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funda-mentalism)라는 낱말을 특정 종교 뒤에 붙여놓으면 왠지 편협한 광기와 과격한 폭력주의가 떠오른다. 이는 아마도 그 동안 이 용어와 결합된 ‘기독교 근본주의’ 또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닌게아니라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근본주의나 원리주의는 교조적 주장에 충실하고자 하는 보수적이고 융통성 없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돼온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기독교 근본주의는 축자영감설에 입각한 성경해석을 양보할 수 없는 기준으로 내세운다. 교부시대의 이레나이우스의 주장에 뿌리를 둔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한자 한자는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므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서무류론(聖書無謬論), 예수의 처녀강탄(處女降誕), 육체적 부활, 예수의 속죄사(贖罪死), 예수의 이적(異跡) 등 다섯 가지를 진리라고 주장한다.

또 그 같은 주장을 역사적·과학적으로 실증하기 위하여 수많은 궤변을 만들어냈다. 설사 오늘날의 과학적 진리나 역사적 사실과 위배된다고 하더라도 성경대로 믿어야 참다운 신앙인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단을 심판하고 객관적 진리를 부정한 사례들은 모두 이 같은 근본주의적 고집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슬람 원리주의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슬람은 교리상으로는 기독교의 모세와 예수를 선지자로서 인정하면서도 마지막 선지자인 무하마드를 믿는 자신들이 가장 정통적이라고 강조한다. ‘칼이냐 코란이냐’는 이슬람의 종교적 도그마가 얼마나 철저한가를 말해준다. 그런데도 현대의 이슬람은 기독교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문명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다.

원인은 무하마드의 교리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대리인인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충실히 믿기만 하면 서구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서구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테러리즘을 택하기도 한다.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싸운다는 ‘지하드’와 같은 무장투쟁 세력이 그것이다.

서양종교에서 근본주의란 이러한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타기(唾棄)되어 마땅한 대상이다. 과학적 이성과 합리주의가 상식인 세상에서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실을 진리로 믿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현실의 빈곤이나 불행이 신을 제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다는 식의 발상은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또 하나의 혹세무민에 다름 아니다. 서양종교에서 원리주의나 근본주의는 보다 새롭고 폭넓은 해석을 용인하는 관용주의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 대목에서 정당성이 획득된다.

하지만 이 문제를 불교에 대입시키면 결론은 그 반대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 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 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 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불교가 근본주의를 채택하면 서양종교와 비슷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기우다. 불교는 서양종교와 차원과 성질이 다르다. 서양종교 특히 유신종교는 원천적으로 그 주장하는 진리에 많은 문제가 있다. 처녀강탄이나 육체적 부활을 글자그대로 믿으라는 것은 무지의 강요다.

이런 근본주의는 당연히 비판받고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도입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옳다. 이에 비해 불교는 대중들의 입맛에 맞춰 교리를 해석하는 것이 더 문제다. 교리가 불용하는 허황한 신화를 만들어내서 진실인 듯 말하는 경우가 좋은 예다. 불교의 문제는 교리 해석을 엄격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멋대로의 해석과 관용주의를 용인하는 데 있다.

불교의 교리사는 이 점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 돌아보면 그 동안 불교를 왜곡하고 변질시킨 주범은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사상체계를 멋대로 변조한 사람들은 불교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데 소홀했으며, 자의적 해석이 틈입할 여지를 만들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불교가 종교의 백화점으로 일컫는 인도에서 새로운 종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성 때문이었다.

재래의 인도종교가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로 나뉘어 극단적인 쾌락주의나 고행주의에 빠져 있을 때 불교는 제3의 길인 중도주의를 선택함으로써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보여주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모습은 중아함 3권 13경 《도경(度經)》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부처님은 이 경전에서 재래의 종교사상을 이렇게 비판했다.

“세상의 지혜 있다는 사람들은 세 가지 그릇된 주장을 한다. 첫째는 일체가 다 숙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일체가 다 존우의 뜻에 의한 것이며, 셋째는 일체가 인도 없고 연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주장은 진리가 아니며 옳지 않다. 만약 사람이 행하는 일체가 숙명으로 이루어졌다거나, 존우의 뜻에 의한 것이라거나, 인도 없고 연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사람들은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과 같은 10가지 악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숙명적이거나, 존우의 뜻에 의한 것이거나, 인도 없고 연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에서 요약한 숙명론(宿命論)·신의론(神意論)·우연론(偶然論)은 아직도 일반적 종교사상에 관통하는 흐름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삼종외도(三種外道)라 하여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했다. 이 세상이 신의 뜻에 의해 지배된다거나, 운명에 의해 결정돼 있다는 믿음은 어리석다는 비판이다. 그 대신 불교는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이 합해서 생겨난다는 연기론(緣起論)을 내세운다. 연기의 진리야말로 역사와 운명을 창조하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불교는 이러한 본래의 입장과는 다르게 전개되어왔다. 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인간의 행불행 문제를 숙명론적으로 설명하기 예사였다. 불보살은 절대적 능력을 가진 신과 같으니 그 앞에서 길흉화복을 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심지어는 거짓 경전을 만들면서까지 부처님이 부정했던 입장을 뒤집고 외도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교리발달사는 안타깝게도 부분적이나마 교리왜곡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각국에 전파된 불교를 형식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과 신행의 문제에서 변질의 정도를 검사해보면 이 지적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 왜곡되고 변질된 불교는 어떻게 하든 자기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온갖 요란한 수사와 변명으로 문제를 호도하려 든다. 이른바 방편론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법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 본래 뜻에 합당한 방편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중적 욕망에 추수하는 포퓰리즘에 빠져 전도몽상의 함정에 깊게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교 본래의 목적인 전미개오(轉迷開悟)와 성불해탈(成佛解脫)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길을 찾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불교의 출발지점이 어디인지, 목적지는 어디인지를 거듭 확인해보는 것이다. 그러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교적 덜 왜곡된 형태로 담겨 있는 경전들을 찾아 읽고, 이에 근거한 교리 해석과 실천을 해나가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설사 현재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은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불교를 재단하려 하지 말고, 부처님의 입장에서 현재의 불교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불교’를 내세우는 근본주의에 대해 자칫하면 문자주의나 법집(法執)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식으로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할 의도가 아니라면, 그리고 현재의 잘못된 모습을 변호하기 위한 억지가 아니라면 그런 반론은 적절치 않다.

불교 근본주의는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지 말장난이나 하는 희론(戱論)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던 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처지에서는 경구 한 줄이라도 조심스럽게 해석하는 겸손이야말로 외도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 펜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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