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간화선 논쟁의 몇 가지 관점

1. 들어가는 말

게놈지도가 완성되어 인간의 유전자에 대해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유전자. 그런데 그 인간의 유전자의 수가 초파리보다 별로 많지 않다고 한다. 굳이 파리가 아니고 초파리라 해서 국어사전을 찾았더니 초파리는 초파리과의 벌레로 길이 3∼4mm 정도로 파리보다 작으며 흑갈색과 담황색의 2종이 있는데 초·간장·술 따위에 잘 덤벼든다고 되어 있다.

초파리와 비교되는 인간. 나 스스로도 그렇고 좀 잘난 것 같아서 또 좀 잘나진 않았더라도 초파리보다 약간 진전(?)된 존재라니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천방지축 날뛰었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하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얼마나 많으냐.

인간은 초파리에서 별로 진전된 것이 없는 존재야’라고 하는 자조적인 말도 들리긴 하지만. 그런데 문제는 게놈지도가 완성되고 또 그것이 인간의 질병치료에도 도움이 되고 인간을 복제할 수도 있다고 해서 한번 태어난 생명체가 태어난 상황을 마무리짓지 않고 계속 살아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시작이다.

종교의 발생 이론에 대해 여러 가지 설들이 있으나 궁극의 문제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생명체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살아서 숨쉬는 동안 아무리 화려하게 지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만나야 될 죽음 그것이 인간을―다른 생명체들도 마찬가지겠지만―두렵게 만들었고 그 두려움이 종교를 시작하게 한 동기가 된 것이다.

인간은 이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것이 일부에서 주장하는 창조주가 되었건 아니면 여러 가지 형태의 신들이 되었건 또는 마을 뒷산의 커다란 나무가 되었건 맹수성을 지닌 동물이 되었건 온화한 성품을 지닌 동물이 되었건 자신보다 강한 것을 상정하게 되었다.

그것이 혹자가 주장하는 좁은 의미의 종교이다. 자신들이 상정한 신이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이며 누군가 나고 죽음도 역시 신에 의한 현상이기 때문에 신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의견이다. 이런 신이 인간의 상위라는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의견은 초기에는 힘을 얻어 신을 관장하는 이들로 하여금 권력과 재물을 동시에 취할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물활론(物活論), 토템 등 원시 신앙에서부터 범신론적 사고를 거쳐 가톨릭, 이슬람교, 개신교와 같은 유일신의 종교로까지 변해 온 것이다.1)

하지만 신부나 브라만 같은 신을 관장하는 이들의 전횡은 뜻있는 이들로 하여금 소위 집을 떠나 수행함이라는 형식을 만들어 주었고 그 결과는 신인동격(神人同格) 또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신과 인간의 동등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신과 인간의 동등화는 별로 세력을 얻지 못하고 또 다른 형태의 사문들에 의해 인간 중심적인 종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불교이다.

그러면 불교는 어떤 점에서 과거의 다른 종교와 다른가? 우선 불교는 신을 상정하여―전지전능하든 그렇지 않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기보다는 ‘현실(dhamma)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인식(bare attention)’을 통하여 종교의 발생에 동기부여를 했던 문제 즉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즉 불교에서 보인 문제 해결의 방법은 현실 외적인 것을 끌어들이는 작업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삶과 죽음의 주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런 출발은 연기(緣起)를 이야기했고 나아가 수행으로 선(禪)을 이야기하고 실천하게 하였다. 그러면 ‘선의 실천’ 또는 ‘선의 수행’이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의의가 만들어 내는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은 무엇일까? 연기와 더불어 선은 불교와 다른 종교를 차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이유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종교들이 모든 일을 신의 의지에 의해서 전개된다고 생각한 반면 선은 개인이 수행을 통하여2) 신의 경지 또는 그 이상의 경지(이를 흔히 부처의 경지라 한다.)에 이르러 생명체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실증해 보인 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인 것이다.3) 고타마 싯닷타는 당시 인도 사회에서 유행하던 수행의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에서 선정(禪定)을 통하여 부처님이 되었으며 그를 교조로 하여 시작된 종교가 불교인 것이다.

2. 위파사나와 간화선의 교집합적 측면

우선 역사적인 사건으로 선의 발달을 살펴보자. 선의 발생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인도의 지정학적 요인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도가 갖는 자연적 요인은 많은 이들에게 숲으로 갈 것을 요구했고 이 요구는 요가의 발달로 이어졌다. 요가의 발달은 인도를 명상의 지역으로 만들었으며 이런 전통은 고타마 싯닷타의 수행으로 이어져 그로 하여금 결국 명상―여기서는 선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을 통해 부처의 경지(Buddhahood)를 이루게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팔리(Pa?i) 경전과 《청정도론(Vissudhimagga)》 같은 논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당시 고타마 싯닷타를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끌었던 수행은 위파사나였다. 이렇듯 부처의 경지를 만들어 줬던 선은 불교의 전파 경로와 더불어 전파되어 남방 상좌부 불교권에는 《삿티파타나 숫타 Satipat.t.ha?a Sutta》에 소개되고 있는 위파사나가 근간을 이루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북방에서는 소위 중국 선종이 발달하여 중국의 남방과 북방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것은 다시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쳐 고려시대 보조지눌(普照知訥)과 혜심(慧諶) 등 수선사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이후 간화선의 수행 전통을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방의 간화선을 주된 수행법으로 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남방의 위파사나를 열등한 소승선이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런가. 이제부터 위파사나가 열등한 수행법인지, 간화선과 위파사나는 전혀 별개의 선인지를 선수행의 목적과 방법, 증과의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선수행의 목적

위파사나 선수행의 목적에 대해 《삿티파타나 숫타》에서는 “중생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근심을 이기고 괴로움과 번뇌를 없애고 올바른 길을 따르며 열반을 깨닫게 하는 길(Eka?ano maggo satta?am. visuddhiya?soka-pariddava?am. atthagama?an??assa adhigama?a nibba?assa sacchikiriya?a)”4)이라고 했다.

그러면 간화선 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변상섭에 의하면 “의식을 통제하고 의식의 허구적인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정신적인 번민과 고통 그리고 불안 등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또한 의식에 의해 허구적으로 인식되고 지각되는 비실제적인 표상과 개념들을 제거하여 참답게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절대적인 평등과 자유라는 인간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5)

선수행 목적에 있어 《삿티파타나 숫타》의 내용과 변상섭이 주장한 것은 내용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다. ‘의식의 통제’라든가 ‘정신적인 번민과 고통 그리고 불안의 해소’라는 식의 표현만 다를 뿐 ‘절대적인 평등과 자유라는 열반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양쪽의 견해에는 다를 바가 없다.

사실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또 불교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수행하는 선의 목적이 다르다면 그것은 모순이며 불교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아주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북방의 불교와 남방의 불교에서―비록 교리의 차이는 일부 있기는 하지만―선수행의 목적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2) 선수행의 방법

우선 가장 오래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위파사나의 경우를 확인해 보자. 위파사나의 수행법에 대해서는 《숫티파타나 숫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몸에서는 몸을 바로 보고(ka?e ka?a?upassl?viharati)―수행자가 숲으로 가서 한적한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몸을 곧게 세운 채 정신을 집중하고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정신을 집중한 채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의 길이가 길고 짧은 호흡을 정확히 인식하고(安般念),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는 것을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고, 몸이 들어가고 나오고, 굽히고 펴고, 먹고 마심, 씹고 맛보는 것과 배설하는 것을 인식하고,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요소들을 바로 인식하고, 기본적인 신체 구성요소인 사대(四大)를 인식하고 또한 사후에 시신이 변화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 등이 있다. …… 느낌에서는 느낌을 바로 보고(vedana?u vedana?upassl?viharati) …… 마음에서는 마음을 바로 보고(citte citta?upassl?viharati)…… 법에서는 법을 바로 보며(dhammesu dhammanupassl?viharati) 자신을 참구하는 것이다.6)

그러면 북방 간화선의 수행 방법은 어떠한가.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마조(馬祖) 스님과 회양(懷讓) 스님의 재미있는 일화에서 그 일단을 찾아보자. 회양 스님이 어느 날 마조 스님에게 물었다. “좌선은 무엇하러 하는가?” “부처를 이루려 합니다.” 이에 회양은 아무 말 없이 기왓장을 하나 집어다 바위에 갈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마조가 물었다. “기와를 왜 갈고 계십니까?” “응, 이걸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마조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이에 회양은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만을 해서는 성불할 수도 없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해야 하느냐, 소를 채찍질해야 하느냐?” 마조가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자 회양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좌선한다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부처를 흉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또 선은 앉거나 눕거나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이란 어떠한 형태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간화선에서의 수행은 좌선만이 아니다. 가면서도 머물면서도 앉아서도 누워 있으면서도 심지어는 잠을 자면서까지, 모든 동작의 상황에서 화두를 잘 참구해야 하는 것이다. 화두를 잘 참구한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도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파사나와 다른가. 이미 위파사나의 수행법을 서술했지만, 모든 동작의 상황에서 스스로 그런 동작을 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양쪽 모두 동일하다. 굳이 위파사나와 간화선의 차이를 찾으라고 한다면 위파사나가 모든 동작에 대해 그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라면 간화선은 모든 동작을 대신하여 화두라고 이름지어진 그 하나만을 참구하여 동작이나 동작을 행하는 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화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른바 1,700공안만을 화두로 본다면 분명 차이가 있으나, 화두를 이렇게 보는 것은 너무 좁게 보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명진 스님은 〈불교신문〉이 주최한 간화선 대토론회(2000년 10월 24일)에서 “석가모니는 ‘죽고 사는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출가했다.”며 “삶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던지는 물음이 모두 화두”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렇게 화두를 넓게 해석한다면, 필자가 과도하게 단순화하고 있는 감은 있으나, 간화선의 화두 참구와 위파사나의 자기의 몸과 마음의 문제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수행 장소의 경우,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참구하기 좋은 장소로 조용한 곳을 추천한다. 외부적인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화두를 참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위파사나 또한 간화선과 마찬가지로 조용한 곳 즉 숲속의 나무 밑이나 정사(精舍, aranyaka) 등을 추천한다. 그러는 한편 간화선에서는 복잡한 곳에서도 화두 참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파사나 역시 시장과 같은 어지러운 곳에서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흡법의 경우도 위파사나와 간화선이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 수행 방법에 있어 위파사나와 간화선은 매우 유사하다.

아니 유사하지 않다면 적어도 둘 중의 하나는 불교가 아니거나 선이 아니다.

3) 선수행의 증과

위파사나의 결과로 얻게 되는 과보는 궁극에 아라한으로 표현되는 사향사과(四向四果)이다. 사향은 상좌부 불교권에서 닦는 계위로 아직 증과(證果)를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예류향(수다원향), 일래향(사다함), 불환향(아나함), 아라한향을 이르며 이 단계를 넘으면 각각 상좌부 증과의 4계위에 이르는데 그들은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이다.7) 그러면 간화선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경지는 무엇인가? 두 말할 필요 없이 부처의 경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처의 경지가 사과의 아라한의 경지보다 더 수승한 경지라는 증거는 경전의 어느 곳에도 없다.

불교사적으로 볼 때 대소승―소승이라는 말을 아무런 의식 없이 사용해도 되는지 반성해야 하겠지만―의 구별이 생기면서 아라한이 부처와 동등한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라한을 비하하는 그릇된 풍조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라한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건 부처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건 신과 같은 외재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며, 그 경지를 통해 진정한 대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여줬던 것처럼. 비록 간화선을 통한 깨달음이 사과의 전삼과(前三果) 즉 예류, 일래, 불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는 하지만 그것이 부처의 과위와 동등한 아라한과를 무시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간화선에서 확철대오를 통해서 이루는 부처의 경지는 위파사나의 아라한과와 크게 다를 수가 없다. 만일 위파사나의 아라한과보다 간화선의 확철대오의 수준이 높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불교나 부처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8)

선을 수행을 하지 않은 이들은 선을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선이 가지고 있는 직관적인 것 때문이 아니라 선은 생명이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수행은 음식물이지 음식물을 담는 그릇이나 그것을 떠먹는 수저와 같은 것이 될 수가 없다. 어떤 종류의 선수행이 되었건 직접 수행하고 그 과보를 직접 체험해야 한다. 위파사나를 수행한 남방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세계가 인정하는 아라한들이 배출되고 있다.

간화선에 의하지 않고라도 아라한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혹 간화선 수행자는 그들은 아라한일 뿐이고 스스로는 수행을 하여 과보를 얻으면 부처가 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역사적으로 인류 최초의 아라한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래 10호의 두번째 칭호인 응공(應供)이 아라한을 의미한다는 것도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단지 상좌부와 대승이 나뉘어지면서 교리적으로 아라한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격하되었고, 그 전통을 지금까지 고수하면서 아라한 폄하 현상이 북방 불교계 일부에서 강하게 보이며, 그 영향으로 남방선에 대해서도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가능하면 폄하하려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봐야 한다. 부처님이 위파사나를 통해 정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파사나를 폄하하는 것은 부처님이 이룬 정각을 폄하하는 것이다. 실제로 남방에서 말하는 아라한과 간화선을 통해 이룬 부처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3. 간화선만이 유일한 수행법인가

최근에 선종(禪宗)을 표방하는 조계종이 장자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 불교계에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의 조실(祖室) 추대이고 다른 하나는 조계사와 불교신문사에서 주관한 간화선(看話禪) 대토론회가 될 것이다. 필자가 봉암사 태고 선원의 조실 스님의 추대를 큰일로 생각하는 것은 우선 그 동안 핍박을 받으면서도 여러 선지식을 면면히 배출한 봉암사의 태고선원이 갖는 실질적·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도 태고선원이 있는 봉암사는 수행자들 스스로 수행 여건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립공원 지정도 거부하고 사찰 입장료도 거부하며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는 곳으로 한국 불교 아니 세계 불교 또는 인류의 희망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성스러운 곳에 소위 남 진제(眞際) 북 송담(松潭)이라 하여 선방의 수좌들은 물론 일반인들조차 공경해 마지않는 진제 스님께서 조실로 추대되셨으니 이는 분명 경사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사건인 간화선 대토론회는 사실상 그 동안 여러 이유로 가장 기본적인 일에 등한시했던 문제를 드러내 공론화하고 체계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겠다.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허전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진제 스님의 일반 신문 기자 회견 내용과 서기 2000년 10월 24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개최된 간화선 대토론회의 내용 때문이다. 우선 진제 스님께서는 간화선만이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일갈하셔서 다른 수행법을 택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함은 물론 일간 신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교를 접하는 이들에게 간화선 이외의 수행은 수준이 낮은 것처럼 인식되게 한 것이다. 또한 간화선 대토론회의 내용 역시 그러하다.

물론 간화선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이 토론회를 하였기 때문에 간화선 지상주의적인 느낌을 줄 만한 내용들을 펼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종류의 선수행법에도 문을 열어주는 자세가 아쉽다. 일반적인 한국의 수행자들이 주장하듯이 간화선은 훌륭하다. 하지만 묵조선 역시 훌륭하며 위파사나 또한 훌륭하다. 이 모든 선수행 방법들이 아주 훌륭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느 한쪽의 수행만이 우수하다는 우월 의식을 가진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거스릴 수 있겠으나 궁극적인 문제가 달임에도 불구하고 달을 가리키는 것이 손이냐 아니면 손에 들린 부지깽이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간화선만이 최고인가?

만일 간화선만이 최고라면 고타마 싯닷타가 위파사나를 통해 부처를 이루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또 1,000년의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간화선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수행법이 나올 법도 한데 출현하지 않은 이유는 무조건 간화선이 가장 우수하기 때문인가?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 지상주의는 어느 순간부터 뭇 중생들이 화두만을 참구해야 할 정도로 획일화되고 표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생들의 근기는 어디로 갔는가? 여기서 문제의 해결점―간화선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문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비교하고 자신의 수행만이 최상승이라고 고집한다면 그 또한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설사 자신의 수행법이 최고라고 해보자. 최상의 수행을 하고서도 정각을 깨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겸허해야 한다. 고타마 싯닷타가 스스로의 수행법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하여 정각을 이루었듯이 적어도 수행자라면 이 부분에 있어서는 겸허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열을 가리고 나의 수행법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갖는다면 아마 이것은 강한 힘에 의지하려 하거나 강한 힘 그 자체가 되고 싶어하는 문화 식민지적인 인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반도에서의 위파사나에 관한 설명이 원효의 저술에서도 발견될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동안 한국 불교에서 위파사나는 소외되었던가.

이에 대해서는 위파사나 이후에9) 중국에서 묵조선이나 간화선이 꽃피고 남방 상좌부 권에서는 지속적으로 위파사나 수행을 계속한 것에 대해 남북의 불교 발달과 결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10) 교학적으로 보더라도 중국불교사나 한국불교사 그리고 일본불교사를 살펴볼 때 팔리 불전이나 팔리 불전과 내용에 있어 유사한 면이 많은 아함부 경전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빠르다고 하는 일본의 경우 19세기 명치유신 이래로 남방 상좌부의 언어와 경전을 연구하여 소위 남전대장경을 만들어냈지만 조선 5백년의 배불과 20세기의 혼돈기를 거친 한국 불교의 경우는 이 분야까지 눈을 돌릴 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11)

이런 상황은 아함부 경전에 소개되고 있는 위파사나 수행을 할 수 없도록 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위파사나를 수행하는 이들도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는 분명 좋은 현상임에 틀림없다. 간화선 이외의 수행을 한다고 해서 그들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수행자들이, 그것도 명망이 있는 수행자일수록 그런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만일 일부에서나마 간화선 지상주의적인 발언을 일삼는다면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불교는 수행 방법을 가지고도 다툼이 있구나 하는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선수행이 되었건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라면 결코 도외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에너지 낭비를 용납할 수 있을 만큼 현대 사회가 한가하지도 않으며 그런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불교가 아직은 건강한 것도 아니다.

그 동안 한국 불교는 이 문제를 놓고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간화선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끝까지 간화선만이 최고라고 주장한다면 유일신을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종교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선은 그 자체가 포용이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모든 것을 용해시킬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간화선 이외의 것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그것은 간화선에 대한 모독은 물론이며 수행자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고 말 수도 있다. 나아가 그런 행동은 인류가 만들어낸 유산 중 가장 고귀한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선(禪) 자체에 대해서도 누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4. 사족

이제 사족(蛇足)을 단다. 그 동안 한창 문제가 되었던 김용옥의 화두 해설에 관한 논쟁을 살펴보자. 김용옥은 화두를 해석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곤욕을 치뤘다. 그것도 내로라 할만한 도인(道人―여기서는 주로 선방 수좌들을 이름)들로부터. 화두는 해석을 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두 역시 문자로 쓰여진 것이라면 굳이 해석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만일 화두에 대해 절대성을 부여하여 화두를 해석하는 것을 마다한다면 그것은 화두라는 이름을 빌려 인간이 가지고 있는―이것이 설사 형이하학적인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소리와 글자에 대한 기본적인 의심을 거부하게 하는 강압일 수도 있다. 화두의 해석에 문제에 있어서도 해석을 하면서 생길 수 있는 관념을 피하라는 것이었지 과연 화두의 해석조차 거부하라는 것이었을까? 만일 해석마저 거절하려 한다면 그 순간부터 불교의 선은 보편 타당에서 일탈하여 유한성을 지닌 또 다른 관념이나 도그마를 만드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불교의 선이나 선의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구별한다면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생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체에 붙여진 관념일 뿐 중생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체는 아니다. 화두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두는 해석을 하든 하지 않든 화두이다. 문제는 그 화두를 들고 있는 이가 해석이라는 관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왕 언설로 표현되었으면 언설로 이해하려는 노력 정도는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옥의 시도는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의 노력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취급될 필요가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높이 평가되어도 무방할지 모른다.12) 애써 치켜 세울 필요도 없고, 굳이 폄하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해석이 된 화두이건 해석이 안된 화두이건 그것이 화두 그 자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므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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