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옥선,<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평자는 불교윤리학을 전공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서평은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까닭에 평자는 불교윤리학의 입장에서 지극히 중요하게 취급하는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격의 예기치 못한 서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사태는 머리말에서부터 발생하는 듯하다. 저자는 《금강경》의 목적과 관련하여, “수보리는 불교의 궁극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윤리적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내어야 하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고 기술한다. 여기에서 평자는 이 문구 안에 왜 ‘윤리적 인간’이라는 표현이 들어가야 하는지 거부감을 감출 수 없다.

과연 앙굴리말라(An?ulima?a)는 윤리적인 인간이었던가? 더불어 불교 교단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빔비사라(Bimbisa?a) 대왕을 위시하여, 아쇼카(As쳍ka) 대왕 등은 원래부터 인륜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던가. 괜스레 ‘윤리적 인간’이라는 자의적 번역어로 인해 평자와 같이 어중간한 사람은 《금강경》의 수혜 대상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지 않는가?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욱 크게 노정된다. 즉 “[붓다가] 권유했던 삶은 일상의 한 중심에서 단 한순간도 방일하지 않는 선한(kusala) 삶이었다. 이러한 삶만이 자신과 타인을 행복/자유(nibba?a)에로 이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라는 대목에서이다. 과연 부처님께서 권유하신 삶을 ‘일상의 한 중심’으로 회귀할 수 있는 문제인가. 더불어 ‘자신과 타인의 행복’이라는 표현에는 또한 얼마나 많은 오해의 여지가 잠재되어 있는가.

평자 또한 초기불교의 문헌들을 접하고 있지만, 우리가 쉽사리 생각하곤 하는 ‘일상의 한 중심’에 대해 부처님께서 언급하신 적은 드물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선한 법(kusala dhamma)은 오로지 열반의 실현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따라서 일상의 삶 자체는 침묵의 대상이었다고 보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아닐까 싶다. ‘선한 사람(kusala, kulaputta)’이란 윤리적 인간이라기 보다는 열반의 가망성을 보이는 사람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평자에게 이렇게 다가온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는 출발 선상에서부터 삐걱거리는 심사를 노출시킨다. 그러나 저자에 의해 비로소 분명하게 제시되는 ‘덕 윤리(virtue ethic)’의 패러다임은 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귀기울여야 할 내용임에는 분명하다. 동일한 맥락에서 부처님께서 가르친 도덕적 삶의 목적을 “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성품을 성취하는 것”으로 명쾌히 규정한 것 또한 탁월한 식견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은 부적절한 서평에 직면한 평자의 상황에 대해서도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저자는 초기불교윤리에 접근하는 자신의 태도를 시대적·맥락적·주관적인 것으로 해명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불교윤리의 독특성과 고유성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며, 또한 현대 윤리학에 대한 기여도를 높이는 데 있어서도 충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맥락으로부터 접근해 나아갈 때,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격리·소외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안옥선 선생님은 바로 이러한 기본 입장을 통해 다년에 걸친 학문적 노고를 응결시키고 있다. 자신의 입장에 대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스스로의 해명은 “세계의 성립은 우리의 주관과 함께 시작된다”는 가르침을 염두에 둔 것으로도 판단이 된다. 주관·객관이 시작됨으로 인해 세계가 성립된다는 전제를 도외시 할 때, 불교란 개인의 문제를 최우선에 두는 이기적인 종교가 되고 만다.

소박한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세계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주관과 객관이 싹튼다. 따라서 그들에게 무명(avijja?이란 원래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특정 개인이 갖는 편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그들에게서 초기불교윤리는 말 그대로 소승의 그것에 불과하다. 열반의 실현이란 자신의 내면 문제에 천착한 몇몇 개인들만의 성취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나 무명이란 개인의 존재를 성립케 하는 원인임과 동시에 현실 삶의 고통을 야기하는 근원이다. 무명이 지니는 이러한 의미는 초기불교의 모든 가르침에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기본 전제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무명의 제거는 개인 존재에 의한 이기적 삶의 해체를 의미한다. 무명의 제거가 곧 이타적인 자비(karua?의 윤리로 전향될 수 있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저자의 입장에 따르면, 불교의 모든 수행은 ‘탐·진·치의 지멸’을 내용과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탐·진·치의 지멸’은 품성의 해체적 측면을 표현한 것이고, 이를 적극적이고 구성적 관점에서 묘사하면 ‘자비심의 배양’이 된다. 따라서 탐·진·치의 지멸과 자비심의 배양은 표현이 다를 뿐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입각점 위에 서서 초기불교윤리의 특징을 ‘덕 윤리의 패러다임’으로 본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그러한 덕윤리의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할애되고 있다. 즉 제1부·제2부·제4부의 내용이 대략 그러하다. 탐·진·치의 지멸은 도덕적 삶의 완성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곧 초기불교 가르침의 전 영역으로 확장된다. 연기와 무아의 개념은 자신과 타자 그 어느 쪽도 고립적·독립적 구조 속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일깨워 자리와 이타의 공존적 자비를 당위로써 요청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서양의 주류 윤리학을 이루는 ‘규범주의 윤리학’이라든가 ‘공리주의 윤리학’과 궤도를 달리한다. 주류 윤리학의 주된 관심은 “무엇이 옳으며 그 옳음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있었던 반면에, 저자가 주창한 덕 윤리의 패러다임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모은다. 규범주의 윤리학이 개인통제를 본질로 하는 것임에 반해, 덕윤리는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성품의 형성, 즉 ‘자기전환(parin.a?a)’을 본질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탐·진·치가 지멸된 성품을 성취한 사람은 초기불교윤리가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아라한(arahant)’이다. 탐·진·치가 지멸된 성품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열반을 성취하고 또한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도덕적이기 위해 더 이상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직 선하기만 한 성향으로 변형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선행은 무의식적으로 자연히 일어난다.

아라한에게서 도덕은 자신의 욕구와 갈등이 없는 절제 상태에 있을 뿐, 욕구와 갈등하는 억제상태에 있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늘 행복과 합치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그에게서 삶은 곧 그 자체로서 도덕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탐·진·치가 지멸된 성품의 형성을 기조로 하는 덕 윤리의 패러다임은 아라한이라는 이상적 존재와 결합함으로써 더욱 완결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평자는 저자가 내세운 이러한 덕 윤리의 패러다임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접근해 나가기 위한 충실한 모색의 하나로 높이 평가한다. 더불어 이러한 시도는 초기불교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탐·진·치의 지멸이 갖는 이타적 의미에 대한 조명은 소승불교라는 그간의 폄칭이 아무런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는 듯하다.

그러나 평자는 이러한 저자의 입장 또한 불교에 접근해 나가는 여러 모색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고 본다. 과연 초기불교윤리는 ‘규범주의 윤리학’이라든가 ‘공리주의 윤리학’의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가. 《율장(Vinayapit.aka)》에 제시된 그 많은 조목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불어 승가(san?ha)의 전체 구성원 중에서 이상향으로 추앙을 받는 아라한의 존재는 과연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였는가.

아라한(arahant)의 원어적 의미는 ‘마땅히 공양 받을 만한 분(應供)’이다. 따라서 아라한이란 외부의 다수에게 그렇게 불리우는 존재를 칭할 뿐이다. 또한 공양을 올리는 주체는 결코 아라한 자신이 아니며 탐·진·치에 물든 채 살아가는 일반 범부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아라한을 정점에 둔 저자의 입장은 덕 윤리의 구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불러 일으킨다.

탐·진·치의 지멸을 위한 자기절제는 분명 덕 윤리의 패러다임 선상에 놓인다. 그러나 자기절제를 위한 계율의 준수와 무소유의 삶은 단순한 덕 윤리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면을 지닌다. 초기불교의 승가구성에서 아라한은 분명 소수의 위치를 점했을 것이다. 따라서 계율은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외적인 강제로서의 기능도 함께 지녔다고 보아야 한다. 더불어 철저한 무소유는 매일 누군가에게 보시를 받아야만 삶을 존속할 수 있는 의존적 형식을 내포한다.

초기불교 승단의 이러한 구조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사회적 존재로 환기시키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시(da?a)와 복전(pun??kkhetta)에 관련된 가르침은 초기불교윤리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중요한 항목이 된다. 즉 출가자로서의 ‘나’를 대상으로 한 가르침이 이기적 삶의 해체에 비중을 둔 반면에, 재가자로서의 ‘나’를 대상으로 한 가르침은 그러한 해체를 넘어 복전에 대한 실천행으로까지 연결되는 구체성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혜자로부터 설해지는 보시와 복전의 교설은 자칫 오해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자발적인 보시를 가능케 하는 승단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중대한 사회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 승단에 의한 복전의 역할은 출가자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승단 스스로를 자비 실천의 구체적 대상으로 위치케 한다. 이러한 승단 존재의 사회 윤리적 기능은 초기불교의 제반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책의 후반부, 즉 제3부·제5부·제6부는 이상의 덕 윤리적 패러다임이 초기불교 이외의 제반 영역으로 어떻게 확대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끝내 복전이라든가 보시와 같은 개념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한 후반부를 이루는 각각의 장은 평소 저자가 생각해왔던 현실에의 모색으로 여겨진다. 나름대로 충분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전체적인 서평을 맺는 시점에서, 이 책은 저자 자신의 문제의식에 투철한 초기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

임승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 졸업.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논문으로 〈대념처경의 이해〉 〈선정의 문제에 대한 고찰〉 〈마음지킴의 용례와 위상에 대한 재검토〉 등이 있고, 역서 및 저서로 《바가바드기타 강독》 《빠띠삼비다막가 역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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