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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의 정치실험, 공명당의 한계와 비전 / 조성렬
[기획] 종교와 정치 그 갈등과 유착의 관계
[7호] 2001년 06월 10일 (일)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

1. 일본에서의 정치와 종교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헌법 속에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현실의 정치에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미치는 종교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회교를 국교로 삼고 그 원리에 따라 통치하는 이란 등 종교국가를 예외로 친다고 해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종교는 어떤 정당의 지지기반이나 이익집단으로서 또는 정치세력의 정강·정책에 도덕적 정당성 부여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해 오기도 하였다.

서구 국가들 가운데에는 종교를 표방한 정치세력이 정당을 만들어 집권당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독일과 이태리에서 기독교민주당은 2차 대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집권당으로 군림해 왔다. 이처럼 정교분리의 원칙과 종교를 표방한 정당활동은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면서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표방하는 종교적인 이념과 현실적인 정치적인 활동 사이에는 간극과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경우도 불교종파의 신도단체인 창가학회가 정당을 만들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종교단체인 창가학회가 공명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많다. ‘정교분리론’의 관점에서 창가학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종단과 신도단체의 관계 및 종교단체와 정당활동의 관계라는 두 측면에서 제기되어 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91년 11월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총본산인 다이세키사(大石寺)의 주지가 창가학회의 해산을 권고하여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일련정종 종단측과 신도단체인 창가학회 사이의 갈등관계가 표면화되었으며, 그 뒤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의 신도단체라는 기존의 성격을 벗어버리고 독자적인 종교단체로 성격을 바꾸는 등 파란을 맞기도 하였다.

‘정교분리론’의 입장에 선 정치권의 창가학회 비판과 반대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는데, 1994년 자민당이 야당이던 시절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전 건설상이 주동이 되어 자민당의 지지단체였던 불교계의 입법교성회(立法敎成會), 영우회(靈友會), 불소호념회(佛所護念會), 신생불교교단(新生佛敎敎團), 진언종금비라존류(眞言宗金毘羅尊流)와 신도계(神道系)의 신사본청(神社本廳) 등을 규합하여 창가학회를 반대하는 종교단체의 모임인 4월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종교단체의 정당활동에 관해 일본 정치인들이 가진 부정적인 인식은 1995년 당시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의 다음 발언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종교는 한 사람의 교조의 가르침을 원리로 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의회제 민주주의와 양립하지 않으며 종교가 정치의 중심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2. 불교이념의 정치적 구현을 위한 실험, 공명당의 창당

창가학회의 모태인 일련정종은 니치렌(日蓮, 1222∼1282)이 일본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연 토착 불교종파이다. 종조(宗祖)인 니치렌은 국가이익보다 개인의 신념을 우선시킨 인물로, 《법화경》이 설한 진리에 귀의한다는 의미의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암송하고 《법화경》의 초월적 진리를 믿으면 개개인의 영혼이 구제되고 나아가서 그것이 국민 전체의 구제로 이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 전체가 일련정종으로 개종(改宗)하지 않으면 외국으로부터 침략당하는 것은 물론 온갖 재난을 맞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실제로 몽골군이 쳐들어오면서 일본열도는 혼란에 들어갔고 민중들의 삶이 고통 속에 빠지게 되자,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하여 니치렌의 명성은 일본 전체로 널리 퍼져나갔다.

니치렌은 지배계급의 타도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귀족계급이 스스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정토종 등 기존의 종파들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른 종파를 공격한 탓에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형은 면하고 후지산 서편의 미노부산(身廷山)으로 유배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니치렌은 그가 꿈에 그린 인류구제를 위한 총본산을 후지산 기슭에 두었다,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일본 전체로 교세를 확장해 나가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교단체로 성장하였다.

일련정종이 근대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이다. 일련정종의 신도조직으로 후지미야(富士宮) 시(市)의 다이세키사(大石寺)를 본산으로 창가학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1930년 마키구치 츠네사부로(牧口常三郞)가 창가교육학회를 만들었고, 1946년 창가학회로 개칭하여 도다 죠세이(戶田城聖)의 지도 아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현재 창가학회는 기관지 《세이쿄(聖敎)신문》을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창가학회는 독특한 신앙과 특유의 적극적 포교활동으로 중소 영세상공업자와 그곳에 종사하는 미조직노동자, 중노년·부인층 등 도시의 중하층을 조직해 나갔다. 창가학회의 회원수는 1951년 6천 명에서 1955년 30만 명으로 성장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본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755만 명으로 급신장하였다. 2000년 말 현재 창가학회의 회원수는 공칭 800만 명을 자랑하고 있다.

창가학회가 추구하는 목표는 당초 국회의 결의를 통해 일련정종의 국교화(國敎化)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단계적인 전략의 하나로 정계진출이 추진된 것이다. 1954년 창가학회는 중앙본부에 문화부를 만들어 처음으로 정계진출을 준비하였으며, ‘광선유포(廣宣流布)’와 ‘국립계단(國立戒壇)’의 건립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1955년 지방선거에 처음 도전했다. 그 이듬해인 1956년에는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3명의 당선자를 내었으며, 1959년 참의원 선거에는 6명이 출마하여 전원 당선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일련의 승리를 바탕으로 1961년에는 외곽정치단체로서 공명정치연맹을 발족시켰고, 1962년 참의원 선거에서 9명을 당선시켜 참의원 내에서는 사회당에 이어 제2의 야당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1964년 11월 공명정치연맹을 공명당으로 발전적으로 해소시켰고, 동시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제31회 총선거에서 중의원에 처음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총선거에서 중도정치(中道政治)를 표방한 공명당은 중의원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 선거에서 창가학회 회원들의 열성적인 선거운동으로 공명당은 중의원선거에 처음 후보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득표율 5.4%, 당선자 25명이라는 승리를 거두었다. 2년 뒤에 실시된 1969년 제32회 총선거에서 공명당은 더욱 약진하여 득표율 10.9%, 중의원 당선자수 47명이라는, 1967년 중의원 선거결과의 두 배에 가까운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69년에서 1970년에 걸쳐 공명당은 이른바 ‘언론출판 방해사건’이 일어나 상당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언론출판 방해사건’이란 후지와라 히로다쓰(藤原弘達)가 쓴 《창가학회를 처단한다》는 책의 출판을 앞두고 공명당의 다케이리 요시카쓰(竹入義勝) 위원장이 자민당의 다나카 카쿠에이(田中角榮) 간사장에게 출판 저지를 부탁했다가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공명당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어 결국 1972년 총선거에서 공명당은 29석을 얻는 데 그쳐 의석이 18석이나 감소당하는 대패를 맛보았다.

이 사태를 계기로 공명당은 당개혁을 선언하고, 당간부가 학회회원직을 사퇴하고 당과 학회의 기구를 분리하여 새로운 당강령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공명당은 공식적으로는 종교색이 없는 인간성 존중의 중도주의 국민정당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었다.

3. 이상과 현실: 공명당의 정치이념과 정책

1) 중도정치와 평화주의
공명당은 그 전신인 ‘공명정치연맹’ 시대부터 대중의 이탈을 우려하여 기본의 보수·혁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책, 즉 사회의 번영이 곧 개인의 행복과 일치한다는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입정안국(立正安國)의 정신을 근본”으로 하여 “근대적으로 최고로 민주적인 정치단체로 활동”하여 “일체의 부정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세상을 바로 잡는다’는 자세는 공명당의 창당선언이나 강령에도 나와 있다. 창당 당시 공명당은 불교용어나 독특한 신조어를 많이 사용하면서 매우 추상적인 내용의 기본정책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첫째, 왕불명합(王佛冥合)과 지구 민족주의에 의해 세계 항구평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둘째,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주의가 가진 상호결함과 모순을 극복하는 인간 사회주의에 의해 대중복지를 실현한다.
셋째, 인간 존중을 기조로 한 불법 민주주의(佛法民主主義)로 대중과 함께 전진하는 진실한 대중정당을 건설한다.
넷째, 부패선거를 철저히 배격하고 부패정치와 싸워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한다.

이처럼 초기강령은 ‘왕불명합(王佛冥合)’, ‘불법 민주주의(佛法民主主義)’ 등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가 짙게 깔린 내용을 내걸었다.

그런데 1966년 당시 창가학회의 회장이었던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가 천태교학(天台敎學)에서 나온 중도의 이념을 독특하게 해석하여, 공명당은 창당 당시 내걸었던 ‘세상을 바로 잡는다’는 입장이 후퇴하고 ‘묘법(妙法)의 중도주의’를 당의 기본노선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공명당은 1967년 총선거를 앞두고 “중도정치”와 “평화와 번영의 신사회 건설”을 기본 모토로 내걸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청결한 민주정치의 확립”, “대중복지로 넉넉한 생활”, “전쟁 없는 평화세계”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970년 당 대회에서 공명당은 어려운 불교용어를 피하고 보다 대중적인 현재의 강령으로 바꾸었다. 바뀐 현 강령에서는 “인간성 존중의 중도주의를 관철하는 국민정당”으로 규정하고 동시에 “혁신의 의지와 실천을 가지고 대중과 함께 전진한다.”고 하여 스스로 중도혁신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강령은 ‘인간성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을 우선으로 하는 대중복지주의를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취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 사회주의’란 책임 있는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그 성과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행복을 함께 실현하는 복지사회의 건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공명당의 강령에서 말하는 ‘사회주의’ 개념은 매우 모호하며 공산당이나 사회당처럼 현 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강령에서는 “모든 민족이 지구인이다.”라는 입장에서 “평등호혜,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의해 자주외교를 추진하여 인류영원의 번영을 추구한다.”고 밝히고, “일본국 헌법을 지키고 종교·결사·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을 옹호하고 일체의 폭력주의를 부정하여 의회 민주주의의 확립을 꾀한다.”고 내걸고 있다.

2) 흔들리는 ‘중도정치’와 보수화
창가학회와 공명당은 기본적으로 한 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조직의 위상 차이에 따른 정책성향과 기본정책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창가학회가 현세이익을 추구하는 신도단체여서 독특한 신앙에 기반을 둔 일종의 원칙성·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반해, 공명당은 현실정치의 동향이나 여론의 추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상황의 변화에 대해 기본정책이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한때 온건정당화를 노리고 민사당과 ‘중도’의 본가(本家)라는 자리를 놓고 서로 이념적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공명당은 지지자층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주의나 상황 추종의 경향이 강해 공명당의 결성 이후 정책이 좌우로 변화되어 왔다. 공명당은 1972년 총선의 패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안보정책에서 혁신적인 색채를 농후하게 띠게 되었다. 자민당의 안보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한편, 1974년에는 창가학회의 이케다 타이사쿠(池田大作)와 공산당의 미야모토(宮本) 위원장이 반파시즘 공동전선의 구축을 목표로 ‘창공(創共) 10년 협정’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원래 공명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출발부터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공명당이 창가학회라는 종교를 바탕으로 한 데 비해, 공산당은 종교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발상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데, 공산당은 경제적 조건의 개선을 중시하는 데 비해 공명당은 인간의 변화에서 사회발전을 찾고 있다. 무엇보다 공명당과 공산당이 화해하기 어려운 점은 서로 지지기반이 중첩된다는 점이다. 공산당은 도시서민층에 지지자가 국한되어 있는데, 공명당 역시 주로 도시 서민층이나 저소득층, 여성이나 노약자 등 사회 소외계층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다.

공명당 최고지도부가 국면전환을 위해 ‘창공 10년 협정’이라는 승부수를 던지려 했지만, 지지기반의 동요와 이탈을 우려한 공명당 간부들이 이 협정에 반발하여 오히려 반공주의의 강화를 요구하며 이 협정을 사문화시켰다. 이 때문에 이후 공명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더욱 불신과 갈등의 관계로 나아갔다. 공명당이 고집하는 반공주의는 종교적인 이유와 지지층의 보수적 의식 때문에 나온 실리주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민사당의 반공주의가 나름대로 이념적인 논리에 바탕을 둔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공명당은 1955∼1993년 사이 자민당의 안정적인 일당지배가 유지됐던 이른바 ‘55년 체제’ 동안에 중도노선을 걸어왔다. 그러나 공명당은 종교정당의 한계, 종교단체에 대한 과세편의와 탈세문제, 지도부의 스캔들 등 약점 때문에 실제로는 야당과의 연대보다는 자민당, 특히 보수본류인 다나카파와 다케시다파 및 오부치파, 하시모토파로 이어진 후속파벌들, 그리고 그 아류인 오자와 세력과 유착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공명당은 1974년 무렵부터 자민당, 사회당 양당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노리고 정책방향을 우선회(右旋回)하였다.

결과적으로 공명당은 중도노선의 기치를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에 협조하였고, 자민당과의 유착관계를 통해 자민당의 장기집권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명당의 정치노선이나 정책이 자민당과 같은 보수적인 색깔만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명당은 중도주의의 이념 아래 좌우세력의 역학관계 속에서 상황에 따라 이동하는 균형점을 모색하면서 당의 방침을 결정하였다. 또한, 상황과 여론에 따라 국민의 이익이 되는 정책을 선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미일안보체제의 지속과 자위대의 당면 존속 등 자민당의 정책과 합치될 수 있는 현실주의노선을 취하면서도, 상징적 천황제의 유지·헌법 제9조의 전쟁포기 조항 유지, 등거리 완전중립의 외교정책 등 독자적인 중도정치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밖에도 영주권을 가진 재일동포에게 지방참정권을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인권과 평화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인 지지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4. 정교분리론과 공명당의 정권참여

1)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조직적 일체성
공명당은 당원 약 17만 명, 기관지 일간 《공명신문》 80만 부를 발행하는 등 공산당 다음으로 조직적인 대중정당으로 발돋음하였다. 그러나 당조직은 1972년 정교분리를 선언한 이후에도 거의 전적으로 창가학회의 조직기반에 의존하고 있다. 당원의 충원은 창가학회의 회원 가운데에서 주로 공급되고 선발되고 있으며, 공명당의 주요 자금원도 역시 창가학회이다. 공명당 조직의 최대 강점은 창가학회=공명당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조직력과 안정된 득표력으로 다른 정당들보다 높은 당선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창가학회와 공명당은 한 몸이 되어 양자의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영세상공업자 등 도시 구(舊)중산층의 헤게모니에 기반을 두고 독특한 좌담회 운영방식을 취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미조직 노동자나 저소득층 사이에 급속히 지지를 얻어나가면서 선거 때마다 경이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공명당의 조직이 나름대로 도도부현(都道府縣) 차원까지 본격적으로 정비되는 등 근대적인 정당형태를 띠게 된 것은 1970년 이후이다. 현 공명당의 지방조직은 도도부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중의원 선거구에 맞게 재편된 총지부가 있고, 이를 기반으로 각급 의원 중심의 지부가 있다. 이 조직구성이 나타내고 있듯이, 공명당의 원외조직의 역할은 중의원 선거를 중심으로 한 집표활동이다.

공명당은 ‘언론출판방해사건’ 이후 ‘정교분리(政敎分離)’선언을 발표하였지만, 1972년 총선거에서 참패하자 이듬해인 1973년에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관계는 사실상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였다. 공명당은 줄곧 창가학회의 전위역할을 하고 있고, 특히 현 명예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1970년 이전의 옛 규약에는 모든 권한이 당위원장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위원장이 지명하는 인원들로 중앙간사회가 구성되었다. 이 중앙간사회는 의결과 집행의 기능을 겸한 강력한 지도집단이었다. 또한 당위원장은 당대회에서 지명한다고 규약에 명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케다 회장이 다케이리 요시카즈(竹入義勝)를 발탁하여 당위원장에 지명하고 당대회에서는 이를 추인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공명당 당대회도 창가학회 총회처럼 질의 없는 만장일치로 진행되는 대회였다. 이렇게 공명당의 조직은 종교적 권위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어 여론의 비판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76년 당규약의 개정 이후 공명당 조직운영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수정되고 당위원장, 서기장을 비롯한 당 요직은 대회에서 선출하고, 중앙간부회는 결의기관과 집행기관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대회 대의원은 하부에서 선출되는 것이 명기되어 최근 당대회에서는 집행부 제안에 대해 대의원들이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공명당은 한때 산하에 민주노동협의회라는 전국적 조직센터의 구축을 고려한 적이 있지만 무산되었다. 그러나 공명당은 당외 후보자의 선발, 기관지 《지(誌)》에 대한 당외 기고문의 수용, 민주음악협의회의 종합잡지 《조(潮)》의 보급 등을 통해 세력확대를 노리고 종교정당이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명당은 강한 종교색으로 일본의 일반국민들로부터 종교정당이라는 거부감이 매우 강하여 일정한 의석수는 획득할 수 있었지만, 의석의 대폭 신장이 불가능한 한계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2) 정교분리론에 대한 첫 도전과 시련 : 공명당의 야당연립정권 참가
공명당의 최대과제는 어떻게 하면 종교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고 보수-혁신의 대결체제 속에서 중도정당의 위치를 확고히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공명당이 한계정당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채택한 것이 연립정권 구상이었다. 공명당이 착안한 것은 자민당 중심의 일당우위체제와 야당의 다당화 구조 아래에서 완충정당(Buffer Party)의 역할이었다. 정책 거리에서 볼 때, 공명당은 유럽의 연립정권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도정당의 성격을 가지면서 좌우 정당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명당은 안정된 지지기반과 원내 세력을 바탕으로 몇 개의 다른 정당들을 연결하는 완충역할을 모색하기 위해 연립정권 구상을 실현할 연립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이러한 정권구상이 실현된 것은 1993년에 들어와서이다. 1993년 7월 18일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23석으로 과반수 256석에 못 미치는 참패를 당하였고, 마침내 37년에 걸친 자민당 1당 지배체제는 종식되었다. 이때부터 자민당이나 야당들은 공명당을 연정(聯政) 파트너로 하는 연립정권안을 속속 내놓았다. 그러나 공명당이 선택한 것은 자신들과의 유착관계에 공을 들여온 자민당 중심의 연립정권 구상이 아니라, 반자민당의 기치를 들고 성립된 신생당, 민사당, 일본신당, 신당사키가케 등 8개 정파 야당연립정권이다.

이러한 8개 정파 야당연립정권의 발족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와 신생당을 결성한 구(舊)다케시다파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와 창가학회 명예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이다. 오자와가 오부치 전총리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뒤 자민당을 뛰쳐나가 신생당을 결성한 뒤 실시된 총선거에서 마침 자민당이 참패하자,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적극 나서서 연립정권의 발족에 나선 것이다.

당시 야당연립정권 내의 의석분포를 보면, 공명당이 51석을 차지하여 오자와의 신생당 55석과 비슷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공명·신생 두 당의 의석을 합치면 106석으로, 연립정권 내 사회당의 의석 70석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립정권의 구성과정에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와 공명당 서기장 이치가와 유우이치(市川雄一)가 여당 제1당으로서 주도권을 행사하였으며, 이러한 양당의 공조체제를 가리켜 일본언론들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이치(一)를 따와 ‘이치-이치 라인’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자민 연립정권은 내부 갈등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1994년 4월 호소카와(細川) 총리가 사임하고 하타(羽田)내각이 출범하였다. 공명당은 신내각에도 적극 참여하여 6개의 각료직을 확보하였는데, 이시다 위원장이 총무처장관으로 입각한 것 외에 건설성, 운수성, 우정성 등 이권(利權) 부처의 각료직을 차지하는 등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자민당의 불신임안 제출로 제2차 야당연립내각은 같은 해 6월 막을 내리고, 공명당은 다시 야당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연립정권에서 물러난 공명당은 신생당, 일본신당, 민사당, 사회당 우파 등과 힘을 합쳐 보수·중도의 통합정당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공명당이 독자적인 당의 깃발을 내리면서까지 ‘신진당’이라는 새로운 통합정당에 합류했던 것은 당시 선거제도가 기존의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로 바뀌면서 소수정당으로는 총선거에서 자민당에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깔려 있었다.

1995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이례적인 낮은 투표율 아래 창가학회의 득표력을 배경으로 신진당은 40석을 얻어, 자민당의 49석에는 못 미친 것이지만 자민당의 의석을 잠식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자민당으로부터 신진당의 결속력을 와해시키려는 정치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 주요공격대상은 신진당의 핵심세력인 구(舊)공명당 그룹이다. 공명당 그룹을 신진당으로부터 분리시켜 내는 것이 자민당의 노림수였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이른바 옴진리교(オム眞理敎)사건이었다. 1995년 신흥종교인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 역내에 ‘사린’ 독가스를 살포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이어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은 종교법인의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개정을 추진하였다. 규제가 강화된 ‘종교법인법’의 개정내용을 보면, ① 종교법인의 관할관청을 광역 지방자치단체에서 문부성으로 이관하고, ② 관할관청에 재무관계 서류 등의 보고를 의무화하고 한정적인 조사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교법인법’을 개정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옴진리교가 2개 현 이상의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담당 관청의 대응이 지체될 수밖에 없고, 현행법이 도시화·정보화의 진전 등 사회적 변화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어서 개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법개정의 정치적인 이유로는 당시 하시모토 총재와 가토 고이치 정조회장 등 자민당 지도부가 야당인 신진당의 오자와 당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구)공명당·창가학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특히 (구)공명당·창가학회에 적대적인 입장의 가토 고이치가 자민당 총재선거 이후 새로운 연정파트너 구상에서 이들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사전포석의 의미가 짙은 것이다.

이 때문에 공명당 세력이 참가하고 있던 신진당은 종교법인의 활동 내용을 보고할 것, 정보공개의 의무를 부과할 것 등 ‘종교법인법’ 개정안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연립여당은 9월말 임시국회에서 ‘종교법인법’ 개정을 추진하였고, 공명당 세력은 신진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 찬성 다수결로 통과되는 참패를 맛보았다.

이듬해인 1996년 10월 총선거에서는 자민당의 의석이 늘은 반면, 신진당은 줄어들어 사실상 패배하였다. 전년도의 ‘종교법인법’ 개정의 저지실패에 이어 총선거에서도 패배하자, 그 동안 신진당을 주도했던 오자와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신진당 내 최대세력인 (구)공명당 그룹 내에서 잇달아 제기되면서 당의 결속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자와 간사장이 자민당과의 보-보(保保)연합노선을 주장하자, 공명당 그룹은 크게 반발하여 탈당 움직임을 보였다.

1998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명당 그룹은 오자와의 보보연합 추진으로는 선거 승리가 어렵다고 보고 당의 노선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으며, 창가학회 내에서도 신진당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었다. 결국 이러한 공명당의 위기감은 신진당으로부터의 이탈을 촉진하여 마침내 1997년 12월 신진당은 해산되고, 공명당 그룹은 신당 평화 등 창가학회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1998년 11월 재차 공명당을 결성하였다.

3) 정교분리론에 대한 두번째 도전 : 자민-공명-보수 연립정권
1998년 참의원선거에서 공명당은 참패를 우려하여 당의 노선전환을 모색하면서 신진당에서 이탈했지만, 결과적으로 1998년 참의원선거에서는 예상외로 집권 자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자민당은 중의원에서는 263석으로 500석 가운데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참의원에서는 과반수 127석에 23석이나 모자라는 104석에 머물렀다. 따라서 제1당인 자민당은 정국안정을 위해서는 야당과의 연립정권 구성을 피할 수 없었다.

처음에 자민당은 미일 신(新)가이드라인 관련법의 조기 통과에 동조하는 오자와의 자유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했으나, 자유당의 참의원 12의석으로는 여전히 과반수 확보에 성공할 수 없었다. 1998년 12월 미국의 켐벨 국방차관보 대리는 도쿄를 방문하여 자민당의 야마사키 타구(山崎 拓) 정조회장을 만나 신가이드라인의 조기 성립을 요청하면서 일본 국회에서 공명당의 협력을 얻는 것이 불가피하므로 공명당과 정책협의를 갖도록 촉구하였다.

자민당은 종교색이 짙은 공명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할 경우, 자당의 이미지 실추와 친자민당·반공명당 성향의 타 종교단체의 표를 잃을 우려, 국회의 법안처리에서 중도노선인 공명당의 의향을 배려해야 하며 그에 따라 정책체계에 혼선을 초래할 가능성 등을 들어 신중론도 있었으나, 참의원에서 과반수 미달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민당은 공명당과의 연정도 추진하여 1999년 3월 자민·자유·공명당의 3당 연정 구성원칙에 합의하였고, 오랜 논의 끝에 1999년 10월 연정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자민·자유당과 보수연정에 대해 공명당과 창가학회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었다. 신중론자들은 보수연정에 공명당이 참가하는 것에 대해 그 동안 반자민당 활동을 해왔는데 갑자기 자민당과 연대를 추진하는 것은 지지자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었으며, 또한 총리 선출 때 자민당이 자신들을 이용만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감을 표명하였다. 특히 반자민당의 뿌리가 깊은 창가학회 내의 여성부와 청년부가 신중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창가학회의 대표들은 대체로 연정참여를 지지하였으며, 공명당의 칸자키 다케노리(神崎武法)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지도부가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먼저 도시지역에서 선거협력을 통해 소선거구제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함이고, 또한 국회운영에서 자민당이 추진했던 종교법인에 대한 규제강화나 이케다 다이사쿠 명예회장 등 창가학회 간부의 증인심문 등을 피할 수 있게 되는 점 때문이다. 정책면에서 이미 공명당이 주장한 상품권 구상이 실시되었으며, 공명당의 소자화(少子化) 대책의 관철로 ‘복지중시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반면, 공명당은 자민당과의 연정 구성으로 지지자들이 이탈할 우려가 생기게 되었고, 민주당이나 연합노조인 렌고(聯合)의 표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창가학회와 공명당이 반대하고 있는 ‘통신도청법’ 등이 법안에 찬성을 강요받게 될 수 있고, 당내 반발표가 나올 수도 있었다.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의 찬성은 ‘평화, 인권, 복지’를 내건 공명당의 정책이념과 상반되는 모순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개헌문제와 관련하여 연립정권의 참가 이후 공명당은 자민당과의 정책협조와 창가학회의 입장 사이에서 궁지에 몰렸다. 공명당은 ‘국민주권, 항구평화주의, 기본인권의 존중’ 등 3원칙과 헌법9조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자민당이 주장한 헌법논의기구를 설치하는 데 합의하였다. 공명당은 헌법조사회 내에서 미묘한 입장에 빠져 있는데, 후원단체인 창가학회가 호헌(護憲)의 성격을 짙게 나타내고 있고 공명당 또한 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호헌에 가까운 논헌(論憲)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민·자유·공명의 3당 연립정권은 오자와 자유당의 이탈로 위기를 맞았으나, 자유당 잔류세력들이 보수당을 창당하여 재차 자민·보수·공명의 3당 형태로 연립정권이 유지되었다. 2000년 4월 모리 내각이 출범한 뒤에도 자민·공명·보수당과의 연립 기조는 계속 유지되었으며, 2001년 4월 새로 출범한 고이즈미 내각에서도 공명당은 연립정권의 구성에 참여해 오고 있다. 그러나 신내각에서 공명당과의 연립에 적극적이던 하시모토파가 사실상 배제되고, 반공명당 노선의 가토 고이치 전 간사장 등이 득세함으로써 연립정권의 장래는 그다지 밝은 것이 아니다.

5. 아직도 끝나지 않은 창가학회의 정치실험

창가학회의 정치적 실험, 즉 공명당은 의회 내의 의석 확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명당은 어떠한 정치적 기반도 없는 가운데 1956년 처음으로 참의원에 후보자를 내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2001년 7월 초 현재 참의원 24석, 중의원 31석을 차지하여 일본 내 제3당이라는 만만찮은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2000년 6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공명당은 비례대표의 총득표수 776만표를 획득함으로써 약 800만에 달하는 창가학회 회원의 조직적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공명당은 야당의 위치에서 자민당 등 기존정당과 싸움에서 초기까지는 탄탄한 종교적 기반 덕분에 어느 정도 중견정당의 규모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명당이 종교정당이라는 점은 거꾸로 더 이상 당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앞의 총선거에서 공명당은 젊은 층이 주축이 된 무당파층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는데, 선거개표 결과 무당파층의 37%가 민주당을 지지한 반면 단지 7%만이 공명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총선거에서 창가학회 회원들은 공명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지역에서 자민당 후보를 지지했으나, 자민당의 지지자들은 공명당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공명당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종교적 이상의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창가학회의 정치적 실험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창가학회가 공명당을 창당할 당시 목표로 내걸었던 “일련정종의 국교화”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해도, 적어도 창가학회가 표방했던 현실적인 강령인 ‘중도’ ‘평화’ ‘복지’의 이념조차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중도정치의 실현’이라는 공명당의 이념은 자민당과 같은 보수정당과 연립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훼손된 감이 없지 않다. ‘평화의 구현’의 이념 역시 미일 안보체제와 자위대의 존속을 인정한 점이라든지 미일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의 국회통과에 협력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치현실에 영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복지의 실현’은 이념적으로는 고수하고 있지만, 소수당이라는 지위로 인해 연정에 참가했다고 해도 주도적으로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명당의 활동이 실패였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창가학회가 현세이익을 추구하는 신도단체여서 독특한 신앙에 기반을 둔 일종의 원칙성·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반해, 공명당은 현실정치의 동향이나 여론의 추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기본정책을 변경시켜 왔다.

공명당이 창가학회라는 종교단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당세 확장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명당이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최소한 창가학회의 ‘중도, 평화, 복지’의 3대 노선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이것은 창가학회의 정치적 실험, 공명당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종교이념과 현실정치의 모순 속에서 공명당이 근대적인 대중정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창가학회의 정치적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더욱 그 진행상황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조성렬
서울공대 화공과 및 성균관 대학원 정외과 졸업. 정치학박사. 일본 도쿄대학, 게이오대학 객원교수 역임. 현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 저서로 《정치대국 일본》 《日本防衛産業政策の決定構造と利益政治》 《과학기술의 정치경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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