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간화선 논쟁의 몇 가지 관점

1.서론:중국·한국불교를 연구할 필요성

한국불교의 현대화를 꿈꾸는 학인들에게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찬밥신세가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조계종 중심으로 작금의 불교계를 바라보노라면, 시대가 요구하는 지엄한 명령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심할 경우에는 쪽박마저 깨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조차 생기기도 한다. 그런 아슬아슬한 조계종의 줄타기 곡예를 먼발치에서 쳐다보면서, 다들 그 원흉이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에 있다고 하고, 이젠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새로운 것을 향해 질주한다. 그 대상은 아마도 인도불교일 것이다.

물론 필자가 보기에도 인도불교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간직되어 있다. 우선 불교의 원조라는 것이다. 요즘 하다못해 족발집도 원조, 진짜원조, 시조 등등의 말을 사용하면서 자기가 진짜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마당인데, 하물며 불교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의 도도한 원류가 인도에 있다는 점은 정말로 중요한 대목이자 인도불교의 진정한 강점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이런 원조타령 위에 논리성의 옷을 인도불교는 입고 있다. 크게 보아 인도문화는 중국문화권에 비해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행객의 말을 빌리면 인도 사람들은 달리는 기차 안에서조차 논쟁을 매우 즐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논쟁’이란 ‘말’을 가지고 싸우는 전쟁인데, 이것도 전투라면 전투라고 할 수 있으므로, 당장은 이겨놓고 보아야 할 일이고, 그러자면 무기가 필요할 터인데, 그것이 바로 말을 가지런하고 또박또박하게 들이댈 수 있는 능력, 즉 논리학이다. 이 논리적이라는 점이 현대에는 더욱 요청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지금의 한국사회는 ‘서양문화’라는 난봉꾼이 휩쓸고 다니는 영토이므로, 그 난봉꾼의 입맛에 일단 들어야 하는데, 이 ‘놈’의 식성에 제일 맞아떨어지는 음식은 ‘논리적’이라는 조미료를 사용한 것이다. 무슨 요리를 만들든지 간에, ‘논리적’이라는 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으면, 이 ‘놈’의 구미를 당기게 할 수 없다.

이러한 형국이니 인도불교에 간직되어 있는 논리성은 오늘날에 딱 부합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 말고도 인도불교의 또 다른 강점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신선함에 있지 않을까 한다.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를 다 아는 것은 결단코 아니건만 그래도 왠지 구닥다리 같고,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다 알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들기 쉽다. 착각은 자유고 망상은 해수욕장이니까.

그에 비해 인도불교는 일단 낯선 것이고, 이것에는 뭔지 모를 신비감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여인의 홀랑 벗은 몸보다는 약간 가린 듯한 모습이 더 사내를 넋 나가게 만들듯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보다는, 그래도 다른 나라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인도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학인들이 인도불교에 열광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풍조가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도 이런 경향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허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가 우습게 보아왔던 동아시아 전통불교에도 현대적 요소가 담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고, 한국불교의 현대화라는 과제에 동아시아 전통불교도 당연히 주장할 몫이 있음을 외치고 싶다.

문제는 그 지적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맨 손으로 물을 떠서 담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그저 놓쳐버리고 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런 거창한 목표에 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전통불교 중에서 천태의 4종삼매라는 한물간 ‘유물’을 들추어서, 이것을 때 빼고 광내면, 어느 불교사상에 못지 않게 제대로 된 알짜배기의 사상일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서 천태지관에 대해 간단히 스케치하면, 그것은 깨달음을 단계적으로 완성한다는 의미의 점차지관, 일정한 단계를 밟다가 비약을 해서 깨달음을 이룬다는 부정지관, 완벽하고 가장 빠르게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의 원돈지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원돈지관은 수행의 방편을 말하는 25방편, 수행의 형식을 말하는 4종삼매, 본격적인 바른 지관수행법인 10경10승관법, 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대상은 바로 4종삼매이다.

2. 4종삼매의 소개

천태의 4종삼매는 단순히 수행의 형식만을 기술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수행을 종합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첫째, 상좌(常坐)삼매는 좌선 수행을 강조하고 보조적으로 염불수행을 결합한 것이고, 둘째, 상행(常行)삼매는 염불수행에 역점을 둔 것이며, 셋째, 반행반좌(半行半坐)삼매는 밀교적 수행법을 받아들인 것이고, 넷째, 비행비좌(非行非坐)삼매는 일상생활에 나타난 선(善)·악(惡)·무기(無記)의 마음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4종삼매에는 좌선법, 염불 수행, 밀교적 수행,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일상생활의 수행이라는 4가지 수행법이 망라되어 있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1) 상좌삼매
상좌삼매는 좌선을 주로 닦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형편이 여의치 못할 때 염불도 보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행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의미는 있음과 없음의 두 극단을 넘어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세계에 머무는 데 있다. 상좌삼매를 실천하는 방법은 몸은 항상 앉아서, 가고·머물고·눕는 동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수행법은 여러 수행자가 모인 곳에서 수행해도 좋지만, 홀로 수행하면 더욱 좋은 것이다. 조용한 방이나 한적한 빈터에 거처하여 모든 시끄러운 것을 피하고, 좌선할 때 사용하는 의자인 승상(繩床)은 하나만 쓰고, 다른 승상은 두지 않는다.

수행하는 기한은 90일을 단위로 하고, 결가부좌로 바르게 앉아서 목덜미와 허리를 단정하고 바르게 한다. 그리고 오래 앉아서 피로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심히 졸리거나 하여, 바른 집중을 할 수 없으면, 부처님의 이름을 오로지 부른다.1) 이와 같이 상좌삼매는 좌선 수행과 염불 수행을 겸하고 있다.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좌선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좌선 수행이 어려우면 염불 수행도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행법은 송대 이후에 좌선과 염불을 통합하는 중국불교의 경향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천태지의(538∼597)는 이 상좌삼매에서 말하는 지관법의 실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상좌삼매에서 ‘지(止)’는 진리의 세계에 오로지 마음을 두는 것이고, ‘관(觀)’은 진리의 세계를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지는 있고 없음의 두 극단을 넘어서고 지식 있고 없음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이때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고요한 진리의 세계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2)

2) 상행삼매
상행삼매는 염불 수행법을 내용으로 한다. 소리내어 염불하거나 마음속으로 염불을 해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게 한다. 수행 방법은 90일 동안 몸은 항상 움직여서 휴식하지 않고, 입으로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항상 부르고 휴식하지 않으며, 마음으로는 아미타불을 항상 염(念)하여 휴식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염불하는 방법은 소리내어 염불하는 것과 마음속으로 염불하는 것을 번갈아 사용한다. 이 점을 천태지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소리를 내어 염불하는 것과 마음 속으로 염불하는 것을 함께 운용하고, 혹은 먼저 마음 속으로 염불하고 나중에 소리내어 염불하며, 혹은 먼저 소리 내어 염불하고 나중에 마음 속으로 염불한다. 이와 같이 소리 내어 염불하는 것과 마음 속으로 염불하는 것이 서로 이어져 휴식의 때가 없다.”3)

따라서 상행삼매의 요점은 몸으로 걸음 옮기고, 입으로 소리를 내고, 마음 속에서 생각할 때마다 오직 아미타불을 잊지 않고 자신 안에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상행삼매의 철학적 의미는 염불을 통해서 공(空)을 자각하려는 것이다. ‘공’을 자각하는 것을 통해서 아미타불의 나라에 태어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정토신앙을 반야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4)

3) 반행반좌삼매
반행반좌삼매는 밀교적 수행법을 받아들여 천태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것인데,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성립된 인도불교이다. 그 수행방법으로 만다라를 사용하고, 다라니를 외워서 이 몸이 그대로 우주와 하나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밀교는 크게 나누면 잡밀(雜密)과 순밀(純密)로 구분할 수 있다. 잡밀은 밀교의 독자적 수행법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단계의 것이고, 순밀은 《대일경》 《금강정경》에서 밀교의 수행법이 정리된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다.

천태의 반행반좌삼매는 잡밀에서 순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반행반좌삼매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에서 방등(方等)삼매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5) 천태지의는 이 방등삼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방등삼매는 지극히 존귀해서 구차하게는 할 수 없다.

만약 이 수행법을 닦고자 한다면 신명(神明)을 증명으로 삼아야 한다. 먼저 몽왕(夢王)을 구하고, 만약 한 번이라도 몽왕을 보았으면 이것은 몽왕이 참회를 허락한 것으로 보아도 좋다.

그 다음 한가하고 조용한 곳에서 도량을 장엄한다. 즉 향기로운 진흙으로 땅과 집의 안팎을 칠하고, 만다라를 의미하는 원단(圓壇)을 설치하여 채색하고 그림을 그리며,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을 걸고, 해안향(海岸香)을 태우며, 촛불을 켜고 높은 좌석을 펴서 24존상(尊像)을 청한다. 이때 그 숫자는 많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음식을 마련하고 마음을 다한다. 옷과 신발은 새 것으로 깨끗하게 하고, 새 것이 없으면 헌 것을 씻으며, 출입하면서 벗고 신을 때 섞이지 않게 한다.

또 7일 간 삼가고 경건하게 하고, 하루에 세 번 목욕한다. 첫째 날에 스님을 공양하고, 그 분량은 스님의 뜻에 따라 많거나 적게 한다. 그 다음 별도로 한 번 안팎에 계시는 율(律)에 밝은 분을 스승으로 삼아서 이분에게서 24계(戒)와 다라니주(多羅尼呪)를 받고, 이러한 스승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6)

이상의 내용에서 만다라를 의미하는 ‘원단’을 설치하여 채색하고 그림을 그리며, 다라니주를 받는다는 표현으로 보아서 반행반좌의 수행방법으로 밀교를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태지의는 이러한 밀교방법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철학적으로 승화시켜 수용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 번 씻는다는 것’을 공(空)·가(假)·중(中)의 삼관이 한 몸이라는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풀이하고 있는 점은 유의할 대목이다.7)

4) 비행비좌삼매
비행비좌삼매는 일상적인 행동에 따르는 선·악·무기의 마음을 분석해서 그것이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어서, 움직이고·앉는 동작과 그 밖의 모든 행위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매법을 밝히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우리의 마음씀이므로, 마음씀을 잘 제어하면 무지와 번뇌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삼매법은 네 가지로 구분되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만을 소개한다.8)

그것은 선·악·무기의 마음을 ‘4운(四運)’이라는 논리구조로 분석해서 그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관찰의 기준점이 되는 ‘4운’부터 살펴보자. 이는 마음을 시간의 네 가지 측면에서 조명한 것이다.

네 가지 측면은 과거·현재·미래의 네 가지에다 현재를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이는 과거·현재·현재진행·미래로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네 가지 측면에서 마음을 살펴 마음에 실체는 없지만 작용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경우를 살펴보자. 이것을 4운으로 나누어서 접근하면 화를 내지 않은 상태에서, 화를 막 내려고 하고 있다가, 화를 현재 내고 있고, 이미 화가 가라앉은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자신이 화내는 것을 이 네 가지로 슬로비디오 보는 것처럼 분석해서 관찰한다면 화를 내는 주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작용은 엄연히 존재하여 분노의 화산이 폭발하기도 한다.

이렇게 관조하면 화내는 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천태지의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자.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으나 네 가지 모습으로 분별하면, 미념(未念)·욕념(欲念)·염(念)·염이(念已)이다. ‘미념’은 마음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욕념’은 마음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염’은 바로 경계를 인연하여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염이’는 경계를 인연하여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네 가지를 통달한다면 한 모습이면서도 모습 없는 것(無相)에 들어간다.9)

그 다음, 이 4운을 착한 일에 적용해보자. 4운을 통해 작용은 존재하지만 실체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공(空)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라면 항상한 이치일 것이고, 이 이치를 알게 되면 진정한 즐거움에 눈뜨게 되고, 진정한 즐거움이 동반되는 일이 바로 자아실현의 길이기도 하고, 이때 자신의 내면세계는 청정해진다. 이 대목을 천태지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한다.

4운을 통해 대상세계가 공함을 깨닫는 것은 항상한 이치에 속한 것이고, 4운을 통해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는 진정한 즐거움이며, 4운을 통해서 마음 속에 어떠한 업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으면, 이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이고, 4운을 통해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진정한 청정함이다. 다시 말해서, 4운을 통해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常)·낙(樂)·아(我)·정(淨)의 이치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10)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상·낙·아·정의 내용은 반대의 경우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름하는 것을 살펴보면, 노름에 빠진 사람에게는 도박에 열중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고, 이 도박을 통해서 삶의 희열을 찾고, 이것이 그 사람의 진면목이 되고, 이 점이 그 사람의 내면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이 반대의 예를 통해서 상·낙·아·정은 4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도 응용할 수 있는 보편적 분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계속되는 설명에서는 일심삼관의 이치가 분명히 나타난다.

일심삼관은 공(空)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의 유(有)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일심삼관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다음의 경우를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이 사흘 동안 굶었다면, 라면 한 그릇에도 목숨 걸고 싸울 수 있겠지만, 이미 배불리 먹고 나면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게 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공’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앞에서 예를 든 라면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이때 라면이라는 대상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에 대해 욕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공(空)의 의미이다. 라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공의 의미가 아니고, 배부른 사람은 라면에 대해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듯이, 공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어떤 분별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대상은 존재한다. 그러나 분별의 대상이 아니고 욕심의 대상이 아니므로, 임시의 의미라는 ‘가(假)’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 다시 이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자.

대상은 존재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그 대상에 대해 어떠한 욕심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대상 쪽에서 보면,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파악하는 주관 쪽에서 보면,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종합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중도의 길이 열린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그것 자체가 중도이다. 사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유(有)이고, 그러나 그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은 청정하고 집착이 없으므로 무(無)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점검해 보면, 이렇게 중도의 길이 나타난다.

이 대목을 천태지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한다. 4운을 통해서 대상세계가 공임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모든 불법(佛法)의 공덕이 다 무의미한 것이 아니므로 유(有)를 거두어들인다. 이것이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가명사운(假名四運)이다. 여기서 공과 가(假)의 의미가 나타났다. 이제 중(中)의 의미를 살펴보자.

대상세계는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독립된 실체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이다. 공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불법의 공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유(有)이다. 이렇게 공도 부정하고 유도 부정하면서, 공과 유를 둘 다 비추어 보는 것이 중도이다. 이렇게 해서 공·가·중의 삼제가 완성된다. 이때 4운을 통해서 마음에 명료함을 얻는 것이다.11) 이는 ‘4운’으로 착한 일을 분별함이 결국 일심삼관의 이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나쁜 일과 선도 악도 아닌 중성적인 것에도 적용된다. 결국 비행비좌삼매에서 4운을 사용하여 우리의 일상에 벌어지는 선·악·무기의 마음이 실체 없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후대의 선종의 간화선에 간접적 영향이라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선·악·무기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4운으로 관찰하는 것은, 뒤에 설명할 간화선 수행에서 일상생활의 가고·머무르고·앉고·눕는 동작에서 화두를 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3. 4종삼매의 의미

앞에서 4종삼매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이것에 대해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첫째, 밀교·선종·정토종의 여러 수행법을 종합했다는 점이다. 둘째, 4종삼매의 비행비좌삼매가 위파사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1) 여러 수행법의 근원지

앞에서 살펴본 내용에 근거할 때, 4종삼매에 종합적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중국에서의 실천불교라고 하면 밀교·선종·정토종을 들 수 있는데, 선종 가운데 송대에 유행한 종파는 좌선 수행에 전념한 조동종과 간화선 수행을 주장한 임제종이다.

송대에 유행한 조동종은 묵조선이 그 특징인데, 이는 모든 생각을 끊고 묵묵히 좌선해서 마음의 본래면목을 깨달아 마음의 신묘한 작용을 부린다는 의미이고, 임제종의 간화선은 대혜종고(1089∼1163)에 의해 크게 주장된 것인데, 이는 의미 없는 화두를 잡아서 정신집중을 하고, 그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상의 밀교·선종(조동종·임제종)·정토종의 네 가지 수행법이 천태의 4종삼매와 직간접적인 연결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좌삼매는 조동종의 좌선을 강조하는 것과 상응하고, 상행삼매는 정토종의 염불수행과 연결관계에 있으며, 반행반좌삼매는 밀교의 수행법과 연결점이 있고, 비행비좌삼매는 송대 이후에 크게 일어난 간화선 수행과 적어도 간접적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분석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인 비행비좌삼매와 일상생활의 어떤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화두를 의심하는 수행법인 간화선은 적어도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실질적 수행법을 개발하겠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비행비좌삼매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간화선의 등장이 비행비좌삼매의 직접적 영향은 아니라 할지라도 간접적 영향은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간화선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간화선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남송의 대혜종고가 분명하게 주장한 수행법인데 고려의 보조지눌(1158∼1210)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무자화두 10가지 병’이라는 형태로 명확하게 정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의지처로 삼는 대혜 스님은 조계의 6조스님의 바른 맥을 이어온 제17대 본분종사(本分宗師)이다.

대혜 스님이 주장한 빨리 깨달음을 이루는 문인 경절문(徑截門)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닫는 것은, 단계적으로 깨달아 올라가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무슨 이유인가? 종사(宗師)가 가르치신 ‘뜰 앞에 잣나무’, ‘마삼근’,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등의 화두는 모두 명백히 가르칠 수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다만 재미없고 따질 수 없는 화두를 수행자에게 준 다음에 가르치기를 “정식(情識)이 아직 깨뜨려지지 않았으면, 마음의 번뇌 불이 활활 타오를 것이니, 바로 이러할 때 의심의 대상인 화두를 마음 속으로 든다.

예컨대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으니, 다만 이 화두를 의심해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즉 왼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고, 오른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 ① 있다·없다라고 이해하지 말고, ② 진정한 없음의 없음이라고 이해하지 말며, ③ 이치가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지 말고, ④ 의근(意根)이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말며, ⑤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자기 진면목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⑥ 말 속에서 깨달음을 구할 생각을 하지 말며, ⑦ 모두 날려버리고 일 없는 곳에서 한가롭게 빈둥거리지 말고, ⑧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자기의 진면목이라고 이해하지 말며, ⑨ 경전을 인용해서 이해하지 말고, ⑩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지어다.

곧장 마음에 분별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마음에 분별이 없을 때 허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 이러한 경지가 깨닫기 좋은 경지이다. 비유하면, 늙어서 약아빠진 쥐가 소뿔로 된 덫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문득 견해의 뒤바뀜이 끊어질 것이다.12) 위와 같이, 화두참구법은 마음에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집중시키는 것이고, 중간에 위에서 말한 10가지 문제점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두를 의심하는 형식은 아주 자유로운 것이다. 어떤 주어진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동작에서 이 화두를 의심하면 되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말의 3대선사의 한 분인 나옹혜근(1320∼137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광명사에 있을 때 일찍이 그대를 위해서 말해준 ‘이 무엇인가’ 화두를 항상 12시 동안 모든 곳과 모든 때에 절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잘 제기하고 잘 참구해서 조금도 끊어짐이 없게 하라. 갈 때도 다만 ‘이 무엇인가’ 하고, 머무를 때도 다만 ‘이 무엇인가’ 하고, 앉을 때에도 다만 ‘이 무엇인가’ 하고, 누울 때에도 다만 ‘이 무엇인가’ 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변소에 가고, 손님을 맞이하고, 내지 공무를 볼 때, 위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쓸 때, 마지막까지 ‘이 무엇인가’ 하라.

다만 이와 같이 제기하고, 이와 같이 참구하여, 잘 참구하고 잘 제기하면, 홀연히 화두를 제기하지 않아도 화두가 제기되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아도 의심되며, 밥을 먹어도 밥인 줄 알지 못하고, 차를 마셔도 차인지 알지 못하며, 이 허깨비의 몸이 인간세계에 있는지도 모르고,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잠자고 깨어있을 때가 한결같게 된다. 이런 경지에서 몸을 뒤집어 한 번 던지면, 비로소 마음의 근본 자리에 이른다. 여기서는 관직을 고치지 않고, 속인의 모습을 바뀌지 않고, 3계의 불타는 집을 떠나지 않고, 인도의 28조사와 중국의 6조사가 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리라.13)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화두를 참구한다는 점에서 간화선은 비행비좌삼매와 연결된다. 따라서 천태의 4종삼매에는 밀교·선종·정토종이라는 실천불교의 모든 수행법을 종합하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천태 4종삼매는 중국불교 수행법의 크나큰 진원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위파사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의 연결점

위파사나 수행법도 비행비좌삼매와 연결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위파사나 수행법 중, 4염처 수행은 우리의 일상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인데, 이 점은 비행비좌삼매와 일치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위파사나 수행의 일부를 살펴보자. 4염처 수행 중, 인간의 몸에 대해 정신을 집중하는 대목에서는 먼저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데, 이는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는 것을 알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숨을 길게 내쉬고 있음을 아는 것이고,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숨을 짧게 들이쉬는 것을 알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숨을 짧게 내쉰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치 능숙한 도공이나 그의 수제자가 물레를 오랫동안 돌릴 때는 오랫동안 돌린다는 것을 알고, 짧게 돌릴 때는 짧게 돌린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이 발생하는 요소와 소멸하는 요소를 바로 보아서,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은 채 초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14) 몸의 자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관찰한다. 갈 때는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몸의 어떤 자세에 대해서도 잘 안다.

이것을 통해서 몸에서 발생하는 요소와 소멸하는 요소를 바로 보아서,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은 채, 초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15) 그리고 일상의 동작에도 이것은 연결된다.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팔다리를 굽히고 펴고 숙이는 등의 몸가짐을 잘 관찰하고 분석하며, 가사를 입고 발우를 잘 지니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을 분명히 잘 이해한다. 자연의 부름에 순응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걷고 서고 앉고 잠자고 일어나고 말하고 조용히 있는 것도 잘 이해한다. 이와 같이, 몸을 바로 보면서 지낸다.16)

이런 관찰이 마음과 느낌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4염처 수행이고, 이것이 바로 위파사나 수행의 내용이다. 따라서 위파사나 수행의 요점은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과 마음씀에 대해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 점은 비행비좌삼매와 연결점이 있는 것이다. 비행비좌삼매도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씀을 4운으로 관찰하는 것이므로, 비록 그 관찰하는 대상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외적인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형식을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점에서는 위파사나 수행과 동일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이 점은 간화선 수행과 통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간화선 수행도 어떤 자세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의 동작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으므로, 이렇게 보면, 비행비좌삼매를 축으로 해서 간화선과 위파사나 수행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점에서 간화선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이 서로 대립되는 것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비행비좌삼매에 대한 투철한 이해는 아마도 간화선과 위파사나를 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접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4. 결론:모든 수행법은 한 맛이다

천태의 4종삼매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여러 수행법이 각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위파사나 수행법과 간화선 수행법을 서로 대립적으로 보지 말고, 각기 깨달음의 고지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주장은 고려의 천태종 승려 운묵무기(?∼1328∼?)에 의해 크게 외쳐진 것이기도 하다. 운묵은 《석가여래행적송》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모든 수행법은 한 맛이라고 주장하였다.

우선 그는 수행방법의 회통을 말하기 위해서 ‘성 안에 들어가는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성 안에 들어가는 데 성문이 8개 있으므로, 어떤 문을 통해서 들어가든 간에 문제가 없는데, 굳이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을 그 당사자가 살고 있는 곳보다 먼 곳의 문으로 들어가게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우선 왕이 살고 있는 성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8개의 문이 다 괜찮으니 그 당사자가 사는 장소에 따라 잘 인도해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되는데, 어떻게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을 서쪽 문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고, 서쪽 지역에 사는 사람을 동쪽 문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는가? 어찌하여 이렇게 잘못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고롭게 하는가? 비록 성의 문은 8개이지만, 들어가는 문은 다만 한 개뿐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듯이 보이지만, 모두 깨달음의 세계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한 쪽만 옳다고 집착하여 싸우겠는가?17) 그래서 운묵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좌선을 가르치기도 하고, 경전을 독송하라고 하기도 하고, 염불을 권하기도 하고, 보시와 계율 등의 여러 가지 선한 행위를 닦으라고 일러주기도 해서 궁극의 도에 들어가게 하고자 한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수행법만 옳다고 집착하여 싸울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운묵은 자신의 수행방법이 최고라고 우기면서 서로 싸우는 사람을 병의 근원을 살펴보지 못한 채 표면적인 임시방편의 약을 조제해 주는 부류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것,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일상동작이 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나타남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법화경》에서 어린아이들이 장난으로 탑을 쌓거나, 건성으로 염불을 한 번만 해도, 그 인연으로 인해서 나중에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자면, 불교의 수행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한 가지 수행법에만 전념하면, 결국 최고의 경지에 이룰 수 있게 된다고 운묵은 강조한다.18)

운묵에게서 살펴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검증된 모든 수행방법에는 각기 장점이 있으므로 그 근기에 맞추어서 자신의 수행에 전력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만이 옳다고 우기고 싸우는 것은 이미 불교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옛어른의 간절하고 준엄한 가르침이 다시 한 번 이 땅에 뿌려져서, 화려하게 꽃피워 새롭게 각광받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강사. 논저서로 〈천태지의 철학사상 연구〉 《천태사상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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