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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불교의 실태와 문제점 / 한명우
[ 특집 ] 기복불교를 말한다
[7호] 2001년 06월 10일 (일) 한명우 현대불교신문 기자

1. 들어가는 말

불자가 아닌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불교를 개인 차원의 기복적 신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심한 경우에는 불교를 무속신앙과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냉정하게 말하면 불교를 기복신앙으로 받아들이고 행하는 불교도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7년여 간 불교계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는 필자가 보기에 대부분의 불자들은 외형적으로는 절에 잘 다니며, 불교공부도 열심히 한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기복적 심성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많은 불교도들의 신앙이 아직도 기복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복(祈福)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복을 내려주기를 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함과 무병장수를 바란다. 복을 기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또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기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기복이 아닌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를 따져본다면 복을 바라는 것이 크게 탓할 일만도 아닌 듯 여겨진다. 하지만 복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복이 무엇인가? 병 없이 오래 살고 풍부한 재물을 누리며 권세와 지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와 내 가족이 이런 모든 것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겠다는 바람이고, 그것을 비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 또는 ‘내 가족’이라는 이기적 욕구와 소유욕이 내재돼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제 가족이나 자손밖에 모르는 철저한 개인주의이자 이기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불교의 궁극적 이상이 무엇인가를 돌아본다면 기복이 얼마나 비불교적인 행태인가를 알 수 있다. 불교는 초월적 절대자로부터 외호(外護)와 가피(加被)를 바라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의 궁극은 깨달음이고, 기복은 불교의 본질적 요소가 비본질적 요소로 전도된 것이다. 기복이라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도 불교 본래의 이타적 본질을 도외시한 채 이기적 성취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복불교의 실태는 어떠하며, 거기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례로 본 기복의 실태

불자들의 기복적인 신행 행태는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적이나 점에 의존하는 경우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기복행위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거나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행위 역시 기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며, 자식의 입시나 남편의 사업을 위해 하는 기도 역시 기복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천도재나 생전예수재는 보는 각도에 따라, 또 이를 행하는 불자들의 마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한마디로 ‘기복행위’로 규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많은 불자들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이 두 가지 재(齋)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분명 내재돼 있다.

필자가 만난 많은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돌이켜보면 기복불교의 때를 벗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취재차 만난 스님들도 불자들의 기복적인 신행생활을 염려하고 있었음을 상기하며,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기복불교의 실태를 분석해 본다.

1)대학입시·사업 번창 기원
불자들, 특히 여성불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기복신앙 형태는 바로 자식의 대학입시 합격 발원기도나 남편의 사업번창을 바라며 올리는 기도다. 해마다 입시철만 되면 큰 사찰, 작은 사찰 할 것 없이 대학입시 합격을 비는 불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사찰들은 앞다퉈 ‘대학입시 합격 발원 100일 기도’니 ‘철야정진기도’니 하면서 불자들이 마음놓고 빌 수 있도록 온갖 편의까지 제공한다.

입시합격 기도처로 유명한 서울의 모 사찰은 입시철이 임박하면 법당은 물론 법당 앞마당, 계단 할 것 없이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불자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초겨울의 문턱이라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불자들은 두꺼운 옷가지까지 준비해 와서는 ‘정성이 지극하면 합격한다’는 확신이라도 있는 듯 혼신을 다한다. 심지어는 시부모와 남편까지 네 식구가 함께 와서 손자와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 역시 입시철에는 갓바위로 오르는 길이 모두 인파로 뒤덮일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들은 급경사의 돌계단 길을 ‘우리 아들 딸 시험에 붙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갓바위 부처님을 찾아 오른다. 2시간씩이나 힘들게 걸어 올라가면서도 부정탈 세라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어려움을 견뎌낸다. 갓바위 부처가 영험이 있어 ‘정성껏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소문을 이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서, 혹은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축원을 하고 난 뒤 차분히 가라앉는 마음자리가 좋아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유독 입시철에 사람들로 붐빈다는 것은 합격을 빌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올해 초 대학입시가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서울의 한 사찰에서는 대학입시 합격발원 철야기도를 하는 도중 한밤중에 두 명의 여성 불자 간에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기도를 올리는 ‘자리’를 놓고 서로가 자기 자리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한 불자는 “잠시 쉬러 나갔다 온 사이에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상대방 불자는 “어제까지 여기가 내 자리였는데 무슨 소리냐.”며 맞고함을 쳤다. 아무것도 아닌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작년에 그 자리에서 기도를 올린 불자의 아들이 대학입시에 합격해 ‘합격보증자리’라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한 불자는 지난 6년 동안 꼭 2년마다 한두 달씩 인근 사찰엘 갔다. 4명의 자식이 모두 두 살 터울이다 보니 2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입시에서 아이들의 합격을 빌기 위해서였다. 위 세 명의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거나 재학중이고, 마지막 남은 막내 딸만 대학에 보내면 되는데, 이 불자는 필자가 불교계 신문기자인 줄을 알고는 입시에 영험이 있는 사찰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얼마전에 해왔다.

세 아이가 모두 대학에 가긴 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막내딸만은 원하는 대학에 꼭 들어가게 하고 싶어 이번에는 미리 기도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이 사람이 사찰에 다니면서 불자가 된 것도 자식들의 입시합격을 빌기 위해 사찰에 나가면서부터다.

말이 불자지 따지고 보면 불자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 이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경전을 읽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는 그런 상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자신처럼 열심히 기도하는 불자도 별로 없다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올해 초 취재차 만났던 한 불자는 남편의 사업이 신통치 않자 아내로서 내조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자신의 재적사찰에서 1백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기도로도 부족했던지, 주지스님에게 어떻게 하면 남편의 사업이 번창하겠느냐고 자문까지 구했다고 했다.

이 불자는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사찰에도 부지런히 다녀 주변에 도반들이 꽤 많은 편이었는데, 문제는 자신의 신행생활이 기복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도반들 중 남편사업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이런 일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 자손번창·질병 치유
어느 사찰엘 가나 산신각과 칠성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도교적인 신앙이 불교에 수용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자손 점지와 자손의 번영, 수명장수 등을 발원한다.
서울에 사는 한 불자는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자 다니던 직장도 그만둔 채 아이를 낳는 데 영험이 있다는 사찰을 찾아다닌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의학적으로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 아이를 갖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이를 점지해 달라는 기도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고 했다.

기도를 하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아픔이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교리공부와 수행에 열심이었던 이 불자의 신행생활은 아이를 얻길 바라는 기복적 기도로 변질돼 버렸다.

과거에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불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전국 도처에 산재해 있는 미륵 석불 대부분이 코가 멀쩡한 경우가 별로 없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아이를 못낳는 부녀자들이 미륵불의 코를 갈아 물에 타 마시거나 끓여서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속설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미륵불의 코가 수난을 당한 것은 바로 아이를 갖겠다는 기복적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나이가 많은 불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신앙이 전해지고 있다.

근래 들어 어떤 사찰에서는 아들을 점지한다는 명목 아래 ‘백일기도’나 ‘백일치성’을 드러내놓고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모일 모시에 합궁을 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처방 아닌 처방까지 해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웬만한 불자라면 한 번쯤은 해보았을 정도로 흔한 기복적 행태다. 불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병은 어떤 절에 가면 잘 낫는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떠돌아다니고 있고, 기도를 해서 병을 고쳤다는 영험담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얘기다. 필자 역시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최근까지 정신과에 다니던 구미의 한 불자는 치료에 진전이 없자 마침내 절을 찾았다. 병원에서 못 고친다면 부처님에게라도 의지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또 어떤 불자는 7년째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사찰에 가서 기도를 하고 있고, 어떤 불자는 아예 사찰에서 기거하며 치료를 위한 기도에 매달리고 있다. 질병치료에 영험이 있다는 어떤 사찰에서는 수십 명씩 집단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기도 하다.

3) 부적·점
2년 전 달마도가 수맥파를 차단한다는 방송이 나간 이후 달마도는 운수대통을 가져다주는 부적처럼 인기가 높았던 적이 있다. 그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아직도 달마도를 부적으로 여기고 이를 가정에 걸어두는 불자들이 많다. 필자도 어떤 불자에게 “집에 모셔두면 영험을 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달마도를 선물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불자는 달마도에 영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마도를 그리는 사람의 수행력이 더 값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새해 초하루나 정월 보름 법회 때면 대부분의 사찰에서 부적을 나누어준다. 액운을 없애기 위해 사찰에서 직접 제작한 부적을 요구하는 불자들이 많고, 사찰은 부적을 제공함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 필자의 주변사람 중에서도 지갑에 부적을 소지하고 다니는 불자들이 많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적이 액운을 막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 법을 따르거나, 참회와 정진이 목적이 아니라 부적을 구하기 위해 사찰에 오는 불자들도 적지 않다.

부적에는 점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1년여 전 모 종단의 지도자급 스님을 만났다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불자들은 연신 점을 봐달라고 요구했고, 스님은 자상하면서도 친절하게 점을 봐주며, 부적을 요구하는 불자들에게는 흔쾌히 부적을 내놓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전화로 20여 분 이상 통화하며 점을 봐주기도 했는데, 이날 점을 보러 온 한 불자는 “우리 스님, 용하기로 소문났다.”며 자랑하기까지 했다. 이 사찰에서는 경전을 읽거나 기도하는 불자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모두가 스님과의 상담순서를 기다리며, 스님이 어떤 처방을 내려줄지 궁금해 할 뿐이었다. 부처님 정법을 따르고 수행하는 도량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필자가 대구에 취재차 갔다가 만난 한 불자는 절에서 스님이 점을 봐주었는데, 시아버지 묏자리에 은을 묻어야 자식들이 잘 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형제들과 거리감이 생겼다고 했다. 60이 조금 넘은 이 불자는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신처럼 여기고, 사찰에 다니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사찰에 다니는 이유였다.

4) 천도재·생전예수재
군포시에 사는 한 불자는 병원에서조차 딱히 어떤 병이라고 진단하지 못한 채 갓 태어난 아이가 질환에 시달리자 평소 인연이 있었던 스님을 찾아갔다가 천도재를 권유받았다. 나쁜 업으로 천도가 안 된 영가에게 부처님 법문을 들려주어 천도케 함으로써 그 공덕으로 악업에서 벗어나면 아이의 병이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천도재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불자들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천도재는 보편화된 것이다.

천도재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했다고 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현재의 고통을 천도재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명 기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찰에서는 흔히 천도재가 망자를 위해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 말이 인과(因果)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즉, 누군가가 대신 공덕을 쌓아주고, 그래서 악업을 풀어줄 수 있다면 깨달음도 대신해 얻어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결국 천도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스스로 슬픔을 위로 받기 위한 것이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닌 셈이다.

물론 천도재를 스스로 참회하고 선행을 발원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딱히 나쁜 것이라거나 기복이라 말할 수는 없다. 재를 올리면서 모든 것이 잘 되길 바라기보다 현실의 고통이 탐욕과 그릇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그늘을 닦는 방편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신행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천도재를 행하는 불자들 대부분이 후자보다는 전자 쪽에 가깝다는 데 있다.

생전예수재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 대부분의 사찰들은 윤5월을 앞두고 생전예수재를 여는데, 생전예수재의 본래 의미는 자신의 업장을 씻고 선업 쌓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자들은 예수재를 지낸 공덕으로 자신과 가족이 편안하기를 기대한다.

불자들이 예수재의 본래 취지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올 4월 예수재 행사를 취재하면서 몇몇 불자에게 그 의미를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복을 비는 의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한 불자는 “집안에 자꾸 우환이 생겨 예수재를 지냈는데, 우환이 없어질지는 모르지만 마음만은 편하다.”고 했고, 또 다른 불자는 “내가 쌓은 업장을 소멸해야 자식들이 잘 될 것 같아 예수재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뜻있는 스님과 불자들은 예수재 본래의 의미가 잘못 받아들여져 기복으로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3. 기복불교의 문제점

1) 교리의 왜곡
불교는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成佛)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나 자신을 문제 삼아 스스로 언행과 마음을 잘 다스려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다른 힘에 의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 즉 절대자에 의지하고 그의 힘에 의해 내 자신의 일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타력신앙과는 정반대의 가치관을 띠고 있다. 바꿔 말하면 불교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 나가는 자력신앙인 것이다.

불교는 본래 이성(理性)과 지혜의 종교다. 부처님은 바라문교의 전통이 확고했던 고대 인도사회에서 재래 종교의 타력적 신앙을 반대하고 ‘현실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리’를 설파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의 운명을 신에 의지해 맡기라고 가르치는 재래 종교의 주장에 반대했으며, 또한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 행하는 주술과 의례 역시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부처님은 인생의 행불행이 절대적 타자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은 행위의 결과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끝없이 윤회되는 고통의 원인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자신이 연기적(緣起的) 구조 위에 있음을 깨닫고 바른 길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신교적(有神敎的)이고, 타력적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복적인 신행생활은 분명 불교의 본질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교리적인 측면에서도 기복은 불교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불교에서 흔히 얘기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상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으로, 모든 것이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인간의 의지’란 절대자나 초월자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절대 자유’다.

즉 고통을 극복하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것도 바로 ‘의지’에 달린 것이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의 법칙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인과응보 사상은 세상만사가 이미 정해진 대로 움직인다는 ‘숙명론’이 아니라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고 해탈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2) 주체성의 상실과 수행의 포기
불교는 과연 부처가 되는 종교인가, 아니면 부처님을 믿는 종교인가? 이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불자라면 기복불교가 왜 올바른 것이 아닌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자들이 진정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돌아볼 때 불교를 부처님을 믿는 종교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바람직한 신행생활을 하고 있는 불자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생각과 행위의 주체를 ‘자기’로 보며, 따라서 모든 원인과 결과가 ‘자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도 스스로의 몫이요, 미혹한 중생으로 남는 것도 스스로의 몫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설법한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에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自燈明 法燈明, 自歸依 法歸依)”는 말은 불교의 본질이 주체적이고 자력적임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상당수의 불자들은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에 의지하기보다는 부처님을 등불로 삼고 부처님에게 의지하려 한다.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기보다는 기복적 행위를 등불로 삼고 의지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나’는 온데간데없고 ‘나’를 움직이는 ‘타자(他者)’만 남게 되며, 타자에 대한 맹목적이고 의존적인 행위를 되풀이하게 된다.

불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부처님이 설한 도리를 좇아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고, 부처가 되는 공부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밝히는 것이다. 덮어놓고 “부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불자들이 많은데, 이것은 실로 잘못된 것이다. 교리공부와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길을 찾는 것이 바로 불교를 신앙하는 것이고, 불자의 올바른 자세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기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불자들의 주체적 자각이 없는 의존적 신행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에게 복을 달라고 빌기만 할 뿐, 부처님이 가르쳐 준 법을 공부하고 실천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교리와 신행의 불일치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셈인데, 교리가 신행생활의 기준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권능을 가진 신에게 모든 것을 기원하는 서양종교식의 신앙형태를 보이는 측면이 강하게 내재돼 있는 것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갤럽조사연구에 의하면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경전을 읽지 않는다는 불자의 비율이 50% 가까이 됐다는 것은 불자들의 신행생활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사실은 불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올바른 믿음을 기대할 수 없음을 전제할 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그 동안 만난 많은 불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찰에 다니면서 부처님을 숭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며 열심히 기도한다. 하지만 체계적인 공부를 하는 불자들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불자들이 기도에만 매달릴 뿐 수행이나 교리공부는 소홀히 한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포기하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물론 사찰은 물론 집에서도 참선수행에 몰두하며, 교리공부도 열심인 불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불자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불교를 제대로 신행하는 불자들이 드물다는 얘기다.

3) 비도덕적·반사회적 경향
개인적 욕망, 즉 세속적인 가치와 결합한 기복적 신앙은 신앙의 진정한 가치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기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거나 더 풍족한 현실을 갈구하기 위해 종교를 신앙한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원인을 자신이나 사회구조에서 찾는다기보다는 ‘정성 부족’으로 여기고 기복에 더욱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깨달음을 통한 정토를 꿈꾸는 것은 자신과는 상관 없는 허상이라고 여긴다. 즉, 현실에서 물질적 보상만 이뤄진다면, 그래서 충족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곧 ‘최고의 선’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불교는 물론 그 개인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경향을 부채질한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우선 입시합격 발원기도를 보자. 기도의 내용은 오직 ‘내 아이 합격하게 해달라’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내 아이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불합격해야 한다는 전제가 수반된다. 내 자식 외 다른 아이들의 합격을 함께 비는 불자는 없다.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필자가 아는 어떤 불자는 “남편의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며 남편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업체가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창 번창하던 남편의 사업이 어느 날 경쟁업체가 생기면서 크게 위축돼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선택한 것이 경쟁업체 망하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였던 것이다.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 남에게는 손해나 재앙이 되는 그런 이기적인 복을 빈다는 것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표는 자신의 행복이고, 그런 와중에서 다소간의 이기심이 작용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초래한다면 어찌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일체 중생이 동체(同體)이며 연기적 존재라고 말하는 불교에서는 더더욱 그런 복을 빌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이런 비도덕적인 기복 행위는 나아가서는 반사회적인 영향을 끼친다. 일례로 3년 전 한 스님이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불자들을 대상으로 불교 복지 의식에 대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불교사회복지의 낙후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5%가 ‘기복적인 신행생활 때문’이라고 답했고, ‘신비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한 불자도 11%나 됐다.

또 응답자의 60% 가까이가 봉사나 복지사업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조사결과는 불자들 대부분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얼마나 기복적인 신행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런 행태가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명제를 거스르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이야 어찌 됐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와 행동이 사회전반의 화합을 깨뜨리고, 나아가 단절된 사회구조를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기복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무능력이나 불운으로 치부함으로써 사회환경의 개선노력을 방기하는 부작용도 초래한다. 잘못된 제도와 관행에서 빚어지는 각종 사건과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기복적 성향을 가진 불자들은 문제의 근원을 살피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는 그 어떤 불행한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불교가 사회참여에 소극적인 이유도 이와 같이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의식이 불자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4) 사찰 경제의 왜곡
3년 전 대구에서 ‘불교계 개혁과 발전을 위한 시민토론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이때 한 발표자는 일부 사찰이 재정적 토대를 유지하기 위해 신도들의 기복신앙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런 관행이 계속될 경우 신도는 물론 일반인, 특히 지식인들로부터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찰들이 그런 행태를 보이게 되기까지의 역사적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우리 나라 불교를 기복불교니 치마불교니 하면서 비방하는 소리가 많았는데, 그 근원은 조선조 5백년 동안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정책에 따라 철저하게 탄압을 받아온 불교가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명문가의 부녀자들에게 뿌리내리면서부터다. 지배계급인 유학자들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산중으로 쫓겨나게 된 사찰들은 부녀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면서 부녀자들을 ‘보살님’으로 부르며 환대했고, 이들 부녀자들이 내는 시주에 의존하게 됐다.

문제는 사찰을 찾는 부녀자들이 가족의 안전과 출세를 비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고, 사찰은 재정확보를 위해 이를 부추겼다는 점이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그 타성이 몇 백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찰들이 이런 요소를 교묘히 이용해 신도들을 확보하고 사찰의 경제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영험담 같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기도만 열심히 하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여기게 함으로써 기복을 조장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영험이 있다는 소문만 나면 전국의 불자들이 모여들고, 그만큼 사찰경제는 윤택해지기 때문이다. 또 상당수 사찰들은 49재다 100재다 기제사다 해서 재를 지낼 것을 강권하기까지 한다. 물론 재를 한 번씩 지내줄 때마다 상당한 비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스님이 교계 신문에서 이같은 사찰의 행태를 정면으로 들추고 나온 적이 있다. 내용인즉 사찰들이 재정확보를 위해 기복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올바른 신행생활의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할 사찰들이 오히려 기복적인 기도를 권하고 천도재를 강요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부적을 팔거나 점까지 쳐주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십중팔구 재정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4. 기복불교의 극복을 위한 방안 몇 가지

불교에서도 분명 복을 말한다. 하지만 세속적인 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복이란 중생이 바른 도리를 추구하고, 욕심을 없앤 번뇌 없는 마음가짐으로 자기 구제의 길을 가면서, 그 속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이지, 결코 세속적으로 말하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영험 따위가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의식이 불자들 사이에서 자리잡으려면 불자들과 사찰, 종단 할 것 없이 모두가 기복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종단과 사찰은 불교의 본질과 교리에 대한 기초교육을 철저히 하고, 기복신앙에 치우치는 신도들을 꾸준히 계몽해 참다운 신행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고, 불자들은 수행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1) 신도교육의 강화
최근 2∼3년 전부터 각 사찰들의 ‘불교교양대학’이 활성화되면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개인 또는 가족단위로, 직장동료 또는 사찰의 도반들끼리 함께 수행을 하는 불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집에서도 매일 조석예불을 올리며 열심히 수행하는 불자들도 있다. 단순히 복을 비는 차원을 벗어나 자신을 가다듬고, 올바른 불자로 거듭 나려는 노력이 의식 있는 불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불자들을 기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사찰들의 철저한 교리교육이 필요하다. 기복에 빠져 있는 불자들 중 상당수가 불교의 본질과 부처님의 정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부처님을 믿고 기도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불자들에게 교리교육을 시킴으로써 불교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신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전적으로 사찰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하반기부터 조계종 포교원이 기초교리 등 신도교육을 의무화하도록 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사찰은 우선 교리가 신행생활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확립하고, 불공과 각종 재(齋)를 위주로 한 방식에서 벗어나 교리에 대한 해설과 함께 진리를 깨우쳐 주는 설법 위주로 신도교육체계를 잡아 나가야 한다.

천도재나 생전예수재를 봉행한다 하더라도 그 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 기복으로 흐를 가능성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 또한 불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고 이를 통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수행에 임하는 마음과 수행의 기초 등 수행과 관련한 기본지침을 마련해 주는 것도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2) 신도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
지난해 어느 사찰에서는 주부 불자들을 대상으로 아주 독특한 강좌가 열렸다. 강좌의 주제는 ‘입시생을 둔 학부모의 올바른 자세’였다. 강사는 강의 서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입시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실력 없는 학생이 붙지는 않는다. 문제는 학생의 실력을 키워주는 것이고, 부모는 학생이 학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필자는 불교와는 관계없는 주제도 주제려니와 각종 매스컴에서 흔히 얘기되는 주제의 강의를 굳이 사찰에서 개최한 이유를 관계자에게 물었었다. 그때 그 관계자는 “입시생을 둔 불자들은 입시가 끝날 때까지 늘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합격발원 기도를 하며 스스로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위안을 합니다. 그런 불자들에게 매스컴이나 다른 곳에서 합격발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강좌를 열기로 했습니다. 사찰에서 기도보다는 자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강좌는 사찰이 신도들의 고충을 어떻게 해결해 주느냐 하는 점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기복에 빠지지 말라는 원론적인 얘기보다는 이런 프로그램 하나가 기복을 막는 데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기복에 젖어드는 대부분의 불자들은 보통 무엇인가 답답하고 잘 안되는 일을 부처님 가피에 의존해 해결하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 강좌를 들은 불자들은 아마도 기도보다는 실생활에서 자식의 학업을 돕는 것이 옳은 방법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에게 사찰에서 입양을 권하는 문제도 생각해볼 만하다. 자신들의 아이를 갖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에게 입양을 권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이상 사찰에서는 입양을 권해봄직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어린 생명을 따뜻한 가정으로 품는 입양은 자비의 실천이기에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이 꽤 많아졌고, 고아를 보호하고 있는 시설도 적지 않은데, 이들 시설과 연계해 입양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이밖에 스님과 신도간의 대화를 정례화해 신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들어주고, 그 고통을 줄이거나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고, 올바른 신행생활을 통해 고통을 극복한 사례를 제시하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불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끊임없는 참회와 자기 혁신 노력
기복을 벗어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불자들의 의지다. 종단이나 사찰이 아무리 올바른 신행생활을 강조해도 이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불자들 스스로 어떻게 하면 올바른 신행생활을 할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하고 공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을까 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위없는 깨침을 이루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려는 깨침과 자비의 가르침이며, 불교를 믿고 행하는 신행의 길은 보살의 길을 걷는 과정이다. 그리고 보살의 길에서 필요한 것은 보살의 길을 가겠다는 발심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신행의 기본은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행하는 데 있으며, 불자들의 신행도 이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선 복을 바라는 행위를 복을 짓고 닦는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하고, 신행생활이 마음 닦는 수행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또 외형보다는 내면화될 수 있는 신행생활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익중생의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기도에 대한 가치관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기도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는 것이다. 역학계에 ‘수상(手相)이 관상(觀相)만 못하고, 관상이 심상(心相)만 못하다’는 격언이 있다. 손금이 아무리 좋아도, 얼굴이 아무리 잘 생겼어도 남에게 호감을 주거나 마음을 잘 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기를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복을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 두 종류로 나누어 말한다. 유루복이란 새어나가는 복이라는 뜻이고, 무루복이란 새어 나가는 것이 없는 복이라는 뜻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유루복은 생로병사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누리는 한정되고 부자유한 사바세계의 복이요, 무루복은 생로병사가 없는 불보살과 성현들이 누리는 영원하고 걸림 없는 정토세계의 복이다. 유루복은 올라갔다가는 다시 떨어지는 변화가 반복되는 복이지만, 무루복은 변함이 없고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불교의 지향하는 바가 무루복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기복이라는 것은 유루복만을 추구하며 무루복을 향해 기도하고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행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또 설사 무루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앞서 말한 것처럼 수행이 뒤따르지 않는 머릿속만의 기도라면 유루복을 추구하는 것, 즉 일반적인 기복적 행태와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올바른 신행생활은 무루복은 도외시한 채 나고 죽는 허무한 유루복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법에 대한 진정한 귀의를 의미한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박카리 비구에게 “법을 보는 자가 여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불교신행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5. 나오는 말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바란다. 기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행위 가운데 기복이 아닌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은 기복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기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 많이 갖고, 더 편안하고, 더 많이 소비하려는 것이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특히 불교는 이러한 욕망의 극대화를 통해서는 행복, 안심(安心)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욕망은 끝이 없고 만족을 모르며, 또 다른 욕망 더 큰 욕망을 야기하고, 이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번뇌를 일으키고 스스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로 하여금 불행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다. 《우바새계경》에 의하면 세 가지 ‘복전(福田)’이 있다. 경전(敬田)·보은전(報恩田)·빈궁전(貧窮田)이다. 경전은 불·법·승 삼보요, 보은전은 부모요, 빈궁전은 빈곤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는 바로 이 세 가지인 바, 복을 받는 행위는 삼보를 공경하는 것이요,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을 비는 모든 행위, 기도는 자기자신의 내적 혁명 작업이어야 하며, 자신의 본래 진면목을 탐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복을 비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인 기도는 현상적·물질적 풍요를 요구하는 방편이 아니라 이타적 실천의 맹세인 서원(誓願)으로 회향되어야 한다.<끝>

한명우
한양대학교 영문과 졸업. 현재 현대불교신문 기자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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