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현대사회와 불교윤리

1. 지킬 수 없는 계율 받기?

계율을 받는 것은 계율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삿된 마음을 일으켜 부끄러운 짓을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하지만, 계율을 받는 행위는 계율을 지키겠다는 개인적 다짐에서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또한 사회적 신분부여의 공식적 의례 역할을 맡아 왔다.

그래서 자신이 불자임을, 사미임을, 사미니임을, 비구임을, 혹은 비구니임을 사회적으로 공인받기 위해선 각각의 신분에 상당하는 계율을 받는 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개인적 수행에 있어서, 불교 공동체의 공식적 유지에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도저히 지키기 어려울 수도, 심지어는 부당하게 판단될 수도 있다면, 이를 어찌 대처해야 할까?

≪사분율비구계본(四分律比丘戒本)≫에 의하면, 비구는 서서 대소변을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당시 인도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 금계(禁戒)는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당시 인도 승려들은 가사를 둘렀고, 그때 하체는 치마를 두른 형상이 된다. 따라서 비구가 서서 소변을 본다면 그는 마치 치마처럼 가사를 밑으로부터 들어 올린 후에야 소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인도에는 화장실도 없었으니 한데서 두 다리를 드러내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 수행자에게 어울릴 리 없다. 그래서 금계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의 상황은 이와 전혀 다르다. 한국의 승려들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생활하며, 그리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다. 이런 한국의 승려들에게 앉아서 소변을 보라는 계율은 보기에 따라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앉아서 소변을 보라는 계율은 조금 불편하지만 지킬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와 장소가 변함에 따라 도저히 따르기 어려운 계율이 있다. ≪사분율비구계본≫에 따르면 비구는 금전을 사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비구가 금전을 사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지킬 수 없다면 그 계를 어찌 받는다는 말인가? 지킬 수 없는 계를 받고서 '비구'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신분을 획득하는 것은 자기기만을 넘어선 사회적 사기행위로 평가될 수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계율도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인도는 남녀가 불평등한 사회였다. 남녀가 해야 할 일이 구별되던 사회였다. 하지만 불교는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볼 때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인 출가 수행을 여성에게도 허락했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불교가 얼마나 평등주의적인 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제 아무리 평등주의를 지향하더라도 당시의 시대적 제한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비구니를 제약하는 계율이 생기게 된다.

비구니가 (아무리 나이가 많거나 계를 받은지 오래 되었다 할지라도) 새로 계를 받은 비구를 보면, 마땅히 일어나 나가서 맞이하고 공경스럽게 예배하고 인사를 드리고 앉으시라고 권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예외사항을 제외하고는 바일제(波逸提) 죄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비구니가 나이나 법랍(法臘)에 상관없이 새로 계를 받은 비구에게 예를 올려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여자라는 것뿐이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공경받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규율은 분명하게도 불평등하다. 21세기의 평등사상을 교육받은 남녀들이 비구계와 비구니계를 받음에 있어서, 이러한 불평등한 조항이 있음을 알고도 계를 받는다면,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 글에서 필자는 비구계, 보살계 등의 불교 계율이 갖는 성격, 그것이 도전을 받게 되는 이유, 그 도전이 갖는 성격, 그 도전에 대한 불교계의 반응 양상, 그러한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규율을 요구하는 동시에 규율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하는 필자의 욕구이다.

2. 계율과 법률, 그리고 불복종

2.1. 계율과 법률


불교는 고통의 인식에서 출발해서 고통의 소멸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은 개개인의 어리석음이라고 파악된다. 따라서 불교에서 다스려야 할 것은 마음이다. 하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집단을 이끌어감에 있어서 마음을 규제하자는 것은 규제의 포기나 다름없다. 이런 이유로, 마음의 다스림을 중시하는 불교라 할지라도 그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행위를 규제할 수 밖에 없다.

≪사분율(四分律)≫에 나와 있는 예를 살펴보면, 계율이 갖고 있는 행위 규제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위성(舍衛城)에 있을 때 가류타이(伽留陀夷) 비구가 자위를 통해 음욕을 해소한 일이 알려지자 고의적인 자위를 금하는 계율이 정해졌다. 하지만 음욕을 이기지 못한 가류타이가 여인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는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알려지자 다시 고의로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일을 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욕을 이기지 못한 가류타이는 다시 여인들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는 여성의 성기를 거론하는 음담을 통해 성욕을 풀려 하였다. 이에 여인들에게 음담을 금하라는 계율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도 성욕을 조절할 수 없었던 가류타이는, 여인들을 자신의 방으로 끌어들이고는 자신의 수행을 칭찬하면서, 그들의 몸을 공양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음욕 때문에 여인네들에게 몸을 공양하도록 요구하지 못하게 하는 계율이 생기게 되었다.
만약 마음을 규제하기 위해서라면, 위에서처럼 네 번에 걸친 계율의 제정이 있을 필요가 없다.

'음심을 가지지 말라'는 하나의 조항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고 따라서 객관적으로 규제할 수 없다. 그래서 승단이라는 조직의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계율이라는 행위 규제가 요구된다. 마치 국가라는 조직의 질서유지를 위해서 법률이라는 행위 규제가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불자들 역시 계율이 가지는 이러한 성격을 파악하고 스스로 계율을 법률에 비유하였다. ≪사분율≫의 첫머리를 열면서 계율을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게송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왕을 세우는 이유는 세상에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사람들이 [왕을] 추대하는 것은 예로부터 항상 그러한 법도이다.죄를 범하는 자는 법[의 대가]를 알게 되며 법을 준수하는 자는 성공하게 된다.계율도 이와 같으니, 왕이 그러하듯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다스린다.

그래서, 한 국민이 법에 따라 국가의 보호를 받음과 동시에 처벌을 받듯이, 한 비구는 비구계에 따라 승단의 보호를 받음과 동시에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법이 부당하다고 판단 될 때 인간은 법에 저항하고 그것을 폐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에 의해 제정된 계율에 있어서의 사정은 어떠한가?

2.2. 법률과 불복종

시민들은 잠시 동안이라도, 아니 눈곱만큼이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가에게 결코 맡겨서는 안 되는가? [그렇다. 만약] 맡겨야만 한다면 왜 모든 사람이 양심을 가지겠는가? 나는 우리가 먼저 사람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복종해야 한다고 본다. 법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은 옳음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내가 유일한 의무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양심에 따른 시민 불복종을 지지하는 헨리 도로우(Henry Thoreau, 1817-1862)의 말이다. 법률이 정의롭지 못할 때 시민이 양심에 따라 불복종하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법률이 정의로운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개인의 양심'에 두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도로우 이후 정당한 불복종에 대한 논의가 세밀해지면서, 그 정당화의 근거가 '양심(conscience)'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넘어가고, '양심적 거부(conscientious Refusal)'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구분된다. 그래서 종교적인 양심에 의한 불복종은 때로는 시민 불복종으로 간주지 않기도 한다.

시민 불복종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법률이 그것이 제정된 정신(혹은 원칙)에 합치하는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이 법의 정신에 불합치된다고 여겨질 때 그 법률에 불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의 합당성과 부당성에 대한 판단을 '개인'이 스스로 내린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

시민 불복종을 정당화하거나 제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정의로운 법률이란 자신이 제시한 정의의 원칙들(the principles of justice)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는 존 롤즈(John Rawls)는 1)어떤 법률이 평등한 자유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liberty)이나 기회균등의 원칙(the principle of fair equlity of opportunity)에 위배될 때, 2)그 부당한 법률을 지지하는 다수에게 부당한 법률의 폐기를 충분히 호소했을 때, 3)그 법률에 대한 불복종이 효율적이라고(그 법률의 존재보다 더 큰 해악이 그 불복종에 의해 초래되지 않는다고) 판단 될 때, 시민의 불복종이 정당화된다고 말한다. 반면, 불복종의 정당화를 법률의 원칙에 호소하는 롤즈와는 달리,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행위의 목적에 호소한다.

그는 때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실로부터 불복종이라는 규칙 위반이 그 목적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불복종, 곧 규칙의 위반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목적이란 단지 양심에서 비롯되었다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성서에 기반한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어떤 임신중절 전문병원에 들어가 흡인 임신중절 기구를 손상시킨 사람의 행위는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시민 불복종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평가한다. 아울러 그는 모든 폭력을 싸잡아 나쁜 것으로 비난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폭력 역시 시민 불복종의 수단으로 채택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현대의 시민 불복종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면서, 불교의 계율과 그것에 관한 불복종을 다루고자 하는 필자의 관심을 끄는 특별한 점이 두 가지 있다.

그 첫째는 어떤 법률이 부당한지의 여부는 '개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거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인용한 도로우의 말도 그러하거니와, 시민은 법에 충성을 해야 하지 그 법에 대한 어떤 특정한 사람의 견해에 충성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그 법이 요구하는 바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신중하고 합리적인 입장에 따라서 나가는 한 그는 부당하거나 불공정하게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의 말에서도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시민 불복종이 법체계 안에서 허용될 뿐 아니라 법체계의 개선을 위해 꼭 요구되는 도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롤즈가 시민 불복종이, 정의(定義)상 불법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헌법 체계를 안정화시키는 도구들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듯이, 시민 불복종은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imperfect procedural justice)에 불과한 입법과정이 산출하는 부작용을 견제하는 도구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필자의 불교의 계율에 대한 질문은 더욱 구체화 된다. 불교에서는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계율에의 불복종이 용납되는가? 불복종과 계율체계의 개선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질문들이 각각 긍정되건 부정되건 그 근거는 무엇인가?

3. 계율에의 불복종

3.1. 마음의 자유와 행위의 자유


경상도 해인사(海印寺) 조실(祖室)로 계시던 어느 날 경허 스님은 석양에 어떤 만신창이가 된 광녀(狂女)를 데리고 와 조실 방에서 같이 식사하고, 같이 주무시고 하였다. ... 만공 스님이 며칠 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경허 스님은 광녀에게 팔을 베게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에게 다리를 척 걸친 채 코를 골고 주무시는 게 아닌가?

단절되었던 한국 선불교의 등불을 조선말에 다시 밝혔던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에 관한 유명한 일화이다. 하지만 이 일화는 경허 스님의 파계를 질책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광경을 본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은 자세히 보니, 그 여자는 코도 눈도 분간할 수 없었고, 손가락도 떨어져 없으며, 걸친 옷은 고름과 오줌에 쩔어서 올이 안 보일 정도인데다 송장 썩는 냄새의 악취까지 풍겨 도저히 코를 들 수조차 없는 문둥병 환자였다. ... 열 번을 고쳐 생각해 보아도 이 스님의 법력(法力)을 따를 수가 없구나 하여, 경허스님의 법력에 존경심이 깊어졌다고 찬탄하고 있다.

분명히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경허 스님은 비구계 가운데 가장 중한 금계인 하나인 음계를 범한 듯하다. 사바라이(四波羅夷)의 하나로 분류된 이 금계를 범하면 승단에서 쫓겨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율은 마음이 아니라 행위를 규제한다.

그렇다면, 행위에 근거해 판단할 때, 비구계에 의하면 경허 스님은 승단에서 축출당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승단에서 축출당하기는커녕 그 법력의 뛰어남을 찬탄받고 있다. 이는 불교 안에서 개인적 판단에 따른 불복종이 용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례에 있어서 개인적 판단에 따른 계율에의 불복종이 정당화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불복종이 깨달음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곧 그의 행위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교 윤리 체계 안에서의 계율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불교 윤리는 고통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고통의 소멸을 목적으로 한다. 선과 악은 행위 자체의 본질적인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통을 낳는지의 여부에 의해서 결정된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불교의 목표인 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행위가 불교 안에서 처벌 받을 수는 없다. 불교 안에서 계율은 고통의 예방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것은 한계를 지닌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계율이 고통의 소멸이라는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버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경허 스님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계율에의 불복종은 굳이 종류를 따지자면 '양심적 거부'에 가깝지 '시민 불복종'이라 분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불복종은 계율이 제정된 원칙 혹은 정신에 호소하지 않고 그것과 별개인 깨달음이라는 요소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사분율≫에서는 비구계 제정의 목적이 열 가지로 소개되고 있다. 1)승단을 화합토록 하며, 2)승단으로 하여금 즐겁게 하며, 3)승단으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며, 4)믿지 않는 자로 하여금 믿게 하며, 5)이미 믿는 자로 하여금 더 믿게 하며, 6)포악한 자를 바로잡으며, 7)참회하는 자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고, 8)현재의 번뇌를 끊게 하며, 9)미래의 번뇌를 끊게 하며, 10)불교로 하여금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경허 스님의 불복종은 그것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이기에 용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비구계 제정의 정신과 많은 점에서 어긋난다. 경허스님의 행위는 논란을 야기함으로써 승단을 화합에 저해요소가 될 수 있으며, 그 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이교도로 하여금 불교를 비방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미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으며, 많은 승려들이 그 불복종을 모방할 때 불교가 하여금 이 세상에 오래 머물도록 하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마치 양심적인 거부가 관용의 대상은 될 수 있지만, 그 법률 체계의 개선에는 도움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허 스님의 예에서와 같이 깨달음에 호소하는 불복종은 용납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불교의 계율 체계의 개선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불교 계율 체계의 불안을 조성하고 궁극적으로 체계의 붕괴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또한 불교의 깨달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특성상, 경허 스님이 보여준 것과 같은 불복종은 소수의 권위자들에 의해서만 범해질 수 있으며, 그것을 용납하는 것도 다수의 깨닫지 못한 자를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3.2 계율, 합리적으로 생각해보기

그러면, 계율이 제정된 원칙 혹은 정신에 호소하는 불복종의 경우는 어떠한가? 용납될 수 있는가? 용납된다면, 해당 계율은 개정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주로 사회의 변화에 따른 불교의 적응문제로부터이다.

화폐의 사용없이 비구의 활동이 불가능한 현대사회에 있어서 화폐의 사용을 금지한 계율은 불교로 하여금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한다는 계율 제정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는가? 남녀 평등 사상을 배우며 자란 비구, 비구니에게 팔경법(八敬法)을 강요하는 것은 승단을 화합토록 하기 위한다는 계율 제정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은가?

그렇다면, 불교로 하여금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승단을 화합토록 하기 위해 화폐 사용에 관한 계율을 어기거나 남녀평등에 어긋나는 계율에 불복종하는 비구, 비구니를 처벌해야 할 것인가? 만약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 불복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그 불복종이 정당화된다면, 비구계와 비구니계는 개정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지키지 못할 계율을 지키겠다고 부처님 전에 맹세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면 말이다. 특히 국가의 법률의 경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부터 이미 정해져 있기에 개인에게 법률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반면, 승단의 경우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가입하기에 계율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선택권이 보장된다.

 따라서 동의할 수 없는 규율을 지킬 것을 스스로 약속하고서는 그것에 불복종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행동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계율에의 불복종은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부처님께서 가섭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한 이여, 이렇기에 비구와 비구니, 남신도, 여신도는 마땅히 불교를 보호해야 한다. 불교를 보호해서 얻는 과보는 광대하여 한량이 없다. 착한 이여, 그러므로 불교를 보호하는 신도라면 불교를 전하는 비구를 보호하기 위해 칼과 몽둥이라도 들지어다. ... 착한 이여, 그러므로 나는 이제 계율을 지키는 비구, 비구니가 칼과 몽둥이를 든 신도들과 동반하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국왕이나, 대신, 재력가, 신도 등이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칼이나 몽둥이를 들었다면, 나는 그들을 '계를 지키는 자라 부를 것이다. 비록 칼과 몽둥이를 들었더라도 목숨을 죽이는 일은 삼가야 하니,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계를 지키는 자라 부를 것이다.

≪열반경(涅槃經)≫의 구절이다. 계율 제정의 목적이 불교의 보호에 있으니,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계율을 어길 수도 있다고, 강하게 해석하면 살인도 허가될 수 있다고 읽히는 대목이다. 이렇게 계율에의 불복종을 허락하는 것은 대승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대승의 과감한 주장에 비하면 너무 미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시불교나 남방불교에서도 역시 비구계 가운데 '사소한 계율(小小戒)'은 상황에 따라서 폐기해도 된다고 허락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아난아! 너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보호해주는 방벽이 없을 것이며, 지녀야 할 바를 상실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성불한 이래로 말해준 경전과 계율이 너희를 보호해줄 것이며, 너희가 지녀야 할 바이다. 아난아! 오늘부터 비구들이 사소한 계율은 포기해도 된다고 허락하겠다.

≪장아함경(長阿含經)≫의 구절이다. 계율에 의지하되 사소한 계율에까지 집착하지는 말라는 말씀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사회적 상황이 분명 변할 것이기에, 사소한 계율에 얽매여서 사회적 상황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누를 범하지 말라는 당부이시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계율의 개정은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부처님 당신께서도 경우에 따라, 대상에 따라 계율을 개정하셨지, 한 번 정한 계율을 지키느라 다양한 상황의 변화를 무시하시는 법은 없으셨다.

약을 두되 7일 기한을 넘지 말라는 계율의 제정과정을 살펴보자.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실 때 비구들이 가을철의 풍병(風病)으로 고생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1) 비구들이 병이 났을 때 다섯 가지 약, 곧 소락(?), 기름(油), 생소(生?), 꿀(蜜), 엿(石蜜)을 먹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때 아닌 때는 먹지 못한다는 계율 때문에 약을 먹는 것이 소용 없자, 2) 비구가 병이 났으면 때 아닌 때에도 다섯 가지 약을 먹도록 허락하였다.

하지만 약이 남아 버리게 되자, 3)병든 사람이 남긴 음식을 간병하는 이가 풍족히 먹었거든 그 나머지 만족하게 먹지 못한 이들이 마음대로 먹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래도 약이 남아 버리게 되자, 4)밥 남기는 의례(殘食法)를 행하고 나서 보관하여 먹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필릉가파차(畢陵伽婆差)라는 비구가 약을 잔뜩 보관하고 있는 것을 속인들이 비난하자, 5)비구가 병이 났을 때 먹고 남은 약을 7일 이상 먹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원래 비구는 걸식을 하므로 주는 대로 받아 먹어야지 어떤 것을 찾아 먹을 수 없다.

하지만 병이 들면 약을 일부러 찾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비구가 때 아닌 때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약의 경우에는 때 아닌 때 먹도록 허락하고 있다. 또, 음식을 남겨 보관했다가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약의 경우 보관했다가 먹도록 허락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관함이 지나치자 그것을 제한하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불교에서는 상황에 따라 계율을 열고(開) 닫는(遮)다고 말한다.

4. 계율과 진리

4.1. 진리 고치기


부처님 당신께서 상황에 맞추어 계율을 개정하셨고, 또 당신이 열반에 드신 후 사소한 계율은 버려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계율에의 불복종과, 계율의 개정은 불교 안에서 단단한 정당화의 근거를 마련한 듯하다. 하지만, 그게 말같이 쉽지가 않다.

아난이 가섭에게 여쭈었다. 제가 부처님께 직접 듣기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사소한 계율을 없애고자 한다면 그래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섭이 물었다. 그러면 자네는 무엇이 사소한 계율이라고 생각하는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무슨 말인가? 부처님께 여쭙지 못했습니다. 왜 여쭙지 못하였는가? 그때에 부처님께서 몸이 불편하시기에 누가 될까봐 그랬습니다. ...가섭이 다시 아난을 꾸짖었다. 만약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가르침(衆學法, Sk. sik?kara?iya)'을 사소한 계율이라고 하면 다른 비구들은 네 가지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 Sk. pratidesaniya)도 사소한 계율이라고 주장할 것이고, 만약 우리가 네 가지 바라제제사니까지가 사소한 계율이라고 인정해 주면 다른 비구들은 바일제(波逸提, Sk. pyattika)도 사소한 계율이라 주장할 것이고, 우리가 바일제까지가 사소한 계율이라고 인정하면 다른 비구들은 니살기바일제(尼薩耆波逸提, Sk. nai?sargikapyattika) 도 사소한 계율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갑자기 네 가지 주장이 생길 것이니 무슨 수로 그것을 결정하겠는가? 가섭이 다시 말했다. 만약 사소한 계율이 무언지도 모르고 멋대로 없앴다가는 외도들이 비난하기를, '석가모니의 제자들이라니, 가르침이란 게 꼭 연기(煙氣) 같구나. 스승이 있을 때에는 지키더니 스승이 열반에 들자 다시는 배우려 들지 않는다' 라고 할 것이다.

가섭이 다시 대중 스님네께 큰 소리로 아뢰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르침은 이미 결집되었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지 않은 것이라면 멋대로 제정하지 말 것이고, 부처님께서 이미 제정하셨다면 어겨서는 안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를 열심히 배워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신께서는 사소한 계율은 버리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를 토의한 비구들이 내린 결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르침은 이미 결집되었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지 않은 것이라면 멋대로 제정하지 말 것이고, 부처님께서 이미 제정하셨다면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부처님 당신께선 계율이 불완전함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살아 계신 동안 끊임 없이 계율을 개정하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사소한 계율은 버리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왜?

여기에서 불교 계율, 아니 불교 윤리 전반이 갖고 있는 특징이 드러난다. 불교 윤리는 진리에 호소한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윤회와 업보 사상이 진리라는 것에 의존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이라는 것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부처님의 파악이 진실임에 의존한다. 따라서 불교도에 있어서 부처님은 진리의 화신이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은 진리여야 한다.

그것은 불완전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국가의 법률과는 달리 불교 계율의 경우 그 개정이 어렵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시민 불복종은 법률에 결함이 있다고 믿기에 행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용납되는 것도 법률에 결함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그런 이유로 시민 불복종이 법률의 결함을 보완하고 법률 체계로 하여금 더 성숙해지도록 만들어주는 유용한 도구라고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계율은 그렇지 못하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진리인 계율에의 불복종은 정당화되기 어려우며, 설사 그것이 묵인되더라도 그것은 계율의 개정에까지는 나가지 못한다. 진리는 고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4.2. 진리 만들기

그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 앉으셔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처음 성취하시고는 보살의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곧 계율)를 최초로 제정하셨다. [이 바라제 목차는] 부모님과 스승님, 삼보께 효순(孝順)하며, 지극한 진리에 효순하는 가르침이다. '효'라는 것은 '계'라고도 이름하며, '조절하고 없앰(制止)'이라고도 이름한다.

≪범망경(梵網經)≫에서 보살계(菩薩戒)가 만들어진 연유를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범망경≫은 법경(法經)이 편찬한 ≪중경목록(衆經目錄)≫(594 C.E. 완성)에서 <중율의혹(衆律疑惑)> 조항에 분류된 이래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에서 만들어졌든 인도에서 만들어졌든, ≪범망경≫의 보살계는 '소승(小乘)'의 비구계가 대승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비구나 비구니에게만 주어지는 '소승'의 구족계(具足戒)와는 달리 ≪범망경≫의 보살계는 승속의 구분 없이 모든 불자들에게 똑같이 주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술을 팔지 말라'는 계율이 열 가지 중요한 계율(十重戒)에 속하는 반면 오히려 술을 마시지 말라는 계율은 48가지 가벼운 계율(四十八輕戒)에 속하고 있으며, '소승'의 계율에서는 비구에게조차 고기먹는 것을 금하지 않은 반면 보살계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는 등 대승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윤리의식이 보살계에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살계는 새로운 요구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이 새로운 계율의 제정이 계율 제정의 원칙이나 정신에 호소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 '소승'의 계율이 시대 상황의 변화 때문에 더 이상 계율 제정의 정신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계율을 만들었다고 정당화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 새로운 계율은 그 자신의 제정을 '진리'로부터 정당화하고 있다.

다이아몬드처럼 보배로운 계율이여,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모든 보살님의 근원이로다. 참으로 부처 성품이 깃든 종자라 하겠다. 모든 중생들이여, 부처 성품을 갖추고 있구나! 어떤 사고도, 인식도, 형색도, 마음도, 그것이 감정이든 마음이든 모두 부처 성품인 계율 속에 들어 있도다. [중생들이여,] 당당하게도 [부처 성품이라는] 원인을 갖추고 있으니, 또한 [결과인] 영원한 법신을 당당히 소유한다 말하겠도다.

이 대목에서 보살계는 불성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성이 진리이듯 보살계 역시 진리이며, 불성이 모든 존재를 포함하듯이 보살계가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보살계는 진리이며 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따라서 보살계는 지켜져야 한다. 이것이 보살계 제정의 정당화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앞에서 인용했듯이 ≪범망경≫의 보살계는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제정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마치 ≪화엄경(華嚴經)≫이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자마자 설해진 것이라고 주장되듯이 말이다. 진리는 만들어 질 수 없다. 따라서 진리로서의 보살계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만들어지고 개정된 것일 수 없다. 진리란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보살계는 그 완전한 모습 그대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깨닫자마자 설해진 것이다.

≪범망경≫의 보살계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도들은 새로운 계율을 만들면서 그 제정의 정당화를 만들어질 수 없는 것, 곧 진리로부터 찾고 있다. 이것이 불교 윤리가 갖고 있는 특징이자 한계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불교에서 계율에 대한 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설사 불복종이 묵인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계율의 개정에까지 나갈 수 없다. 진리는 고쳐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어기기

국가를 정의할 때 제시되는 특징은 권위, 즉 통치권이다. 인간의 일차적 의무는 자율, 즉 통치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율과 국가의 추정상의 권위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해결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결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다하는 한, 개인은 자신에 대해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국가에 대항할 것이다.

절집에서 스님네가 맡기를 가장 꺼리는 소임(所任)으로는 공양주(供養主)와 화대(火臺)가 꼽힌다. 공양주가 밥을 질게 지으면 젊은 스님네가 뭐라 그러고, 되게 지으면 노스님네가 뭐라 그런다. 화대가 불을 넉넉히 때면 젊은 스님네가 더워서 정진 못하겠다 그러고, 불을 모자라게 때면 노스님네가 추워서 정진 못하겠다 그런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솥밥을 각 스님네 입맛에 맞게 지을 수 없으며, 한 방의 온도를 각 스님네의 취향에 맞추어 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어떻게 밥을 짓던, 어떻게 불을 때던 대중 스님네들 중 누군가는 불만을 토로하게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네는 대중을 이루어 모여 살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해 동의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의는 곧 규율이 되고 개인을 지배하게 마련이다.

생리적인 것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너무나도 다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태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는지 아닌지, 안락사가 살인인지 아닌지, 교육이 먼저인지 국방이 먼저인지, 다른 나라의 독재자를 축출하기 위해 전쟁이라도 일으키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사고방식이 그리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살지 않을 수 없고,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율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다양하기에 규율이 필요한 동시에 다양하기에 규율에 반항한다. 획일적일 수밖에 없는 규율이 다양한 개개인의 사고적 취향에 맞추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동의하는 사회구성의 원칙이 있기도 불가능하지만, 설사 그러한 원칙이 있더라도 그 원칙의 적용에 있어서는 너무나 다양한 해석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집단이다. 똑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는 개인들이 낙태에 대한 태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낙태를 금지하는 규율이 있을 때 그에 반대하는 개인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원칙에 호소하여 낙태 금지에 반대할 것이고, 낙태를 허용하는 규율이 있을 때 그에 반대하는 개인 역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원칙에 호소하여 낙태 허용에 반대할 것이다.

요컨대,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규율을 요구하고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규율에 반항한다. 하지만 어떤 집단에 속하는 개인이 그 집단의 규율에 불복종할 때, 그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는 규율에의 불복종은 규율 제정의 원칙 혹은 정신에 호소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규율에 대한 불복종이 합리적일 때 사회 구성원은 현재의 규율체계가 그것의 제정 원칙 혹은 정신에 합당한지를 반성하고, 그것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말해서 규율체계가 불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규율에 대한 불복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교도들 역시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 공동체를 규제하는 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이다. 하지만 불교도들 역시 인간인지라 그 가치관에 있어서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이라 할지라도 모든 불교도가 동의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개개 불교도들이 가진 양식(良識)에 따라 불복종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하지만 불교도들의 불복종이 불교 공동체의 규율을 개선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불교 규율의 제정 원칙 혹은 정신에 호소해야 한다. 규율 제정의 원칙 혹은 정신과는 별개의 것, 예를 들면 깨달음 같은 것에 호소한다면, 그것은 묵인될 수는 있지만 정당화 될 수는 없으며, 규율 체계의 개선은커녕 규율 체계의 혼돈만을 가져올 것이다. ≪사분율≫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도들은 계율 제정의 원칙 혹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계율 제정의 원칙에 호소하여 지금 이곳의 상황에 맞도록 계율을 개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불교도가 해야 할 일은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불완전할 수 있으며, 그것의 개정을 통해 계율체계를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이전의 것보다 향상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계율의 개선도 계율에의 불복종도 불교 안에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록
1989년 사미계 수계(조계종,)1992 비구계 수계(조계종), 1999 환속.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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