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본지 편집위원

1. 기획의 변

최근 불교학계의 학위논문이나 예비 논문들을 살펴보면 응용불교를 다룬 주제들이 눈에 띠게 늘어나고 있다. 이 논문들은 불교학을 근거로 삼아 각자의 관심사를 탐구하면서 제기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고, 여타의 전공을 기반으로 한 연구자들이 불교학을 원용하여 새로운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올해 응용불교학회와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가 창립되어 생명·윤리·생태·환경 등의 이슈를 불교와 접목시키고자 하는 경향도 그만큼 이 분야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다. 또한 불교 이론에 근거한 상담심리와 치료를 지향하는 학회가 발족된 것이나 불교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학제간 연구 형태도 유사한 흐름의 하나라 하겠다. 이번 ??불교평론?? 특집은 처음의 구상을 그대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파악하여 그 실태와 문제점을 드러내고 발전적 논의를 유도해 보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응용불교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 타이틀 앞에 턱도 없는 수준 미달의 졸속한 글들이 양산되어 응용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불교학 스스로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부각시켜 이에 대한 바른 진단과 처방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불교를 진실한 활용의 텃밭으로 가꾸는 방향을 짚어내는 것이 본 기획이 애초에 생각했던 뜻이다.

2. 폐쇄와 소통의 거리

응용불교는 불교의 이론과 세계관을 토대로 그 영역 밖에 있는 다양한 대상들을 해석하고 현실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응용은 모든 학문 분야의 첨단이자 그 최후의 열매를 맺으려는 자연스러운 조짐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그만큼 하나의 학문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가 그것이다. 뿌리부터 여러 가지 과정이 탄탄하고 빈틈없이 쌓여 오다가 터질 수밖에 없는 순간에 개화하는 것이 바로 응용인 탓이다.

불교 이론이 자기 안에 닫혀 오로지 자체의 모순이 없는 폐쇄적인 정합성만 지향한다면 다양한 현상에 대한 역동적인 해석의 지평을 열어주지 못한다. 그때마다의 현상에 적절히 반응하고 당면한 상황에 가장 적합하게 변신하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불교적 사유의 특성인 방편과 지혜가 노리는 목표이기도 하다.

교설이 다양한 현실을 응용의 장으로 활용하여 신진대사를 거듭하며 탄력성 있게 변모해야 하는 이유도 불교의 이러한 본질적 속성에 기인한다. 부단한 비판을 통하여 해묵은 철옹성을 무너뜨림으로써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 기본적인 이념에 배반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온갖 문제로 들끓는 아우성이 들리고 그 광경이 눈앞에 생생한데 그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생각도 없이 무심하기만 하다면 불교의 토대 자체가 붕괴될 일이다. 그렇게 침묵 일변도의 고요함을 유지하고는 아무도 자비심이니 회향이니 하고 다음 말을 내놓을 자격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방편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불교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와 이해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불교라는 껍데기를 썼을 뿐 빈약하고 족보없는 사고만 나열하면서도 사통팔달한 듯이 꾸밀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혼란과 시비가 일어날 때 자체의 정당성을 부여해 줄 근거를 지닐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확고한 이론적 토대를 갖추지 못할 경우, 언젠가 응용불교는 자신들의 의지처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활용이 없이 이론만 희롱하다 자체에 매몰된 불교는 스스로 옥죄며 속박된 끝에 세상과 소통이 막혀 자멸하리라 본다.

반면에 바른 혈맥을 갖지 못하는 응용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날뛰는 꼴이 될 것이다. 줏대도 없이 여기저기서 만나는 것 마다 회합의 한마당을 벌이면서 방편이랍시고 얄팍한 교설을 제공한 대가로 더부살이를 하며 돌아다니다가는 조만간 집도 절도 없는 부랑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수용 능력도 없이 손님이라면 모조리 받아들이는 정상에서 벗어난 하심(下心)의 비굴한 결말이다.

누적된 이론적 토대가 없어서 찾은 샛길이 응용불교라면 자족에 머물 뿐 어느 누구에게도 참신한 결과물을 안겨 줄 수 없다. 경론의 교리와 사상에 대한 연구에 치중되어 온 단지 그 현실 때문에 분연히 일어서 응용불교로 치달리는 것은 옳지 않다. 경쟁력 있는 응용은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구축하는 지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졸속하게 외연만 확장하다가는 응용 자체가 허망하게 날리는 털개지와 같은 신세로 떨어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려다 세상과 연이 끊어져 폐쇄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스스로 정비되지도 않은 몸으로 세상과 성급하게 소통하려다 갈 길을 잃어버린다. 이 폐쇄와 소통이라는 두 가지 장애를 뚫고 나가는 일이 작금의 응용불교 앞에 놓인 화두인 것이다.

3. 깃털 같은 응용

지극히 단순한 기초를 습득한 다음 그것을 원리로 삼아 현상을 해석하거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덧셈과 나눗셈 정도를 마치고 나서 수학의 모든 응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천재를 낳은 역사가 없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일정한 이론에 통달한 다음 그 안으로 아무 대상이나 끌어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불교와 저절로 조화롭게 섞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을 던질 때 몸의 모든 부분이 던지는 동작 하나로 일사분란하게 통일이 되지 않으면 의도한 목표 지점에서 벗어나기 쉽상인 것처럼, 응용의 대상과 불교가 별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만 하고 하나로 수렴되지 못한다면 손발이 제각각 움직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양자를 꿰어 맞추기는 했지만 논리적으로나 내용상 그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면 갓 쓰고 오토바이 타는 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한다. 변화에 적응하도록 시설된 방편의 논리는 경론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불교를 응용하는 학자라면 적어도 이 풍부한 자산에 기초한 성과물에 의지해야 하고, 그에 따르는 비판적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학제간 연구를 한답시고 이 사람 저 사람 각양각색으로 끌어들여 잔치를 벌리기는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먹을거리라곤 거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두 분야를 겸하는 연구는 한 편에 밝으면서 동시에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에 발을 들여 놓고 다른 하나는 공짜로 건져 먹으려 하는 마음으로는 당연히 성공률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교설과 이론의 길에서 끊임없이 장벽에 부딪치면서 막다른 궁지에까지 몰리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 학자로서 최소한의 요건이다.

범상한 눈으로 대충 들러보고 나서 “순수불교에 경도되어 실천성이 약한 연구 풍토를 개탄한다”고 하며 응용불교를 추켜세우는 자들에게서는 일말의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응용불교라는 문패를 달고 있는 논문들 중 불교의 요소라고는 한 점도 들어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평가할 가치도 없는 이런 류들은 힐끗 보고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참으로 돌아보아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 얄팍한 글재주 하나로 자신의 무식을 가리고 아무 주제에나 덤벼드는 재치덩어리들, 그리고 이론적 깊이에는 다가섰으나 응용에 가서는 도무지 문전 처리가 안 됨에도 점잖은 글로 포장하고 시치미를 떼는 부류들이다.

개론적인 연기설을 끌어들여 환경과 생태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다가 필요하면 화엄의 법계론에도 기웃거리고, 모순의 요소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중도로 간단하게 마무리하며, 때로는 선사들의 말끔한 음식 처리 솜씨를 거창하게 확대하는 등 한번 들었던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써먹을 수 있다는 단순무지한 생각이 난무한다. 그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여기저기서 뽑아다 꿰어맞추는 이런 방식이야말로 응용과 활용의 극치라고 착각하는 논문과 수필 그리고 매체의 입방아질 숫자는 넘치고도 한참 넘친다.

이런 작자들은 자신들의 무식을 한탄하며 기초공사를 고민하기보다는 차라리 저급한 수준에 만족하거나 응용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기기만에 빠져 버리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침착하게 공부하며 내공을 쌓지 않았다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이유나, 아니면 그 만큼의 무지에서 오는 그 만큼의 용기 때문이다.

불교가 바르게 응용되려면 정통한 이론가들을 이 분야로 유혹해내야 하고, 그들 스스로 세상의 무수한 난제들을 불교적 안목에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그 이전에는 자기 전공의 전문성을 높이며 그것을 제대로 써먹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순수한 태도이며 세상에 바치는 학자로서의 보시행일 수 있다.
또한 불교학도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철학이나 종교 등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없이 자기 밖의 복잡한 환경으로 나가 적응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면, 현대사회의 병폐와 생태환경의 파괴에 대하여 그 악역으로 기독교를 앉혀 놓고 그 대안으로는 불교를 내세우기도 한다.

참으로 공격적이지만 역공을 당하면 다종교가 공존하는 세계의 생태환경을 무시한 속좁고 독단적인 견해가 백일하에 탄로날 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 고유의 사유방식을 문제 해결의 중심에 자리잡게 하려면 한계선을 분명하게 긋고 양보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화쟁사상이 남북 갈등과 통일의 문제를 푸는 지침이 될 일부 요소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자체로 이 복잡한 문제를 온전히 떠맡기에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일부 교설을 과도하게 아무 대상에나 무차별적으로 써먹는 만병통치식의 진단과 처방은 스스로의 개성과 장점마저 깎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편이 되었거나 지혜가 되었거나 화쟁이 되었거나 불교에서 나오는 그 어떤 수단도 태생적으로 선(禪) 체험의 산물이거나 그것을 전제로 한 사고가 대부분이며 주요 교설일수록 이 기반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끈을 놓친다면 많은 경우 불교적 매듭은 여지없이 풀려버린다. 이 특징과 한계를 고민하지 않고서 나오는 응용은 그 경솔함의 대가를 틀림없이 치르게 되어 있다. 활용의 묘를 폭넓게 인정한다면 불교적 사유의 일부를 독립시켜 어떤 문제에 적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매사에 필요한 단물을 빼먹고 버리는 식이라면 불교표 일회용 쓰레기만 배출하게 될 것이다.

4. 응용불교의 발전을 바라며

응용은 교리에 내재된 당위적 요청이며, 따라서 불교의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각개의 문화에 이식되고 시대마다 특수한 조건과 마주치면서 갖가지 종파와 학파로 변모한 불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무엇을 어떻게 응용해야 하는지를 점검하고 올바른 방향을 탐색하는 작업은 불교학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이다. 전문화된 개별적 학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을 알리면서 불교학도 그들과 교섭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그것은 불교의 응용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자체는 선악을 따질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일 뿐이다. 이 틈에 앞뒤 가리지 않고 응용을 하겠다고 나서는 현상이 발전의 전조가 되기 위해서는 고전의 빈틈없는 번역과 창의적 해석 등 이론적 기초 작업이 배경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선행될 때 학제간 연구 따위에서 바람직한 의미를 손상하지 않고 구색을 갖춘 결과물을 산출할 것이며, 불교학도로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망각한다면 응용불교는 스스로 쇠락을 촉진하게 될 것이며, 대충 해 놓고 다음 수를 본다는 식으로 해서는 응용이 본질을 하나씩 잠식해 들어가서 기형적 불교만 양산하고 말 것이다.

응용불교를 시현할 판은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충분히 조성되어 있다. 소문난 잔칫집에 별로 먹을 것이 없는 것처럼 소리만 요란하게 울린 것인지, 아니면 알려진 것보다 깊이 들어가 새로운 영역을 구축해 하고 있는 중인지 살펴볼 시점이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리려는 심보가 아니라 쌀에 들어 있는 돌을 잘 골라내고 나서 밥을 지으라는 소리를 하고 싶다.

김영욱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졸업. 1994년 <단경 선사상의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본지 편집위원. 《가산불교대사림》원고 집필에 동참하면서 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