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성, 《근대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문학과 지성사, 2000)

1. 본 저작의 의의와 논평의 시각

근대일본의 두얼굴: 니시다철학
허우성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는 근대 일본 철학의 대표자라고 불러도 좋을 사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동안 우리 나라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민족주의적 반일 감정도 한 몫 했겠지만, 니시다 철학 자체가 워낙 난해했던 것도 주요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근대일본철학’이라는 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 마당에 결코 간단하지 않은 니시다 철학을 체계적이고도 방대한 양으로 정리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허우성 교수의 본 저작은 국내 철학계나 정치사상계에 두고두고 읽힐 의미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단순한 민족 감정을 초월해, 니시다의 언어를 통해 동·서양 철학의 문제점들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것은 저자의 철학적 능력과도 연결되는 것이리라. 논평자는 저자만큼 오랜 시간 니시다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던 사람은 아니다. 이번 기회에 무엇보다 니시다 철학을 배우겠다는 자세로 독서에 들어갔다. 그 결과 배움의 기쁨도 컸다. 그만큼 배웠기에 이만큼 촌평이라며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니시다 철학에 관심을 두던 한 독자의 눈에 아쉬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간단하게나마 그러한 아쉬움들을 중심으로 비평적이고 논쟁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차원이라기보다는, 논평자가 느낀 불분명함을 밝히려는 차원에서, 그리고 니시다 철학 자체보다는 니시다 철학을 전개해가는 저자의 서술 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어떻든 본 저술의 긍정적 의미와 가치는 지속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2. 니시다 철학과 불교철학의 관계

먼저 논평자에게 불분명하게 다가온 것은 니시다 철학과 불교철학의 관계이다. 니시다 철학은 불교철학에 기초해 있는, 불교철학의 변용인가? 불교철학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뒤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사유체계인가? 아니면 애당초 불교적 체험이나 아이디어와는 상관없는, 니시다 고유의 철학인가? 이 책에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찾기는 힘들다. 간혹 저자가 단편적이나마 “니시다 철학은 인도의 우파니샤드 사상이나 불교와도 깊이 통한다.”(528)고 말하거나, “니시다의 순수 경험은 …… 불교 무아론의 변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155) 등과 같은 표현을 쓸 때는 니시다 철학과 불교철학의 기본적 연결성을 염두에 둔 듯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불교와는 독립된 니시다 철학의 ‘독창성’에 초점을 맞추고 글을 전개한다.

그러나 과연 이들간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까? 사실 니시다는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나 타나베 하지메(田邊元) 같은 그의 제자들에 비해 불교 사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평자의 눈에는 니시다 철학도 전반적인 대승불교철학을 그대로 닮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닮아 있다기보다는 불교적 체험에 입각해 있으면서 거기에 서구 언어의 옷을 입힌 느낌마저 든다. 논평자의 시각이 지나치게 불교 편향적인 것일까? 가령 저자에 의하면, 니시다는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을 지극히 사랑했고 그의 철학은 내내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의 추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526)고 말한다.

그것은 화엄철학의 ‘성기(性起)’와 얼마나 다를까? 저자가 니시다 철학의 키워드를 “생명, 생명사건, 행위, 한 순간, 일즉다(一卽多), 개성, 자기, 역사, 구원, 논리 등”으로 정리하고(527), “생명의 직접성과 구체성을 기술하기 위해 개발해낸 ‘일즉다(一卽多)’, ‘개물즉일반(個物卽一般)’, ‘일반즉개물(一般卽個物)’ 등의 논리적 독창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532) 말할 때, 그러한 독창성이라는 것이 과연 화엄과 같은 대승불교철학의 범주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니시다의 ‘개물즉일반(個物卽一般)’과 같은 표현을 생경하고 난해한 철학적 신조어라고 말하지만(15), 사실상 그것은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즉리(事卽理)’와 같은 화엄적 용어를 특수와 보편, 개체와 일반 등으로 나누어보는 서양의 존재론적 접근법으로 변용해낸 것으로 본다면 무리일까? 니시다의 ‘생성즉존재(生成卽存在)’의 철학이 그 자체로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불교와의 관련성은 저자가 “행위 하나하나에 절대의 의미,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니시다는 저 한 순간을 ‘현실즉실재(現實卽實在)’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는 불교 화엄의 용어로도 불렀다.”고 표현할 때 부분적으로 긍정되는 듯하다.(105)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각주를 이용해 이렇게 못박는다: “니시다 저작 안에 ‘일즉다’에 대한 사고마저 화엄학에서 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 니시다가 만일 자신의 논리의 싹을 불교 화엄에서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는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133) 이것은 물론 니시다 철학의 독창성을 두둔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러한 단정은 ‘현실즉실재’를 ‘일즉다 다즉일’이라는 화엄의 용어로도 불렀다는 위 주장과 모순되며, 더 나아가 억측인 듯한 느낌마저 든다. 선방을 찾아 참선을 하고, ‘일즉다 다즉일’을 자신의 논리로 말한 사람이 어찌 ‘화엄’을 몰랐겠는가. 자신의 사상을 온통 화엄에서 가져왔다거나, 불교적 체험을 그저 서양철학화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철학이 전반적으로 화엄과 같은 대승불교의 철학적 구조와 상통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오랜 세월 니시다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 니시타니(西谷啓治)를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니시타니는 니시다로부터 비롯된 쿄토학파의 실질적 대표자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서, 니시다로부터 “자기보다 더 자기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수제자이다.1)

이런 니시타니가 니시다의 철학을 다분히 종교철학적 시각에서 규명하는 책을 냈다.2) 그러나 공교롭게도 저자는 니시타니의 이러한 시각을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니시타니는 니시다 역사철학을 외면하고 종교철학적으로만 접근해 들어가는 몰이해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415∼416) 그러면서 니시타니와는 반대로 니시다 철학의 종교적 측면보다는 역사·정치철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전개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 “자기보다 더 자기에 가까운” 제자의 눈에 비춰진 사상이 다분히 종교철학적이라면, 그것을 어찌 스승인들 거부할 수 있는 일이랴. 니시타니가 니시다를 몰이해했다는 비판은 역으로 저자의 니시다 이해에도 문제가 없지 않음을 드러내준다. 니시다의 사상을 종교철학적으로 파악한 니시타니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면, 역사·정치철학 중심적으로 파악한 저자의 접근법도 완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저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니시다 철학 안에 나타난 종교적 측면을 밝히는 데는 다소 소극적이다. 물론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니시다의 ‘삶과 철학’을 다루는 제1장에서는 니시다가 10년 이상을 선방에서 보냈고, 세츠몽(雪門) 선사로부터 슨신(寸心)거사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좌선과 철학공부가 양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는 나름대로 그 길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그의 생애 중에 나타난 선불교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여러 차례 제시한다.(특히 63∼80) 그렇지만 니시다의 생애를 묘사할 때 외에는 정작 그의 철학 내지는 사상이 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나 그의 철학과 불교와의 관계 등은 세심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천황, 국체 등을 강조하는 역사·정치철학 쪽에 무게 중심을 둔다. 이것이 독자로 하여금 니시다 철학을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 채, 민족적 앙금을 여전히 남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저자가 우려하는 대로 “그의 철학 전체를 개인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 종교철학 같은 것”(525)으로만 불러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내적 생명의 입장”(525)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니시다 사상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또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쿄토학파를 불교에 기초한 순전히 종교적이고 구원론적인 관심사의 철학적 재구성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겠지만(526),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기초를 무시했다면 과연 학파 자체가 성립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정말 “니시다가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을 지극히 사랑했고, 그의 철학은 내내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의 추구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 초기 생명 철학에서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은 생명의 회복이면서 해탈의 구현이었다.”(526∼527)면, 그것이야말로 종교적이고 구원론적인 관심사를 반영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는지.

저자의 말대로 “사유의 중점에 ‘불변’의 핵심 같은 것을 두고 부단히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여 새롭게 형성해가는 것이 니시다 글쓰기의 방식이었다.”면(15), 비록 니시다가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더라도, 그 불변의 핵심 같은 것을 불교철학이라고 볼 수는 없겠는지. 저자가 결국 니시다 역사철학의 실패는 “불교전통의 단점을 노출한 것”(482)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사실상―정말 니시다 역사철학이 실패한 것이냐 아니냐와는 별도로―니시다 철학이 불교철학적 구조를 하고 있었음을 자인한 셈이 되는 것이다. “니시다에게 종교적 체험의 입장과 철학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304)고 하더라도, 철학이 체험을 반영한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시다 철학의 종교철학적 접근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니시다 철학의 직접적인 소재가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그의 철학적 기초와 지향이 불교적 구조와 통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만일 니시다가 의도적으로 불교적 철학이 되도록 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런 철학이 될 수밖에 없도록 애당초 틀지어준 체험적 가능성의 정도는 분명히 거론했어야 할 것이다.

3.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자각’의 관계

저자는 니시다의 초기 사유의 핵심인 ‘순수경험’과 나중에 발전된 ‘절대무의 자각’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어떤 때는 연장으로, 어떤 때는 모순으로 보지만, 전반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가령 그가 “(니시다의 초기) 논문 ‘자각주의’에서 발아한 싹을 처음에는 순수경험이나 직접경험이란 이름으로, 나중에는 절대무의 자각이라는 이름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은, 저 염세의 구름을 완전히 걷고 확실성과 만족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다.”(147)라고 말할 때는 전자인 듯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순수경험이란) 개념은 니시다 철학 전체에서 지극이 단명했던 것으로 전집 1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따라서 순수경험이란 개념은 역사철학은 물론이고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조차 설명할 수 없다.”(526)고 말할 때는 분명히 후자에 가깝다. 초기 니시다 철학의 핵심인 순수경험에는 참 실재가 되기 위한 논리가 부족하고(143), 따라서 낭패가 보이며(160), 그 모자란 점을 생각하다가 장소의 논리를 얻게 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것은 저자 자신이 니시다의 평생 화두를 ‘내적 생명’과 ‘역사적 생명’이라는 두 생명에 대한 ‘일관된 논리’ 추구로 정리하고 있는 부분(99) 및 ‘개물즉일반의 논리’야말로 “〈선의 연구〉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대작이며 사후에 발표된 〈장소적 논리와 종교적 세계관〉(1945)에 이르기까지 니시다의 일관된 입장이었다.”(105∼106)는 저자의 말과 어긋난다. 니시다가 평생 일관된 하나의 논리를 추구했다는 평가와 순수경험을 핵심으로 하는 〈선의 연구〉를 가지고는 ‘절대무의 자각’조차 설명하지 못한다는 말은 모순인 것이다. 당연히 ‘순수경험’은 분명 니시다 철학의 출발점이자 기초이다. 출발점이 없는 도착점이 있겠는가.

그 출발점으로 인해 절대무의 자각이라는 일단의 도착점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니시다 자신도 자신의 사상을 보완적 진전―니시다의 표현대로 하면 ‘비연속의 연속’―의 차원에서 해명하고 있지 않은가(187). 나중에 ‘순수경험’이라는 표현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니시다 철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은 일종의 비약이다. 순수경험이 많은 부분 심리적 성격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185∼186), 그렇다고 해서 순수경험을 니시다 철학의 ‘낭패’로까지 말하는 것은 곤란할 듯 싶다. 이것은 저자가 니시다의 글 하나 하나를 모두 자기완결적이자 전체 요약적이라고 말한 것과도 모순된다: “니시다의 논문 하나하나는 대체로 자기완결적이거나 자기동일적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개물이지만, 동시에 그 논문이 집필 당시의 니시다 사유의 전체 모습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전체이다.

논문 한 편이 하나의 논문이면서 전체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개물즉일반에 해당한다.”(14∼15) 더욱이 “사유의 중점에 ‘불변’의 핵심 같은 것을 두고 부단히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여 새롭게 형성해가는 것이 니시다 글쓰기의 방식이었다.”(15)는 저자의 앞선 평가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이다.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자각’은 마치 소극적인 ‘무(無)’와 적극적인 ‘공(空)’의 관계와 같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공과 무가 모순되는 것이 아니듯이,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자각 역시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절대무의 자각’ 없이 어찌 자기 조국의 ‘역사’를 긍정할 수 있었겠는가. 전반적으로 저자가 ‘비연속의 연속’ 중 ‘비연속’에 초점을 둔다면, 논평자는 ‘연속’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싶다. 원시불교와 대승불교를 단순히 ‘비연속’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4. 니시다 사상의 ‘전회’

이러한 문제 의식은 니시다 사상의 ‘전회’와도 연결된다. 과연 니시다에게 ‘전회’는 있는가? 니시다 철학의 전·후기는 연속적인가 불연속적인가? 저자는 니시다 사상이 초기의 ‘내적 생명’ 철학에서 1920∼1930년대에 시대, 민족, 국가, 천황같은 역사·정치적 개념들을 중시하는 ‘역사철학’으로 ‘전회’했다고 본다.(6장)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니시다가 내적 생명의 추구에서 얻어낸 자각의 형식을 역사적 생명의 활동에까지, 그리고 시대나 국가 등의 비의식적인 현상에까지 적용하게 된 것을 필자는 니시다 철학의 전회(turn)라고 불러 보았다.”(112); “제3위를 차지했던 역사적 행위가 존재론적으로 상승하게 되는 것을 필자는 니시다 철학 내의 가장 중요한 변화로 보아서 이를 전회라고 불렀다.”(340) 저자에 의하면, 니시다에게 ‘전회’란 ‘개물즉일반’이라는 자각의 형식의 대상이 ‘내적 생명’에서 ‘역사적 생명’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내적 생명 철학에 대한 역사적 행위의 존재론적 상승인 것이다. 그러면서 니시다 철학의 허점, 전기와 후기 사상의 비연속성을 여기서 본다.

저자는 말한다: “내적 생명의 한 순간이 응용되거나 연장되어서 역사적 생명의 한 순간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성격을 달리하는 듯한 두 생명이 등가(等價)의 생명 사건으로 불릴 수 있을까?”(114) 두 생명은 등가적이지 않으며, 전기와 후기 사상은 비연속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니시다가 ‘하나의 논리’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다는 앞선 평가와 어긋난다. 그렇다면 니시다에게 두 생명은 연속적이되, 시기에 따른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니시다의 ‘역사철학’은 화엄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중 ‘사’에 대한 강조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물론 이와 대립된 사를 우선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화엄의 사는 이에 즉(卽)한 사이다. 그 사로부터 이로 나아간 것이 니시다의 입장인 것이다.(298) 그러한 사에서 역사적 신체성, 일본의 국체 등 구체적 사실에 대한 강조도 나오게 되었으니(406∼415), 니시다 철학의 ‘전회’를 정말 ‘전회’로―불연속적으로―파악하기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역사철학 ‘이전’의 역사와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했더라면 ‘오해’를 덜었으리라. 논평자의 앎이 짧은 데서 오는 오해라면 오히려 다행이겠다.

5. 저자와 텍스트의 관계

저자와 텍스트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저자는 니시다의 철학을 텍스트로 다루면서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주체인가? 아니면 스스로 니시다가 되어 서술하고 있는가? 물론 어떤 경우라도 가능한 일이고, 모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자가 니시다 철학을 좀더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객관화시켜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크다. 때로는 니시다의 다양한 언어들이 해석되지 않는 채 뒤섞여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러한 문제점은 특히 2장에서 두드러진다. 저자는 이것을 니시다 철학의 난해성 탓으로 돌렸지만(12), 이 책이 니시다‘의’ 책이 아니라 니시다‘에 관한’ 책이라면, 저자에게는 저자 자신의 눈으로 그만큼 체계적으로 정리해낼 사명과 의무가 있었으리라. 특히 저자가 “니시다 철학의 정수이고 이 책의 핵심”이라고 규정한 제2장은 더욱이나 니시다의 책들을 웬만치 읽고 니시다의 사상을 어지간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이해에 근거해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써놓았다. ‘개물즉일반’, ‘절대무의 장소’ 같은 니시다 철학의 종점을 출발점 삼아 이곳 저곳 소요하며 쓰고 있는 바람에, 니시다 철학의 종점에 도달해보지 못한 사람은 애당초 잘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어디까지 ‘니시다’이고 어디까지 ‘허우성’인지도 종종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니시다의 논리가 추론식 “포섭논리가 아니라, 창조와 힘으로서의 논리”(116)라지만, 그러한 니시다의 논리를 추구해가는 저자의 논리는 추론식 포섭논리였어야 한다는 말이다. 길희성 교수가 이 부분을 삭제하거나 그렇지 않으려면 대폭 수정해서 맨 뒤로 옮기라 제안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13)

그리고 니시다식 용어들에 대한 개념정리 없이 글을 전개하는 것 역시 적지 않은 문제들을 남긴다. 절대무, 절대모순, 자기한정, 장소, ‘자기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본다.’ 등의 용어나 언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체계적인 정의를 하지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 글을 전개한다. 저자에게는 너무 당연한 개념일지 모르지만, 독자로서는 그 말 하나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게 되어 있다. 책의 분량이 제법 되어서도 그렇겠거니와, 분명한 개념 정리가 부족한 바람에 ‘독서’가 더욱 쉽지 않았다. 잘 짜여진 하나의 장편소설이었다기보다는 내용적 연결성을 지닌 단편소설들을 여럿 취합해놓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6. 맺으며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비판적 촌평을 늘어놓았다. 마무리하며 다시 보니, 이 촌평 역시 얼마든지 비판의 대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절하게 든다. 그러나 어쩌랴. 제한된 시간과 지면 탓을 해야 할 밖에. 저자가 이 책 어디선가 니시다에 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쌓인 후 다시 써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논평자도 마찬가지이다. 니시다 사상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

책상머리에 〈西田幾多郞全集〉부터 들여놓아야 할는지……. 오늘날 동양사상은 일본이 대변하고 있다. 그 일본에서 발생한 철학을 모르고서 어찌 동양을 알겠으며, 또 동양을 대하는 서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랴. 근대 일본의 대표적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니시다에 대한 전체적인 정리는 필수불가결한 일일 것이다. 의도적으로 논쟁문이 되도록 꾸며보려 했지만, 사실 이 책의 가치는 견고하다.

니시다의 철학으로 이만큼 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일지 내심 공감이 가고도 남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논평자에게 이상의 궁금증들이 떠오르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분명하게 읽혀졌다면 금상첨화였겠다는 마음에서, 그저 아쉬움만을 담아보았다. 이제 우리 나라에도 본격적인 근대 일본 철학에 대한 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기쁨이 크다. 당연히 저자의 노고와 이 책의 의의는 이 촌평 안에 다 담기지 않는다. 이곳에 담을 수 없을 내용들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이찬수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1986),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으로 석사학위를(1989), 종교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997). 지은 책으로 《인간은 신의 암호》 《종교신학의 이해》 《한국종교문화연구 100년》(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화엄철학》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지옥의 역사》 등이 있으며,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적 논리’ 소고〉 〈니시타니 케이지의 불교적 허무주의〉 〈卽非의 논리·回互的 관계·禪問答〉 〈요한복음의 불교적 해석〉 등의 논문을 썼다. 현재 강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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