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종교와 정치 그 갈등과 유착의 관계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정치와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인간 사회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는 표현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출세간을 지향하며, 세간을 멀리한다고 하여 정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출세간이 세간의 번영과 발전을 전제로 한 과정적 수단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면 그런 행위 자체도 정치적 표현의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불교도들이 희구했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상과 그것을 실천할 방법을 제시했다면 불교도들은 고유한 정치이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여기서는 이상과 같은 점을 전제로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에 나타난 정치적 이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불교의 이상정치론

1) 사회계약적 국가기원론
근본불교에는 국가의 기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장아함경》의 〈소연경〉과 〈기세인본경〉, 《중아함경》의 〈범지고〉와 〈대루탄경〉 〈기세경〉 등 국왕의 기원을 설하고 있는 경전들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장아함경》 권22의 〈세기경〉에 의하면 인간은 광음천(光音天)에서 살다가 지상으로 이주하였으며, 이주 초기에는 토지의 공유개념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갱미(粳米)를 먹기 시작한 이후 남녀를 분별하게 되고, 욕심이 발생하게 되면서 토지를 사유화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사유화 경향은 급기야 도둑의 출현을 야기시켜 이전의 평화를 깨트리고 말았다고 말한다. 평화의 파괴는 혼란과 다툼의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은 불신과 다툼을 팽배시키고, 마침내 평화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구성원 간의 공동인식을 유발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고 도둑을 방지하며, 공정한 재판을 진행시켜줄 적임자를 찾게 되었다. 선발된 적임자는 농업이나 다른 생계 수단에 전념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봉사에 보답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의 육분의 일을 주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장아함경》에 나오는 국왕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도들이 국왕을 넓은 의미의 고용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배자의 역할이 공공질서 유지와 방범으로 한정되는 경찰국가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계약제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사고의 원형은 고대 바라문교도에 의해서도 보존되고 있었다. 《보다야나(baudhayana)》란 책에 의하면 국왕은 개인 수확물의 육분의 일의 세금과 벌금 등으로 백성에게 고용되어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백성 중에 누군가가 도둑을 맞았는데 그 도둑을 잡지 못하면 국왕이 자신의 소유물로 변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카우틸리야실리론》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이고 있다.

불교의 성립시기에 불교와 강력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자이나교는 ‘아주 오랜 옛날에 사람들 속에서 한 명의 강자가 나타나 모든 분란과 내란을 진압하고 나라를 통제’하면서 임금이 되었다고 말한다. 불교와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자이나교의 국왕기원설이지만 임금이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에 의해 추대된다는 초월적 존재로 묘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통하고 있다.

국왕의 기원에 관한 불교도의 입장은 두 가지의 특징적인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는 왕권(정부)의 발생은 여하간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기 위해 인간의 타락이 불가피하게 만든 하나의 단계라는 점이다. 즉 사회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특수한 목적으로 그 공동체에서 한쪽의 가장 특수한 시민과 다른 한쪽의 나머지 시민들 사이에 맺어진 사회적 계약인 것이다. 정부라는 제도는 인간이 타락한 시대에 필요한 불행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완전함에 보다 가깝고 아직 탐욕이라는 나쁜 기질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인간들 사이의 사유재산제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나아가 사회는 정부 즉 국왕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사회적 정치적 원리는 인류의 생물학적 통일과 평등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음천을 떠나 지상으로 내려와 존재하게 되었던 인간들은 공통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가족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시에 존재했던 계급제도는 원천적으로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브라만 위주의 이론을 독단적이라 배격하는 것이다. 《숫타니파타》에 의하면 붓다는 생물학적인 근거를 논하면서 종자의 차이가 현저한 동식물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의 종(種)이라 말하고 있다.1)1) 《한글대장경》 201, p.133ff.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차이는 이름뿐이며, 나머지는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출생에 의해서 신분이 구별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한다.

개개인의 사회적 역할은 그것이 무엇이든 사회적 유용성과 적절성에 따라 존중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철저한 업설에 의거하여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거하여 철저한 책임만이 개개인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행위에 의해 브라만이 되고, 행위에 의해 브라만이 아닌 자로도 된다.”2)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한글대장경》 201, p.139.

이런 점에서 가아드 박사는 “불교의 초기 교의학자들은 우주론적이며 사회형성론적인 진화의 준 역사적 해석을 바탕으로 인도 정치사상에 두 가지의 본원적이며 상관적인 이론을 기여했다. 첫째는 계급 파생에 대한 추론적인 설명에 따르는 것으로서 사회를 위한 사회적 계약(재산권 확립)이다. 이것은 촌락생활에서 발생되었고 상가라는 사원제도에서 보존되었다. 둘째는 그 결과 왕권에 있어서 정부계약론(재산의 보호)의 확립이다. 이것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사회에서 이상이 되어 왔다”3)고 평가하고 있다.3) 정승석 역, 《불교의 정치철학》(대원정사, 1987), p.151에서 재인용.

2) 비권위주의적 민주정치론
이상과 같은 이상을 지니고 있었던 불교도들은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위해 상가를 조직하고, 상가를 사회개혁의 전진 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들은 우선 상가 내부에서의 인간 차별을 금지했다. 철저하게 출가자의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았으며, 개개인의 수행여부에 따라 교단 내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나아가 상가의 의사 결정도 철저하게 만장 일치제를 채택하였다.

그들은 회의의 진행에서도 세 가지 원칙을 견지했다. 무기명 비밀투표와 귀의 속삭임과 공개투표가 그것이다. 또한 결과가 도출되었더라도 진행과정이 법답지 못했다면 투표진행원은 결과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상가의 제도에 대하여 트레보 링은 “불교상가는 대체로 민주주의 단체로 묘사되어 왔다.

그 이유는 거기에 전제적 우두머리가 없고, 명령과 책임이라는 권위주의적 끈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공동체 전체가 함께 결정을 내리는 공인된 절차가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생활에 관한 심의에 있어서는 틀림없이 상가의 구성원 각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4)고 평가하고 있다. 트레보 링의 지적처럼 불교의 상가는 후대에 상가의 우두머리가 출현하여 조직의 밑바탕에 깔린 자율과 보편적 우애 및 평등의 이상을 저해하기 전까지는 상가의 행정을 위한 법적인 우두머리를 규정하지 않는 것이 상가의 원칙이었다.5) 4) 정승석 역, 앞의책, pp.89∼90에서 재인용.
5) 《마하파리닙바나 숫타》, II, p.107. 재인용. “아난다여, 이 세상에는 틀림없이 ‘조직을 이끌 사람은 나라든가’ ‘그 질서는 나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을 품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질서와 관련된 어떤 문제에 있어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바로 그 자이다. 아난다여, 이제 여래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라든가 질서가 그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법에 의지하여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주적인 정치에 대한 부처님의 이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밧지족의 공화정치를 칭찬하면서 설명한 칠불쇠법(七不衰法)에 잘 나타나 있다.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은 밧지국을 침공하기 위해 그 가부를 알고자 대신 우사(雨舍)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6) 6) 《장아함경》 권3.

첫째 자주 모여서 정사(政事)를 논의하는가. 둘째 군신이 화순(和順)하고 상하가 서로 공경하는가. 셋째 봉법효기(奉法曉忌)하여 예도(禮度)에 어긋나지 않는가. 넷째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사장(師長)에게 경순(敬順)하는가. 다섯째 종묘(宗廟)를 공경하고 신을 받드는가. 여섯째 규문(閨門)이 진정(眞正)하여 정결(淨潔)한가. 일곱째 사문을 섬기고 지계자(持戒者)를 공경하여 우러러보며 받들되 게으름은 없는가.

이상의 일곱 가지 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민주적인 집회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라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중간의 세 가지는 가정의 질서와 전통문화를 존중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뒤의 두 가지는 유덕한 인사들을 존중하고 종교문화정책에 힘쓰라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나라는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더불어 전쟁을 하더라도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부처님은 언급하는 것이다.

이런 상가의 자율정신은 주로 도시국가들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활동할 당시의 인도는 도시국가 형태의 공화국에서 왕권신수설 내지 정치적 이해에 따라 국가를 국왕이 독단하는 전제국가의 두 가지 조직형태의 국가가 존재했다. 밧지족, 말리족, 석가족 등은 부족 국가 내지 연합국의 형태를 취하면서 공화제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러나 코살라국, 마가다국 등은 전제국가로서 정치적 편의에 따라 국가를 운영했다.

말하자면 전제국들의 출현은 공화국의 몰락과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활동할 당시는 공화국이 전제국가에 통합되어가고 있었던 과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주권재민의 정신이 사라지고 국왕의 독단과 전제 속에서 백성들이 압박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부처님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과 자유의 보존을 고민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국왕의 전제에 대한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국왕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바른 정치를 통해 자비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법을 실현하고 아울러 왕 자신도 일상생활에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은 국왕을 모범으로 삼고있으므로 국왕은 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민정치에 의해 국가의 번영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7) 7) 《증일아함경》 권51. “법으로 다스리고 비법으로 다스리지 마시오. 이치로 다스리고 비리로 다스리지 마시오. 대왕이시여, 정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죽어서도 하늘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3) 애민적 복지국가론
마르크스 이론에서 말하는 이상국가와 상가의 이상을 비교하여 보면 불교의 정치적 이상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계급성 종식과 사유재산의 철폐에 목적을 두고 있다. 개인주의와 자아의 벽을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불교의 이상과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상적인 정부의 형태에 관해서도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차이는 그 의도와 방법에 있어서 명백한 차이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즉 “마르크시즘은 유물론에서 출발한 데 반해서 불교는 유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방법론에서 마르크시즘은 결과인 현상을 타파하고 개혁함으로써 원인이 수정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 원인을 다스림으로써 결과는 저절로 개선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전자는 전제주의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으나 후자는 자유주의를 고수한다. 이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도 통하는데, 이 개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될 때에는 불교의 본의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은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발전된 사회관을 제시하는 것이다.”8) 8) 정승석 역, 앞의책, p.157.

장부경전 《구라단두경》에서는 죄악의 원인과 이것을 근절하기 위해 가하는 처벌은 실용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죄악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경제적 조건이 개선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아함경》의 〈전륜왕사자후경〉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부(富)를 주지 않으므로 가난한 자가 생기고, 도둑이 생기고, 도검(刀劍)이 생겨서 살생하는 일이 있다.

허언자(虛言者)·밀고자·이간어자(離間語者)·사첨자(邪諂者) 등이 생기고,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이 왕성해져 무법, 사법(邪法)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단순히 이상만을 추구하여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료하게 말하는 것이다. 경제문제는 현실이며,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위정자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중아함경》의 〈전색왕경〉에서 “무엇을 괴로움이라 하는가. 빈궁함이다.

어떤 괴로움이 가장 무거운가. 빈궁함의 괴로움이다. 죽는 괴로움과 가난함의 괴로움은 크게 다름이 없으나 차라리 죽음의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는 말아라.”9)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현실을 처절하게 응시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가난이 사회적 불평등 내지 계급모순의 내적 원인의 중대한 요인의 하나라는 점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9) 《문수문경》 권하에서는 “재가자는 재물로 보배를 삼고, 출가자는 공덕으로 보배를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붓다의 사회인식은 초기 경전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재화의 획득 방식에 정당성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비록 국왕과 부모와 처자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악사(惡事)를 행하지 말라.”(《견세사가경》)고 강조한다.

문화적 환경을 가꾸기 위해서는 출가수도자를 공경하고, 국민생활의 복리증진을 위해 복지사업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복지사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적인 요소가 필요하므로 시설자를 위한 복전(福田)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국가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경전에서는 구체적인 문화복지사업을 열거하고 있다. 당시 불교도들이 지니고 있었던 복지관을 알려주기에 충분한 내용들이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0) 10) 《제복덕전경》 제1조∼제7조. 《잡아함경》 권36 제8조, 《증일아함경》 권27 제9조, 《우바새계경》 권3, 《이치육바라밀다경》 권4 제10조∼제11조.

첫째, 부도와 승방과 당각(堂閣)을 건립할 것(수행시설을 정비하여 갖출 것). 둘째, 원과욕지(園果浴池)에 수목(樹木)이 청량(淸凉)하게 할 것(공원의 개설과 목욕시설의 확충). 셋째, 의약을 상시하여 중병(衆病)을 구료(救療)할 것(의료시설의 확충). 넷째, 견고한 선박을 건조하여 인민을 제도(濟度)할 것(해상교통시설의 확충). 다섯째, 교량을 시설하여 어리고 약한 자를 건네 줄 것(육상교통시설의 확충). 여섯째, 도로 주변에 우물을 파서 목마른 자로 하여금 마시게 할 것(편의시설의 확충). 일곱째, 공원에 화장실을 만들어 편의시설을 제공할 것. 여덟째, 객사를 건립하여 여행자에게 공급할 것. 아홉째, 나무와 숲을 만들 것. 열째, 비전(悲田)을 개설할 것(고아원이나 양로원 시설의 확충). 열한번째, 경전원(敬田院)을 개설할 것(삼보와 부모와 스승을 공경할 수 있도록 계몽하는 기관).11) 열두번째, 병자를 부처님 받들 듯이 돌볼 것(간병시설의 확충). 열세번째, 목욕시설을 건립할 것.11) 《범망경》 권하 제12조, 《십송율》 권37, 《증일아함경》 청법품 제36 등 13조항.

이상의 내용을 보면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복지사회의 구현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민정치를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공화정치가 시행되고 있었던 도시국가 출신이며, 팽배해가던 전제국왕들의 대민정책에서 권위주의와 독선을 발견하였기에 더욱 공화정치를 모델로 하는 애민정치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상가의 제도를 정비하면서 공화정치를 본받아 집회법, 의사법, 선거법, 고시법 등을 제정하고 있으며, 정법정치를 역설하게 된다. 국가나 국왕을 신성시하고 그 권위를 절대시하는 사상을 배제하고 영원한 가치인 법의 정치를 통해 평등과 자유와 자비가 충만한 사회건설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대승불교의 현실적 정치관 : 전륜성왕론12)
대승불교가 흥기하던 당시의 인도사회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었던 월씨족의 일파인 쿠사나족이 서력 60년경부터 인도 서북부를 공략하며, 그후 카니시카왕이 인도에 침입하여 그 세력을 이란까지 확장하는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들 쿠사나 왕들은 스스로 신의 칭호를 붙여 대주재신(大主宰神) 혹은 주재신이라 자칭했다. 12) 이 부분은 주로 차차석 역, 《불교정치사회학》(불교시대사, 1993)에 의거하여 서술하였음을 밝혀둔다.

당시 주권자인 국왕의 권력은 막대하여 법전에서는 국왕을 불에 비유하며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제적인 주권자를 신으로 비유하는 한편 국왕은 신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국왕의 정치활동중에는 신이 전제되어 있으며, 국왕은 세계의 8수호신의 화신이라 말한다. 국왕의 신성성은 누구도 침범해선 안 되는 것이며, 백성들은 국왕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대승불교의 국왕관에도 일정한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대승본생심지관경》은 국왕의 은혜를 강조하는 데 대표적인 실례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근본불교 이래 평등과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전래의 신분제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국가계약설에 입각하여 국가의 기원을 설명해 왔다. 국왕을 신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자의적인 전제정치를 허용한다는 것에 대해 용인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현실적인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대승불교운동가들은 제왕신권설을 사회통념상 수용하면서 국왕이 신이란 점을 다른 각도에서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다. 《금광명경》에 의하면 국왕의 신성에 대해 국왕의 의무를 실행하는 것 즉 사회적 역할에서 찾고자 한다.

때문에 국왕의 출신이나 혈통은 무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건 신이건 간다르바건 나찰이건 사람들의 악행을 제지하는 자가 왕이다.”라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국왕도 역시 생명체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으며, 사후에는 그의 행위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불소행찬》에서는 국왕도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왕반야경》과 《금광명경》은 국가도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주괴공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국왕이건 국가건 모두 무상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는 사상적 기반 위에서 법에 의지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법은 인간에게 진실한 실천을 가르쳐 주는 완전한 지혜, 즉 반야바라밀이며, 이것을 국가적인 활동 속에서 구현할 때 비로소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도들은 현실상황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끊임없이 근본불교 이래 불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왕과 국가는 법을 실현하는 기관이라 본다.13) 여기서 말하는 법에 의한 정치는 인륜의 이법을 실현하는 정치를 지칭하는 것이며, 백성 개개인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평등의 관념을 실천하고, 상대적 가치를 존중해 주어야 하며, 그로 인해 자비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비의 구현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여 미생물에게까지 공평하게 미쳐야 한다고 본다. 13) 《용수보살위선타가왕설법요게》, 《금광명경》, 《제법집요경》

국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 본분이기 때문에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성군으로 묘사되고 있었던 전륜성왕과 부처님의 역할은 동일하다고 역설하면서 일체의 왕들은 전륜성왕이 되라고 권유한다. 전륜성왕은 정법을 통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 존재 이유라 본다. 부처님은 정법을 통해 중생들을 전미개오(轉迷開悟)시켜 백성들을 사랑하고 예토를 정토로 바꾸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존재이유라면 전륜성왕과 부처님은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향점이 같을 수밖에 없다.

대승불교에서 정법정치를 구현하는 전륜성왕은 현실적으로 백성들이 의식주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정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올바른 조세정책과 그에 상응하는 사회복지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체적인 정책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가난한 자, 고독한 자, 병든 자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여 자비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계급이 존재했었던 당시의 사회질서 속에서 지배자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불교는 한편으론 사회적 통념을 인정하면서도 국왕이나 국가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하는 반면에 그들도 중생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말한다. 국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것은 백성에 대한 국왕의 보은행이라 보는 것이다.

따라서 국토나 초목은 국왕의 소유물이 아니며,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14) 호혜평등의 입장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연기적 사회관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일반 대중을 기반으로 기존의 보수교단에 반발하여 흥기한 대승불교의 사회적 배경과도 상통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14) 《보행왕정론》, 《대살차니건자소설경》

5) 국가에 대한 출가자의 태도
그렇다면 출가자는 국가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을까. 초기불교에서는 국가의 권력에서 벗어나 승가 자체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으므로 출가수행자가 국왕을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출가자가 국왕을 가까이 하면 열 가지의 과실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15) 15) 《오분율》 권9에 의하면 이것을 突入王宮戒라 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권44와 권45, 《마하승기율》 권20, 《근본살바다부율섭》 제13, 《십송율》제18에도 나온다.

<증일아함경》 제42권 〈결금품〉에서는 국왕을 가까이 하는 출가자는 열 가지 비법(非法)이 생긴다고 가르친다. 나아가 국왕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국왕이 요청하는 일이 있으면 우선 그 일을 들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을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강대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국왕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생각은 출가수행자들은 ‘국가에 속하지 않는 존재’ 즉 ‘국가를 벗어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불교에 한정된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인도사상사에서 구루로 지칭되는 출가자들 일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정교분리 원칙이 일찍이 설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런 점에서 국왕과 마찰을 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국왕이 설사 불교도라 하더라도 “왕이 통치하는 국가의 영토를 칭찬하거나 비방하지 마라. 또 왕이 뛰어나다느니 못났다느니 논하지 마라.”고 말한다. 국사의 인연을 논하는 것은 멸진정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며 사문의 정행법(正行法)을 얻지 못하며, 심지어는 국사를 논하는 것은 정업(正業)이 아니라고 엄격하게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 자체는 승가가 추구하는 이념에 유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단을 정략적으로 이용당할 우려도 했으리라 생각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의에 합당하지 않고, 법에 합당하지 않으며, 범행에도 이르지 않게 하고, 지(智)도 정각(正覺)도 아니고 열반에 이르는 길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잡아함경》 권16).

현실적으로 정치가란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 있다. 권력을 통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백성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생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처님은 국왕(정치가)을 뱀과 같은 존재 혹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훔쳐가는 도둑에 비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왕과 가까이 하는 출가자가 있다면 그는 마음에 사사로움이 있던가 없다고 하더라도 승단의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파탄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승가의 이상과 같은 태도는 역사 속에서 쉽게 지켜질 수 없었다.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국왕과 결탁하거나 권력자와 결탁하여 승단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다. 정교분리의 관념이 일반화되어 있는 인도에서보다는 중국에서 그러한 경향은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소위 중국불교사에서 3무1종의 법난으로 알려진 불교 박해의 이면에는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정치적 이익 내지 사사로운 이익을 탐닉했기 때문에 그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 불교 전래 초기에는 외국 승려들을 중심으로 불교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5세기를 전후로 출가자들 스스로가 왕권에 기생하여 승단의 정체성을 망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이후 당나라 시대 이후가 되면 불교교단은 완전히 국왕의 통제하에 어용불교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미화하여 호국불교라 부르고, 이러한 호국사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인왕호국반야경》과 같은 위경을 만들어 교단과 불교도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도가 되면 근본불교 이래 사회개혁을 통해 불국정토를 건설하고 일체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는 구심점이 되겠다던 불교도들의 염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불교도의 본분이요, 출가자의 본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출가자 스스로 중국 고대의 봉건제도를 모방하여 승가를 조직하고, 출가자 내부에 계급제를 도입하여 왕명을 통해 교단을 통제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현실화되어 버린 이래 현재까지 그것을 대단한 전통인 것처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몇가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동진시기의 석도안(釋道安)은 전진왕 부견(묑堅)의 정치고문이 되어 “국주(國主)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법사(法事)를 세우기 어렵다.”고 말했으며, 당대의 선승 하택신회(荷澤神會)는 향수전(香水錢)이란 면죄부를 팔아 안사(安史)의 난 때 군비로 제공했다. 국사의 예우를 받으며 권력을 향유했으나 불교가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발전하는 데는 기여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당나라 시대 290년에 20여 명의 황제가 출현하는데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모두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불교를 이용한 목적은 ‘사람들의 고난을 위무하고, 투쟁의지를 없애며, 분수를 지키게 만들어 농민봉기를 사전에 차단’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이런 통치술은 자연스럽게 후세에 전달되며, 통치자들의 상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승려들이 앞장서고 있다.

이런 일들이 불교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중국불교가 망하는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근대중국불교부흥을 이끌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구양점(歐陽漸)은 중국불교 패망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선종(禪宗)이라 지적했는데 그 이유는 당나라 시대 이후 가장 권력과 유착했던 종파가 선종이며, 그러므로 불교 교단 본래의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반면에 현재의 중국에서 선종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교단이 본래의 정체성을 버리고 가장 중국화된 불교가 바로 선종이라 보기 때문이다. 역사의 입장은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도에서 지나친 밀교화가 불교의 역사적 퇴장을 재촉한 것이나 우리 나라 고려시대의 불교가 무비판적으로 중국불교를 수입한 이래 권력과 밀착하여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였기에 성리학에 의해 퇴출당하는 비운을 맞이한 것이나 동일한 시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불교의 절대적 영향권 안에 있었던 우리 나라의 불교는 외세에 의해 해방과 더불어 정교분리의 민주제도 아래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으나 자원의 질적 저하와 인식부족으로 인하여 아직까지 권력과의 유착관계가 어떠한 정도인가에 따라 출가자의 지위를 평가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 유신 이후 불교를 박해하자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국민들과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교육사업, 사회복지사업, 문화사업 등에 매진한다. 그 결과 각 종단의 정체성을 침해받지 않고 세계불교계를 이끌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본도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강도가 약하였고, 더하여 종파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동시에 16세기경에 니치렌(日蓮) 같은 승려가 나와 불교적 가치와 사상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후에도 그 영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3. 역사에 나타난 불교와 정치와의 관계

1) 인도의 경우
고대 인도의 통일은 기원전 321년에 찬드라굽타 마우리야가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마우리야 왕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후 3대인 아쇼카 왕은 현재의 인도의 남부 지방 일부를 제외한 인도 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며, 제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출신계급을 불문하고 출가고승에게 절대귀의하여 만나는 승려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그의 양발에 얼굴을 대고 예배하였다.16) 자신이 국왕이지만 왕가의 존귀함을 자랑하기 위해 가계를 조작하거나 혈통의 우월함을 내세우지도 않았다.16) 차차석 역, 앞의책, p.93 참조.

또한 특별한 민족의식을 앞세워 민족의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국가 초월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대제국을 통일한 그가 지닌 자긍심은 법의 수호자 내지 실현자라는 자각뿐이었다. 민족이나 국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법의 실현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의 이상과 같은 자각은 불교적 이상인 정법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국가나 민족, 종교를 초월하여 이 세상에는 누구나 시대를 불문하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영원불멸의 이법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쇼카 왕 자신은 이 법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법칙’이라 불렀다. 그의 정치이념을 민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석주에 남아 있는 조칙(詔勅) 4장과 7장에는 자신의 후손들이 영원토록 법의 실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쇼카 왕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말하는 법이란 법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세에서 법의 실현을 완성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피안의 세계에서는 달성할 수 있는 것”(마애조칙9장)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차원에서 아쇼카 왕은 “법은 선(善)”(마애조칙 2장)이라 정의하며, 법의 실천을 증대시켜 감소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선이라 말하기도 한다.

나아가 “선의 일부분을 상실하는 것은 악한 일을 하는 것”(마애조칙 5장)이라며 극단적으로 선의 실천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쇼카 왕의 이상과 같은 법의 관념은 현실적으로는 매우 실현성이 희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나치게 엄숙한 도덕성을 요구한다고도 느껴지기에 오히려 종교적이라 표현할 수 있다.

또한 구체성이 없는 선이란 관념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지나치게 관념적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아쇼카 왕 자신도 인정하고 “누구든지 선을 행하기 시작한 사람은 행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라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쇼카 왕이 선 혹은 법의 실현을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구체적인 실천 목표는 무엇인가. “실로 지상의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보다 더 숭고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 나는 전세계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마애조칙 6장). 이상의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통치 목표는 마치 석존의 전도선언을 연상케 한다.

인천(人天)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 불교도의 사명이라 설파한 석존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쇼카 왕이 말하는 “전세계의 이익과 안락”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승과 저승에서 이익과 안락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법정치의 궁극적 목표라고 보았던 것이다(마애조칙 1장, 4장, 7장)17) 17) 마애조칙 1장에선 “현세와 피안의 세계에 관한 이익과 안락은 법에 대한 최상의 존경과 사모와 믿음, 그리고 경외감, 노력 등이 없으면 올바르게 행하기 어렵다.”고 말한다.(차차석 역, 앞의책, pp. 98∼105.)

그는 연기론에 입각하여 인간은 서로 돕는 존재이며, 은혜를 주고 받는다고 보고, 정치는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국왕의 보은행(報恩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마애조칙 6장, 7장)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에게 진 채무를 돌려주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안락을 얻고 저 세상에서는 하늘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진일보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아들이라 선언한다.(별애조칙 1장, 2장) 자기 자식을 돌보는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백성을 대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3계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은 나의 자식이라 선언하고 있는 것을 상기하게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정법대관을 시켜 5년마다 인도 전역을 순행하며 감찰하도록 했다.

아쇼카 왕은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영토 곳곳에 조칙을 돌기둥에 새겨 세우도록 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을 도덕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교법대관이란 직책을 만들어 전국을 순행하며, 관리를 감독하고 백성을 교화하는데 주력하게 했다. 나아가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사회사업, 자선사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의 관념 속에서는 법이 미치는 범위가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생명체이었기 때문에 병원, 우물, 여관, 휴게소, 자선사업 등을 시행함에 있어서 동물들을 위한 시설이나 자선까지 강조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백성들의 생명과 생활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성의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보다 더 잔혹한 일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쇼카왕은 정법정치의 구현을 위해 현실적으로 의식주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경제 발전과 산업 발달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농지나 관개시설의 개발과 확충, 농산물의 유통과 원활한 무역을 위한 도로 건설, 산림의 관리와 환경의 정비, 약초와 과수 재배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조세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백성의 조세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자산가인 왕 자신의 소유 재산을 솔선해서 기부했다.

2) 중국의 경우
중국은 인도문화와 달리 독자적인 고유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농본(農本)사회를 배경으로 발달한 한족문화는 가정에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단일 질서를 형성하였고, 이것이 촌락으로 확대되어서는 촌장을 중심으로 하는 예교(禮敎)문화가 되었으며, 국가로 확대되어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사분란한 가부장적 충성의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농본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식이 오랜 시간의 검증과정을 통해 한족문화 특유의 예교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이 문화의 특징은 아버지, 촌장, 천자(국왕)를 중심으로 상명하복의 질서를 탄생시켰으며, 이런 질서의 붕괴는 곧 몰락을 의미했으므로 자식은 효(孝)를 통해, 마을과 국가의 구성원은 촌장 내지 국왕에 대한 충(忠)을 통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극대화시키고자 하였다.

중국 한족문화의 특징은 조직의 중심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그 중심 축은 인륜의 바탕이므로 흔들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국왕의 경우는 하늘이 백성과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의 권한을 위임한 대리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국왕의 권위는 우주를 다스린다고 생각했던 하늘의 권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왕을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에서 천자(天子)라 부르고, 그에 대해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 충성을 강요하게 되었다.

반면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인도에서 발생하여 발전했던 불교는 유교와 달리 국왕의 권위는 백성들이 위임한 것에 불과하며, 국왕 자신도 인간에 불과하므로 인과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국왕신권설을 부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래의 중국 한족문화와 배치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원을 전후로 중국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불교는 전래 초기 그다지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고 있었다. 한편 기층민을 대상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불교는 312년 발생한 영가(永嘉)의 난을 기점으로 새로운 형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한족의 중심지역인 낙양과 장안 지역을 점령한 북방민족 출신의 국왕들에 의해 도래하게 되었다.

점령자인 그들은 사회통합적 이유에서 혹은 이민족 출신도 국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종교가 불교라는 이유에서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고 신행하게 되었다. 일부 귀족을 제외하고는 서민대중을 상대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불교계에는 더없이 좋은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국가적인 후원과 실크로드 내지 해로를 통해 들어온 수많은 승려들의 역경과 포교는 불교가 중국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종교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국왕들은 고승을 자신의 스승으로 섬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서역 출신의 고승들은 국왕의 스승으로서 국왕에게 정치적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출가자들은 국왕의 신하가 아니라 방외지사(方外之士)로서 왕권에 예속되지 않고 교권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불도징(佛圖澄, 232∼348)은 화북(華北) 지방의 패자가 된 후조왕(後趙王) 석륵(石勒)과 석호(石虎)의 존경과 귀의 속에서 불교의 번영을 유도하며, 그의 제자인 도안(道安)은 교단을 정비하여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당당한 종교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된다. 이러한 불교세의 팽창은 수구적 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유교 내지 도교세력의 비판과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출가자도 국민의 일원인 이상 국왕의 신하가 아닐 수 없으므로 국왕에게 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출가자가 국왕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승단의 독자적인 교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이며, 교권이 왕권에 예속되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홍명집》 권12에 의하면 배왕론(拜王論)을 둘러싼 논쟁은 동진 함강 6년인 340년 유빙(庾氷)이 처음 문제를 제기한 이래 403년 태위 환현(桓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된다. 배왕론은 한족 전통사상에 비추어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불교적 입장을 담아 발표한 것이 혜원(慧遠)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출가자는 국왕에게 절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나름의 논리에 의거하여 작성한 논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불교적 정치를 희망했던 최초의 국왕으로는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무제를 들 수 있다. 그는 504년 불교에 귀의하며, 511년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517년에는 희생(犧牲)제도를 폐지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며, 종묘의 공물에 채소와 과일을 사용하였다(《양서》 권2, 무제기). 평등정신에 입각하여 도속(道俗)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선비와 서민을 차별하지 않았다. 수륙대제를 열어 수륙 일체의 생물에 이르기까지 덕화를 미치고자 하였다. 인도의 아쇼카 왕과 같은 정치를 꿈꾸었지만 지나치게 불교에 몰두하고 이교도를 박해하였기에 양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북위시대에는 황제를 법신불의 화현으로 간주하는 논리가 등장하여 사문들은 누구나 황제에게 절해야 한다는 배왕론을 합리화시키게 된다. 이 시기의 명승 담요(曇曜)는 북위의 태조 도무제부터 당시의 황제 문성제까지 5대의 황제를 위하여 석가입상(釋迦立像) 5체를 조각하여 운강석굴 제16동부터 제20동까지 모셨다. ‘황제가 바로 여래’라는 북조불교의 전통에 따른 것인데 석가입상의 얼굴은 황제의 얼굴이라 한다. 이런 사실은 교권이 완전히 왕권에 복속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위서》 〈석노지〉에 의하면 법과(法果)란 스님은 도무제를 현존여래로 칭송했다. 또한 도성 전체를 하나의 사찰로 간주하고, 그곳을 주관하는 국왕을 여래로 받들었다는 것이 《광홍명집》에 나오는데 북주 때 위원숭(衛元崇)이 주창한 평연사(平延寺) 제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승단통제는 북위시대에 시작되어 교단과 승려, 사원은 국가가 임명하는 승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형법상으로도 승려들은 국법의 관리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남북조가 끝난 뒤에도 교권의 예속은 지속되며, 수당 이후는 보다 철저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국가의 권력이 강대해지면서 방외(方外)의 존재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760년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의 제자인 영도(令韜)가 국왕에 대해 신(臣)을 자처한 이래 모든 승려들은 국왕에게 절하며 신하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중국불교의 경우는 교권과 왕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결국은 교권이 왕권에 예속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비운을 벗어나지 못하며, 불교적 사상에 입각한 정치는 이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불교도 스스로도 불교는 단지 수행을 중시하는 종교이므로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편견에 최면이 걸려 왔던 것이다.

당나라 시대는 태종의 도교우위 정책, 무측천의 불교우위정책, 예종의 도불평등정책의 과정 속에서도 일관되게 통치의 방편으로 불교를 이용하고, 교단이 비대화되는 것을 막고 있다. 불교교단의 왕권의 예속을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찰과 통제를 가하며, 이런 과정 속에서 불교도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수행과 현담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방립천(方立天)18)은 불교와 중국정치의 관계에 대해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8) 방립천, 《중국불교와 전통문화》, 상해인민출판사, pp.252∼254.

첫째, 해탈과 출세를 표방하여 현실적인 정치이론이 부족하다. 중국정치사상사에서 불교는 중요한 지위를 점유하지 못하며, 단지 봉건통치층과 직접 관계하며 하층민중의 반봉건투쟁을 억제시키는 데 일정 정도 기여했다.
둘째, 중국 역사상 전개된 4대 박해 사건은 정치와 경제상의 이익이 상충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즉 사원의 증가와 사원경제의 팽창은 토지, 노동력, 재원, 병력의 자원 등 각 방면에서 통치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저해했다는 점이다.
셋째, 중국불교가 봉건사회의 모순과 투쟁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변화한 것은 새로운 역사와 지리의 조건에 순응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두 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우선 봉건통치를 위해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그 하나는 봉건왕권의 합리성을 위해 신학적 논리를 제공한 점, 그 둘은 고승들이 직접 통치자를 위해 지모와 계책을 제공하고 군정(軍政)에 참여하여 정책을 결정한 점. 그 셋은 민중의 마음을 마취시켜 반봉건의 투쟁의지를 꺾어 역사발전에 역기능을 표출했다는 점, 즉 일체개공, 초탈속세, 인과응보, 천당지옥, 용서와 조화, 공경유순 등의 해석이 그렇게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매우 역설적이지만 불교의 추상적 이론들이 고대농민을 위해 열정, 환상, 호소, 농사를 벗어나는 것 등을 제공하여 군중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도구가 되었다. 즉 이상, 희망, 도덕, 평등, 자애, 보도중생(普渡衆生), 자아의 희생, 전생담 등의 이론이 그것이다. 이런 논리들은 대중의 개혁의지와 봉기, 혁명의지를 자극하였으며, 진보적인 인사들이 왕왕 이용했다.

이상에서 지적한 북경인민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방교수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그의 지적들을 참고로 반성해 본다면 현재 우리 나라 불교계가 수행을 강조하고, 그것에 집착하며 사회와의 융합에 등한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불교의 미래를 창출할 에너지의 결핍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성이 크다고 하겠다.

다만 중국의 정치적 변혁기 혹은 민중 봉기시에 미륵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회변혁이 시도되기도 한다. 미륵이 당대에 하생하여 용화세계를 건설한다는 《미륵하생경》의 사상은 민중봉기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6세기 초 북위 왕조를 위협했던 대승적(大乘賊)의 난을 비롯하여 수나라 초에 백의(白衣)와 향화(香花)로 단장한 미륵 소집단이 미륵의 출세를 외치며 낙양에 들어간 사건, 미륵을 자칭하는 송자현(宋子賢)의 집단이 수양제의 행렬을 습격한 사건, 섬서지방의 향해명(向海明)이 미륵의 화신임을 자칭하면서 민중을 모아 황제를 칭하다 실패한 사건 등이 있다.

또한 원, 청, 명시대를 걸쳐서 존재했었던 백련교도들의 정치운동 등 미륵신앙에 의지한 민중운동이 수없이 발생19)하였지만 결국은 모두 왕권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이런 운동들은 승단의 지도자인 승려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닌, 당사자 개개인의 필요성에 따라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전체 불교도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 아니며, 때문에 지속적인 뒷받침과 교단적 의지가 부족했으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교 치국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19) 황선명 외 지음, 《한국근대민중종교사상》, 종로서적, pp.240∼241.

4. 맺는 말

이상에서 불교의 정치적 이념과 그런 이념들이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인도는 문화의 속성상 교권과 왕권이 엄밀하게 분리되어 있었으며, 교단의 독자적인 발전 속에서 사회변혁을 유도해 왔다.

국왕 역시 그 사회적 역할에 따른 권위를 인정하되 권한의 범주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국왕 역시 교화의 대상이었으며, 백성을 위한 통치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불교적 이상에 따른 통치를 실현하고자 한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 왕이 등장하여 불교적 정치의 이상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처음에 교단의 독자성을 지키며, 토착화를 시도한다. 시대의 경과에 따른 중국의 정치적 변화, 특히 북방민족의 중원 통치는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그 반대급부로 불교는 국가의 공인과 보호를 받으며 국가불교로 성장한다. 교단의 팽창과 교세의 확장은 보수정치세력들의 비판과 견제를 야기하며, 2∼3세기에 걸친 지루한 배왕논쟁은 5세기 전후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것은 불교교단의 왕권에 대한 복속을 시사한다.

교단의 독자성 상실은 불교적 정치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숭상하는 국왕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며 통치방법이나 이념은 유교에서 찾게 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등장하여 이민족 출신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으나 정치이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중국 고유의 문화 속에 융합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노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중국문화의 강한 영향권에 존재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중국을 모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삼국시대 이래 불교의 전래와 동시에 국가불교로 성장하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불교치국(佛敎治國)을 꿈꾸지 못했다. 왕조교체기 혹은 사회혼란기에 미륵사상에 의거한 사회변혁 내지 건국을 시도한 예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별도의 장을 마련하여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차차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저역서로 《불교정치사회학》 《구도자의 나라》(공저) 《불교상식백과》(공저) 《중국불교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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