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표현이다. 그 관심은 구체적으로 진리의 추구와 선의 추구 그리고 아름다움의 추구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진리나 선이 아니라 이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진리라든가 선이란 것은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문화라고 하는 일정한 컨텍스트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또한 문화적 컨텍스트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진리나 선의 경우 보다는 특정 컨텍스트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신에 대한 찬미를 표현하는 건축물이나 음악 그리고 조각과 그림 등의 조형 예술은 종교의 경계를 초월한 숭고한 아름다움과 조형적 균제미를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이슬람 사원 건축과 벽화가 주는 감동적인 아름다움은 이슬람교도들만의 것이 아니라 종교와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유럽을 여행해 보면 성당의 아름다움에 곧잘 감탄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타종교인들도 성당에서 경건한 신심을 느낀다는 것은 한두 사람의 경우가 아니다. 예술은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진(眞)?선(善)?미(美)가 하나라는 것은 아름다움을 통해서이다. 진선미가 하나가 된 아름다움에서는 종파적인 편협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불교 또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초기 인도불교 이래 산치나 바르후트의 불탑의 조형미와 조각은 지금도 사람들의 감탄과 경외심을 자아내며 백번의 법문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특히 대승불교의 등장과 함께 불교적 진리와 선의 추구는 아름다움으로 통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전에서 묘사하는 불국토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불국토는 그 자체로 불교적 진리와 선(善)의 극점인데 그 구체적 표현은 아름답게 장엄된 불국토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이겠는가? 선불교에서도 선(禪)의 정수는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필치로 묘사되는 서법(書法)에서 그 정점을 드러내고 있다. 선의 정신은 곧 예술적 감성과 바로 맞닿아 있다. 선방 구조의 단순함과 장식의 간결함은 반드시 수행 생활의 단순함의 산물이라기보다 선(禪)정신의 예술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종교적 심성은 곧 예술적 감수성인 것이다. 그리고 타 종교인과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바로 이러한 예술적 감수성을 통해 더욱 더 확대해 갈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이 불교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는 어렵듯이 불교 경전의 가르침이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감화를 주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성화(聖畵)의 아름다움을 통해 기독교의 사랑의 가르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듯이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을 통해 타종교인들에게 자비의 가르침을 전달하기란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절에서 마음의 휴식과 평온을 느끼는 것은 불교인들만이 아니다. 많은 다른 종교인들도 절에서 평화로운 영혼을 느끼며 마음이 열리고 따듯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절이 숲에 위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절 건축물이 가지는 불교 특유의 예술적 감성 때문이다. 또한 저 유명한 미륵반가사유상 아름다움을 생각해보라.

그 균형미와 미소의 절묘한 아름다움을. 그 아름다움은 ‘미륵’의 불교적 의미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그 조각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불교인들만이 아니다. 종교라고 하는 ‘편협한’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인류의 유산인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통해 전달되는 그 ‘무엇’은 특정 종교 이상의 것으로 ‘종교’라는 ‘특수’를 넘어서는 것이다.

종교와 아름다움의 긴밀성은 비단 잘 알려진 예술적 작품에서만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테면 크리스마스트리는 성탄절에 관련된 것이면서도 이제는 겨울 도시의 한 풍경이기도하다.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가 연말을 맞은 도시인들에게 주는 것은 종교적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적 상징물이 항상 아름다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한국 도시의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네온 십자가들이 주는 이미지는 아름다움하고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인들조차도 그 ‘추함’에 분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제부터인가 매년 부처님오신 날에 등장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불교의 연등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성탄절을 알리듯 연등은 부처님 오신 날을 알리는 불교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본래 연꽃은 그 자체의 고결한 아름다움도 그러하거니와 그 서식 환경의 상징성으로 불교의 전통적인 상징물이다.

진흙탕물 위로 꽃 대궁이 솟아올라 아름답게 피어 있는 연꽃은 이 오탁악세에 태어나 청정한 삶을 보여주신 부처님을 상징하기도하고, 또 그 연꽃의 절묘한 향기는 부처님 가르침의 향기에 은유되기도 하고 깨달음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등(燈)은 주위를 밝힌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진리의 가르침을 면면히 이어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력 오월이 가까이 오면 각 사찰의 신도회가 바빠지는 것도 바로 이 연등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투명의 얇은 색지를 접어 연잎을 하나하나 붙여나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일부 사찰들과 시청 광장과 같은 도심 중심지에는 일손이 모자라서인지 공장에서 대량 생산 한 것 같은 플라스틱 연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친환경적이어야 할 불교의 행사에 플라스틱과 같은 반환경적인 재질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그 조야한 색깔과 조잡한 모양도 문제이다. 시청 광장과 같은 공공장소에 불교 행사를 위한 조형물을 설치한다는 것은 그 설치물의 미추(美醜)가 단지 불교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불교적 아름다움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줄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곧 종교적 감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연등을 설치한 다는 것은 곧 부처님 오신 날의 진정한 의미를 불교인은 물론 불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어지럽게 번쩍이는 네온 십자가를 보면서 감동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조야한 색깔의 플라스틱 연등에서는 아름다움은커녕 어떤 종교적 감동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내년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위해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우선 인사동이나 시청 주변과 같은 서울의 주요 일부 지역을 “아름다운 연등” 설치의 시범지역으로 정해 참가를 원하는 재가 불교 단체에서 각 단체가 맡은 지역을 책임지고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다. 또한 이번 기회에 연등을 비슷한 모양으로만 제작하지 말고 그 모양이나 색깔을 ‘불교적’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좀더 현대적 감각과 도회적인 감각으로 변형된 다양한 형태의 ‘예술적’ 연등을 선보여 젊은 세대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연등이 많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계에서 주관하는 연등제작 콘테스트 같은 것이나 아니면 예술에 종사하는 불교인들이 함께 의논하여 새로운 연등의 모델을 몇 가지 제시하는 것도 생각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포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움을 통해 불교를 보여주는 것은 한국 불교의 미래를 생각 할 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새로운 예술적 감성의 한국인들에게 어필해야 함은 물론 친환경적이어야 할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2004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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