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본다

1. 시작하며

필자는 이 글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현대적 관점에서 욕망/갈애
(tan.ha?-자유/행복(nibba?a)-자비(karun.a?의 세 코드로 풀어보고자 한다. 불교는 열반, 깨침, 행복, 혹은 자유의 획득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듯이 불교가 말하는 자유는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성취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유는 우리가 고립된 개체가 되어 자아의 성을 공고히 쌓아 방어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아의 벽을 두텁게 하면 할수록 자유로부터 멀어져간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자유는 욕망 내지는 갈애, 보다 포괄적으로는 탐(ra?a)·진(dosa)·치(moha)를 지멸시킨 상태에서 얻어진다. 중생의 삶과 세계는 탐진치의 욕망에 의해 활활 타고 있으므로1) 이 불을 ‘불어서 완전히 끄는 것’(nibba?a)―그것도 나무 밑동이 잘려나간 것처럼 재연소의 가능성이 티끌만큼도 없이 완전히 끄는 것―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1) Sam.yutta-nika?a IV, 19∼20쪽.

탐진치의 욕망 지멸의 상태가 진정한 자유인 것은 이 상태가 성품이 되어 자리이타의 자비의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탐진치 지멸에 의해서 내 자신이 ‘자비의 방식으로 느끼고, 자비의 방식으로 생각하며, 자비의 방식으로 말하고, 자비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특정의 성품 자체’가 되었기에, 외적 속박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동요·교란시키지 못하게 된다. 나와 객체와의 사이에 놓인 무수한 경계선을 무화시킨 상태에서 외적 속박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글의 전개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취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유에의 가능성으로서의 도덕적 가능성에 대하여 살펴보고(2),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살펴보며(3), 현대의 자유의 개념과 비교의 관점에서 불교적 의미의 자유를 생각해 보고 그 획득방법에 대하여 간략히 논의하며(4), 자유인을 규정하는 자비에 대하여 말해보고자(5) 한다.

논의는 남방부 전승의 경장(Sutta-pit.aka)에 의거하며, 초기불교 교설에 대한 필자의 다음과 같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1) 연기(pat.iccasamuppa?a), 공(sun??ta?,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n), 중도(majjhima-pat.ipada?: 생명/존재의 실상에 대한 설명으로 현상에 대한 여실지견(yatha?u?an???dassana).

2) 오온(pan?a-khandha), 6입처(a?atana), 12입처(a?atana), 18계(dha?u): 중생들의 세계 내지는 주객 이원적 분별과정을 밝힌 것. 중생의 세계에 대한 설명.

3) 사제(catu-ariya-sacca), 12연기의 순·역관: 열반과 윤회의 전개과정을 밝힌 것. 고통의 발생과 소멸의 인과관계에 대한 여실지견.

4) 팔정도(ariya-at.t.an?ika-magga)와 사념처(catu-sat.t.t.ipatthana?를 포함한 37조도품, 지(samatha)·관(vipassana?, 삼매(sama?hi), 감각 절제(indriya-sam.vara), 오계(pan?a-s沖la)(더 나아가서는 8계, 10계, 10선업, 비구계, 비구니계), 부정(asubha, 不淨)·자비·무상·무아 등에 관한 여러 가지 관법: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들. 수행(bha?ana? 내지는 청정한 삶(brahma-ca?iya)의 구체적 내용. 탐·진·치 지멸 내지는 신·구·의 청정(visuddhi)으로 귀결.

5) 사무량심(catu-apparima?.a-manas), 사섭법(catu-san.gahavattu) 등을 포함한 자비(karun??: 포괄적 도덕 내지는 자유의 삶의 모습. 4)항의 실천모습이기도 함.

6) 자비의 성품의 아라한(arahant)2): 다섯 가지 장애(n沖varan?), 집착(upa?a?a), 갈애(tan.ha?, 번뇌(a?ava) 등의 다양한 이름의 불건전함/악(akusala)을 지멸하고 자유(nibba?a)3)에 도달한 이. 초기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자유인. 2)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아라한, 정등각 붓다(samma?sambuddha), 여래(tatha?ata)’라고 동시에 지칭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일반적으로 ‘아라한’의 개념은 ‘붓다’(buddha)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아라한’은 대승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기적인 수행자가 아니며, ‘붓다’와 다른 개념인 것도 아니다. 아라한도 붓다처럼 ‘자리이타의 자비’를 삶의 이념으로 한다.3) ‘닛바나’(nibba?a)(열반/자유/행복)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필자는 닛바나를 ‘탐진치 지멸의 결과로 획득된 성품의 상태’로 이해한다. 그것은 ‘올바른 세계관이 전제된 올바른 행위(신구의)의 성향’ 혹은 ‘실상에 합치하는 삶의 방식의 체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팔정도를 거치지 않고서는 닛바나에 이를 수 없다. 닛바나는 개념적 이해, 과정을 통한 축적이 없는 일순간의 깨침, 강제적 도덕, 신비적 종교체험 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7) 행위/업(kamma): 자아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나’는 곧 (나의) 행위이며 행위가 곧 ‘나’.

8) 단계성/점진성(anupubbata?: 자유인이 되어 가는 수행은 단계적/점진적(anupubba)이다. 예컨대 계정혜에도 순서가 있고 팔정도에도 순서가 있다. 단계적 수행의 필연적 결과가 자유.

이상을 탐진치의 욕망 지멸의 관점에서 보면 1)은 탐진치의 욕망 지멸에 전제되는 세계관이며, 2)는 탐진치의 욕망의 구체적 발생 과정을 밝힌 것이며, 3)은 탐진치 욕망의 생멸구조에 대한 설명이며, 4)는 탐진치를 지멸해 나가는 수행법들에 관한 것이며, 5)는 탐진치의 욕망 지멸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설명한 것이며, 6)은 탐진치 지멸의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며, 7)은 ‘행위에 있어서의 탐진치 유무’에 의해서 ‘나’라는 존재를 규정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마지막으로 8)은 탐진치 지멸 또한 점진적 수행법에 따라야 함을 말한 것이다.

중생이 생로병사의 고통 내지는 속박 속에 있다고 한다면, 이로부터의 자유 또한 탐진치 지멸을 의미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탐진치를 지멸시키지 못하면 생로병사를 여의지 못한다고 하며,4) 탐진치를 멸함으로써 행해야 할 것을 다 행하여 열반에 이른다고 반복한다. 4) An?uttara-nika?a V, 144쪽.

2.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

“이 마음은 (본래) 총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객진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5) 5) An?uttara-nika?a V, 10쪽.

불교는 행복/자유의 구현을 이상으로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진정한 행복은 다른 모든 이의 행복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행복은 뭇 중생의 행복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이러한 이치를 체득하고 이러한 이치에 합치하는 삶을 구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신비의 체험도 아니며 일상을 초월한데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 속에서 한 순간도 방일하지 않고 올바르게/청정하게 생활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는 연기, 공, 무아, 혹은 무상의 실상을 체득함으로써 탐진치의 욕망을 지멸하고, 실상에 합치하는 삶을 사는 동체자비(同體慈悲)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한 행복, 타인의 불행에 대해 무감한 행복, 뭇 존재의 아픔과 자연에 대한 학대를 전제로 한 행복 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동류의 인간뿐만 아니라 뭇 생명의 행복을 배려하는 동체자비의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체자비의 삶은 ‘나’에서부터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이 존중되며 그 존재의 고유성이 온전하게 실현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우리가 자유/행복에 이르지 못한 까닭을 다양한 개념과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자기변혁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전제하고 있다. 불교는 상(相, nimitta), 탐진치, 집착(upa?a?a), 갈애(tan.ha? 등을 말하기도 하고, 연기·공·무아의 이치를 보지 못하는 것, 무상·고·무아의 도리를 모르는 것, 계정혜를 닦지 않는 것, 37조도품을 닦지 않는 것, 선업을 쌓지 않는 것, 혹은 신구의를 청정하게 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은 모두 자유가 스스로의 힘에 의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문제임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 모두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 앙굴리말라(An?ulima?a)의 이야기는 불교의 인간의 가능성과 자기변혁에 대한 감동적 신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는 사람을 수없이 죽여 죽은 이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닌 강도였으나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환골탈태의 자기변혁으로써 아라한/자유인이 된 사람이다.6) 6) Majjhima-nika?a II, 98∼100쪽.

인간의 자기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는 초기불교에서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깨달음의 가능성’을 갖는다는 의미로 표현되고,7) 후기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여래장 혹은 불성을 갖는다는 말로 표현된다.7) 인간의 마음은 그 자체로 빛이지만 客塵(a?antuka upakkilesa)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은유 된다(An?uttara-nika?a V, 10쪽).

그렇다면 자기변혁의 가능성, 깨달음에의 가능성, 여래장, 혹은 불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도덕적 가능성으로서 타자, 더 나아가서는 뭇 중생을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 혹은 나와 너, 인간과 동물,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간의 경계선을 해체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연기, 공, 무아를 체득하여 그에 합치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다. 불교의 다양한 수행법들은 이러한 능력의 개발과 발현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자기변혁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타인, 더 나아가서는 뭇 중생을 나와 같이 보고 발고여락(拔苦與樂)의 자비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도 이러한 능력을 갖지만 타인도 예외 없이 이러한 능력을 갖는다. 그래서 불교는 파렴치한에 대해서도 무한한 관용과 인내를 요청하며,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자신을 능멸하는 사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 혹은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조차도 금강석 같은 부동의 자비를 요청한다. 예컨대 설령 칼로 베어 죽이고자 하는 험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를 원망하지 말고 ‘육체와 생명을 수치로 여기고 있는데 이제 원치 않아도 찔리게 되었구나’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8) 8) Sam.yutta-nika?a IV, 61∼62쪽.

불교의 이상과 같은 인간 이해에 의하면 인간이 같은 조건이면 건전함/선(kusala)을 선호하고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을 선호하고 선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이 전적으로 선하다 혹은 선한 본성을 갖는다는 단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선을 지향할 수 있으며, 전쟁보다는 평화를 선호하며, 미움보다는 사랑을 원하며, 악보다도 선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정도의 사실이면 된다. 그래서 불교는 자비를 설득하는데 있어서 당위적 명령에 의거하지 않고, 존재의 자연적 성향―‘모든 존재가 상해/해침 받기를 원치 않으며, 쾌를 원하고 보살핌 받기를 원한다’는―에 의거한다.

불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식의 양자택일적, 탈상황적, 본질주의적 질문을 제기하거나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교는 인간의 현재적 양면성―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을 선호하고 선을 지향한다고 확신 할 뿐이다. 혹자는 불교의 이러한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는 덧붙여서 인간처럼 잔인하게 행동한 동물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살육과 전쟁도 많았지만 평화의 시대가 더 길었으며, 우리의 삶 또한 싸움의 일상보다는 상호 보살핌의 일상이 지배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간이 희구하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사랑인 것이다. 정상적 인간은 사랑, 관심, 배려를 갈구하지만 투쟁, 싸움, 무시당함을 갈구하지는 않는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인간이 투쟁, 싸움, 무시당하는 상황 등에 몸을 던질 때조차도 그 행동의 지향점이 보다 안정적인 사랑, 관심, 배려의 쟁취에 있다는 것이다.

3. 욕망

‘일체가 탐진치의 불에 타고 있다.’9) 9) Sam.yutta-nika?a V, 19∼20쪽.

자유의 문제가 자기변혁의 가능성, 도덕적 가능성, 혹은 선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능력의 문제라면 그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을 보아 온 방식과 살아온 방식을 통째로 뒤집어엎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가르침은 마음의 번뇌, 탐진치, 집착, 갈애, 분별심, 상 등을 없애라고 다양하게 말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포괄적 표현은 ‘탐진치’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예컨대 108번뇌는 탐진치로 압축되고, 집착, 갈애, 분별심, 상 등도 탐진치의 마음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반복하여 탐진치의 지멸을 강조하고 탐진치의 지멸에 의해 자유에 이른다고 한다.10)10) 주지하다시피 초기경전에서 “나는 (더) 태어남을 끊고, 청정행(brahma-ca?iya)을 완성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안다”라는 말은 열반/자유(nibba?a)의 상태―‘아라한의 (성품) 상태’(arahatta)―에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전형구이다. 우리는 또한 탐진치 지멸에 의해서 이러한 상태에 이른다는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부자유/윤회의 중생인 까닭은 우리의 욕구가 탐진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탐진치, 즉 탐진치라는 욕망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에 윤회하는 중생이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 즉 탐진치가 문제가 된다.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욕망은 “항상 부족을 느껴 채우려 하는 본성”이라고 정의되어 있고, 욕구는 “바라서 구하는 바”라고 정의되어 있다. 초기불교에서 ‘욕망’과 ‘욕구’에 가장 가깝게 상응하는 말은 각각 ‘tan.ha阪?갈애)와 ‘chanda’(욕구)인데, 갈애는 모두 지멸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욕구는 그렇지 않다.

욕구를 의미하는 ‘chanda’라는 말은 선악과 무관하게는 ‘(심리적) 지향성/의도’를, 나쁜 의미로는 ‘육욕에 대한 탐닉이나 탐욕’을, 좋은 의미로는 ‘법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결단’을 의미한다.11) 탐진치의 욕구, 즉 욕망(tan.ha?은 나쁜 의미의 욕구에 속한다. 경전에서 욕구와 관련하여 ‘모든 것(sabba dhamma)이 욕구(chanda)에 뿌리를 두고 욕구로부터 비롯된다’고12) 할 때의 욕구는 윤회하는 중생의 욕구로서 욕망을 의미한다.11) Nyanatiloka, Buddhist Dictionary: Manual of Buddhist Terms and Doctrines(Sri Lanka: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7), 48쪽. 12) An?uttara-nika?a V, 107쪽.
 

탐진치의 ‘욕망’에서 탐욕(탐)은 본성상 결코 충족될 수 없기에 혐오/성냄(진)을 수반하고, 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진은 어리석음인 ‘치’를 유발한다. 그리고 치는 다시 탐을 유발한다. 탐, 진, 치는 직선적 관계라기보다는 원형적 관계 속에서 연쇄적이다. 연쇄적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는 항상 뭉뚱그려서 함께 언급된다. 그리고 탐진치는 모든 고통의 뿌리이므로 지멸되어야 한다고 반복된다.

인간이 일반적으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모든 욕구들―생물학적 욕구로서 식욕, 수면욕, 성욕 등과 인위적/사회적 욕구로서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등―은 불교의 가르침의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 탐진치와 관련되어 나타나거나 탐진치를 전제로 한다. 이들 욕구들에 대한 불교의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행과 쾌락의 중도와 오계의 불사음계의 관점에서 식욕, 수면욕, 재가인의 성욕 등은 절제와 법도를 전제로 승인된다. 일반적으로 식욕이나 수면욕은 생명체의 보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자연적·필수적 욕구인 반면, 성욕은 자연적 욕구이지만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는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수면욕은 수행(bha?ana?의 장애로서 극복 대상이지만 전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으며, 식욕 또한 절제와 법도를 전제로 하여 수행의 관점에서 충족되어야 하며, 성욕은 출가 수행자에게는 그 자체가 극복과 금기의 대상이지만 재가 수행자에게는 불사음계의 준수를 전제로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욕구들이 절제되지 않거나 여법하지 않게 추구될 때 그것은 좋은 의미의 혹은 중성적 의미의 욕구가 아니라 나쁜 의미의 욕구, 즉 탐진치의 욕망이다.

생물학적 욕구와 달리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등과 같은 인위적 욕구는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탐진치의 표현이다. 소유, 권력, 명예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추구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재가인에 한하여 좋은 동기에서만 추구될 수는 있을 것이다. 자리이타적 동기나 자비의 동기에서 추구되는 소유, 권력, 명예는 이기적·배타적 속성을 갖지 않고 따라서 탐진치의 욕망으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는 것은 탐진치의 욕망이다. 인위적 욕구는 자리이타적 동기를 벗어나서 추구되는 한 탐진치의 욕망인 것이다.

생물학적 욕구와 인위적 욕구에 대하여 우리 중생이 추구하는 형태는 탐진치의 형태이다. 그래서 모두 지멸되어야 하는 ‘욕망’이다. 특히 현재 우리 시대―자유주의와 자본주의로 규정 지워지는 시대―의 욕구는 모두 탐진치의 욕망이다.

자유주의에 내포된 개인주의의 이념에 의하면 개개인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의 욕망(desires)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또 그러한 욕망들은 자본주의 하에서 상품화/사물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작되고 변형되며 재형성된다. 자연적 욕구는 탐닉·중독·사치의 모습으로 미화, 개발, 증폭, 재생산되며, 인위적 욕망은 합법적·초국가적으로 추구되어 범위와 정도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 게다가 욕망이 창출·유발·소비·재생산되는 과정은 지극히 반불교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 맡기에 좋은 것, 먹기에 좋은 것, 만지기에 좋은 것만을 선호하며 그 충족에 있어서도 필요한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 자체가 삶의 목표로서 집착적 추구의 대상이다. 오감각의 쾌를 집착적으로 추구하는 삶이다. 그리하여 수행의 기본으로서 혹은 자유에 이르는 디딤돌로서 반복·강조되고 있는 ‘오감각에 대한 절제’(sam.vara)의 가르침과 상반된 삶을 추구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오감각을 통한 감각적 쾌락(ka?agun.a) 혹은 오감의 쾌락(ka?a)은 보다 높은 즐거움에 장애가 되는 저급한 쾌이다. 그것은 진정한 최상의 즐거움이 아니다.13) 13) Majjhima-nika?a III, 139쪽.

감각적 쾌는 기분 좋고, 즐길만 하고, 매력적이고, 보기에 좋고, 유혹적이어서 쾌나 기쁨을 가져오지만14) 그것은 결국 고통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의 다섯 감각기관(indriya)은 쾌를 탐닉하는 도구가 아니라 쾌의 무상·고·무아의 속성을 바로 보아 열반에 이르는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 혹은 오감각 기관은 이것들이 그 대상을 만났을 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큰 석주와도 같이 그것들에 전복되지 않도록 지켜야 할 대상이다.15) 14) An?uttara-nika?a IV, 415쪽. 15) An?uttara-nika?a V, 404∼405쪽.

탐진치의 관점에서 볼 때 쾌 감각에의 탐닉은 쾌의 대상에 대한 탐을 전제하며, 쾌감은 결코 충족될 수 없기에 진을 유발하며, 쾌의 무상·고·무아의 속성을 모르기에 치를 전제한다. 그래서 욕망의 중생은 오감을 통한 쾌 느낌―여기에 하나를 더한 마음의 쾌 느낌―에 대하여 항상 탐진치를 수반하게 된다.

오감각을 통한 쾌 욕망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의 중생을 특징짓는 다른 대표적인 욕망은 소유욕망이다. 중생은 소유에 있어서 ‘소유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소유의 노예’로서 무한소유를 추구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소유욕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모든 행동에 있어서 소유욕을 전제하거나 소유욕과 결부시키고 있다. 예컨대 의식주도 소유 수준을 과시하는 수단이며, 성도 매매 형태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며, 신체의 일부나 아이디어도 누군가의 소유물이기에 매매의 대상이다.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공통된 수단은 화폐이기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들은 화폐로 환산되어 계산된다. 인간의 정신이나 신체 또한 소유의 대상으로서 매매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소유한 부와 부의 생산 능력에 따라 평가되고, 지불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우받는다. 인간의 가치는 물론 인간 자신도 돈으로 환산되며 돈에 종속되어 있다.

불교는 소유욕에 대해 비판한다. 자신만을 위한 배타적 소유뿐만 아니라 소유 자체에 대한 무한욕망도 비판한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무아의 가르침의 핵심은 ‘나 만들기’(aham.ka?a)나 ‘나의 것 만들기’(mamam.ka?a)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16) 16) Sam.yutta-nika?a IV, 41∼42쪽.

나의 생각, 나의 몸, 외적 대상 등과 관련하여 나는 배타적 소유권을 갖지 못한다. 자기 신체에 대한 소유의식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파생·확산되는 다른 대상들에 대한 소유의식은 무명(avijja?인 것이다. 대상에 대한 무한 소유욕은 말할 나위 없다.

근대 이후 거의 절대화되다시피 한 소유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의식―즉 자신의 신체, 더 나아가서 자신의 정신에 대한 소유의식―에서 기원한다.17) 17) 로크의 분석에 대해서는 그의 《통치론》(강정인·문지영 옮김, 서울: 까치, 1996) 5.27을 참조.

로크(Locke)에 의하면 오직 우리 자신만이 우리의 신체에 대한 소유자이다. 우리 자신이 신체에 대하여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배타적 소유권을 갖기에, 그 누구도 우리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신체에 대한 이러한 배타적 소유권은 ‘노동’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외적 대상으로 확장된다. 로크는 우리가 신체로부터 나오는 노동력을 자연에 투입함으로써 그 대상에 대하여 배타적 소유권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화폐를 발명하게 됨으로써 대상에 대한 배타적 소유개념에 ‘무한소유’의 개념을 추가하게 된다. 신체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과 노동, 그리고 대상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에 화폐의 개념이 추가됨으로써 배타적 무한소유의 개념이 가능해진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무한 소유욕은 물론 배타적 소유욕도 무명의 소산이며 더 포괄적으로는 탐진치의 소산이다. 배타적 소유욕은 무상한 대상을 갈구하고 붙들어 오직 자기 것으로 고집하는 탐심이다. 또한 배타적 소유욕은 존재의 관계성과 삶의 공유성, 즉 연기·공·무아의 실상에 대한 무지를 전제하기에 치심을 전제한다. 마지막으로, 배타적 소유욕은 소유하지 못함에 대하여 좌절하고 상실할 수밖에 없는 소유물에 대하여 상실을 싫어하기에 진심을 내포한다.

요컨대 우리 시대의 대표적 욕구인 소유욕―그것이 무한 소유욕의 형태로 나타나든지 혹은 배타적 소유욕의 형태로 나타나든지―은 오감각에 대한 쾌 욕구처럼 탐진치를 수반하는 욕망이다. 그런데 오감각에 대한 쾌 욕망과 소유욕망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여타의 생물학적 욕구와 인위적 욕구가 우리에게 추구되는 방식은 모두 탐진치를 수반하기에 욕망이다.

4. 자유

‘불교가 추구하는 자유는 외적 간섭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탐진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는 모두 탐진치를 수반한다. 인간 중생은 다양한 탐진치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삶은 탐진치의 욕망을 쫓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혹자는 때때로 이를 의식하지만 관성의 힘에 의해 욕망을 쫓아 달려가고, 혹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달려간다. 탐진치의 달리기의 과정과 종점에는 늘 사회적 격려와 칭송이 있기에 달리는 동안에는 우리 모두가 훌륭한 경기에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기의 과정에서 바쁜 것에 대하여 자위한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에 바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그 경기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에 배제된다.
불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은 탐진치의 욕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다. 불교는 탐진치의 지멸을 추구함으로써 이러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 욕망은 ‘항상 부족을 느껴 채우려고 하는 속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탐진치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욕망은 무상(anicca)한 것들에 대한 실상을 모르는 치심으로 인하여, 만족을 모르고 항상 채우려고만 하는 탐심을 가지며, 탐심의 욕망은 좌절될 수밖에 없어서 결국 분노, 불쾌, 혹은 싫어함을 내용으로 하는 진심을 갖게 된다. 가르침에 의하면 이 같은 탐진치의 욕망이 지멸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고통을 야기시키는 근본 원인으로서 우리를 구속하는 맹목적 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는 탐진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 그래서 깨달음은 외적·물리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며, 내적·심리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제도, 타인, 혹은 타인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욕망, 즉 탐진치의 욕망인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힘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불교의 통찰이다. 그런데 이러한 탐진치의 욕망 지멸의 자유의 개념은 서구에서 발전되어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자유의 개념과 판이하다. 그 의미와 추구 방법이 다르며 함의가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이상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유는 서구의 근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추구되어온 자유이다. 서구의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자유’는 외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서 국가 권력이나 타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제도, 권력, 혹은 물리적 힘 등,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속박이든지 방해받지 않고, 개개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천부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근대적 자유 개념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적 자유의 개념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한 것으로서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자아들을 전제한다. 공동의 선(common good)을 추구하기보다는 각자의 고유성과 독창성의 발현을 중시하는 이러한 자아는 타자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독립적·탈관계적으로 이해되는 주체이다. 자아는 주체적이면서 고립된 개체아이다. 벌린(Berlin)이 말하고 있는 저 유명한 자유―‘간섭/방해받지 않을’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실현할‘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는 이러한 자아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근대의 자유 개념에 전제된 파편화된 자아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욕이 갖는 특징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배타성과 무한 소유성을 특징으로 한다. 파편화된 자아는 그것이 탈관계적인데 그치지 않고 타자에 대하여 배타적이라는 의미에서 배타성을 갖는다. 파편화된 자아는 소유를 지향하며 소유에 있어서는 그 대상과 정도에 있어서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소유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특징의 파편화된 자아는 최소한의 규범 안에서 자신의 가치에 몰입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추구할 수 있다.

파편화된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의 실현이며, 이러한 욕망의 실현에 있어서 공통의 핵심 욕망은 소유 욕망이다. 욕망 실현에 있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조건하에서 배타성을 합법화하고 있으며, 소유의 내용과 정도에 있어서도 무한자유를 허용한다. 최소한의 규범만 지키면 되므로 자신의 욕망 실현이나 무한소유가 타자의 고통과 어떻게 결부되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의 어떠한 사소한 행동도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에게, 혹은 전체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조차도 없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탈관계적이고 파편화된 자아 개념은 무명의 소산이다. 자아는 타자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관계아이다. 자아의 존재 조건은 항상 타자의 존재 구조와 얽혀 있다. 자아가 추구하는 이념, 인생 계획, 복지의 이상 속에는 항상 타자의 그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타자는 자아의 삶 속에서 늘 포함되며 똑같이 배려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까닭에 관계아는 배타성과 무한소유성을 내포할 수 없다. 이상적인 삶은 자리이타의 자비로 표현되며 어떠한 형태의 배타적 소유욕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그래서 타자에 대해서는 적극적 포용과 인정을, 탐진치의 배타적 소유욕에 대해서는 지멸을 주장한다. 타자 배타에 대해서는 동등배려를, 무한소유성에 대해서는 소유의 공유성―소유하되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공유성―을 이상으로 한다.

이처럼 근대적 자유와 불교의 자유, 즉 ‘외적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와 ‘탐진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의 개념은 서로 상이한 자아를 전제하고 있다. 전자의 파편화된 자아가 자기 도취적 타인 배타성과 소유의 대상과 정도에 있어서 무한성을 전제한다면, 후자의 관계아는 동등배려와 공유적 소유의식을 지향한다.

더 나아가서 근대적 자유와 불교의 자유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전자가 욕망을 쫓는 자유라면 후자는 욕망을 버리는 자유이다. 전자가 외적 성취로서 구체화된다면 후자는 내적 인품의 변화(parin.a?a)를 핵심으로 한다. 전자가 외적인 것에 의한 간섭의 배제를 관건으로 한다면 후자는 내적 욕망의 절제를 관건으로 한다. 전자가 배타적·대립적 자아를 전제한다면 후자는 배려적·공조적 자아를 전제한다. 전자가 자타간 공고한 경계선을 고수한다면 후자는 자타간 경계선의 해체를 요구한다. 전자가 ‘항상 부족을 느껴 채우려는 마음’의 유아론적 자유를 추구한다면 후자는 ‘자족과 공유의 마음’의 무아론적 자유를 추구한다.

그러면 불교의 탐진치의 욕망 지멸의 자유는 내적으로 어떠한 기제를 통하여 획득되는 것인가? 그것은 요약컨대 자기절제(sam.vara)의 수행으로부터 시작하여 계(s沖la, 戒)·정(sama?hi, 定)·혜(pan??? 慧)를 닦아 심해탈(ceto-vimutti)·혜해탈(pan???vimutti)을 이룸으로써 완성된다. 혹은 그것은 계정혜를 보다 구체화 한 팔정도(ariya-at.t.an?ika-magga)를 닦음에 의해서 획득된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는 반복하여 감각(indriya)에 대한 자기절제를 기초로 하여 계정혜를 차례로 닦을 것을 말하고18) 팔정도를 닦을 것을 수없이 반복하여 강조한다. 18) An?uttara-nika?a, III, 360쪽.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초기불교는 절제를 모든 수행의 기초로 강조한다. 육감각(sad.-indriya, 六根)에 대한 자기절제가 모든 수행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육감각의 영역은 탐진치의 욕망이 전개되는 곳이면서 탐진치의 지멸이 습득되는 곳이다. 그래서 육감각을 올바로 관리하지 않고서는 탐진치 욕망 지멸이라는 자유를 획득할 수 없다. 육근수호, 신구의 청정, 사념처, 팔정도, 사정단, 오계, 팔계, 계정혜, 지관법, 등은 모두 육감각을 관리하는 자기절제의 수행이거나 이를 포함 내지는 전제하는 수행이다.

다양한 자기절제의 수행법 중에서도 ‘육근수호’(sad.-indriya-gutti, 六根守護)라는 말은 육감각의 절제를 통한 자기절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생의 삶의 과정은 육감각의 활동의 과정인데, 중생은 천성상 육감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고(dukkha)를 회피하고 쾌(sukha)를 추구한다. 육근수호는 육감각 영역에서 쾌고가 일어나는 과정과 쾌고의 속성에 대해서 여실지견하여 치를 떨침으로써(amoha, 무치), 쾌고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ara?a, 무탐), 쾌고에 의해 좌우되거나 쾌고를 혐오하지 않는(adosa, 무진) 것이다. 쾌감각/쾌느낌(sukha-vedana?과 고감각/고느낌(dukkha vedana? 뿐만 아니라 중성적 감각/느낌(asukha-adukkha-vedana?이 일어날 때 그 움직임을 알아차림으로써 각 감각/느낌에 탐진치가 수반되지 않도록 한다.19) 19) Majjhima-nika?a I, 303∼304쪽.

즉 주관이 객관 대상을 만날 때 발생하는 세 감각/느낌에는 탐진치―쾌감각/쾌느낌을 탐하는 탐, 고감각/고느낌을 혐오하는 진, 중성적 감각/느낌의 무상성을 모르는 치―가 수반되는데, 이 때 여섯 감각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감각/느낌을 갖되 이에 대해 집착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그 무상성을 인지함으로써 탐진치의 일어남을 막는 것이다.

육근수호는 이와 같이 감각의 영역에서 탐진치를 지멸시켜 가는 수행이다. 이러한 육근수호 수행의 핵심은 여섯 감각 자체를 지멸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섯 감각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감각/느낌에 탐진치를 수반하지 않는 데 있다. 즉 탐진치에 걸리지 않고 감각/느낌만을 섬세하게 지각하는데 있다. 이는 주관이 대상을 접할 때 들뜨지도 않고(na sumana) 우울해 하지도 않으며(na dumana), 평정을 유지하며 주의집중하여 잘 알아차리는 태도20)와 같다. 20) An?uttara-nika?a V, 30쪽.

그런데 육감각 영역의 다스림, 즉 육근수호를 통한 자기절제는 강제된 통제의 단계를 넘어 자발적 자기절제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육근수호가 한 두 번의 억제로 그치는 통제의 단계를 넘어서 습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제의 완성단계에서 자아는 구속이 아니라 해방을 체험하는데, 그것은 절제의 단계에서 육근수호가 심적 갈등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육근수호의 완성점에서 탐진치의 지멸도 가능하고 심해탈과 혜해탈도 성취된다.

육근수호를 핵심으로 하는 자기절제의 수행은 계정혜, 팔정도, 신구의 청정 등을 닦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에 사념처(catu-satipa-t.t.ha?a, 四念處)나 지(samatha, 止)와 관(vipassana? 觀) 등의 수행이 필수적으로 요청됨은 말할 나위 없다. 이러한 모든 과정의 결과로서 중생은 탐진치의 욕망 지멸에 이르고 속박의 상태를 탈피하여 자유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자유는 연기, 공, 무아, 무상의 체득을 전제하는 ‘현상세계에 대한 주체적 대응’으로서 외적인 것에 대한 맹목적 추구도 아니지만 외적인 것에 대한 거부나 회피도 아니다. 이러한 자유의 상태에서 우리는 육입, 12입처, 18계의 가르침이 인도하는 대로 자타, 주객, 주관과 대상, 혹은 인간과 자연의 이분적 분열을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자유인은 자리이타의 동체적 자비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 즉 자유는 제도나 타자의 의지 등에 의한 외적 간섭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탐진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를 획득한 자아는 개체적 자아의식이 아니라 동체적 자아의식으로 살며, 그 성품은 필연적으로 자타동체의 자비의 삶으로서 외화 되게 된다.

5. 자비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길러야 한다.’21) 21) Sutta-nia?a, 149∼151쪽.

자유인의 성품은 더 이상 탐진치의 성품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성품은 탐진치의 욕망이 사라진 탐진치 지멸의 성품이며 그의 욕구(chanda) 또한 탐진치의 욕망(tan.ha?이 아니다. 그의 성품은 자비의 성품이며 그의 욕구는 자비의 ‘원’(pan?dhi, 願)이다. 그래서 그의 몸, 행동, 말, 생각은 자비로서 드러나게 된다.

초기불교에 나타난 자비의 개념은 구체적인 자비행 혹은 타인에 대한 자비행에 앞서서 자비의 성품, 성향, 혹은 심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마음의 원망이나 미워함을 버리고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애심의 배양을 강조하고 있다. 자애심(metta?citta)을 배양하는 수행의 핵심을 필자는 ‘자비스러운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자비의 성품을 닦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자비심 배양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을 청정하게 하는 데 있고 심해탈을 이루는 데 있다. 마음의 온갖 불건전한(akusala) 것들을 없애는 데 그 일차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심의 배양은 일체의 불건전한 심적 에너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수행이다. 환언하면 이는 모든 불건전한 심적 에너지들의 포괄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탐진치 욕망의 지멸이다.

초기불교에서 자비심의 배양을 가르치는 대표적인 교설은 사무량심(catu-apparima?.a-manas, 四無量心) 혹은 ‘청정한 머무름’(brahma-viha?a, 梵住)이다. 사무량심은 자비의 성품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그리고 탐진치 지멸의 구체적 색깔로서 모든 존재에 대하여 공평하게 ‘한량없는(apparima?.a)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무량심은 자(慈)·비(悲)·희(喜)·사(捨), 즉 자애의 마음(metta?, 자비/연민(karun.a?, 공감적 기쁨(mudita?, 차별 없는 마음(upekkha?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은 각각 뭇 중생을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마음, 뭇 중생의 고통/아픔을 덜어주려는 발고(拔苦)의 마음, 뭇 중생의 기쁨에 대해 같이 기뻐하는(與樂) 마음, 평정함 속에서 공평하게 두루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식별할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 뭇 생명에 대하여 차별심을 내지 않고 평등하게 ‘나와 똑같이’ 대하는 마음을 지향한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개발하는 데는 공간적, 시간적, 실천적으로 한계가 없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사방, 팔방, 모든 곳에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편만하게 하고,22) 극히 짧은 순간이라도 그 마음을 놓지 말며,23) 강도가 자신의 사지를 양날의 톱으로 절단하는 상황에서도 그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24) 말한다. 22) 이러한 사무량심을 닦는 수행은 초기불교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명상수행, 특히 사선정은 이러한 사무량심의 내적 체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23) An?uttara-nika?a I, 10쪽.

사무량심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탐진치 욕망의 지멸의 가르침이 그렇듯이, 자신의 성품 변혁을 통한 자유 획득과 세계 변혁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 자비심의 배양에는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 변혁의 힘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자비의 성품은 지속적이고 습관적인 자비행을 예약한다. 그것은 상황이나 조건에 예속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자비행을 확약한다. 자비의 성품의 사람은 성향/기질(san.kha?a, 行) 자체가 자비이기 때문에 자비의 삶 속에서 자유나 행복을 얻는다. 그러한 이는―그럴 수도 없겠지만―자신이 자비와 배치되는 행동을 했을 때 불쾌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그에게 ‘자비롭지 못함’은 구속이다.

이상과 같은 사무량심 중심의 자비심 배양이 자비행을 ‘할 수밖에 없는’ ‘성품’으로서의 자비의 내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사섭법(catu-san.gahavattu, 四攝法)은25) 이러한 성품이 행동으로 외화 되는 자비의 외적 측면을 밝힌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섭법인 보시(da?a), 애어(peyyavajja), 이행(atthacariya), 동사(sama?attata?는 자비심이 특정의 대상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자비의 언행이다. 25) 사섭법(san?aha-vattu)은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사회(ariya-san?ha) 구현의 구체적 방법이기도 하다. 사섭법은 이 말의 어원에도 나타나 있듯이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함께(sam.) 붙들어/이어주는(gaha) 토대(vattu)’이다.

유형의 것이든지 무형의 것이든지 자신의 것을 나누는 보시, 상대를 배려·치유하는 올바르면서도 따뜻한 말인 애어, 상대를 직·간접으로 도와 이롭게 하는 이행, 기쁜 일이든지 슬픈 일이든지 상대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함께 하는 동사는 언행을 통하여 자비를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서 자비의 성품의 외화이다.

사섭법의 핵심은 타인의 행복/복지(attha?ita/attha/hita)에 대한 기여에 있다. 우리의 삶은 말과 행동의 연속이며, 우리는 우리의 사람됨이나 성품을 언행을 통해 표현한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 언행은 자신임을 드러내고, 자신임을 보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불교는 무아를 말하면서도 ‘행위’의 소유자 내지는 상속자로서의 자아에 대하여 말하며,26) 불교는 사람을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 생물학적 성별 등에 의해서 보지 않고 그 언행의 질, 즉 사람됨에 의해서 본다.27) 26) An?uttara-nika?a V, 88쪽. 27) Sutta-nipa?a, 650.

사섭법은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언행을 평가하는 불교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적으로 가치 있는 언행이라면 직접·간접 혹은 현재·미래에 타인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로―결국에는 자신의 복지도 증진시키게 되는― 귀결되어야 한다.

사무량심이 탐진치의 욕망을 지멸한 사람의 성품의 내면을 나타낸다면 사섭법은 그 외면을 나타낸다. 전자는 자비의 내적 측면을 강조하고 후자는 외적 측면을 강조하지만 양자는 모두 ‘자비(행)’이라는 말로 통합된다. 우리가 자비라고 할 때는 신구의―언행과 마음―에 있어서 자비를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의 자비 개념의 특징은 내적인 마음의 자비와 외적인 언행의 자비가 각각 서로를 내포하고 서로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자비심은 자비의 언행으로 드러나고, 자비의 언행은 자비심을 원천으로 한다.

그런데 자비(행)에는 원칙이 있다. ‘자리이타’(自利利他)가28) 그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한 가지로 동일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자신을 이롭게 하고 동시에 타인도 이롭게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리’(attahita)가 ‘이타’(parahita)를 의미하고 ‘이타’가 ‘자리’를 의미하므로, ‘자리’와 ‘이타’ 중에서 상황에 따라 더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자신과 타자를 모두 이롭게 하는 것이 자리이타인데, 자리와 이타를 양립시키지 못할 상황이라면 이 둘 중에서 보다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28) ‘자리이타’는 자기희생이나 배타적 이기주의가 아닌 상호존중과 상호배려를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원칙은 재가인의 윤리를 설명하고 있는 D沖gha-nika?a의 Siga?ova?a-Sutta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자리이타의 자비의 원칙은 연기, 공, 무아, 무상, 업설에 근거한 원칙으로서 존재들을 가르고 분류하여 차별하는 수많은 경계선의 해체를 요구한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을 넘어서 온 우주를 하나의 유기적(organic)·전일적(holistic) 생명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전일적 한 생명’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언행이든지 혹은 어떠한 생각이든지 그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고 무화되는 것은 없다.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 현시적이냐 미래적이냐라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무효력의 신구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자유인은 신구의에 있어서 자리이타의 자비의 원칙에 따름으로써 동체자비를 구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존재의 실상에 합치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자리이타의 자비 혹은 동체자비가 구체적으로 촉발되는 기제는 뭇 생명체가 느끼는 쾌고를 나의 것으로 받아드리는 공감 혹은 동일시의 정서이다. 한 마디로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마음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고통/상해를 회피하고 쾌/보살핌 받기를 원한다’고 전제한다. 자비 또한 이러한 생명체의 본성에 근거하여 호소된다. 내 자신이 고통이나 미움을 피하고 쾌나 보살핌을 원하듯이, 뭇 생명도 그러하니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즐겁게 하고 보살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자리이타의 자비, 동체자비, 동고동락의 자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계발·습득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탐진치의 욕망 지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반복에 의한 습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수행은 특정한 마음 상태와 언행방식을 습득하는 습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가르침은 지관, 선정, 사념처, 삼매 등의 다양한 명상법들을 시설하고 있다. 그것들은 여실지견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탐진치 지멸의 자비의 성품을 체득해 가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까닭에 명상법들을 포함한 모든 가르침은 자신의 깨침, 행복, 혹은 자유의 획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뭇 존재의 깨침, 행복, 혹은 자유를 실현하는 대사회적인 것이다.

6. 맺으며

필자는 이상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탐진치 욕망의 지멸, 행복/자유, 자비의 세 개념으로 풀어보았다. 이 글의 핵심요지는 인간은 탐진치의 욕망 지멸을 통해서 자유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유는 자비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인은 자비를 자신의 성품으로서 완전하게 구현했기에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asekha) 아라한(arahant)이며, 나와 대상간에 경계를 해체한 자유인이다. 경계 해체의 자유인은 연기, 공, 무아라는 존재의 실상을 체득함으로써, 이에 합치하는 자비의 성품을 길러, 자비의 삶을 살기에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자유인의 경지는 모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탐진치 지멸의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모든 인간의 이와 같은 도덕적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출발한다.
탐진치 욕망의 지멸은 이상과 같은 도덕적 능력의 개발·활용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의 지멸이 모든 욕구의 지멸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적 입장에서 법도에 맞게 충족되어야 하는 자연적 욕구가 있다. 그러나 부, 권력, 명예 등의 인위적 욕구는 경계의 대상이다. 무엇보다도 오감각에 대한 쾌추구 욕망과 소유욕망은 탐진치를 은폐하고 있는 반불교적인 것이다.

불교의 자유, 즉 탐진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외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 안의 내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근대 이후 추구되고 있는 타자 배타적이고 고립적이며 소유지향적인 자유와 속성을 달리한다. 현재 추구되고 있는 자유는 타자에 대한 배타성과 무한 소유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불교의 자유는 상호 배려적이고 공유적 자유를 추구한다. 불교가 추구하는 이러한 자유는 ‘나 만들기’와 ‘나의 것 만들기’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경계선을 해체해 가며 자비의 성품을 체득해 가는 과정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은 기본적으로는 육감각에 대한 수호, 즉 자기절제를 요구하며, 지관 등의 명상법을 통한 감각의 속성―무상, 고, 무아―에 대한 여실지견을 전제한다. 또한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하는 세 가지 감각/느낌 각각에 수반된 탐진치 지멸을 요구한다.

탐진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성취한 자유인은 자비를 성품으로 한다. 자비의 성품의 자유인은 자리이타, 자타동체, 발고여락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발현시킨다. 예컨대 그 구체적 모습은 마음의 자비인 사무량심과 언행의 자비인 사섭법을 통해 나타난다.

이 글에서 고찰한 이상과 같은 가르침, 즉 ‘탐진치의 욕망 지멸에 의한 자유’와 ‘자유의 구현으로서 자비의 삶’이라는 가르침에 대한 공감은 우리들 각자의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적 대상과의 관계―우리 삶의 회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관계―에 끄달리고, 갈구와 집착과 복종을 속성으로 하는 욕망 속에 침몰해 있는 한, 우리는 속박된 부자유의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 문제를 욕망―탐진치 욕망―의 지멸로 보고, 탐진치 지멸의 자비의 성품을 기르며, 그 결과로서 자연히 동체자비의 삶을 사는 문제라는 통찰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되는 자유의 개념과 관련하여 혹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탐진치 욕망의 지멸이 진정으로 ‘자유’를 의미하는가?

필자는 욕망, 즉 탐진치 욕망의 지멸이 자유인 까닭을 이렇게 생각해 본다. 탐진치의 대상은 항상 밖에 있지만, 욕심을 부리고, 미워하거나 화를 내며,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자유는 바깥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문제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바깥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우리들 자신 안의 탐진치인 것이다. 만일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바깥에 있다고 한다면 자유를 성취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거나,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어떤 외적인 힘을 빌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탐진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욕망지멸에 의해서 자유에 이를 수 있으며 오직 우리 자신만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지향하는 이러한 자유는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해 온 자아 집착적이고 자아 몰입적이며, 그러면서도 자아를 무한히 외적으로 확장해 가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조건, 즉 뭇 존재간 무한적 상호의존성을 탈피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 ‘안’에서의 자유로서 자신의 ‘질적 변화’를 본질로 하는 자유이다. 그래서 자유는 항상 우리의 선택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

안옥선
전남대 심리학과,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 졸업. 하와이 주립대 철학박사, 현재 전남대 강사. 저서 및 논문으로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초기불교 윤리에의 한 접근》, Compassion and Benevolence, 〈21세기를 위한 불교윤리의 모색〉, 〈‘개인주의적 인권’에 대한 불교적 비판〉, 〈원효사상에 있어서 인권의 기초이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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