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본다

1. 초기불교1)란 무엇인가

 불교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또 여러 지역에 전해졌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불교를 분류할 때 시대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불교를 시대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고, 지역에 따라 분류하면 인도불교, 남방불교, 티베트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각 지역의 불교도 시대적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Early Buddhism)’는 ‘근본불교(Fundamental Buddhism)’ 또는 ‘원시불교(Primitive Buddhism)’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석가세존(釋迦世尊)의 가르침을 일컫는 것이다. 지금까지 ‘원시불교’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어 왔으나 요즈음은 ‘초기불교’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근본불교’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다른 분들의 글과 개념의 일치를 보기 위해 초기불교라고 부르기로 한다.

초기불교는 시대에 따른 분류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분류는 단순히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것이 아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상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석가세존이 처음 깨달음을 이루어 세상에 가르침을 폄으로써 불교는 시작된다. 세존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에 의심이나 논란이 있어도 세존을 통해 의심과 논란을 해소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단은 통일과 화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존이 열반한 후 불교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고 승려와 신자들의 수가 양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교단이 분열하게 되었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분열을 막기 위해 수차의 결집회의를 하였지만 교단의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교단의 분열은 계율 해석상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지만 교단이 분열되자 경의 해석에도 부파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각 부파는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에 따라 아비달마(abhidhamma)라 불리는 독자적인 교리해설서, 즉 논(論)을 편찬하였다. 아비달마란 세존이 설한 ‘법(dhamma)에 대한(abhi) 해석’이라는 의미이다. 이들 논서(論書)를 통해 각 부파는 자신들의 해석이 진정한 세존의 뜻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분열 대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파에 의해 분열 대립하게 된 불교를 부파불교 또는 아비달마불교라고 부른다.

불교가 이렇게 분열된 것은 불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세존은 모든 대립과 모순을 떠난 중도(中道)에서 연기법(緣起法)을 설했다. 모든 존재현상은 연기하고 있으므로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모든 대립은 존재현상의 실체가 없음(空)을 알지 못하고 실체를 찾으려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불교는 중도와 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체를 문제삼음으로써 대립하게 된 것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이들 부파불교의 대립을 소승(小乘)이라고 비판하고 불교의 본질이 중도와 공이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대승불교의 초기경전인 반야부(般若部) 경전의 공사상(空思想)은 바로 이러한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초기불교는 불교가 분열하기 전의 불교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의해 소승불교로 비판받았던 부파불교와 초기불교는 엄연히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초기불교를 소승불교로 오해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대승불교가 전해진 중국과 우리 나라를 포함한 북방불교권에 보편화되어 있는데 그 원인은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을 아비달마불교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불경에는 세존의 가르침을 전하는 근본경전과 대승불교의 발흥과 함께 나타난 대승경전이 있다. 근본경전은 북방불교권에 전해진 한역(漢譯) 《아함경(阿含經)》과 남방불교권에 전해진 상좌부 전승의 《빠알리 니까야(Pa?i Nika?a)》를 가리킨다. ‘아함(阿含)’이란 범어(梵語) ‘A?ama’의 음역(音譯)으로서, 본 뜻은 ‘전승(傳承)’인데,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전승되어 오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리고 ‘빠알리(Pa?i)’는 성전(聖典)을 의미하고 ‘니까야(Nika?a)’는 수집(收集)을 의미하므로 ‘빠알리 니까야(Pa?i Nika?a)’는 ‘성전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란 ‘니까야’에 사용된 고대 인도어로서 성전을 기록하고 있는 언어라는 의미이다.

《아함경》은 4부로 되어 있고, 《빠알리 니까야》는 5부로 되어 있는데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한역 4아함경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 분량에 30개의 경이 수록됨. 장편의 경(經)이 수록되어 ‘장아함(長阿含)’이라고 부름.
A.D. 412∼413년 후진(後秦)에서 불타야사(佛陀耶舍, Buddhayas첺s)·축불념(竺佛念) 공역.
외도(外道)와의 대화와 그에 대한 비판이 많아서 당시의 인도 사상을 살펴볼 수 있음.
법장부(法藏部)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 분량에 222개의 경이 수록됨. 중편의 경이 수록되어 ‘중아함(中阿含)이라고 부름.
A.D. 397∼398년에 동진(東晉)의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 Sam?ghadeva) 역.
세존과 제자 또는 제자 상호간의 문답과 대화가 수록되어 교리의 체계를 살펴볼 수 있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 분량에 1,362개의 경이 수록됨. 소편의 경이 수록됨.
A.D. 435∼443년 송(宋)에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n.abhadra) 역.
오온송(五蘊誦), 육입송(六入誦), 잡인송(雜因誦), 제자소설(弟子所說), 도송(道誦) 게송(偈誦)의 순서로 각각의 교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수록하고 있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계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16권의 분량에 364개의 경이 수록됨.
《잡아함경》의 이역(異譯)으로서 역자(譯者)는 알 수 없음.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51권 분량에 471개의 경이 수록됨.
A.D. 397년에 동진(東晉)의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 Sam?hadeva) 역.
1법(法)에서 10법(法)까지 법수(法數)의 순차에 따라 분류하여 수록하고 있음.
대중부(大衆部)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이 밖에도 이역(異譯) 《아함경》과 《아함경》에 속한 수많은 개개의 경이 단행본으로 번역 출간되었음.

빠알리 5니까야

D沖gha-nika?a(長部) : 3vagga(編) 34sutta(經). 《장아함경》에 상응함.
Majjhma-nika?a(中部) : 3pan.n.a?aka 152sutta. 《중아함경》에 상응함.
Sam?utta-nika?a(相應部) : 5vagga 56sam?utta 2875sutta. 《잡아함경》에 상응함.
An?uttara-nika?a(增支部) : 11nipa?a 170vagga 2198sutta. 《증일아함경》에 상응함.
Khuddaka-nika?a(小部) : 15sutta. 한역 《아함경》에 섞여 있음.

이들 근본경전은 부파불교의 소의경전이기 때문에 대승불교권에서는 소승경전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해 왔다. 혹자는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을, 부파불교에 의해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세존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부파불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논서를 통해 드러내려 했지 불경을 변조하면서까지 대립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부파가 있었다면 다른 부파들로부터 불경을 변조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아함경》과 《니까야》는 서로 다른 부파에서 전승된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근본경전을 부파불교에 의해 변질된 것으로 보거나 소승경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2) 졸저, 《근본불교》(민족사, 2002), pp.16∼23 참조.
3)

2. 대승불교의 뿌리, 초기불교

초기불교는 근본경전에 나타난 불교를 의미하며, 대·소승을 포함한 모든 불교의 뿌리이다. 후대의 불교는 모두 초기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흔히들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은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위해 설한 소승경전이기 때문에 세존의 깨달음을 완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존이 직접 설한 가르침은 근본경전이며, 세존께서 아껴두거나 감추어 둔 가르침은 없다. 다만 중생들의 근기가 낮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주지하듯이 대승경전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한 경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승경전이 불경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대승경전은 결코 근본경전을 부정하지 않고 있으며, 근본경전에 나타난 세존의 가르침을 바르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불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에서 비판하는 소승불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국불교에서는 대승경전을 위주로 공부하는 가운데 초기불교를 소승불교와 동일시했다. 천태(天台)와 화엄(華嚴)의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해 불경의 경중이 가려졌다. 그 결과 세존이 직접 가르친 초기불교는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한 수준 낮은 가르침으로 인식되었다.

중국과 역사적,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우리 나라는 이러한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다. 《화엄경》과 《법화경》은 최고의 경전으로, 근본경전인 《아함경》은 가장 수준이 낮은 경전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왜곡의 결과는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마저 왜곡시켰다.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의 뿌리이기 때문에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대승불교는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않는다.

용수의 《중론(中論)》은 대승불교사상의 근본으로 평가되며, 난해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금을 통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나왔지만, 주석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중론》을 보면, 결코 난해하지 않다. 왜냐하면 《중론》은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수립하려고 지은 책이 아니라,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기 때문이다.

《중론》의 ‘팔불중도(八不中道)’는 《중론》의 요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팔불중도’의 해석을 일례로 대승불교의 이해에 초기불교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소위 팔불중도(八不中道)로 불리는 불생역불멸(不生亦不滅), 불상역부단(不常亦不斷),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불래역불출(不來亦不出)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청목(靑目)의 소(疎)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만물이 대자재천(大自在天)에서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 자연(自然)에서 생긴다는 말도 있고, 미진(微塵)에서 생긴다는 말도 있다. 이런 잘못으로 인해 무인론(無因論), 그릇된 인과론(因果論), 단멸론(斷滅論), 상주론(常住論) 등의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나’라느니, ‘나의 것’이라고 갖가지로 설하며 정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여러 가지 사견(邪見)들을 끊고 불법을 알게 하시려고 우선 성문법(聲聞法) 중에서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이미 수행을 하고 큰 마음을 갖추어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대승법(大乘法)으로써 연기(緣起)의 상(相)을 설하셨던 것이다. 이른바 “일체법이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일불이(不一不異)하여 필경공(畢竟空)하니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반야바라밀경에서 설하는 다음과 같은 얘기와 같다.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도량에 앉아 있었을 때 십이연기가 허공과 같아 다함이 없음을 관(觀)하였느니라.’”3) 龍樹, 靑目 疎, 鳩摩羅什 譯, 《中論》, 김성철 옮김(경서원, 2001), pp.27∼28.

청목은 부처님께서 근본경전, 즉 《아함경》에서는 12연기설을 이야기하고, 중도와 공은 대승의 《반야경》에서 이야기했으며, 《중론》은 대승 《반야경》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십이연기설은 낮은 근기를 위한 가르침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일불이(不一不異) 등의 중도와 공은 대승의 수승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아함경》은 중도와 공이 연기설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빠지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빠진다. 의미 있고 진리를 이야기하는 주장은 이들 두 모순 대립(二邊)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 법이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남이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니라.4) 대정장 2, p. 85c의 필자 번역.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들 주장은 결론은 한 가지인데 서로 다르게 주장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이 육신과 다르다고 해도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를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중도로 향할지니, 그것은 현성이 세간에 나와 전도되지 않고 여실하게 바로 보아 알아낸 것이다. 소위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5) 대정장 2, p. 84c의 필자 번역.

위의 두 경은 각각 단상중도(斷常中道)와 일이중도(一異中道)를 이야기한 것이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영혼과 육신에 대한 일원론과 이원론의 모순대립은 연기의 실상을 알지 못해서 생긴 사견이다. 따라서 버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상부단(不常不斷)이며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할 뿐 자성이 없으므로(無我) 생멸(生滅)의 주체는 있을 수 없다. 주체가 없다면 생멸(生滅)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불래불출(不來不出)도 마찬가지다. 초기불교를 통해 팔불중도(八不中道)를 보면 이렇게 의미가 명쾌하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불교의 이해 없이 불생불멸 등의 중도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생멸(生滅)이 없는 출세간의 경지(열반)로 해석할 수 있다. “세간은 생멸(生滅)이 있으나 출세간은 생멸(生滅)이 없다. 《중론》의 팔불중도(八不中道)는 이러한 열반의 경지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팔불중도는 신비주의 교설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우리는 세간을 떠나 생멸 없는 세계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용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6) 《中論》, 〈觀涅槃品〉 제19게.

여래가 갖는 자성은 바로 이 세간의 자성이다. 여래는 자성이 없으니 세간도 역시 자성이 없다.7) 《中論》, 〈觀如來品〉 제16게.

용수는 중도실상의 세계(열반)가 중생의 세계과 멀리 떨어진 별세계가 아니라 모순대립하는 사견을 떠나면 세간이 곧 열반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십이연기설에서 무명이 멸하면 생사가 멸한다는 이야기와 추호의 차이가 없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지면 관계상 간단한 일례로 대승불교의 이해에 초기불교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했지만, 필자가 본 대승불교는 거의 모두가 초기불교를 떠나서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3. 불교의 세계화와 초기불교

우리가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불교의 출발점이며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불교가 주목받아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 세계의 석학들은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상으로 불교를 주목하고 있으며, 불교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불교를 요청하고 있고, 그 요청에 의해 불교는 세계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초기불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 기술에 의한 산업사회의 위기를 한 번 사용한 에너지는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변한다는 열역학 제2의 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하고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기계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한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I》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나 도교의 신자는 예로부터 에너지의 흐름을 적게 하는 데서 가치를 찾고 있었다. 명상이란 바로 에너지를 경감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에너지를 최저한으로 억제하고 외적 및 물질적 생명을 유지함으로써 비로소 니르바나, 또는 도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8) 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I》, p. 259.

에너지의 소비를 적게 하는 것이 최종적인 도덕 규범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고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자유로 전개될 수 있게끔 사랑을 가지고 약속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가장 숭고한 사랑은 자기 희생, 즉 자기 삶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의지, 또는 필요한 경우 다른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을 바쳐도 좋다는 의지이다.9) 위의 책, pp. 256∼257.

그는 인간이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서 정신적인 열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보살의 자비가 인류를 구원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①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것.
② 우리의 불행의 원인을 인식할 것.
③ 우리는 우리의 불행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④ 우리가 우리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생활 규범을 따라야 하며, 우리의 현재의 생활 습관을 변혁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이상의 네 가지 조건은 불타의 가르침의 기초를 이루는 네 가지의 진리(四聖諦)와 부합한다.10)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최혁순 옮김(범우사, 1997), p. 204.

이와 같이 프롬은 인류가 사성제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새롭게 출현해야 할 새로운 인간의 성격구조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형태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
② 지금 존재하고 있는 곳에 완전히 존재할 것.
③ 탐욕과 미움, 환상을 될 수 있는 한 줄이도록 노력할 것.
④ 비판적이고 냉철한 사고 능력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것.
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현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
⑥ 자기 자신을 알 것. 알고 있는 자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자아까지도 알려고 노력할 것.
⑦ 모든 생명이 자기와 하나임을 인식할 것.11)
위의 책, pp. 207∼208.

프롬이 이야기하는 인간은 불교에서 지향하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탐진치를 여읜, 지혜와 자비를 성취해 가는, 끊임없이 정진하는, 참된 자기를 찾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 프롬이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인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써서 성장 위주의 경제가 몰고 온 파국을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대안을 제시한 영국의 경제사상가 슈마허는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불교경제학을 썼다. 그는 불교경제학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고 있다.

정신이나 종교의 가치보다 경제 성장 쪽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불교경제학의 연구를 권하고 싶은 것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과 장래의 예상을 고려해서이다. 문제는 ‘근대적 성장’과 ‘전통적 정체(停滯)’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바른 경제 성장의 길, 유물주의자의 무관심과 전통주의자의 침체 사이의 중도(中道), 즉 팔정도(八正道)의 하나인 ‘올바른 생활(正命)’을 발견하는 일이 문제인 것이다.12)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김진욱 옮김(범우사, 1995), p. 6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은 선각자들이 인류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불교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불교는 인류 생존의 희망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이 세계는 탐욕과 질투와 어리석음의 불길에 휩싸인 문자 그대로 화택(火宅)이며 고해(苦海)이다. 붓다가 염려하고 경계했던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인 삼독(三毒)의 불길이 온 세상을 불태우고 있다. 이제 인류는 자연과 인간을 모조리 불태우고 있는 무서운 삼독의 불길에서 벗어나는 생존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 길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슈마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사상은 과학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 가장 위대한 과학 사상이라도 작업 가설에 지나지 않으므로, 특정한 연구 목적에는 유용해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 하는―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냐 하는―문제에는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다. …… 과학은 자연계나 공학적 환경 속에서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며 작용하느냐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며, 인간의 소외감이나 내면의 절망을 치유해 줄 수는 없다.13) 위의 책, pp. 92∼93.

마음과 영혼이 결여된 19세기의 형이상학 대신 무엇을 가져와야 할 것인가? 우리 세대의 임무는 형이상학을 다시 구축하는 일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 우리의 병은 형이상학적인 성질의 것이므로, 치료법도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다.14) 위의 책, p. 109.

슈마허의 지적과 같이 인류 생존의 길은 과학에 있지 않다. 마음과 영혼의 형이상학이 인류 구원의 길이다. 세존께서는 그 길을 잘 가르쳤다. 우리는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인류의 삶의 토대가 될 형이상학과 윤리를 구축해야 하며, 초기불교는 이러한 작업의 토대가 된다.

4.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초기불교

세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새롭게 깨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현실은 매우 암담하다. 본 고장인 서구사회에서 퇴조하는 기독교는 융성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는 미신과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당의 푸닥거리를 돕는 사람을 법사라고 부르고, 사람들은 점쟁이의 권유로 사찰을 찾아 액땜과 복을 빌며 기도한다.

그런가 하면 수행승들은 세속을 등지고 깊은 선방에 들어가 면벽 참선하면서 견성 성불을 추구한다. 불교를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은 갈 곳이 없고, 이들을 바르게 인도할 사람도 없다. 육조 혜능의 돈오(頓悟)돈수(頓修)와 간화선의 우월성만을 내세우면서, 차근차근 배우는 것은 점수(漸修)라고 깔보고,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교종(敎宗)이라고 비웃는다. 남방불교는 소승이라고 얕보고, 우리는 대승, 최상승이라고 우쭐댄다. 그러나 그렇게 뽐내는 한국불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막상 이러한 물음에 당면하면 뚜렷이 대답할 내용이 없다. 과연 한국에 진정한 불교가 있기나 하는 것일까? 필자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초기불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육조 혜능의 종지를 추종하는 종단이다. 만약 조계종이 혜능의 가르침만을 따른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혜능교다. 그러나 조계종을 혜능교라고 부르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까닭은 혜능이 불교도이기 때문이다.

혜능을 불교도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혜능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불경 속에 있다. 육조 혜능을 따르는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육조단경》을 보면 혜능은 자신의 이야기가 불경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론(經論)의 이야기는 가벼이 여기고 선사들의 어록(語錄)만을 봉지(奉持)하는 것이 과연 혜능을 따르는 일인가?

혜능은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15) 退翁 性徹 역주, 《敦煌本 六祖壇經》, 장경각, p. 121.

이렇게 혜능이 입으로 다투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 수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종과 교종을 나누고,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분별하여, 선후를 다투면서 간화선만을 제일로 삼고 여타의 수행을 무시하는 것이 진정한 조계(曹溪)의 법통(法統)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파나 종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의지해서 스스로 깨칠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혜능의 돈오(頓悟)와 돈수(頓修)는 돈오와 돈수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교 수행이 자오(自悟) 자수(自修)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견성(見性)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과 대승과 십이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我)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16) 위의 책, pp. 173∼175.

돈오란 일체의 만법이 자신 가운데 있음을 한 생각 깨치는 일이요, 돈수란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돈오에서 강조하는 것은 스스로 깨침이지 수행 없는 깨침이 아니다. 즉 단박에 깨침이란 스스로 깨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와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에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 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17) 위의 책, pp. 177∼178.

여기에서 혜능이 강조하는 것은 언어적인 이해가 아닌 깨달음이다. 혜능은 깨달음이 언어적인 지식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돈오(頓悟)라고 표현한 것이다. 선지식은 스스로 깨치도록 돕는 자이지 깨달음에 대한 지식을 주는 자가 아니다. 깨달은 자는 선지식을 의지할 필요도 없다. 《벌유경(筏喩經)》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신 부처님의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돈수(頓修)란 단박에 닦아 수행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돈수는 불교의 수행에 목적이 따로 없음을 의미한다. 즉 목적을 설정해 놓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대로 사는 것이 그대로 수행이라는 의미에서 돈수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의 행이 곧 부처님이다.(卽佛行是佛)18) 위의 책, p. 235.

이와 같이 그에게 부처는 존재가 아니라 본성대로 사는 삶이다. 그렇다면 진여 본성이란 무엇인가?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自性)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이니라.19) 위의 책, pp. 159∼160.

혜능이 이야기하는 자성(自性)은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며, 만법 그 자체이다. 즉 주객의 분별을 떠난, 연기하는 법계가 자성이다. 무아(無我)와 공(空)과 연기(緣起), 이것이 혜능이 말하는 본성이며 자성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함께 연기하는 한 몸이며 한 생명이다. 이러한 사실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견성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변에는 몸 속에 있는 마음 찾는 것을 견성(見性)으로 착각하고, 앉아서 마음 찾는 사람들이 많다.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움직이지 않는 이라면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나니,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20) 위의 책, pp. 134∼137.

화두를 참구하여 견성하는 일을 마치 과거에 급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는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다. 화두 참구는 성불(成佛)의 지름길이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미천한 신분이지만 급제하는 순간 신분은 급상승한다. 견성하기 전에는 미혹한 중생이지만 견성만 하면 한 순간에 모든 사람의 존경과 숭배를 받는 부처가 된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듯이, 견성하기 위해 선방에 앉아 면벽한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화두에 매달리지만 한 순간 깨치면(돈오) 부처가 되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게 된다(돈수). 혜능이 그렇게 가르쳤는가?

만약 뒷 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 ……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 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21) 위의 책, pp. 277∼278.

혜능이 이야기하는 성불은 탐진치 삼독심을 지혜롭고 평등하고 자비롭게 변화시키는 일이다. 중생의 마음인 탐진치가 없다면 부처의 마음인 지혜와 자비도 없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의해 중생과 부처가 구별될 뿐, 중생과 부처에 어떤 차별도 없다. 차별이 없기 때문에 돈오 돈수라고 한다. 만약 차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망상이다.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자는 망상 속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혜능의 가르침은 결코 선가(禪家)만의 가르침이 아니다. 삼독심을 없애고 지혜와 자비를 실현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추호의 차이도 없다. 그런데 입으로는 혜능을 추종하면서도 마음과 몸이 어긋나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한국불교는 조계종인가?
한국불교의 역사는 조계종만의 역사가 아니다. 삼국시대에 전래한 불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모든 전통과 역사를 외면하고, 간화선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바른 태도가 아니다. 한국불교의 현실도 그렇다. 한국의 불교 신자 가운데 간화선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염불도 하고, 송주도 하고, 근래에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도 한다. 이 모든 다양한 수행을 아우르고 1700년 한국불교사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불교 사상을 통일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불교는 대승불교도 아니고, 선불교도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교이다. ■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현재 전남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아함의 중도체계>,<불교의 이해와 실천1,2>가 있고, <공의 의미><불교의 인간관><불교의 생명관>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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