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본다

필자 주

본고에서 초기불교(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는 문헌을 중심으로 하되 빠알리(Pa?i)의 경장(Sutta Pit.aka)과 율장(Vinaya Pit.aka), 그리고 한역 사아함(四阿含)과 율장(律藏)을 그 범위로 한다.

 

1. 재가자의 의미

석가모니 붓다의 제자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출가자이고 다음으로는 재가자이다. 다시 출가한 남성인 비구(bhikkhu)와 여성인 비구니(bhikkhun沖)로 출가자를 구분하고, 재가자로서는 남성은 우바새, 여성은 우바이로 나누는데 이들을 합하여 흔히 사부대중(四部大衆: catta?i parisa?이라 한다.

여기서 우바새(優婆塞)는 우빠사까(Upa?aka)에 대한 음역으로 오파색가(烏波索迦), 우파사가(優波娑迦) 등으로도 음역되며 다시 이것을 근사(近事)·근사남(近事男)·근선남(近善男)·신사(信士)·신남(信男)·청신사(淸信士)라 의역되고 있다. 우바이(優婆夷)는 우빠시까(Upa?ika?에 대한 음역으로서 우파사(優婆斯)·오파사가(휂婆斯迦)로 그리고 근사녀(近事女)·근선녀(近善女)·근숙녀(近宿女)·신녀(信女)·청신녀(淸信女)로 의역되었다. 이들을 각각 재가의 남녀로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하는 사람을 이름하는 말이다. 한 경전은 재가불자, 즉 “우바새란 집에 머물며 청정한 삶을 살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삼보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이에 저를 증명하고 알아주십시요’라고 맹서한 사람이다.”2)라고 표현하고 있다.2) 《잡아함경》 제33권 : “優婆塞者. 在家淨住. 乃至盡壽. 歸依三寶. 爲優婆塞. 證知我.”

율장(律藏) 등에 의하면 아직 교단이 성립되기전 불(佛)·법(法) 이보(二寶)에 귀의한 최초의 재가불자는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로서 이들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 공양을 올린 대상(隊商)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삼보(三寶)에 귀의한 재가불자는 야사(Yasa)의 부모이다. 각각 이들은 최초의 우바새와 우바이가 되었으며 야사 또한 우바새였다가 최초로 출가비구가 된 경우이다.

불교도가 된다는 것은 출가이든 재가이든 기본적으로 모두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오계(五戒)를 수지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특히 재가의 경우 최소한 삼보에 귀의가 먼저 요구되고 그리고 오계의 수지까지를 그 범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3)3) 대표적인 한 예를 든다면, A.(PTS의 An?uttara-nika?a) vol. IV, pp. 220∼222.

이러한 오계가 확립된 사람에게는 다시 몇 가지 계율을 더 부가한 팔재계(八齋戒)가 주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아함경》의 《우바새경(優婆塞經)》4)은 그 경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가불자를 위한 기본 가르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경은 많은 경전에 산재해 있는 재가자에 대한 기본적인 교설의 요점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경전인데, 재가자는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제자’로 언급되면서 오법(五法)과 사증상심(四增上心)을 실천할 것이 설해진다.

오법은 오계를 지켜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사증상심이란 네 가지 뛰어난 마음을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서 삼보의 염(念: anussati)에 계(戒)의 염이 더한 것이다. 여기서 삼보의 염이란 다름 아닌 불·법·승의 성질과 가치 그리고 덕성 등을 깊이 되새겨 내면화하는 행법을 말한다. 일종의 관상법(觀想法)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 중심의 종교가 입으로 신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러 기도하고 숭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불보(佛寶)에 있어서 “여래는 세존(世尊)이시며, 아라한(阿羅漢)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시며(正遍知), 지혜와 덕행을 잘 갖추신 분이시며(明行足), 잘 가신 분이시며(善逝),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시며(世間解), 위없는 분이시며(無上士), 인간을 잘 이끄시는 분이시며(調御丈夫), 신들과 인간들의 스승이시며(天人師), 깨달으신 분(佛世尊)입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불보를 수식하고 나타내는 각각의 말에 대한 의미와 가치 그리고 성질을 되새겨보는 것이다. 법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불법이야말로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 잘 설하신 가르침이며, 현생(現生)에서 바로 (결과를) 볼 수 있는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해 있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고 검증해 보라고 할 수 있는 가르침이며, 목적하는 바대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가르침이며, 지혜로운 이라면 각자가 성취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으로 역시 불법의 특징과 가치 그리고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승보에 대해서는 승보야말로 “세상에서 잘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올바르게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지혜롭게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바른 방법으로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네 쌍의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이룬, 여덟 부류의 성스러운 수행자들의 모임이며, 이것이 실로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으로 공양을 올릴 가치가 있고 대접할 가치가 있으며, 보시를 드릴 가치가 있고 예경을 올릴 가치가 있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공덕의 복밭(福田)”이라고 하는 것을 되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계증상심은 오계 등의 불교의 윤리 도덕적인 실천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재가자는 이와 같은 오법과 사증상심을 통해 선(善)하지 않는 세계를 다하고 예류과(預流果)를 얻어 끝내는 괴로움의 끝과 정각(正覺)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2. 재가자의 출신성분

현존하는 초기경전에서 출가자를 포함하여 재가자의 출신성분을 분석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에 따르면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재가자는 농촌보다는 도시에 주로 거주한 도시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 의해 불교를 ‘도시형의 종교’라고 결론짓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계급이나 계층에 있어서는 하층민보다는 상층이 압도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경전에서 언급되는 재가자의 유형은 왕과 왕족, 촌장, 대신과 귀족, 지방 관리, 장군, 바라문 사제나 교리학자, 수학자, 의사, 고급 유녀(遊女), 지주, 거상(巨商), 대상(隊商), 고리대금업자 등과 같이 다양하며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상층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반면에 이발사, 농부, 코끼리 조련사, 옹기장이, 금속 세공업자나 범죄인 또는 거지들과 같이 하층의 사람들도 나타난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 불교로 귀의한 재가자는 왕에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이 가운데 거상(巨商)이나 대상(隊商)과 같은 무역업에 종사하는 많은 상인 계층은 불교 교단의 발전에 있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회적·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3. 수승한 재가자

《증일아함경》 제3권 〈청신사품(淸信士品)〉과 〈청신녀품(淸信女品)〉에 대응되는 빠알리(Pa?i) 《앙굿따라 니까야(An?uttara Nika?a)》5)를 보면 불설(佛說)로서 당시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남녀 재가제자들을 출가제자와 똑같이 성문제자(聲聞弟子: sava?a)로 칭하면서 나열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5) A. vol. I, pp.25∼26.

〈청신사품〉

나의 우바새(優婆塞)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처음으로 법락(法樂)을 성취하고 성현의 진리를 깨달은 이는 삼과(三果)의 대상(隊商)이며 지혜 제일인 질다(質多) 장자가 바로 그요, 신통력(神德) 제일은 바로 건제아람(ㅦ提阿藍)이요, 외도를 항복 받는 이는 바로 굴다(堀多) 장자요, 깊은 법을 잘 설명하는 이는 바로 우파굴(優波掘) 장자요, 늘 앉아 참선하는 이는 바로 가치아라바(呵侈阿羅婆)요, 악마 세계를 항복받는 이는 바로 용건(勇健) 장자요, 복과 덕을 많이 가진 이는 바로 사리(륉利) 장자요, 큰 시주(施主)는 바로 수닷타(須達) 장자요, 일가 친척이 많은 이는 바로 민토(泯兎) 장자이다.

나의 우바새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이치 묻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생루바라문(生漏婆羅門)이요, 성품이 지혜롭고 밝은 이는 바로 범마유(梵摩喩)요, 모든 부처님에 대해 깊은 신심을 내는 이는 바로 어마마납(御馬摩納)이요, 몸 가운데 무아(無我)의 이치를 생각하는 이는 바로 희문금(喜聞芩) 바라문이요, 이론으로 이길 수 없는 이는 바로 비구(毘㈊) 바라문이요, 게송을 잘 짓는 이는 바로 우파알리(優婆離) 장자요, 말을 빨리 잘하는 이는 바로 우파알리 장자이다.

좋은 보배를 기꺼이 내어주어 아끼는 마음이 없는 이는 바로 수제(殊提) 장자요, 선(善)의 근본을 이룩한 이는 바로 우가비사리(優迦毘舍離)요, 묘한 법을 잘 설명하는 이는 바로 최상무외(最上無畏) 우바새요, 주장에 두려움이 없고 사람의 성질을 잘 살피는 이는 바로 두마대장영비사리(頭摩大將領毘舍離)이다.

나의 제자 우바새 가운데 첫째로서, 은혜로이 베풀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빔비사라왕(毘沙王)이요, 적게 보시하는 이는 바로 광명왕(光明王)이요, 선(善)의 근본을 이룩한 이는 파세나 왕이요, 뿌리 없는 좋은 믿음을 얻어 기뻐한 이는 바로 아자타사투왕(阿륉世王)이요,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해 뜻이 변하지 않는 이는 바로 우다야나왕(優塡王)이요, 바른 법을 받들어 섬기는 이는 바로 월광왕자(月光王子)이니라.

성스러운 중을 받들어 공양하되 뜻이 언제나 평등한 이는 바로 제타왕자(造祇園王子)요, 항상 남 건지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이는 바로 사자왕자(師子王子)요, 남을 잘 공경히 받들되 높고 낮음이 없는 이는 바로 무외왕자(無畏王子)요, 얼굴이 단정하여 남보다 뛰어난 이는 바로 계두왕자(鷄頭王子)이다.

나의 우바새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불니(不尼) 장자요, 마음으로 항상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바로 석가 종족 마하납(摩訶納)이요,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석가 종족 발타(拔陀)요, 항상 보호하는 마음을 써서 착한 행을 잃지 않는 이는 바로 비사선(毘륉先) 우바새요, 욕됨을 잘 참는 이는 바로 사자(師子) 대장이니라.

여러 가지로 잘 논하는 이는 바로 비사어(毘舍御) 우바새요, 성현의 침묵을 잘 행하는 이는 바로 난제바라(難提波羅) 우바새요, 착한 행을 부지런히 잘 닦아 쉬지 않는 이는 바로 우다라(優多羅) 우바새요, 내 제자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깨달은 이는 바로 구이나마라(拘夷那摩羅)이다.

〈청신녀품〉

나의 우바이(優婆夷)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처음으로 도를 잘 깨달은 이는 바로 난타타바라(難陀陀婆羅) 우바이요, 지혜가 제일가는 이는 바로 쿠주타라(久籌多羅) 우바이요, 언제나 좌선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수피야녀(須毘那女) 우바이요, 지혜가 밝은 이는 바로 비부(鼻浮) 우바이요, 설법을 잘하는 이는 앙갈사(鴦竭륉) 우바이요, 경전 뜻을 잘 연설하는 이는 바로 발타바라수염마(跋陀婆羅須焰摩) 우바이요, 외도를 항복 받는 이는 바로 바수타(婆須陀) 우바이요, 음성이 맑고 트인 이는 바로 무우(無優) 우바이요, 여러 가지로 논하는 데는 바로 바라타 우바이요, 용맹스레 정진하는 이는 바로 수두 우바이이다.

나의 우바이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여래를 공양하는 이는 바로 말리카(摩利) 부인이요, 바른 법을 받들어 섬기는 이는 바로 수뢰바(須賴婆) 부인이요, 성스러운 중들을 공양하는 이는 바로 사미(捨彌) 부인이요, 미래와 과거의 어진 선비를 우러러 보는 이는 바로 월광(月光) 부인이요, 보시하기에 으뜸인 이는 바로 뇌전(雷電) 부인이요, 항상 자애의 삼매를 행하는 이는 바로 마하광(摩訶光) 우바이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비제(毘提) 우바이요, 기뻐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 이는 바로 발제(拔提) 우바이요, 착한 행동을 지키어 선업을 보호하는 이는 바로 난다(難陀)의 어머니인 우바이요, 믿음의 해탈을 얻는 이는 조요(照曜) 우바이이다.

나의 우바이 제자 가운데 첫째로서, 항상 욕됨을 참는 이는 바로 무우(無優) 우바이요, 공삼매(空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비수선(毘얽先) 우바이요,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우나타(優那陀) 우바이요, 무원삼매(無願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무구(無垢) 우바이요,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이는 시리(尸利) 부인인 우바이요, 계율을 잘 가지는 이는 앙갈마(鴦竭摩) 우바이이다.

얼굴이 단정한 이는 바로 뇌염(雷焰) 우바이요, 모든 감각 기관이 고요한 이는 바로 최승(最勝) 우바이요, 많이 듣고 널리 아는 이는 바로 니라(泥羅) 우바이요, 게송을 잘 짓는 이는 바로 수달(須達)의 딸 수마가제(修摩迦提) 우바이요, 겁내지 않는 이도 바로 수달의 딸이요, 내 성문가운데서 최후에 깨달은 우바이는 바로 람(藍) 우바이이다.

위의 양 경전을 비교·검토해보면 기본적으로 재가 불자의 위상과 역할 등이 종합적으로 잘 요약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면, 먼저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출가자에게 공양드리는 재시자(財施者)로부터 시작하여 사무량심(四無量心)이나 사섭법(四攝法)과 같은 이타행의 실천자, 성묵(聖默)을 잘 행하고 좌선을 통해 선정(禪定)을 닦는 선정수행자 그리고 깊고 묘한 법을 잘 이해하고 설하는 설법자(說法者), 더 나아가 주장에 두려움이 없고 논쟁으로 남을 이길 수 있는 논사(論師)는 물론 그렇기에 외도(外道)까지 조복받고 불교로 귀의시키는 포교사(布敎師) 역할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우바새로서 가장 이상적인 재가불자의 대표로 ?따와 핫타까(Hatthaka)를 우바이로는 쿠줏따라(Khujjuttara? 또한 벨루칸타끼야가 언급되고 있다.6) ?따는 설법사(dhammakathika)로 나타나고7) 쿠줏따라는 또한 여러 경전에서 언급되지만8) 특히 폭넓은 불교에 대한 이해(bahussuta) 면에서는 우바이 가운데 최고로 언급된다.9) 벨루칸타끼야는 많은 비구들이 찬사를 보내는 우바이로서 사리불이 그녀에게 법을 설하기도 한다.10) 여기서 최고의 이상적인 재가불자로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있거나 설법사의 역할로서 이야기된다는 점은 불교가 법을 중시하는 지혜의 종교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겠다.6) A. vol. I, p. 26, p. 88; vol. II, 164. 7) A. vol. I, p. 26. 8) A. vol. I, p. 88; vol. II, 164; vol. IV, 368; S.(PTS의 Sam?utta-nika?a) vol. II, 236. 9) A. vol. I, p. 26. 10) A. vol. IV, p. 64 ff.

4. 재가자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어디까지인가

한번은 유행하는 바차고타(Vacchagotta)라는 한 외도가 부처님을 만나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흰 옷 입은 재가자11) 가운데 얼마만큼이나 범행을 닦아(梵行者: brahmaca?i) 오하분결(五下分結)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11) 여기서 재가자를 흰 옷 입은 사람(gih沖oda?a vasana?으로 표현한 것은 출가자가 착용하였던 당시 분소의(糞掃衣)나 염색한 승복(kasa?a vasana?에 대비되는 염색하지 않은 당시 일반인들의 의복을 뜻한다.

이 물음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 보다도 훨씬 많은 재가자들이 범행을 닦아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비구·비구니에 이어 같은 형식으로 재가불자에게도 해당하는 질의 응답인데, 여기서 분명히 불설(佛說)에 의해 많은 수의 재가 불자들이 범행을 닦고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어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opapa?ika?’가 되었다는 의미는 수행에 따른 좀 더 고양된 인격으로 순간순간 변화하는 정신적 재탄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재가자도 열반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음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조건과 단서가 있는데 이는 바차고타의 다음 질문에서 대비적으로 잘 드러난다.

“당신은 이렇게 범행자로서 많은 수의 비구·비구니는 물론 흰 옷 입은 재가불교인까지 열반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흰 옷 입은 제자 가운데 욕락자(欲樂者: ka?abhog沖)로서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녀 해태(懈怠)하지 않고 의심을 떠나 의혹을 끊고 확신하여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바차고타여,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 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흰 옷 입은 제자 가운데에서도 욕락과 함께 나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녀 해태(懈怠)하지 않고 의심을 떠나 의혹을 끊고 확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12)12) M.(PTS의 Majjhima-nika?a) vol. I, p. 498 ff.

이처럼 과연 재가자들이 아라한과 증득이 가능한가에 대한 중요한 문답이 담겨 있는 이 경은 《마즈히마 니까야(Majjhima Nika?a)》의 《마하바차고타 숫타(Maha?Vacchagotta Sutta)》라는 경전이다. 한역 대응 경전은 《잡아함경》 제34권의 《출가경(出家經)》인데 여기서는 사문사과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열반의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은 범행을 닦는 자(梵行者: brahmaca?沖)로서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어야 가능하다는 언급에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욕애(欲愛: ka?a)를 벗어나지 못하는 흰 옷의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닌다 하더라도 해태(懈怠)하지 않고 의심을 떠나 확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정도이지 아라한의 열반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재가자라 할지라도 출가자 못지 않게 열반의 아라한과를 성취하려면 범행을 닦는 자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는 다시 바차고타와 대론하는 또 다른 경에서 ‘재가자로서 속세의 결(結)을 끊지 못하면 고(苦)를 끊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13)13) M. vol. I, p. 483.

그리고 여기서 꼭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궁극적인 경지로서의 목표는 분명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과이고 그 내용에 있어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그 성취하는 과정까지 결코 모두 같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출가의 중요성이 강조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재가자의 조건은 출가자보다 열반 성취에 있어 훨씬 힘들다는 것이다. 즉 욕애를 벗어나기 훨씬 힘든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초기불교에서는 출가라는 조건이 강조된다.

5. 재가자의 열반 성취는 가능한가14)14) 과연 재가자가 열반의 경지에 이른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불교 교리사에서 오랫동안의 쟁점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논의를 생략한다.

불설로서 재가자라 할지라도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 보다도 훨씬 많은 수라고 나타난다. 여기서 잠깐 열반의 아라한과 경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불교도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경지이고 궁극적인 목적의 경지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아라한은 일체 번뇌를 소멸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라한 가운데 한 분이며 그러기에 여래 십호의 처음에 위치하여 강조된다. 더 나아가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초기경전에서 보여주는 근본적인 의미의 불타관(佛陀觀: 붓다의 개념)은 아라한관(阿羅漢觀: 아라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15) 15) 졸고, “A Study of The Concept of Buddha”: A Critical Study Based on the Pa?i Texts, Delhi : 델리대 박사학위논문. 1999.

그러기에 초기경전에서 아라한과 이상의 불과(佛果)가 따로 설정되어 설명되지 않았다. 다만 아라한과와 불과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초기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불교 흥기 이후 한참이 지난 이후부터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재가자가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재가자로서 열반 성취의 예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야사(Yasa)는 재가자 신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아라한과를 성취한 인물이며 그 이후 출가하였다.16) 마가다국의 왕비, 케마(Khema? 또한 마찬가지로 재가자로서 아라한과를 증득한 후 출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의 세속 부친인 정반왕도 임종 바로 직전에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잡아함경》의 《아지라경(阿支羅經)》17)에 따르면 아지라는 붓다와의 대론에서 연기에 대한 설법을 듣고 법 눈이 깨끗해져 “저는 이미 제도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는 우바새가 되려니 증명하고 알아주십시요”라고 재가불교도가 될 것임을 맹서하고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소에 받히는 사고로 말미암아 죽고 말았다. 이를 보고하는 비구들은 그의 후생을 묻는데, 이에 대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미 법을 보고 법을 알고 법에 머물러 법을 받지 않고 이미 반열반에 들었다.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그 몸을 공양하라”18)고 설한다. 16) Vinaya-pit.aka vol. I, pp.15∼20. 17) 《잡아함경》 권12. 18) “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 已般涅槃. 汝等當往供養其身.”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바새로서 다시 태어나지 않을 반열반에 들었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최종적으로 《앙굿따라 니까야(An?uttara Nika?a)》에서는 놀랍게도 불사(不死: amata)의 열반을 성취한 ‘재가(gahapati) 아라한’ 21인의 이름이 하나 하나 나열되면서 반복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Tapussa, Bhallika, Sudatta Ana?hapin.d.ika, Citta Macchika?an.d.ika, Hatthaka A?.avaka, Maha?a?a Sakka, Ugga Vesa?ika, Uggata, Su?a Ambat.t.ha, J沖vaka Koma?abhacca, Nakulapita, Tavakan.n.ika, Pu?an.a, Isidatta, Sandha?a, Vijaya, Vajjiyamahita, Men.d.aka, Va?et.t.ha, Arit.t.ha 그리고 Sa?agga 등이다.19) 19) A. vol. III, p. 451.

이상과 같이 열거한 남녀의 구성비를 보면 우바새는 Nakulapita까지 모두 11인이고, 우바이는 그 이후 나머지 10인이다. 모두 독실한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와 지(n??.a) 그리고 해탈법과 같은 ‘여섯 가지 법’에 의해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6. 뛰어난 수행 표본으로서 재가자

불교의 본격적인 수행의 과정은 사선(四禪)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 단계적으로 발전해 가는 구조를 압축적으로 잘 요약하여 보여주는 구조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사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수행은 전문적인 출가수행자만이 가능한 실천법처럼 생각해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역 《증일아함경》의 〈청신사품(淸信士品)〉과 〈청신녀품(淸信女品)〉에서20) 불설(佛說)에 늘 앉아 참선하는 재가불자는 가치아라바(呵侈阿羅婆) 우바새와 수피야아녀(須毘那女) 우바이가 각각 칭찬되고 있다. 20) 《증일아함경》 제3권 제6·7.

더 나아가 특별히 공삼매(空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비수선(毘 先) 우바이,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닦는 이는 우나타(優那陀) 우바이, 무원삼매(無願三昧)를 닦는 이는 무구(無垢) 우바이로서 여성 재가 불자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이는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선수행을 열심히 닦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초기경전에서는 출가수행자 못지 않게 그 이상의 수행을 행한 ?따(Citta) 장자가 있는데 그를 통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따는 당시 사문종교의 대표격으로 최대의 종교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자이나교 중흥조 니간타 나타뿟따를 찾아 신흥종교인 불교측 대표로 대론하게 된다. 먼저 니간타 나타뿟따는 재가불자인 ?따에게 “당신의 스승인 고타마는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삼매가 있어 심(尋)·사(伺)가 지멸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당신은 믿는가?”하고 묻는다. 이에 ?따의 답변은 “스승을 믿고 믿지 않고에 상관없이 심사가 지멸하는 무심무사가 있다”고 바로 응답한다. 이에 마하비라 니간타 나타뿟따는 대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처럼 “심·사가 지멸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그물로 바람을 막고자 하는 것과 같고 손바닥으로 갠지스 강물을 막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조롱하였다.

여기서 ?따는 대론자로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로서 당당히 최대의 사문종교 수장에게 믿음보다는 체험에 따른 앎(n??.a)이 더 중요함을 주지시킨 뒤 놀랍게도 스스로 초선에서부터 제사선까지 자유로이 실천 수행하여 그 어떤 누구에 대한 믿음에 따라 무심무사의 경지가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결국 계속되는 대론에서 마하비라는 ?따의 질문에 더 이상 적절히 응수할 수 없어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서 초기경전은 재가불자로서 높은 선수행의 경지를 증득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경전21)에서 나체 수행자 깟싸빠를 찾아 출가한 지 얼마 되었는가를 묻고 30년이 되었다는 그에게 당돌하게도 인간을 초월한 법을 성취하여 지견(知見)을 얻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묻는다. 인간을 초월한 법(uttari-manussa-dhamma)은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정욕(情欲)에 얽매이지 않고 뛰어넘은 경지인 범행(梵行)의 성취를 의미하는데 그렇지 못하였음을 솔직히 말하는 그에게 ?따는 30년 수행으로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21) S. vol. IV, p. 300 ff.

이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깟싸빠는 역으로 ?따에게 불교신자가 된지 얼마나 되었냐고 반문한다. 마찬가지로 30년이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30년 동안에 자신에게 물었던 인간을 초극한 법을 성취하여 지견(知見)을 얻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여기서 ?따는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사선을 자유로이 성취하여 다시 태어날 결박이 이미 다했음은 부처님 또한 증명하실 것으로 설명한다.

이에 나체 수행자 깟싸빠는 어떻게 출가자도 아닌 재가자가 인간을 초월한 법을 성취하여 지견(知見)을 얻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자신 또한 불교에 귀의할 것을 원하자 ?따는 대덕 스님들에게 인도하여 결국 깟싸빠 또한 현생에서 범행을 이루고 해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의 경전22)은 ?따의 임종에 즈음하여 많은 하늘의 존재들이 몰려와 미래세의 ?따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 하자 오히려 그것 또한 무상하고 안정되지 않은 것으로 버려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불법승 삼보에 대한 굳은 신심으로 총체적으로 닦아야 함을 강조하면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22) S. vol. IV, p. 302 ff.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나는 ?따는 마치 대승경전의 유마 거사를 연상하게 하는데 아마 유마 거사의 초기불교적 원형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로 출가자들에 의해서까지 심오한 불교에 있어 반야지혜의 눈을 이미 갖춘 것으로 그는 칭찬 받고 있으며23) 더 나아가 당시 62가지 종교철학적 여러 견해들이 논의된 《디그하 니까야(Digha Nika?a)》의 유명한 경전인 《브라흐마잘라 숫따(Brahmaja?a Sutta)》에 대해서도 정통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24) 그러므로 부처님에 의해 불교를 잘 설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재가제자로 선언되고 있으며25) 또한 가장 이상적인 재가불자로 평가되고 있다.26) 23) S. vol. IV, p. 283. 24) S. vol. IV, pp.283∼288. 25) A. vol. I, p. 26.26) 참고, An?uttara-nika?a vol. I. p. 88; vol. II, p. 164; vol. III, p. 451.

마찬가지로 한역 《증일아함경》의 〈청신사품(淸信士品)〉에서도 한역 질다(質多)로 이름이 음역되어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새(優婆塞)로서, 처음으로 법의 즐거움을 얻고 성현의 진리를 깨달은 이는 바로 삼과(三果)의 장사꾼이요, 지혜 제일은 바로 질다 장자”로 평가되고 있다.27) 그러한 ?따는 앞의 나체 수행자 깟싸빠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올 결박이 이미 제거된 불환과를 성취했음을 보여주고 다시 21인의 재가 아라한의 명단에서는 이미 재가 신분으로 일체 번뇌를 끊어 열반을 성취한 것으로 나타난다. 27) 《증일아함경》 제3권 제6 〈청신사품〉.

7. 이타행의 표본으로서 재가자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이타행의 모범으로서 재가자를 들면 마하나마(Maha?a?a)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마하나마는 부처님과 같이 석가족 사람으로 아니룻다(Anuruddha)의 형으로 일찍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구도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상가(Sam?h)의 나라로서 석가족의 왕위는 세습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코살라 국에 의한 석가족의 멸망의 시점에 왕은 마하나마였다. 그는 석가족을 대표하거나 재가신도를 대표하여 부처님께 법을 자주 묻는 것으로 여러 경전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에 석가족의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받았던 코살라 국의 왕이 대군을 이끌고 석가족을 함락시키고 카필라 성 안의 사람들을 모두 몰살하려 들 때 코살라 왕을 찾아 자신이 우물 속에 잠겨 있을 동안만이라도 학살을 쉴 것을 간청한다. 이에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던 코살라 국 왕은 승낙하였는데 한번 물 속에 뛰어든 마하나마는 한참이 지나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군사를 시켜 우물 안을 조사해보니 물 속에 난 나무뿌리에 자신의 상투 머리를 묶은 채 익사해 있었다. 이에 감동한 코살라 국 왕은 더 이상의 학살을 하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석가족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28)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을 정도는 죽음까지도 초연한 불사(不死)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타행의 표본으로서 대승의 보살도를 연상시키며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나열되는 21인의 ‘재가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등재되어 있다.29)28) 《증일아함경》 제26권 ; Jataka vol. I, p. 133 ; 《사분율(四分律)》 권41 ; 《오분율(五分律)》 권21.
29) A. vol. III, 451.

8. 재가자의 일반적인 신행생활

불교 최고의 가르침은 재가자에게도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설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4제·8정도 등이다. 또한 전적으로 재가자의 일상 생활과의 규범과 윤리를 설하고 있는 경전도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싱갈로바다경(Singa?ova?a Suttanta)》30)이 가장 유명하고 그 외에도 《비얏가빠자 숫따(Vyagghapajja Sutta)》,31) 《빠라바와 숫따(Para?hava Sutta)》,32) 《망갈라 숫따(Mangala Sutta)》33) 그리고 《담미까 숫따(Dhammika Sutta)》34) 등이 잘 알려져 있다. 30) D.(PTS의 D沖gha-nika?a) vol. III, pp.180∼193. 31) A. vol. III, p. 281. 32) Suttanipa?a PTS, pp.18∼20. 33) Suttanipa?a PTS, pp.46∼47.
34) Suttanipa?a PTS, pp.66∼70.

특히 《싱갈로바다경》은 생활 윤리의 기초로서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물론 부부·친구 더 나아가서는 노사간이나 재가자와 출가자 사이에 이르기까지 서로간에 지켜야 할 덕목과 의무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결국 성공적인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가르침이 된다. 또 어떤 경전에서는 재가자는 생계의 수단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일, 살상의 무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일, 독약을 판매하는 일, 생명 있는 것을 죽여 고기를 파는 일이나 그리고 술을 판매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제하고 있다.35) 이것은 모두 오계와 관련된 불살생의 자비 정신과 불음주계가 바탕이 되어 있지만 불교도 차원뿐만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어떻게 현대의 모든 삶이 지향해야 할 직업윤리의 확립을 위해서도 많은 시사점들을 주고 있어 심도있는 조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35) A. vol. III, p.208.

그리고 흔히 재가자에게 있어서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큰 복업을 짓는 것으로 강조되었다. 그렇기에 차제설법으로서 삼론(三論)이 그것이고, 다른 경전에서 삼복업사(三福業事)로서 보시·지계 그리고 정진수행(bha?ana?으로 나타난다.36) 정진수행이란 7각지와 전문적인 수행을 의미하지만 이전의 보시·지계가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물질적인 보시 능력이 있는 재가자를 염두한 설법으로 볼 수 있다. 베품과 윤리 도덕적 생활에 이어 구체적인 수행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36) A. vol. IV, p. 241 ; 《증일아함경》 제12권 《복업경(福業經)》.

기본적으로 재가는 5계를 수지하는 것 외에 매달 포살(布薩: uposatha)을 행해야 한다. 포살일은 출가 비구가 매월 2회인데 반해 재가자는 6회이다. 포살일에 8재계를 지키는 것은 많은 이들을 이익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대단히 큰 공덕의 복업사로 권장된다. 후에 육재일(六齋日)로 이름하기도 하는데 8·14·15·23·29 그리고 30일에 8재계(八齋戒)를 지키는 것이다. 8재계란 5계에 ⑥ 제 때가 아닐 때 밤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 ⑦ 꽃이나 향을 몸에 장식하거나 바르지 않는다. ⑧ 다리가 있는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를 더 한 것이다. 이 날 만큼은 5계보다 확장된 청정한 삶을 지내보도록 하자는 데에 뜻이 있다. 모두 출가자의 수행 생활이 좀 더 확대된 특별 정진의 날로 초기경전에 이미 불설로서 강조되어 있다는 점에 특별한 주의가 요청된다.37) 37) 참고로 대부분의 계율이나 교단사 전공의 학자들의 경우에서조차 현재 초기불교 전통에서 시행되고 있는 포살일과 8재계의 관계가 초기경전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 불교전통에서 성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경전적 분석은 다음 기회에 미룬다. 다만 여기서는 포살일과 8재계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경전 하나를 소개하면

그리고 현재 초기불교 전통에 있는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 재가자들이 포살일이 되면 가까운 사찰에 가서 계를 받고 설법을 듣는 등의 특별한 하루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데 근거한다. 이를 만약 현대 도시 생활의 우리 나라 재가자들에 있어 그대로 적용하기가 무리라면 8재계의 근본취지를 다른 방식으로라도 살려 재가자가 지계와 수행에 집중할 수 있는 특별 수행일로 고정시켜 복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히 5일제 근무와 관련해서도 한 달에 몇 일이라도 산중의 사찰이나 불교마을 등을 조성하여 집단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함께 하는 수행 프로그램을 총림이나 종단적 차원에서 시행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재가 불교인의 실천 수행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는 《잡아함경》의 《일체사경(一切事經)》과 이에 대응되는 빠알리 경을 들 수 있다. 이는 마하남이 붓다에게 우바새가 되는 조건을 묻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① 어떤 우바새(優婆塞)는 스스로의 도덕적인 삶(戒)은 확립되었지만, 남을 위해 바른 도덕적 삶(正戒)이 되도록 하지 않는다. ② 스스로는 깨끗한 도덕적인 삶(淨戒)이 확립되었지만, 남도 구족(具足)하게 하지는 않는다. ③ 스스로는 보시(布施)를 행하지만, 남이 보시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④ 스스로는 (절에 나가) 불교를 접하고 나아가 여러 스님들을 뵈옵지만, 남을 권하여 불교에 접하게 하거나 스님들을 뵈옵게 하지는 않는다. ⑤ 스스로는 열심히 법을 듣지만, 남을 권해 바른 법을 즐겨 듣게 하지는 않는다. ⑥ 스스로는 법을 들어 가지면서도, 남이 바른 법을 받아 가지도록 하지는 않는다. ⑦ 스스로는 매우 깊고 묘한 이치를 관찰하지만, 남이 깊은 뜻을 관찰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⑧ 스스로는 깊은 법을 알아 법에 따르고 향하지만, 남을 권하여 법을 따르고 향하게 하지는 않는다. 마하남이여, 만약 우바새가 이러한 여덟 가지 법만을 성취했다면 스스로는 편하고 안정(安慰)되나 남을 편하고 안정되게 하지는 않는 것이라 한다. …… 우바새로서 열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스스로도 편하고 안정되고, 남도 마찬가지로 편하고 안정되게 한다. ① 우바새는 바른 믿음(正信)을 완전히 갖추어, ② 남도 완전히 갖추도록 한다. ③ 스스로도 깨끗한 도덕적인 삶이 확립되었고, ④ 남도 확립되도록 한다. ⑤ 스스로도 보시를 행하고, ⑥ 남도 행하도록 한다. ⑦ 스스로 (절에 나가) 불교를 접하고 나아가 여러 스님들을 뵙고, ⑧ 남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 ⑨ 스스로도 열심히 법을 듣고, ⑩ 남도 또한 듣게 한다. ⑪ 스스로도 법을 받아 가지고, ⑫ 남도 받아 가지게 한다. ⑬ 스스로도 이치를 관찰하고, ⑭ 남도 관찰하게 한다. ⑮ 스스로도 깊은 이치를 알아 법에 따르고 향하며 닦으면서, ? 남도 깊은 이치를 알게 하며 법을 따르고 향하게 하여 수순한 닦음이 있게 한다. 마하남이여, 이런 열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스스로도 편하고 안정되며, 남도 또한 편하고 안정되게 하는 것이 된다.”38)38) 《잡아함경》 제33권 《일체사경(一切事經)》: “若優婆塞能自立戒. 不能令他立於正戒.自持淨戒. 不能令他持戒具足. 自行布施. 不能以施建立於他. 自詣塔寺見諸沙門. 不能勸他令詣塔寺往見沙門. 自專聽法. 不能勸人樂聽正法. 聞法自持不能令他受持正法. 自能觀察甚深妙義. 不能勸人令觀深義. 自知深法能隨順行法次法向. 不能勸人令隨順行法次法向. 摩訶男. 如是八法成就者. 是名優婆塞能自安慰. 不安慰他 … … 若優婆塞成就十六法者. 是名優婆塞自安安他. 何等爲十六. 摩訶男. 若優婆塞具足正信. 建立他人.自持淨戒. 亦以淨戒建立他人. 自行布施. 敎人行施. 自詣塔寺見諸沙門. 亦敎人往見諸沙門. 自專聽法. 亦敎人聽. 自受持法. 敎人受持. 自觀察義. 敎人觀察. 自知深義. 隨順修行法次法向. 亦復敎人解了深義. 隨順修行法次法向. 摩訶男. 如是十六法成就者. 是名

이 경전은 재가 불교인의 자리이타와 관련한 맥락에서 실천행이 체계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다.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이타행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신(信)·계(戒)·시(施)·문(聞)을 실천하도록 돕고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행의 대체적인 내용은 삼귀의와 오계 수지 그리고 신·계·시·문이다.

초기경전에서 신(信: saddha) 또는 정신(正信)이란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으로서 확신이나 올바른 인생관이 확립된 자신감으로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계는 오계(五戒)나 팔재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인 삶을 의미하고, 시(施: ca?a) 또는 보시(布施)는 여기서 쓰인 빠알리의 쓰임새에 비추어보면 탐착을 여윈 사심 없는 선행, 또는 인색하지 않고 넉넉히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문(聞: suta)은 원래 ‘법을 듣는다’가 기본 어의이지만, 법을 듣고 배우고 실천수행 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에 다른 경전에서도 재가자를 상대로 설해진 가르침이지만 문(聞: suta) 대신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지혜(般若智慧: pan???를 더하여 네 가지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39) 그리하여 이상과 같은 네 가지 덕목을 구족하고 완성(sampanna)하는 것이 격려되고 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재가자 가운데 연꽃과 비교될 수 있고 보석과 같은 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춘다고 한다. 신(信 : saddha), 윤리 도덕적인 계율, 미신(迷信)에 있지 않고, 업보(業報)를 믿어 요행을 바라지 않고, 그리고 (불교) 외부로부터 수승함을 구하지 않는 것 등을 들고 있다.40)39) 《중아함경》 제30권 《우바새경(優婆塞經)》; S. vol. V, p.338.40) A. vol. V, p.175.

그리고 초기경전에 불교도로서 재가자의 최소한의 조건 또는 의무로 제시되는 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보에 귀의하며 항상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둘째, 5계를 수지하도록 노력한다.
셋째, 매달 6회의 8재계를 지켜 이 날은 설법을 듣도록 해야 한다.
넷째, 하안거를 마친 스님에게 가사장삼을 보시한다.41) 41) 주로 율장에 나타난다.
다섯째, 석가모니 붓다의 탄생지, 성도지, 초전 법륜지 그리고 (반)열반지 등의 성지를 참배한다.42)42) D. vol. II, p. 141.
여섯째, 불탑(佛塔) 등의 성적(聖跡)들을 참배한다.43)43) D. vol. II, p. 142.

9.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

초기경전에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경구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자주 인용된다.
재가자와 출가자는 서로 의존하여 참된 법과 최상의 안온함에 이른다. 출가자는 재가자로부터 의류와 생필품과 침구 그리고 약품을 받는다. 이에 재가자는 선서(善逝)인 출가자를 의지하여 아라한의 반야지혜와 선정을 믿는다. 현생에서 닦아 좋은 세계에 이르는 길과 기쁨이 있는 욕락의 천상을 성취한다.44)44) Itivuttaka, pp.111∼112.

기본적으로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로 출가와 재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믿고 물질적인 보시에 따라 욕락이 있는 천상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전의 여러 곳에서 항상 재보시와 법보시라는 두 가지 종류의 보시 가운데 법보시가 더 뛰어나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45)45) Itivuttaka, pp.101∼102.

이처럼 출가와 재가는 재보시와 법보시를 통한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출가 승단이 일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승단 내에 화합하지 못하고 분규가 일어날 때는 외호(外護)하기도 하고 또는 일종의 압력 단체처럼 재가자는 출가 승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많은 경우가 나타난다. 이는 출가 승단의 문제가 단지 출가 승단의 문제로만 독립되어 있거나 한정되어 있지 않고 붓다의 재세시부터 항상 재가자의 건의 또는 요구에 따라 출가 승단 내부가 조정되고 확립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장을 보면 승단의 일이라든가 출가자들의 계율 가운데 많은 조항들이 재가자들의 비난에 의해서 출가 수행자로서의 비법(非法)이라 규정되어 새롭게 제정되거나 수정되는 경우를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마가다의 빔비사라 왕의 제의에 의해 건립된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竹林精舍)는 이후 사찰 건립의 위치를 선정하는 기준이 되었다.46) 교단의 중요 행사인 포살 또한 재가자인 빔비사라 왕의 건의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불교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는 특별한 행사로 정착되었다. 이외에도 승지지(僧祗支)47)를 착용하는 문제 등 세세한 조항들까지 재가자의 건의와 제의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허다하다. 46)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어야 하며, 오가는 것이 편리하여 누구든 원하면 가서 법을 들을 수 있는 장소”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47) 겨드랑이와 앞가슴을 가리는 옷.

초기불교 당시 출가자에 대한 재가자의 가장 강력한 영향력 행사의 한 예는 코삼비 승가의 분쟁에 대한 재가자의 대처를 들 수 있다. 붓다 재세 시부터 코삼비 지역의 출가 승단은 다른 지역과 달리 화합하지 못하고 두 파로 갈라져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함께 공양도 하지 않고 포살이나 갈마(즼磨)까지 같이하지 않았다.48) 48) Vinaya-pit.aka(PTS) vol. I, pp.337∼357 ; S. vol. III, 94나 Uda?a(vol. IV, 5)에도 코삼비의 이러한 분규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석가모니 붓다는 친히 방문하여 여러 가지로 서로 화합할 것을 강조하였음에 불구하고 두 파로 나누어진 비구 승가의 불화는 멈추지 않았다. 이에 붓다도 코삼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이제는 재가자들이 나서 양측이 화합할 것을 종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자 ‘공양거부 운동’을 벌인다. 이는 재가자가 출가자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극단적이고 조직적인 대처방안이었고 그 결과 불화를 멈추고 화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을 찾아가 참회하였다. 이는 당시 출가자와 재가자는 전적으로 재시와 법시라는 불가분의 관계가 유지되었으므로 이러한 재가자는 출가 승단의 구조적인 외호 역할이 가능하였다.

다음으로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데 있어 네 가지 삿된 방법으로 살아가는 출가자에게는 보시해도 복행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첫째는 농토를 일구는 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 둘째는 천문이나 길흉을 말하는 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 셋째는 세속 사람의 심부름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점치고 약을 만들어 치료하는 일로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다.49) 여기서 첫 번째의 농토를 일구는 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의 부분에서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장하는 동북아시아 불교전통에 상반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렇게 설한 맥락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것은 현재에도 가끔 불교를 알리는 데 방편적인 측면으로 변호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긍정적 효과뿐만이 아니라 부정적 효과 또한 비판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문제는 출가자 본연의 생활을 하지 않고 생존의 수단으로 출가하여 청정한 수행 풍토이어야 할 불교를 훼손하는 적주비구(賊住比丘: theyyasam?a?aka)가 더 정확한 말이다.49) 《잡아함경》 제18권 《정구경(淨口經)》; S. vol. III, p.189.

적주비구란 진실한 수행에는 마음이 없고 이득이나 생활의 방편으로 또는 부처님 가르침을 도둑질하기 위해 불교교단에 출가한 자를 말하는데 이들에게는 보시하지 말도록 권유하는 것은 재가자가 앞장서서 수행하는 청정승가의 풍토를 일구어야한다는 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경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경우의 출가자에 보시를 거부하도록 하고 있다. ① 재가자에게 손해를 끼친 자, ② 재가자를 다치게 한 자, ③ 재가자를 이간시키고 비방한 자, ④ 삼보를 비난하는 자, ⑤ 악행을 행하는 자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출가자가 재가자를 찾아가 참회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는데 하의갈마(下意즼磨: pat.isa?am?ya-kamma)로 율장에서 설명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반대로 출가자가 재가자의 공양을 거부해야 되는 몇 가지 경우 또한 설하고 있다. 자신의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는 사람, 출가자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 출가자를 비방하는 사람, 출가자를 다치게 한 자, 어떤 곳에서 출가자를 내쫓는 사람, 출가자들을 이간하여 싸우게 하는 자, 출가자 앞에서 삼보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 그리고 비구니에게 욕을 보인 자 등은 참회를 하지 않는 한 보시받는 것을 거부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50) 50) A. vol. IV, p.227 ; 《사분율》 제53.

이러한 자들이 보시하려 하면 보시를 받지 않고 바루를 거꾸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발(覆鉢: patta-nikkujjana)이라 한다. 출가자가 재가자를 경책하는 방법으로 진심으로 출가 승단에 참회하면 재가불자로서의 위치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율장에서 복발갈마(覆鉢즼磨: patta-nikkujjita-kamma)라 하여 세세한 규정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재가자가 출가자를 모시는 데 있어 다섯 가지 방법으로 섬겨야 한다고 한다.51) 51) D. vol. III, p.191.

① 몸으로 친근함을 행하고, ② 말로 친근함을 행하고, ③ 뜻으로 친근함을 행하고, ④ 언제나 집에 들릴 수 있도록 하고, ⑤ 그들의 수행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이에 대해 출가자는 재가자들에게 여섯 가지 방법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한다. ① 나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② 선(善)에 머물도록 권장하고, ③ 친절한 마음으로 자비롭게 대하며, ④ 아직 듣지 못한 법을 설해주고, ⑤ 이미 배운 바를 다시 옳게 정정해 주며 청정하게 하고, ⑥ 즐겁고 행복한 세계에 나는 방법을 일러준다 등이다.

10. 마치는 말

인도불교사에서 중국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 이르기까지 재가불교 또는 재가불자의 위상은 뚜렷하다. 그 가운데 다음의 수승한 재가불자 몇 사람을 거론하는 것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초기불교 부처님 시대의 ?따 거사, 대승의 유마(維摩) 거사, 승만(勝븾) 부인, 그리고 중국의 이통현·배휴·방온 거사와 신라의 사복·부설, 고려의 윤필·조선의 이처사에 그리고 가까이 20세기 한국불교계의 큰 스승으로 일컫는 백봉 김기추 거사(1907∼1985)가 그것이다.

우리 시대의 백봉 거사의 경우 현재에도 많은 스님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자랑삼고 있을 정도이다. 탄허 스님은 그를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평할 정도였다.52) 52)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백봉 거사는 말법시대의 등불이다. 거사의 풍모는 신라의 사복 거사와 부설 거사, 고려의 윤필 거사, 조선말의 이처사(경허 스님을 격문치성으로 일깨운 은사(隱士)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지식이다.” 《불교와 문화》(2001 3·4 제19호), 노규현, 〈한국불교계의 큰 스승, 한국의 유마 거사

마지막으로 경전의 말미에 재가자는 가르침을 듣으면 항상 “매우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받들어 행하였다”라고 하거나, 좀 더 긴 정형적 표현으로는 ‘재가자의 신앙고백’이라 이름해도 좋을 감동의 탄성이 발해지고 있는데, 본고 또한 이러한 재가자의 찬탄문 또는 신앙고백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세존이시여,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거꾸로 된 것을 바로 놓는 것과 같고,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것 같고,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일러주는 것 같고, 어둠 속에 불을 밝혀 눈 있는 이라면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이 같은 많은 방법으로 법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교단에 귀의하고자 하옵니다. 부디 저를 재가제자로 받아 주시고 오늘 이후 삶이 계속되는 날까지 귀의하도록 하여 주옵소서.” ■

조준호
동국대 불교학과 및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논문으로 〈붓다(Buddha) 개념에 관한 연구: 팔리(pali)경전에 나타난 일국토 일불설에 대한 비판〉 〈불교의 기원과 Upanisad 철학: 불교는 Upanisad 철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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