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운명을 의심 없이 계속 믿어 나간다는 사실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미리부터 절망해 버린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자만의 태도이다.”르네 듀보, 〈내재하는 신〉

1. ‘하느님의 어린 양’과 복제양 돌리

1997년 2월,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도된 복제 양 돌리는 (실제로 돌리가 태어난 것은 전년도인 1996년 7월 5일의 일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 이래로 세상에 등장한 가장 유명한 양이 되었다.

신의 손으로부터 생명 탄생의 신비를 빼앗는 프로메테우스적 기술로 인정되고 있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생겨난 첫번째 생명체가 다름 아닌 ‘양’이라는 사실은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생명복제라는 문제가 단순한 과학기술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깊은 종교적 차원의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임을 예상토록 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 양’이 인간에게 신의 생명 구원의 소식을 전하였다고 한다면, 복제양 돌리는 이제 생명의 탄생이―인간게놈 연구에 의한 인간 생명의 조작까지 포함하여―인간의 손에 의해서 가능해졌음을 신에게 알리는 ‘인간의 어린 양’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하느님의 어린 양’의 등장과 같은 계시적 차원의 사건이었고, 그런 만큼 그것은 종교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어린 양’은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내준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선언에 대해서 종교계가 대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돌리가 ‘종교적 사건’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신학자들은 이렇게 황급히 절규한다. “생명복제의 문제는 더 이상 늦출 수도 없는 효과적인 통제 대책의 긴박성을 요청하고 있으며 그것은 종국적으로 하느님의 생명 주권에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의 토대 위에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관심을 구현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하는 윤리학적 문제라 하겠다.

따라서 생명복제에 관한 기독교 윤리학적 관심은 단순한 논리적 접근이나 찬반을 묻는 학문적 유희에 고착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과학기술시대의 하느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하여 생명 존중의 실천을 수반하는 것이어야만 하겠다.”1) 하지만 복제양 돌리에 대해서 종교계가 보이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반응은 역설적으로 과학이 생명의 신비에 파고듦으로써 종교의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음을 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2)

생명복제의 문제가 오직 신에게만 의존한다고 여겨지던 생명의 탄생과 마감이 이제는 신 없이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건인 동시에, 인간의 무한한 지식에의 욕망의 결과라고 여기기 때문에 종교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불교 측에서 제기된 다음과 같은 반응도 앞서 인용하였던 기독교측의 위기감에 못지 않다. 생명공학이 인류에게 큰 편익을 가져다 줄 ‘꿈의 기술’이긴 하지만 인류가 그 기술을 사용할 때 치러야 할 대가는 치명적이다. …… 19, 20세기의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풍요와 편리함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환경문제와 같은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생명공학까지 가세한다면 인류는 ‘꿈의 기술’을 향유하기도 전에 멸망할 것이다.

오늘의 생명공학은 서구의 이기적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주의는 현대의 과학기술을 낳았고, 과학기술은 자연파괴, 자원 고갈, 환경오염과 같은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이기심에 기초한 인간 중심적 사고가 인간의 삶마저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생명공학의 성과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생명공학이 여전히 이기적 인간중심주의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3)

그러면서 “이타적인 삶과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을 제시하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뒤에서도 거론하겠지만 과연 생명공학이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인가에 대해서는 보다 주의 깊은 논의를 필요로 할 것이다―를 뛰어넘어 ‘자아의 확장’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아가 확장되어 다른 존재를 포용한다면 우리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타인에 봉사하고 자연과 조화하는 윤리적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 확장’은 현대의 심층생태학과 맥을 함께 하는 것으로서 윤리학에 새로운 장을 열어줄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이 생명의 구조 속에서 통일적으로 이해될 때, 우리는 인간 중심의 윤리에서 보다 확장된 생태 중심적, 생명 중심적 윤리체계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4)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의 근간을 ‘인간중심주의’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독교(개신교)의 입장도 불교의 그것과 그다지 멀지 않다. 예를 들어서 “현대 생명공학을 이끌어 가고 있는 가치들은 이러한 개체 자아중심주의나 인간중심주의의 소산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 인간중심주의가 자연 없는 인간중심주의가 됨으로써 생태계의 균형과 질서를 위협하고 급기야는 인간 자신의 생존까지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이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 그러하다.5) 결국 (인간) 복제는 인간이 신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불(不)신앙의 결과이고, 인간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으로 마감되는 기독교 신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비판인 것이다. “복제는 신의 방법이 아니다.”라고 그들은 부르짖는다.6)

유전공학은 오직 인간에 대한 치료 목적 이외에는 허용될 수 없다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도 일단은 앞에서 인용한 불교나 개신교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도 유전공학의 연구범위를 치료목적에만 한정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처럼 “인간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거나 혹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키지 않고 개인적인 안녕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전제하에서 유전공학은 허용된다는 말이다.7) 가톨릭 교회가 인간복제를 윤리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오직 신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며, 생명복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이며, 나아가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혼란으로 빠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황청 생명학술원이 선언하듯이 복제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힘을 비극적으로 서투르게 모방하려는 위험한 시도”일 뿐이다.8) 이처럼 종교는 생명공학에 대해서 대단히 제한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하였던 것처럼 종교가 생명공학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생명공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이 종교와 거의 유사한 차원의 문제를 놓고서 평행적인 경쟁관계에 들어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생명공학의 탄생은 생명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종교와 과학이 한데 어우러져서 통전적(通全的)인 영역의 지식 내지 진리를 창출해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종교의 독점물은 아니며,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생명은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이처럼 과학과 종교가 공통으로 생명을 탐구한다는 사실은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가 급전기를 맞이하면서 생명의 신비의 또 다른 측면이 문을 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종교와 과학

복제 양 돌리로 상징되는 현대의 생명공학은 전통적으로 종교만이 독점한다고 여겨왔던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종교가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生死事大)를 다루고 있듯이, 과학과 의학도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의 생명과 죽음을 콘트롤하고자 한다.

하지만 과학은 생명의 문제를 신에게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지닌 인간의 손으로 처리하고자 한다. 생명의 탄생과 마감은 더 이상 신의 독점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생명이 그러하듯이 죽음의 경계 또한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일방적으로 부과되지 않는다. 인간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 역시 과학의 도움을 빌려서 조절한 지 오래 되었다.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인공수정과 낙태는―보고에 의하면 한국에서 1년간 이루어지는 낙태 건수는 150만∼200만에 이른다―생명의 시작을 신의 손에서 빼앗아온 지 오래이다. 뇌사와 안락사의 문제는 죽음의 경계 또한 인간의 판단에 맡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의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찍이 알도스 헉슬리가 예언자적인 소설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음울하게 말하였던 것처럼 인간의 삶은 과학에 의해서 철저히 통제되고 필요에 의해서 생산·파괴되는 것일까? 이제 인간은 유전공학의 힘을 빌려서 불치의 병을 치료해 줄 《예수의 유전자》(마이클 코디)를 찾아내고자 할 것인가? 유전공학의 문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기서 잠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본 논문에서는 유전공학이나 생명복제에 관계된 상세한 기술적인 논의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서구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다시 말해서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는, 밀월관계가 분명 아니었다.

비록 근대과학 역시 전형적인 기독교적 태도인 로고스 중심주의로부터 연원된 것이었지만,9) 기독교는 과학의 진리 추구가 자신의 입지를 좁게 만들고 나아가 종교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대립 일변도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갈등’과 ‘무관심’, ‘대화’와 ‘상호보전’의 방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10) 문제는 현재 (인간)복제에 대한 종교의 태도가 지나치게 ‘갈등’ 일변도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서 많은 종교인들은 인간복제가 동일한 유전자에 의해서 통제되는 동일한 인간을 제조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거리에는 동일한 인간군상들이 활보하는 양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 악명 높은 우생학의 망령을 다시 거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유전자 복제를 통해서 같은 나와 동일한 유전자 배열을 가진 인물이 태어난다고 해도 그는 엄연히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주장한다. 동일한 유전자 배열을 지닌 인물은 성장과정상의 여러 가지 영향의 차이로 인하여 나와는 다른 존재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은 유전적 상황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운명론은 유전학에 대한 우리들의 혁명적 이해에 있어서 어두운 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1) 뿐만 아니라 종교계는 복제된 인간에게는 영혼이 없으므로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인간)복제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또한 만만치 않다.

신학자들은 “영혼의 기능이 유전자 자체이거나 영혼이 유전형질에 포함되거나 혹은 두뇌의 기능과정이 영혼일 수 없다.”12)고 주장하지만,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차드 도킨스의 말대로 “그 누구도 (동일한 유전자 배열을 지닌 일란성) 쌍둥이가 개체성이나 인격성이 없는 좀비(마법으로 되살아난 시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13) 동일한 유전자 배열을 가진 일란성 쌍둥이는 서로 다른 영혼을 가진 개별적인 인격체이지 그 어느 한 쪽에만 인격을 지닌 것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과학은 종교와 다른 차원의 문제를 논할 뿐이라는 식으로 과학을 백안시하는 종교의 태도에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근대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설명하면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과학은 근대적 인간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에 결정적인 각인을 남겨 놓았다. 프로이트는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지동설이 당시까지 우주의 중심에 움직이지 않고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인간을 우주의 떠돌이로 만들어버렸고,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서 인간은 여타의 생물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하나의 생물체임을 자각함으로서 인간은 그때까지 당연한 것으로 누려오던 특수성을 박탈당한 채 불안에 사로잡혀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과학의 입장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립을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로는 버트란드 러셀을 꼽을 수 있다. 러셀이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때에 그에게는 종교에 대한 강한 불신이 풍겨 나오고 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그에게는 독단과 이성의 대립 이외의 것이 아니었다. 참된 탁월성은 결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근거 없는 믿음과 결부되어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신학적 믿음들이 근거 없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종교적 견해가 지닌 어떤 가치 있는 것을 보존하는 데 필수적일 수 없다. 이와 달리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발견할지도 모르는 어떤 것에 관한 두려움으로 충만해 있음이며, 이것은 장차 세계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도들들 방해할 것이다.14)

러셀이 진화론과 교회의 불편한 관계를 진술하는 대목에서 우리들은 현대의 생명공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의 전조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공학은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체의 형이상학적-신학적 구분에 대한 철폐라는 점에서 다윈적 진화론의 연장선상에 서 있기 때문이다. 러셀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다윈주의는 신학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의 설만큼이나 심각한 타격이었다. 종(種)의 불변성, 창세기가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각각 독립된 많은 창조행위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생명의 기원 이래로 시간의 경과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통파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또한 동물들이 주위환경에 기막히게 적응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신의 자비에 대한 많은 논의를 버리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이제 자연도태의 작용으로 설명되었다. 최악의 경우로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했다고 감히 주장했던 것이다.15) 이러한 입장에서라면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다윈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러셀은 이를 두고서 “어떤 혁신의 모든 논리적 결과들이 동시에 나타날 때는 습관에의 충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의 충격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은 대개의 경우 배척을 받는다는 말이다. 혹은 그의 말처럼 “신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중요성을 그것의 옹호자들보다 더 빨리 깨달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6)

러셀의 이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원리들의 등장에 의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신과학 운동의 경우 과학과 종교의 이분법적 대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가 유전공학의 문제에 대해서 보이는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를 접하면서 우리들은 “신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중요성을 그것의 옹호자들보다 더 빨리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러셀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되는 것이다.

앞 절에서도 밝혔듯이 유전공학의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과학 모두에게 오버랩되는, 그러면서도 종교의 가장 핵심 층을 건드리는 문제라는 사실을 과학자보다 오히려 신학자(종교인)가 더 빨리 알아채 버린 것이다.

3. 생명과 죽음:뇌사의 경우

(인간)복제가 생명 탄생을 둘러싼 논쟁이라면 같은 생명윤리의 문제권에 있는 뇌사 논쟁은 죽음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생명과 죽음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더욱이 뇌사 문제는 한 존재의 죽음이 다른 존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장기이식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뇌사 판정을 둘러싸고서 제기되었던 문제를 살펴본다는 것은―이미 뇌사 문제는 입법화되어서 시행되고 있다―생명 탄생을 둘러싸고서 벌어지고 있는 유전공학의 논쟁에도 시사하는 바가 다대할 것이다. 뇌사 논쟁에서 우리들은 이미 우리 사회가 현대과학문명에 의한 고도산업사회에 깊숙이 진입해 있음을 인식하면서 생명에 대한 태도를 서서히 변경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생명윤리가 다루는 낙태, 안락사, 인공수정 및 대리모, 그리고 뇌사 및 장기이식의 문제에는 고도로 발달된 의료기술과 이의 시행에 따른 윤리적인 문제가 복합되어 있다. 특히 뇌사의 문제는 죽음에 관한 종래의 입장인 삼징후설, 즉 심장의 정지·호흡의 정지·공동의 열림 등을 뛰어넘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죽음에 대한 이해에로 우리들을 불러 세우고 있다.17)

죽음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의료적인 차원을 넘어서 법률적이고 문화적이며, 나아가 종교적인 세계관의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생명과 죽음의 기로를 논하는 뇌사의 문제는 일반적인 사회적 콘센서스를 도출해 내야만 하는 문제이며, 이는 생명복제에 직면한 사람들이 생명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놓고서 합의점을 찾아야만 하는 것과 똑같은 경우이다. 특히 뇌사의 문제는 장기이식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 민감한 사안이 되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장기 일부를 가지고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하는 장기이식의 경우는 거기에 수반되는 의료 윤리적이고 법률적인 문제가 중요 논의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서 장기의 매매금지에 관한 법률이나 의료자원의 공정하고 효과적인 분배의 문제가 주요 논쟁의 대상이 된다.18) 그러나 근본적으로 장기 제공을 통해서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문제는 갈수록 생명을 물화(物化)시키고, 생명을 이기적인 소유욕의 대상으로 여기는, 그래서 역으로 사회병리적인 생명 경시의 현상으로 비화되고 있는 현금에 인류의 생명의 연대의식을 고취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자각해 나간다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황 바울로 2세는 1990년 4월 ‘신장병과 신장이식 국제학회’에서 “도너(=장기기증자)로서의 등록은 인류로서의 연대성을 인식하고 타자에게 인간애를 드러내는 좋은 기회이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또한 독일 가톨릭과 개신교 사교단 합동 윤리위원회에서도 1990년 8월 신자들에게 장기 증여를 권장하는 기준을 배포하였다. 불교의 경우도 대체로 생전이든 사후든 장기 기증이란 인간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자비행이요 보살행이라고 보는 입장이다.19)

장기이식과 직결되는 뇌사를 인정하려는 적극적인 입장은 주로 방금 말했던 것처럼, 보다 확대된 의료자원 확보를 통해서 보다 많은 생명을 수호한다는 대명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반대론자, 또는 신중론자들의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뇌사 판정과 장기이식에 관해서 원칙적인 반대론자는 드물다.) 한 생명의 죽음을 전제로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장기이식, 즉 뇌사 판정을 통해서 죽은 자로 판명난 사람으로부터 장기를 적출하는 문제는 이미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우선 뇌사 판정을 둘러싼 의료계 내부의 견해차가 있다. 일본의 뇌사 판정을 위한 이른바 다케우치 기준(竹內基準)의 경우―우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① 심혼수(深昏睡) ② 자발 호흡의 소실 ③ 공동 확산 ④ 뇌간 반사의 소실 ⑤ 평단뇌파 ⑥ 6시간 이상의 관찰시간 등에 의해서 뇌사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뇌사를 “뇌의 불가역적 기능 상실”이라고 보는 정의에 대해서 기능사(機能死)가 아닌 기질사(器質死)의 입장에서의 반론이나, 뇌혈류 정지 상태를 뇌사의 판정을 위한 기준에 포함시켜서 오판의 가능성을 더욱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20) 다시 말해서 현재의 기준으로는 뇌사라고 인정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1990년 일본 오사카 대학병원에서 뇌사상태에서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신장을 적출하였고, 이것이 큰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뇌사 판정에 대해서 신중론을 펴는 사람들의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의견을 통해서 우리들은 뇌사 문제를 포함한 생명윤리 문제 전반에 대해서 제기되는 문제군들을 살펴볼 수 있다.21)

① 장기 제공자(도너)의 생명의 존엄성 확보의 문제: 특히 사망자가 생전에 장기이식을 위한 장기 적출에 관하여 의사표시가 없었을 경우에는 유족의 동의를 얻는 것으로 장기를 적출할 수 있다고 할 경우, 사망자의 장기가 물화되어 버리거나, 이를 통해서 매매의 대상으로 될 수도 있으며, 이는 자칫하면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배금사상의 희생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장기 제공자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상의 문제 해결과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서 뇌사 판정이 필요한 환자는 대개의 경우 위급한 상태에서 치료의 대상이 될 것이므로, 이들에게 장기이식의 의사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②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의 문제: 이는 특히 의료자원 배분에 있어서 과연 얼마나 장기이식이 경제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입장에서의 불평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③ 뇌사판정을 둘러싼 의료계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 현금에도 왕왕 일어나는 의료분쟁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료계에 대해서 약자의 입장에 있다고 느끼고 있다. 뇌사 판정이라는 지극히 첨예한 문제를 둘러싸고서 의료계와 사회의 신뢰회복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뇌사 판정의 과정이 철저히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뇌사 판정 과정과 장기이식 과정의 철저한 분리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④ 뇌사자를 죽은 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유족들에 대한 배려의 문제: 뇌사를 죽음이라고 피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유족이 감당해야 하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요구된다. 뇌사의 문제에는 위와 같은 몇 가지 신중론자들의 입장뿐만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와 개인의 입장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기에 간단치 않다. 다시 말해서 뇌사의 문제는 문화인류학, 사회학, 종교학 등의 논의를 통해야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뇌사와 장기이식의 문제는 생명을 함께 지켜 나가려는 사회적인 연대감의 확산을 통해서 활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뇌사 판정과 장기이식에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각계 각층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특히 다원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종교계가 자신의 전통적인 입장에 얽매여 있지 말고 스스로를 현대화하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22)

4. 생명공학이 밝혀주는 생명의 그물망

우리들은 위에서 생명복제를 둘러싼 논쟁의 일단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위의 찬반 논쟁에서는 생명복제라는 문제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본령이 아직 충분하게 드러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생명복제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조건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간(間)’에 의해서 규정되는 연기의 세계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크게 힘입은 이러한 인간 삶의 조건은 인간의 존재양태를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우리들의 의식 자체를 바꾸어놓고 있다.

즉 종교와 종교를 연결하는 종교간(inter-religious)의 대화, 네트워크와 네트워크 사이를 연결하는 인터넷(inter-net), 그리고 생명과 생명을 그물망으로 연결하는 생명의 그물(inter-bios) 속에서 우리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삼중의 ‘간’의 세계는 이른바 근대적인 주체의식과 근대적인 시공간 의식을 해체시키고, 나아가 생명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토대를 마련해줄 수 있다.23)

흥미로운 것은 현금의 유전공학이 제기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인터넷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른바 미디어 혁명의 세계가 제시하는 패러다임과 오버랩하는 부분이 대단히 많으며, 나아가 거의 동일한 현상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미디어 혁명을 불러일으킨 인터넷이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순한 정보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존재론적 규정을 의미하듯이, 유전공학의 문제 역시도 단순히 기술적으로 하나의 생명을 생산해낸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거대한 생명의 덩어리로 연결하고 있으며, 나아가 생명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네트워크의 연결망이 탈주체화된, 육체를 지니지 않는 사이버 인간, 곧 사이버노트(cybernaut)를 만들어 내듯이,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를 생명이라는 그물로 엮어주는 유전공학의 세계는 이제 또 다른 복제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복제가 근본적으로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은 타당성을 상실한다.) 모든 것을 0과 1로 부호화하는 비트의 세계에서 태어난 사이버노트와 일체의 생명현상을 A, T, C, G의 배열로 풀어내는 유전공학에서 태어난 (영혼이 없는?) 육체인 복제인간은 어쩌면 근대적인 공간과 생명 이해 모두를 해체한 시대에 태어난 쌍생아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사이버 인간이 인터-네트워크의 세계에서 부유하듯이, 복제인간은 생명의 그물망 사이에서 명멸을 계속하면서 단독자와 같은 자신의 각질을 벗어 버린다.

이 비트로부터 탈근대의 문명은 시작된다. 곧 모든 것을 그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외로운 단자로서 비트는 더 이상 대상을 지시하지 않으며, 기표는 기의를 상실한 채 부유한다. 현상은 본질을 가리키지 않으며 원인과 결과, 안과 밖, 참과 거짓,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사라진다. 비트는 더 이상 사회적 재현물이 아니다. 더불어 대상을 구조화하지도 않는다. 모든 대상은 구조로부터 벗어나 단형의 형질로 쪼개지며, 그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로부터 근대적 표상체계는 사라지고, 구조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24) 이러한 사이버노트와 복제인간이 살아가는 ‘간(間, inter)’의 현실 양태는 인간의 의식뿐만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세계 자체의 새로운 실재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도표는 이러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과학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역시 과학에 의해서 가능해진 새로운 삶의 공간 사이에 대단한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억압하는 통제기구나 권력장치”에 의한 중앙집중화가 아닌 “근원적 무질서”야말로 인간과 세계의 ‘근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종교인들은 생명공학이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이기적 행위라고 비판하지만, 생명공학이 열어주는 새로운 생명관은 이들의 비판과는 정반대로 생명이야말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할 수 없는 연속체이며, 생명은 생물학자 자끄 모노가 말하는 것처럼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며, 어떤 “근원적인 무질서”로부터 와서 그러한 무질서를 향해서 가는 무한한 흐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27)

생명의 전체상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러나 전적으로 새로운 시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근대의 ‘인간학적 전환’ 이래로 인간에 대한 이해는―아이러니컬하게도―인간 이외의 생물체와의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른바 막스 쉘러나 헬무트 플레스너, 아놀드 겔렌 등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특성을 여타의 동물과의 연속선상에서 탐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방법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연속성을 가정하였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독특성을 전체 생명과의 연속선상에서 다룬 것은 인간이 그러한 생명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나름대로의 특이성을 확보하였는가를 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목표는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환경으로서의 자연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28)

하지만 유전공학이 밝혀준 생명의 신비는 인간의 생명이 전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의 가역적인 연속성 속에서 하나의 통전적인 그물망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은 모든 생명체의 생명과 구분할 수 없는 교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명에는 이른바 자연적인 생명과 인위적인 생명을 구분할 수 없이 혼재해 있다. 현금 논란이 되고 있는 복제양의 문제도 사실 이미 우리 주위에 수없이 존재하는 수많은 클론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29) 분화세포를 이용한 식물복제나 유전자 변이로 우량식물을 만드는 작업 등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생명은 이미 자연적인 생명과 인위적인 생명을 구분할 수 없는 복합체가 되어 있다.30)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탄생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생식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말이다. 생명은 이제 창조되는 동시에 ‘생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복제에 의한 생명의 ‘생산’은 생명의 본질 자체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다. 생명이라는 문제에서 우리들은, 종교인들의 비판과는 정반대로, 인간과 비인간으로서의 생물―이런 의미에서 생물은 곧 사물을 의미한다―의 대립을 벗어나 생명 현상의 흐름 속에서 통전적으로 교차한다.

나와 그것의 주객도식은 생명 속에서, 보다 미크로적으로 말한다면, 유전자 배열에서 무너져 버린다. 유전자는 인간과 생물을 대상적으로 관찰해서 도달한 경계이지만, 이제 그 유전자가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 전체의 연속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복제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소식 앞에서 중요한 것은 대답을 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진지하게 묻는 일이다. 우리들은 아직 생명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올바르게 물어오지 못했음을 생명복제는 지적해주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 및 신학적 질문들은 너무 어렵거나 너무 심오하다고 한켠으로 제쳐두는 이 유희의 시대에, 클로닝은 우리를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과 정면으로 맞서게 하고, 생명 그 자체의 특권과 한계를 우리의 눈앞에 들이댄다. 그것은 또한 과학의 힘에 관해 질문하라고 강요한다.

사실상 거기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지식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차라리 추구하지 않는 편이 나은 길들이 있는 것일까?31) 문제는 (인간)복제의 허용 여부에 대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생명복제라는 문제에는 사회적인 콘센서스가 요구되는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이기에 성급한 판단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인간)복제라는 문제의 중요성,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우리들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을 포함한 전 생명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묻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은 (인간)복제에 대해서 대단히 저어하고 있으며 경계 어린 태도를 취하고 있다. 모든 나라는 치료 이외의 목적에서 인간배아의 복제를 금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인간)복제에 대한 금지는 (인간)복제가 제기하고 있는 본질적인 물음의 심각성을 오히려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복제를 둘러싼 다음과 같은 차분한 관찰에서 계발받는 바가 많을 것이다. 복제는, 인간의 복제까지도 포함하여, 생명 그 자체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생명에 대한 우리들의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복제라고 하는 “신화나 허구”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복제가 절대로 인간 사회에 있어 재앙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하나의 기술임을 밝히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복제는 원래 세포증식의 기술이며, 복제와 다를 바 없는 자연생식 체계(즉, 꺾꽂이 같은 무성생식 유형)를 갖는 식물들을 생식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복제는 요 몇 년 전부터는 가축들을 얻는 방법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온갖 신화론과 신화 그리고 공상과학 서적을 아무 생각 없이 거론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가까이 와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용 가능한―혹은 막 태동하는―기술들의 밀림 속에서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기 힘든 경계선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유성생식이라는 자연적인 방법 외에 자유롭게 복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권리를 인간에게 주는 복제가 인간 존엄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본질을 해치지는 않을까?32) 미국의회기술평가사무국(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 Congressional Board of the 97th Congress)은 《유전공학의 현재와 전망》을 펴내면서 한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신에 의해서 피조된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공동 창조자(co-creator)일진대 인간은 단순히 “협력자, 관리자, 후견인만은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면서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창조자인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현재 또는 궁극적으로는 가까운 장래에, 미래의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아야만 하는가? 왜 우리들은 구태여 ‘하느님처럼 행동하는가?(play God)라고 하여, 과학자, 또는 의사를 두려워하며 공공연하게 비난하여야 하는가? …… 창조란 우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임무이며, 우리들의 일은 아직도 미완성 상태로 있는 것에 대한 창조를 전진시키는 것, 즉 인간의 본성을 진화시킨다는 것이다.33) 그러나 그는 이렇게도 묻는다. 그리고 이 물음에는 생명복제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의 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만일 인간의 소질은 탁월한 생물이고, 또 인간은 미래(현재와 미래)로 향하는 생물이며, 그 미래에 있어서는 하느님과 함께 창조사업에 관여하는 자로서 생각했다면, 현재 우리들에게 없는 상당한 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34) 복제인간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복제되고 개량된 클론들이 이미 우리들 주위에 존재해 있으며, 인류 문명은 그들과 공존하는 법을 서서히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생명체의 고통을 덜고 치료하기 위한 유전자 연구는 이제 인간 이외의 존재를 복제하는 데 머물지 않고 ‘클론 인간’까지 만들려는 문턱에 와 있다. 사이버 인간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복제인간의 시대에도 우리들에게는 이른바 생명 이해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하여서 세계의 신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하여왔음을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복제인간의 문제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복제인간이 던져주는 메시지에 대해서 불필요한 알레르기 반응이나 경계심을 버리고 보다 심각하고 적극적으로 고려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승철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및 감리교 신학대학원,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 졸업. 신학박사. 현재 경성대학교 신학과 부교수. 저서로 《대지와 바람: 동양신학을 위한 해석학적 시도》, 《엔도 슈사꾸의 문학과 기독교》, 《해체적 글쓰기와 다원주의로 신학하기》 등이 있고, 종교다원주의나 불교-기독교의 대화, 그리고 종교와 과학의 만남과 관계된 10여권의 역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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