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간화선 논쟁의 몇 가지 관점

1. 현대에 있어서 불교와 선에 관한 관심의 증가

얼마 전 ‘쿤둔’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바 있다. 달라이 라마의 소년기를 담담히 그려낸 작품으로, 달라이 라마의 방한과 맞춰져 상영코자 하였지만 방한이 무산되는 바람에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영화에 보자면, 달라이 라마가 망명을 고심하던 중 신탁을 받게 되는데, 거기에는 ‘서구에서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예언이 들어 있었다. 그 예언은 적중하여, 달라이 라마가 비록 고국인 티베트에서는 떠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티베트 불교는 오히려 세계적인 관심과 주목을 끄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 티베트 불교는 서구식 합리주의와 물질문명에 식상한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또한 눈푸른 납자인 현각 스님의 《만행》이라는 책이 지난해 세간에 선풍적인 관심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바 있다. 합리와 실용주의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최고 학부인 예일대와 하버드대학원에서 공부한 미국의 지성인이 어째서 한국의 선에 매료되어 마침내 입문까지 하게 되었던 것일까?

말하자면 이 땅의 젊은이들 상당수가 목표로 삼아도 좋을 만한 위치에 있는 이가 정작 이 땅에서는 크게 주목하고 있지 않는 참선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증폭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것을 오히려 외국 그것도 최대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국민들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단 참선만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지난해 쌍계사 하계수련법회에는 이 책을 읽고 참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수련회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분들도 있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최근 들어 본사급 사찰 대부분이 하계수련법회에 참선과정을 마련하고 있고,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응 또한 상당하다는 점은 대단히 고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동안거 해제일을 맞이하여 제방 선원의 해제에 관련된 소식이 일간지의 문화면을 크게 장식한 바 있다.

거의 대부분의 일간지들이 해인사의 해제법요식을 취재하며 방장 스님의 법문과 안거의 내용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이는 현대인들의 참선에 관한 관심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참선에 관한 논의의 증가

참선에 관한 세인들의 관심과 더불어, 그 수행방법에 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수행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는 수행론이 있다는 점이 가장 커다란 특색이며, 따라서 수행에 관한 연구와 논의는 불교를 진정 불교답게 만들어주는 첩경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나 철학이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지 못한다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또한 그러한 이상이 자신의 노력이 아닌, 절대타자의 의도에 따라 성취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수행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수행이야말로 저마다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주체자로서의 노력 혹은 선택의 여지를 열어주는 관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최근 참선에 관한 반성적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불교의 현재 대표적 수행법은 바로 참선법, 그 중에서도 간화(看話) 수행법이다.

간화선은 고려 중엽 보조국사 지눌 스님에 의해서 이 땅에 도입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지식들이 직접 참구하고 깨달음을 증득한 정통적 방법이라는 점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제방의 선원에서는 대부분 이 방법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비파사나와 염불선, 혹은 천태지관 등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에 관한 관심과 수행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일단 우리 나라 불교의 특색이 통불교적(通佛敎的)이라는 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수행법만 고집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수행법을 골고루 근기에 따라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원융정신에 입각하다보니 이러저러한 수행법들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간화선을 정통으로 삼되, 개별적으로는 다수의 다른 불교 수행법들도 용인 내지는 묵인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간단한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조계종의 기관지인 〈불교신문〉의 주도로 간화선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수행법이 혼재하는 현실은 그 동안 조계종의 정통 수행법으로 인식되어온 간화선에 대한 회의 내지 불신이 일각에서나마 존재한다는 증좌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간화선 논쟁 이전에도 비공식적으로 간화선 수행에 관해 설왕설래가 있어 왔다. 요컨대 다수의 사람들이 열심히는 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 이에 관한 체계적 지도나 이해가 없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있었는가 하면, 간화 수행법은 문제가 없으나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다, 시대가 변했으니 수행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사정이야 어떠하든 최근 간화선에 관한 논쟁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한마디로 참선의 화두 수행법은 상근기에게나 맞는 방법이므로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방법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당송대에 만들어진 화두는 21세기인 현대에는 적실성이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선은 본래 불교의 핵심을 당시대의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면서 태동 발전해왔다. 어려운 문자의 논리적 이해와 다단계의 선정법을 뛰어넘는 쉽고도 빠른 견성법(見性法)으로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특수한 장소에서 특별한 기간을 정해놓고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왔던 선을,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참선으로 전환시킨 이가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다만 선지식을 만나 자신의 성품을 돌아보는 것뿐이다. 이렇게 대중화된 선에 화두를 간(看)하는 구체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생활 속에서의 참선을 가능케 한 이가 대혜종고(大慧宗┳) 스님이다.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화두를 간함으로써 분별지견을 소탕하여 저절로 성품이 드러나도록 하는 간화 수행법은, 일체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음을 확신하는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가치가 인정받는 한, 간화선 수행법의 가치가 인정받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간화선 수행의 원칙에 관한 몰이해가 문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이 점을 중심으로 최근의 간화선 논쟁과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3. 간화선은 생활선이다

간화선은 본래 생활선(生活禪)으로서 주창된 것이지, 상근기의 소수 수행 전문가들을 위한 수행법이 아니다.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大慧)의 《서장(書狀)》에는 이러한 점이 뚜렷이 밝혀져 있다.

62편의 편지글 가운데 단 2편을 제외한 60편의 글이 재가불자를 상대로 화두 참구를 권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그 내용에서도 또한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 꾸준히 화두를 참구해 나갈 것을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사를 제쳐놓고 조용한 곳에서 화두를 들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 화두를 놓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생활을 떠난 적정처에서 묵묵히 앉아 오직 좌선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이들을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화두 참선법이야말로 오히려 최상근기의 전문 수행자를 위한 방법이 아니라, 모든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개발되고 권장되어진 가장 발달한 수행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관념을 여의지 않으면서도 관념의 굴 속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 생활 가운데서 도를 닦을 수 있도록 하는 수승한 수행법이다. 만약 대혜 스님이 지금 이 땅에 와서 간화선에 관한 논의를 듣는다면 기절초풍할 지경인 것이다.

본인이 의도했던 간화선의 본래 취지는 완전히 실종되어 버린 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수행의 힘을 얻기까지는 적정처에서 일정한 수행에 몰두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혜 스님도 강조한 바와 같이, 일단 적정처에서 좌선하기를 권한 것은 오히려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수행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지, 오직 적정처의 좌선을 금과옥조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4. 간화선은 ‘사람의 선’이다

그러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간화선이야말로 ‘사람의 선’이라는 점을 간과한 데에 있다고 생각된다. 간화선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활발하게 펄떡이는 생명의 선인 것이다. 간화선은 본래 돈오법(頓悟法)을 기반으로 하여 창출된 것이다.

돈오의 주창자인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은 누구든지 즉각적으로 자신의 본성만 돌이켜보면 된다고 하는 견성(見性)을 강조하였고, 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해내는 것이다.

선은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보고 하는 것도 아니다. 선지식과 만나고, 자연과 만나고,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상황 가운데서 선지식은 함께 한다. 결국 선이란 불법승 삼보 가운데에서 승보를 중심으로 불법을 전수해 나가는 가르침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거나 불상에 예배하는 등은 불보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신봉하거나 일정한 경전을 중심으로 수행하는 등은 법보를 중심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은 이러한 불보와 법보를 핵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보를 중심축으로 하고 불보와 법보가 보완적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선원이 있는 사찰에서 선방이 불당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이러한 취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견성한 이가 나타나면 그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견성한 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육조혜능이 그랬으며, 마조도일이 그랬고, 경허성우가 그랬다. 사전에 부처님의 명호를 외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경전을 암송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선지식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준비만 되어 있다면 그대로 견성이다. 그래서 돈오인 것이다. 화두는 의심덩어리, 의단(疑團)이다. 의단이 타파되었을 때 깨달음이 현성(現成)하게 된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의단은 방편적인 화두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믿음(信)을 갖춘 선지식이 촉발시켜준다는 것이다. 견성은 철저한 의심을 갖춘 화두만이 가능케 해주며, 철저한 의심이 있기 위해서는 화두를 내린 선지식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없다면 그 화두는 죽은 화두에 불과한 것이다.

화두를 생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선지식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화두 자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화두를 주고받는 당사자 사이에 단단한 신뢰감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비로소 화두에 대한 투철한 의심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일평생이 걸릴지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행의 긴 여정에서 오로지 화두 하나에 목숨을 걸고 참구해야 하는데, 어찌 대충 할 수 있겠는가. 참선은 선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 가운데 큰 분심(憤心)이 일고 큰 의심이 갖추어진다. 이 삼요(三要)가 한 덩어리가 될 때 비로소 깨달음의 정안(正眼)을 갖추게 될 것이다.

5. 산 사자새끼가 있는가?

여기서 선지식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하지만 견성한 선지식이 많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선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된다. 일파만파로 확산될 여지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각자 스스로 견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상근기가 아니라거나, 나는 중생에 불과하다거나 하는 등 스스로가 비굴한 마음에 머물러 있는 한, 무슨 의심과 깨달음이 현성할 수 있겠는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여기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곧바로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또 하나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문이다. 사람들이 과연 어느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의외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문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왜 곧바로 행복해지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이 스스로 고를 감수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고를 받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견성하도록 일깨워준다고 해도 견성하지 못하는 까닭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으로 철저히 무장되어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견성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내부의 문제에 직면하여 맞닥뜨리지 않고 엉성하게 넘어가 버리려 하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느낀 대로 본다는 것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귀로도 보고 코로도 본다. 육근(六根)을 호용(互用)하여 본다는 것이다. 색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소리로도 보고 향기로도 보고 감촉으로도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서도 보는 것이다. 궁극에는 보는 자를 보는 것이다. 시인이 전체 상황 속에서 전체를 느끼듯이 느낌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정(無情)이 설법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화두를 받는 것도 이처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신근(信根)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이 지속될 수 없으며 관념적으로만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염(念)화두’와 ‘주작(做作)화두’를 면할 수가 없다. 선지식을 만날 때까지는 자신을 던져서 화두를 챙길 수가 없다. 선지식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삼척동자라도 선지식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인 성수(性壽) 스님의 다음과 같은 지적(〈불교신문〉 2월13일자)은 신랄하다. 우리 나라 큰 절이나 작은 절 할 것 없이 제대로 된 화두 일러주는 중이 없어. 그렇지만 화두 타러 온 불자들은 많지. 화두를 무슨 물건 마냥 척척 던져주고 받는데 이런 불자들 중에 견성한 사람 있으면 내 목 베러 와도 좋아. 화두는 모양과 형상과 이론과 논리를 초월한 자리에 있어. 화두는 그것을 받아 이해하는 ‘산 사자새끼’가 있을 때 들려주는 거야. 요즘 아무 절에서나 화두를 척척 던져주는데 그런 사람들은 모두 바보야.

부처님은 49년 동안 전법해도 그 뜻 알아듣는 이 없다가 가섭이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고, 다자탑 전에서 자리를 나눴고, 열반한 후에 관에서 발을 내밀었는데 그것이 화두야. 49년 동안 설한 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 전한 것뿐이야. 요즘 많은 중들이 큰 절 맡아서 대중 거느리고 사는데도 산 사자새끼 한 마리 안 보여.

6. 불지견(佛知見)을 열라

견성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인식의 대전환이다. 그것은 중생지견(衆生知見)을 열지 않고 불지견(佛知見)을 열어 출세(出世)하는 것이다.

불교의 출세, 그것은 불지견을 여는 것이다. 스스로가 염소라고 생각하는 한, 기껏해야 큰 염소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사자새끼가 되어야 사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한, 항상 중생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본래 부처라 생각하여야 부처를 이룰 수 있다.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고 하는 육조 스님의 말처럼, 닦건 말건 잘 낫거나 못 낫거나에 상관 없이 우리 모두는 본래 부처인 것이다.

이처럼 불지견이란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못 깨친 중생으로 묶어 놓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본래 성품이 있는 그대로 완벽함을 알아채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견성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체의 단계를 거부한다.

어떠한 단계라도 설정이 된다면, 그것은 불오염수(不汚染修)가 아니다. 불지견을 여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단계이기 때문에 목적과 방법의 이원화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목적이 곧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견성법은 무방법의 방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방편을 세우셨지만, 조사에게는 방편이 없다.

다시 말해서 견성은 그 자체로서 곧 목적이자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과 방법이 이원화되지 아니 한 것이고, 따라서 불오염수이자 불지견을 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견성을 다만 목적으로만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다른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따로 설정하려 든다면, 그것은 점차적 단계를 세우는 것이며, 이미 《육조단경》에서의 본래 취지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7. 선이 미래사회의 대안이 되게 하라 예컨대, 화두를 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화두를 드는 것이 다만 견성을 위한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벌써 이원화가 진행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방편으로서의 화두를 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활구(活句)를 이루지 못한다. 궁극적으로 화두는 방편이자 진실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간화 수행법이 참으로 돈오를 표방한다면, 활구를 성성하게 들고 있는 그 순간이 곧 자기 반조(返照)의 순간에 다름 아님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육조단경》에서는 말한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若欲化愚人 是須有方便 勿令破彼疑 卽是菩提見 알 수 없는 의심, 그것이 바로 보리의 현전(現前)이다. 대답할 수 없는 물음,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관찰자이다. 그것은 망념이 일어나면, 이를 다스려 없애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다스리고 말고 할 게 없다.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깨어있으면서 판단하거나 시비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는 집중이 아니다. 망념을 억지로 다스려가면서 화두에 집중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화두는 그 자체로 무심이다. 성성적적하게 깨어 있으면서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항상 깨어 있는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간화선이 돈오를 표방하는 한, 활구 참선도 이러한 바탕에 입각해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 참구가 다만 견성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견성 그 자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만 미래의 견성을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활구 참선의 참다운 입각처가 된다. 이러한 활구 참선을 하여야 비로소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수행, 사회 속에서의 수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 오직 미래의 깨침에 목을 매는 수행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현대는 선이 미래사회의 대안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선에는 이미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이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참으로 선을 미래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선 그 자체가 아니다. 선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사람이다. 시비의 굴 속에서도 몸을 바로 세우고 성난 군중들 사이에서도 자재하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툼 속에서 다툼 없는 자리를 창조해낼 수 있는 삶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 그것이 활구 참선의 지향점이고, 미래사회를 주도할 진정한 원칙이다. 올바른 활구 참선이 이 땅에 정립되어 선이 미래사회의 대안이 되도록 하는 것은 정법을 선양하려는 우리 자신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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