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종교와 정치 그 갈등과 유착의 관계

1. 서론 : 종교의 정치참여 문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정치의 문제점으로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2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우선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은 흔히 배타적인 파벌의 형성을 통하여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도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정치에서는 갈등과 대립구조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한국의 정치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들은 한국의 역사적·정치적 경험 속에서 오랫동안에 걸쳐 응결되어 한국인들의 심층 기저에 잠재되었던 의식이 정치행태로 나타난 것으로서―즉 정치문화와 관련된 문제로서―법과 제도의 개혁만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정치문화의 폐단을 시정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종교의 적극적인 역할에 큰 기대를 걸기도 한다.

이들에 의하면, 종교는 포용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날카로운 정치의 논리를 순화하면서 계층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완화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는 데 적격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과거 독재정권에 맞서 자유와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사명을 다했던 것처럼, 특유의 사회 비판 기능을 통해서 사회개혁과 진보를 위한 유력한 전도사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교가 언제까지나 정치의 바깥에서 현실의 모순은 애써 외면한 채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여 교세 확장과 교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며 심지어 위선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따라서 종교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회적 소임을 다하면서, 나아가 정의의 파수꾼으로서 정치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한 서구 국가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독일의 기독교 민주당과 이탈리아의 기독교 민중당―우리 나라에도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우리 나라는 정치적으로 다원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정당이 보수 정당임을 표방하고 있어서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대변할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하기에 이 문제는 더욱 시급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종교의 정치참여가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만 초래할 것인가? 또한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긍정적인 기능만 가지고 있는가? 혹시 그것의 부정적인 기능이 정치에 더 많이 작용하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정치문화와 종교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2. 한국의 정치와 종교: 이분법적 세계관과 비타협적 극단주의

일찍이 칼 슈미트(C. Schmidt)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적과 동지가 있게 마련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기에 누가 적이고 누가 진정한 동지인지를 구별하는 일이 곧 정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치를 이와 같이 이분법적 구도로 생각하기는 마르크스(K. Marx)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정치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정치의 모습은 조직화된 세력 혹은 계급들간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경쟁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었던 것이다. 사실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과 이익을 둘러싼 대립이 집단들간의 분파주의적 투쟁의 양상으로 표출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파주의 속성이 유독 한국의 정치문화에서 뿌리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논자들이 분파주의 성향을 한국 정치문화의 주요한 특성 중의 하나로서 지적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특히 이기백(李基白) 교수는 한국 정치문화에서 나타나는 당파성과 그것의 형성과정을 잘 분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당파성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및 사회적 조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조선은 중앙집권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귀족들은 모두 중앙에 진출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생애 최고의 목표로 간주했으며, 그들간의 정치적 갈등은 곧 중앙의 정계를 무대로 한 권력 대립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근대사회에 들어 이러한 대립은 이념이나 정강의 대립보다는 혈족관계나 사제관계로 연결되었고, 이로 인해 자손이나 제자에게 계승된 파벌간의 대립은 결국 정의나 정책을 둘러싼 논쟁을 압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재석(崔在錫) 교수 역시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으로서 친소(親疎) 구분 의식을 들면서, 이렇게 친소를 구분하는 의식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파벌이나 붕당(朋黨)이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친소를 가리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이겠지만, 유독 한국인은 가족주의로부터 파생된 특이한 친소구별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의 친소구분 의식의 요인으로서 7가지를 들면서 그 중 가장 큰 요인의 하나로 ‘효도’의 개념을 들고 있다. 즉 개인의 정당한 주장은 언제나 누구에 대해서도 자유로이 발표되고 용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국사회에서는 효도의 원리로 말미암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익의 주장이나 대립을 합리적인 조정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생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이나 타 집단과 타협 또는 조정에의 길이 두절되는 것은 결국 친소에 근거하는 파벌을 조장하게 되며, 이와 같이 형성되는 퍼스낼리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배타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설득이나 조정을 통해서는 반대자나 적대자와 상호 이해에 도달하기 곤란하다고 인식하며, 심지어 더 넓은 집단이나 사회의 발전과 조화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의 적대자에 대한 복수와 파멸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 때 효도 자체가 파벌 형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효도라는 명목 하에 길들여진 자식의 퍼스낼리티가 파벌 형성에 더 큰 영향을 준다. 다시 말해서 효도는 룰에 대한 충실성보다 인간에 대해서 충성하는 퍼스낼리티를 길러내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특유한 ‘의리’의 관념 또한 파벌 형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각기 배타적인 ‘왕초-똘만이’ 관계를 형성하여 왕초는 자기의 똘만이에 대한 보호 의무만을 갖고 있으며, 똘만이는 자신의 왕초에 대하여 충성만을 이행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이념이나 정당성 또는 다같이 동일한 인격과 자유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단지 자기 파벌 소속의 성원이나 두목의 이해관계만이 중요시되기 때문에, 자기 집단 이외의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배타적으로 된다.

이런 이유로 종래 한국의 정치사에는 상호 인격의 존중이나 정책 경쟁에 의한 페어플레이보다는 타인과 타 정파에 대한 배척과 중상모략이 다반사로 발생했던 것이다.
타인과 타 정파에 대한 배타성을 더욱 강화하는 요인이 바로 공동체로부터 개인의 미독립(未獨立)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자신의 소속 집단과 일체감을 갖는 생활을 가장 이상적인 생활 형태로 여겨왔으며, 그 결과 이들은 자기가 소속된 집단이나 집단의 리더가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행위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주의 문화의 소산으로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집단이 정치적 권위의 기반으로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만일 한 인간이 자신의 소속 집단에 반대하여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그는 즉시 소속 집단으로부터 심한 사회적 따돌림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여 협동의 덕목을 체득하도록 강요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공동체나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미분화는 다른 한편으로 집단 이기주의(group egoism)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가장 배타적이며 비합리적인 집단 이기주의를 생활화하면서, 개인의 존엄과 자주성을 존중하는 생활원리인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와 같이 자기 집단만을 위하는 행동은 결국 대립과 파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대립은 있게 마련이며, 갈등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의 결과로서 ‘사회집단의 결속이 더욱 강화·유지되느냐’ 아니면 ‘약화 내지는 분해되고 마느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는 대립과 갈등이 국민들의 의사나 국가의 안전과 발전의 필요에 의해 자제되고 또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닫기 일쑤였던 것이다.

한국인의 이러한 특성은 정치적 갈등과 대립의 상황을 ‘제로 섬(zero-sum) 게임’으로 인식하려는 성향에서 연유하며, 그것이 곧 비타협적 극단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비타협적 극단주의는 분쟁 당사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입장만을 절대시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면서 억압하려는 데서 나온다. 이러한 태도는 ‘나의 주장은 무조건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그르다’는 흑백 논리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신분석학자는 한국인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성격적 특징의 하나로 흑백논리의 사용과 공격적이고 타협을 할 줄 모르며, 자기 주장을 끝내 옳다고 믿는 고집을 든다. 이 같은 성격에는 투사의 방어 기제와 분리(splitting)가 개입된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때 극히 공격적이고 방어적이다. 투사에다 분리의 기제마저 겹치면 극단적인 사고가 더욱 심하고 감정의 기복이 크며 대인관계도 어렵고 충동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나타내기 쉽다.

모든 대립적 상황을 이처럼 정의와 불의의 대결, 혹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시각에서만 본다면, 여기에서 타협의 여지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비타협적 극단주의는 특히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조선조 이래 오랜 전제 왕권정치와 일제의 강압정치 같은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 속에서 타협에 의한 정치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리학(性理學)에 의해 뒷받침된 배타성이 당쟁의 과열을 부채질하였고 이후 한말의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동학운동파 간의 강경 대립 그리고 친일파와 친청파, 친로파 간의 극단적인 경쟁과 갈등이 정치를 황폐케 하고 국론을 분열시켜 결국 일제의 합방을 재촉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조차 독립운동 세력들 간에 벌어진 내분과 비협조는 국권의 자주적인 회복에 지장을 주었으며, 해방을 맞은 후에도 4대 강대국은 한국민들이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신탁통치를 강요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타협에 서투르며 그것이 또한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은 해방 직후 3년 동안 군정통치를 맡았던 미군 당국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들은 “타협적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는 문제가 한국인들과 한국의 관리들에게는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 “4천년에 걸친 이 나라의 봉건적 유산이 불과 3년 동안에 일소될 수는 없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로 인해 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급기야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관계의 역사는 온통 ‘대결’로 점철되었다.

이런 양상은 국내정치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의 헌정사는 각 정파 간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위주의적인 군사정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대결은 한 세대 이상 지속되었고, 민주화 시대에 들어서도 여야간의 극단적인 대립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으며 각종 선거에서 지역간의 대립 의식은 오히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감이 있다. 민주정치를 타협에 의한 정치라고 볼 때, 그 동안 대립과 갈등 일변도의 정치구조가 지속된 것도 타협에 익숙치 못한 한국인의 태생적 성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분법적 세계관과 분파주의적 대립 그리고 비타협적 극단주의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점에서는 종교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는 그 자체의 특성상 세계를 선과 악, 정의와 불의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의해 이해하고 있으며, 각 종교인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위대성만을 신봉하여 여타 종교에 대해서는 살펴볼 여유가 없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진리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타종교에 대해서는 흔히 배타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 되기도 한다. 그 결과 종교의 숭고한 교의에도 불구하고 실제 행동은 배타적인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종교가 화합과 포용의 주체가 아니라 대립과 갈등의 원천으로 되는 것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종교적 갈등과 종교전쟁의 사례들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종교의 배타적 성향에 대한 사례는 한국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유교의 배타성과 그로 인한 폐해는 한국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우선 유교는 논리적으로 정연하고 뚜렷한 이분법적 세계관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체계화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다.

유교사회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성격의 하나는 음양의 원리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2원론의 시각에서 보려 한다는 점이다. 음과 양은 상호 대립되지만 동시에 서로 의존적이며 보완적인 성질을 갖는다. 그래서 천지만물은 천과 지, 남과 여, 명과 암 등 상반된 성격의 조화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한말의 유교 사회에서 ‘정(正)’은 조선이었고 성리학적 가치관이었으며, 침략적인 외세와 천주교 사상은 ‘사(邪)’였던 것이다.

종교의 배타성은 종교집단들 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종교집단 내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단체들은 밖으로는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타 종교단체들과 경쟁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지만, 안으로는 자신의 종교집단 내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혹은 종파의 이권을 둘러싸고 끝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른바 종파주의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종파주의의 문제는 한국의 각 종교에서는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국의 종교문화에서 종파주의의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한국인 특유의 분파주의적 대립과 비타협적 극단주의 성향의 소산인 것이다.

한국인들이 이와 같이 타협의 문화를 체득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한국사회가 전통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하는 유학자 중심의 사회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던’ 고대 아테네나 영국이 모두 상업 민족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협’이란 근본적으로 상인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농민이나 선비에게는 낯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천한 일이기 때문이다.

3. 한국의 정치와 종교 : 의존적 성향과 권위주의

일찍이 인류학자 코넬리우스 오스굿(C. Osgood)은 한국인의 성격을 ‘구강적(oral-saddistic)’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구강적 성격의 두드러진 특징은 ‘의존적’이라는 데 있으며, 이들은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서도 항상 남이 도와줄 것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성향 때문에 이들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부탁을 하게 되고 또 집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남이 자신의 가까이에 있어 주어야 하며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의 인생은 자신이 돌보기에는 너무 공허하기 때문에 남에게 기대고 의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구강적 성격의 한국인은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서양인과 달리, 의존적인 삶을 살게 된다. 아기는 엄마에게, 엄마는 아빠에게, 아빠는 조상에게, 상민은 양반에게, 학생은 스승에게, 사원은 사장에게 일단 의존을 한다. 한국인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의존적 연쇄에 매어져 있으며, 그렇지 않고는 불안하기에 꾸준히 매일 의존적 쇠고리를 모색한다.

그리고 그 의존체에 자기의 개성이며 이해관계며 욕구며 책임이며 모든 주체를 의존하고 자신을 무화(無化)시킨다. 한국인이 자신의 소속 집단과 일체감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의존적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문화가 집단 내의 유대를 강조하면서 그 집단의 보스에 대해 무한한 충성심을 강요할 수 있었던 이면에도, 집단 구성원들의 보스에 대한 의타심이 있었던 것이다. 집단의 보스와 구성원들간의 이러한 관계는 일견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관계의 호혜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양자간의 일방적인 관계는 합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오히려 정신병리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기가 쉽다. 즉 양자는 일종의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 간의 나름대로 ‘조화로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관념도 한국인들의 특유한 의존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순리라고 생각되었으며, 그것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보스에게 복종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대주의를 단지 대국의 압도적인 힘에 비굴하게 굴복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국의 문화적 우월성과 권위에 순종함으로써 평화와 안전을 보전하면서, 우수한 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대체로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사대주의적 태도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한반도가 대륙에서 형성된 강력한 왕조들로부터 자주 침략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주로 한족(漢族)이 아닌 북방 이민족이 세운 정복왕조들에 의한 것이었다.

인간의 의존적 성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종교에 대한 태도에서이다. “인간은 사는 것이 무서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는 것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인간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식하고 절대적 존재에 의존하고자 하는 심리를 갖고 있다. 모든 종교가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적 약속을 통해서 죽음과 질병, 고통에 대한 공포감을 애써 불식시키고자 하며 바로 그 점에서 종교는 불가피하게 기복신앙적 요소를 갖게 된다.

따라서 종교적 의타심이 한국인에게만 고유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종교적 의타심에 유달랐던 측면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의 근원을 제공한 무교(巫敎)는 모든 생활현상을 신령계에 근거한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신령에게 맡긴 채 그 중재자로서의 무당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의타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 목적도 무병장수와 복락을 누리며 살다가 죽어서는 편안히 저승으로 가자는, 한 마디로 기복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종교였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의타심은 기복신앙에 그치지 않고, 급기야 자신을 구원해줄 ‘메시아’에 대한 염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가 시련에 처할 때마다, 특히 미륵 불교가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거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미륵불은 민중을 고난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서방 낙원으로부터 온 구세주적인 부처였기 때문이다. 미륵 불교가 통일신라 말에 민중 속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메시아적인 불교의 이념은 이후에도 민중의 삶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고려 말과 같이 무신의 난과 농민 반란이 빈발하고, 몽고와 왜구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민중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민심이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들은 이민족으로부터의 침략조차도 불력(佛力)에 의지해서 저지하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불교는 의존적 성향을 가진 한국인의 삶의 방식 속에서 호국불교라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한국의 종교들이 민중들의 삶에 공통적으로 기여했던 바는 현실의 위기를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여 해결하는 수단이었다는 점에 있으며, 기독교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 역시 ‘어떻게 하면 재난과 화를 면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래서 때로는 초자연적인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주술과 기적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민중들의 신앙을 이끌기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도 마치 무교처럼 개인 구복적 신앙의 성격을 강하게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구강적(口腔的) 성격의 한국인은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수용적 성향(receptive orientation)’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와야 한다고 믿으며, 따라서 외부의 권위에 의지하려 하고 지식이나 도움을 밖에서만 구하려고 한다. 즉 한국인들은 이질적인 사물을 꾸준히 기성의 사물에다 절충하고 융합함으로써 배척하지 않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한국인들은 국내적으로는 분파주의적이고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외래 문화에 대해서는 무한정의 포용성을 갖는 문화전통을 유지해왔다. 현재의 한국인들이 여러 종교의 신념체계를 동시에 수용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가 별 문제 없이 다종교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외래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수용적인 한국인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이처럼 외래의 종교나 사상, 문물에 너그러워서 불교나 유교, 천주교나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마다 기성의 가치관과 별다른 마찰이 없이 수용했던 것이다. 물론 외래 종교들이 한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전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특히 구한말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할 무렵, 일부 고루한 위정자들에 의해 몇 차례의 박해 사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다수 일반 민중들의 의사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한국의 일반 민중들은 천주교를, 그 포교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든 불교든 도입과정에서 갈등이 일단 해소되고 나면, 한국인들은 어떤 국민보다 더 열심히 그 종교에 심취하고 몰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의존적이고 수용적인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권위주의 성향이다. 대체로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너무 소극적으로 정의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자주적으로 결정하려는 성향이 약하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비판하기보다 지도자의 권위에 맹종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정부는 모름지기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지도자의 명령이나 지시에도 잘 순응한다.

가브리엘 알몬드(G. Almond)는 정치문화의 유형을 ‘참여형(participant) 정치문화’, ‘신민형(subject) 정치문화’ 그리고 ‘지방형(parochial) 정치문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한국의 정치문화는 권위주의적이고 예속적 성향이 가장 우세한 신민형 정치문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민형’ 성격은 투표행태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나는데,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투표를 자유롭고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결정하기보다는, 정당의 보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정부에 대한 맹목적 추종심리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러한 권위주의 문화는 특유한 역사적 및 정치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제 왕조정부의 압제와 일제 40년간의 강압정치,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독재와 군사정부의 강권정치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권력에 의해 길들여지고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데에만 익숙해졌을 뿐, 민주적 성향을 체득할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법과 제도라는 하드웨어는 잘 갖추고 있는데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이 고질적인 정치문화의 문제점, 즉 권위주의적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인들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성향에는 아마도 한국전쟁과 분단 상황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이 국민들로 하여금 진보주의적 견해를 수용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 것 같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변화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보수성에는 좀더 근원적인 이유로서의 역사문화적 경험, 즉 보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에 이 땅에 들어온 주자학은 이후 경험주의보다는 사변적이고 명분론적인 사고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학문적 전통으로 인해 조선의 유학자들은 오로지 기성의 질서에 대한 맹종만을 일삼아 그들과 다른 견해의 존재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유학자들이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조선 사회는 온통 보수적인 풍조 일색으로 되어 권위와 질서만이 강조되었고 반대나 비판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 있어서 유교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절대주의적 가치관 속에 몰입되어 교조적인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유교사상과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동아시아의 어떤 유교 국가들보다도 더 철저했으며, 그 정도는 심지어 유교의 원산인 중국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화인류학자인 제임스 그레이슨(J. H. Grayson)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 3국 중에서 “유교가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현저한 영향을 끼쳤고, 또 현재에도 끼치고 있는 사회는 한국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심지어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들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이 중국보다 더 중국적”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종교를 믿는 태도에서 한국인들이 얼마나 보수적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 불간섭과 비개입

정치와 종교는 모두 문화현상의 외적 표현으로서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와 종교의 문제점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양자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배타성과 비타협적인 극단주의의 온상으로 되고 있다. 한국의 종교가 사회 통합을 위한 장치로서 기능하기보다는 분열과 대결이라는 역기능을 더 많이 산출하고 있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와 종교는 우리 사회의 의존적 성향을 심화시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강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한국의 종교들이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을 상실하고 이기적인 기복 신앙으로 전락한 것도 한국인들의 지나친 의타심 때문이었으며, 나아가 한국의 종교가 진보와 사회개혁의 추동력이 되지 못했던 것도 근본적으로 교조적 보수성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폐단이 오랫동안 축적된 한국의 문화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단기간 내에 치유하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종교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종교문화와 정치문화가 본격적으로 결합한다면, 그 결과는 아마도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종교가 정치권력에 의해 지배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이용되어 본의 아니게 정치에 개입되든지 아니면 종교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할 목적으로 스스로 정치에 뛰어들든지 간에, 종교가 정치세력화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배타적 성격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신념이야말로 유일한 진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 신념을 타인과 타 집단에게 강요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결국 절대화된 권력은 자신의 신념마저 절대화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중국 한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국교로 삼는 한편 공자를 신격화하여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그들은 ‘사람은 각자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설명한 공자의 이론을 근거로 독재정치에 반항하는 백성들을 탄압했다. 그들은 인간의 아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에게 반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저항하는 자들을 신성모독죄로 처벌했다. 이 점은 중세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권력을 획득한 중세의 교회는 기독교의 이론을 정치적 지배의 수단으로 악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중세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이론에 배치되는 듯한 견해를 발설하기만 해도 신성모독죄에 적용되어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가 결탁되어 발생할 수 있는 폐해의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교권과 세속권은 왜 분리되어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 반면교사로서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베버(M. Weber)가 동양의 종교를 케사로파피즘(Caesaropapismus)으로서 비판한 것―서양의 종교에서 교권과 세속권은 신의 지배질서의 하위 권력으로서 병렬적으로 위치해 있는 데 반해, 동양의 종교에서는 세속적 지배자인 황제가 곧 신(天子)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교권과 세속권이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도 종교가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정치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종교인 불교와 유교, 기독교는 이미 현실정치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으나 그 결과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태민안의 종교로서 정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현실정치에 참여한 바 있었지만, 타락한 정치질서를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교 자체가 먼저 속화됨으로써 결국 종교와 정치 모두를 부패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타락한 불교를 대신하여 조선왕조를 위한 정치이념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던 유교의 말로도 불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대 유신을 표방하면서 등장했던 유교 역시 점차 반동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결국 기존 질서를 수호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사회 모순을 척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비전과 윤리를 창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 모순을 시정하고 사회를 개량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타종교에 비해 적극적이었던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기독교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우리의 전통적 종교문화에 동화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기독교가 경쟁적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지나치게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렇고, 개인 기복신앙적 측면이 강조되는 측면이 그러하다.

따라서 종교가 정치에 간여함으로써 양자의 장점만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마치 배추와 무를 교잡함으로써 한 식물체에 ‘배추 잎과 무 뿌리를 동시에 맺는 야채’를 수확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종교가 정치에 간여하게 되면 양자는 동반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할 위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종교가 국교로 발전하는 계기로 되어 종교적 평등성이 저해될 우려마저 있다.

장래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우리 나라 헌법은 이미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 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兪鎭午) 박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 문제는 현재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성이 없는 것 같으나, 역사상으로 볼 때에는 구미 각지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너무 밀착하여 여러 가지 폐해를 야기하고 때로는 유혈의 참극을 일으킨 적도 없지 않았으며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이조시대에는 유교가 국교와 같은 대우를 받아 그 때문에 폐해도 적지 않았으므로 금후 그와 같은 폐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주의적(注意的)으로 본조(本條)에서 국교는 장래 두지 아니 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이상의 문제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 나라에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현재와 같이 상호 불간섭과 비개입의 입장이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주라’고 가르쳤던 예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채규철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동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및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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