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16대 대통령 선거는 한국정치의 변화 가능성과 방향을 보여주었다.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정권교체’,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정치교체’,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패러다임 교체’를 각각 내세웠다.

낡은 정치의 교체를 열망하던 국민은 ‘정치교체’를 선택했다.노무현의 당선이 갖는 정치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특정한 지역에 압도적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카리스마적 1인 보스가 끌어가던 사당정치, 지역정치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돈이나 지역감정, 색깔론, 흑색선전, 거대 족벌언론의 위력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 배경에는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는 시대의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은 낡은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성장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나타났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는 오랫동안 사생결단식의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난장판이 된 정치와 선거를 지켜보는 국민의 정치불신과 정치무관심은 매우 심각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당과 후보는 정책과 공약을 내세운 정책대결을 기피했고, 비난과 폭로를 일삼았다.

‘최악의 선거’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많았으나 16대 대선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면서 역대 어느 선거보다 깨끗하게 치러졌다. 정치가 제 구실을 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정치가 바뀔 가능성이 보인다면 국민의 능동적 정치참여가 일어날 수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16대 대선은 주춧돌 선거(founding election)이다. 주춧돌 선거란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되는 선거를 말한다.1) 16대 대선이 주춧돌 선거인 것은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가 정치문화의 변화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책에 무관심하고 돈이나 지역주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던 유권자가 낡은 정치의 틀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질 것이다. 1) 예컨대 우리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주춧돌 선거는 1988년 4월 26일에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였다. 13대 총선거는 우리 선거 사상 처음으로 집권여당이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던 선거이다. 그 뒤 1992년의 14대 총선, 1996년의 15대 총선, 2000년의 16대 총선 등 선거 때마다 여소야대 현상이 되풀이되었다. 특히 1990년의 3당합당으로 출현한 민자당은 국회 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거대 여당이었지만 1992년 14대 총선에서 소수 여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2년 초만 해도 노무현은 ‘괜찮은 정치인’으로 민주당 안에서 ‘이인제 대세론’의 ‘다크호스’ 정도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국민참여경선을 치르면서 노무현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노무현 바람’의 위력은 민주당 안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을 꺾었고, 밖으로는 ‘이회창 대세론’도 압도해 마침내 노무현 시대를 열었다.

노풍의 요인은 정치 환경적 요인과 정치 제도적 요인으로 나뉘어진다. 정치 환경적 요인으로 정치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국민의 정치불신이 매우 컸다는 점,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적극적인 정치 행위까지 할 수 있는 합리적 개혁세력이 시민사회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이른바 ‘반DJ 정서’에 따른 반사이익과 지역구도에만 기대고 있을 뿐 ‘대안의 정치인’으로서의 희망과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자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정치 제도적 요인으로는 대통령 후보 선출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제의 도입이 있다.

그러나 노무현 당선의 가장 큰 원동력은 그가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낡고 썩은 정치에 실망하고 좌절했던 유권자에게 주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바람’을 정치인 ‘노무현 개인’에 대한 기대와 지지라는 좁은 뜻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유권자들이 노무현에게 희망을 건 것은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자질’보다는 그의 ‘일관된 소신과 원칙의 정치’에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주의 극복과 언론개혁이라는 현안에 대해 보인 ‘일관된 개혁적 태도’가 새로운 정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지금까지의 정치가 갈등과 대립의 정치였다면 새로운 정치는 화합과 조화의 정치여야 한다. 국민을 평소에는 소외시키고 배제시켰다가 필요할 때만 동원했던 동원의 정치에서 자율과 자치를 기준으로 국민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는 참여의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 밀실에서 패거리들이 움직이던 닫힌 정치를 광장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열린 정치로 바꿔야 한다. 돈과 지역감정 등 비합리적 요인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깨끗한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정치가 형성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불교는 어떤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을 위한 자비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중심의 종교인 불교가 참여민주주의의 확산과 정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찾아보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2.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정치제도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이탈리아 학자 보비오(N. Bobbio)는 사회주의가 어렵다면 민주주의는 더 어렵다고 말한다.2) 2) Norberto Bobbio, et. al., Which Socialism?: Marxism, Socialism and Democracy (Oxford: Polity Press, 1987); 구갑우·김영순(함께 엮음), 《마르크스주의 국가 이론은 존재하는가》, 의암출판, 1992, 46쪽.

민주주의가 실천되지 못하는 원인을 보비오는 민주주의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국가 규모의 확대, 관료 기구의 팽창, 욕구 충족력의 상실, 전문 기술의 발달 등이 민주주의의 발달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의 영역은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기본적 자유의 보장, 경쟁적 정당의 존재, 보통선거권과 주기적인 선거, 다수결의 원칙 등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건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와 연관시켜 보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의 본질적 내용을 총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비판되곤 한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매우 다의적이다. 민주주의 이해 방식이 너무나 다양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개념 정의들이 민주주의의 본질을 부분적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어서 ‘여행용 가방’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보편적인 개념으로 꼽히는 것은 “국가의 권력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합법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정치이념 또는 정치제도”라는 듀이(J. Dewey)의 정의이다.

민주주의란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국민의 정치 참여를 통해 자유 평등 정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시키려는 국민에 의한 통치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에 의한 통치’가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정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현대 민주주의 정치는 대의정치이다. 대의정치가 제대로 움직여 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의 대표를 바르게 선출해야 하고, 국가 의사를 바르게 결정하여야 한다. 앞의 것과 관련되는 원리가 대표의 원리이고, 뒤의 것에 관련되는 것이 다수결의 원리이다.

가) 대표의 원리
대표의 본질은 다양한 개별 의사를 전제로 하면서도 대표자 자신이 독립된 판단과 의사에 따라서 일반 의사의 형성에 참여하고, 대표자의 참여에 따라서 성립된 일반 의사는 그대로 구성원 전체를 구속하는 의사로서 타당성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대표의 원리란 국민은 다양한 의사를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공식적인 국가 의사를 결정하기 위하여 국민을 통합하는 것을 말한다.

나) 다수결의 원리
다수결의 원리는 국민의 의사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의 하나이다.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는 유용한 수단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다수결은 서로 다른 국민의 의사를 통합하는 방법이다. 국민은 누구나 주권자이므로 서로 다른 국민의 의사는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통합의 문제를 주장의 질이나 가치는 놓아두고 양이나 수로 해결하고자 하는 제도가 다수결이다. 수의 다수로 결정되는 통합은 소수의 다수에 대한 복종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다수결이 민주정치 운용의 기본원리로 작동되려면 다수의견이 양에서는 물론 질에서도 소수의견보다 우수해야 한다. 다수의견이 소수의견보다 질적 우수성을 갖도록 보장하는 정치과정은 자유토론이다. 다수의견은 단순히 소수와 대립하는 의견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소수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임으로써 다수의견이 가질 지도 모르는 질적 열등성을 최소화시킨 새로운 의사인 것이다.3)3) Ernest Barker, Reflections on Government, London, 1953, p.67.

또한 소수의 보호도 보장되어야 한다. 소수를 보호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결국 ‘다수의 독재’, ‘다수의 횡포’로 떨어지고 만다. 따라서 다수결은 자유토론이 보장돼야 한다.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경우의 다수결은 도리어 독재를 은폐하는 절차로 떨어지기 쉽다. 또 다수결은 표결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 평등한 지위가 전제되어야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4) 4) 다수결 원칙의 정당성을 결정 참여자의 평등한 지위에서 찾으려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라이프홀쯔(G. Leibholz)와 헤르쪼(R. Herzog) 등이 있다.

2) 민주주의의 정치제도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개인을 정부나 국가보다 앞세운다. 따라서 개인을 위주로 하는 민주주의의 궁극적 이념은 국민 각자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일이다.5) 5) 해롤드 라스키는 이것을 ‘최선아의 실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를 위해 어떤 제도가 필요한가? “정부 발생 이래로 상반하는 두 정부이론이 서로 다투어 왔다.”6) 루즈벨트(F. Roosevelt)의 말대로 제도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개인이 정부에 봉사해야 하느냐 또는 정부가 개인에 봉사해야 하느냐라는 문제가 핵심이었다.”7) 6) Woodrow Wilson, The New Freedom, N.Y., 1913, p.55. 7) Franklin Roosevelt, “Looking Forward,” Democracy, Liberty and Property, ed. Francis W. Coker, N.Y., 1942, p.720.

‘국민에 의한 정치’ 또는 ‘사회계약론’, ‘일반의사’ 등은 모두 국민이 국가를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이념은 민주주의 이상의 제시일 뿐 민주주의 현실로 구체화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는 당위성보다는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가 더 문제였다.

‘국민에 의한 정치’가 역사 속에서 제대로 구현된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제퍼슨(Jefferson)의 지적처럼 민주주의 나라의 국민은 행정부를 스스로 운용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운용할 사람을 선출할 수는 있고 스스로 입법할 수는 없으나 입법자를 선출할 수는 있다.

보비오는 민주주의를 ‘절차(procedures)’라는 관점에서 파악하여 “전체적 결정권이 누구(who)에게 주어지는지와 그들을 선출하는 절차를 수립하는 일련의 규칙”으로 본다.8) 즉 “전체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결정에서 시민 다수의 가장 광범위하고 확실한 직·간접적 참여를 허용하는 방식”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9) 8) N. Bobbio, 윤홍근 (옮김), 《민주주의의 미래》, 인간사랑, 1988, 38쪽.9) N. Bobbio, Which Socialism?, pp.68∼73.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법칙으로는 전체 시민의 투표와 선거권, 투표의 동등성, 집단의 경쟁과 의견 형성과정을 통한 자유로운 선거, 진정한 대안의 존재, 다수결의 원리 및 소수의 권리 보장 등이 있다. 이 같은 법칙이 효율적으로 충족되기 위해서는 여론 형성의 자유, 언론 및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국가권력을 행사할 지도자를 국민이 선출하는 방식과 이 방식에 따라 선출된 지도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규정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제도는 가능한 한 유권자인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잘 반영이 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대의제도, 선거제도, 복수정당제도, 권력분립제 등이 있다.

가) 대의제도
근대 민주정치는 국민의 직접 참여가 아니라 대표에, 국민에 의한 권력의 직접 행사가 아니라 권력의 위임에 의거하는 간접 민주정치 내지 대의정치로 바뀌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나라의 크기가 넓어졌으며 사회가 복잡해진 오늘날 직접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민이 자신의 대표를 뽑아 권력을 위임하는 간접 민주주의가 차츰 보편적인 형태가 되었다.

대표와 위임에는 감시와 통제가 따라야 한다. 대의제도를 받아들인 근대 민주정치의 특성은 국민 스스로의 자치보다는 국민이 스스로의 의사를 반영하게 하기 위하여 국가의 권력행사를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제도라 하겠다. 대의정치는 한마디로 국민이 선거를 통해서 그들의 대표기관을 선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의사나 국가의사를 결정, 집행하게 하는 정치제도이다. 대의정치의 중핵은 국회이다. 물론 행정부 수반도 입법부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주권행사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이므로 대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나) 선거제도
선거는 국민의 자유의지에 따라 대표자를 뽑는 행위이다. 대표결정방법인 선거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기초를 두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며 진보적인 유권자의 의사표현 수단이다. 선거는 대표자를 국민 합의로 임명하는 행위인 동시에 국민이 민의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정치적 자유를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정치참여의 중요한 형태인 선거의 정치적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의성을 확보한다. 국민의 직접참여로 대표를 선택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선거를 통해 주권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통제와 감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선거를 통해서 국민은 정부를 견제하고 다양한 국민의사를 국정에 반영하게 된다. 셋째, 정치적 충원의 기능도 있다. 선거를 통해서 무능하고 썩은 정치인들을 제외시키고 젊고 깨끗하며 유능한 정치인들이 충원되는 것이다. 넷째, 선거는 민주정치의 정통성의 근원이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정통성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국민의 동의이기 때문이다.

선거제도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라이커(W. Riker)는 투표절차가 공정하다 하더라도 투표자의 선호와 관계없는 자의적 결과를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10) 10) William H. Riker, Liberalism against Populism: A Confrontation between the Theoty of Democracy and the Theory of Social Choice(San Fransisco: W.H.Freeman, 1982), p.37.

따라서 선거가 국민의 의사 대변에 실패하고 제한적인 대의민주주의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콜만(J. Coleman)과 피어존(J. Ferejohn)도 선거는 나쁜 독재자를 거부할 기회만을 허용할 뿐이라고 말한다.11) 슘페터(J. Schumpeter)는 국민의 의사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피쪼르노(A. Pizzorno)는 개인들의 의사결정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12) 선거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이의를 제기한다.11) Jules Coleman and John Ferejohn, “Democracy and Social Choice,” Ethics, vol. 97, No.1(Oct. 1987), pp.11∼15.12) 임혁백, 《시장·국가·민주주의》, 나남출판, 1994, 40쪽

국민이 정치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 유권자를 좌지우지하게 되어13) 선거가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를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를 선출하게 된다는 주장14)까지 나오는 것이다. .13) Jon Elster, Explaining Technical Change(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3), p.129. 14) 임혁백, 앞의 책, 41쪽.

다)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는 존재유무보다 실제적 내용이 중요하다. 사회에는 다양한 의사가 존재한다. 그 다양한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선거제도는 유권자에게 주어지는 선택 범위가 넓을수록 더욱 민주적이다. 다시 말하면 정당이 많을수록 국민의 선택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일당제인 나라의 선거는 국민의 의사를 확인함으로써 정부와 입법부의 대의성을 확보하기보다는 정부의 독재성을 은폐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의회, 선거, 정당이 필수적이다. 의회는 선거를 통해서 국민이 선출한 의원으로 이루어지며, 선거는 대다수 국민이 참여하여 자신의 대표를 뽑는데 이 과정에서 정당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대의제는 국민의 의사와 이익을 정당의 매개기능으로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시키는 정당정치이기도 하다. 정당정치는 국민이 대표를 평화적이며 민주적으로 뽑는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국민이 주권자이기는 하지만 국민의 의사가 개별적으로 정치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국민의 의사가 유효하게 정치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조직화되어야 한다. 이 조직화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정당이다. 정당의 주된 기능은 국민의 의사를 통합하는 것이다.

민주적 복수정당제도는 다양한 정강정책을 내건 두 개 이상의 정당이 조직되어 있고, 이 정당들이 교대로 권력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한 정당만이 계속 집권하는 것은 위장된 일당제이거나 발전의 포기이다. 정강과 정책이 거의 비슷한 복수정당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선택의 범위를 넓혀주는 것이 아니다.

라) 권력분립제도
대의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부이다. 국민의 의사를 잘못 반영하면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정권교체력을 국민이 갖고 있을 때 가능하다. 대의제도, 선거제도 및 복수정당제도 등은 민주주의에서 정부의 책임성 확보와 국민의 자유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국가권력의 분립도 민주주의의 유지에 굉장히 중요하다.

정부권력을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을 목표로 처음 분립시킨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권력을 심의·집행·사법으로 나누었다. 오늘날 보편화된 입법·사법·행정의 3권분립은 몽테스키외가 주장했다. 권력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분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15) 15) Montesquieu, De l’Esprit des Lois, Paris, 1956, tome premier, p.164. 신상초 옮김, 《법의 정신》, 을유문화사, 1965, 161쪽.

정치권력의 남용을 막아 시민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해서 3권을 분립하여 상호 견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이 같은 민주주의 기본원리가 현실 정치에서는 변형될 수밖에 없다고 보비오는 생각한다.16) 16) 《민주주의의 미래》, 42∼56쪽.

민주사회의 이상적 모델이 구심적 사회인데 현실은 다원주의 사회이며 공공이익의 수호라는 기본 성격과는 달리 사적인 특수 이익이 앞세워지고, 과두제 권력(oligarchical power)의 종식에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권력(invisible power)’이 제거되지 않았으며, 통합적 사회질서의 수립에도 실패했고,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안정된 민주주의 체제가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3.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제도

민주주의의 중요 가치 가운데 하나가 ‘국민주권’의 원리이다. 국민주권은 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의 행사를 국민의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민주권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상향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 달성의 길은 무엇일까? 립셋(S. Lipset)은 민주주의 체제의 성립이 재산, 도시화, 산업화 및 문자 해독율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높다는 것이다.17) 17) Seymour M. Lipset, Political Man, N.Y., 1963.

민주정치의 성립 여부는 자치와 참여에 있다.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참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러너(D. Lerner)는 민주주의를 국민의 정치참여로 본다. 정치참여는 도시화, 문자 해득 및 통신 수단의 순차적 발전에 의해 가능하다. 도시화는 농촌인구의 이주를 가능하게 하고, 도시생활은 문자 해득을 요구하며, 문자 해득이 마침내는 정치참여를 확대시킨다는 것이 러너의 주장이다.18) 18) Daniel Lerner, The Passing of Traditional Society, N.Y., 1958.

국민참여를 가장 잘 보장하는 것은 직접민주주의이나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은 쉽지 않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현실적인 정치체제인 대의제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 보장, 부의 공정한 분배의 결합으로 나타난 최선의 정치형태이다. 다만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사이의 부적절한 균형이라든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데서 발생하는 비민주성이 문제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는 국가적 차원의 영역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참여민주주의는 다양한 시민 사회의 영역에까지 민주적 원리와 제도가 확산되어야 한다.19) 다시 말하면 참여민주주의는 민주적 참여의 절차와 통로의 개방이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된다. 19) 이 같은 주장들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보비오는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평의회민주주의나 생산자 자주관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보비오의 입장을 앤더슨(P. Anderson)은 밀(J. S. Mill)이나 다알(R. Dahl)에 가까운 온건한 사회민주주의라고 본다. 잉그라오(P. Ingro)나 바까(G. Vacca) 등은 생산 단위의 기층 민주주의(democratie de base), 지역자치제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와의 결합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 정치체제

가) 기본권의 보장
민주주의가 부딪치고 있는 위기는 자유방임주의의 파탄이다. 자유방임주의는 예정조화론에서 출발하는데 사회가 발달하면서 현실과 맞지 않는 면이 나타났다. 그러자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이념적 도전이 나타나기 시작해 근대 자유주의가 크게 변화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경제적 자유주의로, 정치적 자유에서 경제적 평등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이 바뀐 것이다.

자유방임주의는 지배층이 특권은 독점하면서도 피지배층 보호의 책임은 저버리게 하였다. 그러자 사회의 책임을 요구하고,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보호와 간섭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개인의 자유가 ‘국가로부터의 자유’에서 ‘국가에 의한 자유’로 바뀐 것이다.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다가 국가의 보호와 간섭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국가의 보호와 간섭을 요구하게 되면서 국가에 권력이 집중되어 자유와 통제, 개인과 국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와 국가의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게 되었다. 국가의 목적 추구, 즉 개인 자유의 외적 조건으로서의 경제적 평등 추구를 위해 국가가 개인의 경제활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자유는 인간의 자격으로 누리는 ‘시민적 자유’, 국가 구성원으로서 누리는 ‘정치적 자유’, 그리고 생활을 하는 경제적 인간으로서 누리는 ‘경제적 자유’로 나누어 볼 수 있다.20) 20) Ernest Barker, Principles of Social and Political Theories, London, 1967, pp.146∼147.

민적 자유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시민 사회에서 자유의 주체인 개인이 누리는 기본권적 자유이다. 기본권인 시민적 자유는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 계약 및 재산의 자유로 나뉜다. 신체적 자유란 생명·건강 및 이동에 대한 위협이나 손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정신적 자유는 양심·신앙·사상·언론·출판 및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가리킨다. 계약 및 재산의 자유란 타인과의 재산상의 계약 행위나 경제적 관계의 자유를 뜻한다.

토크빌은 평등화와 민주화가 자유와 평화의 갈등, 자유와 질서의 갈등, 개인주의와 다수의 횡포 등으로 말미암아 ‘민주적 전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위험을 정치 참여를 활성화하고 사회적 다원주의와 행정권의 분산, 이기심의 완화 등을 통해 극복할 것을 토크빌은 제안한다.

나) 대의제
근대 민주정치의 대의성은 정부의 대의성에 달려 있다. 입법부의 의원이나 행정부의 수반이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느냐가 민주정치의 핵심이다. 민주주의 나라는 정부의 대의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입법권은 의회와 정부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유방임주의에서는 입법을 강제와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입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입법은 밀(J. S. Mill)의 주장처럼 국가의 강제라기보다는 자유의 기회를 사회성원들에게 개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21) 21) George H. Sabine,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Holt, Rinehart and Winston, 1961, pp. 705∼715.

입법이 법률 외적인 형태의 강제를 최소화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입법권을 담당하는 의회의 활성화가 매우 중요하다. 현대국가에서는 행정부의 권한이 비대해져 실질적으로 행정국가적인 경향을 띤다. 시민입법권을 보장해 주고 국민소환(recall)제도나 국민발안(initiative)제도도 참여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좋은 방안 가운데 하나이다.

다) 지방자치의 활성화
참여민주주의를 이루는 지름길의 하나가 지방자치의 활성화이다. 지방의 주민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공동체적인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꾸려나가는 것은 민주주의 발달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의 통치구조를 지방분권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지방자치는 ‘지방의 일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다. 지방의 일이라 함은 특정 지역의 정치와 행정을 말한다.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은 자기의 일을 남의 간섭 없이 자신의 의사나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독립적 자율적으로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지방자치는 “일정한 지역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을 기초로 주민이 선출한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주민이 부담하는 조세를 사용해서 주민의 일상생활과 밀착된 그 지역의 사무를 단체 자신의 권위와 책임 아래 단체구성원인 주민의 의사에 따라서 결정 집행하는 것”이다.

지방자치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자치권(autonomy)을 갖는 지역 단체(territory community)의 존재와 그 단체의 사무(own affairs)에 주민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단체자치와 주민자치라고 한다. 단체자치와 주민자치는 자주 책임의 원리와 더불어 지방자치가 제대로 운용되기 위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전제 조건이다.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인 권한과 기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방자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에게 상당한 권한과 재정을 넘겨주어야 한다.

라) 선거
“탄환 대신 투표로(Not Bullet, But Ballot)”라는 말이 있다. 국민 정치참여의 중앙 통로인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의사 형성을 보장하고, 국민의사를 바탕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다. 선거는 국민이 의원이나 대통령과 같이 권력을 위임받아 자신을 대신해서 정치를 해 나갈 대표를 뽑는 합법적 절차이다. 선거가 단순히 대통령이나 의원 등 국가기관 선출기능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선거는 평화적 민주질서를 만들어내고 평화적 방법으로 지도자를 선출함으로써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기능도 아울러 갖는다.

선거제도는 정치적 기본권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선거제도의 유무보다 실제적 내용이 중요하다. 주민참여의 원리와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참여의 기회나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공허한 말에 그치고 만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선거공영제가 필요하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적 의사를 조직적으로 표명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이므로 불공정한 선거운동이나 금권선거가 치러지면 안 된다. 금권선거는 선거의 기회균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도 배제되는 불공평사회가 된다. 금권선거는 필연적으로 금권정치를 유발시킨다. 선거공영제는 불법타락선거를 정책선거로 바꿀 최선의 방법이다. 선거공영제는 선거에서 돈의 영향을 최소화시키고, 정치부패를 막는다.

대의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1인 2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정당투표제라고도 불리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를 따로 선출하는 제도이다. 비례대표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계층과 직능 대표성을 높이고 지역구 활동이 어려운 전문가의 정치 참여를 쉽게 해주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의 정치적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

마) 정당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당을 통한 정치활동이다. 정당은 국민을 정치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현대사회는 사회구성원의 이해관계라든가 이념적 성향이 다양하므로 필연적으로 복수정당이 될 수밖에 없다.

복수정당제도는 단순히 여러 개의 정당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정책경쟁을 통해서 정권 담당의 기회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소수의 보호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복수정당제도는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 소수의 보호를 이념적 바탕으로 하지 않는 복수정당제도는 사실상의 일당 독재를 위장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 시민사회단체의 자율성 보장
시민사회단체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일반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권주의이다. 국민의 자율적 의사와 판단을 바탕으로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정당 이외에 시민단체의 역할이 존중되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특히 정당이 정책대결이 아니라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이 잦은 나라에서는 건전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정치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3) 환경적 조건: 사회적 평등 달성
참여민주주의의 중요한 외적 조건 가운데 하나가 경제적 평등의 달성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에 따라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존 정부를 비판하거나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국민의 힘은 사경제력(私經濟力) 없이는 불가능하다.22) 22) Robert M. MacIver, Democracy and the Economic Challenge, 1952.

빈부의 격차가 심하면 사경제력을 독점한 사회적 지배층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사경제력이 빈약한 일반국민이 견제할 힘을 갖지 못한다. 또 빈부격차는 계층간의 이해대립을 첨예화시켜 민주주의의 성립요건인 동의의 기반도 침식하게 된다.

4. 불교의 민주주의적 특성

이 같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착에 불교의 가르침은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가. 특히 속세를 떠난 출세간의 종교라 하는 불교가 가장 현실적인 정치적 과제와 어떤 관계를 지녀야 하는가. 흔히 한국불교를 산중불교 또는 산림불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와 사회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는 불교가 정치와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불교가 전래되던 삼국시대는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체제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던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이념의 확립과 체계화의 필요성을 느낀 왕실이 중심이 되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왕실과 결합한 불교는 불국정토사상을 기반으로 호국불교화 되었다.23) 23) 우리 불교는 오랜 호국불교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호국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불교와 정치권력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호국불교란 국가 발전을 불교 발전으로 보는 현실 국토 완성의 의지가 나타난 호국사상이다. 호국불교가 결코 왕권에의 굴복이 아님은 불교가 배척 당했던 조선시대에 나타난 승병의

남북조(신라와 발해)시대를 거쳐서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국교로서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불교의 근본정신이기도 하다. 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사회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생이 앓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유마경》의 가르침이나 지옥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 모두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치유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여래가 세상에 온 것은 가난하고 소외되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법구비유경》은 밝혀 놓고 있다. 약사여래의 본원(本願)도 남에게 매여 자유롭지 못하거나 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원래 승과 속이 둘이 아니라는(僧俗一如) 것도 중생이 살고 있는 현실에 관심을 가지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보살이 보시 바라밀을 닦고 있을 때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고 의식에 궁핍한 중생을 보면 바로 다음과 같은 서원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그곳에 따르고 그 때에 따르는 방법으로 보시바라밀을 닦아야겠다. 그래서 내가 이윽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내 불국의 중생에게는 절대로 이와 같은 궁핍이 있게 하지 않겠다.

의식이나 생활용품은 충족하여 모자람이 없고, 마치 천상계와 같이 만들어야겠다.” “가정에 상류 중류 하류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 나의 불국에는 이와 같은 우열이 없게 하겠다는 원을 일으켜야 한다.” 다만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이 ‘정치적 종교’로 바뀌어서는 안될 것이다. 도슨의 말처럼 정치적 종교는 종교도 해치고 정치도 해치기 때문이다.

정교분리도 마찬가지이다. 정교분리란 신앙의 자유를 국가권력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종교가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라가 특정 종교에 대하여 특별한 법령적 지지나 재정적 원조를 해서는 안 되고 모든 종교에 대해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24) 또 신앙의 자유의 보장은 다른 모든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보장으로 이어진다.25)24) 석탄일과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한 것도 정교분리나 종교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특혜인 셈이다. 유림에서 공자의 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25) 孝橋正一, 석도수 옮김, 《현대불교의 사회인식》, 도서출판 여래, 1983, 83쪽.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적 정신의 발로인 신앙의 문제까지 나라가 간섭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 또 신앙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양심, 사상, 교육,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앙의 자유 억압은 다른 시민적 자유의 억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교가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연기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기설은 일체 현상의 생성소멸을 ‘인’(因: hetu)과 ‘연’(緣: pratyaya)의 상호관계로 설명하는 불교의 기본 원리이다. 연기설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더불어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비의 실천도 삶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한 삶으로 승화될 때 가능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해주려는 것(慈)과 남들의 고통을 없애주려는 것(悲)은 모두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정신인 것이다. 결국 연기설의 바탕에 깔려있는 세계관은 공존하고 서로 살리는(상생) 공동체 사회의 존재이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공동체 사회는 남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고통인 사회이다. 갈등과 대립, 분리, 투쟁, 배신 등이 지배적인 약육강식의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상태’인 것이다. 이 같은 잘못된 공동체 사회를 상생, 협력, 조화, 사랑, 평화가 지배적인 만민평등의 진정한 인간공동체로 바꾸려는 노력이 바로 출가(pravrajita) 정신이다.

출가는 소극적으로는 무소유, 적극적으로는 방생을 뜻한다.26)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더 가지려는 소유욕을 버리고(무소유), 나아가 자기보다 남을 더 살리려는 행위(방생)가 바로 출가이다. 다시 말하면 출가는 ‘뭇 존재들을 힘닿는 데까지 애써 살리는 행위’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꿈꾸는 공동체 사회는 함께 사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살리고 공동체를 바람직한 형태인 정토(sukha?at沖)로 바꾸는 것이다.26) 김진열, 《불교사회학원론(1)》, 운주사, 2002, 28쪽.

인간고통을 해방시킨 정토는 죽어서 갈 수 있는 피안의 세계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고통을 주는 사회문제를 해결한 ‘현실정토’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남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깔려 있으니, 이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기본이념과 똑같은 것이다.

연기의 법칙을 실현하기 위한 참된 진리인 사성제 또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바람직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 사회에는 어디나 많은 삶의 문제들이 있다(苦諦). 그 문제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集諦) 그 문제를 해결할(滅諦)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제시(道諦)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은 사회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할 것을 요구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인생은 고해이다”(duh.kham bhavah.)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결정짓는 사회적 환경과 사회구조가 그릇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으로 주어진 근본고도 있지만 인위적 윤리적으로 겪어야 하는 사회고(社會苦)도 있다. 특히 사회고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고통’이므로 사회문제에 대한 접근을 통해 고쳐야 하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실천’도 불교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상구보리’를 위해서 세속적 사회를 떠나지만 ‘하화중생’을 위해서는 세속적 사회로 다시 돌아와 중생들의 삶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항상 지켜야 할 덕목인 육바라밀(pa?amita?도 불교의 가르침이 민주주의의 실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누어 베푸는 보시(da?a)는 평등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불교는 평등의 종교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sarva-sattvas tatha?atagarbha)는 것보다 더 평등을 강조한 것은 없을 것이다. 경제적 평등은 말할 것도 없고, 존엄성의 평등, 정치적 평등, 사회적 평등까지도 보시는 포함하고 있다.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극적 평등에 머물지 않고 그 기회를 누릴 조건까지도 제공하는 적극적 평등의 개념이 바로 보시가 아닐까.

계율을 지키는 지계(sヵ?a)는 공동체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지켜야할 덕목이 된다. 자비를 실천함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하는 인욕(ks.a?ti)은 중생을 정토로 이끄는 행위이니27)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정신이 된다. 끊임없는 노력인 정진(v沖rya)은 공동체의 구현에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요구한다.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과 육체가 균등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안정을 얻은 선정(dhya?a)은 자기수련을 말하는 것이므로 결국 ‘최선아의 실현’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궁극적 목적과 같은 의미인 것으로 볼 수 있다.27) 김진열, 《불교사회학원론(1)》, 운주사, 2002, 113∼114쪽.

미혹된 상태를 떠나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지혜(prajn?)는 바람직한 삶을 위한 가르침이니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민주적 공동체에서 비로소 바람직한 삶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육바라밀을 통해 실현시킬 진정한 인간공동체란 어떤 것인가. 공동체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필요(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를 충족시키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고, 서로 존중하는 공동체다. 다시 말하면 자비정신이 실천되는 정토를 구현하는 것이 바로 바람직한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승가(sam?ha)이다. 승가의 운영방식은 민주제의 의결, 공평한 평등 분배에 의한 삶,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편진리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승가의 기본 원리인 민주성·평등성·개방성의 실현은 민주주의의 기초적 원리인 것이다.

최남선은 인도의 불교가 서론이고 중국의 불교가 본론이라면 우리 불교는 결론적 불교라고 주장했다.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고 종파를 묘합한 통불교라는 특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 같은 우리 불교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이다. 원융이라 함은 원만하여 막힘이 없는 것을 말하고, 회통이라 함은 대립과 갈등이 높은 차원에서 해소되어 하나로 만나는 것을 뜻한다.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은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다. 국가 공동체가 안고 있는 과제의 해결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국가공동체의 가장 바람직한 역할은 이처럼 불교의 원융정신과 만나는 것이다.

불교는 관념의 종교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현실적 고통을 없애려는 불교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종교이다. ‘뭇 생명의 존귀함’을 외치는 불교는 인간을 존중하는 인간중심적(humanism) 종교이다. 가장 존재의 본래적 바탕으로 돌아가자는 인간회복정신이 불교의 가르침의 근본인 바 이것이 또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인간존중사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목표는 인간의 존엄성 존중과 보호, 개인의 자유와 평등 및 복지의 실현, 개개인의 자아실현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존경, 신뢰, 자치, 연대, 협동의 생활을 하도록 하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없는 사회를 실현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5. 맺는 말

민주주의가 더디게 정착되는 것은 불완전한 절차와 제도화와 파행적인 법 집행 및 운용에도 기인하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데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적인 생활 태도의 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은 형식적 절차가 제도화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적 시민 사회가 정착되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보장될 때 달성될 수 있다. 민주적 제도가 충분히 발달된 국가에서도 참여의 원칙을 거스르는 현상들이 일반화되어 있다. 정치 참여의 부족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무관심과 대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집단에 의해 왜곡되며 불구화된 참여, 그리고 시민이 참여하는 통제의 허구화 등이다. 다시 말하면 관료, 군대 등 실질적인 권력의 가장 중요한 장치들은 어떤 민주적 통제에도 종속되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현실 완성적이라기보다는 미래 완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켜 나가야 할 미완의 형태이다. 근대 민주주의가 나타났던 서유럽의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 발달사는 평등한 국민의 지배를 달성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즉 민주주의는 과정의 형태인 것이다. 그래서 ‘생활로서의 민주주의’가 강조되고, “민주 시민이 없는 곳에 민주주의가 없다”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시민 사회가 강화되면 참여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완성에 불교가 이바지할 바는 매우 크다. 연기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나와 남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不異) 점을 전제로 한 무조건적인 포괄적 사랑인 자비정신의 확산은 민주주의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나 혼자만의 깨달음과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날 것을 염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중생의 구제를 추구하는 대승정신 또한 민주주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불교는 스스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착하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한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도덕적 선진국을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 상실의 시대라는 점이다. 물질만능주의는 물질적 능력, 경제적 능력이 모든 것을 헤아리는 잣대가 됨으로써 인간을 물질로 평가하는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인간 상실의 시대에 인간 중심의 종교인 불교는 인간을 인간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보내 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소지를 안고 태어났으므로 소중한 존재이다. 귀하고 천하고 부유하고 가난하고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바르게 살려는 생각과 실천만이 불교에선 중요한 것이다.

또 우리 사회에는 남북 갈등, 지역 갈등, 계층 갈등, 성별에 따른 갈등, 세대간 갈등, 종교간 갈등 크고 작은 갖가지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같은 갈등과 대립을 통합과 화합으로 이끌 수 있다. 이제 원융회통의 정신과 방편의 묘를 살려 불교를 먼저 살려내는 것, 나아가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것. 이 시대 불교의 가장 커다란 과제이다.

불교가 계속 산중에만 머무르면서 사회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기본 교리는 고통 속의 중생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국가와 국민의 관심사에 무심해서는 불국정토의 완성이라고 하는 과제의 달성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개혁불사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중생의 삶의 질을 높이고 중생 구원을 위한 민주 정치를 이 땅에 꽃피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불교계가 아끼지 않기를 바란다. ■

손혁재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정치학 박사. 전불련 중앙위원, 재가연대 자문위원, 달라이라마 방한 준비위원회 대변인, 안양불교청년회 지도법사 역임. 현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저서로 《새천년 한국시민사회의 비전》 《김대중 정부개혁 대해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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