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 / 최연식 옮김

화엄사상과 왕권 또는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화엄사상에 대한 논의는 한국 불교학계와 역사학계의 주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중대 왕실과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시도한 고려 초 광종의 정치이념을 각기 의상과 균여의 화엄사상에서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전개되었다.

많은 불교사상 중에서도 특별히 화엄사상이 정치이데올로기 특히 중앙집권의 이데올로기로 이해되는 것은 전체와 개인의 통일을 강조하는 화엄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이론이 중앙집권을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쉽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화엄을 중앙집권의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논의는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 이해에서도 제시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측천무후의 집권기에 화엄교학의 완성자인 법장(法藏)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일본에서는 나라(奈良)시대에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한 사상적 노력으로 화엄사상에 의거하여 중앙과 각 지방에 동대사(東大寺)와 국분사(國分寺)·국분니사(國分尼寺)를 설립하였다는 해석이 정설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문헌이나 화엄사상가들의 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해석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었고, 현재는 화엄사상을 중앙집권의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이해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입각한 해석이라기보다 화엄사상은 중앙집권에 상응하는 사상이라고 하는 가설에 기초한 해석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불교와 정치 혹은 정치이념의 문제는 불교학계와 역사학계에서 모두 심각하게 추구(推究)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구체적 자료에 입각하지 않은 해석은 불교와 역사의 이해에 모두 득보다는 실을 더 많이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점에서는 화엄사상이 ‘중앙집권체제의 이데올로기였다’는 또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해석이 어느 시기에 어떠한 배경에서 누구에 의해 제시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도대체 왜 근원적으로 비정치적인 불교사상이 정치이데올로기로 이해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유독 화엄사상이 주목되었던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불교사 해석의 당위를 따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대 사상계의 동향과 불교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여기에 번역하는 〈화엄철학은 어떻게 일본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화엄사상을 정치이데올로기로 해석하는 것은 근대 일본 불교계의 동향 특히 불교가 국가주의와 연결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한 개연성은 어느 정도 짐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형성과정과 사상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혀낸 연구는 아직까지 제시되지 못하였고, 그런 점에서 이 논문은 이 문제를 해명하는 선구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일본의 불교사상학회에서 간행하는 《불교학(佛敎學)》 42호(2001년 3월 간행)에 실린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 교수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합리화와 화엄철학(1)-기히라 타다요시(紀平正美)의 역할을 중심으로〉을 완역한 것인데, 한국학계의 불교사 인식에 대한 전환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논문의 제목을 위와 같이 변경하였다.

필자인 이시이 교수는 중국 화엄사상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돈황 문헌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지론종과 화엄종, 초기 선종의 사상 내용을 재검토하는 작업을 주로 진행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연구의 일환으로 지론종 및 초기 화엄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신라의 의상과 원효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 전체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밝혀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 내의 대표적인 한국불교사 연구자이기도 하다.

본 논문은 이시이 교수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인 화엄사상 연구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현재 일본의 지성계 특히 불교학계의 사상적 기반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시이 교수는 과거 일본 지식인 사회 특히 불교학계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 이러한 연구가 심적으로 몹시 괴로운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학계의 발전을 위해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시이 교수는 이 논문 이외에도 〈교토(京都)학파의 철학과 일본불교 -고야마 이와오(高山岩男)의 경우〉(《계간 불교》 49호, 2000년 2월)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제국주의 시기 일본 불교(학)계의 동향에 대한 연구를 향후 자신의 주된 연구과제로 설정하여 고대 동아시아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와 병행하여 계속 추진해 갈 계획이다. 이러한 교수의 연구가 한국의 불교계와 불교사학계는 물론 우리의 근대 지성계를 이해하는 연구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역자>

화엄철학은 어떻게 일본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

1. 문제의 소재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교학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은 국가주의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1933년 4월 10일에 혼고(本鄕)의 동경제대 불교청년회관에서 폭넓은 사상연구와 계몽을 추구했던 유물론연구회가 공개 강연회를 열고 ‘리버럴 좌파’라고 할 수 있는 하세가와 뇨제칸(長谷川如是閑)이 개막인사를 시작하기가 무섭게 지역의 경찰서장이 해산을 명령하고 참가자들의 상당수를 체포하였다.

패전 다음해에 〈초(超)국가주의의 논리와 심정〉을 발표하여 전후 일본사상계의 기수가 되었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고등학생(東京一高)의 신분으로 이 강연회에 참가하여 검거되어 이후 수년에 걸쳐 특고(特高)경찰의 감시를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는 정부와 군부의 사상 탄압이 이미 상당히 엄해지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사이에서는 이미 수년 전에 마르크스의 인기가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다이쇼(大正) 교양주의,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래의 리버럴한 풍조도 아카데미즘의 세계에서는 아직 번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유물론연구회에 강연회장을 제공한 동경대 불교청년회가 간행한 잡지 《불교문화》에도 이 사건 이전의 권두언과 기사들에는 상당히 리버럴한 논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뿐 아니라 1932년 6월 간행의 제6권 제11호의 ‘청년불교도여, 일어나 단결하라’라는 제목의 권두언에는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의 위험을 지적한 후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불교도여, 일어나라. 늙고 낡은 불교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젊고 기운 넘치는 청년불교도가 일어날 때가 왔다. 우리들이 나아가는 곳에는 반드시 불타(佛陀)의 승리의 노래가 약속되어 있다. 청년불교도여, 일어나 힘차게 단결하여 나아가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면서도 말투 자체는 공산주의운동의 삐라를 생각나게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한 시대였던 것이다. 9월에 간행된 다음 호의 ‘파시즘에 대한 불교도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권두언은 다른 사람이 집필한 듯 전체적으로 온건한 문체이지만 이 글에서도 파시즘의 ‘배외적(排外的) 국수주의’와 ‘위력주의’를 비난하는 한편 불교의 ‘문화주의’ ‘무상해(無傷害)’의 입장을 강조한 후 불교는 국가를 초월한 면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불교는 바른 국가의 의의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초국민적인 이상에 서있기 때문에 파시즘에 의한 배외주의의 위험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이어서 1933년 2월에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후 일본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강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국수주의가 급격히 고조되면서 외래사상인 불교에 대해서는 ‘제2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비판과 공격이 가해졌다. 1) 市川白弦, 《日本ファシズム下の宗敎》(エヌエス出版會, 1975.) 162p. 市川白弦著作集 第4卷, 《宗敎と國家》(法藏館, 1993년)에 재수록.)

그러한 비판 중에는 불교에 대해 일정한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국가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937년 9월 중국 산서성에서 전사하여 국민영웅이 되고 군신(軍神)으로까지 칭하여진 스기모토 고로(杉本五郞) 중좌의 유고집 《대의(大義)》(平凡社, 1938년)는 ‘종교는 초국가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분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석가를 믿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공자를 존경하는 어리석음을 그쳐라. 우주 유일의 신이자 최고의 진리구현자인 천황을 신앙하라.(제1장) 석존도 그리스도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천황의 적자(赤子)로서 팔굉일우(八紘一宇)에 현현(顯現)된 기관(機關)적 존재이다.(제4장)

천황을 일체의 종교, 사상의 위에 놓고서 군부의 부패를 포함한 여러 불순한 현상을 격렬히 비난하고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스승들로부터 좌선에 열심이라고 크게 칭찬을 받았지만 좌선을 어디까지나 사심을 버리고 존왕(尊王)이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던 스기모토 중좌의 이 책이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던 사실은 일본의 사회상황에 숨이 막혀서 현상의 부정을 부르짖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이건 국수주의이건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스기모토의 영향을 받아 《일본정신 신해(信解)》 등의 책을 써서 ‘정국정토(靖國淨土)’의 이론을 선포했던 사람이 매스컴에 대하여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던 육군성 신문반의 오쿠보 히로카즈(大久保弘一) 대좌였고, 스기모토나 오쿠보와 같은 방향에서 《국체의 신앙과 불교-불교 철리(哲理)의 재인식》을 지어 종래의 불교학 대신 국체를 제일로 하는 불교학을 주창한 사람이 오쿠보의 친동생이자 불교학자였던 이나즈 키조오(稻津紀三)였다. 2) 市川, 전게서 pp.187∼189. 市川은 정국(靖國)정토의 실제 주창자는 이나즈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이나즈는 경도제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고야마 이와오(高山岩男)가 1928년에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등의 동료들과 함께 시작한 ‘화엄경론 윤독회’에 지도자로서 참가하였는데3) 193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하게 초국가주의로 기울었다. 3) 高山岩男, 《京都哲學の回想-舊師舊友の追憶とわが思索の軌跡》(燈影社, 1995.) pp.88∼92. 花澤秀文, 《高山岩男-京都學派の基礎的硏究》(人文書院, 1999.) pp.65∼67. )

그는 패전 후에는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쇼토쿠(聖德) 태자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불교학측으로부터의 불교와 불교학에 대한 변화의 요구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로 불교에 대한 공격과 개혁의 요구가 높아지는 분위기에서 동경대 불교청년회는 불교청년회관에서 빈번하게 공개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1939년부터는 시국에의 대응을 강하게 의식한 기획물 ‘불교사상강좌’ 시리즈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불교청년회의 기관지와 ‘불교사상강좌’ 시리즈에 수록된 논고들을 살펴보면 당시 대표적 불교학자들의 다수가 일본에 있어서 국가와 불교의 긴밀한 관계를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불교를 천황과 국가 아래에 위치 지으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논고 중에는 일본정신의 우수성과 중국에의 불교 전파를 포함한 ‘흥아(興亞)의 대업’을 전적으로 강조하는 시국대연설회의 내용과 같은 히가타 류쇼(干潟龍祥)의 〈중관(中觀)사상과 일본문화〉(1939년 9월)처럼 문부성 교학국 편집의 교학총서에 게재된 것을 약간 수정하여 “특별히 교학국의 허가를 얻어 여기에 싣는다.”고 한 것들도 있었다.그러나 이보다 조금 앞선 1930년대 초까지는 학생도 학자도 편협한 국수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직 많았었다. 4) 이러한 강연과 논문 중에 일본 중심의 관점에서 현실적인 인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중국에 건너가 실정을 보았던 학자들이었다고 생각된다. 거꾸로 말하면 지도적인 불교인이나 불교학자의 다수는 일본이 세계 속에서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과 대학교원의 그러한 자유주의적 태도와 사회주의 지향이 문부성의 책임이라고 비판하는 우익세력의 비난 때문에 문부성은 사상통제를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시작하였다.

1932년에는 국민정신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일본정신의 연구와 교원과 전향 학생의 지도를 시작하였는데 개설 당시부터 위원으로 활약하여 학생 사상선도의 측면에서 문부성의 고문 역할을 한 사람이 일본주의 철학자 기히라 타다요시(紀平正美, 1874∼1949)였다. 교육칙어의 해설인 《칙어연의(勅語衍義)》의 저자로서 교육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郞)의5) 제자인 기히라는 1919년에 학습원대(學習院大) 교수가 되었고 그밖에도 동경제국대학, 동경사범학교 등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5) 井上哲次郞의 사상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비판적 연구를 계속해 온 船山信一의 연구가 뛰어난데, 船山의 기본적 입장은 노작 《明治哲學史硏究》에 대한 비판에 대답한 〈明治哲學における護敎主義→現實主義の三つの論理-實證主義, 現象則實在論, 內面主義=二重眞理說〉(《船山信一著作集 第6卷》 こぶし書房, 1999.)에 정리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사에 대해서는 島튼進, 〈國民的アイデンティティと宗敎理論 -井上哲次郞の宗敎論と《日本宗敎論》〉(脇田晴子·Bouchy Anne編 《アイデンティティ·周緣·媒介-〈日本社會〉 日佛共同硏究プロジェクト》 吉川弘文館, 2000.), 井上의 국가주의적 주장에 리버럴한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반대한 인물도 드물었던 것에 대해서는 末木文美士, 〈佛敎と近代日本② 倫理化される宗敎·井上哲次郞〉(《福神》 3호, 2000. 3.)이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는 맹렬한 일본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헤겔 철학을 자신의 철학으로 하고 변증법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한 일본 최초의 철학자로서 《무문관(無門關) 해석》(岩波書店, 1918년) 《삼원전입(三願轉入)의 논리》(山喜房, 1927년) 《도겐(道元)과 일본의 선(禪)》(문부성 교학국, 1937년) 등을 저술하는 등 불교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 헤겔을 불교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한 인물이었다.

불교 중에서도 화엄교학과 신란(親鸞)교학, (쇼토쿠 태자의) 17조 헌법은 기히라의 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기히라가 크게 관여한 문부성의 《국체(國體)의 본의(本義)》에는 ‘화(和)’를 서술한 부분을 비롯하여 여러 주요 부분에 기히라의 독자적인 불교 이해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당시 일본의 불교계·불교학계가 어떻게 국가에 타협하여 왜곡된 불교를 만들었는지를 엄하게 비판하면서 상세한 연표를 만들었던 이치가와 하쿠겐(市川白弦)조차도 기히라에 대해서는 아주 미미하게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치가와는 1934년 3월 《중앙불교》지 특집의 ‘일본정신과 불교’에 발표한 〈일본정신현상론서설〉에서 기히라 등의 일본정신론은 헤겔을 끌어댄 것으로 많은 부분을 서양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하였고, 1937년 7월의 《선종(禪宗)》지에 발표한 〈도덕의 과잉〉에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 등 전쟁 이전의 단계에 명확하게 기히라를 비판하고 있다.

일찍이 종교의 본질은 도덕을 초월하고 있다고 배웠던 우리들이 이제는 일체의 종교가 도덕에 봉사하여 국민도덕의 보조기관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하야시(林) 전(前)수상은 ‘멸사봉공’ 윤리의 제창자로 유명하지만 이 윤리는 일찍이 우리 나라 고유의 미풍인 ‘구루와(廓)’의 존재의미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하고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임무의 윤리’를 발견한 후 일본정신의 진수가 여기에 있다고 얘기한 모(某)박사의 철학과 상통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1967년에 간행된 《일본 파시즘하의 종교》의 연표에 위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모(某)박사를 기히라라고 밝히는 데 그치고- (주 6) 주 1)과 같음.) -기히라의 중요한 역할을 재검증하고 비판하려 하지 않은 것은 의아스러운 일인데, 이는 아마도 당시까지는 《국체의 본의》의 편찬위원 명단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기히라에 관한 연구로서는 후나야마 신이치(船山信一)의 비판적인 소논문들이 있는 데 불과하다. 현재 《후나야마 신이치 저작집》에 수록되어 있는 이 논문들은 모두 대단히 유익하지만 기히라와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부분밖에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히라는 일본주의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였고 특히 화엄교학을 중시하여 자신의 국체론에 응용하였는데, 그의 주장은 문부성을 통하여 일본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불교학계도 기히라의 불교 이해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보다 자세히 연구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화엄교학은 국가와의 관계가 깊은 것으로 얘기되고 있는데 현재 다음과 같은 생각이 통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① 화엄교학의 완성자 법장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숭을 받았고 화엄교학은 당시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② 쇼무(聖武) 천황의 정치를 뒷받침했던 것은 화엄교학이었고 그가 건립한 동대사(東大寺)는 (화엄교학의) 일즉일체(一卽一切)를 구현한 총국분사(總國分寺)였다.
③ 청나라 말기에는 화엄의 교리가 개혁과 혁명의 이론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④ 대동아 공영권, 대동아 전쟁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교토(京都)학파이며 그들은 그때 화엄교학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들 통설은 문제가 많고 또한 실제로는 복잡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이들 통설의 관련상황에 주의하면서 각각의 설의 타당성에 대하여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기히라의 역할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2. 법장과 측천무후의 관계

법장과 측천무후가 서로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되지만 법장은 측천무후가 중시했던 많은 승려들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 문헌에는 법장이 특별히 존중되었고 정치적으로 활약했다고 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코지마 다이잔(小島岱山)은 불경 번역 기구 내에서 법장의 서열이 그다지 높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법장이 측천무후에게 존경받고 그의 사상이 측천무후의 치세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통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7) 小島岱山 〈《八十卷華嚴經》漢譯原典硏究序說〉(鹽入良道先生追悼論文集刊行會編, 《天台思想と東アジア文化の硏究》, 山喜房, 1992.)

화엄이 측천무후 당시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하는 이론은 화엄교학을 수당(隋唐)을 정점으로 하는 중국 고대사회에 있어서 노예제 지배의 이데올로기라고 본 모리모토 쥰이치로(守本順一郞)의 사관을8)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가 좁은 시대에 적용하여 당나라 초기 태종과 고종 때에 법상(法相)교학을 존중한 것과 달리 측천무후 때는 화엄교학이 존중되어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설명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9) 이것이 내외에 퍼져서 통설이 되었다. 8) 守本順一郞, 〈朱子學の歷史的構造―中國における封建思惟の成立とその特質〉(《思想》 1953. 12.∼1954. 1.) 守本順一郞, 《東洋政治思想史硏究》에 재수록. (주 9) 鎌田茂雄 〈華嚴哲學の根本的立場〉 (中村元編 《華嚴思想》法藏館, 1960.) 이 논문의 주 6)에서 守本의 설을 언급하고 있다. 鎌田茂雄, 《中國華嚴思想史の硏究》(東京大學出版會, 1965.)에 재수록.

가마다의 이러한 학설이 나온 배경에는 일본에서 전쟁중에 화엄교학과 국가의 관계가 강조된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의미가 있던 것으로, 전쟁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한 시기에 나올 수 있는 학설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예과 재학 중에 패전을 맞았던 가마다는 초기의 논문인 〈화엄철학의 근본적 입장〉에서부터 니시다(西田) 철학 등에서 이야기하는 화엄적 절대긍정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절대부정 즉 절대긍정의 일즉다(一卽多)를 이야기하는 니시다 철학의 국가론이 니시다 박사 개인의 황도(皇道)주의에 대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선의를 무시하고 현실의 천황제 국가체제를 긍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한 사실이다.

가마다는 이와 함께 다카쿠스 쥰지로(高楠順次郞)가 일본제학진흥위원회의 철학 공개강연회에서 〈일본정신의 전체적 발양〉이라는 제목으로 화엄이야말로 불교에 있어서 전체성이론으로서 전체주의와 화엄법계를 연결할 것을 강조하고 “국민정신총동원의 시국을 당하여 일본정신의 전체적 발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10) 이상에 대해서는 佛敎思想學會 제16회 학술대회에서의 발표 〈大東亞共榮圈の合理化と華嚴哲學〉(2000. 6. 24. 東北大學)에서 언급하였는데, 발표 후 鎌田說에 대한 守本說의 영향에 대하여 간단한 지적으로 南東信, 〈의상(義相)화엄사상의 역사적 이해〉(《역사와 현실》 20호, 1996.)가 있는 것을 崔鉛植 씨를 통해 알게 되었다.

3. 동대사(東大寺) 총국분사(總國分寺)설

쇼무 천황이 《화엄경》과 《화엄경》의 교주인 노사나불을 존신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천왕과 같은 호법·호국의 신들의 활동을 활발하게 해주는 근원적 위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11) 石井公成, 《華嚴思想の硏究》(春秋社, 1996.) 제1부 제7장 〈聖武天皇の詔勅に見える誓願と呪詛〉

원래 국분사는 ‘화엄사’가 아니라 (《금광명경》에 의거한)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로서 이 점에서는 동대사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동대사 쥬레(壽靈)의 〈오교장지사(五敎章指事)〉를 보아도 알 수 있지만 헤이안(平安)시대 초기까지의 일본의 화엄연구는 화엄을 근원적 일승으로 보고서 일승과 삼승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는 것에 중점이 있었고,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면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12) 위 책, 제1부 제6장 〈日本の初期華嚴敎學〉

동대사를 총국분사라고 하는 설 특히 총국분사로서의 동대사와 각 지방의 국분사(혹은 국분사로 상징되는 각 지방)들이 연화장세계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형태로 상즉(相卽)하고 있다고 하는 설은 옛날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비로소 생겨난 설이었다. 13) 家永三郞, 〈東大寺佛身をめぐる諸問題〉(《上代佛敎思想硏究》 畝傍書店, 1942.)

이러한 설이 강조되게 된 것은 오노 겐묘(小野玄妙)가 1915년에 연꽃잎의 그림이 《범망경》에 의한 것이므로 동대사 대불은 《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범망경》의 교주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한 데14) 대해 동대사의 츠츠이 에이?(筒井英俊)이 총국분사로서의 동대사와 석가를 본존으로 하는 각 지방의 국분사의 관계를 볼 때 연꽃잎의 그림은 일본의 국토를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에 비긴 것이라고 반론한 것을 계기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 사이에서 논쟁이 전개되면서부터였다.15) 14) 小野玄妙, 〈東大寺大佛蓮瓣の刻畵に見ゆる佛敎の世界說〉(《考古學雜誌》 5∼8) 15) 川村知行, 〈蓮瓣と蓮華藏世界圖〉(《日本の古寺美術6 東大寺(古代)》 保育社, 1986.)

그리고 그것이 통설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국수주의자들의 불교 비난에 맞서기 위해 불교학측에서 쇼무 천황의 불교 신앙과 동대사의 국가적 의의를 강조하기 시작하던 쇼와(昭和) 초기 이후부터였다. 한편 패전 이후에는 동대사 총국분사설에 기초한 국분사 상즉설을 사실로서 그대로 받아들인 가운데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동대사와 화엄교학을 국가주의적 성질이라고 비판하는 이론이 제시되었다.

이것은 전쟁중의 국가불교 강조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기본이 되는 전제를 확실하게 검토하지 않은 가운데 다만 평가만을 예찬에서 비판으로 바꾼 이론이었다. 국고를 다 기울여 건설된 동대사가 국가적 성격을 갖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후대의 해석에 기초하여 그 의의를 논하는 것은 당시의 실상과는 괴리된 해석에 불과하다.

4. 청나라 말기 개혁가, 혁명가와 화엄교학

청나라 말기의 지식인인 캉유웨이(康有爲)·탄스통(譚嗣同)·챵타이엔(章太炎) 등이 화엄과 유식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개혁과 혁명을 위한 정치적 주장에 도입했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논의가 중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탄스통은 화엄의 영향 아래 사회의 유기적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바꾸면 속박으로 가득 찬 구래(舊來)의 사회 전체가 바뀐다고 주장하고 실천하다가 처형당하였다.

그들은 극히 관념적이면서 대단히 실천적이었다. 그들의 사상 형성에 있어서 불교가 담당한 역할에 대하여는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연구가 활발하지만, 역사적 측면의 연구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는 것에 비해 불교 교리에 입각한 상세한 검토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남경에서 불교문헌을 교정하여 차례로 출판하면서 탄스통에게 화엄과 법상을 가르쳤던 양원훼이(楊文會) 거사는 난죠 분오(南條文雄)와 교유를 맺고 협력하였을 뿐 아니라 탄스통 이외의 개혁가, 혁명가들의 다수가 일본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청말의 개혁가, 혁명가와 화엄교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개혁가, 혁명가들은 서양 근대와 불교교리를 존중하면서도 절대시하지 않고 중국의 빛나는 전통을 강조하였지만 그 전통은 그들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관념 그 자체였지 근대화되기 직전의 중국의 유교 도덕과 그것에 기초한 생활양식에 그대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당시의 유교가 이민족인 청조의 지배도구가 되어 있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캉유웨이는 《대동서(大同書)》에서 여성 차별의 역사를 강하게 비판하고 불교, 기독교, 유교 모두 여성을 저버렸다고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전체와 상즉하는 ‘분(分)’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가족주의라고 하는 근대화 이전의 미풍양속에 복귀하자고 역설했던 기히라 등의 쇼와기 일본의 화엄교학 이용파와는 다른 점이었다.

5. 전쟁 전의 화엄교학과 동대사의 정치적 이용

화엄교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을 비롯하여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불교계, 불교학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전쟁중의 모습에 대한 반성까지 포함하여 가장 엄격하면서도 자세하게 검토한 사람은 이치가와 하쿠겐(市川白弦)일 것이다. 16) Joaquim은 市川의 노력을 평가하면서도 그 논리의 불철저함을 지적하고 있다. Joaquim, 《天皇制佛敎批判》 제2장 〈戰後佛敎學에における天皇制の問題〉(三一書房, 1998.) pp.88∼89. 市川에 있어서 화엄의 의의에 대해서는 鈴木大拙, 西田幾多郞, 京都학파 등과 함께 논할 계획이다.

그러한 이치가와가 니시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아나키즘과 연결된 형태로 화엄교학을 자신의 사상적 배경으로 하였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화엄은 국가주의에 대하여 양날의 칼과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다. 이치가와는 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불교와 정치의 관계를 파고든 《일본 파시즘하의 종교》 중의 1941년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다카가미 카쿠쇼(高神覺昇)의 《일본정신과 불교》에 의하면 불교는 국가신도에 입양되어 국체와 하나가 된 일본불교이다. …… 불교는 신도(神道)와 함께 일본적이면서 세계적(八紘一宇)이다. 일본에 의한 세계질서 건설의 발판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는 개체와 전체가 하나이며, 일즉일체(一卽一切)·일체즉일(一切卽一)의 국체만다라야말로 무아(無我)의 법에 입각한 총체화의 세계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상보적(相補的) 존재이며 거기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계가 있다. …… 에베 오손(江部鴨村)의 《화엄경강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나라의 조상신은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절대신이고, (중략) 부처도 일다상즉(一多相卽), 주반호융(主伴互融)의 여래이다.

여기에 신과 부처의 일치하는 마음이 있다. (중략) 황국 일본의 팔굉일우와 화엄의 연화장세계는 일치성, 유사성을 지닌 (중략) 제국주의가 아닌 일다상즉, 주반호융의 연화장세계적 팔굉일우이다.

” 황실에 의한 불교의 도입과 17조 헌법의 제정, 동대사 대불전과 국분사, 국분니사의 건립의 사실은 우익과 군부의 폐불운동에 대한 일본불교의 자기방위의 주된 근거이며, 동대사 대불전의 비로자나불을 《화엄경》의 본존불로 보는 것에 의해 화엄사상과 황국사상의 융화 혹은 일치를 말하는 것이 일본불교의 기조가 되었다.

다카가미가 상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직전에 일본을 방문했던 원자물리학자 보어가 주장한 상보성원리를 의식한 것이었다. 동양사상의 훌륭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최신의 서양물리학 이론, 그 중에서도 동양을 중시하는 물리학자의 설을 원용하는 도식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상대성이론의 붐과 이어지면서 동양사상에 통한다고 여겨진 상보성원리가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이 상대주의적인 면을 가진 화엄교학을 동양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새롭게 평가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편 17조 헌법과 화엄사상을 폐불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이 시기부터 정착하였는데, 그것은 이치가와가 이야기한 대로이다. 1942년 12월 즉 진주만 공격이 행해지고 미국, 영국과 전쟁에 돌입한 때에 동경대학 불교청년회에서 간행한 논문집 《국가와 불교》에는 법학의 오노 세이이치로(小野淸一郞)와 함께 하야시야 토모지로(林屋次郞), 미야모토 쇼손(宮本正尊), 하나야마 신쇼(花山信勝), 시바노 쿄토(芝野恭堂), 요쵸 에니치(橫超慧日) 등의 일류 불교학자들이 불교와 국가의 연결을 강조하면서 불교는 충군애국을 가르치는 것임을 논하였는데 “모든 학자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쇼토쿠 태자의 불교를 거론하고” 있었다. 17) 田平暢志, 〈國家の論理と思想の論理〉《近代日本の精神と國家》(文理閣, 1994.) p.156. 한편 橫超의 논문은 학술성을 지향한 높은 수준의 것이다.

이들 학자 중 하야시야가 ‘천황이 곧 국가’라고 하는 구조는 ‘화엄교학을 배경으로 하면 한 점의 모순도 없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18) 이는 역설적으로 불교와 국가의 ‘모순’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엄교학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천황과 국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측에 자신감을 주었다. 18) 林屋友次郞, 〈日本國體と日本佛敎〉(東京帝大佛敎靑年會編, 《國家と佛敎》 1942.) p.148.

다만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쇼토쿠 태자와 화엄을 이용하는 것은 불교 공격에 대한 변명의 재료로서 제시된 범위를 넘어서 성전을 고무하기 위한 열광적인 주장으로 변해갔다.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후의 시기에 니시다 키타로와 고야마 이와오, 니시타니 게이지 등 교토학파라고 불린 니시다 문하의 사람들도 빈번히 화엄교학을 이용한 이론을 전개하여 불교계와 불교학계만이 아니라 학생과 지식인의 눈을 화엄에 향하게 하였는데 이들 니시다와 교토학파에 대하여는 별도의 논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원래 메이지(明治) 시기 이래 불교와 국가의 관계를 강조하는 주장은 많이 등장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그 밖의 대외적인 위기의 시기에는 언제나 그러한 논의가 성행하였는데,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의 국주회(國柱會)를 비롯하여 국가주의적 불교를 지향하는 풍조는 메이지 시기 이래 늘 존속하고 있었다.

일련종(日蓮宗)과 선종, 그 밖의 승려와 거사들의 국수주의적인 활동이 얼마나 성행했었는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쇼와 시기에도 불교의 각 종파는 국가주의화의 길을 걸었으며 특히 1931년의 만주사변 이래 종파별로 황도불교화가 진전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와 불교학계에서 화엄교학과 동대사의 의의를 강조한 것은 1940년경부터였다.

이것은 그때까지는 각 종파가 자기 종파의 교의에 기초하면서 국가에의 협력을 강화하는 정도로 해결될 수 있던 문제가 이 시기부터는 일본의 불교계와 불교학계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격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각 종파의 개창자들이 아니라 일본불교 전체의 시작과 관련되는 쇼토쿠 태자와 쇼무 천황 그리고 동대사의 국가적 의의가 이제까지와 달리 한층 강조되었던 것이다.

특히 만주사변 이래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하나로 하여 일본이 지도하는 형태의 한 덩어리가 되어 구미열강과 대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한편 국내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러 종류의 대립이 심화되어 정부는 그 융화와 통제를 추진하였다.

국내와 국외에 있어서 이러한 일본의 존재양태를 이론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이 추구된 결과 쇼토쿠 태자와 화엄교학, 동대사가 이제까지와 달리 주목을 받게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1930∼40년대에 이르는 대동아 공영권적인 이론과 불교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1931년 9월에 국주회의 신자였던 이시하라 간시(石原莞爾)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시하라는 국주회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창안한 최종전쟁 구상에 기초하여 무리한 군사행동을 일으켰지만,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다치바나 시라키(橘樸)와 카사키 요시아키(笠木良明) 등이 제창한 ‘왕도(王道)’ ‘협화(協和)’와 같은 유교적인 언어로 만주국 건국에 의의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후일 이시하라 등은 이민족 융화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또한 일본에서 만주로 파견된 관료들의 독선에 반발하여 동아연맹론을 제창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의 지도적 지위를 강조하면서도 일본의 강권적 지배에 대해서는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이시하라는 도죠(東條) 육군상에 찍혀 예비역으로 쫓겨났다.

다음으로 1938년 11월 고노에(近衛) 수상이 ‘동아신질서’ 건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때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전향한 미키 키요시(三木 淸)와 후나야마 신이치(船山信一) 등의 니시다 좌파와 하세가와 뇨제칸 등의 좌파 멤버를 포함하는 쇼와연구회가 고노에의 브레인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들은 하세가와와 오자키 호츠미(尾崎秀實) 등을 통하여 중국에 있어서 반일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 제국을 지도하여 구미열강과 대항하지만 문장상으로는 불명확하게라도 중국의 내셔널리즘에도 배려하였고, 일본이 중국에 대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결국 일본의 주도적 입장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면서도 일본은 침략을 행하지 않고 또한 독선적이 아니며, 아시아 제국을 지도하며 일본 스스로도 아시아 제국으로 구성되는 협동체 전체의 룰을 따른다고 하는 ‘동아(東亞)협동체론’을 전개함으로써 동아신질서에 의의를 부여하고 일본의 침략에 다소나마 브레이크를 걸고자 하였다.

다만 현실에 있어서는 침공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일본의 그러한 이상론적 주장이 중국 등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하였고, 협동체론을 작성한 사람들도 그 허구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협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천황을 받드는 일본의 국체라고 얘기한 점은 니시다 철학의 영향으로 보인다. 화엄교학의 직접 영향은 아니지만 니시다 철학을 거친 화엄적인 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쇼와연구회의 멤버가 그러한 형태에 의한 군부와 우익의 견제를 단념하고 공적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 무렵부터 그에 대신하여 논단에 등장한 사람들은 후나야마나 미키 등과 마찬가지로 니시다 문하이면서도 일찍부터 그들을 비판하고 있던 보수적인 교토학파의 젊은층이었다.

1940년 8월 제2차 고노에 내각은 남태평양을 포함하는 대동아 공영권 구상을 발표하였는데 교토학파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시국을 독자적인 ‘세계사적 입장’에서 의미부여하여 일본의 지도성과 전쟁의 의의를 강조하는 한편 우회적으로 육군의 폭주와 황도주의에 브레이크를 걸고자 시도하여 학생들의 공감을 얻었지만 대세는 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히라를 포함한 우익과 육군 세력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고19) 전쟁이 격화되는 것과 함께 발표의 장을 빼앗기게 되었다. 19) 기히라는 황도우익들의 선전지인 《讀書人》의 1943년 2월호에 게재된 좌담회 〈日本的思惟を語る-紀平博士を圍みて〉에 등장하여 그들의 유도에 편승하여 니시다를 비판하고 있으며, 니시다와 교토학파 비판 특집인 같은 해 7월호 ‘特輯 哲學書批判’에서는 기히라는 니시다와 교토학파를 영국과 미국 이상으로 악랄한 것이라고 하는 비판 캠페인에 참가하여 〈‘무’개념의 희롱(‘無’槪念の弄び)〉이라는 논문을 쓰고 있다. 한편 같은 특집으로 대표되는 황도우익들의 문체와 사고법은 그 배후에 있는 콤플렉스까지 포함하여 전후 니시다와 교토학파를 악의 근원으로 보면서 교조주의적으로 단죄하는 사람들 또는 반대로 니시다와 교토학파를 무비판적으로 치켜올리며 찬양하는 사람들과 기묘하게도 일치하고 있는 점이 많다.

그들은 전쟁을 침략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도죠내각의 타도를 획책하였고 전쟁 말기에는 패전을 예견하고 대비책을 검토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대동아 공영권과 대동아 전쟁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미키는 후에 검거되어 패전 직후에 감옥에서 죽었는데 패전 이후 일본주의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노력하였던 후나야마는 미키 등과 함께 전개하였던 협동주의의 사상에 대하여 패전 직후에 “침략전쟁을 조금이라도 침략적인 것이 아니게 하고자 한 논리가 실천적으로는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론에는 전쟁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20) 船山信一, 〈責任について〉(《理想》 1947. 3.) 船山은 이후에도 자주 협동체론의 제약과 실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藤田友治 〈船山信一の天皇觀〉(現代思想硏究會編 《知識人の天皇觀》三一書房, 1995.)

반면 고야마 등의 교토학파는 자기들 이론의 기본적인 정당함을 믿었고 또한 전시에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노력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때문인지 패전 후에도 그러한 반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21) 石井公成, 〈京都學派の哲學と日本佛敎-高山岩男の場合〉(季刊 《佛敎》 49호 ‘特輯 日本佛敎の課題’, 2000. 2.) 다만 高坂正顯은 〈와야 할 시대를 위하여〉(《어느 철학자의 반성》 弘文堂, 1952.)에서 자신은 군부와 우익의 쇼비니즘에 대한 부정이 충분하지 못했던 점에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상황은 이상과 같았다. 쇼와 시대에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군부 특히 육군의 폭주에 의한 경우가 많았고, 이론적인 의미부여는 사건 이후에 비로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한 침략과 일본의 우위성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 가운데 신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다른 나라의 자주성을 조금이라도 고려하고자 한 합리적인 것들은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침략 반대 입장의 사람들이 언론통제를 의식하면서 타협적인 형태로 제시한 것들이었다.

이들에 비하여 아시아의 지배를 기도한 군부와 황도우익과 연결되어 일본정신론을 주창하고 문부성을 통해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기히라 등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6. 《국체(國體)의 본의(本義)》와 화엄교학

1937년 3월 문부성은 《국체의 본의》를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여 교육현장을 비롯한 여러 곳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체의 본의》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일본 국체’ 중의 ‘4. 조화(和)와 성실’의 항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조화(和)는 이성에서 출발하는 서로 독립된 평등한 개인의 기계적인 조화가 아니라 전체 속에서 분(分)을 가지고 존재하면서 이 분(分)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통하여 전체를 잘 유지하는 커다란 조화(大和)이다. …… 각각 그 특성을 가지고서 서로 차이가 있으면서도 그 특성 곧 분(分)을 통하여 본질을 보다 잘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일여(一如)의 세계에 조화되는 것이다.

즉 우리 나라의 조화는 각자 그 특질을 발휘하여 갈등과 절차탁마를 통하여 하나에 잘 돌아가는 커다란 조화(大和)이다. 특성이 있으면서 갈등하는 것에 의해 이 조화는 더욱 위대한 것이 되고 그 내용은 풍부하게 된다. 또한 이를 통하여 개성은 더욱 신장되고 특질은 아름다움을 완성하며 동시에 전체의 발전융창(發展隆昌)을 가져온다.

실로 우리 나라의 조화는 무위고식(無爲姑息)의 조화가 아니라 발랄하면서 발전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커다란 조화(大和)이다. “우리 나라의 조화는 이성에서 출발하는 서로 독립된 평등한 개인의”라고 하는 부분까지 읽으면 그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내용에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국체의 본의》는 그와 같은 개인의 협조관계는 “기계적”인 것이라고 내팽개치고서 “우리 나라의 조화(和)는 분(分)을 수행하는 개인과 전체 사이의 협조에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조화(大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의가 ‘대화(大和)=야마토=일본’을 연상시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 조금 뒷부분에서 《국체의 본의》는 쇼토쿠 태자의 헌법 17조 중 제1조를 인용하여 이것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조화(和)의 대정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일본정신이라는 것은 조화(和)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헌법 17조든 《국체의 본의》이든 조화(和)가 강조된 배경에는 당시 어지러움의 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2) 石井公,成 〈憲法17條が想定している爭亂〉(《印佛硏》第41卷 第1號, 1992. 12.) 한편 헌법17조의 제1조 중 전거가 밝혀지지 않았던 ‘無?’라는 말은 成實師가 존중했던 덕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부터 쇼토쿠 태자의 스승은 삼론종이 아니라 성실종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石井公成, 〈佛敎の朝鮮的變容〉 (鎌田茂雄編 《講座 佛敎の受容と變容5 韓國篇》 ㉺成出版社, 1991.)

《국체의 본의》가 앞의 부분에 이어서 우리 나라는 “상무(尙武)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래와 같이 무(武)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헌법 17조와 공통되는 모습이다.

아울러 이 무(武)는 결코 무(武)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화(和)를 위한 무로서 이른바 신무(神武)이다. 우리 나라의 무의 정신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무는 만물을 살리려고 하는 무로서 파괴의 무가 아니다.

즉 근저에 조화를 가지고서 생성 발전을 약속하는 갈등으로서 그 갈등을 통하여 사물을 살리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나라의 무의 정신이 있다.

전쟁은 이런 의미에 있어서 결코 타자를 파괴하고 압도하고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道)에 따라서 창조의 움직임을 행하는 커다란 조화(大和) 즉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즉 헤겔의 변증법을 의식한 이론에 의해서 일본 정신의 본질은 조화이고 이 조화는 무의 발동을 포함하는 커다란 조화(大和)라는 것이 선언되어 있으며, 국민은 전체 속의 부분으로 규정되어 각각의 직분에 따라 노력함으로써 전체와 일체융화될 것이 요청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헌법 17조의 영향이 강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헌법 17조의 제1조는 분명히 조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은 관인과 유력 씨족들에 대해 주로 상하의 화목을 이야기한 것으로 전체와 부분의 융화라고 하는 사상은 직접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주목되는 것은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가 《국체의 본의》 중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이야기한 앞의 부분에 대하여 “나에게는 중국불교의 화엄철학의 해설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점이다. 23) 松本史朗, 《緣起と空-如來藏思想批判》(大藏出版社, 1989.) p.115.

확실히 여기에는 화엄교학의 영향이 보이고 있으며 그것은 헤겔철학과 연결되어 있다. 《국체의 본의》 중 조화를 이야기한 부분이 니시다 학파가 아닌 기히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국체의 본의》의 편찬과정을 조사한 츠치야 타다오(土屋忠雄)의 연구에24) 기초하여 조사를 한 아지사카 마코토(상坂眞)에 의해 밝혀졌다. 24) 土屋忠雄, 〈《國體の本義》編纂過程の硏究〉(《關東敎育學界紀要》 제5호, 1978. 11.)

아지사카는 니시다 철학과 와츠지(和핊)윤리학에 기초했다고 얘기하면서 화(和)의 사상을 강조하는 우메하라 타케시(梅原猛) 등의 주장에 의문을 품고서 조사한 결과 와츠지를 포함한 《국체의 본의》의 편찬위원들의 저서에는 화(和)는 강조되어 있지 않고, 1935년에 문부성이 국체명징, 국민정신총동원 등을 목표로 설치한 교학쇄신평의회에서 니시다 키타로, 타나베 하지메, 와츠지 테츠로 등은 일본정신을 독선적으로 강조하면서 서양의 학문을 배척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문부성이 니시다와 그 주변의 학자들을 경계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기히라의 논문집인 《지와 행》(1938년) 중 《국체의 본의》 편찬 이전인 1933년, 1934년, 1935년에 쓴 논문 중 《국체의 본의》의 화(和)의 논의와 공통되는 화(和)의 사상이 얘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지사카는 ‘화(和)’는 불교사상 즉 외래사상이었기 때문에 국학계 등의 일본정신주의자들은 오히려 그것을 배제하려고 하였던 데 주목하고 있다.) 25) 삿坂眞, 〈和の思想と日本精神主義 - 《國體の本義》の成立事情〉 (日本科學者會議 思想·文化硏究會編, 《日本文化論批判》 水曜社, 1991.) 한편 이러한 和의 사상을 신라의 삼론종의 사상, 구체적으로는 원효에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袴谷憲昭는 그의 本覺批判의 입장에서 《국체의 본의》비판을 계속하고 있는데 최근의 논술로는 〈無責任體制批判〉(《駒澤短期大學佛敎論集》 제3호, 1997.)이 있다.

이러한 아지사카의 지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다만 그의 논문들에는 《국체의 본의》의 화(和)의 사상을 해명하는 데 중점이 두어져 그 화의 사상이 화엄교학과 연결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에 그러한 연결이 행해진 이유, 기히라와 불교 특히 화엄교학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논하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문제들 특히 마지막 문제를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7. 다카쿠스 쥰지로와 기히라 타다요시의 관계

1937년 5월에 《국체의 본의》가 간행된 직후인 7월에 노구교(蘆溝橋)사건에 의해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8월 문부성 종교국장은 국민정신총동원에 대하여 종교가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문부성이 설치한 일본제학진흥위원회에서는 10월에 철학강연회를 개최하여 다카쿠스 쥰지로(高楠順次郞)가 ‘불교의 전체성 원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타카쿠스는 “우리 나라는 개국의 처음부터 전체주의”였고 “불교의 전체성 원리를 가지고 세계를 지도하는 것이 가능”한데 쇼무 천황의 동대사와 국분사는 그 좋은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理想)의 불국토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실제에 있어서 어긋나게 된 것은 우리 국민의 죄과라는 것을 자각”하고서 “원융무애”로 나아가 “일사불란하게 한 점의 사사로움도 없이 멸사봉공을 기도”하면 “일본정신을 전체적으로 발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강연은 다음해 3월에 문부성 교학국의 《일본제학진흥위원회연구보고 제2편(철학)》에 수록되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보이는 전체주의 예찬은 당시 언론, 사상통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내각 정보부 정보관으로 활약했던 오쿠무라 키와오(奧村喜和男)가 라디오방송 등에서 자유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원리로서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체주의를 찬미하면서 이기심을 버리고 국가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우리 나라에서 옛날부터 많이 나타났던 것”이라고 주장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26) 榮澤幸二, 《大東亞共榮圈の思想》(講談社, 1995.) p.120.

또한 기히라가 철학부분의 주임연구원으로서 이론면의 중심 역할을 하던 국민정신문화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다카쿠스가 임명되었던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도측으로부터의 불교 공격에 대하여 열심히 변명하면서 일본의 불교와 국가의 연결을 강조하고, 불교와 달리 건국의 이념과 어긋나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배제할 것을 열심히 주장했던 다카쿠스는 일본주의자이면서 화엄교학을 중시하였던 기히라와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다카쿠스의 강연 5개월 전에 간행되었던 《국체의 본의》의 기본 원고는 국민정신문화연구소의 국문학 연구위탁이었던 히사마츠 센이치(久松潛一) 도쿄대 교수가 집필하고 그것을 여러 위원의 의견에 기초하여 오가와 요시아키(小川義章) 문부성 조사과장과 히사마츠의 제자로서 연구소 연구원이었던 국문학의 시다 노부요시(志田延義) 등이 수정했다고 밝혀져 있는데,27) 이처럼 《국체의 본의》는 문부성의 방침 아래 국민정신문화연구소가 주도적으로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27) 주 23)의 土屋 논문 및 志田延義 〈‘精硏’時代の辭令をめぐって〉 (《古典と現代》 33호, 1970. 10.), 〈歷史の片隅から-‘精硏’時代の辭令をめぐっての續稿〉(같은 책, 34호, 1971. 5.) 참조. 志田의 회고담적인 기술을 비판하면서 당시의 국민정신문화연구소의 ‘권위’와 ‘중압’을 지적하고 《국체의 본의》의 역할을 이야기한 것으로 柳田知常 〈國體のこと 國民精神文化硏究所のこと〉 (같은 책, 35호, 1971. 10.)

다카쿠스의 주장에는 그 편찬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기히라와 일치된 부분이 많지만 비교적 단순하다. 28) 불교와 전체주의의 관계는 당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문제인 듯 鈴木宗忠, 〈政治原理としての全體主義〉 (東京帝大佛敎靑年會編 《佛敎思想講座 2》, 1939년 6월)에서는 高楠의 이 강연을 언급하면서 서구의 전체주의를 개설하고 있는데, 황도 존중을 전제로 하면서도 당시로서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기술을 시도하고 있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또한 中根環堂, 〈全體主義と禪〉 (東京帝大佛敎靑年會編 《佛敎思想講座 3》, 1939. 7.)도 결론으로서는 ‘聖業관철’ ‘八紘一宇의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당시의 전체주의 유행은 ‘西洋의 眞似’라며 거듭 비판하는 등 高楠처럼 일방적인 예찬은 하지 않고 있다.

《국체의 본의》의 편찬위원에는 불교학에서는 도쿄대 교수였던 우이 하쿠쥬(宇井伯壽)가 참여하였는데, 우이도 화엄을 중시했던 인물이지만 우이가 활발하게 정치적 발언을 한 흔적은 없으며 그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담당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국제적인 대학자이자 인격자였던 다카쿠스는 ‘정의의 전쟁’이라고 하는 개념을 부정하고 만년에는 여성교육에 힘을 기울인 데서 알 수 있듯 오히려 평화 지향의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성장해 가는 근대 일본국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던 메이지인(明治人)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폐불훼석에 대한 위기감이 대단히 강했기 때문에 만년에 국가의 위기와 불교의 위기를 동일시하게 되어 경직된 선동적인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시가미 토모야스(石上智康)는 다카쿠스의 모순된 면을 ‘이해하기 어려움’으로 지적하고 있다. 29) 石上智康, 〈高楠順次郞博士の光と影-佛敎徒のおける權力と眞實の一考察〉( 《佛敎の社會的實踐の硏究》 제3편, 世界聖典刊行協會, 1988.)

8. 기히라 타다요시와 화엄교학

1908년 재야의 화엄학자 가메야 세이케이(龜谷聖馨)는 《우리 국체와 종교》에서 국체론자로 전향한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종교 공격에 반대하여 쇼토쿠 태자, 쇼무 천황 등과 불교의 연결을 강조하였다. 가메야는 노사나불과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의 성격을 동일시하고 화엄·천태의 의의를 이야기한 이외에 1912년 간행의 《교육칙어와 종교》에서는 교육칙어는 화엄, 천태의 삼관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1930년대 후반 이후 불교계, 불교학계측이 주장한 내용들은 이 단계에서 이미 그 내용이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화엄교학은 거대한 교단을 가지고 있는 종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주의와의 접근이 두드러진 일련종, 선종, 정토진종 등과 달리 사회적 영향은 약하였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의 사이에 화엄관계의 개설서, 주석서에 언급한 것은 거의 없다. 유일한 예외는 ‘지양(止揚)’이라는 번역어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던 헤겔 학자 기히라 타다요시였다. 그는 칸토(關東)대지진의 참상을 서양문화 수용의 과오, 나아가 서양문화 자체의 약점이라고 파악하고 당시 대지진의 구호를 위하여 출동했던 군대의 위력과 부흥을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 일본주의를 강화하였다.

1923년 기히라는 주저인 《행(行)의 철학》(岩波書店)의 〈화엄경과 파우스트〉라는 장에서 “산천초목과 국토의 일체중생을 조직한 대만다라로서 천지의 신들과 그 밖의 보살의 대조직계를 표현한 것을 《화엄경》이라고 한다.”고 이야기하여 헤겔과 병칭된 《화엄경》을 칭송하였다. 이후에도 기히라는 여러 곳에서 화엄과 헤겔을 병칭하고 있다.

이것은 ‘진여연기(眞如緣起)에 해당하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법계연기(法界緣起) 즉 《화엄경》을 논리화한 것에 해당하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두 철학을 지양한 칸트, 그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논리화한 것이 헤겔이라고 하는 생각에 기초하여 《화엄경》은 논리로서의 진여연기와 법계연기의 양쪽을 융합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요컨대 기히라는 기본적으로는 헤겔과 《화엄경》을 동일한 수준으로 간주하면서 빈번히 화엄교학의 교판(敎判)의 사상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30) 헤겔을 논할 때 불교 교판의 구조를 이용하였다는 것은 대학원생 시절에 화엄연구회와 함께 헤겔연구회를 조직하여 西谷啓治, 高坂正顯, 久保虎賀壽, 船山信一 등과 연찬을 거듭하여 헤겔연구자로서 데뷔했던 高山岩男의 《ヘ-ゲル》(弘文堂, 1936.)에도 보인다. 화엄과 헤겔의 친근성이 주목되는데, 기히라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후반기에 헤겔에 대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있던 적지 않은 예로는 국수주의 법학자 上衫愼吉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대표인물인 吉野作造이 있다. 당시 사상계의 동향을 생각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내용이다. 長尾龍一, 《日本國家思想史硏究》〈法思想における’國體論’〉 (創文社, 1982.)

《행의 철학》의 경우 쇼토쿠 태자의 화(和)의 사상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으며 화엄교학과 화의 사상은 아직 연결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제12장은 〈국가〉로서 그 말미에는 헤겔에 기초하여 “국가는 …… 구체적인 진리이다.”라고 단언하고 커다란 포인트의 고딕체로 “우리는 일본인이다.”라는 구호로서 이 책을 매듭짓고 있는 것에서 보여주듯이 기히라의 헤겔과 《화엄경》 해석은 실은 그대로 일본국가론, 일본정신론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법계연기, 진여연기로서 논리화되기 이전의 통합된 존재 양상을 《화엄경》에서 발견한 기히라는 그러한 통합적인 입장이 살아 있는 예를 천황, 국체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1930년에 간행된 《일본정신》(岩波書店)으로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東大寺의) 대불은 우주 그것으로서 비로자나 법신이다. 그러나 그 법신은 그것을 넓히면 우주 일체이고, 그것을 좁히면 티끌이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현실태 그것 자체이다. 《화엄경》 내용의 논리화에 의한 법계연기설로 말하면 황족의 후손인 도쿄(道鏡)가 천황의 자리를 넘보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즉 동대사의 대불은 《화엄경》의 부처가 아니라 《범망경》의 부처이었다. ……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여래장(如來藏)연기와 법계연기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다. 곧 이 대불이야말로 실로 황위(皇位)의 움직일 수 없음을 상징한다.

즉 승려인 도쿄가 천황이 되려고 한 사건을 국체의 위기로 중요시한 기히라는 법계연기의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입장이야말로 현실의 참된 모습이지만 이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천황과 같은 덕을 갖추기만 하면 황위를 넘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된다고 얘기하고 있다. 도쿄의 사건은 《국체의 본의》의 편찬위원이었던 야마타 요시오(山田孝雄)의 같은 이름의 책 《국체의 본의》(寶文館, 1933년)에서도 비난되었으며, 신도계가 불교를 공격할 때 가장 유용한 재료였다.

이에 대해서 일본주의자이면서 불교를 중시하였던 기히라는 여래장연기를 일체와 격리된 근원적인 진리존재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난다는 이론으로서 천황의 덕에서 모든 것이 생겨난다고 하는 입장과 동일하다고 보고, 실제의 일본의 국체는 법계연기와 여래장연기의 중간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직분(分)을 지키며 평등한 가운데 천황과 황위는 절대적인 것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며, (동대사의) 대불은 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본래는 ‘중간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지양(止揚)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실은 메이지 시기 이래 계속해서 일본 사상계의 절대적인 제약이었던 〈교육칙어〉에 기초하고 있다. 1932년 4월에 간행된 기히라의 《일본정신과 변증법》(문부성 사상문제연구회 편)에는 그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만일 교육칙어의 말미의 구절에 의거하여 교육칙어를 해석하면 이는 화엄의 법계연기에 상당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도쿄(道鏡)가 황위를 넘본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덕이 있다면 누구든지 군주가 되어 황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로서 헤겔을 유물주의로 바꾸어 놓는 것 혹은 밀교에 있어서 교상(敎相)보다 사상을 존중하는 것과 같아서 그 폐해가 오히려 도의 본체의 힘을 없애버리게 된다. 도의 본체의 힘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에 진여연기의 의의가 있다.

즉 황위는 여래장연기로서 일체의 존재를 그 안에 포괄하고 무량한 공능(功能)을 갖춘 본체가 아니면 안 된다. …… 진여연기는 실로 법계연기로 나아가면 민주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 화엄과 천태의 교리에 의한 본각(本覺)사상이 가장 융성했던 시대 즉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전횡시대에 사회의 상태가 가장 나쁜 상태였는데, 현대의 사상의 상태가 다시 그러한 이론이 유행하는 시대로 생각된다.

…… 곧 나라(奈良)의 대불은 화엄법계의 부처가 아니라 《범망경》의 비로자나불이다. 진여연기와 법계연기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빛을 발산하는 본체로서 삼천세계의 시방을 비추고 있다. 그 빛에 의하여 중생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야말로 법계연기로서 교육칙어의 말미에 있는 구절로 표현된 것이다. 교육칙어를 형편없는 이론 즉 추상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그것이야말로 국체를 그르치는 것이다.

즉 기히라는 앞에 언급한 동대사 본존을 둘러싼 논의를 이용하여 자신의 국체론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교육칙어의 말미의 구절’이라는 것은 “이 도는 실로 우리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유훈으로서 …… 짐과 너희 신민이 함께 모두 복종하고 모두 그 덕을 하나로 하여야 할 것이다.”의 부분으로 기히라가 성제로 추앙하는 메이지 천황이 황실의 선조에 대해 신민과 함께 그 유훈을 지키고, 신민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덕을 하나로 하겠다고 기원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신민 가운데에 천황과 같은 최고의 덕을 갖춘 사람이 포함되면 일즉일체의 법계연기가 되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황과 대등하다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일즉일체는 민주주의로 갈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지적은 “장소(場所)의 논리 또는 사사무애의 철학은 황도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아나키즘의 근거가 되어 버린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입장에서 니시다 철학과 화엄교학을 이용한 전시의 불교학계의 전쟁 책임을 물었던 이치가와의 주장과31) 평가는 반대이지만 인식은 통하는 면이 있다. 31) 市川白弦, 《禪·華嚴·アナキズム》(《自由思想》 5), 市川白弦著作集 第3卷 《佛敎の戰爭責任》에 재수록.

이러한 면에서 화엄에 반국가주의적인 면을 발견한 사람은 전후의 이치가와를 제외하면 사회주의의 유행 등에 나타나는 일본의 현상에 대하여 강렬한 위기감을 가지고 있던 기히라와 고야마뿐이었다. 분(分)의 주장에 있어서도 실은 서양의 개인주의, 서양 근대사회에 있어서의 시민의 의무의 자각이라고 하는 면을 어느 정도 인식한 위에 그 내용을 불교·유교·신도 등의 언어로 표현하여 전통을 강조하면서 일정한 구조로 집어넣으려 한 것으로 실제에 있어서는 서양의 근대를 상당히 의식한 이론이었다.

일본의 불교계, 불교학계가 헤겔학자 기히라를 좇아서 그 주장의 표면만을 불교 변호에 이용했다는 것은 불교계, 불교학계가 근대 일본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인 어용학자가 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지식인 사이에서도 사상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니시다, 타나베, 교토학파 등의 서양철학파의 불교 해석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히라가 중시한 화엄교학이라는 것은 무력에 의한 공격을 정당화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기히라는 일본의 무(武)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화(和)를 끄집어내었다. 1933년 11월에 국민정신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우리 신(神)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쇼토쿠 태자는 ‘조화(和)를 귀하게 여긴다. ……’고 하여 일본이 대승(大乘)에 상응하는 땅이라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황조(皇祖)를 근본으로 하는 신전의 본전에는 반드시 화혼(和魂)을 제사지내며 또한 오궁(奧宮)에 황혼(荒魂)을 제사지낸다. 그 황혼이야말로 이 비판의 힘 즉 의(義)의 결단력을 드러낸 것이다. 이 힘 즉 무(武)의 힘이 없이는 화락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타협적인 것으로 외면적인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 일본의 분(分)은 ‘본분(本分)’으로서 그것은 양적인 분(分)이 아니라 항상 전체의 실현으로서의 분(分)이다. 즉 이것이 ‘의무’의 개념이다.

그리고 1935년의 《일본정신의 유래》(문부성 사회교육국)에서는 “이 커다란 조화(大和)를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곧바로 그 오저(奧底)에 가라앉아 있는 황혼(荒魂)이 곧 움직인다. 이것이 일본의 무력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들의 논고는 《지(知)와 행(行)》(弘文堂, 1938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기의 기히라의 저서와 강연의 여러 곳에 화엄이 언급되어 있다. 32) 和와 武의 면에 대한 강조는 《國體と日本國憲法》(文部省, 1935.)에도 보이고 있고, 《自證過程としての歷史》에도 화엄이 강조되고 있다. 33) 앞의 志田延義 〈‘精硏’時代の辭令をめぐって〉 p.8.

다만 기히라는 신란(親鸞)의 영향도 일찍부터 받았기 때문에 억지 해석이긴 하지만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이 신란의 삼원전입(三願轉入)으로 얘기될 수 있다고 하는 등 신란교학을 국가주의, 일본주의로 왜곡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삼원전입의 논리》(山喜房, 1927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육칙어를 강의할 때에 교사가 ‘너희 신민’은 누구를 가리키느냐고 물어본 데 대해 많은 생도들은 모두 제국의 신민 일반이라고 대답하였는데 한 명의 우수한 생도만이 그것은 ‘나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였다. …… 이 정신이 신란의 가르침에 있다는 것은 ……

이처럼 《탄이초(歎異?)》의 말을 이용하여 〈교육칙어〉에서 ‘너희 신민’이라는 부르는 것을 ‘나’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등의 왜곡이 눈에 띤다. 이러한 주장의 많은 부분이 《국체의 본의》에 수용되고 있다.

이제까지 주목되지 않았지만 기히라는 1938년에 문부성 교학국에서 《국체의 본의》 해설총서 중의 한 권으로 간행한 《우리 국체에 있어서 화(和)》를 펴냈는데 17조 헌법의 ‘사리자통(事理自通)’을 ‘사(事)와 리(理)의 대립을 걸림 없게 하는 사사무애법계의 실현’으로 해석하였고, 화엄의 십현문(十玄門)을 ‘곧 비로자나의 작용’이라고 이야기하는 등 여기에도 끊임없이 화엄교학을 이용하여 국체를 논리화하려 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기히라도 국민정신연구소가 1943년 11월에 국민연성소(國民鍊成所)와 통합되어 교학연성소로 바뀌면서 오직 연성(鍊成)을 주로 하며 관계자들에게 ‘목욕재계’를 열심히 할 것을 요구하고 연구는 부차적인 것으로 하자 이에 반대하였지만 그의 의견은 무시되었다.33)

즉 헤겔과 화엄 기타를 뭉뚱그려 절충하여 과격한 일본주의를 설파하여 젊은이들을 선동했던 기히라조차도 전쟁 말기에는 신에게 매달리는 사람들에 의해 내팽개쳐졌던 것이다. 전쟁이 조금 더 계속되었다면 기히라는 서양풍이 있고 불교 냄새가 강하게 나는 불순분자로 몰려 황도주의자들로부터 심하게 공격받았을 것이다.<끝>이시이 코세이 (石井公成) / 저자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교 철학과 졸업. 박사(문학). 일본 코마자와(駒澤)단기대학 불교과 교수. 저서로 《華嚴思想の硏究》, 논문으로 〈敦煌文獻中の地論宗諸文獻の硏究〉 〈華嚴經問答の著者〉 〈《釋摩訶衍論》の成立事情〉 〈新羅佛敎における《起信論》の意義〉 〈佛敎の朝鮮的 變容〉 〈新羅華嚴敎學の基礎的 硏究〉 〈佛敎東漸史觀の再檢討 -渡來人とその系統の人 のアイデンティティ〉 〈《二入四行論》の再檢討〉 〈梁武帝撰「菩提達摩碑文」の再檢討〉 〈佛敎學におけるコンピュ-タの利用〉 등이 있다.

최연식 / 옮긴이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일본학술진흥회 초청 외국인특별연구원(post-doc.)으로 코마자와(駒澤)단기대학 연수중. 논문으로 〈균여 화엄사상의 연구 -교판론을 중심으로〉 〈원광(圓光)의 생애와 사상〉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통해 본 보조(普照) 삼문(三門)의 성격〉 〈《진심직설(眞心直說)》의 저자에 대한 재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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