선의 통찰과 간과 : 선불교 전통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Chan Insights and Oversights : an Epistemological critique of the Chan tradition)》, 《붉은 실 : 성에 대한 불교적 접근(The Red Thread : Buddhist approaches to sexuality)》 등이 아직 우리말로 소개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 영향력이 서서히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의 신화》는 아마도 그 첫번째 결과물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베르나르 포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 속으로 선불교의 문헌과 문화사를 완전히 소화해 버”리고 “포스트모던 이론들의 기본적인 교의, 즉 이념화된 본질주의에 대한 탈신화화를 근본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3) 이념화된 본질주의에 대한 탈신화화라….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쉽게 다가올 듯하던 《깨달음의 신화》가 갑자기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필자가 포르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즉각성의 수사학’, 또는 ‘깨달음의 수사학’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포르의 책 제목을 닮은 ‘깨달음의 신화’라는 제목부터이다. 제목 자체가 이미 ‘탈신화화’적이지 않은가. 서설에 등장하는 ‘통찰’과 ‘간과’, ‘방편’의 이미지, ‘중심’과 ‘주변’, ‘진동’ 등의 용어들 역시 그런 영향을 보여주고 북종 신수에 대해 비교적 옹호적인 입장으로 전개되는 논지 역시 그렇다. 특히 문화적인 요소들과 인식론적인 요소들로 선을 비판하는 것을 보며 필자는 포르의 영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깨달음의 신화》가 보여주는 새롭고 감탄스러운 비판 속에는 때로 오해를 살 만한 용어가 숨어 있다. ‘중(中)’을 “단(斷)과 상(常)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진동하는 것뿐”(106쪽)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저자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한 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중의 체험”이라고 피난처를 마련해 놓았어도 나는 ‘단과 상을 진동하는 중’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다.

저자도 지적하듯이 용수가 그토록 흠모해마지 않던 ‘중’은 열 네 가지 상대(相對)적인 질문들로는 파악할 수 없는, 상과 단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제3의 길(中道)이기 때문이다. 제3의 길이라고 해서 “여전히 상징에 불과하”여 “존재의 장에서는 구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바로 보는 것이 바로 중이다. 나는 바른 것(正)이 중이라고 알고 있다.

4. 삶은 고통스러운가, 경이로운가

나는 ‘글쓴이의 글’에 담긴 저자의 고백이 무척 인상적이다.

불교의 삶이란 끝내 고단할 수밖에 없다는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해서, 고통의 바다(苦海)와 부질없음(無常)은 불교의 영원한 공간적 배경이요 시간적 배경이 됩니다. 그런데 선불교는 좀 다릅니다. 선불교에서 삶은 늘 경이롭습니다. 새벽 닭 우는 소리도 경이롭고, 장작 패는 소리도 경이롭고,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조차 경이롭습니다. 그들에게 경이로움의 대상은 일상입니다. 일상에서도 경이로울 수 있다는 그들이 제게는 차라리 경이롭습니다.(5쪽)

아마도 저자가 선불교에 이의를 제기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삶을 경이롭게 보는 선의 태도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신 내용에는 분명히 우리의 현실은 고해이고 무상하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선불교는 자꾸 현실이 경이롭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저자는 문제삼는다. 필자가 ‘글쓴이의 말’로 이해하기에는 《깨달음의 신화》가 가장 바르고 뛰어난 것으로 인정하는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성이 녹아 있는 초기불교이다.

하지만 아무리 초기불교가 삼법인을 강조한다고 해도 ‘불교의 삶이란 끝내 고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어째 좀 찜찜하다. 깨닫지 못했을 때는 괴롭지만 깨달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 아니던가? 만일 그런 깨달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고 물으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이야기는 오히려 불교가 아닌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뭐 그렇다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거창하게 설명하지도 않으셨지 않은가?

그저 바로 보는 일, 그것이 깨달은 사람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필자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개인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상의 원리를 잘못 보고 있으니까 고통이다, 그러니 바로 보라, 오!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찬탄과 환희가 불교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의 신화》에는 화엄과 선이 교섭하게 되는 중요한 사항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이 필자의 눈에 보였다. 바로 신라 의상이 체계화시킨 ‘성기(性起)’에 대한 내용이다. 성기야말로 현실을 긍정하는 이론의 가장 정점에 있는데도 말이다. 화엄사상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무명에서 퍼져가는 연기론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나는, 저자가 삶의 경이로움을 일부러 빼버리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지나가는 김에 한 가지 더. 《깨달음의 신화》에는 자꾸 지눌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화엄사상은 의상 이후로 끊어진 것이고 지눌의 사상은 중국의 아류에 속하는 것일까? 이미 지눌이 의상의 영향도 상당 부분 받았다고 증명되었고4) 화엄의 핵심교의가 지엄→의상→법장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변용되었는데5) 그런 점은 아쉽게 여겨진다.

5. 비판과 애정의 대화

《깨달음의 신화》의 책장을 덮던 나는 뜻밖에 선불교를 비판하는 와중에 은근히 안타까워하는 저자의 희미한 목소리를 듣는다. 《깨달음의 신화》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실존적 사무침’에서 나오는 불교, ‘언제나 내 발 밑에 있는 화두’,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알고 싶은 것’이다.

딸 아이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어떻게 경이로울 수 있느냐는 항변은 도대체 학문 해서 무엇을 먹고 살 수 있느냐는 장사하는 사람의 비난과 같은 의미이다. 필자가 책장을 덮고 나서도 《깨달음의 신화》가 던져준 화두처럼 가슴에 전해주는 기억에 남는 저자의 이야기.

선불교가 사실의 세계를 보여주는지 아니면 마술의 세계를 보여주는지, 나는 아직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마술이든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선불교의 관객은 관객일 뿐만 아니라 배우인 까닭입니다. 손이 많이 무겁습니다. 그만 쓰겠습니다.(7쪽) ■

최원섭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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