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행동회의 참관기 ]

종교는 정치와 무관한 것일까

필자는 지난 3월 10일부터 13일까지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국제 행동 회의’(Inter-Action Council)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국제 행동 회의’는 정치·경제·환경 등 현대 사회의 주요한 영역에서 국제적 차원의 정의와 화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세계의 전직 국가 원수들이 모여서 결성한 여론 형성 단체이다. 이번 회의는 특히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서 세계의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의견을 듣는 자리가 되었다. 따라서 회의의 주제도 ‘문명의 충돌과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회의에는 정치인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직 수상 말콤 프레이저, 네덜란드의 전직 수상 반 액트, 인도네시아의 전직 대통령 주수프 하비비, 그리고 에쿠아도르의 전직 대통령 자밀 마흐무드 등이 참석하였고, 종교계에서는 각 문명권의 종교지도자가 모두 21명 참석하였다. 힌두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유태교, 희랍 정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들이 한두 명씩 고루 참석하였으니, 인류문명을 대표하는 고등종교의 지도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과분하게도) 유교 측의 대표자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사실 떠나기 전부터 썩 마음이 내켰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참석을 권유하고 추천해준 사람이 군사정권 시절 내내 정부에서 고관을 지낸 사람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일단 전직 국가원수라고 하면 독재나 부정축재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부터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국제 행동 회의’라는 단체의 성격도 잘 모르는 터에, 혹시 회의에 참석해서 정의롭지 못한 일에 들러리나 서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 마음이 썩 개운치가 않았다. 하지만 남의 청을 단호하게 물리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 탓으로, 미적거리며 확답을 미루다가 결국은 등을 떠밀려 참석하게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자카르타까지는 직항으로 7시간.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라고 하니, 불현듯 테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전에도 인도네시아의 발리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고, 필리핀의 공항에서도 테러가 있었다니, 처자식을 가진 몸으로 불현듯 불안감이 스친다. 보안 검색대를 거쳐 입국심사장으로 들어가다 말고 발길을 되돌려 나왔다. 여행자 보험에 들어두는 일을 깜박 잊은 것이다. 큰 맘 먹고 3만원을 지불한 후, 사망시 3억원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로열(Royal)급 보험에 가입했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 반, 검푸른 열대림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었다. 습하고 무더운 열대 공기에 숨이 막혀온다. 겨울양복을 벗어들고 세관을 걸어 나오니, 누군가 “이 교수님!(Professor Lee!)”이라고 부르며 달려온다. 주최 측에서 미리 대기시켜놓은 차량의 기사였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내로 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짙어가는 땅거미 속에서 현대, 삼성, 에스케이, 엘지의 네온사인이 연이어 눈에 들어온다. 우선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몇 년전 실크로드의 북서쪽 끝자락인 중국의 우르무치에 갔을 때 한국에서 직수입된 마을버스를 보고 감개무량했던 것처럼, 낯익은 우리 기업의 간판들은 이국땅에 도착한 여행자에게 일말의 안도감을 불어넣어 준다. 국내에서 대기업의 비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느끼던 불편한 감정이 이국땅에서는 슬며시 반가운 마음으로 바뀌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간사한 것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 바로 인도네시아 전직 대통령 하비비가 베푸는 환영 만찬에 참석하였다. 하필이면 인도네시아 주재 영국 대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다니……. 나는 참 재수가 없는 사람이다. 식민지 총독과 같은 거만한 자세로 영국인 상류계급 특유의 엑센트 섞어가며 이라크 침공의 정당성에 관해 떠들어대는 바람에 식사를 망치고 말았다. 워낙 포크와 나이프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상대가 맘에 안 들면 입맛을 잃어버리고 마는 까탈스런 성미는 어찌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부시의 푸들’인 블레어 총리의 말투를 그대로 빼어 닮았는지……. 들어주는 척 하면서 포도주만 두어 잔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음날 오전 9시부터 ‘하비비 센터’에서 열린 첫날 회의는 ‘문명의 충돌과 전쟁’에 관해 참석자들이 각자의 견해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사회는 호주의 전 수상 말콤 프레이저가 맡았는데, 그는 의전관례상 첫 번째 발언권을 하비비에게 넘겼다. 하비비는 독재자 수카르노의 치하에서 20여 년 동안 기술부 장관을 지내며 인도네시아의 근대화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한 인물로서, 수카르노가 실각한 후에 2년 동안 대통령 직을 맡았다가 차기 대통령인 와히드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사람이다.

불행하게도 집권초기에 동티모르 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었지만, 아직도 국민들 사이에 많은 지지와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술관료 출신답게 대단히 명쾌하고 논리적인 언변으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국제적 사태를 분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분쟁은 크게 두 가지 원인으로 귀결된다.

하나는 미국이 그동안 국제정책을 집행하면서 공정하지 못한 ‘이중 잣대’(double standard)를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중동지역 국가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낙후된 중동지역의 국가들이 빈곤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필자는 현직 대통령이든 전직 대통령이든 정치인들이 이처럼 자기의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든 한결같이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빙빙돌려 우회적으로 하는 모습만 보아오다가, 솔직하고 기백있는 정치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되니 우호적인 느낌이 절로 우러났다. 물론 현직 대통령이 아니니까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할 필요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각국의 언론이 주시하고 있는 국제 회의장에서 이처럼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제점을 노골적으로 지적하는 일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비비의 발언이 끝난 후에는 각 문명권의 종교지도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순서가 되었다. 먼저 스리랑카에서 온 불교 지도자인 아리야라뜨네(A. T. Ariyaratne) 박사가 입을 열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겨나는 빈부의 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먼저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발언의 요지였다.

아리야라뜨네는 스리랑카에서 사르보다야(Sarvodaya)라는 명상 프로그램을 통하여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온 불교 지도자로서 한국에도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깨달음을 개인의 차원에만 국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깨달음으로 확장시키고, 공동체적 깨달음을 다시 국가적 차원과 세계적 차원으로 승화시켜서, 마지막으로는 우주적 차원의 깨달음에 도달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된다고 역설하였다.

아리야라뜨네의 발언을 경청하면서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착잡하였다. 비록 그의 참여불교적 노력 덕분에 스리랑카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빈곤한 마을의 주민들이 가난과 질병에서 해방되어 환경친화적인 지역개발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과연 이러한 종교 운동이 ‘동물의 왕국’과도 같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떠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스리랑카처럼 불교 전통이 강한 나라 안에서는 종교적 힘에 의해서 새로운 삶의 모델을 창출해내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 공동체를 모색하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으로 점철된 세계화의 상황 속에서 이러한 명상운동은 과연 얼마나 적실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리야라뜨네의 발언을 들으면서 마음이 더욱 어두워진 것은 한국 불교계의 현실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나라의 불교계는, 스리랑카와 달리 풍부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비록 IMF 사태가 일어난 직후에 실상사의 도법스님이 시도했던 귀농 공동체가 있기는 하지만, 스리랑카에서처럼 광범위한 사회운동으로 번져나가지는 못했다. 1998년부터 나날이 정리해고자와 노숙자가 늘어가는 상황에서도 우리의 불교계는 소외받는 계층과 도태된 약자를 위하여 아무런 실천적 프로그램도 만들어내지 않았고, 비합리적인 사회구조와 경제제도의 모순을 개선하기 위한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했다.

개인적 깨달음을 사회적 깨달음으로 연결시키려는 스리랑카의 불교계와 달리, 우리나라의 불교계에서는 그동안 너무도 ‘사회적 깨달음’을 외면해왔다. 하안거 동안거의 결제기간 동안 수많은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선승이 세속에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의 불교는 “하화중생”의 이념에서 탈피하여 ‘개인적 깨달음’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종교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어찌 보면 ‘사회적 깨달음’은 ‘개인적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깨달음’을 위한 노력 자체가 ‘개인적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야라뜨네의 발언이 끝나자, 이어서 유태교를 대표하는 데이빗 로슨(David Rosen) 박사의 발언이 있었다. “명상을 통한 평화의 회복”이라는 아리야라뜨네의 발언 요지를 이어받아, 유태교에서 ‘기도’의 의미와 ‘영성’의 회복에 대해 발언하였다. 로슨의 발언을 들으며 점차 필자에게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분명 “문명의 충돌과 전쟁”인데,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현실과 동떨어진 ‘기도’와 ‘영성’뿐이라니……. 역시 종교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동떨어진 고상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설교를 듣다 지쳐서, 회의 참석자의 명단이나 훑어보고 있자니 뜻밖의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로슨 박사는 ‘미국 유태교 연합’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고위 성직자였다.

그가 문명의 충돌이나 전쟁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대신 ‘영성’만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만도 했다. 중동의 많은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편파적으로 감싸고돌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이스라엘과 유태교인 것이다. 로슨은 더구나 ‘미국 유태교 연합’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이니, 그가 문명의 충돌과 전쟁에 대해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답답했는지 하비비가 다시 끼어들었다. 하비비는 회의 참석자들이 행여 주제를 잘못 파악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에서였는지, 미국-이라크 분쟁의 원인을 ‘문명의 충돌’과 관련해서 발언해달라고 주문했다. 사태가 이쯤 되면, 다음 차례 발언자는 당연히 ‘테러리스트’로 주목받아온 이슬람교의 지도자라야만 했다.

‘국제 이슬람 회의’의 의장인 알 샤리프(Al-Sharif) 박사가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답게 마호메트의 가르침에 담긴 ‘평화’의 메시지와 ‘나눔’(zakah = 복지공헌)의 정신을 들어가며 ‘문명의 공존’과 ‘종교의 화합’에 관해 역설하였다. 이슬람이라고 하면 우선 테러부터 연상하는 타 종교인의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특히 이슬람교에 담긴 평화의 정신을 강조하고자 고심했다. 발언 도중에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슬람교가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서구인들의 시각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오해받아왔는지에 대해 감정섞인 목소리로 토로하였다.

그의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대 발언을 신청한 사람은 일본의 나가오 효오도 교수였다. 그의 발언의 요지는 이렇다. 이번 국제회의는 종교와 문명간의 대화에 관한 것이므로, 될 수 있으면 정치 경제적인 이야기보다는 영적(spiritual)인 측면에 토론을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그 순간 문득 스쳐가는 느낌이 있었다. “이게 바로 물타기 작전이구나!” 강대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야기가 터져 나오지 않도록 논의의 범위를 아예 종교적인 차원으로 제한하려는 그의 속셈이 너무도 뻔히 드러나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회의의 재정적 후원자는 일본이었고, 그는 도쿄 게이자이(經濟) 대학의 교수로서 이 회의의 자문 역을 맡고 있었다.

세계의 각종 기구와 이벤트에 돈을 지원해가며 뒷전에서 슬그머니 자국의 입김을 확대해나가고자 하는 일본의 속셈을 볼 때 참으로 교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국제적 분쟁의 원인을 종교적 분쟁으로 환원시켜버리고자 하는 영악한 술책에, 가슴 속에서 문득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석유를 둘러싼 이익다툼을 ‘종교간의 분쟁’으로 돌려버리고, 세계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문명의 충돌’로 귀결지으려는 간교한 말장난에, 필자는 즉각 손을 들고 효오도 교수에 대한 반대발언을 신청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그의 눈총을 의식하며 필자가 발표했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문명의 충돌’이라 불리는 유령

이 세상에 합치하기 어려운 신념과 교리를 가진 종교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단순히 종교간의 분쟁이나 문명 간의 충돌로 파악하고자 하는 견해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불행한 사태가 단순히 종교간의 갈등과 문명 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면, 그러한 분쟁은 ‘공존을 위한 대화’와 ‘관용을 위한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리 서로 다른 종교라 할지라도, 수천 년에 걸쳐 인류의 지혜가 농축되어 만들어진 모든 고등종교 안에는, 한결같이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유교의 인, 가톨릭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그리고 이슬람과 유태교에서 중시하는 평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소위 ‘문명의 충돌’이라고 호도되는 작금의 사태는 사실상 ‘문명의 충돌’이라기보다 ‘문명의 충돌’을 빙자한 ‘이익의 충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방 세계는 중세의 십자군전쟁 때부터 이슬람 문명권을 사악한 이단으로 낙인찍고 짓밟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특히 2차대전이후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석유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내쫓고 이스라엘이라는 친미국가를 수립하였습니다.

그 후로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파적인 옹호와 지원은 수많은 중동국가들의 불만을 초래하였습니다. 미국은 이라크를 9·11테러의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신빙성 있는 근거도 제시된 바 없습니다. 미국은 또한 이라크를 생화학무기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불량국가로 낙인찍고 있지만, UN 무기사찰단의 조사결과 그러한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미국은 UN 안보리의 표결도 거치지 않은 채, 단독으로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이는 분명히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일’이며, 윤리적으로도 ‘비도덕적인 일’입니다.

지난 가을(9·11) 미국이 겪었던 사태는 너무도 불행하고 처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에 처할수록 인간은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중용》에서는 활쏘기에서 군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군자가 활쏘기에서 과녁을 맞히지 못했을 때 그는 돌아서서 자신 안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남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9·11사건 이후 즉각 아프간에 대한 침공을 단행했고, 9·11사건에서 희생된 미국 시민보다 훨씬 많은 수의 민간인을 살상하고서도 오사마 빈 라덴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미국은 공격의 총구를 이라크를 향하여 겨누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성적인 이유도, 도덕적인 명분도, 합법적인 절차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 인류의 존망(存亡)은 부시 행정부가 내리는 한마디 판결문에 의해 결정되고 있습니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구호는 부시 행정부의 마녀사냥을 미화시켜주는 구호입니다. 부시에 의하면 세계는 흑과 백의 두 집단으로 분류됩니다. 미국의 세력에 복종하는 나라는 ‘친구’(friend)이고, 복종하지 않는 나라는 ‘적’(enemy)입니다.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나라는 ‘선’(the Good)이고, 미국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나라는 ‘악’(the Evil)입니다.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한 국가’들과 이에 맞서려는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을 따르는 약소국들을 대표하는 ‘정의’(justice)의 화신입니다. 미국이 행하려는 전쟁은 ‘무한 정의’(infinite justice)를 구현하기 위한 숭고한 성전(Crusade)입니다. 부시의 흑백론적 이분법에 의하면, 미국을 따르지 않는 모든 나라는 단지 ‘악의 축’이거나 불량국가(rogue state)이거나 테러국가(terrorist country)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라크가 보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생화학 무기나 대량 살상무기는 오래 전에 이미 미국이 이라크에게 제공해 준 것입니다. 미국은 이란의 친미 정권인 팔레비 왕조가 몰락하고 반미 성향의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서자, 이라크에게 대량살상무기를 지원해주어가며 전쟁을 부추겼습니다. 1980년부터 8년간에 걸쳐 벌어진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그것입니다.

어디 미국은 이라크에만 대량살상무기를 지원해주었습니까? 미국이 9·11사태의 범인으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 역시 미국의 정보기관이 훈련시키고 길러낸 인물입니다.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세력을 뻗쳐오자 미국은 빈 라덴에게 거액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가며 대 소련 테러를 벌이도록 부추기다가, 이제 구소련이 해체되어 빈 라덴의 용도가 폐기되자 그를 ‘토사구팽’시키려는 것입니다.

물론 9·11사태의 진범이 누구이던 간에 그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마땅합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차분히 생각해봅시다. 2차대전 이후 세계의 무기시장에서 무기수출로 가장 큰 돈을 벌어온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여기서 구태여 특정한 나라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아도 알만한 분은 다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군수업체는 세계 무기시장에서 매년 총 거래액의 50%이상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9년에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42건의 군사 분쟁에서 사용된 무기와 군사기술은 그 92%가 미국으로부터 제공된 것입니다.

이 한 해 동안 미국이 세계의 무기시장에서 차지했던 총 거래액은 무려 6조 8천억 달러에 달합니다. 미국은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독재국가이건, 어린이를 군대에 징집하는 군사국가건, 가리지 않고 무기를 팔아먹는 일에만 열중해왔으며, 이런 이유로 세계의 비판적인 지성인들은 미국을 “평등한 죽음을 팔아먹는 장사꾼”(equal opportunity death merchant)이라고 비꼬는 것입니다.

고귀한 생명이 대량으로 사라져도 오직 자국의 이익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미국의 비인도적인 작태는 지난 세기 지구의 도처에서 자행되었습니다. 한국, 베트남, 라오스, 레바논, 리비아, 이라크, 유고슬라비아, 그라나다, 파나마,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등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이 바로 그 것입니다. 수많은 주권국가들을 향하여 자행된 무력침공은 그 자체로 ‘테러’라고 불릴만합니다.

지금 미국은 ‘국가’가 아닌 단체나 그룹에 의하여 전개되는 군사행동만을 ‘테러’라고 부르며 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집단이나 그룹에 의하여 전개되는 ‘테러’ 못지않게 더 큰 인명피해와 기반시설 파괴를 가져오는 것은 ‘전쟁’입니다. 전쟁이 어느 한 ‘집단’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전개된다고 하여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쟁이야말로 테러보다 더 잔혹한 학살극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민주국가이고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라고 자부한다면, 미국은 이제라도 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미국은 왜 9·11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좀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동지역에서의 불공정한 대외정책, 자원의 독점과 패권의 확보, 세계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이제라도 반성의 기회를 가져야만 합니다.

《논어》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먼저 서게 해주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으면 남을 먼저 도달하게 해주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만약 치솟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억누를 수 없어서 이러한 황금률을 실천할 수 없다면, 미국은 최소한 “자기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보편적인 윤리원칙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유교뿐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이러한 황금률을 지키지 않는다면, 부시 대통령은 사이비 기독교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회의의 주제는 “문명의 충돌과 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단언코 말합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국과 이라크의 분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갈등’이나 ‘문명의 충돌’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문명의 충돌’이란 ‘이익의 충돌’을 감추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불과합니다. ‘테러에 대한 전쟁’(war on terror)이라는 구호도 ‘석유를 위한 전쟁’(war for oil)을 감추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합니다.

‘성전’(crusade)이라는 구호도 ‘중동지역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야심을 종교적 용어로 포장하려는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호아래 숨겨져 있는 것은 추악한 인간들의 탐욕과 음험한 정치가들의 모략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의 진실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힘으로 일어서는 자는 힘으로 망한다.”라는 사실을. 무력에 의한 군사행동은 결코 테러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피는 더 많은 피를 부릅니다. 무력을 이용한 군사행동은 끊임없는 폭력의 소용돌이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폭력은 결코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경험이 일천한 땅에서 살아온 미국 행정부의 수뇌들로서는, 왜 인류의 고등종교들이 폭력대신 ‘자비’를, 무력대신 ‘인’(仁)을, 그리고 미움대신 ‘사랑’을 강조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에는 다양한 문명권으로부터 이주해온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문명으로부터 결집된 지혜와 사상을 존중한다면, 이렇게도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무력행사는 꿈 꿀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은 “전쟁을 벌이기 이전에, 모든 가능한 비군사적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라고 명시된 UN헌장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2차대전 직후 자신이 주도하여 만든 국제헌장을 스스로 폐기해버리는 자가당착의 모순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비윤리적이거나 비인도적이기 이전에 ‘탈법적’인 처사입니다. 세계를 무법과 탈법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미국 내에서 더 많은 테러와 불안이 발생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부시 행정부는 이제라도 이라크에 대한 전쟁포고를 철회하고 대외정책을 ‘독존’(獨存)이 아니라 ‘공존’(共存)의 방향으로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종교지도자 성명서’를 작성하기까지

필자의 발언이 끝나자 하비비와 프레이저는 멀리 떨어진 좌석에서 공감한다는 미소를 보냈고, 일본의 참석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비비와 프레이저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너무나 노골적이거나 직설적인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이었고, 일본 측 참가자들은 마치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미국에 빌붙어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면서 전후 복구사업이나 유전 개발사업에 참가하여 푼돈이나 챙기려는 차에 예기치 않은 불청객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발언을 계기로 이슬람 및 가톨릭 지도자들의 지지 발언이 이어졌고, 회의장 전체의 분위기는 반전 평화와 미국 규탄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튿날 회의에서는 전날 개진된 반전 여론을 집약하여 ‘세계 종교인 성명서’라는 문건을 작성하게 되었다. (이 선언문은 회의가 끝난 후 인도네시아에 주재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언론기자들과 인터뷰를 통하여 배포되었다.) 성명서의 줄거리와 세부적인 표현을 두고 장시간의 토론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가결된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작년 9월 11일 뉴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테러사건이래 ‘국제 행동 회의’는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테러에 대한 전쟁’이 오히려 세계의 종교 간에 심각한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 행동 회의’에 참가한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자 한다.

    1. 현재 진행되고 있는 ‘테러에 대한 전쟁’, 특히 ‘무력에 의한 대규모 인명 살상’은 세계사회에 더 큰 불안을 가져올 것이며 안정된 세계질서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2. 일부 테러는 증오와 시기 때문에 자행되기도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특수한 목적과 의도에 의해 자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목적과 의도는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역적인 것이다.

    3. 불행한 사실은 일부 서방세계들의 대외정책이 이러한 테러의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정책들은 특정지역에서의 편파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다.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세계화의 진행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역의 사람들은 벌어져가는 빈부 격차로 인해 심각한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다.

    4. 정의와 형평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협동과 신뢰를 통해 달성해야 하는 지속적인 목표가 된다. 모든 국가들의 정책은 이러한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5. 자기방어가 아닌 모든 전쟁을 불법화하고 있는 UN의 헌장은 세계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중요한 규약이다. 만약 일부 국가들이 타국에 대하여 일방적인 선제공격을 가한다면, 이는 지난 50년간 세계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인류가 기울여왔던 노력을 무산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상의 이해에 입각하여 우리는 세계의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에게 다음 사항을 촉구하는 바이다.

    1. 우리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과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과 테러를 정당화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2. 우리는 세계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종교나 인종사이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며, 대화와 합의를 통하여 국제적 차원의 정의와 협력을 이끌어낼 것을 촉구한다.

    3. 우리는 크고 작은 모든 국가들이 UN을 통하여 분쟁을 해소하고, 분쟁 해소의 과정에 있어서 국제협약을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

    4. 우리는 모든 국가들이 인류의 고등 종교에 의해 제시된 보편적 가치와 윤리를 인식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 정의로운 경제 질서, 연대의식과 관용, 신뢰와 형평을 증진시킬 것을 촉구한다.

    5. 우리는 세계의 모든 종교와 문명이 극단주의와 배타주의의 길을 걷지 말 것을 촉구한다.

    6. 우리는 세계의 모든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극단주의를 거부하고 보편적 가치를 인식할 것을 촉구한다.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이해 없이는 문명화된 사회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7.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분리의 벽을 넘어서서, ‘독단’과 ‘이중 잣대’ 그리고 ‘부정의한 차별’에 대항할 것을 촉구한다.

이상은 3월 12일 최종적으로 작성된 성명서의 요지이다. 물론 성명서 작성 과정에서 필자에게 전혀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될 수 있으면 ‘미국’이라는 특정한 국가의 명칭을 집어넣지 말자는 주최 측의 의견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미국의 죄악상을 명시하기가 불가능했던 점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사회를 맡았던 프레이저가 제시한 이유는, 이 성명서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넘어서서 좀더 장기간에 걸쳐 보편적인 효력을 지니려면, 특정 국가의 이름을 넣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글쓰기를 선호하는 필자에게는 성명서의 추상적이고 일반론적인 표현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차례에 걸쳐 성명서를 수정하고 최종안을 가결에 부친 후 회의를 폐하기 직전, 그동안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던 일본의 중의원(衆議院) 스기우라 쇼켄(彬浦正健)이 갑자기 긴급 발언을 요청했다. 그는 옵서버의 자격으로 회의장 한구석에 앉아서 발언을 경청하고 있었는데, 한마디 말도 못하고 회의를 마치려니 무언가 서운한 듯 했다. 사회자가 시계를 보며 발언권을 주자, 그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떠듬떠듬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원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2차 대전 이후에 미국의 도움을 받아 전후 복구가 가능했으며, 지금의 일본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 번영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세계질서의 유지에도 커다란 기여를 해왔다. 앞으로도 미국은 세계의 질서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할 것을 기대한다. 세계 질서에 위협이 되는 요소들은 과감히 제거되어야 한다. 특히 북한의 핵 개발은 아시아의 평화에 위협이 되며, 미국은 그러한 위협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기 바란다…….

스기우라의 발언 내용은 대충 이상과 같았다. 스기우라의 발언이 계속되는 동안 회의장의 모든 참석자들은 갑자기 어안이 벙벙하게 바뀌어갔다. 이틀 동안 회의 기간 내내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반전평화를 위한 종교인 성명서를 작성하였는데, 폐막직전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도 대꾸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말로) ‘무댓뽀’인지 ‘바카’인지 도대체 분간이 가지 않았다. 폐막 시간이 임박한 관계로 반대 발언을 신청할 기회도 없었다.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경제대 출신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일본에서는 중의원에 당선되는가 싶었다.

전쟁은 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멀리 인도네시아까지 날아가서 전쟁반대를 외치고 온 노력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3월 17일 미국은 이라크를 향하여 48시간의 항복 여유를 주었고, 유예 기간이 지나자 한발에 12억 원이나 하는 미사일 수천 발을 가난하고 굶주리는 민중을 향하여 발사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인(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불인(不仁)한 사람은 민중들에게 해를 입히므로, 부득이하게 사람을 죽여서라도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크게 인한 사람’(大仁人)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兵陣, 仁人之事也. 不仁之人爲民害, 不得已而殺人以生人, 此非大仁人不可.) 이는 명나라 말기의 독실한 유학자 육세의(陸世儀: 1610∼1672)가 남긴 말이다.

과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전쟁은 부시가 말하는 것처럼 “고통받고 있는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인가? 만약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침공이 진정 이라크 국민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면, 부시는 육세의가 말한 ‘크게 인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석유자원’의 확보와 ‘미국의 중동지역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임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미국 부통령 딕 체니의 딸이 반전운동에 가담하여 인간방패가 되기를 자원했겠는가? 진정 미국이 이라크 국민을 독재자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했다면, 1980년 이라크가 이란과 수로 분쟁을 벌일 때 미국은 왜 사담 후세인에게 대량 살상무기를 지원해주어 가며 이란을 침공하도록 부추겼던가? 미국은 후세인을 이용하여 반미성향의 호메이니 정권을 쓰러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의 관심은 민주국가의 수립이나 독재자의 추방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중동에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일만이 안중에 있었을 뿐이다.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전쟁은 육세의가 말한 ‘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과는 180도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지금 지구상에는 수많은 아동과 난민들이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유엔 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3백억 달러만 있으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아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더도 말고 3백억 달러만 있으면 지구의 모든 굶주리는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해낼 수 있는데, 그 열 배가 넘는 돈을 사람을 죽이는데 쏟아 붓고 있는 일은 얼마나 야만적인 일인가? 이라크는 지난 1991년 걸프전에서 15만 명의 민간인이 죽고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이래 연간 1%미만의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며 비참한 생활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구에서 최고로 부자나라, 그리고 최고의 문명국임을 자랑하는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 정도인가? 실망과 탄식을 금할 수 없다.

《논어》에서 “군자는 덕을 품고 소인은 땅 욕심을 품는다.”(君子懷德, 小人懷土)고 했다. 이라크는 세계 제2위의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산유국이다. 총 2천억 배럴의 매장량을 가지고 있으므로, 배럴 당 30달러만 쳐도 모두 6조 달러가 되는 셈이다. 미국이 1천억 달러의 전쟁비용을 써서 6조 달러 어치의 석유를 차지한다면, 이는 60배의 이익을 남기는 장사로서 장사꾼으로서는 한번 해볼 만한 모험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차피 ‘소인배’ 무기 장사꾼인데? 하지만 미국이 세계 각지에 팔아넘긴 무기가 한 군데로 모여서 또다시 미국의 심장을 강타한다면? 그래서 《논어》에서는 “자기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타인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당분간 전쟁은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될 것이다. 반전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수많은 사상자와 막대한 전비지출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단 시작한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를 거두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국제법의 와해, 우방국들의 외면, 세계여론으로부터의 고립, 반대세력의 결집, 세계 경제의 악화 등은 21세기 전반기의 인류사회를 예측하기 어려운 혼란의 늪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정의한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계정부의 수립이 급선무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인류의 다양한 문명으로부터의 지혜와 조언이 요청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도 ‘개인적 차원’에서의 깨달음이나 구원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깨달음과 구원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이 요청된다. 현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종교, 타자를 배제한 종교, 약자를 외면하는 종교는 사치스런 고급 유희일 따름이다. ■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국립대만대학 철학과 석사, 하와이주립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철학과 교수. 저서 및 논문으로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동양과 서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현대문명과 동양철학》(공저) 〈주희 형이상학의 정치철학적 함의〉 〈눈빛·낯뷸·몸짓: 유가적 덕의 표현 방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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