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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과학적 진보를 제한할 수 없다 / 조성택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20호] 2004년 09월 12일 (일)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근대 이래 인간의 생명권은 '인격 개념'에 의해 정당화되어 왔다. 살생이나 신체 손상의 금지 원칙의 근거는 '자연적,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권리주체로서의 인격'이라고 하는 '법적, 도덕적 차원'에 있다고 본 것이다.

'생명권'에 관한 근대적 개념 정의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철학의 구분,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도덕의 구분이라는 근대적 기획이다. 이러한 근대 기획이 일정부분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제고하고 보편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근대적, 다시 말해서 탈신화적·탈종교적 개념의 생명 개념과 종교나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근거한 생명개념 간에는 별 다른 충돌 없이,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피임, 낙태 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지기 시작한 문제는 최근 '생명공학' 특히 복제 기술을 중심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즉 과학 기술을 인간의 탄생과 소멸/죽음의 과정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가 윤리학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 문제의 쟁점은 결국 수정란이나 배아(胚芽)와 같은 발생의 초기 단계와 뇌사 상태와 같은 비가역적 소멸 단계에 있어 인간이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 즉 인격인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의 조건을 더 자세히 고찰해 보면 첫째는 '과학 기술의 인체에 대한 적용으로 인해 인간의 생명이 (특히 초기와 말기 단계에서) 탈자연화될 수 있다, 즉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태이고, 둘째는 이러한 '탈자연화가 종종 윤리적 요구를 지니고 제안된다'는 사태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생명 의료 기술의 발전이 전통적으로 자연적 과정에 맡겨졌던 수정란, 배아, 태아의 발생 과정에 그리고 죽음의 과정에 기술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이러한 개입이 종종 윤리적 목적(예를 들어 인공 수정을 통한 불임 해결, 배아 세포 연구를 통한 난치병 치료술 개발, 장기 기증에 동의한 뇌사자로부터의 장기 적출을 통한 장기확보)을 가지고 제안되기 때문에 수정란, 배아, 비가역적 혼수상태의 인간 등의 권리상의 지위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 종교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근거해서 과학 기술을 제한할 수 있는가? 없다고 본다. 더욱이 특정 종교에서처럼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과학 기술을 제한하려 든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종교적 관점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과학 기술이 사용되는 한, 그 과학 기술을 제한할 수 없으며, 과학 기술이 종교적 관점에서 제한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된 경우'에 한해서이다.

과학 기술 혹은 현대 문명 일반에 대한 최근의 우려는 한편으로 환경과 생태계 파괴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대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무의식적 불안이 투사된 과장된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진보' 자체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감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불안감은 종교적 가치관에 의해 더욱 더 증폭되는 측면이 있다.

복제 기술과 관련한 생명공학의 문제 또한 그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것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것보다 진보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복제 기술의 경우 그 부작용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은 인정하고 그 보완책과 규제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지만, 종교적 관점이나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근거하여 인간의 탐구의 권리와 능력을 제한하는 사태는 있을 수 없다.

또한 과학의 발전과 진보는 불가역적인 것으로 돌이키지 못한다. 과거 인류의 발달 과정에서 흔히 있어 왔던 것처럼 진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종교의 역할은 이러한 진보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있지, 진보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약간의 비약을 허용한다면, 사회가 종교에 봉사할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회에 봉사해야 하며, 이런 관점에서 계속 진보해온 사회에 비하면 종교는 정체되어온 감이 있다.

한편 현대 사회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삶의 과정을 신화화하지 않고서도 그 교리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의미는 '붓다'라고 하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인도 사회의 브라흐마니즘에 기초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화적 이해를 깨뜨리고 인간의 자율성에 기초한 도덕관을 세웠다는 점에 있다.

복제 문제에 관한 여러 쟁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성을 신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불교는 복제 문제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불교는 인간의 종교이지 신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2004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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