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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무행정 제도 변천 고찰 / 조기룡
[현대 불교사 탐구]
[7호] 2001년 06월 10일 (일) 조기룡 조계종 중앙종회 사무처

1. 서언

현대 조직의 특징 중의 하나는 복잡성이다. 과거 단순했던 신앙·수행 공동체인 종교집단의 조직도 현대 사회의 변화와 그 요구에 따라 복잡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리고 조직의 복잡성은 필연적으로 업무의 조정과 운영을 요구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 제도이다. 제도란 조직의 목적 달성을 위한 특정한 행위나 일의 절차, 방법, 원칙 등이 모여진 결정체로서 조직 운영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조직의 인적 구성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그 운영의 기본틀인 제도가 부실하면 그 조직은 발전할 수가 없다.
본고에서는 한국불교의 여러 종단 중 최대 종단이자 전통 종단인 조계종의 종무제도를 연구대상으로 하되, 전래 이후 교단사 전체를 이 소논문에 담아낼 수는 없으므로, 현대적 행정조직이 정비된 사찰령 시행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연구시점으로 하고자 한다.

특히 조계종 종무행정 제도의 핵심이 되는 종헌을 중심으로 해서, 종단 운영의 원동력이 되는 인사권과 재정권의 이동을 축으로 하여 조계종의 제도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가 조계종의 제도 변천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그 흐름이 어떤 방향성을 가치고 변해 왔다면 이동방향을 분석하여 조계종의 현황을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분명 도도한 흐름이 있다.

현명한 자는 이 흐름을 알고 사회를 발전시키나, 어리석은 자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사회를 퇴보시킨다. 필자가 조계종의 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도 조계종이 후자의 길을 피하고 전자의 길을 가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2. 지방종무기관 성립기

일제는 한일합방 1년 뒤인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을 제정 반포하고 그 해 7월 8일 사찰령 시행규칙을 공포하였다. 이 사찰령은 한국불교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효과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현행 조계종의 지방종무기관인 본말사는 바로 이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특히 사찰령 시행규칙 제2조에는 주지의 취직에 대하여 조선총독에게 신청하여 인가를 받아야 하는 30개 사찰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들 사찰이 30본산1)이며 이외의 사찰은 각 본사에 소속된 말사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 30본산을 총괄할 중앙종무기관이 교단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2) 이의 총괄은 사찰령에 의하여 총독부에서 담당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중앙종무기관을 교단 내에 인정할 경우 민족의 구심점이 생길 것을 우려한 분열정책으로 파악된다.

또한 종전의 교단은 민주적인 산중공의(山中公議) 제도3)에 의해 주지를 임면할 수 있었으나, 사찰령 시행규칙에 의해 본산주지는 총독이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이 주지에 대한 인사권을 갖게 되어 교단은 자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은 조선총독을 정점으로 한 일제의 행정체계 하에 한국불교를 일원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시행된 것이라 할 것이다.

    사찰령 제3조 사찰의 본·말관계 僧規, 法式 기타의 필요한 寺法은 각 본사에서 정하여 조선총독의 허가를 受함이 可함.
    사찰령 시행규칙 제2조 아래에 揭하는 사찰주지의 就職에 대하여는 조선총독에게 신청하여 인가를 受함이 가함.
    경기도 광주군 봉은사 수원시 용주사
    양주군 봉선사 강화군 전등사
    충청북도 보은군 법주사
    충청남도 공주군 마곡사
    전라북도 전주군 위봉사 금산군 보석사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 장성군 백양사
    순천군 송광사 순천군 선암사
    경상북도 대구부 동화사 영천군 은해사
    의성군 고운사 문경군 김용사
    장기군 기림사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양산군 통도사
    부산부 범어사
    황해도 신천군 패엽사 황주군 성불사
    평안남도 평양부 영명사 순안군 법흥사
    평안북도 영변군 보현사
    강원도 간성군 건봉사 고성군 유점사
    평창군 월정사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 함흥군 귀주사
    전항 이외의 사찰주지의 就職에 대하여는 지방장관에게 신청하여 인가를 受함이 可함.

이러한 30본산제는 법맥 중심의 승가조직이나 전통적인 승풍의 진작과는 상관 없이 비합리적으로 지정된 것으로, 다음의 글은 당시의 상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今에 本末 區域을 觀할지라도 그것은 歷史上 關係를 취한 系統的도 아니오 行政的 便宜를 取한 地方制도 아니로다.
    이러함에도 不拘하고 惑은 創建年代의 久遠한 者가 反히 近古 新倉의 下에 末寺가 되며 혹은 歷史不明의 寺刹이 歷史 赫赫한 寺刹의 上에 居하야 本寺가 되며 或은 地醜德齊한 地位로 本末이 懸殊하게 되니 그 末寺로 하야곰 和氣融融게 平靜安穩코자 한들 엇지 可得할 바이랴.4)

여기서 알 수 있듯이 30본산제는 역사적·행정적 기준 없이 일제의 정치적 관점 하에서 조직화되고 위계화된 체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본산은 각각 30개 지역으로 분열된 채 총독과의 구심적 관련성만을 중시하면서, 각 본산은 중앙교단의 통제 없이 자신의 힘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30본산은 독자적인 인사권과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종권(宗權)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한 상태였다. 30본산제가 종래 체계와 통일성이 없던 한국 사찰의 행정체계를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전환시켜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5) 그러나 이는 국가행정체계에서의 관점이며, 교단의 관점에서 본다면 종권을 보유하지 못한 채 다만 지방종무기관만을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중앙종무기관 성립기

1) 총무원·교무원
1919년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사찰령이 시행된 후 10년이 지나면서 일제 사찰정책의 본질을 자각하게 되었고 1920년에는 본격적인 사찰령 철폐운동이 시작되었다. 사찰령의 극복을 위한 불교혁신의 움직임은 이후 30본산과 30본산 연합제규를 부정하고 불교계 통일기관의 설립을 요청하게 된다. 이는 한국불교계가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 30본산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30본산 연합사무소가 대표기관으로서 제 기능을 못하는 현실 속에서 불교계의 혁신 및 민족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적 여건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된다.6)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2년 1월 해인사·통도사·범어사·석왕사 등 10여 본산이 참여하여 중앙종무기관인 총무원이 설립되지만 일제에 협조적인 본사주지들은 이에 대응하여 1922년 5월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을 설립시켜 대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인하여 30본산 중 27개 본산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은 그 명칭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불교계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종무기관이 아니고 불교계의 사업을 전담하는 재단법인에 지나지 않았다.7) 그 후 1924년 3월경 양측의 대타협을 통해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으로의 통합이 이루어져 불교계 기관의 단일화를 이루는 중앙종무기관이 성립되지만, 이는 총무원이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 합류한 것으로 일제의 사찰정책에 종속되어 자주적 통일기관으로서의 위상은 위축된 것이다.8)

2) 종회·중앙교무원·법규위원회, 3권분립
불교계 통일운동은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 총무원이 합류한 이후에도 지속되어, 1929년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를 통해 최초로 종헌이 제정되고 종회와 중앙교무원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이 종헌은 불교계의 제반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종회에 부여하고 중앙교무원은 실무 집행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는데,9) ‘종문(宗門)의 만기(萬機)를 공결(公決)하기 위한’ 종회는 당시 불교계의 현안이 되었던 통일기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불교계 모든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부여받은10) 입법기관이었다.

이러한 종회의 의원은 예·결산의 재결, 중요 법규의 협찬, 일체 의안 등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뿐만 아니라 일체 의안의 제출권도 부여받아11) 종회가 실질적으로 입법기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중앙교무원은 ‘교무와 제반 사업을 통변하는’ ‘31본산의 단일기관’으로서 종회에서 결정된 불교계 모든 문제와 사업을 전담하여 추진하는12) 행정기관이었다. 또한 종헌은 중앙교무원 산하에 각 법규의 해석과 법규 운용상의 분쟁의 재결을 처리하는13) 법규위원회를 두어 사법기관의 성격을 갖도록 하였다.14) 종헌은 기관간 권력충돌의 경우를 대비하여 교정회(敎正會)를 설치하여 종회가 교무원을 위해하는 의안을 의결할 것이 예상되는 경우는 교정회에서 그 종회를 부결할 권한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제정된 종헌은 권력을 3권으로 나누어 입법은 종회에 행정은 중앙교무원에 사법은 법규위원회에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법규위원회가 중앙교무원 산하에 설치되어 있으며 종회의 의결과 교정회의 반포를 요하기는 하나, 종헌·교무원 원칙·종회법 등의 제정권 같이 일정 부분 3권분립에 위배되는 행위를 할 수가 있어 완전한 3권분립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이 종헌은 구조상 중앙집권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실질적인 운용에 있어 지방분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종무기관인 중앙교무원이 중앙기관으로서 지방의 사찰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인사권과 재산권을 확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즉, 중앙교무원에 주지의 임명권과 사찰재산에 대한 처분권이 없었던 것이다. 주지의 임명은 여전히 사찰령 시행규칙 제2조에 의하여 조선총독과 지방장관에게 있었으며 사찰재산에 대한 처분권 역시 사찰령에 구속받고 있었다. 종헌에서 불교계의 전재산이 조선불교 선교양종의 재산임을 명기하고 있고 사찰령 하에서의 사찰 재산에 대한 관리권은 사찰령 제4조에 의하여 해당 주지에게 있었으나, 그 재산의 처분권은 사찰령 제5조에 의하여 조선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은 자주적 교단인 중앙교무원이 중앙집권을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승려대회 종료 이후 불교계는 대회에서 제정한 종헌의 실행을 불교계의 시대적 과제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불교계가 자주적으로 정한 이 종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일제의 사찰정책을 옹호하는 반대세력은 종헌을 일제당국이 승인하지 않은 것이라고 경시하여 중앙교무원을 인정하지 않고 일제가 승인한 이전의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을 존중하였다.

4. 중앙집권제 구현기

1) 종정 중심제

① 조선불교 총본산 태고사법
불교계 통일운동은 분열의 어려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지속되어 1935년 이후 총본산 건설운동으로 집약되어 1941년 일제가 최초로 승인한 교단인 조계종과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이때 한국불교의 종명을 ‘조선불교 선교양종’15)에서 ‘조선불교 조계종’이라 하고, 총본산 태고사에 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할할 수 있는 인사권 및 행정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을 제정하였다.16)

이 법은 태고사와 관련하여 “사격을 총본사·본사·말사의 3종(제7조)”으로 하여 “총본사는 본사 및 말사를 통할하여 지휘감독(제9조)”할 권한을 보장하고 “본말사는 총본사 유지의 의무를 진다.(제10조)”고 하여 태고사가 명실상부한 조선불교의 최고 대표 사찰이 될 수 있도록 그 위상을 보장하였다. 또한 제29조에 “총본사 주지는 종정(宗正)이라 칭하고 본종의 대표로서 종정(宗政)을 총리(總理)한다.”고 종정 중심의 체제를 명시하였으며,17) 종정에게는 종회의 소집권(제30조), 총본사의 직원(제33조) 및 포교사 임면권(제34조), 승니의 도첩과 법계 수여권(제35조) 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종무의 집행을 위하여 총본사에 종무원, 본사에 종무소, 말사에 사무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제38조). 종무원에는 종무총장을 두어 종정을 보좌하고 종무를 장리하도록 하고 종무총장이 종정 유고시 그 직무를 대리하도록 하였으며(제43조), 서무부, 교무부, 재무부를 설치하여 각부의 사무분장은 종정이 정하도록 하였다(제38조). 그리고 종무총장과 각 부장의 임면을 종정이 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종무총장의 임면은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제45조). 종무원에는 또한 종무고문을 약간인 두어 종정의 자문에 응하고 중요한 종무를 심의케 하였는데, 그 임면에 있어서는 종무총장과 마찬가지로 종정의 임면을 받아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제40조). 이와 같이 종정은 모든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권한의 핵심인 인사권을 행사함에 있어 조선총독에게 제한당하고 있었다.

총본산 태고사법은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제정된 종헌과 같이 입법부인 종회의 설치도 규정하고 있는데, 총본사에는 중앙종회를 본사에는 교구종회를 설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제52조) 그리고 중앙종회 의장은 종정이 하도록 하여(제52조) 종정 중심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총본산 태고사법은 입법부인 종회의 설치는 규정한 데 반해 사법부에 해당하는 기관의 설립을 규정하고 있지 않아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의 종헌에 나타난 3권분립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② 조선불교 교헌
불교계는 해방이 되자마자 기존 교단 집행부가 퇴진하고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불교혁신을 위한 여러 방안이 논의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교구제 실시 문제였다. 이를 위하여 1945년 9월 22∼23일에 걸쳐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서는 불교의 종명을 ‘조계종’에서 ‘조선불교’로 바꾸고 교정(敎政)기구의 개혁을 논의하면서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을 부정하고 총본산 태고사법과 31본산제를 폐지하였다.18) 그리고 그 대안으로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였는데, 운영체계에 있어서 “교단 대표로 교정(敎正) 1인을 두고(제10조) 교정은 교정(敎政) 전체를 총람하며 일체의 교무를 재정(裁定)함(제11조)”이라고 규정하여 교단의 일체 종무가 교정 중심의 운영체제임을 명시하고 있다.19)

교정체제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 하의 종정이 교정으로 명칭만 변경되어 교정 중심의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의 틀을 유지하면서 기존 종회가 중앙교무회로 기존 종무원이 중앙총무원으로 기존의 감사원이 중앙감찰원으로 변경된 것이었으며, 이전 본산체제를 각 도에 교구 교무원을 설치하여 각 도 교정의 중심을 삼도록 하는 각 도별 교구제로 전환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불교 교헌은 일제말기 교헌의 성격이었던 태고사법을 자구만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20)

③ 불교조계종 종헌-불교정화운동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라는 제1차 정화유시를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비구·대처 갈등이 급격히 야기되면서, 대처승 중심의 교권(敎權)세력은 1954년 7월에 이전의 ‘조선불교 교헌’을 ‘불교조계종 종헌’으로 바꾸고 교정을 종정으로 환원하여 당시의 송만암 교정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였다.21) 종정은 종회의 의결을 경(經)하여 총무원장을 임명할 수 있었으며(제35조), 총무원장은 종정을 보좌하여 종정(宗政)을 통리하였다(제36조). 또한 종정은 조계종을 대표하는(제13조) 반면에 총무원장은 총무원만을 대표하는(제36조) 종정 중심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11월 4일 ‘왜식 종교관을 버리라’는 제2차 정화유시를 발표하자, 11월 5일 비구측은 종단 사무실이 있었던 태고사를 접수하여 대처측에게 종권의 양도를 요구하게 된다. 결국 대처측은 공권력의 압박, 사회여론의 불리 등으로 인하여 11월 20∼24일 종권집행부의 퇴진을 결의하게 되나, 그 종권을 이른바 태고문손 계열인 대처측 비구들에게 인계하였다.22)

이러한 혼란 속에서 비구·대처 양측의 대립이 해결되지 않자, 공권력이 개입에 나서서 1955년 1월 26일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7월 11일에는 사찰정화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8월 12일 비구측이 주도한 전국승려대회가 태고사에서 개최되었다. 1천여 명의 승려가 참가한 대회에서는 기존 총무원 및 종단 간부들의 해임, 신종회 구성, 종헌 제정·통과, 신집행부 구성 등이 이루어졌다. 이 같은 결정은 당시 공권력도 인정하게 된다. 요컨대 국가의 합법성에 기초한 종헌이 선포되고, 조계종이 출범하였다. 이는 전국 사찰의 소유와 관리의 권한이 비구측의 정화구도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23)

그런데 불교정화 추진에 변수가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정화를 후원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4·19혁명으로 인한 하야였다. 우선 대처측은 불교정화로 인한 사찰에서의 대처승 퇴진 등이 이승만의 정치적 후원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대세를 반전시키려고 하였다. 비구측은 이러한 정세 하에서 제16회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사태추이를 예의 주시하게 되었다. 당시 그 종회에서 결정한 주요내용은 종회를 상하 양원으로 하되 상원은 출가대중, 하원은 재가대중으로 구성하고, 중앙집권제에서 지방 수사(首寺)에 종무행정권과 인사권을 이양하는 것 등이었다.24)

그 후 비구·대처측의 대응은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5·16을 통하여 정권을 집은 군부세력, 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는 불교정화로 야기된 분규를 사회안정 차원에서 해소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였다.25)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 불교재건위원회였다. 불교재건위원회는 1962년 1월에 4차례의 회의를 거쳐서 2월 12일 불교재건 비상종회를 이끌어 내었다. 비구·대처의 대표 각 15인으로 구성된 그 비상종회는 2월 20일에는 종헌의 골격을 완성하였고 종헌의 대부분이 합의되었다. 4월 1일에는 불교재건 비상종회 의원이 참가하여 비구측 종정(이효봉)과 대처측 총무원장(임석진)을 선출하고, 4월 11일에는 마침내 통합종단이 역사적 출발을 하게 된다.

당시의 종헌에 의하면 비구측이 맡기로 되어 있는 종정에게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는 종정 중심제였다. 조계종을 대표하는(제19조) 종정은 인사에 있어서는 종단직원 및 사찰주지를 임면하고(제25조) 중앙종회에서 선출된 총무원장 및 각 부장을 임면할 수 있었다. 또한 재무에 있어서는 사찰 및 종단에 속한 재산을 감독하며 그 처분에 있어서는 승인권을 가졌다(제26조).

이전의 불교조계종 종헌과 마찬가지로, 종정이 조계종을 대표하는 반면 총무원장은 종(宗)이 아닌 원(院)을 대표하였으며 종정을 보좌하며 그 역할에 있어 종정(宗政)을 통리하고 종정의 궐위시에 그를 대행하였다(제49조). 또한 인사와 재무의 권한에 있어서는 종단직원 임명·재산의 감독 및 처분에 관한 상신권밖에는 없었다(제50조). 이는 종정을 비구측에서 맡기로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종정의 권한을 강화한 것으로 후일 종정과 총무원장 간의 권력분쟁의 계기가 된다.

당시 종헌은 종정 중심제에 충실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3권분립의 원칙은 준수되고 있지 않다.26) 입법부인 중앙종회는 중앙종회를 소집함에 있어 그 의장이 종정의 동의를 얻어서 소집할 수 있도록 하고, 임시종회를 소집함에 있어서도 종정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또는 중앙종회의원 1/3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소집할 수 있도록 하여(제38조) 중앙종회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제약받고 있다. 또한 사법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사정기관인 감찰원과 법규위원회만이 존재하였는데 감찰원장·부원장 및 감찰위원 그리고 법규위원을 임명함에 있어서도 중앙종회의 선거를 거쳐 종정이 임명하도록 하고 있다(제55조, 제60조).

지방종무기관의 관계에 있어서는, 도별 교구제가 폐지되고 오늘날 25교구본사제에 이르게 되는 해방전의 본사제가 부활된다.27) 그러나 형식은 31본산제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변화된 것은 중앙종무기관이 본말사에 강력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중앙집권을 이루게 된 것이다. 종정은 지방종무기관인 본말사에 대하여도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본말사의 예산·결산안, 그 소유재산처분안, 관내종무 및 사찰법규 기타 중요한 사항은 당해 본말사회의 의결을 거쳐 종정의 인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제78조). 즉 종정은 중앙집권의 당연한 귀결로써 지방종무기관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통합종단은 비구·대처 간의 갈등을 지속하였으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대처측보다 먼저 불교단체 등록을 하여 대한불교 조계종을 종명으로 등록한 비구측은 11월 30일에 제2대 종정으로 이청담을 추대하게 되면서,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손경산과의 종권분쟁으로 인해 비구간의 내분에 빠지게 된다. 종정은 비구측에서 총무원장은 대처측에서 맡기로 했기 때문에 종정의 권한이 의도적으로 강화되었는데 총무원장마저도 비구측에서 맡음에 따라 비구간의 권력충돌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후 대처측은 1970년 4월 16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5월 8일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불교단체 등록을 문교부에 접수시켰고, 정부는 이를 공식 인정하였다. 태고종의 독자노선의 선택과 정부의 공인은 불교정화라는 대단원을 공식적으로 마감하는 것을 의미한다.28)
불교정화운동 종료 후 종정과 총무원장 권한을 두고 대한불교 조계종은 앞에서 언급한 비구간의 분쟁에 휩싸이게 되는데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은 1975년 7월에 제주 관음사 주지 임명을 놓고 본격화된다.29) 이에 10월 2일에 원로 24명이 참석하는 중진회의를 개최하여 종단비상사태의 대권을 종정에게 일임하는 결정을 내린다.

종정 중심제가 강화됨에 따라 1인에게 집중된 종권을 견제할 필요성이 대두되며, 1975년 12월 4일 제42회 중앙종회 본회의에서 철저한 종정 중심의 종단운영에 대하여 중앙종회의 견제기능을 강화하도록 종헌을 개정한다.

주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종정의 종무처리가 부당한 경우에는 중앙종회의 결의로써 이를 무효화 내지 변경시킬 수 있도록 하고(제37조의 2), 종정은 15일 이내에 중앙종회의 결의사항을 공포시행하도록 하였다(제41조의 2). 또한 1962년 종헌이 중앙종회소집시 종정의 동의가 없으면 중앙종회를 소집할 수 없도록 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규정을 삭제하였다. 이와 같이 1975년 개헌을 통하여 형식적으로는 입법기관이자 대의기관으로서의 중앙종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인사권과 재무권 같은 실직적인 권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종정 중심제라 할 수 있었다.

2) 총무원장 중심제

① 종정과 중앙종회의 분쟁
1977년 9월 9일 열린 제48회 임시중앙종회가 유회될 때까지는 강력한 종정 중심제가 지속된다. 이 임시중앙종회는 종정 중심체제와 관련하여 이를 견제하려는 중앙종회와 지지하려는 총무원의 대립으로 인해 성원미달사태가 발생하면서 유회된다.30) 그 여파로 10월 7∼8일 해인사에서 총무원측의 참여 없이 제49회 임시중앙종회가 개최되고 이서옹 종정추대결의 무효를 선언하고 이서옹 종정불신임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10월 12∼14일에 개최된 제50회 정기중앙종회가 통도사에서 개최되어 총무원장 중심제의 시작을 알리는 개헌안이 통과된다.

이 종헌에서는 종정이 종단을 대표하나 대표권의 행사와 종무행정의 통리권은 총무원장이 행하도록 하였다(제19조). 이로써 종정이 행정의 책임자가 아닌 신성의 상징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총무원장이 종무행정의 대표자로서 종무행정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총무원장의 임명에 있어 종정의 지명으로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던 것을 중앙종회의 선출로 종정이 임명하도록(제47조) 하여 총무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이면에는 중앙종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중앙종회는 그 권한을 상당히 강화하였는데, 이전에는 종정의 권한이었던 종법의 제·개정권을 중앙종회에서 의결된 종법을 공포시행하는 것으로(제27조) 한정하였으며 종정이 종지·종통에 위배된 주장을 하거나 중대한 과오를 범한 경우에 그 추대를 취소할 수 있도록(제37조 제①항 제4호) 하여 종정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었다. 또한 총무원의 각 부장 임명시에 종회의 인준을 얻도록 하였고(제47조) 종무행정기관에 대한 수시 감사권을 부여받아서(제37조 제①항 제6호) 총무원을 견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앙종회의 권한강화는 필연적으로 총무원과 종권다툼을 야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종단은 양분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의 해결을 위해 1978년 4월 27일 재경(在京)원로 및 중앙종회측 대표가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원로회의 신설과 중앙종회 권한의 약화를 골자로 하는 새 종헌·종법제정을 합의한다. 원로회의는 기존 장로원의 명칭을 변경한 것으로 중앙종회의 결의에 문제가 발생하고 분규의 조정이 어렵게 되자, 장로원을 중앙종회의 상원격인 원로회의로 명칭을 변경하여 종헌 개정안에 대한 의결권(제29조 제①항)과 원로, 총무원장, 각종 위원회 위원장 등의 징계 또는 불신임 동의에 대한 결의권(제29조 제②항)을 원로회의에 부여하여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31)

그러나 원로회의는 실질적으로 인사권과 재무권을 보유하지 못한 자문기구였다.32) 또한 수 차례의 종헌 개정을 통하여 강화되어 왔던 중앙종회의 권한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켜 종무행정기관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중앙종회의 권한이었던 종정의 선임 취소 권한을 삭제하고, 총무원장 및 각 부장의 불신임 요건을 재적 2/3이상으로(제37조 제⑤항) 강화하고 중앙종회의원의 자질향상을 위해 자격요건을 연령 30세 이상에서 35세 이상으로 상향조정하여 종단안정 및 화합에 기여하도록 하였다.33)

이와 더불어 주목할 만한 것은 법규위원회의 지위변화이다. 법규위원회는 개정 전 종헌에서는 총무원에서 중앙종회에 제출하는 종법안, 종령안 기타 법규의 기초 심사를 담당하는 업무에 그친 데 반해,34) 개정 종헌에서는 종헌·종법의 합헌성 심의 및 종헌·종법의 최종해석권을 갖도록 하여 그 권한을 국가의 헌법재판소에 해당하는 최고의 종헌해석기관으로 그 위상을 격상시켰다.35)

중앙종회의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 이후에도 종정과 종회간의 분쟁은 지속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9월 8일의 제54회 중앙종회에서는 종정의 지위를 약화시켜 본격적인 총무원장 중심체제를 구축할 것을 선언한다. 이 종회에서는 종헌에 종정의 종무행정 참여금지를 선언하고(제19조) 종단의 대표권자를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하고(제49조) 종정은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는 정신적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고(제19조) 총무원장 임명권을 삭제하면서(제47조), 그간의 종정 문제를 위시한 종헌질서의 문란과 종단분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종단이 집행부의 조계사측과 종회의 개운사측으로 양분되어 종권다툼을 지속하는 가운데, 1980년 군사정권은 쿠데타에 의해 정권찬탈을 하고 국민의 분노를 돌리기 위하여 불교정화라는 명목으로 10·27법난을 자행하게 된다. 10·27법난으로 종단의 자율정화는 무산되고 비구와 비구니 40∼60인으로 구성된 ‘불교정화중흥회의’가 발족하게 되면서 불교정화중흥회의(의장 박기종)는 중앙종회, 총무원, 규정위원회 및 법규위원회의 모든 권한을 승계 받아 종헌·종법을 개정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선다. 그러한 수습을 위한 노력으로 인해 불교정화중흥회의는 총무원장의 권한강화와 3권분립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개정종헌을 1981년 1월 8일 공포하게 된다.

총무원장의 강화된 권한을 살펴보면, 기존 종헌에서 종정이 신성을 상징하고 종무행정에 관여하지 아니 한다는 조항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조직·재무·인사에 관한 전반적인 종정의 권한을 총무원장의 권한으로 명기하였다. 조직에 있어서는 교구획정권(제71조)이 종정의 권한에서 총무원장의 권한으로 되었으며, 재무에 있어서는 본말사회의 예산·결산안 및 그 소유재산 처분인가권(제75조)과 사찰의 재산처분 승인권(제93조)이 총무원장의 권한으로 이전되었으며, 인사에 있어서는 총무원 종무원 및 사찰주지 임면권, 징계의 사면·복권·경감 품의권, 포상권(제44조)을 총무원장이 행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총무원장의 독단적 인사를 견제하기 위해 본사주지의 임면을 심의 의결하는 인사관리위원회를 설치하고(제60조), 종정이 총무원장을 임명하도록 하기도 하였다(22조).

총무원장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에 중앙종회는 종정 또는 총무원장이 행한 종무처리가 부당하다고 인정될 때 종회의결로써 이에 대한 무효 결의 또는 변경 결의할 수 있는 권한이 삭제되어 권한이 약화되었으며, 중앙종회의원의 겸직금지 조항을 확대하여 호계위원장, 본말사주지 및 본사4직을 겸할 수 없도록 하여(제38조) 행정·입법기능이 분리되었다.

개정종헌에서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사법기관으로 호계위원회를 신설하여 3권분립체제를 확립하였는데, 독립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예결산의 독립집행권을 보장하고(제54조), 그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을 종법으로 정하도록 하였다(제55조). 그리고 호계위원장의 임명은 총무원장과 마찬가지로 종정이 하도록 하였다(제22조).

이와 같은 총무원장 중심제와 3권분립을 내용으로 하는 종헌의 등장으로 인하여 종정과 종회간의 분쟁은 일단락 된다. 그러나 총무원장 중심제로 전면 수정된 종헌은 중앙집권체제 확립을 위해 1981년 한 해에만 세 차례나 더 개정되는 홍역을 치른다.

5월 1일 개정·공포된 종헌 제44조 제④항에서는 전국 주요사찰의 예산을 총무원에서 조정·승인할 수 있는 ‘주요사찰 예산조정권’을 신설하고 인사관리위원회의 권한이었던 본사주지의 임면권을 총무원장에게 부여하였으며(제74조), 6월 19일 개정·공포된 종헌에서는 총무원의 직제를 개편하였으며, 9월 18일 개정·공포된 종헌 제44조 제⑦항에서는 불국사, 신흥사, 석굴암, 낙산사, 능인정사를 총무원 직할로 제정하는 ‘직영사찰관리법’을 제정하여 중앙집권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② 비상종단체제
10·27법난 후 구성된 불교정화중흥회의의 활동으로 인해 안정을 찾았던 종단은 1983년 8월 6일 신흥사 사건이 발생하면서36) 중앙종회가 그 권한을 원로회의에 이양하고 비상종단체제가 들어서게 된다.

중앙종회의 해산에 따라 그 권한을 승계한 원로회의는 9월 15일 제19회 원로회의를 개최하고 그 자신의 권한을 강화한다. 즉, 종단 비상사태시 입법, 사법, 행정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고, 원로회의 재적 2/3이상의 찬성으로 종헌의 전부 또는 일부의 효력을 정지시키거나 종단기관의 구성 및 권한에 대한 특별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122조). 또한 종단의 대표권자를 종정으로 하고(제19조), 총무원장은 총무원만을 대표하도록 하여(제44조 제①항) 강화되었던 권한을 축소하였다.

이후 8월 1일에는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비상종단운영회의를 해체시키고 오녹원 총무원장 체제의 집행부를 출범시킨다. 이에 원로회의에서는 8월 18일 종단비상사태를 전제로 원로회의의 비상조치권을 규정한 조항을 삭제한다.

해인사 전국승려대회에 의하여 비상종단운영회의가 물러나고 오녹원 총무원장체제가 들어서면서 9월 1일 제80회 중앙종회에서는 본사주지 임면에 관한 심의의결기구인 인사위원회를 폐지토록 하고(제59조), 총무원장이 본사주지를 직접 임명하도록(제74조) 종헌을 개정하였다. 이 개정으로 인해 다시 총무원장이 종단의 인사권을 확보하게 된다.

③ 강력한 총무원장 중심제
1986년 8월 22일 오녹원 총무원장이 사임하고 25일 서의현 총무원장체제가 들어서게 되고, 1988년 제92회 중앙종회에서는 총무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종헌개정이 이루어져 비상종단체제에서 잠시 종정 중심제로 환원되었던 종권이 총무원장 중심제로 바뀌게 된다. 이전의 “종정은 본종을 대표하고 종통을 계승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가진다.”를 상징적 존재로 바꾸고 종정임기를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여 중임토록 했다(제22조).

그러나 총무원장에 있어서는 1981년 불교정화중흥회의에 의해서 종정에게 부여되었던 총무원장 임명권이 원로회의 인준으로 개정되었으며(제26조 제②항), 1983년 제19회 원로회의에 의해서 종정에게 부여되었던 종단의 대표권을 총무원장에게 환원시키고 총무원장이 종무행정을 통리하도록 하였다(제44조 제①항). 또 징계·사면·경감·복권을 종정에게 제청하는 조항을 삭제 중앙종회 동의만 얻어도 가능하도록 개정하였다(제44조 제⑤항). 중앙종회의원 선거법에서도 종회의원 의석수를 65석에서 75석(직선 48, 간선 27)으로 늘려 총무원장의 종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37)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래 가장 강력한 총무원장 중심제가 합법화된 것이다.38)

1990년 8월 26일 제26대 총무원장에 연임된 서의현은 총무원장의 본사주지에 대한 인사권을 강화시킨다. 즉, 교구본사 주지의 면직 기준을 해임 이상의 징계 처분뿐만 아니라 종법에 의하여 직권면직에 해당하는 위반사항이 있을 때에는 총무원장이 면직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73조). 이 조항은 직권면직에 해당하는 위반사항의 해석 및 집행권이 총무원장에게 있기에 이 조항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총무원장 체제에 반대하는 교구본사 주지에 대한 탄압에 사용될 여지가 있는 조항이었다.39)

5. 교구자치제 도입기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저지와 종단의 개혁·자주화를 열망하는 종도들의 공감대가 ‘3·29 구종법회’와 ‘4·10 전국승려대회’로 집결되면서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는 막을 내린다. 이에 제10대 중앙종회는 제113회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한시적 기구인 개혁회의를 탄생시키고 자진 해산하였다.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의 와해와 함께 총무원장 중심의 중앙집권화는 9월 27일의 ‘개혁입법’을 계기로 지방분권화의 서막을 올리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본사주지의 임명권과 지방의회격인 교구종회의 설치에 관한 사항이다.

종전에는 총무원장이 직권으로 본사주지를 임명한 데 반하여 산중총회(山中總會)의 추천을 받아 총무원장이 종법에서 정하는 결격사유가 없는 한 지체 없이 임명하도록 규정하였다(제91조).40) 이로써 실질적으로 총무원장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대중들은 자신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주지를 선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과거 신흥사 사태와 같은 신구 주지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종단의 인사 부문의 이러한 변화와는 달리 재무 부문에 있어서는 교구로의 이전이 없이 종전과 같이 사찰 및 종단기관에 속한 재산을 매각, 기부, 담보제공, 대여, 인락 기타처분을 할 경우에는 총무원장의 승인을 얻게 되어 있으며 이를 위반할 시에는 행위를 무효로 하고 행위자는 징계하도록 하고 있다(제120조). 이는 주지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또한 종헌에 교구종회 조항을 신설함으로써(제85조 제①항) 각 교구는 중앙의 수직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어 종권의 지방분권화 초석을 이루었다. 교구종회가 그 순기능을 실행한다면 교구 내에서 지방의회의 기능을 함으로써 주지의 전횡을 막고 종도가 교구 운영에 직접 참여하게 되어 교구의 민주적인 운영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의 본말사회가 행정부의 기관장회의였다면 교구종회는 지방기관인 교구본사의 입법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권한을 보면 그 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

    제86조 교구종회는 다음 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1. 총무원장 선거인 선출
    2. 중앙종회에 건의할 종법제정 및 개정에 관한 사항
    3. 중앙종회에 건의할 사항
    4. 교구규칙의 제정 및 개폐에 관한 사항
    5. 교구의 예결산에 관한 사항
    6. 교구 내 중요한 불사, 교육, 포교, 수행, 사회, 복지에 관한 사항
    7. 본사주지가 부의한 사항
    8. 기타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 등

이와 같이 교구종회는 교구행정의 감독, 사업에 대한 심의의결 등 입법기능을 수행하여 종단발전의 기틀을 확보하게 해줄 수 있으며, 공의에 의한 종단 운영체계 확립과 지방불교의 활성화에 일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행정기관장 회의인 본말사회의의 대체기구로써 본사주지회의를 신설하였음41)에도 불구하고 교구종회를 구성함에 있어 직선의원 10인 이외에 본말사 주지와 본사 부주지 및 각 국장을 당연직으로 참여시키고 있으며42) 행정기관의 장인 본사주지를 그 의장으로 하고 있어 입법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약화시키고 있는 일면이 있다.

6. 결어

불교가 전통적인 계율만으로 현대사회에서 존립할 수만 있다면 좋겠으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조계종이 현실 속에서 종단의 공동이익과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운영의 근간이 되는 인사와 재무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이를 집행할 종무기관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조직의 성립과정에서 하부조직이 성립된 후 상부조직이 성립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조계종단 역시 이러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먼저 일제침략기에 사찰령에 의해 30본산제가 시행되면서 하부조직인 지방종무기관이 설립되었으나 상부조직인 중앙종무기관은 설립되지 못하였다.

이는 민족의 구심점이 생길 것을 두려워 한 일제의 분열정책에 기인하는 것으로 조계종은 자주적 종권을 갖지 못하고 총독부에 의하여 통제된다.

그러나 불교계 통일운동은 열정적으로 지속되어 마침내 1922년 총무원이라는 중앙종무기관을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종권은 지속적으로 사찰령에 근거한 공권력에 의하여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찰령에 의한 종권의 제한은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도 지속되다가 1962년 특별조치법에 의해서 해제된다. 그러나 이 해제는 불교재산 관리법과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변경되면서 새로운 공권력의 개입 형태로 나타날 뿐 종단에 자주적 종권을 제공하지는 못하였다.

조직과 권력의 성격상 지방과 중앙의 조직이 정비된 후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 중앙집권과 그 권한의 행사문제일 것이다. 즉, 통치권에 대한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조계종에서는 종정과 총무원장 간의 권한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게 되고, 본고에서도 이 부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방·중앙종무기관을 완비하게 된 조계종은 조선불교 총본산 태고사법을 통해서 종정 중심제의 중앙집권조직이 먼저 등장을 하게 되나, 불교정화운동이 종료되면서 총무원장 중심제의 중앙집권조직으로 전환된다. 이는 종교 조직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종교의 신성의 상징과 행정의 통리권을 1인에게 집중시키느냐, 이를 분산시키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현대사회에 들어 사회의 민주화와 시민의식의 성장에 따라 중앙에 집중되었던 권한은 점차 분산되는 현상을 보인다. 조계종에 있어서도 이 현상은 무관하지 않아서, 총무원장 중심의 중앙집권은 개혁종단의 등장과 함께 지방분권을 도입하여 교구자치를 도입하고 있다. 물론 교구자치제가 명실상부하게 정착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근현대사에 있어 실망스러운 조계종의 모습을 많이 보면서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이는 분명 참다운 종단의 모습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가 본고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종단을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면, 이것이 종단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지엽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조계종단은 먼저 지방종무기관을 설립하고 이후 중앙종무기관을 설립한 후 중앙집권기의 혼란을 거쳐 교구자치를 도입하는 조직 발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계종이 역사 속에서 발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여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권을 기반으로 한 사람 중심의 종단 운영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조계종의 제도 변천이 전체적으로는 발전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 내면을 살펴보면 분규적인 성격이 적지 않다. 심하게 말하면 조계종의 종무제도 변천은 종단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사회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사상적, 제도적 보완 내지 개혁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특정인, 특정집단의 이해를 강화시키는 방편의 측면이 있다.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으로서 사회의 목탁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기룡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고 졸업.동 대학원 행정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현재 조계종 중앙종회 사무처에 재직하고 있다. 논문으로 <종무행정의 조직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조계종단의 균형적 조직발전 방향><교구자치의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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