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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 담론과 정교유착의 현실 / 이진구
[기획] 종교와 정치 그 갈등과 유착의 관계
[7호] 2001년 06월 10일 (일) 이진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 왜 정교분리 원칙인가

대한민국 현행 헌법 제20조는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와 “②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 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로 되어 있다.

제1항은 종교자유 조항이고 제2항은 정교분리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헌법 수정 1조는 “의회는 국교의 수립에 관한 혹은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로 되어 있다.

이 조항을 요약하면 ‘국교수립의 금지(no establishment)’와 ‘종교자유의 보장(free exercise)’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국교수립의 금지는 사실상 정교분리를 의미하므로 미국 헌법 수정 1조의 핵심 내용도 우리 나라 헌법과 마찬가지로 정교분리 조항과 종교자유 조항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 나라와 미국의 헌법에서 정교분리와 종교자유 원칙을 하나의 조문에서 함께 다루고 있는 이유는 그 두 가지 원칙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교분리가 되어야 종교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될 수 있으며, 종교자유 원칙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전제가 깔려 있는 셈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도 자국의 헌법에 이 두 조항을 함께 병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원칙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두 원칙은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지만 어느 것을 중심축으로 설정하는가에 따라 논의의 방향과 효과가 약간 달라질 수 있다. 종교자유의 원칙을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면 개인적 양심의 자유, 인권의 보장, 종교집단이 행사하는 종교자유의 범위와 한계 등이 주요한 문제로 등장할 것이다.

이와 달리 정교분리 원칙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게 되면 국가와 종교의 ‘관계’가 핵심적 사항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치와 종교, 혹은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1) 따라서 정교분리 원칙이 핵심적인 논의의 축이 될 것이며 종교자유 원칙은 보조적인 차원에서 다룰 것이다.
1) ‘정치와 종교’(politics and religion)와 ‘국가와 종교’(state and religion)는 서로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엄밀하게 보면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전자가 추상적이고 인식론적 차원이 강조되는 개념인 데 비해 후자는 보다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혼용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헌법적 차원에서 천명하고 있는 정교분리 원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정치에서 종교가 분리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종교에서 정치가 분리된다는 것인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정말 바람직한 것인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문자 그대로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단지 하나의 ‘수사(rhetoric)’에 불과한 것인가?

현대사회의 일각에서는 ‘정교분리’를 거부하고 ‘정교일치’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종교집단이나 국가들도 존재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사회는 정교분리원칙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다양한 ‘해석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집단과 국가권력은 ‘정교분리’라는 동일한 원칙에 대하여 서로 상반된 해석을 내림으로써 ‘상호갈등’의 관계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와 반대로 쌍방이 함께 ‘정교분리’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정교유착’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정치와 종교, 혹은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배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원칙은 서구 근대성의 형성 및 확산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즉 정교분리 원칙은 서구 근대성의 독특한 산물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근대 서구 사회의 성립 과정에서 정교분리 원칙이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과 이 담론이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효과를 발휘하여 왔는가를 집중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그 이전에 먼저 정치와 종교의 관계 즉 정교관계의 역사적 유형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정교관계의 역사적 유형

역사적으로 보면 정치와 종교의 관계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 자체가 미분화되어 있거나 합일되어 있는 경우이고, 둘째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이 의식적 제도적 차원에서 분리되어 있는 경우이다. 전자를 정교일치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교분리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교일치형 사회의 대표적인 예는 흔히 ‘제정일치’ 사회라고 불리는 과거나 현재의 씨족사회나 부족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최고 지도자가 제사와 통치의 대권을 동시에 행사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단군이 다스리던 고조선 사회나 유교사회라고 불리는 조선시대가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고조선 사회의 단군이나 조선시대의 국왕은 최고의 사제이자 동시에 최고의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슬람 국가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국가들도 ‘정교일치’ 혹은 ‘정교합일’의 이념에 기초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무하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은 처음부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고 정교일치를 표방하였다. 무하마드 자신은 처음부터 최고의 종교지도자이자 최고의 통치자로 간주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서구적 근대화의 영향으로 이슬람 국가의 정교일치 체제가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흥으로 이 체제가 다시 강화되고 있다.

특히 1979년 팔레비 정권을 붕괴시키고 새로이 등장한 이슬람 공화국 이란은 오늘날 가장 전형적인 정교일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란 혁명의 기수였던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최고의 종교지도자이자 최고의 정치지도자로 존재하면서 이슬람의 종교법이라고 할 수 있는 샤리아(Sharia)로 팔레비 시절에 ‘타락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성하고자 하였다.

서구사회로 눈을 돌려보면 종교개혁 당시의 제네바나 오늘날의 바티칸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던 당시의 제네바나 교황이 국가원수로 활동하는 오늘날의 독립국가 바티칸은 사실상 ‘신정(神政)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체제에서는 ‘종교법’과 ‘세속법’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신이 제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성법(聖法)’만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은 종교적 이념이 국가권력의 형태로 외화되어 나타난 경우들이다. 그것이 유교 국가의 형태를 취하건 이슬람 국가의 형태를 취하건 ‘신정국가’의 형태를 취하건, 이 모두는 ‘종교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외형적 모습은 비슷하면서도 성격이 다른 체제가 있다. 세속 권력이 특정한 종교를 선택하여 국교로 삼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종교와 정치를 의식적 차원에서 분명히 구별하고 있지만 정치권력이 주도권을 가지고 종교를 이용하는 체제이다. 대표적인 예는 절대주의 시대의 유럽국가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가통합의 수단으로 특정한 교파나 종교를 국가종교로 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정교합일형은 종교적 이념이 국가권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종교국가’와 국가권력이 특정한 종교를 국가통합의 도구로 삼는 ‘국가종교’를 모두 포함한다. 전자는 종교와 정치의 미분화 상태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이고 후자는 종교와 정치가 분화되었지만 국가권력이 종교를 통합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자 할 때 주로 나타난다.

그러나 ‘종교국가’가 되었건 ‘국가종교’가 되었건 그 어느 것도 현대사회에서는 지배적 담론이나 제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와 국가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일치시키는 정교합일 모델은 현대사회에서는 매우 낯선 현상이거나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종교국가’가 아니라 ‘세속국가(secular state)’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도처럼 매우 ‘종교적’으로 보이는 나라도 헌법에서 스스로를 ‘세속국가’로 선포하고 있을 정도이다.

‘세속국가’는 종교와 정치를 의식적 제도적 차원에서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으며, 특정 종교를 국교로 삼지 않고, 나아가 모든 종교에 대한 국가의 ‘중립’을 선언한다. 이러한 ‘세속국가’ 모델의 인식론적 토대가 ‘정교분리 원칙’이며 그것의 법적 장치가 ‘정교분리 제도’이다.

그러면 왜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국가는 정교분리 원칙과 정교분리 제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때 정교분리 원칙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담론적 실천적 효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 서구사회의 형성과정과 근대성의 성립 과정을 검토해야 한다. 정교분리 원칙은 근대성(modernity)의 내재적 원리이며 정교분리 제도는 근대국가(modern state)의 핵심적 구성 요인이기 때문이다.

3. 종교전쟁의 시대와 종교의 자유

근대 서구 사회의 성립은 중세 ‘기독교왕국(Christendom)’의 붕괴와 궤를 같이 한다. ‘기독교왕국’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 사회를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이러한 사회체제 하에서는 교황청의 입김이 사회의 모든 부문에 걸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등의 영역이 명확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각 부문의 내적 자율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교황의 말 한 마디는 세속 군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으며,2) 교회법은 시장논리의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교황청은 갈릴레오와 같은 과학자를 언제든지 소환하여 재판에 회부할 수 있었고, 예술은 오로지 신앙에 봉사하는 ‘종교예술’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요컨대 중세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영역은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거대한 ‘우산’ 아래 있었던 것이다. 2) 교황이 황제보다 상위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대변하는 이론이 이른바 ‘양검 이론(two sword theory)’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느님은 교황에게 두 개의 검을 주었다. 하나는 영적인 영역을 다스리는 검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 사회를 다스리는 검이다. 이때 교황은 자신의 팔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세속적 칼을 군주에게 일시적으로 양여한다. 그렇지만 교황은 세속 군주가 그 칼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그 칼을 회수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16세기의 ‘종교개혁(Reformation)’을 계기로 이러한 ‘기독교왕국’의 공고한 지반에 금이 가고 거대한 ‘우산’이 찢어지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새로운 ‘이단’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 교회 중심의 종교지형을 교란하면서 지각변동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프로테스탄트는 과거의 ‘이단’ 종파들과는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달리 하고 있었다.3) 신학적 신앙적 내용에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였다기보다는 양자가 놓여 있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중세의 ‘이단’은 ‘기독교왕국’의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단’은 ‘기독교왕국’ 내부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희생양’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희생양 만들기’의 가장 좋은 대상은 ‘마녀’나 ‘이단’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등장할 무렵에는 ‘기독교왕국’의 절대적 영향권 하에 있던 수많은 제후국가들이 교황청의 입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소왕국’을 구축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중세의 ‘이단’들이 도저히 지닐 수 없었던 막강한 ‘힘’을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실어 주었던 것이다.

제후국가의 소군주들과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서로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황권에 반대한다는 면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그리고 양 진영은 아직 거대한 공룡처럼 버티고 있는 ‘기독교왕국’의 가공할 힘 앞에서는 서로 제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연대하여 공동의 적을 격파하는 것만이 그들의 서로 다른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따라서 당시 교황청에서 파문당한 루터를 어떤 제후국가의 군주가 적극적으로 숨겨주고 비호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당시 새로운 ‘민족국가(nation state)’를 모색하던 소군주들은 프로테스탄트 집단에게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효용성’을 발견하였는가? 여기에는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이 있다. 소극적인 측면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반(反)교황주의의 동지라는 점이고, 적극적인 측면은 프로테스탄트 교파를 새로운 민족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당시 제후국가의 군주들은 프로테스탄트와 연합하여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그 다음에는 프로테스탄트를 새로운 ‘민족국가’의 ‘엔진’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제후국가의 군주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수용하였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상당수의 군주들은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는 단일한 교파가 아니라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었으며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가톨릭 군주, 루터교 군주,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군주 등이 난립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교파를 보호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그 교파를 국가통합의 ‘엔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신앙의 자유, 교파의 보호, 영토 확장을 위해 서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저 유명한 ‘종교전쟁’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 전역에 걸쳐 한 세기 이상 지속된 ‘종교전쟁’은 신의 ‘사랑’이라는 구호 아래 전개된 전쟁이었다. 중세의 십자군이 ‘다른 신’을 믿는 자들에 대한 ‘성전(聖戰)’이었다면 이 시기의 종교전쟁은 ‘같은 신’을 ‘다른 방식’으로 믿는 자들에 대한 전쟁이었다. 기독교 밖에서 보면 이 전쟁은 ‘집안싸움’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항상 멀리 있는 적보다는 가까이 있는 적이 더 증오스럽지 않던가?

따라서 이 ‘집안싸움’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신앙적 ‘광기’와 대학살을 동반한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emew) 축제일의 학살 사건’4)이다. 4) 1572년 8월 24일 밤, 프랑스의 파리 시에서 발생한 대학살 사건이다. “파리 시내의 심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전에 준비하고 있던 가톨릭 신자들은 손에 손에 흉기를 들고 일제히 일어나 깊이 잠들고 있던 개신교도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이 학살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7일간 계속되었다. …… 그 후 살육은 2개월 동안 계속되어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조찬선, 《기독교 죄악사》(상), 평단문화사, 2000, pp.326∼329.)

독일 지역을 주요 무대로 하여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을 마지막으로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시대는 마침내 종언을 고하였다. 그러면 이 전쟁이 가져온 과실과 열매는 무엇인가? 이제 모든 사람의 종교자유는 확보되었는가?

그렇게 쉽게 답할 수 없다. 물론 종교지형의 근본적 재편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가톨릭 독주의 종교지형이 종언을 고하고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존하는 새로운 지형이 형성된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세력이 양분되었다. 알프스 북쪽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하게 되고 교황청에서 가까운 알프스 남쪽의 남유럽에서는 여전히 가톨릭이 강세를 보였다.

알프스 산맥의 북쪽에서 주로 발생한 종교개혁의 열풍이 알프스를 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교황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알프스 북쪽의 지역을 영원히 잃은 셈이다.
이처럼 가톨릭과 개신교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공존하는 새로운 종교지형이 형성되었다면 이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인가? 개인의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확보되기까지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우선은 군주의 신분을 가진 자에게만 신앙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즉 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는 어느 교파든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지만, 일반 백성은 자신의 군주가 선택한 종교만을 신봉해야 했다. 만일 군주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선택하고자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재산을 포기하면 다른 나라로 이주할 권리를 얻어 자신이 원하는 신앙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5) 따라서 ‘종교전쟁’은 소수의 신앙 자유는 가져왔지만 만인의 신앙 자유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군주의 종교가 백성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용어는 이 시대의 성격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5) 중세 시대에는 ‘이단’으로 간주되었을 경우 ‘재산의 포기’가 아니라 ‘목숨의 포기’였으므로 이러한 면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한 단계 전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근대성과 정교분리 담론의 구조

소수만이 아닌 만인의 종교자유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창한 목소리는 교회 내부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 밖에서 나타났다. ‘종교전쟁’으로 인해 피로 물들은 유럽의 강토를 보면서 일부 지식인들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할 것 없이 기독교 자체에 대하여 염증과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교파와 신앙의 차이 때문에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종교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바로 18세기의 계몽주의 지식인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며 모든 인간이 신앙의 차이나 유무에 관계 없이 보편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며 서로에 대하여 평등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앙과 교파의 차이를 빌미로 타인을 살해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계몽주의의 종교 이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계몽주의는 종교를 ‘계시종교(revealed religion)’와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로 구분한다. 이들에 의하면 ‘계시종교’는 초자연적 계시를 강조하면서 기적이나 이적(異蹟)과 같은 비합리적 현상을 중시하며 편협한 교리주의로 나아간다. 이에 비해 자연종교는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근거한 도덕과 윤리를 중시하며 엄격한 교리나 신조에 얽매이지 않는다.
당시 대다수의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계시종교’에 비판적이었으며 ‘자연종교’를 모든 종교의 토대로 간주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의 본질도 ‘자연종교’이지만 성직자의 탐욕과 독선으로 인해 교회 자체가 편협하고 권위적인 신앙으로 흐른 것이다. 따라서 제도종교의 외적인 권위와 독선의 껍질을 제거하고 순수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계몽주의 지식인의 기본 입장이었다. 이처럼 계몽주의는 ‘참된’ 종교의 기준을 외적인 제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이성과 도덕에서 찾음으로써 근대 종교가 보편화(universalization)와 추상화(abstraction)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계몽주의적 종교 이해는 ‘종교적 관용’의 에토스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근대 기독교 내부에서 등장한 경건주의(pietism) 사조는 신앙의 ‘개인화’와 ‘내면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조는 참된 신앙의 지표를 교회와 같은 제도보다는 개인의 내면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경건주의 신앙의 소유자들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교리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개인의 ‘내면’ 속에서 ‘참된’ 경험과 경건을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전쟁’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던 교리투쟁과 교리수호에 관심이 없었다. 이처럼 근대 계몽주의는 종교의 보편성을 상정함으로써 종교간의 교리적 차이에 의한 갈등과 투쟁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경건주의는 신앙의 내면성을 강조함으로써 종교를 개인화하고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종교전쟁’의 후유증은 새로운 민족국가를 다스리는 군주들의 종교 인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 통일 없이는 시민적 국가적 통일이 어렵다.”는 과거의 인식이 이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보다는 모든 시민과 국민들에게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국가의 통합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혁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만약 교리와 종교의 차이로 인해 다시 ‘종교전쟁’과 같은 심각한 갈등이 나타나면 국가질서는 해체의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는 보장하되 그 한계를 분명하게 하자는 전략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공(the public)과 사(the private)의 이분법이며 정교분리 원칙은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등장한 새로운 근대적 담론이다.

그러면 공과 사의 이분법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세시대에는 가톨릭 교회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사회 전체가 미분화의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왕국’이 붕괴되면서 경제, 과학, 예술 등의 영역은 교황청의 입김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경제 영역은 교회의 경제외적 강제에서 벗어나 시장의 논리에 의해서 운영되고, 과학은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로운 학문적 탐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술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해 나아갔다. 정치의 영역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이제 민족국가들은 ‘기독교왕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자신의 ‘소왕국’을 구축하여 갔다. 이처럼 근대 사회의 각 부문과 영역이 교회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거시적인 과정을 ‘세속화(secularization)’라고 부른다.

이러한 ‘세속화’ 과정은 ‘종교’의 영역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 ‘기독교왕국’ 체제에서는 정치, 경제, 과학, 예술, 종교가 미분화되어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지만 ‘세속화’ 과정으로 인해 각 영역이 분화해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종교’도 ‘기독교왕국’에서 해방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중세 사회에서는 ‘종교(religion)’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의 ‘종교’ 대신 정치-경제-과학-예술-종교라는 복합체(complex)만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거대한 복합체가 분화되면서 정치, 경제, 과학, 예술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였고, 그 과정에서 ‘종교’도 다른 영역과 구분되는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세포’의 자체 분열로 인하여 새로이 형성된 새로운 ‘세포’들은 모두 동등한 지위와 가치를 부여받는 것일까? 바로 이때 작용하는 것이 공과 사의 이분법이다. 종교와 정치의 영역에 국한하여 이 이분법을 적용하여 보자. 그러면 어떤 것이 공적 영역으로 편성되고 어떤 것이 사적 영역으로 배치되는 것일까? 근대 사회가 마련한 공사 이분법은 정치를 공적 영역으로,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편성한다. 그러면 왜 정치는 공적 영역으로, 종교는 사적 영역으로 편성되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계몽주의에 기초한 근대성의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 계몽주의적 근대성은 합리성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합리성의 관점에서 비합리성/합리성의 이분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여기에 초자연/자연의 이분법을 연결시킨다. 그러면 초자연 = 비합리성, 자연 = 합리성이라는 도식이 생겨난다. 여기에다 또 공/사의 이분법을 다시 덧붙이면, 초자연 = 비합리성 = 사적 영역, 자연 = 합리성 = 공적 영역이라는 도식이 출현한다.

그러면 ‘세속화’ 과정을 거쳐 근대 사회 속에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종교와 정치는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 속에서 각각 어느 범주와 연결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근대성이다. 그런데 계몽주의적 근대성은 ‘계시종교’를 초자연의 표상으로 가득찬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를 초자연=비합리성=사적 영역과 등치시킬 수밖에 없다. 이때 정치는 종교와 반대되는 표상들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제 최종적인 대차대조표가 완성되었다. 종교 =초자연 = 비합리성 = 사적 영역, 자연 = 합리성 = 정치 = 공적 영역.

여기서 종교가 사적 영역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근대성이 종교를 완전히 제거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적 차원의 범주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성의 구조하에서 종교는 공적 영역이 아니라 오로지 사적 영역에만 그 존재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 종교는 사적 영역에서만 활동 무대를 찾을 수 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도 오직 사적 영역에 한해서이다. 만일 종교가 사적 영역을 벗어나 공적 영역으로 진출한다면 이는 종교자유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지점에서 드디어 정교분리 원칙이 등장한다. 근대적 의미의 정교분리 원칙은 바로 이러한 공/사의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제 국가는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되고 종교는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된다. 이제 각자의 고유한 자리와 역할을 찾았으므로 과거와 같이 서로의 본분을 망각하고 상대방의 영역을 침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만일 종교가 사적 영역을 벗어나 공적 영역으로 진출한다면 이는 종교의 자유를 남용하는 것이고, 국가가 사적 영역에 간여하면 이는 국가가 권력을 남용하는 일이 된다. 공과 사라고 하는 명백한 이분법에 의하여 ‘신사협정’을 체결한 이상, 이제 국가와 종교는 서로의 본분을 지키는 일에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서구 사회가 오랜 시행착오와 피나는 투쟁을 통하여 도달한 최종 결론 즉 ‘정교분리 원칙’인 것이다.

5. 정교분리의 원칙과 정교유착의 현실

그러면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 갔는가? 서양 근현대사의 과정 속에서 정교분리 원칙이 법적 제도적 차원으로 구체화된 대표적인 예는 미국혁명,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세 나라의 경우는 각기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정교분리 원칙의 적용 즉 제도화 과정에서 일정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먼저 미국의 경우를 보자. ‘종교전쟁’ 시대의 유럽 대륙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종교피난민’이 건국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당시 ‘종교피난민들’은 서로 다른 교파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다교파 지형으로 출발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조국을 떠나온 피난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지상 최초의 국가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처음부터 어느 하나의 교파도 주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미국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을 헌법에 명기한 최초의 국가가 되는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미국 헌법에 나타난 정교분리 원칙은 국가의 종교활동 금지와 국가의 종교간섭 금지를 의미한 것이지 종교의 정치참여를 차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즉 미국 혁명에 나타난 정교분리 원칙은 종교의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면 프랑스의 경우는 어떠한가?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종교개혁의 ‘열풍’을 겪었지만 개신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가톨릭 교회가 지배적인 힘을 계속 행사하였다. 그 결과 절대주의 왕조 치하에서 가톨릭 교회는 사실상 국가종교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지닐 수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 정부는 앙시앙 레짐(구체제)과 가톨릭 교회의 강고한 유착관계를 끊고자 하였고 그것을 혁명의 일차적 과제로 삼았다. 이때 혁명 세력이 표방한 ‘단절의 담론’이 정교분리 원칙이다. 혁명 정부는 정교분리 정책의 일환으로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담당해오던 학교교육을 전면 금지시켰다. 학교교육은 국가의 고유한 영역에 속하는 공적 영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가톨릭 성직자와 교회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에 나타난 정교분리 원칙은 종교의 정치활동 금지를 주로 의미하였다. 미국의 경우와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혁명의 경우를 살펴보자. 프랑스의 구체제가 가톨릭 교회와 결합되어 있었다면 러시아의 경우에는 짜르 체제가 정교회(Orthodox Church)와 강고한 유착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볼셰비키 혁명 세력은 정교회와 짜르 체제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정교분리 원칙을 표방하였다.

프랑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먼저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금지시키고 성직자와 교회의 정치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프랑스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면 종교자유 조항에 ‘반종교 선전의 자유’ 조항을 함께 병기하고 있다는 점이다.6) 6) 구소련만이 아니라 중국, 북한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 만이 아니라 ‘반종교 선전의 자유’ 조항을 함께 병기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정교분리 원칙은 각국이 놓여 있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상이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혁명의 경우에는 국가가 국민의 종교자유를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정교분리원칙을 제도화하였고,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경우에는 구체제를 타파하고 종교의 정치활동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정교분리 원칙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차이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정교분리 정책을 실시하는 주체가 국가권력이라는 점이다.

근대 사회의 성립 이후에는 국가만이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권력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근대 사회에서 국가의 힘을 뛰어 넘는 조직이나 단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 발전했는가에 따라 국가권력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의 정도가 결정된다. 근대 국가와 시민 사회의 발전 속에서 종교는 사적 영역에 배치되어 왔기 때문에 근대 종교는 ‘사사화’의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국가 속에 존재하는 한 종교는 정치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때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바로 정교분리 원칙이다. 요컨대 현대 사회 속에서 국가와 종교는 정교분리 원칙을 매개로 하여 서로 만난다.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은 국가권력과 종교집단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민주국가의 경우에는 국가권력과 종교가 부딪칠 이유가 별로 없다. 국가의 종교 간섭이나 통제가 별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권력이 과도하게 권위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는 국가권력과 종교의 충돌이 쉽게 예상된다. 권위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국가는 자신들의 취약한 정당성을 인위적으로 증대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종교집단의 극단적 충성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나 히틀러의 나치주의, 그리고 일본 파시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전체주의 국가는 종교집단들이 전시체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그들이 상습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정교분리 원칙이다. 전체주의 권력의 대변자들은 종교가 정치권력에 충성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지 않지만 종교가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의 위배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종교인들을 종교자유의 남용자이자 정교분리 원칙의 위배자라고 비난하면서 가혹한 탄압을 행한다.

한편 거대한 종교집단의 ‘보수주의적’ 지도자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정교분리 이해와 궤를 같이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바이블의 구절을 정교분리 원칙의 구실로 삼으면서 국가권력에 대하여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 종교 세력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전체주의 국가에 대하여 과도한 충성을 바치는 행위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면에는 국가권력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지금까지 누려온 종교권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나아가 이를 증대시키려는 은밀한 동기가 숨어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침략 전쟁을 묵인하고 승인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교황청과 파시스트 정권의 ‘밀약’은 정교분리 원칙을 빌미로 한 종교권력과 독재권력의 ‘야합’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정교분리 원칙은 종교권력의 ‘이익’을 위해 독재권력과 ‘유착’하는 주요 메카니즘의 하나이다. 요컨대 정교분리의 ‘원칙’은 언제든지 정교유착의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서구 근대성의 산물로 등장한 정교분리 원칙은 현대사회의 정치와 종교를 매개하는 주요 담론이자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규정하는 토대이다. 그런데 이 원칙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효과적인 제도적 장치의 역할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종교권력과 독재권력의 ‘유착’과 ‘야합’을 은폐시키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정교분리 원칙에 대해서는 항상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하며, 이 원칙이 작동하는 구체적 맥락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교분리 원칙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진구
서울대 종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종교학 전공). 현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서울대 강사. 논문으로 〈근대 한국 개신교와 불교의 상호인식에 관한 연구: 개신교 오리엔탈리즘과 불교 옥시덴탈리즘〉 〈근대 한국사회의 종교자유 담론: 양심의 자유와 종교집단의 자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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