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용수와 칸트>

1. 책의 특징과 주요 논점

동양인이지만 서양문화에 더 익숙하고 서양화와 다를 바 없는 세계화로 돌진해가는 우리. 문득 자신의 역사와 사상의 연원을 묻고자 하면 허전해져서 동양철학 또는 동서사상의 비교, 융합, 절충 등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정작 동서비교철학의 서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동양사상의 정수랄 수 있는 불교, 그 중에서도 그 핵심인 중관사상의 대표자 용수와 서양철학의 대표적 인물이랄 수 있는 칸트를 비교 논의하는 연구서가 나온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이 책은 여러 명이 각각 쓴 논문들을 하나로 엮어 냈다거나 또는 한 명이 여러 편의 논문들을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짜맞춘 그런 식의 책이 아니다.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논지를 유지하면서 짜임새있는 구도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정성을 들인 책이라고 여겨진다.

본 책은 시작하는 글과 마치는 글을 제외하면 세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세 장이 서로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용수와 칸트 둘 다 실재론적 경향을 비판한다는 것(제1장), 그러면서 인식의 한계를 간파했다는 것(제2장),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실천적 극복을 설한다는 것(제3장)이 각 장의 주요 요지이다. 그러면서 각 장의 제1절은 용수를, 제2절은 칸트를 다루고, 그리고 나서 제3절에서 둘을 비교하는데, 비교에서는 제1, 2절의 논의를 근거로 그 둘 간의 공통점 이외에 차별적 특징까지도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용수와 칸트에 의해 비판받는 실재론이 그 내용에 있어 각기 서로 다르다는 것, 따라서 그들 각각이 비판의 근거로 취하는 반실재론적 관점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용수는 ‘공과 연기론’에 입각해서 설일체유부의 ‘범주적 실재론’(현상의 요소인 다르마가 실재한다는 관점)을 비판하며, 칸트는 ‘주관적 구성주의’에 입각해서 합리론자 및 경험론자의 ‘모사주의적 실재론’(인식이 실재 자체를 반영한다는 관점)을 비판한다.

제2장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이 절대적이지 않고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논하는데, 그러한 인식의 한계는 용수에게서는 허구적 희론을 형성하는 고정적 개념화 탓에 우리가 연기와 공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며, 칸트에게서는 인식의 주관적 형식 탓에 그렇게 구성된 현상 너머의 ‘물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3장은 인간이 그런 인식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논하는데, 둘 다 ‘실천적 극복’을 설하지만 이 때의 실천이 용수에게서는 반야바라밀과 그에 입각한 자비를 뜻하고, 칸트에게서는 자유에 의해 확립되는 도덕성에 입각해 신과 영혼불멸을 요청하는 실천적 신앙을 뜻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논의를 통해 저자가 용수와 칸트의 궁극적 차이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칸트의 철학이 “초월적 관념론과 경험적 실재론의 이원성”,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성”, “자연 인과와 자유(자발성)의 이원성” 등으로 귀결되는 “이원성의 철학”인데 반해, 용수의 철학은 “관념론도 실재론도 아닌 비이원성”, “현상즉본제의 비이원성”, “주객미분의 무심” 등 불이(不二)의 철학, “비이원적 중도의 무아관”이라는 것이다.

각 부분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상세히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용수와 칸트철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있지 않다고 해도 기본적인 인문학적 내지 철학적 소양과 관심이 있다면 각 사상의 기본 골격 및 비교되는 특징들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저자가 뚜렷한 문제의식과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서술해 나가므로 누구나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용수와 칸트철학의 차이, 동서사유의 특징적 차이를 진지하게 되물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아주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평자 역시 이 책을 기회로 용수와 칸트 철학에 대해 여러 생각을 떠올리며 그들의 동이점에 대해 숙고해보게 되었음을 저자에게 감사한다. 이하에서는 평자와의 관점 차이를 통해 저자의 관점을 좀더 분명하게 부각시킬 겸, 더불어 요구된 평자로서의 역할도 해낼 겸, 몇 가지 의문점들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2. 몇 가지 문제제기

1) 칸트와 관련하여
저자는 칸트의 “주관적 구성주의”(52)를 “물체는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현상이라고 이해하는 이론”(75)이라고 보며, 칸트 역시 용수와 마찬가지로 “마음이나 인식 주관 밖의 절대적 실재를 부정한다”(87)고 말한다. 이는 존재론적 해석 아닌가? 그러면서도 저자는 또한 칸트의 구성주의가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적 구성주의”(62)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결코 대상의 존재 부정이 아님”(70)을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 대상을 현상과 구분되는 물자체, “감성을 촉발시키는 그 어떤 것”(95)으로서의 물자체로 해석한다(물론 저자가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셋으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성을 말할 때는 주로 촉발자로서의 객관 자체를 말하고 있다). 주관적 형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인식대상으로서의 현상일 뿐, 대상 자체는 구성되지 않고 따라서 인식되지도 않지만, 그래도 ‘물자체’로서 현상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칸트철학은 다시 “현상 이면의 실재를 암암리에 전제하는 …… 기체-용인적 현상론”(152-3)으로 간주된다.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현상은 무의 현상일 것이며, 따라서 현상은 현상이 아니라 가상”(91)으로 되겠기에, 이를 피하기 위해 칸트가 현상 너머 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성이 “초월적 관념론과 경험적 실재론의 이원론”(72, 95)으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평자는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이 정말 저자가 논하는 식대로 현상 너머의 물자체를 상정한 이원성의 철학인지 의심스럽다. 우선 칸트가 데카르트의 ‘질료적 관념론’(또는 초월적 실재론=경험적 관념론)을 비판하며 ‘대상이 실재한다’고 할 때, 그가 인정한 ‘실재하는 대상’은 바로 시공간적 대상인 현상, 즉 우리의 인식 형식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을 말한 것이지, 현상 너머의 객관 자체, 물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대로 “초월적 관념론은 외적 직관의 대상은 그것이 공간 중에 직관되는 그대로 ……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74)이다. 즉 칸트가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현상으로서의 외적 직관대상(현상으로서의 내적 직관대상도 마찬가지임)인데, 저자는 그 실재하는 대상을 마치 현상 너머의 물자체인 듯 해석함으로써 칸트철학을 현상-(객관)물자체의 이원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대상이 현상이지 가상이 아니라는 칸트의 주장도 저자 말대로 현상 너머의 물자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91, 131, 151),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본다. 칸트는 현상과 구분되는 그 자체 인식될 수 없는 물자체를 인정할 경우, 객관적 존재(물자체)와 주관적 인식(현상)이라는 이원성 속에서 오히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이 가상이 되고 만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상 너머 물자체를 인정하는 초월적 실재론이 오히려 인식론상으로 회의주의에 빠지고, 현상을 가상으로 간주하게 되는 경험적 관념론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칸트철학을 현상과 (객관)물자체의 이원론 내지 이원성의 철학으로 해석하면서 그 결정적 단서를 “초월적 관념론과 경험적 실재론의 이원성”(72, 95)에서 구하는 것 같다. A370의 구절을 “초월적 관념론자는 경험적 실재론자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듯 이원론자이다”(72)라고 해석함으로써, 칸트를 이원론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초월적 관념론이 경험적 실재론이라는 칸트의 주장은 이원론적 주장이 아니다. 이 현상세계(시공간적 사물세계)는 초월적 관점에서 보면 주관독립적 실체,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라는 것, 따라서 관념론이지만, 그러나 경험적 관점에서 보면 그 현상세계가 현실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에서 실재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교가 우리의 오온 및 세간이 진제로 보면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며 따라서 무아이지만, 속제로 보면 연기화합물로서 엄연히 존재하므로 유이고 따라서 유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용 구절에서 칸트가 이원론이라고 말한 것은 ‘초월적 관념론과 경험적 실재론의 이원론’이 아니라, ‘경험적 실재론이 소위 이원론’이라는 말이다.

경험적 관점에서 보면 이 현상세계는 주와 객, 물질과 정신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 이 현상세계가 분별적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그런 분별적 이원성이 경험적 차원에서만 성립하지 초월적 관념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이원적 분별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즉 초월적 관념론은 현상적인 물리와 심리, 색과 심, 능과 소의 상대적 분별을 넘어선 관점을 뜻하는 것이다.

2) 용수와 관련하여
저자는 용수를 따라 우주의 근본 이법으로서의 연기를 모든 현상의 발생 과정을 뜻하는 외인연과 유정의 고통의 발생소멸 과정을 보여주는 내인연 둘로 구분한다(47이하). 그러면서 “[내인연인] 십이연기가 인식론적인데 반해 [외인연으로서의 연기관은] 존재론적이다”(49)라고 주장함으로써 인식이 진행되는 내적 심리세계와 인식과 무관한 외적 존재세계를 구분한다.

즉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서의 존재는 공과 연기의 무자성의 세계일 뿐인데, 우리 인간은 고정적인 개념적 틀에 따라 사유함으로써 그런 세계를 자성적 존재로 실체화하여 아상과 법상의 왜곡된 세계인식을 갖게 되고 따라서 그런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2연기를 “유심적 관념론”(87)이라고 하면서도 저자는 “마음이 지었다고 하나, 지어진 것은 대상에 대한 분별성과 집착성이지, 그 대상의 존재성이 아니다”(88)라고 하여 대상세계는 우리의 분별이나 집착과 독립적으로 외인연에 따라 존재하는 “연기적 실재론”(90)이라고 칭한다.

다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 자체가 무자성의 상호의존적인 연기세계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며 그 너머에 물자체를 다시 상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용수의 관점이 칸트의 이원론과 구분되는 불이의 철학이라는 것이다(93).

그런데 우리가 주관적 형식을 통해 인식하는 현상세계 너머에 우리를 촉발하는 기체로서의 객관적 물자체를 칸트가 다시 상정했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오히려 저자 방식대로 용수를 읽을 경우, 우리가 우리의 분별적 개념틀에 따라 인식하는 (내인연으로 성립하는) 인식세계 너머에 외인연에 따라 성립하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의 존재세계가 설정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

즉 세계를 유정의 업의 산물인 정보(正報)와 의보(依報)가 아니라, 그런 번뇌나 업과는 무관한 우주 자체의 존재론적 원리(외인연)에 따라 연기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오히려 인식된 현상세계 너머에다 마음 밖의 실재, 물자체를 “암암리에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자는 저자가 인식론을 존재론과 구분하면서, 12연기, 유정의 업과 보, 윤회와 해탈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이 아닌 단순한 심리적 고통의 발생과 치유라는 인식론적 차원으로만 국한하여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럴 경우 불교는 유정의 생사와 세간의 존재 자체를 논하는 형이상학 내지 구원의 종교이기를 그만두고 단순히 인간의 내적 심리적 고통의 발생과 치유만을 논하는 심리분석에 그치고 말게 되겠기 때문이다.

저자가 용수에서의 마음을 “순수성이 전혀 없는 망심”(95)만으로 읽는 것, “마음이란 분별심, 무명심, 망심을 의미한다”(87)고 단정하며, “여래장, 자성청정심” 등을 용수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마음을 단순히 존재를 가리는 번뇌라는 심리적 인식 차원에만 국한하여 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 용수와 칸트를 함께 생각하며
① 사실 궁금한 것은 칸트나 용수가 세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보다 저자 자신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 이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때 이미 시공이나 범주 등 주관적 형식에 따라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용수 역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때 우리 자신의 상대적이고 분별적인 개념에 따라 인식하기에 희론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칸트가 말하는 인식의 주관적 틀과 용수의 분별적 개념의 틀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가? 누가 우리의 인식의 실상을 바로 파악하였는가? 저자가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기 위해 벗어야 할 분별적 틀이란 용수적 집착 분별에만 해당하는가, 칸트적 형식에도 해당하는가?

② 형이상학적으로 보다 의미있는 물음은 사실 현상 너머 객관적 물자체이기 보다는(평자 생각에 그런 물자체는 없다. 칸트나 용수는 둘 다 이점을 바로 간파하였다), 현상 너머로 고양된 정신이 추구하는 무제약적 실재, 자유나 신 또는 해탈의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칸트의 ‘이원성’과 불교의 ‘불이’의 참된 의미는 바로 이 차원에서 해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칸트는 우리의 인식이 우리 자신의 직관 내지 사유 조건에 의해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제약된 현상이 아닌 무제약자(절대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믿고 바랄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현상 너머에 우리에게 불멸하는 영혼이 있는 지, 신이 있는 지 등은 알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칸트에게서는 유한과 무한, 인간과 신이 하나가 아니기에 그의 철학은 이원성의 철학이 된다.

그런데 저자는 용수를 해석하면서 “인과 법칙에 본제란 존재하지 않으니, 칸트식의 인과 계열상의 최초 시작은 인정될 수 없다”(222), “불교는 무제약적 원인의 가정을 허용치 않고 서로 제약하는 현상들의 계열을 무한히 소급해갈 것만을 가르쳐 준다”(223)라고 말한다. 저자 말대로 이는 칸트 이율배반 중의 반정립일 뿐이며, 시공간적 구조속에 드러나는 현상세계일 뿐이다. 저자가 연기는 “선후 관계를 뒤섞은” “비선형적 되먹임구조”(228)로서 칸트 식의 “직선적 시간 관계상의 인과”(229)와는 구분된다고 강조하지만, 인과 관계가 동시적 상호인과 관계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둘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우주적 인과 법칙에 따라 상호의존적으로 규정되는 필연성의 현상세계 외에 남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런데 불교가 정말 그런 연기의 세계만을 인정하는 것일까? 연기가 생멸의 원리라면, 공이나 진여는 본래 불생불멸의 것이며, 진여심은 불생불멸의 자성청정심이다. 그런데 일체를 연기적 상의상관 관계로만 간주한다면, 윤회를 벗는 해탈이란 아예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로 “윤회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222)고 한다면, 그럼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나는 후생을 받지 않음을 안다”(我生已盡 自知不受後生)는 석가의 말은 무얼 뜻한단 말인가?

불교의 불이(不二)를 단순한 현상주의로 몰고 가서 인간의 자성청정심, 그리고 윤회를 벗는 해탈가능성을 부정한다면, 그래도 그것이 불교의 정신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영원히 윤회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 안에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불성이나 여래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마음이 단지 망심(妄心)일 뿐이라면, 한마디로 인간이 그렇게 철저하게 연기의 상호관계망에 의해 규정된 유한한 존재일 뿐이라면, 오히려 칸트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인과의 무한소급이 끝나는 지 계속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유한자 아닌 절대자, 인간 아닌 신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스스로 무한자가 아니라면, 무한소급에 끝이 있는 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석가 자신의 깨달음이 무한소급의 현상 차원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신적 지혜에 이른 것이 아니라면, 석가 자신이 소위 신적 존재가 아니라면, 유정 바깥에 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 어떤 것의 비존재를 어떻게 증명해낼 수가 있겠는가?

석가가 깨달음을 통해 그런 신적 지혜에 이르렀기에, 석가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었기에, 우리는 석가의 깨달음을 무상정각이라고 하고, 유한과 무한, 인간과 신, 상대와 절대가 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불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석가를 통해 우리 또한 누구나 바르게 수행하는 한 그런 신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 ■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석사)을 졸업. 독일 프라이브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칸트철학)를 취득한 다음,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불교철학)를 취득.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로는 《칸트와 초월철학》 《자아의 연구》 《자아의 탐색》 《유식무경》 《동서양의 인간이해》 《일심의 철학》이 있고, 역서로는 《전체 지식론의 기초》 《인간의 사명》 《인간 자유의 본질》 《자연철학의 이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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