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화두를 찾아서

편집자
본명은 김영일.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6년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하여 첫 옥고를 치뤘다. 1970년 《사상계》에 담시 〈오적(五賊)>을 발표한 후, 8년 간의 투옥기간과 사형 구형 등 수난의 세월을 겪었다. 1975년 ‘로터스 특별상’, 1981년 ‘위대한 시인상’,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을 전후하여 민중사상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생명사상’을 전개, 1990년에는 ‘한살림모임’을 창립하여 생명사상의 확대와 민중적 실천을 모색했다. 1998년 율려학회를 발족하여 ‘율려사상’과 ‘신인간 운동’을 주창하였다. 시집으로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별밭을 우러르며》, 《이 가문 날의 비구름》, 《중심의 괴로움》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옹치격》,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보내는 겨울편지》가, 그 밖의 책으로 《남》이 있다.

 

추억의 치열함

 조성택: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평소에 선생님을 사진에서만 뵈어 왔습니다만, 제가 오랜 기간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끔씩 한국의 토종 얼굴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송창식 씨, 차범근 씨, 그리고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죠. “아, 이 세 얼굴들이야말로 한국의 토종 얼굴이다!” 생각했던 것인데, 오늘 선생님을 뵙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김지하:
허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송창식 씨는 우리 장모님(소설가 박경리)이 무척 좋아하세요.

 조성택: 이제 일산에 오신 지도 제법 되시지 않았습니까?

 김지하: 벌써 한 9년 가까이 된 것 같아요. 원주를 떠난 것은 제법 오래 됐지요. 해남을 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합니다만, 하여간 자꾸 왔다갔다하다가 결국 서울에 정착한 셈이죠.

 조성택: 당시 선생님께서 원주를 떠나신 일은, 단순한 지역적인 이동이 아니고 정신적인 변화, 즉 어떤 사상적인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김지하: 예, 맞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사실은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문제도 있었긴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날이 갈수록 저하고는 맞지 않는 변화들이 자꾸만 등장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 개입의 문제 이전에 저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감옥 안에 있을 무렵에는 제가 완전히 변하게 되었죠. 그리고 감옥에 있을 때 동학하고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주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눈동자와 그 뒤에 있는 마음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고나 할까요. ‘뒤에 있는 것과 앞에 있는 것’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요즘 제가 말하는 외적 변혁과 내적 평화, 혹은 유목생활과 농경정착의 문제와 같은 이원론적 대립의 극복 등은 아마도 당시의 변화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고 해야 되겠지요. 그러는 와중에 또한 여러 가지 새로운 과학적 정보들에도 눈뜨게 되었는데, 이제는 무언가 행동을 위한 떠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는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 중이었는데, 광주항쟁이 터지면서 그러한 생각들이 더욱 구체화되고 강해졌습니다.

한 사흘 동안 잠 못 이루고 생각에 들었는데, 당시 광주의 일이 저에게는 일종의 문명사적 사건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정치적 문제들 역시 단순히 정권을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당시 미국과 북한이 아무 소리도 안 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보았으니까요. 또한 김대중 씨 사건에 대해서도 이상하게도 묘한 예감들이 떠올랐습니다. “아, 저 사람이 나가면 집권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지만 그 앞날이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 것입니다.

 문제들은 더욱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고, 당시 저에게는 그 모든 것이 일종의 괴로움으로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계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자 불교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자 하는 심정이 생겨났고, 불교를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을 명료하게 만드는 일은 그리 쉽지 않더군요. 돌아가신 장일승 선생님과 함께 불교에 어떤 모티프가 있다면 그것으로 좀 개혁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란 동네에는 워낙 대단한 분들이 많이 계셨던 터라, 우리 같은 참새들이 아무리 짹짹거려 보아야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하여튼 원주를 떠날 무렵에는 개혁의 일꾼들도 많아지고 투사들도 늘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지요. 당시 원주에서 지학순 주교께 그런 말씀들을 드렸더니, 목포로 가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니 그 옆에 동학이라는 데가 있다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너 천도교 갈려고 그러냐?” 하시길래, “천도교가 아니고 그 동학이라는 마을에 가려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어른이 하시는 말씀이 “거기에 가면 가지 뭐, 니가 가봐야 어딜 가겠냐?” 그러시더군요. 하여간 지 주교님 참 멋쟁이였습니다.

조성택: 그럼 당시 선생님께서는 세례교인이 아니셨습니까?

 김지하: 왜요, 세례를 받았죠. 견진(堅振, confirmation)까지 받았죠.

조성택: 이렇게 여쭈면 그렇습니다만, 혹시 배교자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닙니까?

김지하: 냉담! 냉담이었습니다. (웃음) 사실 제가 뭐 그다지 천주교를 반대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고마움이나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당시의 저로서는 스스로 해결 안 되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아니 문제가 많았다기보다는 문제 자체에 들러붙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그 치열한 시대에 바로 그런 고민들을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저는 감옥 안에서 허송세월만 보낸 느낌이 듭니다.

 조성택: 부처님은 고행을 6년간 하셨다고 합니다.

 김지하: 그러셨죠. 사실 감옥 안에서의 시간들이 수행의 시간들이 될 필요가 있었는데, 저로서는 아쉬운 점들이 남습니다. 남들은 감방에 앉아 있는 것이 다 참선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제가 과연 그런 시간들을 보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조성택: 당시 세간에는 선생님께서 감옥 안에서 백일 동안 참선하니까, 아무개도 사망하고 했다는 다소 신비적인 소문도 났었습니다만.

 김지하: 참 별일이 다 있더군요. 우연히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이 무섭다는 것은 그때 알았습니다. 당시 저는 꽤 아만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갓 서른 넘었을 무렵인데 이미 문단에 이름도 났고, 주위에서도 영리하다고들 치켜주어서 스스로도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선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때까지의 저의 삶과는 다른 세계들을 조금씩 깨우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박정희 씨에 관한 일화는 바로 그러한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참선을 시작하고 꼭 100일째 되던 날인데, 박정희 씨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말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씩, 아주 느리게 말이죠. 저로서는 그때가 그러한 경험을 처음으로 한 때입니다. “인생무상, 먼저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런 말이었죠. 저로서는 무슨 신파극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조성택: 사실 박정희와 김지하라는 두 인물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볼 때 첨예한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지하: 그 양반은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 이제 그 사람을 증오한다든가 하는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의 생각은, 이 인간만큼은 제거해야 된다, 민족사로부터 제거해야 한다 하는 생각이었어요. 왜냐하면, 그가 주장한 소위 ‘경제’라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중요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팔아서는 안 될 마지막 허리띠까지 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러했습니다. 특히 일본하고의 관계가 그러하였고, 또한 김우중 같은 이를 비롯한 관착(官着) 재벌들과 군벌들을 조성한 일 등을 생각하면, 이제 막 자라나고 있던 희망의 길을 과거로 후퇴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장한 것들은 우선 생존을 위해 그랬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만, 그 대가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죠.

 조성택: 아마도 그 무렵이었겠습니다만, 당시 선생님께서는 기독교의 《성경》을 통해 인생과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자꾸만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김지하: 아마도 초기였을 겁니다. 저는 감옥 안에서 《성경》을 아주 많이 읽었습니다. 사실 특별히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성경》 뿐만이 아니라 《반야심경》이나 《금강경》까지도 달달 외웠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읽었던 것으로 크리스토퍼 도이센의 말이 항상 잊혀지지 않는데, 그가 말하기를 “르네상스 이후 전 세계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 16세기 마테오 릿치가 북경에 상륙한 것”이라고 하였어요.

도이센과 토인비를 비교하면 토인비는 무척 산만하게 느껴집니다만, 하여간 마테오 릿치가 중국에서 한 일들이 만만치 않아요. 마테오 릿치는 바티칸에 대해 여러 가지로 진정을 올립니다. 예를 들어 기(氣), 신(神), 령(靈), 이런 것들에 대한 중국이나 극동적인 개념체들을 받아들여야만 선교가 가능하다든지, 만일 이러한 것들을 자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동양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오래된 개념들이기 때문에 선교가 안 된다 해 나가면서, 기독교 교리들을 상황에 맞게 바꾸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6세기에 말이죠. 그러자 바티칸에서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마라, 이놈아!” 하면서 혼을 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카톨릭만의 역사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카톨릭으로 제한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 역시 역사에서 하나의 한 큰 고비였구나. 우리가 놓치고 지나갔구나. 만일 안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문명의 꽃들이 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양쪽 세계가 서로 간에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성경》도 보고, 다른 문헌들도 보고 하는 가운데 비교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간 당시 이런 저런 다양한 탐색을 추구하던 중에 어떤 벽 같은 느낌을 절감하게 되더군요. 일종의 예언자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엄한 계율이 가진 무거움과, 또 신과 인간 사이의 이어질 수 없는 경계 같은 것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마치 계약에 의해 성립된 상행위 같은 느낌이었죠. 그런데 이러한 관계라는 것이 절대로 다시 물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떼먹을 수도 없는 성격이란 점에서 한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조성택: 보통 기독교와 불교를 이야기할 때 계약적인(Contractual) 것과 비(非)계약적인(Non-contractual) 것으로 나누는 방식이 있습니다만, 이 구분에서 불교의 경우에는 비계약적인 것에 들어갑니다. 부처와 중생간의 계약이 없어서 그런 것이죠. 계약적인 것의 예로는 노비문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일종의 속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지하: 아마도 그와 유사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여간 당시 저에게 천주교를 떠난다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1960년대는 어지러운 시대였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틱 쾅뚝 등 승려들의 소신(燒身) 공양이 줄을 이었고, 또 그 전후로는 남미에서 시작해서 세계적으로 해방신학의 열풍이 굉장했습니다. 바로 그럴 즈음 카톨릭에서 중요한 흐름이 일어납니다.

즉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당시 “바티칸 공의회”가 개인의 구원을 위해 사회참여 문제를 구체적이고 소상하게 검토한다고 해서 저로서는 사실 좀 고무되어 있었죠. 사실 당시의 저는 불교나 천주교에 대해서든, 조금 좌파적인 생각을 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든 전혀 격의 없이 대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어주는 기제로서 다행히도 소위 ‘통일전선’으로 운운하는 말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저로서는 조금 공감이 안 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동료들 사이에서 항상 이단분자 취급을 당하곤 했는데, 예컨대 레닌의 ‘신경제정책’이란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신경제정책’도 제가 너무 완강하게 비판을 하니까 동료들 사이에서는 저에 대해 굉장한 비판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레닌의 농촌착취를 보고 자살을 해버린 시인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쩌면 그와 유사한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저 스스로도 종교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필요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종교 자체도 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제 자신을 돌아보면, 내 머리 속에 너무도 여러 가지가 얽혀서 머리 속이 꼭 쓰레기통 같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한쪽에 아이스케키를 먹다 남겨둔 것이 남아 있다면, 그 옆으론 과일 깎는 칼이 놓여 있는 것처럼 대단히 복잡한 상황이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조성택: 불교에서는 그것을 제8식(識)이라고 하죠. (웃음)

 김지하: 당시 저는 동학도 읽고, 불교도 읽고, 천주교도 읽고, 마르크스도 읽고, 또는 그 외에 무정부주의자들의 문헌이나 모택동의 문헌도 읽고 그러던 와중이었는데, 그러한 사상적 편린들이 얽혀버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냥 한 사람의 구도자였다고나 할 수 있는 그런 시기였지요. 게다가 그러한 상황 자체를 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늘 읽고 생각하고, 그리하여 저의 것이 되어 나오기 이전에는 그 모두가 저의 스승이던 시절이었죠.

바로 그러던 참에 그 공의회가 있어서, 그 내용들이 조금씩 미리 공개되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이미 발표되었던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촉진’과 유사한 것으로 일종의 노동회칙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젊은 감각으로 보기에는 별로 화려하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국가와도 같은 천주교가 2년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소위 ‘공개발언자’들을 통해 검증한 결론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 중 흥미로운 점은 노동운동권을 조직하여 투쟁까지 한다는 것이었는데, 공의회 이전 시대에는 카톨릭의 담론에 투쟁이란 이야기가 그다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흥미 있게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조성택: 사춘기 시절은 어떠하셨습니까?

 김지하: 청소년기에 제가 《검은노트》라고 이름 붙인 노트가 있었는데 소위 말하는 ‘개똥철학집’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일기장인 동시에 반 시집이었고, 반 명상록 비슷한 것이었는데, 지금의 기억으로는 마약에 대한 이야기와 제법 암울한 내용들로 가득 찬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한 글자로 상징화시킨다면 왠지 ‘탈(脫)’자로 상징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를 이탈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 늘 마음 속에 남아 있었을 때였습니다. 요기싸르

조성택: 우리가 앞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선생님은 변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김지하: 저의 꿈은 ‘요기싸르’라는 개념에 다 들어 있지요. 요기(yogi)는 인도의 수행자이고, 싸르(ssar)는 혁명위원회를 뜻하는 코민싸르(comminssar)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기싸르’란 말은 안으로는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밖으로는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는 혁명가 정신을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내면의 정신적 평화와 외면의 사회적 변혁이 동시에 제 안에서 공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말을 근사하게 합니다만, 제가 스무 살 전후에 가지게 되었던 이러한 생각은 사실 영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서산 스님의 “구름이 좌선하는 옷에 젖어 든다”와 같은 시에 빠져들곤 했지요.

“꽃이 떨어졌는데도 절집은 오래 닫혀있고, 봄을 찾는 나그네 돌아갈 줄 모른다. 바람은 학 둥우리를 흔들고 구름이 좌선하는 옷에 젖어든다”와 같은 시 말입니다. 당시 그러한 내용들은 저에게 토막토막 단절된 채로 들어 왔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저에게는 큰 가르침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시를 썼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문법을 통해서 오히려 더 잘 들어왔습니다. 문체가 시적인 문장들이 오히려 논리적인 문장들보다 훨씬 더 빨리 다가왔던 것입니다.

조성택: 일종의 직관적인 것이었군요.

 김지하: 그렇지만 그러한 내용들의 체계적인 정리가 잘 안 되곤 했는데, 그 때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계기로 민족문화운동을 시작하면서 보다 구조적인 접근을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동학에 접근하게 되고, 불교도 알게 되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시도는 장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오셔서 “정치로는 이 파시스트들에 대항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종교를 통해 할 수밖에 없다”고 하신 때부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당시의 시절 인연과 맞았던 것이지요.

우리의 움직임은 남미에서 일어난 움직임들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비슷한 시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선배들보다는 후배들이 오히려 더 잘 받아 들이더군요. 하지만 종교와의 관계라든가 하는 여러 문제들로 인해 내부적으로 저는 아주 혼이 났습니다.

 그 당시의 논쟁 분위기는 매우 험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결핵을 앓을 때였지만 우리들은 한 달에 한 보름쯤은 회합을 가지곤 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기에 놓여 있을 때이고, 북으로부터는 김신조 패들이 내려오고 하던 시기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아주 어두운 때로 기억됩니다. 앞에서 《검은노트》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것이 왜 ‘검은노트’였는가 하면 철저한 비관주의를 견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땐 말똥종이라고 불리는 저질의 종이에 아주 엉터리로 번역한 쇼펜하우어 개론서를 빌려서 읽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원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곧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는 중동고등학교였는데, 당시로서는 2류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전교생이 두 가지 이상의 스포츠를 해야 된다는 규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태권도하고 농구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늑막염에 걸렸기 때문에 3∼4개월 정도 다시 원주에 가서 쉬기도 했습니다.

그 바람에 성적은 뭐 완전히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는데, 당시엔 학교에서 반을 세 개로 나누어 맨 밑의 반은 불량한 학생들, 중간 반은 그저 그런 중간치 학생들, 그리고 우등반은 공부를 좀 하는 학생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세 군데를 다 돌아다녔죠. 이러한 일들이 바로 그 노트 속 이야기입니다. “슬프다”든가 “어둡다”, “살기 싫다”, 그런 것들로 가득 찬 것이었죠.

그 상태가 바로 제가 대학 들어갔을 때의 상태입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4·19가 일어났는데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어요.

조성택: 마치 역사의 그 어떤 시점에 꼭 맞춰 서 있는 것 같군요.

 김지하: 네, 그런데 저는 처음에는 4·19에 참가를 안 했어요. 그 날이 시골서 올라오는 날이었는데, 당시 제 자취방은 국립묘지 근처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불 두 채를 지고 버스를 타러 나갔는데 버스가 다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대학생들로 꽉 차서, 거기부터 걸어 왔습니다.

온 종일 흑석동에서 성북동까지 강행군을 했어요. 그런데 학생들의 대오 가운데 제 친구들의 얼굴이 다들 보이고, 그 친구들이 “너 왜 안 들어와, 이 새끼야!”라고 소리를 치더군요. 그들은 바로 그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로터리를 지날 때쯤 발포가 시작되더군요.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왜인가? 정신적 준비도 없고 지도노선도 없으니 이것은 단순한 폭동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난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마치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저에게는 그것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 이튿날 내려오는데 혜화동 어딘가에서 구두닦이들부터 껌장수까지 모두들 트럭에 올라타 난리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아, 이거 내가 잘못 보았구나. 폭동은 폭동이지만 학생소요가 아니다. 이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움직인다고 해보았자 조직에 들어가 보았던 경험이 전무한 처지에서 저는 제 나름의 방식을 택했던 것입니다. 소위 ‘미술학교 저항’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엔 장면 씨 동생이 서울미대 학장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여간 그로부터 이상하게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가 굉장히 정치적 재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전 사력을 다하고 있었고, 그를 위해 심지어는 병법(兵法)을 읽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싸워야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 바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저는 그와 정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전 사실 정치에는 그다지 흥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제가 그때부터 생각한 것은 결국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양한 사상적 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론》을 읽었을 때 세상에는 이렇게 무서운 이론서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긁어쥐는 힘이 저를 사로잡았죠.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사회주의가 막 나와서, 오장환 씨가 일본어 역에서 중역한 세르게이의 시집도 읽곤 했죠. 소름이 끼쳤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까 결단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게다가 감옥 기간 중에는 동학과 불교에 가까워지기까지 했습니다. 당시의 저에게는 좌파냐 우파냐 이전에 둘 다 아무 모순 없이 저에게 들어오는 것을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정지용 선생이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지독한 모던주의자였고, 더욱이 지독한 향수주의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향수〉라는 시까지 쓰지 않았습니까? 이런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저에게로 들어 왔고, 그것이 그 뒤로도 계속되었던 것일 뿐입니다.

조성택: 전 항상 선생님 글의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하고 항상 궁금했는데,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요기싸르’라는 그 한 마디에 선생님의 생이 다 집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마치 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말과도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김지하: “상구보리 하화중생”. 학창시절 이 말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그 ‘상하’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러나 ‘보리’와 ‘중생’이란 말, 어디가나 그 말들은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안과 밖의 관계, 사람이 어떻게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마음으로 완전히 평화로울 수 있고 명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사실 하나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바로 그렇게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확고하고, 이미 역사상 나타나 있으며, 기존에 존재하는 체계들 중에서 불교 교학처럼 그렇게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이 이 말 같고, 또 저 말이 저 말 같고, 정신을 차려 한참을 들은 후에야 귀가 뚫리곤 하지만, 불교가 가진 매력은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러한 원천을 잘 살려서 이제는 무언가 조그마한 움직임으로 새로운 차원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새로운 문명이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런 지점에서 ‘동북아 물류중심론’이라고 하는 방식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움직임들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조성택: 선생님의 ‘요기싸르’에 대해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영원한 경계인’이다. 어느 쪽에도 속하는 것이 아닌, 한쪽으로는 요기를 지향하고, 또 한쪽으로는 직업적 혁명가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를 살아오셨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선생님의 ‘생명’에 대한 생각들도 계속해 이동해왔음을 반증해 주지는 않을까 싶은데요?

 김지하: 요즘 회고록을 쓰면서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주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것들이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느끼게 되는 사실은 ‘기억’이란 결국 ‘재구성’이란 점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재구성이 아니라 가치의 재구성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점에서 개념체들도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전 요즘엔 ‘영성’과 ‘생명’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동학의 어법으로 이야기하면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성택: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의 불교는 어느 한쪽에도 충실하지 못한 면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말을 “좌구보리 우화중생”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김지하: ‘좌우’도 논리적으로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상하’보다는 ‘좌우’나 ‘내외’가 좀더 가까운 느낌은 주는 것 같습니다.

조성택: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요기싸르’는 어쩌면 불교의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지나온 인생에서 요기싸르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나 인간의 한계 같은 것이 어디에 있었다고 보십니까?

김지하: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외면적인 문제로서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 즉 ‘좌익 소아병’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제 친구든지 후배들이든지 그런 사람들이 자꾸 설치게 되는 것이 큰 어려움이죠. 두 번째 문제는 저의 내면적인 문제인데 보다 단단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참선인 것 같습니다.

하여간 지금도 ‘요기싸르’라는 말은 저의 모토이긴 합니다만, 지나치게 욕심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 이제 시들은 것이 틀림없어요. 그림 그리고, 글을 쓰고, 가끔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런 일로 만족하고 싶습니다. 다만 제가 꼭 좀 그렇게 됐으면 하는 공적인 마음은 조금 남아 있습니다. 만약 불교계와 같은 곳으로부터 어느 한 군데서라도 정말 맑은 물 한 줄기 흐르듯이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마치 ‘삼보일배’처럼 말입니다.

이제부터의 변혁은 외적 구조의 변혁이라기보다는 내적인 변혁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화두는 단연 ‘생태’와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안쪽이야 마음 빼고 또 무엇이 남아 있겠으며, 마음 이외에 생명이 돌아갈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생명이고, 생명이 돌아갈 곳이 곧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자세에서 출발하여 그 다음으로 밖으로는 어떤 변혁을 할 것인지, 즉 생태적 질서라든가 도시적 삶, 농촌적 삶이나 농업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담론들이 다시금 보다 왕성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귀명(歸命), 목숨을 걸고 목숨으로 돌아가다

조성택: 얼마 전 새만금 문제로 1인 시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님들과 신부님들을 비롯해서 여러 분들이 삼보일배로 서울까지 오셨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그 문제는 조금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 보입니다만.

김지하: 저도 그 문제로 지방에까지 간 적이 있는데, 회의 중에 일부 젊은이들이 격분해서 다소 과격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전 불쾌감을 느껴서 퇴장했는데, 수경 스님이 멀리까지 쫓아와서 그 사람들 좀 바로잡아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돌아가 한 말이 “그보다 더 지독한 일에도 폭력은 쓰지 말라. 그까짓 폭력이야 별로 효과도 없고, 심지어 다이나마이트를 쓴다 해도 얼마 파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만용들 부리려거든 아예 포기하라.

내가 보기에는 삼보일배가 제일 정도(正道)이고, 그걸 중심으로 문화적 방어전을 펼쳐라. 법률적으로 소원도 하고 정치적으로 대통령과 협상도 해보고, 그리고 꼭 필요하다면 팀을 조직해서 전북의 유지들한테 가서 항의도 좀 하라” 이런 내용이었죠. 그랬더니 젊은이들이 좀 겸연쩍어 하는 것 같더군요. 저도 실은 삼보일배 전에는 별로 희망을 안 걸었습니다.

그런데 삼보일배가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 감동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힘일까요? 바로 영적인 힘이 속세로 내려온 데서 나온 힘입니다. 그것도 아주 속세, 즉 구체적인 현장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힘이 필요할 때입니다.

조성택: 개발과 보존에 관한 문제는 늘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보다 본질적인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한 듯 한데요?

김지하: 사실 그 질문은 모든 질문의 합(合)입니다. 저는 우선 우리 사회의 운동하는 사람들의 문제로부터 출발해 보았으면 합니다. 전에 어떤 운동단체가 저한테 도와 달라고 해서 난초를 친 것도 보내고 했습니다만, 선언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 데 이르러서, 저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못 쓰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너무 오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문제의 발생이 오래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코앞에 닥쳐서야 요란을 떨면서 자신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들이 매우 오만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둘째는 그들이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좀 엉뚱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왜 ‘붉은 악마’를 연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당시의 저의 지적이었습니다.

700만 명이 길거리에 똑같은 빛깔의 셔츠를 입고 외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 일을 할 때 그런 힘을 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도 안 해 보았는가 하고 비판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구성되기 이전에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말하는 새로운 문화이론이란 농촌에서 농경정착을 하는 동시에 도시에서 유목생활을 겸할 수 있는 그런 문명을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에레미티즘과 노마디즘으로 표현하곤 합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어불성설이며 하나의 파라독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둔을 즐기면서 동시에 유랑하고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농경과 생명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문명적인 디지털적 삶을 모순 없이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에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합치지 못한다면, 즉 디지털과 에코를 우리의 몸 속에 녹일 수 없다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입니다. 이 둘의 모순을 제거하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화두 아니겠습니까?

조성택: 일종의 중도적 문명과도 같은 느낌입니다.

김지하: 제가 아는 불교계 인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깊은 산에 들어가 무슨 궁궐 같이 큰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분의 오랜 투쟁의 세월을 생각하면 일종의 한 같은 것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산다는 것이 과연 은둔의 삶일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그런데 더욱 저를 난감하게 만든 것은 “앞으로 오는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 식량은 자기가 농사를 지어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바로 ‘생태파시즘’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과도한 경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실 불교가 더 살아나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조성택: 불교가 더욱 살아나야 된다는 말씀엔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최근의 불교계를 살펴보면, 불교가 살아나기 위한 조짐들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최근 총무원장에 취임하신 법장 스님과 종단 기구들은 생태·환경문제에 상당히 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조계종 총무원 중심으로 환경워크샵 같은 행사도 있었습니다. 또한 동국대 홍기삼 신임 총장은 동국대를 불교생태학의 본산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등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지하: 그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조성택: 물론 무엇보다도 역시 삼보일배 운동이 가장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앞에서 농경정착과 유목생활 사이의 긴장 해소를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생태의 문제는 곧 문명의 전환 문제와 관련을 가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지하: 불교계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변화들은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문화운동, 생태, 환경 이러한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다음이 문명의 문제일 것인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가 움직여야 됩니다. 문화 중에도 문학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가르침이란 두 기능을 동시에 가진, 다른 예술 분야와는 약간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이념성과 미학성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이번 삼보일배를 그냥 놔두지 마시고 불교계가 중심이 되어 잘 회향되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지금 생태시를 쓰는 사람이 100명이 넘습니다. 생태문학자들도 많고, 기타 소설이나 이론 또는 문학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예술 쪽에서도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이삼 일 예정으로 적절한 행사를 기획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삼보일배를 계기로 불교가 말로만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불교가 신비주의적 말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로 한 번 의미 있게 회향해보는 것입니다. 수경 스님처럼 목숨을 걸고 한 번 넘어 보자는 자세라면 아주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매듭이 필요한 법입니다.

조성택: 그렇다면 역시 불교적 세계관을 펼쳐 보여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김지하: 그렇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사회변혁론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변혁론은 유물론을 인정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죽은 알튀세르 같은 사람은 유물론과 유명론을 연관시켜서, 소위 유물론이 가지고 있는 개념적 사유의 빈곤을 넘어서려 하였었지요.

불교는 유명론이 아니라, 아예 마음이라든지 마음 안에 물질을 다 포함한다든가, 물질 안의 주체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보다 고도의 차원까지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보다 통크게 한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이 가진 가장 괜찮다고 생각되는 실천이성 부분은 인정도 해주고 하면 어떨까도 싶습니다. 얼마 후 저의 새로운 시가 발표될 예정입니다만,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지요. “갈잎이여, 대낮에도 촛불을 켜라. 새내기들 녹색 솟대를 솟구칠 수 있는 촛불을 켜라” 하는 구절입니다만, 한번쯤 무지개 빛도 좀 보여주고, 녹색도 좀 보여주고 함으로써 불교의 멋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 불교의 멋이 바로 그러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은 큰 산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요런 나무도 보여주고 저런 나무도 보여주고 하는 아량 말입니다.

조성택: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삼보일배의 결론이 어떻게 나야 될 것으로 보십니까? 구체적으로 새만금의 결론은 어떻게 나야 되겠습니까?

김지하: 삼보일배의 결론은 공사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중지! 자연에는 ‘중지’ 이상의 휴식이 없습니다. 휴식을 주어야 합니다. 짱뚱이와 게들에게 휴식을 줘야 합니다. 벌써 며칠 뜸한 사이에 그곳의 생태계는 벌써 달라졌을 것입니다.

조성택: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개발 속에 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개발의 삶을 거부해야 합니까? 개발 자체를 중지해야 하는 것일까요?

김지하: 아닙니다. 생태계가 지금 사슬이 끊어진 상태에서 일어서려 하는데, 그 자체의 자기보양 시간을 주자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자기 상처를 스스로 핥지 않습니까? 자기가 치유하는 것이죠. 그런 여유를 주자는 것입니다. 누가 가서 그 전부를 치료하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지 우리가 무슨 도시적 삶을 버리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성택: 그런데 새만금을 계속 개발하자는 측의 주장 가운데 지금 중단하면 생태계가 더 파괴된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김지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치유책은 없습니다.

조성택: 그런데 문제는 이미 우리가 어중간하게 손을 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둬서 자연적 치유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이왕 어중간하게 손을 댔으니 그것을 완전히 해체해야 하는 것인지 말이죠.

김지하: 글쎄요, 쉽지는 않습니다만, 결론은 결국 단 하나 뿐입니다. 중단하고 놔두라는 말입니다. 흘러가는 길 막지 말라 그것입니다. 그것은 불교 정신과도 통하겠지요. 그만 두는 것, 그대로 놓아두는 것, 즉 내 마음을 딱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게한테도 생명이 있고, 물방울 하나하나에도 모두 오묘하고 신령한 생명들이 깃들어 있어서 스스로 회복하려 하는데, 바로 지금 이 순간 더 망치든 말든 일단 “스톱!”, 즉 ‘단(斷)’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복잡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간단한 이벤트인 것입니다.

조성택: 일본의 전통 예술인 노우(能)에 바로 그러한 요소가 있습니다. 굉장히 빠른 모습을 보여줄 때는 스톱을 하는 것이죠. 아마도 그 자체가 무한속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지하: 그렇습니다. 우리 음악에도 아쟁 같은 것을 보면 명인들이 그런 점을 많이 보여줍니다. 아쟁에는 ‘칭’이라고 하는 갑자기 탁 끊는 연주법이 있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그 멈춤은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장식들을 덧붙혀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동양은 사정없이 딱 끊어버리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선방에서 조실 스님이 수자에게 하던 이야기를 이제 대중들이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약간의 거추장스러운 집착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과가 있을 것인가는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운동인데 효과야 안 나도 문제가 되겠습니까.

 만일 실패하면 그 다음에 다시 또 언젠가 시도를 거듭해야 될 것입니다. 즉 하나의 패턴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끊음, 욕심을 끊음,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패턴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조성택: 그런데 지역주민들의 경제적 이익과 생태적 관점의 충돌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존재합니다. 실제로 최근 새만금 이외의 북한산 관통도로라든가 금정산 터널 문제 등의 불교계 관련 생태 문제들은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김지하: 그렇기에 바로 불교가 그런 문제들의 해답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밖에서 제 방식으로 불교를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것에 앞서 일단 끊고 나서, 그 다음에 다시 시작하든 말든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 지식인들의 깊이 있는 설득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소문을 낳는다면 그런 것이 진짜 운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앞에서 얘기했던 농경정착을 하면서 동시에 유목생활을 하고, 전 세계화하면서 동시에 작은 지역의 농촌과 자기의 조국이라는 지방화를 달성하는 것, 바로 이런 것을 존중하는 것이 사실은 불교의 여러 가지 핵심원리 중 하나이다 하는 논리들을 개발하고 보급하게 된다면 매우 바람직한 결과들이 초래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언제나 현학적인 경전의 인용만 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을 좀 바꾸어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단(斷)’이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딱 끊는다”는 것은 정말 용기가 없으면 안 됩니다. 사실 문제라는 것은 언제나 펑퍼짐하기 때문에, 바르게 드러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단’이란 운동도 결국은 어디론가 돌아가는 운동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귀명(歸命)운동입니다.

 물론 불교는 삼보(三寶)에 귀명하고 있습니다만, 이제 목숨(命)을 걸고 목숨의 진리에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래야만 환경문제는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불일불이(不一不異)

조성택: 이제 저희 《불교평론》이 불교 저널인 만큼, 불교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좀 여쭈어 볼까 합니다. 물론 앞에서도 불교에 관해서는 제법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상투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 맨 처음 접하신 불교는 어떠하였습니까?

김지하: 제가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가졌다고 한다면 아마도 유달사라는 절의 종(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할머니가 그 종 조성할 때 제 이름을 새겨 넣으셨지요. 저의 어릴 때 별명은 잘 운다고 하여 ‘울래미’였습니다. 외할머니가 “우리 울래미 복도 좀 넣어 주십시오” 했다는 기억이 납니다. 저는 외할머니를 따라 유달사에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저에겐 무척이나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벽화 같은 데 그려진 시뻘건 마귀와 신장들의 모습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을 살펴보면 종교와 관련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저희 큰집 이모들은 성당을 다녔는데, 꼭 저를 새벽에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성당에 가면 컴컴한 데서 여자들은 하얀 보자기를 쓰고 앉아 있었고, 또 눈 파란 사람이 ?라?라 하는 소리도 저에게는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당이라는 데는 또 체질상 안 맞더군요. 막 소리들을 지르고, 뭐랄까 신발들도 막 제멋대로 놓여 있었고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또 다른 전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당시까지도 ‘꺼먹제사’라고 한 것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동학의 의례였습니다. 원래 동학은 반드시 제사를 정오 12시에 태양과 생명이 가장 밝을 때 지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체포하러 다녔기 때문에 밤에 제를 지냈으므로 ‘꺼먹제사’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꺼먹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어려서 매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부님은 낮에는 또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원래 일본에서 미싱 기술을 배워오셨는데, 아마도 그때 카톨릭을 접하시게 되셨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낮에는 카톨릭인 것을 알았지만 밤에는 뭐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학이었죠.

조성택: 그렇다면 불교는 감옥에 계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접하셨습니까?

김지하: 아닙니다. 학교에 막 들어갔을 무렵 《반야심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이것은 외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외워버렸습니다. 그때 외운 것이 아마도 시발점이 된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마치 제가 생래적으로 불교 신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의 사유가 불교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우리 외할머니는 큰 보살님이셨는데 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무시다 돌아가셨는데, 그 어른 돌아가신 후 백일 동안 제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저보다 두 살 위의 외삼촌이 제사 때 《천수경》을 술술 외웠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천수경》을 읊은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궁금하곤 했습니다.

 아무튼 대학에 들어와서 토론을 많이 하면서, 특히 4·19 지나가고 5·16 오는 시기에는 정말 어수선한 시기였는데, 그 무렵 불교가 저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불교와 관련된 토론에는 초의와 다산의 관계와 같은 내용들이 논의되었습니다.

조성택: 감옥에서 《화엄경》을 읽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때 어떤 텍스트로 읽으셨습니까? 혹시 탄허 스님 번역으로 읽으셨는지요?

김지하: 상당히 여러 권이었습니다. 한 20권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다 읽은 것은 《입법계품》 같은 부분 몇 품밖에 안 되지만 말입니다. 사실 제가 좋아한 경전은 《금강경》이었습니다. 특히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고 한 그 부분을 제일 좋아합니다. 특히 용성 스님이 쓰신 주석을 즐겨 읽었습니다.

조성택: 선생님의 인생에서 불교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김지하: 전 스스로 동학당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의 배후에 있는 은거지는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조성택: 요즘에도 불교와 인연을 맺고 계십니까?

김지하: 아, 물론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큰 대찰에 가는데, 그러면 몸이 확실히 개운해져서 돌아오곤 합니다.

조성택: 절에 가시면 무얼 주로 하십니까? 특별히 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김지하: 그저 잠자고, 뒷산으로 산책로 나 있으면 좀 걷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제일 먼저 보는 것은 역시 대웅전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 고찰들에는 대웅전 뒤에 거의 다 조그마한 전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바로 그러한 곳들을 찾게 됩니다.

칠성각이든 삼성각이든, 환웅전이든 북극전이든 말입니다. 무언가 말로는 잘 설명하진 못하겠는데, 그러한 전각들에 들어가 있노라면 불교라는 초우주적 보편성과 불행한 역사를 지닌 이 조그마한 민족의 성덕풍류가 습합되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바로 이런 점이 새로운 역사를 꽃피울 원동력은 아니겠습니까? 하여간 그런 장소를 만나면 꼭 들어가서 향을 올리고 나오곤 합니다.

조성택: 선생님 시집 《화개》를 보면 “한 송이 꽃이 피니 세계가 일어난다”란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벽암록》의 “일화개 세계기(一花開 世界起)”와도 상통하는 의미인데, 도대체 지금은 불교가 새로운 꽃을 피울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으로도 보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지하: 제가 이제부터 좀 막 말해도 되겠습니까?

조성택: 예, 물론입니다. 바로 그런 말씀을 좀 듣고 싶었습니다.

김지하: 불교는 지금 죽어 있어요. 그 어마어마한 진리는 벅차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의 진리들인데 다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 죽어 있는 것일까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의문에 답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몇 가지 예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반드시 새로운 변혁은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동북아에서 말입니다. 어떤 변혁일까요? 문화적 변혁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문화를 중심으로 집결해 갑니다. 문화상품 같은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류의 정신사적으로 봐서, 소위 극동으로 표시되는 이 곳은 한마디로 ‘불교’였습니다.

이곳에서 불교가 새 꽃을 피워야 인류가 살아납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던 에레미티즘과 노마디즘의 화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은둔을 즐기면서 동시에 유랑하고자 하는 문제에 불교가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레미티즘과 노마디즘, 그리고 청산과 백운은 왜 그렇게 유기적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과 저것이 따로 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상 아닙니까?

조성택: 재가와 출가도 따로따로고요.

김지하: 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모든 이항대립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출가와 재가의 벽을 완화한 대승불교야말로 불교의 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성택: 대승불교가 결국은 불교의 꽃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대승이라는 것도 이제는 너무 개념화되어 버려서 어떻게 보면 죽어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소승을 포함하는 대승이어야 하는데, ‘소승과 구별되는 대승’ 이런 것을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까 말입니다.

김지하: 저는 가산불교문화재단에서 지관 스님이 금석문 해석한 것을 다는 못 보고 조금씩 보고 있는데 참으로 놀라운 내용을 많이 발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조그만 것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그 옛날 벌써 그 고승들이 말은 안 했지만 빛으로 남긴 것 아니겠습니까?

소위 선도(仙道)나 풍류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함께 굴러갔던 것입니다. 불교는 다시금 그러한 꽃을 피워야만 합니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