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는 말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B.C.623∼B.C.544)이 개창한 종교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

불경은 중생구제의 목적과 방편에 대해 언급해 놓고 있으며 이것이 곧 불교의 교리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제시한 교리를 통해 참된 행복을 추구하고 구원의 길을 걷고자 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평범한 사실을 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최근 불교 내에서 진행된 기복불교 논란에 상당한 오해와 논리적 비약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평론》과 〈법보신문〉이 주도해 온 이 논쟁은 비판과 옹호라는 뚜렷한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불교평론》은 2001년 여름호 특집 ‘기복불교를 말한다’에서 기복불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논의를 폈다. 이어 이 잡지의 주간 홍사성은 격월간 〈불교와 문화〉(2002, 1·2호)에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글을 실어 파문을 일으켰다. 이러한 기복불교 비판론을 비판하고 옹호론을 전개한 것이 〈법보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1면 머릿기사1)를 통해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라고 보도했다. 이어 기복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인사들의 기고와 칼럼을 지면에 반영함으로써 기복불교 비판론을 비판하고 옹호 논리의 개발에 앞장서왔다.

이러한 기복불교 비판론과 옹호론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다시금 처음부터 불교의 ‘근본’과 ‘본질’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한국불교에 있어서 기복신앙은 매우 광범하게 퍼져 있는 신앙현상이긴 하다.

〈법보신문〉 ‘데스크 칼럼’에서도 지적했듯 (기복불교 아니면)“포교는 무슨 돈으로 하고 사찰은 어떻게 유지하며, 스님들은 무슨 돈으로 공부해야 하나……. (중략) 기복이 사라진 한국불교의 그 큰 빈 공간에 현실적으로 기복 대신 무엇이 채워질 수 있는지”2) 걱정될 정도로 기복불교는 한국불교에서 절대적 의미를 갖는 신앙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복신앙이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극복돼야 할 대상이라는 점이다. 기복불교는 아무리 교묘한 논리를 전개해도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신앙체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기복불교에 대한 비판과 옹호론이 맞서면서 대척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안타까움이다. 기복의 문제는 솔직히 말해 논쟁의 대상일 수 없다. 신앙의 행태가 기복으로 흐르고 있는 게 태반이라면 그 현상을 현실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불교의 본질 안으로 흡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교리적으로도 타락과 왜곡을 부를 수 있는 사안이라면 반드시 극복 또는 시정돼야 한다. 따라서 기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와 관련해 방법과 대안의 차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어도 비판과 옹호라는 대척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불교의 미래를 위해,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전법도생(傳法渡生)의 역할과 기능을 보다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교조와 교리의 가르침을 환기시키려는 애정어린 비판은 꼭 있어야 한다. 역사의 발전적 동력은 바로 이 같은 비판적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인도 재래의 제사와 주술을 멀리하면서 불교를 개창했던 정신을 헤아려보면 이의 이해가 어렵지 않다.

본고는 논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복에 한정해서만 그 옹호론의 잘못됨을 지적하고자 한다. 앞서의 논쟁들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정체성과 교리적 해석, 역사적 전개에 따른 불교의 신앙형태 변이 등에 대해서까지 확대하여 기복의 옹비(擁批)를 논하다 보니 궤도를 벗어나 설득력을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2. 기복불교 옹호론의 제 문제

1) 기복과 작복의 혼동 문제
기복불교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많은 논자들은 기복을 매우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일례로 “수행방편과 근기 그리고 아홉 종류의 인간상을 유념하면서 ‘깨달은 즉 정법 아닌 것이 없고, 깨닫지 못한 즉 그가 엮어내는 자칭 정법 또한 삿된 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일깨움을 돌이켜보면 ‘기복신앙’만을 굳이 불교의 근본교리에 어긋난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된다.”3)는 주장과 “어떤 일을 함으로써 그 대가로 복을 받자는 의식구조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신행형태를 기복불교라 정의하고자 한다.”4) 등이 그것이다.

이외 앞의 필자들과 함께 기복을 옹호하는 논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기복신앙이 불교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방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행복을 추구하는 신앙행위가 기복이란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신앙적 정서에 의지한 기복의 정의일 뿐이다. 문제는 기복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 교리적 근거나 해명이 없다는 데 있다. 기복을 정당하다고 하려면 어디에 그런 가르침이 있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옹호론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궁색하게 기복을 자꾸 작복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성철 교수의 글이다.

“우리는 초기불전 도처에서 기복과 작복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를 대하실 때 해탈의 가르침 이전에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베푸셨다. 이를 차제설법이라 부른다. 또, 대열반 이후 사리탑의 관리를 재가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발복을 권하셨다.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물을 올리고 탑을 조성하며 사원을 건축하는 것이 복을 짓는 행위임은 초기불전 곳곳에서 발견된다.”5)

김교수의 이 글은 기복을 작복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복=작복’이라는 오해를 부른다. 이러한 잘못은 이미 조준호 박사에 의해 지적되었다. 조박사는 “초기불교 도처에서 기복과 작복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는 김교수의 주장은 기복과 작복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중략) 이제까지 그의 다른 글을 통해서도 두 개의 용어를 같은 뜻으로 혼용해 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6)고 말함으로써 기복과 작복의 구분을 명확하게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기복과 작복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교계신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복불교 논쟁과 관련해 〈만불신문〉은 사설에서 “복 짓는 행위는 신앙행위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금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복불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복 짓는 행위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7)고 주장하고 있는데 ‘복 짓는 행위’를 기복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복과 작복에 대한 개념의 혼동과 이해부족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기복이 무엇이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작복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 두 용어에 대한 개념이 정확하게 파악돼야 올바른 기복 논쟁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복은 말 그대로 복을 받기 위해 절대자의 가피를 바라는 기도행위를 말한다. 불교는 교리적으로 기복의 방법에 의해 행복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불교에선 초월적 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이(특히 비불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부처님이나 보살을 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스승이자 성인이지 중생들에게 그 어떤 초월적 능력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 보살들이 각각 중생구제의 서원을 밝히고 있는데 그 구원의 힘은 초월적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뼈를 깎는 정진과 원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신과는 그 성격부터가 다르다. 기복은 이들 제불보살을 신격화하는 그릇된 신앙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는 중생이 종교에 의지하는 기본 목적인 행복추구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복이 신에 의지하는 여타의 종교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불교에선 작복(作福)과 수복(修福), 그리고 구복(求福)이 있다. 작복이란 말 그대로 행복해지고자 하거든 복 받을 일을 하라는 것이다. 불교는 연기사상을 골격으로 세계관과 인생관을 설명한다. 내가 짓는 복도 인과응보요 연기의 법칙에 적용된다. 지극 정성으로 기도했는데 영험이 나타났다는 말은 초월자의 힘에 의해서 가피를 받았다기보다 복 받을 만한 행위를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작복인가. 그것을 부처님은 보시와 지계로 말씀하셨다. 보시가 나눔의 행복추구라면 지계는 절제와 금도를 통해 한결같은 평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끝없이 솟구치는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자칫 유루복(有漏福)에 흘러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무루복(無漏福=새지 않는 복)을 닦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고 있다.

구복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보통 사람에게 행복이란 재산과 건강, 사랑과 장수, 명예와 같은 조건이 충족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 행복은 유한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루복에 해당하므로 어디까지나 다함이 없는 영원한 행복인 무루복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불교에서 유루복을 무조건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복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 자체를 잘못됐다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경전에서는 복덕을 구족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대목도 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하나인 아니룻다가 정진에 몰두한 나머지 앞 못보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을 때 부처님은 친히 그의 옷을 꿰매주며 복덕을 짓는 일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구복의 한 좋은 예다.

불교에선 이처럼 복을 짓거나 닦고 구하는 행위를 권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덕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기복을 권하는 구절은 경전의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불자의 도리는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거나 누리는 방법’이 그릇된 사견과 수단을 동원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서글픈 일이다. 어쨌든 불교의 교리를 일탈하면서까지 기복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기복불교’가 아닌 ‘기복신앙’일 뿐이다. 기복은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기복불교라는 용어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방편론은 자기를 기만하는 변명이 아닌가
기복신앙을 옹호하는 논자들은 대부분 기복이 불교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방편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복을 구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근기에 따라 행해지는 기복을 인정하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작복불교로 이끌어 가는 게 순서가 아니겠느냐는 논지를 편다. ‘기복도 공덕 짓기의 한 방편이다’고 주장하는 성태용 교수의 글8)이나 “기복적 신행은 누구나 거쳐가는 일종의 과정이다. 기복이라는 뗏목을 택하여 불교에 입문했다고 해도 바른 공부가 이어지면 결국 저절로 소멸되는 운명을 지닌 신행행위라는”주장9)이 그것이다.

이 같은 논지는 일견 매우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기만하는 변명이 포함돼 있다. 즉 기복의 현실론에 빠져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 목적이나 원칙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방편이 불교의 교의에 충실하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이는 참된 방편이 아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기복으로 출발해서 정법으로 돌아온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실제 사찰에서 기복 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방편이 잘못 적용되고 쓰여질 때 얼마나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비불교적 신앙행태도 ‘불교의 것’인양 동화돼 버린다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방편이란 이름을 앞세워 ‘점쟁이’도 포교의 전위대로 포장되는가 하면 ‘굿’과 ‘역술’마저 용인되는 현상까지 부르게 한다.
방편은 무지몽매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어떻게 일러주느냐 하는 문제다.

미혹한(無明) 중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내는 수단이 방편이다. 그래서 불교는 ‘사람을 바꾸는’ 역할과 기능을 가져야 한다. 불교입문은 바로 그러한 ‘사람 바꾸는’ 단초이며 시작이다. 그런데 ‘사람 바꾸는’ 역할 대신 미혹함으로 몰고 가는 행태가 바로 기복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방편을 쓴다 하더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 것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 오히려 중생을 더욱 미혹 속으로 몰아가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방편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봐야 한다. 방편은 범어 우파야(upa?a)의 번역으로 (깨달음에)‘접근하다’ ‘도달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좋은 방법을 써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교화방법’이라고도 하고 차별의 사상(事象)을 알아서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를 일컫는다는 것이다.10)

《법화경》 〈방편품〉이나 〈비유품〉에 따르면 우매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불난 집에서 철모르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희유하고 얻기 어려운 장난감’이 있다며 구출해내는 장면이 그것인바 이도 역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과 비유의 예화다.

하지만 어느 경전에서도 기복을 방편으로 내세워 중생을 교화하는 예는 없다.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아함 《가미니경》에 나오는 얘기를 함께 음미해 보자.

부처님이 가미니라는 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마을의 촌장이 부처님을 찾아와 “어떤 종교인들은 기도를 하면 병든 사람도 고칠 수 있고 악한 일을 한 사람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데 당신도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고 물었다. 부처님은 그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촌장이여, 가령 저 호수에 어떤 사람이 돌을 던졌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호수 주변에 모여 합장하고 ‘돌맹이여, 떠올라라’ 하고 기도를 했을 때 과연 돌맹이가 떠오르겠습니까?” 촌장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다시 물었다. “촌장이여, 저 호수에 어떤 사람이 기름을 부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모여서 합장하고 기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기름이 가라앉겠습니까?” 촌장은 역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그에게 말했다.

“촌장이여, 그와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돌맹이는 떠오르지 않고 기름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처럼 기도를 한다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이 천상에 태어나거나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촌장은 이를 바로 알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 신비와 능력을 기대했던 가미니의 촌장에게 부처님은 어떤 것이 정법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일깨워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 《가미니경》의 얘기가 들려주는 교훈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기복은 절대 방편으로 수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방편이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뗏목’같은 것이라면 강을 건넜을 때 뗏목은 버려야 된다. 하지만 기복은 뗏목의 구실조차 할 수 없는, 차라리 신기루에 가깝다. 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뗏목이 방편일 수는 없다. 기복은 강을 건너 주지 못하는 뗏목이자 중생을 나약하게 만드는 신기루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방편이란 이름으로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까지 포용하려는 일부 주장에 대해 다음 지적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던져준다.

“불교라는 깃발을 들지 않는다면 모를까 불교를 불교이게 하려면 폭넓은 관용주의 못지 않게 무엇이 원칙이고 진리인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방법과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 ‘무당과 점쟁이가 포교의 첨병’이라는 식의 발상은 무책임하고 백해무익하다. 목적이 좋다고 수단을 무시하거나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원칙을 포기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것이 원칙을 넘어서는 것일 때, 목적과 상관없는 것일 때,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난다. 대승불교의 포용주의가 무당불교가 되고 선불교의 자유주의가 도덕적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11)

‘기복을 넘어 작복’으로 가자고 하는 주장에는 방편론이 들어 있다. 그러나 처음부처 빗나간 방편론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한국불교의 경험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기복을 방편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목적이나 원칙보다는 현실과 대중의 구미만을 생각하는 대중추수주의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방편은 깨달음과 관련한 훌륭한 교화방법에 가까운 것이지 기복과 주술 등 타력(他力)에 의존하자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3) 일부 사례를 들어 기복불교를 옹호하는 논리의 문제점
기복과 관련해 불자를 현혹시키는 또 다른 문제는 일부 사례를 들어 기복불교를 옹호하는 자세다. 과거에도 기복신앙의 흔적이 있었다거나 남방상좌부도 기복신앙이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기복신앙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요, 그러니 괜찮다는 식의 논리다.

예를 들면 울만 파트리크(미국 UCLA 강사) 씨는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초기 부파불교 시대에도 기복신앙은 있었다’12)고 밝히면서 한국불교의 기복현상도 나무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송위지 교수는 최근 《불교평론》에 기고한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이란 글에서 “상좌부 불교에도 기복신앙이 있었다.”13)고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앞서 인용한 김성철 교수도 〈법보신문〉 기고문에서 ‘초기불교에도 기복신앙의 흔적이 전해진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물론 이들의 주장대로 복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기복형태를 띤 신앙행위가 초기불교시대에 있을 수도 있다. 시대가 흐르고 경제관념이 바뀌면서 복전에 대한 인식변화도 있었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또 비교적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남방 상좌부에도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현상의 흐름을 놓고 기복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례로 불전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배반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데바닷타가 몇 차례에 걸쳐 부처님을 위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다고 해서 불교에서 배반을 정당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기불교 혹은 부파불교 시대에 기복의 역사가 있다고 해서 기복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방불교에도 기복신앙이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런가 하면 기복신앙 문제를 종교현상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예를 들면 김용표 교수는 초기불교에도 기복신앙이 있었다는 주장을 견지하면서 이를 종교사학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종교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대승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와 사상은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신앙하는 이들의 마음은 초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현대종교학은 ‘신앙의 존중’과 ‘다른 신앙형태에 대한 구조화된 감정이입’이라는 방법론을 견지하면서 종교현상을 이해하고자 한다.”14)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불교신앙에서 나오는 여러 잡다한 신앙행위까지 종교사학적 안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교수의 이 주장은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종교사학적 관점이란 종교현상에 대한 배경과 의미를 분석할 뿐,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판단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떤 입장에 서서 ‘현상학적으로 그러니 옳다’라며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기복 옹호론자들의 논지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과거에 그런 사례가 있었으므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요 보편적이고 괜찮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 그것의 ‘옳고 그름’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하나의 현상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 후유증과 부작용 등 역기능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불교의 신앙형태는 불교의 정법에서 일탈해서 비법이 아니면 불교를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지 오래다. 본말전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 기복불교에 대한 일말의 옹호론은 거듭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왜 초기불교에 주목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지 이유를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원칙과 상식 수준의 궤도를 일탈해 있는 현실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학원을 설립해도 건학이념이 있게 마련이다. 한 단체를 창립해도 개창정신과 설립지표를 내세운다. 이것은 훗날 관련단체의 중심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의 현실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면 불조의 혜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마땅히 초기불교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3. 기복신앙 극복을 위한 제언

1) 교리에 따른 신행활동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후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설법하기를 결심하고 밝힌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증일아함경》 10권 〈권청품〉에 의하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낡은 믿음을 버리라.”
부처님이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낡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당시 인도사회는 대개의 종교가 그렇듯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숙명적으로 결정돼 있다는 숙명론(宿命論), 전능한 신의 뜻에 결정된다는 신의론(神意論), 모든 것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는 우연론(偶然論)이 그것인데, 부처님은 기존의 이런 관념과 인식을 배격하고 있다.15)

낡은 믿음에 대한 배격은 인도사회에서 신불교운동을 제창했던 암베드카르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암베드카르는 불교신자로 입문할 때 계율의 준수 등을 선서하는 의식을 동반하는데 , 그 선서는 마라디어로 22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처음 8항목은 “나는 브라흐마, 비슈누, 마헤슈와라(창조 유지 파괴를 맡고 있는 힌두교의 세 신인데 이 가운데 마헤슈와라는 시바신을 말한다)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한 숭배하지도 않는다.”는 등 힌두교와 그 관습을 거부하는 서약이었다. 이러한 옛 신앙의 부정 위에서 불교도로서의 올바른 생활을 서약했던 것이다.16)

암베드카르의 이 같은 서약은 과거 인도불교가 힌두교에 동화돼 차츰 쇠망의 길로 접어든 교훈을 거울삼은 것이다.

암베드카르는 미래사회에 알맞은 종교의 조건으로 ① 도덕성을 기초로 할 것, ② 과학과 이성에 모순되지 않을 것, ③ 사회생활의 기본적 신조인 자유·평등·우애를 인정할 것, ④ 빈곤을 축복하지 않을 것(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는 사상은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상이다)의 4개항을 제시했다.17)

이중 ② 항 과학과 이성에 모순되지 않을 것이란 내용은 최근 종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국불교의 신행 현실은 어떠한가. 부처님이나 보살을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복을 비는 기복신앙은 불교의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기복주의 요소가 얼마만큼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기복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불교평론》(2002, 여름·가을호)에서 마성 스님은 ‘초기-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에 대한 검토’를 통해 만해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인용해 논지를 전개했다. 필자도 한때는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암송하고 다닐 만큼 ‘불교의 변화’를 강렬히 원했던 사람 중의 하나다. 그렇지만 만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이 교계 현실에선 그저 ‘고전’ 속의 구호로만 취급되고 있는 현실을 접하고 낙담을 금치 못했었다. 만해는 독립운동가로, 시인으로만 만족해야 했지 그가 염원했던 불교혁신의 꿈은 거대한 절벽에 부닥쳐 사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만해와 암베드카르가 훌륭한 인물로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기존 ‘낡은 종교(관념과 인식이라고 해도 좋다)’를 배격한 데 있다. 불교의 본질을 회복시키려는 그들의 의지와 뜻이 절대로 중단돼서는 안 된다. 본질로의 회복은 그 어떤 것을 변화시키고 혁신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국불교의 신행 현실로 보아서는 분명 그렇다.

기복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불교의 근본교리와 괴리돼 있다는 점이다. 앞서 예로 든 《가미니경》의 지적처럼 아무리 기도를 해도 호수에 빠진 돌은 떠오르지 않고 기름은 가라앉지 않는다. 한국불교가 기복의 신행형태를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같은 부처님의 말씀(교리)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사찰마다 교양대학을 개설해 운영하고는 있으나 깊숙이 들여다보면 기복을 방편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다시 말해 기복이 방편이라고는 하지만 아예 방편으로 활용하려는 시도 자체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리의 체계적 습득은 부처님의 일대기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부처님의 생애를 모르고 《지장경》이나 《화엄경》이나 《능엄경》을 공부한다는 건 초등과목을 건너뛰고 대학원 수준의 전공과목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생애를 알게 되면 자연스레 그 사상과 가르침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신도들을 상대로 한 교리교육을 위해 관련 커리큐럼을 마련하고 교리와 신행을 함께 가도록 하는 지침 제정도 검토해볼 일이다.

2) 사찰재정의 투명화와 보시의 공덕
기복불교를 탓할 때 가장 염려하는 문제의 하나가 사찰재정이다. 기복이 부정됐을 때 사찰재정이 압박을 받을 게 명약관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계종단뿐 아니라 군소종단의 대부분 사찰에서는 기복을 조장하는 각종 재와 기도, 역술과 부적 등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여기에 기와불사, 인등불사, 입시기도, 영가천도, 생전예수재 등 기복불사들이 기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만일 사찰들이 신도들의 길흉화복을 빌어주는 기복불사를 하지 않으면 사찰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할 정도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기복을 옹호하는 이들의 논지는 이 점에 착안해서 기복을 불교의 경제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법보신문〉의 데스크는 기복불교 척결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며 “그럼 포교는 무슨 돈으로 하고 사찰은 어떻게 유지하며 스님들은 무슨 돈으로 공부하나. 기복불교를 타도하자고 하기에 앞서 한국의 모든 사찰이 어떤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운영돼야 하는지, 기복이 사라진 한국불교의 그 큰 빈 공간에 현실적으로 기복대신 무엇이 채워질 수 있는지를 현실성 있게 제시했으면 한다.”18)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복이 없으면 절에 돈이 들어오지 않고 각종 불사도 되지 않으니 입 다물라는 주장이다. 이는 한마디로 억지 주장이자 비불교적 발상이다. 부처님은 청정수행과 설법으로 교단을 운영했다.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분들은 부처님이 사주나 관상, 기복을 가르쳐서 교단을 운영하지 않았음을 왜 외면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불교는 부처님을 모델로 하는 종교다. 형식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정신이나 내용이 바뀌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이 했던 그대로 정법에 의한 방법으로 교단이 운영된다면 교단재정 확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따라서 사찰재정의 위협을 내세워 기복을 옹호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포교문제도 마찬가지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교단재정은 포교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재정이 풍부하면 그만큼 복지 교육 등 제 분야에 걸쳐 건실한 투자를 기할 수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사찰재정이 기복을 중심으로 한 물량주의로 흘러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걸식(탁발)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했다. 재가불자들 역시 수행자들에게 기꺼이 음식을 보시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것은 기쁜 마음으로 행해지는 자비였고 수행자에 대한 존경과 귀의심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후대에서처럼 어떤 거래적 조건이 부가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지면 사찰재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시대에서 사찰재정과 연계해 기복을 옹호하는 것은 물량주의의 확대와 다를 바 없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주장이 아니다. 대신 불교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덕목이 불자들 사이에 폭넓게 주입돼야 할 것이다. 보시와 자비는 다름 아닌 ‘현실세계의 극락화’라는 대승불교의 지향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보시의 지계를 사찰재정과 결부해 일정형식으로 제도화하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다.

3) 정법의 불교를 하자
우리 나라 근·현대의 교육영향도 있겠지만 흔히 종교와 구원에 대한 개념과 정의를 대부분 서양식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기복과 관련해서도 ‘개신교와 카톨릭도 기복이 성행하는데 불교계에서만 유독 문제삼는다’며 볼멘 소리를 하는 경우도 나온다.

이는 불교를 여타의 종교와 동질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릇된 견해다. 여타의 종교가 신에 의지해 자신의 구원과 행복을 비는 일은 문제삼을 게 없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다. 불보살을 신으로 간주해 복을 비는 행위는 불보살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불교는 서양종교와는 달리 ‘이성과 과학’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낡은 믿음’을 버리고 부처님 법을 따르는 것이 정법의 태도다. 정법을 지키지 않은 불교의 모습은 인도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의 땅 인도에서 불교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래 이성과 지혜의 종교였던 불교는 인도 재래의 주술주의와 기복주의를 ‘중생구제의 방편’이란 말로 받아들이면서 변질과 왜곡을 거듭하다가 결국 힌두에 동화되면서 소멸되고 말았다. 부처님이 그토록 비판했던 주술과 기복에 훗날의 불교도가 빠져들면서 불교의 역사를 단절시킨 것이다.

이를 교훈 삼아 한국불교는 달라져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정법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정법대로 신행되지 않는 불교는 겉모습만 불교일 뿐 그것은 사이비에 다름 아니며 타락한 불교다. 정법신앙의 뿌리가 내리지 않고는 불교 본래의 기능을 수행해 내기란 어렵다. 정법이란 비법(非法)이 아니란 뜻이다. 정법은 모든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부처님의 뜻에 따른 진리의 교시다. 따라서 정법이 신앙의 수단이 되고 믿음의 방편이 돼야 한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기복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이의 극복방안에 대해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종교는 이 같은 인간의 바람과 염원을 실현시키려는 기능을 담지하고 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부처님이 성도 후 처음 설법을 하신 사성제와 팔정도의 내용도 바로 괴로움을 끊고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는 길을 밝히신 것이다.

사성제란 괴로움의 현실을 알고(苦諦)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야 하며(集諦) 괴로움이 멸한 상태를 증득해야 하고(滅諦) 괴로움을 멸하는 도를 닦아야 한다(道諦)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중생들이 영원한 행복을 이루려면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正道)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 같은 행복의 길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자들이 지나치게 기복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기복은 앞서도 말했지만 그 어떤 초월적 신에 의지해 행복을 갈구하는 행위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른 종교와는 입장을 달리 취하고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신의론(神意論)에 의지하는 여타의 종교에서나 있을 법한 기복신앙이 지혜와 이성을 앞세우는 불교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일부 기복신앙 옹호론자들은 초기 부파불교 시대에도 기복신앙은 있었다’거나 다른 나라에도 기복신앙이 있으므로 한국불교의 기복현상도 나무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현상의 반영이지 불교가 그것을 용인한다는 증거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 어디에도 기복을 권장하는 가르침이 없다면 이런 주장들은 옳지 않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복을 문제삼는 데 대해 한국불교 안에 있으면서 한국불교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그 수준을 의심케 한다. “한국불교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문제 있는 한국불교 내부에서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고 초기불교 지상론을 편다면 그 행위는 과연 옳은 것인가? 비겁함이고 이율배반이다.

그들은 응당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국불교 내에서 한국불교 때문에 누리고 있는 알량한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19)거나 기복을 비판하는 이들을 ‘몬스터’(괴물을 말함)로 지칭하며 “기복을 타도하려고 주장하려거든 기복불교로부터 오는 일체의 혜택에서 벗어나는 자세를 꼭 보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몬스터’라는 소리가 듣고 싶지 않다면.”20) 등 상식 이하의 발언은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문제는 누가 지적해야 하는가? 이교도들이 해야 하는가? 다른 외국 사람들이 지적해야 하는가? 이들의 주장은 이교도가 하면 괜찮고 불교인이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인지 묻고 싶다.

또 ‘혜택받은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충고까지 곁들이고 있는데 이 충고의 저의가 비판론을 재갈 물리고 기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불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 치졸한 논리는 마치 개발독재시대의 경제적 성장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그때의 문제점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옹비론을 지켜보며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나 정법의 수레바퀴를 바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제2·제3의 만해 스님이나 암베드카르 같은 인물들이 계속 배출돼야 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정법의 당간이 바로 서느냐 이대로 비법이 횡행하느냐 기로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서다. 거듭 강조하건대 정법으로의 회귀는 이 시대 우리 불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무다. ■

김종만
대전대학교 국문과 졸업. 〈불교신문〉 취재편집차장을 거쳐 〈법보신문〉 편집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月刊 佛陀〉 대표로 있다. 논문으로 〈오도송(悟道頌)에 나타나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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