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불교사 탐구 ]

김광식
대각사상 연구원 연구부장
1. 서언

이청담은 식민지 불교의 잔재 극복과 한국불교 전통의 계승을 추구한 불교정화운동의 ‘화신’으로 널리 알려진 승려이다. 그런 그가 1969년 8월 12일, “불교정화 이념과 제반불사가 여의부진(如意不進)하므로 참회심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마침내 대한불교 조계종(비구승단)의 탈퇴를 해명”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계종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 같은 이청담의 조계종 탈퇴 선언은 당시 불교계 내외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1962년 4월, 통합종단의 출범으로 일단락된 정화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끈 이청담의 종단 탈퇴는 적지 않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탈퇴의 시점이 통합종단이 출범한 7년 후라는 점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1954년 5월에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1962년 4월의 통합종단 출범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통합종단 출범 직후 적지 않은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종회의원 비율에 불만을 품은 대처측이 종단을 이탈하였다.

이는 통합종단의 명분을 위축케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난제는 정화운동의 과정에서 등장한 급격한 승려의 증가에서 비롯된 승려 자질 및 승가교육의 문제점이었다. 나아가서 승려의 증가는 정화정신의 소멸 혹은 종단 운영의 난마로 전개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그 모순을 더욱 심화시킨 것은 1965년 3월부터 구체화된 통합종단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하여 추진한 이른바 대처측을 포섭하기 위한 화동(和同)의 움직임이었다. 요컨대 화동의 흐름에서 적지 않은 대처측 승려가 조계종에 유입되었지만 오히려 그 화동의 흐름은 정화정신의 재생산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종단 운영의 구도 및 모순을 개선하기 위하여 1963년 11월 전국신도회는 종회에 조계종단 혁신 재건안을 제출하기에 이른다.혁신 재건안의 요구는 종단에 수용되었지만 그 결과는 신도회가 당초에 의도한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시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를 조정시킬 여건도 성숙하지 않았고, 모순을 일깨워 줄 계기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1968년 10∼11월, 당시 종단의 운영과 진로에 큰 위기감을 제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국사에서 승려들 간에 폭력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태는 불교계 내외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 이에 당시 재가불자들은 이상적인 종단 운영을 구현하기 위한 정법수호회(正法守護會)를 결성하여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국사 사태 이후에도 종단 내부에서 그 모순을 각성하는 흐름은 미약하였다. 이에 이청담은 그 같은 종단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 해결을 정화운동의 지속에서 찾기 위한 일대 결심을 하게 이르렀거니와, 그것이 바로 본고에서 다룰 ‘조계종 유신재건안’의 작성과 제출을 통한 종단 재건의 추진이었다.

이 같은 배경 하에서 본 고찰에서는 조계종 유신재건안의 배경, 내용과 성격 등 그 전모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이청담의 종단 탈퇴에 관한 단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 같은 분석은 정화운동 및 통합종단의 성격을 재조명할 수 있는 사례 연구인 것이다.

2. 유신재건안의 배경

이청담은 1969년 7월 5∼7일에 개최된 조계종의 제20회 중앙종회에 ‘대한불교 조계종 유신재건안’(이하 유신재건안으로 약칭함)을 정식 안건으로 제출하였다. 그 종회에서 이청담은 유신재건안의 개요를 설명하고 종회의원들은 토의를 하였지만, 총무원에서 원안을 연구·검토하여 차기 종회에 종합적인 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결의되었다.

이 결정은 유보였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거부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본장에서는 유신재건안이 종회에 제출된 배경에 대하여 우선 살펴보겠다.

유신재건안을 종회에 제출하고, 설명한 인물은 이청담이었다. 그러나 현재 전하고 있는 유신 재건안의 원본을4) 확인해보면 유신재건안의 도입 부분에 ‘대한불교 조계종 유신재건위원회 선언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원본 재건안의 표지에도 ‘대한불교 조계종 유신재건위원회’가 작성의 주체로 되어 있다. 또한 그 선언문의 말미에는 ‘불기 2512년(서기 1969년) 6월 일 발행인 일동’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그 유신안은 이청담이 개인 차원에서 작성, 제출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유신재건위원회를 발기한 인물들의 공동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 재건위원회의 성격 및 발기인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원회 및 발기인의 중심에는 이청담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위원회 및 발기인에 관련된 인물을 찾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5)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유신 재건안이 제출된 중앙종회가 종료된 직후 〈대한불교〉에 기고된 이종익의 글을 유의할 수 있다. 우선 그 관련 내용을 살펴보겠다.

    지난번 宗會에 提案된 大韓佛敎維新再建案은 확실히 韓國佛敎가 再生될 뿐 아니라 國家재건, 民族재생의 歷史的 大課業에 이바지될 바이다. 그것을 淨化運動의 先鋒長이신 靑潭禪師가 代表하여 提案한 것인데 그 案件 內容을 1分間도 검토하여 보지도 아니 하고 再建이니 무엇이니 하고 문구만 가지고 공박하다가 거의 묵살하는 方便으로 總務院敎務部에 一任한다는 형식으로 일축하여 버렸으니 과연 曹溪宗을 걱정하고 佛敎의 장래를 진지하게 근심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무책임한 처리를 할 수 있겠는가? 나도 淨化를 최초에 발기한 한 사람으로서 韓國佛敎의 維新再建을 위하여 近十年間 心血을 경주하여 보았지만 그러한 주위와 事情으로서는 中興의 課業을 성취할 수 없으므로 일단 放下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강건너 불타는 것을 바라보듯이 할 수는 없기에 이번에 四部宗徒 有志와 함께 이 再建 課業을 發起하였던 것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유신재건안을 작성하고, 제출한 주체는 ‘사부종도 유지’라는 발기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재건안은 이청담이 대표로 종회에 제출하였음도 파악되었다. 이 같은 사실에서 일단은 그 재건안을 작성한 주체인 재건위원회 및 발기인은 ‘사부종도’로 표현되는 승려와7) 재가자라 하겠다.8) 그 재가자의 일원에 이종익이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유신재건안의 주체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이에 여기에서는 승려로서 대표 제출자인 이청담과 재가거사이면서 발기인의 일원이었던 이종익이 유신재건안을 작성한 배경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청담과 이종익은 승가 및 재가를 대표하며 불교개혁 및 정화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음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먼저 이종익의 경우부터 그 전후 사정을 짚어 보겠다. 이종익은 위의 글에서 나온 바와 같이 정화운동의 초기부터 그 일선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정화운동 이래 불교의 재건을 위하여 근 10여 년 간을 심혈을 기울여왔지만, 어떠한 사정에 의하여 일단 ‘방하착’하였다고 한다. 그 어떠한 사정은 무었이었을까?

이는 정화운동이 일단락된 이후 전국신도회에서 정화정신의 구현 및 명실상부한 사부중의 종단을 만들기 위하여 제기한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의 종회 제출과 유관한 사정이라고 볼 수 있다. 1963년 11월 전국신도회는 중요도시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여 정화정신의 퇴색, 승려 중심의 종단 운영, 사찰 재산 망실 등에 우려를 표하면서 조계종단을 혁신하기 위한 건의서를 종회에 제출하였다.

종회에 제출된 건의서는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었는바, 그 핵심 요지는 재가 신도들이 종정(宗政)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종헌 개정을 통해 명실상부한 사부대중의 종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이종익은 그 혁신재건안을 작성한 책임자였다. 그가 기획하고 입안한 혁신재건안이 종회에서 수용되고, 그를 위하여 종회 차원에서 개헌안 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그 심의위원회를 개최한 결과, 종헌 개정이 아닌 종단의 제반 시책을 기획하는 기획위원회의 설치로 전개되었다.

1964년 1월의 종회에서 기획위원회법은 종법으로 제정, 선포되었다. 기획위원회는 승려 11명, 재가불자 10명으로 구성하고 승려는 종정이 임명하지만 재가자는 전국신도회장의 추천에 의하여 종정이 임명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종단의 혁신을 도모하기 위해 출발한 기획위원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더욱 세밀히 검토해야 하겠지만 이종익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종익은 그를 사정에 의하여 중흥의 과업을 성취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이제 기획위원회의 활동에 나타난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이종익이 불만을 품은 내용을 적출하겠다. 기획위원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 함은 우선 그 규정에서 정한 임무를 원할히 수행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고, 아울러 재가자로서 참가한 위원의 독자성과 자율성 여부에 있다.

기획위원회는 1964년 6월 11일 제4차 회의를 개최하기 이전에는 정례적인 모임을 갖고 종단의 3대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결의를 하였지만, 기획위원회가 유명무실하다고 지칭될 정도로10) 그 출발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즉 기획위원회에서 결의를 하여도 실질적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며, 위원이었던 이운허와 강석주는 사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에 고육지책으로 위원회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기획위원회의 또 다른 변화는 중앙종회 차원에서 일어났다. 1965년 3월 25일에 개최된 제9회 중앙종회에서, ‘종단강화에 대한 대책 강구의 건’의 일환으로 전국신도회의 개편 및 강화의 문제와 기획위원회의 강화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 결과 종회에서는 신도회 문제는 전국신도회 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총무원의 지시를 ‘순종 실행’할 수 있는 신도회 회칙으로 개변키로 정하였다.

나아가서 중앙간부를 개편 보강하고 불응하면 종정의 직권으로 현 간부 취임 승인을 취소하고 총재 명의로 대의원 대회를 소집하는 방향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기획위원회에 대해서는 기획위원회 법 제4조의 말미 즉 재가자인 위원을 추천하는 기존의 전국신도회장을 총무원장으로 변경하고 그 단서를 삭제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 같은 종회의 결정은 전국신도회 및 기획위원회의 성격과 진로에 큰 변화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신도회의 경우 비록 그 당시에 신도회의 공백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로 자체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종회의 결정은 그 운신의 제약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도회의 이 같은 조처에 대한 건의를 한 인물은 종회의원이면서 종회의장이었던 이청담이었다.

그리고 기획위원회의 재가자 10명의 추천의 권한을 전국신도회장에서 총무원장으로 변경하는 법 개정을 단행한 것은 기획위원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기획위원회의 출범 배경은 사부대중이 공유하는 종단 재건의 방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획위원회를 등장시킨 저변의 동력도 전국신도회에서 종단의 모순을 개혁하겠다는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기획위원회에서 전국신도회의 권한을 제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획위원회의 이러한 전환이 위원회가 출범한 지 불과 1년 만에 단행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선 신도회 자체 내부에 문제점이 있을 수 있겠고, 다음에는 재가자의 종정 참여의 문제를 거북하게 여긴 승단의 인식을 지적할 수 있다. 그 후 1965년 7월 10일 제 10차 기획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개편된 신규 위원의 임명이 있은 직후의 최초 회의였는데, 이종익은 그 위원의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이는 곧 기획위원회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종익은 사부대중이 공유하는 종단을 재건하겠다는 1963년 11월의 종단 혁신재건안의 기획자였기에, 그의 기획위원의 탈락은 그 재건안이 추구하는 노선의 상실을 말한다.

기획위원회의 변질은 1965년 11월 25∼27일에 개최된 제 11회 중앙종회에서 재차 확인되었다. 그것은 기획위원회법의 개정으로 나타났다. 개정의 요지는 기존 승려 출신 위원 11인을 ‘약간인’으로, 재가자 위원 10명을 ‘기외인’으로의 개정과, 기획위원회의 직무 3항에 종단 4대불사(조직, 기금조성, 총본산 건립, 홍보기관 설치)에 관한 사항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이는 재가자 기획위원의 축소를 가져올 수 있는 측면과 함께 기획위원회의 노선과 활동을 종단 4대불사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기획위원회의 성격 변질과 동시에 기획위원회를 종단 4대불사를 주도하는 전위로 삼으려는 의도의 산물로 이해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는 전국신도회의 조직 재건과 그를 통한 재정의 모금을 통하여 종단 4대불사 및 전국신도회와 기획위원회가 합작으로 작성한 중흥불사 11대과업을16) 추진하기 위한 포석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 같은 전환은 곧 사부대중이 참여하는 종단 지향에서 우선 종단의 중흥불사를 우선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식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이종익이 재편된 기획위원에서 누락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납득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위의 이종익의 회고에 유신재건을 도모한 지 10여 년에 방하착하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기획위원회의 재편시부터 이종익은 종단에 관한 관심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청담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청담은 재편된 기획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피선되었으며, 당시에는 종회의장이었기에 그의 구상대로 종단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보인다. 이청담은 종단 재건 및 정화정신에 기본을 둔 중흥불사에 큰 정열을 기울였지만 그의 입장은 이종익이 구상하고 있는 사부대중이 참여하는 종단 재건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청담은 승단 중심의 재건을 의도하였다. 즉 승려와 재가자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1963년 8∼9월 조지훈과 전개한 지상논쟁에서도 극명히 개진되었다.이청담의 그러한 입장은 신도회의 재건을 도모하면서 행한, “신도회는 총무원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그의 발언이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이청담은 1966년 8월 11∼13일에 개최된 제13회 중앙종회에서도 “신도는 무조건 스님들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제안을 종회 차원에서 채택할 것을 강력히 제안하였다. 이에 그 종회는 이청담의 제안을 채택하였다. 당시 이청담은 승려와 신도와의 관계를 사부중의 한계 규범으로 언급하였다. 즉 이청담과 이종익의 입장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종단 재건과 정화이념의 구현에서는 동일한 취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 해법에는 이질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청담은 1969년 6월경에 어떠한 사정으로 조계종 유신재건안을 공동 작성, 제출하는 입장을 취하였던가? 그 문제를 이해하는 단서는 1968년 10∼11월에 나타난 불국사 사태였다. 불국사 사태는 불국사에서 일어난 승려들 간의 폭력 행사로, 그 내용이 세간에 보도되면서 재가불자들의 거센 분노와 반발을 야기시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62년 4월에 출범한 통합종단 내부에서 최초로 제기된 승려 폭행 사건으로, 그 파장은 자못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승려들의 반승가적인 의식과 행태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이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 이청담은 이미 종단의 노선 및 승려의 행태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청담은 이효봉 종정의 입적으로 1966년 11월의 제14회 중앙종회에서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종정에 취임한 이청담은 정화 이념에 의거하여 종단을 혁신하기 위한 옹골찬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종단의 현실을 난국으로 규정하고, 종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부정 부패가 추후 종단을 뒤집어 엎을 것이라는 우려하에 종단 혁신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이청담이 특히 우려한 대목은 이탈한 대처측 인사를 포섭하기 위한 이른바 화동(和同)의 흐름이었다. 당시 조계종단에서는 1965년 3월부터 대처측을 포섭, 유입하기 위하여 화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대처측을 적극 종단 내부로 흡수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화동의 노력은 어느 정도 가시적인 효과를 내고, 화동의 명분하에 기존 대처측 인물들이 종단 내부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청담은 이 화동의 흐름에서 나타난 종단 내부의 계율 불감증, 사찰 재산 망실, 승가 정신의 위축 등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종단에 유입된 화동파는 곧 과거의 대처승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화운동과는 이질적인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더욱이 그 유입된 화동파가 종단의 주요 직책에서 활약을 하게 됨은 단순한 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청담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종단 일부에서는 화동의 흐름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 문제점의 인식에서는 상이한 흐름이 있었다. 이러한 종단 내부의 상이한 현실인식이 구체적으로 노출되었거니와 이는 이청담의 종정 자진 사퇴이었다. 비록 그 사태의 전면에는 당시 손경산 총무원장의 동국대 및 종단의 운영에서 야기된 부채(당시 시가로 4,170만원) 문제가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위에서 요약한 이청담의 현실인식과 화동으로 상징되는 종단 흐름간의 갈등이 내재해 있었다. 더욱이 손경산 총무원장은 화동의 흐름을 이끌었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이청담은 종정의 자진 사퇴 이후에도 장로원장에 재직하면서 그의 구상을 다시 펼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68년 11월의 불국사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불국사 사태는 종단 내외에서 종단에 대한 비판과 원성을 야기케 하였다. 이청담은 그 사태 직후 개최된 제19회 임시종회(1968. 11. 18∼20)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불국사 사태는 불교 역사상 희유한 수치이고 비극입니다. 비구승끼리의 쟁탈전이라고 보도되었고, 패싸움이라고 이간시키는 중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 중을 오대산 문제 때부터 주시해 왔으나 이 다음에 또 그러한 일을 하면 우리 모두 분신 자살할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이청담은 불국사 사태를 우연한, 단순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에 그는 그와 유사한 사태가 재발하면 종회의원 모두가 분신자살해야 된다고 강조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곧 이청담의 입장에서 그 해결을 위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이종익과 함께 유신재건안을 작성, 제출할 여건을 이해하는 단서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당시 재가불자들은 불국사 사태에 큰 충격을 받고 종단의 폭력 사태를 추방함과 동시에 교법을 수호하려는 차원에서 신도단체 연합으로 교법수호회를 결성하였다. 1968년 11월 9일 전국의 11개 신도단체 대표는 교법수호연합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후 교법수호회는 대표단과 간사장, 기획위원회를 선출하고 11월 12일에는 교법수호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선언문에는 종헌에 의거한 재가보살의 지위의 보장, 승려의 위상 정립, 정화불사의 지속 등을 주장하였다. 11월 18일에는 교법수호 선언대회를 조계사에서 개최하여 그 행보를 더욱 가속화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이전의 선언문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승단의 자체적인 윤리 기강의 확립과 올바른 승려와 건전한 종단을 수립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였다. 교법수호회는 정법수호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불국사 사태에 즈음하여 개최된 중앙종회에 그 결의문을 공문으로 전달하고, 정식 안건으로 채택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종회에서는 그 공문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로 여기고 안건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이처럼 정법수호회는 그들이 추구하는 노선이 종회에서 수용되지 않았으나, 1969년 3월 10일에는 정법수호회 회칙을 선포하는 등 더욱 종단 개신을 위한 박차를 가속화하였다.31) 그런데 당시 이청담은 그 정법수호회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는 이청담이 정법수호회의 노선에 동의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1969년 6월 15일 삼보학회 강당에서 정법수호회의 기획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 이청담이 참가하여 치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청담은 치사에서 “한국 불교는 승풍, 승규가 극도로 문란, 도괴 직전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종익도 불국사 사태가 일어나자 즉시 종단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대한불교〉에 기고한 〈한국불교 재건의 전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제20회 종회가 개최되기 직전에도 〈대한불교〉에 종단개혁의 당위성을 기고하였다.

이 두 기고문은 이전 신도회에서 주장된 개혁의 노선, 방안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더욱이 후자의 기고문은 본 고찰에서 살피고 있는 유신재건안이 종회에 제출되기 직전에 기고되었는바, 이는 이 재건안이 종회에서 통과될 수 있는 사전 정지 및 홍보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전국신도회의 이름으로 추진된 종단개혁이 왜곡, 단절된 이후에는 종단개혁의 활동을 잠시 접었던 이종익이 불국사 사태 이후에는 종단개혁에 다시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종익과 이청담이 다시 결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요컨대 본고의 주대상인 ‘조계종 유신재건안’이 ‘조계종 유신재건위원회’의 이름으로 작성된 시점인 1969년 6월 이전에 이청담과 이종익은 재결합하였던 것이다. 이청담이 정법수호회에서 발언한 시점과 유신재건안이 작성된 시점이 일치하고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고 이청담, 정법수호회, 이종익이 지향하는 바가 동일함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정법수호회, 이청담, 이종익이 추구하는 동질적인 종단개혁이 조계종 재건위원회라는 토대에 모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이 같은 사정을 곧 유신재건안이 작성, 제출된 배경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3. 유신재건안의 내용과 성격

이청담은 대한불교 조계종 유신재건위원회에서 작성한 ‘대한불교 조계종 유신재건안’을 제20회 중앙종회에 제출하였다. 이는 유신재건안을 종단 차원에서 검토, 실행해줄 것을 요청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본장에서는 그 유신재건안의 내용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필자가 본고의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동국대 역경원의 최철환 부장이 소장하고 있는 유신안이다. 당시 〈대한불교〉는 제20회 중앙종회가 종료된 직후에 이 유신재건안을 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36) 이 두 재건안을 비교해 보면 〈대한불교〉에 게재된 것과 최철환 소장본의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대한불교〉에는 최철환 소장본의 도입 부문에 있는 ‘선언문’과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된 ‘종조, 종지, 종통 정립 초본’과 ‘조계종전(曹溪宗典) 편찬요지 원안’은 게재되지 않았다.

이러한 전제에서 최철환 소장본을 중심으로 유신재건안의 대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언문, 유신재건안,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 위의 순서에 의거 그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선언문은 대한불교 조계종 유신재건위원회의 결성 취지와 유신재건안을 작성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선언문의 도입부에서는 르네쌍스는 인간을 찾고 신을 얻었지만, 당시는 기계문명으로 인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잃었다는 시대인식을 제시하였다. 이에 그 대안으로 동양정신 문화의 부흥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국토분단과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는 한국에서는 석가의 슬기와 자비를 배우고, 그를 실천에 옮길 과업에 직면하였다고 개진하였다.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양과 우리 겨레의 정신문화의 근간이었으며, 국운의 성세와 불교의 성세는 일치하였다는 인식을 하였다. 이 전제에서 불교의 중흥은 역사의 엄숙한 명령이요, 불교도의 양심적 자각으로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배경에서 유신재건위원회의 발기에 대한 취지와 당위성을 개진하였다.

이러한 世紀的 使命과 民族的 課業을 위하여 일찍기 16年前에 佛敎淨化再建運動이 發起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現 大韓佛敎曹溪宗團은 宗權과 重要한 文化財와 傳統的인 比丘僧團은 어느 정도 復原되었으나 그 동안 滿身瘡痍가 된 敎團 自體는 가진 病魔에 呻吟 更生의 길은 날이 갈수록 어둡기만 하다.
이에 눈 푸른 同志들은 人類歷史的 使命과 民族 中興의 課業을 위하여 發起하였던 佛敎淨化運動의 精神을 되새기며 이에 大韓佛敎曹溪宗의 維新再建委員會를 發起한다.
憂世, 憂國하고 愛敎, 愛宗하시는 여러분은 이에 積極 贊同하시리라.

당시 조계종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불교정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조계종단 갱생을 위하여 유신재건위원회가 등장하였음을 밝혔던 것이다. 이 선언문 말미에는 ‘불기 2512년(1969년) 6월 일 발기인 일동’이라는 표현이 전하고 있다.

유신재건안의 내용은 종조·종지·종통의 정립안, 지도체계 확립안, 삼학 최고도량 건립안, 합리종단 재건안, 양원제 실시안, 죽은 문화재의 재생안, 새교화운동안, 실천요원 수련원 설립안, 이상 제안의 실시방법 등의 순서로 서술되었다. 우선 종조·종지·종통의 정립안에서 종교에서 생명 및 근본과 같은 것인데도 당시 조계종단의 이에 대한 상황을 ‘난마상태’로 진단하였다.

정화운동 초창기에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으나 시비가 벌어져 후일로 미룬 것인데 당시까지도 방치되었음을 지적하고 종조의 정립, 종지의 정립, 종통의 복원을 시도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학술적, 역사적 과제이기에 전문학자의 검토와 여론을 통하여 첨부의 초안을 제시하였음을 설명하고, 공청회를 통하여 결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지도체계 확립안은 종조, 종지, 종통이 정립되었다는 전제하에 그 이후의 대책을 제시한 것이다. 종조, 종지, 종통을 지도이념으로 보고, 그 이념에 의거하여 교육, 문화, 수도 분야의 지도체계를 확립할 것을 개진한 것이다. 구체적인 대상은 종전 편찬과 교육으로 대별하여 제시하고 있다. 종전편찬안은 종단의 지도이념을 종도들에게 교육시킬 지침을 구체화시킨 것을 말한다. 당시 조계종단은 이념의 지침이 부재하기에 종단의 약화, 분열, 파멸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종전의 편찬은 급선무이고, 긴요한 사항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첨부한 종전편찬요목에 의거, 종단 차원에서 완성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교육재건안은 종단의 지도이념을 종도들에게 교육시키는 방법과 내용을 의미한다. 당시 종단 교육의 중추를 담당하는 선원과 강원은 창조적 생명력 결여, 보수적 형태, 현실과의 유리 등의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일대 혁신을 기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종단의 근본 이념에 입각한 정신교육과 정혜쌍수(定慧雙修)와 지행일치의 수련을 시킬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 전제에서 교육 대상 분야에서는 전문학림, 전문선림, 동국대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우선 전문학림은 지방의 1, 2개 소의 사원에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 학림에서는 종학, 종사(宗史), 일반교리, 인문·사회과학 등을 수학케 하되, 정혜쌍수 및 지행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신행생활을 당연시 할 것을 제안하였다. 4년 정도의 수학 후에는 전문선원, 대율원, 대교원 등에 들어가서 선, 율, 교의 분야를 3년 이상 이수토록 하였다. 이 과정을 마친 대상자에게 초급 학사와 함께 초급 교직자의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출가한 승려는 고졸자 이상의 학력을 갖추어야 하며, 반드시 전문학림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정식 교직자가 되어야 함을 부연하였다.

전문선림은 지방 2, 3개 소의 사원에 설립하되, 전문학림의 이수자만 입방케 할 것을 전제하였다. 이수 기간은 3년으로 정하고, 종단의 수도문(修道門)에 의하여 십종식망문(十種息忘門)·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성불문(圓頓成佛門)·간활결의문(看活決疑門)을 실수(實修)하여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 개요를 정하였다.

동국대의 불교교육의 재건은 당시 동국대의 불교교육을 강하게 비판한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즉 종학과 종사의 교육 부재, 그리고 지도이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지행일치적인 교육방법도 아니며 참된 종도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에 동국대 불교교육은 추후 근본적으로 개편, 재건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삼학(三學) 최고도량 건립안은 계·정·혜를 원수(圓修)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제시한 것이다. 이 전제하에 종단 차원으로 대선원(大禪院), 대율원(大律院), 대교원(大敎院)을 설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대선원은 종풍 수립의 명분에서 나왔는데, 송광사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보조국사를 종조로 하고, 종단의 총본산을 송광사에 두어야 한다는 대의명분하에 그곳을 종단의 정신적 귀의처이자 신앙을 결집한 성지로서 위치지워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왔다. 종단의 종정은 이 대선원의 조실이자 총본산의 주지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야만 지도체계, 명령체계, 조계종풍이 수립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종풍의 재흥은 자연스럽게 수립된다고 보았다.

대율원은 종단의 기강을 확립해야 되다는 당위에서 나왔다. 조계종은 선종이 중심이지만 계율의 기반을 구축해야 하기에 대율원, 계율학자, 율사 등을 양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비구계 및 보살계도 이 대율원에서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위치는 통도사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통도사가 갖고 있는 계율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식의 산물이다. 대율원은 종단의 규정원(糾正院)의 역할도 해야 한다고 보았다.

대교원은 교학의 진흥을 위해서 반드시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조계종이 선종이라 하여 교학을 무시하는 것은 배종(背宗)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설하면서 선학에 앞서 교학에서 혜안을 얻어야 된다고 하였다. 대교원은 해인사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도 해인사의 교학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식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전문학림 졸업자, 동국대 불교과 출신, 타대학 철학과 출신 등의 불교학자 등을 집결케 하고, 동국대 불교대학원은 가능한 해인사에 위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이곳에 종단의 교재 편찬기관과 역경원도 부설하도록 하며, 한국불교의 교학적 권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신재건안에서는 종조, 종지, 종통의 정립과 삼학전문도량이 창설되어야만 종단의 지도·교육체계가 재정립되고 종풍, 종단기강, 교학이 재건된다고 강조하였다. 이 구상은 사전 정비를 통하여 종단의 재건 과업의 기틀이 설 것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주제는 합리적인 종단의 재건안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유신재건안에서는 당시 조계종단은 사부중이 구성하는 종단이나 그 분한과 권리, 의무 등에 불합리한 점이 많아, 종단 운영에 지장이 있음을 우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종단 재건의 과업으로 합리적인 종단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우선 사부중의 임무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출가중(出家衆:승려)과 재가중(在家衆:신도)의 임무를 제시하였다. 출가중은 속세의 일을 정리하고 전심수도(專心修道), 전법도생(傳法度生)을 하는 것을 근본 사명으로 보았다. 재가중은 출가중이 본연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그 후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임무로 보았다. 출가중은 두 가지 본연의 사명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재가중은 출가승단의 권위, 존엄성을 보호하면서 삼보 수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합리적인 재가중(在家衆) 제도가 실천에 옮겨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조계종단의 재가 신도는 단지 자유 신앙에 입각한 신도이지 법적인 신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에 신도들은 입교, 수계식을 거쳐 교적법에 등록하고 종단이 부과하는 의무 등을 실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재가중의 권리가 생긴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합리적인 절차 즉 입교식, 수계, 지계, 입교적(入敎籍), 의무 이행 등에 관한 조직적이며 합리적인 제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재가중의 제도적인 관리(지도, 교육, 조직, 훈련 등)가 선행되어야만 출가중의 근본 사명이 완수된다고 강조하였다. 요컨대 합리적인 사부종단이 설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합리적인 교도(신도)의 기초하에 합리적인 사부종단이 구성되어야 재가중의 권리와 의무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 권리는 종단운영, 교육, 포교, 사회복지 사업 등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연후 종권을 영도권과 운영권으로 나누고 출가중은 영도권을 전담하고 재가중은 운영권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양원제 실시안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양원제를 주장한 논거는 사부중제가 실현되지 못하였기에, 승려들은 본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종단 운영을 전담하였던 저간의 현실을 문제시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승려들은 불가피하게 과오를 야기할 여건에 처하였고, 식견이 있는 재가중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었기에 종단이 약체화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식견과 능력이 있는 재가중이 종단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하원을 구성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대안은 이전에도 제기되었으나 승려들의 인식의 미흡으로 인하여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그 같은 승려의 인식은 재가중의 훈련 부재, 재가자의 참여를 승권 및 성직에 대한 침해로 보는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승려는 승려 본연의 수도와 전법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당연히 재가중의 종무 참여는 수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당시 재가교도 중에서 만인이 공인할 수 있는 신앙의 경력, 혹은 호법과 애교의 정신이 돈독한 대상 인물을 약 30명을 선출하여 하원의원을 구성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의 실행을 위하여 승려와 신도로서 교정(敎政)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에 관련된 모든 절차를 정하자고 부연하였다.

죽은 문화재 재생안은 사찰의 고유한 정신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제안한 것이다. 각 사찰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를 단순히 관람, 보수, 유지만 하는 것은 그 문화재에 담겨진 정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찰과 문화재의 정신을 살리는 것은 민족중흥과 국토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의 3대 사찰을 부활시키고 그 연후 약 10여 개 사찰을 참된 수도장과 홍법원(弘法院)으로 부활한다면 자연 여타의 500여 사찰도 부활할 것이라는 구도를 제시하였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단이 보유하고 있는 사찰을 수증(修證)도량, 전법(傳法)도량, 특수신행도량, 자비도량, 기타 활용 재생안으로 구분할 것을 제안하였다.

수증도량은 심산의 사찰을 전문선원, 학림, 일반선원, 염불원, 지주원(持呪院) 등으로 지정하여 수도와 신행기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도량은 승려들만의 수행공간으로 제한하지 않고 재가 불자들의 수도장도 설정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이바지하도록 강구하였다.

전법도량은 도시 부근에 있는 사찰을 포교 및 전도 기관으로 삼자는 것이다. 이는 기존 도시 사찰들의 기복과 매불을 위주로 하는 행태를 혁신 재건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자비도량은 산중이나 도시의 사찰에 고아원, 양로원, 요양원, 병원 등을 설치하여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특수신행도량은 각 사찰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신앙 대상과 전통을 고려하여 교화운동의 배경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기타 활용 재생안은 적당한 사찰에 불교 청소년 수련도장, 학생 수련도장, 일반신도 수련도장, 소년감화원, 불교문화원, 불교예술원, 불교도서관, 불교연구원 등을 설치하여 그를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새교화운동안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다. 이 안은 과거의 포교가 노인층, 부녀자 등을 대상으로 하였고 그 방법도 비현대, 비합리적이었다고 평하면서 포교 및 교화를 조직화, 적극화, 합리화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대안은 소년, 학생, 청년, 지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화운동을 전개하되 일요학교의 설립, 유치원 부설, 소년회, 중고교학생회, 청년회, 거사회, 부인회 등을 계통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화운동은 인간의 양심 회복, 진리의 눈 각성, 국민도덕 재건, 사회정화운동 등을 지상의 목표로 삼아야 하며, 이것이 이 불교가 담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교화 방안은 강설포교, 문서포교, 특수교화, 집단포교, 의식포교, 가정방문 및 개인 상대 등을 제시하였다.

이제는 위에서 제시한 유신재건을 실행하는 인력을 교육시킬 실천요원 수련원의 설치안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우선 그 실천 요원을 양성할 수 있는 기관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실천요원으로 주지, 포교사, 각 단체의 간부, 각 사찰의 사무원 등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종단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역들을 종단 재건의 역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재교육과 재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소임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 젊은 승려들을 위한 특수한 수련도량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1∼2년을 수련시킨 후 교직자로 내보내야 함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지금껏 제시한 유신재건안을 실행하는 방법을 살펴보겠다. 이는 재건안이 실행되면 한국불교의 재건과 인간 개조, 국민도의 재건 등이 성취되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수행된다는 확신을 갖고 그 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조계종 유신재건위원회에서 그 원칙만을 가결하고 구체적인 실시는 과도적인 교정위원회에서 담당하도록 하였다. 위원회는 사부중의 10인 내외로 구성하여, 그에 관한 모든 방법과 절차 등을 토의, 결정하여 실천에 옮기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만약 이렇게 시행되면 각처의 사부중이 큰 호응을 할 것이고, 종단에 불평과 불만을 갖고 있던 인사들도 대동단결할 것을 예견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일대 결심과 용단이 제일 긴요함을 역설하였다.

지금껏 유신재건안의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였다. 이제부터는 그 유신재건안의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었던 종조, 종지, 종통의 정립안과 조계종전 편찬요목의 내용을 간추려 제시하겠다.

종조, 종지, 종통의 정립안은 ‘법운거사 초안(法雲居士 抄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종익의 글로 이해된다. 우선 종조부터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조계종단의 종헌에 제시된 도의(道義) 국사는 조계종의 종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종조는 보조 국사 지눌로 변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종지도 자연 보조 국사의 사상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기존의 종지인 자각각타(自覺覺他)는 일반불교의 교지이고,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도 다른 선종에서도 말하고 있는 선의 표지이기에 조계종의 종지로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계종의 종지는 보조 국사의 핵심적인 지도이념이며 사상체계의 요체인 선교융회(禪敎融會)·사교입선(捨敎入禪)·돈오점수(頓悟漸修)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보조 국사의 이념은 정법불교·수행불교·생활불교이기에 이를 조계종지의 요체로 주장하였다. 다음 종통의 문제에서도 당시 조계종단의 법계는 주로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종조를 도의 국사로 내세운 것은 또 다른 모순으로 이해하였다. 이에 조계종에서 보조 국사를 종조로 세우게 되면 그에 걸맞는 법맥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조계종전 편찬 요목은 총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개요는 1편 부처님(석가모니불, 부처님의 덕성, 구원의 부처님), 2편 교리(인생의 원리, 네가지 결정법, 우주의 이법, 불성, 보오디, 열반), 3편 선도(총설, 선과 교, 선법의 지침), 4편 보살도(대승의 길, 보살의 길, 이상세계의 건설), 5편 승가(교단, 신행생활, 생활 규범, 협동생활, 보덕행, 재가생활규범, 公福생활, 호법행), 6편 종지 및 종사(종지, 종통, 종사, 조사전) 등이다.

이상으로 유신재건안의 관련 내용 전체를 요약하여 보았다. 이제부터는 그 내용에 나타난 성격을 대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당시 조계종단의 이념에 대한 강한 부정이 드러나고 있다. 조계종의 종조, 종지, 종통의 문제점과 모순을 지적하고 그를 개선하려는 의식과 대안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기존 종조로 내세워진 도의 국사 대신에 보조 국사를 내세우면서 종단의 이념 전체를 재정립하겠다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둘째, 종단의 교육 및 수행체계에 대한 비판과 개선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종조, 종지, 종통의 수정은 종단의 지도체계가 전환됨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당연한 조치이다. 그러나 그 전환에 대한 조율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육과 수행체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더하고 있어 그 대안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선방, 강원, 동국대에서의 교육을 거의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이 그 단적인 실례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를 중심으로 종풍, 종단 기강, 교학의 체계를 정립하려는 대안은 자못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셋째, 당시 종단 운영의 강한 비판이 전제되었으며, 그 개선 방향은 합리적인 종단의 지향에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종단 운영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은 주로 승려 중심의 운영에서 기인한 것에서 찾은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 대안은 사부중이 참여하는 종단에서 찾되, 이를 위해서는 출가중(승려)과 재가중(신도)의 재교육과 재수련을 그 전제 조건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려의 반발을 고려하여 출가중과 재가중이 담당할 직무를 영도권과 운영권 참여로 이원화시킨 것도 현실을 고려한 고민의 산물로 보인다.

넷째, 재가자의 종단 운영의 참여를 양원제 실시에서 찾은 점이 유의할 측면이다. 이는 출가중과 재가중의 의무와 권리를 이원화시킨 전제하에서 나온 것이다. 재가자가 참여하는 하원도 출가중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면을 은연중 제기하였음은 승려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고려로 보인다. 또한 그 하원에 참가하는 재가자의 신앙과 애교(愛敎)를 중시하겠다는 점과 아울러 그 실시를 위한 교정위원회에 승려와 함께 동참하려는 구도는 승가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된다. 1963년 11월의 전국신도회에서 제안한 혁신재건안에서는 기존 종회의원 50명 이외에 재가자 출신 의원 30명을 추가하는 방안이었는바, 그 방안과 이 양원제안과 비교하면 승려의 동의와 이해가 재가자 종단 운영 참여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새롭게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섯째, 전국의 사찰을 종단 재건, 종단 이념의 재편, 사찰의 문화정신 계승, 교육, 수행, 포교, 교화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나오고 있다. 지금껏 불교개혁, 종단개혁 등에서 이 같은 혁신적인 구도는 차별적인 방안이라 하겠다. 각 사찰의 전통과 역사성을 고려하면서 종단과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새로운 방향으로 각 사찰을 그 최전선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여섯째, 종단의 이념과 지도체계에 대해서 근본적인 대안을 내놓았다면 종단운영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은 현실을 충분히 고려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려는 고뇌의 산물로 보인다. 1963년 조계종단 혁신재건안과 비교할 경우, 종단 이념과 지도체계 확립을 기하기 위한 대안(교육, 수행)은 더욱 강화되고 다양한 반면 종단 운영에 있어서는 그 대안의 분야가 축소되면서 현실적인 탄력성을 갖기 위해 유의한 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개선하려는 종단 운영의 분야에서 출가중과 재가중의 의무와 권리를 이원화시키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부문을 양원제에서만 찾았다. 또한 유신재건안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에서 당시 주지, 간부급 승려들을 실천요원으로 설정한 것이나 그 이행을 위한 교정위원회를 승려와 재가자가 함께 구성하고 함께 제반 문제를 풀어가자는 주장은 그를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4. 결어

지금까지 이청담이 1969년 8월 12일에 조계종을 탈퇴한 요인으로 작용한 조계종 유신재건안에 관련된 제반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 내용의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그 재건안의 내용뿐만 아니라 재건안에 나타난 배경을 당시 불교계 동향과 관련지워 살펴보았다. 이제 그 개요를 정리하면서 그 이면의 의의를 더욱 살피는 것으로 맺는 말에 대하고자 한다.

이청담은 1964년 1월에 출범한 기획위원회의 좌절과 1965년 이후부터 본격화된 조계종의 화동의 흐름에서 가시화된 종단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혁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현실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1967년 7월 종정을 자진 사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그가 이전부터 추진한 정화운동의 지속을 통한 종단 개혁을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종익은 1963년 11월 전국신도회가 추진한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의 핵심 실무자로서 그 재건안이 종회에 제출된 이후의 이행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재건안은 종회에서 기획위원회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는바, 이종익은 그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종단개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 위원회는 출범 후 불과 1년 후에 접어들면서는 종단의 무관심, 신도회의 역량 부족 등으로 인하여 변질을 겪었다. 더욱이 그는 1965년 7월경에는 기획위원에서도 이탈하였다. 이는 그가 의도한 종단개혁과 기획위원회의 노선이 불일치한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종익과 이청담은 기획위원회의 출범시에는 동질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 변질에 즈음하여서는 개별적인 노선을 가고 있었다. 즉 이청담은 기획위원회를 통한 종단 개혁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종익은 종단개혁에서 관심을 거두고 있었다.

이 같은 이질적인 노선을 가고 있었던 이청담과 이종익이 종단개혁을 위해 결합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거니와 그는 1968년 11월의 이른바 불국사 사태이었다. 불국사에서 일어난 승려들 간의 폭행 사태는 통합종단이 출범한 직후 최초로 발생한 승려 폭행 사건으로 당시 불교계 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청담은 그 사건이 당시 종단 내의 제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고 그 해결을 위한 최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이는 그가 주장하고 있는 승단 정화의 명분을 살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그 사건에 분개하였던 재가 신도들은 이 기회를 승단 정화 혹은 종단개혁을 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그 저변에는 재가자의 종정 참여라는 목적이 일정 부문 개입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재가 신도단체는 그 노선을 정비하면서 종단개혁을 위한 연합회인 정법수호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종단의 변화에 즈음하여 이청담과 정법수호회는 종단개혁이라는 목적을 두고 같은 노선을 갔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1968년 후반부터 1969년 6월경의 정황이었다. 그 연대는 1969년 6월의 조계종 재건위원회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이종익은 그 재건위원회의 일원이었다. 마침내 재건위원회에서는 조계종 개혁을 위한 재건안을 작성하여 1969년 7월에 개최된 제20회 중앙종회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재건안은 조계종단 이념의 부정, 교육 및 수행체계에 대한 비판과 개선의식, 종단 운영에 대한 비판, 재가자의 종단 운영 참여, 사찰의 활성화 등을 유의한 것이었다. 그 내용에는 특히 기존 종조인 도의 국사를 제외하고 보조 국사를 내세우자는 것, 재가자의 종단 운영의 참가를 위한 양원제(상, 하원)의 도입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도 적지 않았다. 이 재건안은 1963년 11월에 작성된 신도회의 혁신재건안을 계승한 것으로 대부분 이종익의 구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종회에서는 이 재건안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 종단을 부정한다는 등등의 이견으로 인해 충분히 토의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일단은 종단의 총무원에서 검토하여 차기 종회에 보고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 같은 종회의 결정은 재건안을 홀대한 것이었다. 이에 재건안을 제출하고, 재건안의 내용을 설명한 이청담은 종단 탈퇴라는 충격적인 성명서를 발표하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재건안을 작성·제출한 인물들이 정화운동 초창기 시절의 주역이라는 점을 유의하면, 이 같은 사태의 전개는 조계종단 내에서 정화의 이념이 배척당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청담은 정화운동을 진두지휘한 핵심 승려로서 총무원장, 종정, 장로원장을 역임한 종단의 상징적인 승려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종단은 서서히 정화 이념의 상실로 접어들었음을 느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로 이해된다.<끝>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대각사상 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 <고려 무인정권과 불교계><한국 근대불교사 연구><한국 근대 불교의 현실인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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