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불교와 예술

1. 서언

밀교(密敎)의 구체적 상징표현은 신(身)․구(口)․의(意) 삼밀(三密)로 나타난다. 이 중 신밀(身密)은 무드라(mudra), 즉 인계(印契)․결인(結印)으로 표현되며, 구밀(口密)은 만트라(mantra)․다라니(陀羅尼, darani), 즉 진언(眞言)으로 행해지며, 의밀(意密)은 요가사마디(yoga-samadhi)라 하여 정정(正定)의 관법(觀法)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구밀인 진언․다라니가 신밀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무용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려 한다. 불교무용을 발생케한 진언․다라니의 송주(誦呪)는,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리듬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몸동작인 율동이 수반되면서, 이를 체계화하고 정형화하여 의식에 채용함으로써 의궤화(儀軌化)를 이룬 것이 불교무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불교무용은 불교를 일반 대중이 가깝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원효(元曉) 스님의〈무애가(無碍舞)〉와 대안(大安) 대사의 동발무(銅鉢舞)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불교의 포교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서도 불교무용은 문화활동 등을 통해 대중의 신심을 자아내게 하고, 불교포교의 방편(方便)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하겠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소중한 불교문화 유산을 바르게 정립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있다.

2. 진언의 형성과 전개

1) 진언의 기원

범어(梵語)로 ‘진언’을 ‘만뜨라’(mantra)라 하며, 음역(音譯)하여 ‘만달라’(漫怛欏 혹은 滿怛羅)라고 한다. 의역(意譯)하면 신주(神呪), 비밀어(秘密語), 진어(眞語), 여어(如語), 불망(不忘), 불이(不異)라고도 한다. 진언의 기원은 고대 인도 원주민의 주술행위와 베다(Vedas) 성전의 주문(呪文)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데,《리그 베다(Ṛg-Veda)》에 실려있는 여러 만뜨라가 그러한 예이다.

이들은 종교적 실천법으로 요가를 수행하였고, 일상생활과 생산활동에 직접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주술에도 능통하였다. 이들 원주민의 종교신앙은 후일 밀교의 진언 수행에 많은 소재들을 제공하여 밀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1) 주문법(呪文法) 가운데《아타르바 베다(Atharva-Veda)》는 후일 밀교의 계경(系經)인 《소실지경(蘇悉地經)》과 양부대경(兩部大經)인 《대일경(大日經)》 및《금강정경(金剛頂經)》 의 식재(息災), 증익(增益), 조복(調伏)과 경애법(敬愛法), 그리고 구소법(鉤召法) 등의 3종, 4종 또는 5종의 수법(修法)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 명칭과 내용에 있어서《리그 베다》의 주술적 신앙이 밀교의 진언 수행법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이와 같이 진언은 불교에서 독자적으로 행하여진 것이 아니고, 이미 고대 인도 종교에서 사용되었다. 대승 후기의 밀교에서부터 신앙 속에서 의궤화되고 체계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고대 인도 종교의 주술신앙이 불교의 발전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수용․융섭․습합되어 밀교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밀교는 소승불교의 교리적 체계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교학을 더욱 발전시켜 체계화하고 상징화하는 강한 실천력을 내세우고 있다.

더구나 밀교는 대승의 교리를 실천적 교학으로 더욱 발전 체계화하였다.2) 즉 성불(成佛)의 경지를 상징화하여 불교 교리와 실천을 구체적으로 도식화․상징화․의궤화하였다. 다양한 의궤작법(儀軌作法)이 산출되었으며, 이는 곧 수행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경성불(究竟成佛)의 수행방편이 되었다.

2) 진언과 다라니의 의의

진언은 다라니 또는 주(呪), 명(明) 등으로 구분 없이 불리어 지는데, 여기서는 경전을 중심으로 진언과 다라니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진언

진언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들에 나타나 있는데,《대일경의석(大日經義釋)》 권1에서는, “진여(眞如)의 말이므로 진언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대일경(大日經)》 권3에서는 “낱낱의 진언이 모두 여래(如來)의 묘(妙)가 극(極)한 말이다”3)라고 하였고,《금강정유가분별 위수증법문(金剛頂瑜伽分別 位修證法門)》 에서는, “무릇 진언다나니종(宗)이란 일체 여래의 비오(秘奧)한 교(敎)다”라고 하였고,《비장기본(秘藏記本)》 에서는, “진언이란 여래의 진실한 말씀에 허망함이 없기 때문에 진언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또《대일경소(大日經疏)》 권7에서는, “여래의 일체 언설은 진언 아님이 없다”4)고 하였다. 이는 곧 여래의 참 말씀은 모두 진언임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진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은 다라니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② 다라니

다라니(陀羅尼)는 범어로 ‘다라니(dh󰐀raṇi)’라 하며, ‘지닌다(保)’는 뜻의 ‘두르(dur)’에서 전화된 명사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래의 언어가 일자일문(一字一文)에 능히 무량한 교법의리(敎法義理)를 총섭임지(總攝任持)하므로 다라니”라 하였다. 다라니를 의역하면 지(持), 총지(總持), 능지(能持), 능차(能遮)라 한다.5) 밀교에서는 많은 어밀진언(語密眞言)에 대해서 다라니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 진언의 문자에 모든 부처가 적집시킨 공덕이 총섭임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승경전에서는 ‘진언’과 ‘다라니’란 말이 상당히 많이 쓰이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즉 주(呪)가 발전하여 불교 내에서는 다라니로 변천한 것이다. 보통 문구가 간단한 것을 진언․밀언(密言)․명(明)이라고 이르며, 조금 긴 것을 다라니(陀羅尼)라고 이르는 것이 일반적이나, 진언과 다라니를 단순한 이명(異名) 동의어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총석다라니의찬(總釋陀羅尼義讚)》 에 이르기를, “진언에는 일 자(一字)의 진언이 있고, 이 자, 삼 자 내지 백 자, 천 자, 만 자가 있다. 또 그 수를 넘는 무량무변의 진언도 있다. 이 모두 다라니․진언․밀언․명이라 이름한다”6)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진언과 다라니, 명을 동일한 의미로 총칭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언과 다라니는 외도(外道)의 주(呪)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인도에서의 주술신앙은 불교 시대로 내려오면서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진언은 여래(如來)의 가지력(加持力)에 의해 이루어지고, 진언도(眞言道)는 정등각(等正覺)의 성취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점들이 외도와 초기불교에서의 세간적 주술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진언과 다라니의 불교적 수용과 전개

초기불교 시대에는 인도 고대 종교의 주술신앙이 밀교적 요소로서 전개되지 못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때는 석존이 재세하였던 시기이므로 정법 외에는 불교 내에서 허용될 수 없었다. 때문에 초기불교에는 주술신앙이 크게 자리잡지 못했다. 다만 일상생활과 관련된 사항 중에서 부분적으로 주술 사용이 허락되었음을 초기경전이나 소승경전에서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은 석존 당시의 초기불교에서도 주술신앙이 전혀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점이다.

석존이 주술사용을 금지하였음은 경전에서 볼 수 있는데,《장아함경(長阿含經)》 권14,《범동경(梵動經)》 권2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문(沙門), 바라문(婆羅門)들은 남의 신시(信施)를 받아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사람을 병들게 하기 위해 저주하고 혹은 악한 주문을 외우며 혹은 선한 주문을 외운다. (중 략) 혹은 코끼리 주문 혹은 지절(支節)의 주문, 혹은 안택부(安宅符) 주문, 혹은 불에 데이고 쥐에 물린 병을 고치는 주문을 외운다. (중 략) 그러나 사문 고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7)

이 경에서 설해진 주문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의 고대 종교에서부터 사용되어 왔던 주술은 석존 당시 인도 사회에서도 보편적으로 행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석존 자신은 주술사용을 금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고(苦)로부터의 해탈, 즉 열반(涅槃)에 듦에 있는데, 주술신앙으로는 감히 이룰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해 주(呪)는 불교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수행방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만 “뱃속에 벌레를 없애는 주문을 외우거나, 음식이 체한 것을 낫게 하는 주문을 외우거나, 글을 배우거나, 세속의 외도를 항복시키는 주문을 외우거나, 독기를 없애는 주문을 외워 몸을 보호하는 것은 모두 죄가 되지 않는다”8) 하여, 부분적으로는 주문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문은 불교에 들어와 종교적인 면에서 더욱 발전 모습을 보이며, 현세 이익적 수단뿐만 아니라 정법(正法)을 위한 방편수행으로써 행해 졌다.

또한 초기․부파불교를 살펴보면, 부파불교에서 성했던 교학연구 중심의 불교활동으로 인해 재가불자들과 불교 사이에 거리감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교단의 위축과 특정인만을 위한 불교로 전락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밀교가 형성되었다. 밀교에서는 기존의 특정 교학 집단을 위한 불교가 아닌,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불교운동으로 진언과 다라니를 불교적으로 수용했다.

3. 진언과 타라니가 불교무용에 끼친 영향

1) 불교무용의 기원과 의의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계율 상 가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무용의 종교적 의미와 교화적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들에 밝혀놓고 있다.《법화경(法華經)》 제2 비유품에 “사리자가 기뻐 춤추며 일어나서, 합장하고 부처님의 존안을 우러러보았다”라고 하였다. 또한《무량수경(無量壽經)》 권(卷)상(上)에는 “이 빛을 만나는 자는 삼구(三垢)가 소멸하고, 신업(身業)이 부드러워져, 기뻐 춤추고 착한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하였으며, 권하에는 “빛이 전신을 감싸서 세 번 돌아 정수리로 쫓아 들어와, 일체 천인(天人)들이 모두 기뻐 춤춘다”라든지, “부처님의 이름을 얻으면 기뻐 춤추고 이에 일념(一念)에 이르면 마땅히 큰 이득을 얻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불교무용인 범무(梵舞)의 기원이 환희용약(歡喜踊躍)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환희용약은 깊은 신앙의 결과에서 얻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무용은 신앙의 행위적 표현이며, 의식무용으로 전개될 수 있는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 의식무용의 전개와 발전은 밀교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밀교란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적 가치체계 면에서 밀교는 상징체계를 중요시하며 모든 행위적 표현에 있어서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밀교가 불교의식을 다양하게 전개․발전시켜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무용이 의식무용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불교의식의 구조적 성격에서 파악되어야 한다.9)

불교의식에서 구밀(口密)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진언과 다나니의 독송과 염불이 있고, 신밀(身密)에 해당되는 것은 의식무용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의밀(意密)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환희(歡喜)가 있다. 밀교에서는 신․구․의를 삼밀가지(三密加持)라 하여 수행의 중요한 3대 요소로 삼는데, 그 전개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불교의식의 진행이 독경과 염불 등의 구밀에만 의존하였다. 그러던 것이 신밀인 의식무용에까지 구체화시켜나가는 데는 환희라는 동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삼밀가지의 구체적인 신앙 표현에 따른 의식무용의 의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불교무용의 기원은 신라시대의 원효 대사가 표주박을 두드리며〈무애가〉를 부르고 무애무(無碍舞)를 춘 것과 그의 스승 대안 대사의 동발무(銅鉢舞)를 들 수 있는데, 기록을 보면 동발무는 동발을 치며 “대안 대안(大安 大安)”을 외치면서 시장과 골목 등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일반대중을 교화하는 것이었다.

 또 682년 경에 조성된 감은사(感恩寺)의 사리탑에서 발굴된 금동상여형(金銅喪輿形) 환희용약 사리기(舍利器)의 난간에 보면 동북우주악천(東北隅奏樂天)10)이 보이는데, 현재 우리나라 바라의 모형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아직 정형화된 의식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형화된 대규모 불교의식이 행해진 기록은 신라시대의 백고좌강(百高座講)․팔관회․연등회 등에서 살필 수 있는데, 다만, 범무(梵舞)의 발전이 범패(梵唄)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범패가 이미 신라시대(830년) 진감국사(眞鑑國師)에 의해 당나라에서 전래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본격적인 의식무로서의 범무가 행해졌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범패란 일반적으로 성악으로서의 불교음악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성악만을 지칭할 때는 범음(梵音)이라 하고, 범패라고 하면 범음과 기악, 그리고 무용까지 합쳐진 종합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시대에 범패가 전래되었다 함은 범무도 함께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상남도 하동의 쌍계사(雙溪寺)에 있는〈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功塔碑)〉에는 많은 제자들이 범패를 배워 성행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의식이 더욱 발전한 시기였다.《고려사》에 전하는 불교의식의 기록들은 다양하나, 범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별로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재회(齋會) 등에는 수백 명의 범패승이 의식을 진행했다고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 성대한 의식과 더불어 그에 따른 의식무용으로서의 범무의 존재를 알게 해줄 따름이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범무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자료로는 연산군 2년(1496)에 간행된《진언권공(眞言勸供)》11)을 들 수 있는데, 이 문헌을 살펴보면 ‘명발’과 ‘요잡’이란 말이 보이는데, 이는 바라춤을 추라는 내용으로 불교의식에는 불교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 숙종 때에 이르면 불교계는 의식집(儀式集)의 정비에 많은 힘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식집의 정비는 의식음악으로서의 범패 중흥에 중점을 두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조선왕조의 배불정책에 의해 상류층에서 기반을 잃은 불교계가 그나마 일반대중에게 그 기반을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식을 통한 전교가 더욱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재래적 토속신앙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범패와 범무를 중흥시키는 데 크게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선조 22년(1589)에 제작된 감로왕도(甘露王圖)12)를 자세히 살펴보면, 석존께 육법공양(六法供養)을 올리고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스님들의 작법을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스님은 법고(法鼓)춤을, 어떤 스님은 바라춤을, 또 다른 스님은 나비춤으로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볼 때, 불교 의식무(儀式舞)의 역사는 1589년 이전 불교문화와 더불어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때 간행된《범음집(梵音集)》은 그 뒤 몇 번이나 증보판이 나오게 되었다. 가령 백파(白坡)에 의해 정비된《작법귀감(作法龜鑑)》은 그러한 성격의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안진호(安震湖)에 의해 편찬되어 오늘날 불교계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석문의범(釋門儀範)》은 앞의 의식집을 재편집한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집들이 모두 범패와 범무의 중흥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불교 의식(儀式)이 상당히 민중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전하는 범패와 범무는 신라시대 이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유지되던 것을 조선 중기에 다시 확립하여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오늘날 전하는 불교 의식무는 모든 불교 의식에 통용되는 춤이 아니라 일반 신도들의 요구에 응하여 승려가 행하는 재의식(齋儀式)에서 주로 추고 있으며, 몇몇 승려들에 의해 무대화 작업을 시도하여 많은 호평도 받은 바 있다. 그 한 예가 2001년 국립국악원 50주년 특별 초청행사로 예악당에서 영산재를 봉행한 것이며, 일본의 국립극장에서도 영산재를 시연한 바 있다.

2) 불교무용에서의 진언과 다라니의 역할

불교무용 중 바라춤은 진언과 다라니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나비춤이 불법(佛法)을 상징하는 춤이라면, 바라춤은 불법을 수호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의식 도량을 정화하여 성스러운 장소가 되게 하는 춤이라 하겠으며, 한편 주술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춤은 의식 절차상, 특히 도량정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추는 것이다. 바라춤은 나비춤과 같이 특수한 의상을 필요로 하지 않고 통상 승려의 가사와 장삼으로 춘다. 양손에 바라를 들고 두 사람, 네 사람 또는 그 이상의 많은 수의 사람이 군무(群舞)를 추며, 반주는 범패․호적․태징으로 하고 삼현육각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다라니를 범음성(梵音聲)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춤이 도량 정화와 관계된 주술적 의미를 지님을 뜻한다.

바라(鈸羅)춤 가운데 ①천수(千手)바라춤 ②사다라니바라춤 ③관욕게진언(灌浴偈眞言)바라춤 ④화의재진언(化衣財眞言)바라춤은 진언과 다라니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는데, 이는 진언과 다라니가 불교무용 바라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 다른 종류의 바라춤은 명발(鳴鈸)과 막바라춤․내림게(來臨偈)바라춤, 요잡(繞匝)바라춤 등이 더 있는데 진언과 다라니는 없고 주로 태징 박자에 맞추어 춘다. 다음으로 나비춤은 주로 게송에 맞춰 추게 되지만 일부 진언과 다라니와 관계를 갖는 것은 옴남작법과 삼귀의작법 등이다.

4. 불교무용의 현대적 활용방향

1) 문화예술로서의 발전과 포교에의 활용

불교무용 바라춤을 무대화하여 공연예술과 접목시킨다면 그 효과는 크리라 생각된다. 실제 바라춤을 연극에 접목시켜 공연한 사례들이 있는데, 그러한 예로는《노미오와 주리애(盧美吾와 朱梨愛, Romeo and Juliet)》,13)《데이신따이》(부제: 일본군 ‘위안부’ 훈 할머니),14) 《등신불(等身佛)》15) 등이 있다. 연극의 효과는 객석의 관람객뿐만 아니라 배우들 자신들도 동화된다는 의미에서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해외무대 공연에서의 호평도 있었는데, 1988년 ‘태국 국왕 초청공연’과 1994년 러시아 사할린 ‘강제징용희생자 위령제’, 2000년 미국 뉴욕의 ‘카네기 메인홀 영산재 공연’, 2001년 일본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범패 공연, 유럽 오스트리아, ‘벨기에 국제민속페스티발’, ‘제24회 한국 명무인전’ 출연, ‘세계통과의례페스티발’, 2003년 미국 뉴욕 ‘재팬소사이어티 초청 범패 공연’ 등, 국내외에서 이루어진 단체공연이 많은 호평과 갈채를 받고 있다. 이는 우리의 불교무용을 한 차원 높여 문화예술로서의 발전과 포교에의 적극적 활용의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2) 사회복지 측면에서의 발전방향

(1) 청소년 단체에의 활용


청소년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불교사상이 깃든 문화․복지 프로그램의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 문화복지에 대한 청소년부 동아리들의 욕구는 문학의 밤, 연극공연, 미술, 조각전시회, 청소년 산사음악회 등으로 사찰의 법당이나 마당만 제공하면 쉽게 실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들 프로그램 중 청소년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바라춤, 나비춤을 지도하고 활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흠씬 풍기는 춤사위를 청소년들이 배운다면, 신심과 포교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인천광역시에서는 바라춤과 나비춤을 지방무형문화재 제10호로 2002년 2월 4일 지정하였다.

또한 2003년부터는 전승학교를 지정하여 지역문화 발전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또한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타악연희과에서는 범패 전공과목을 개설하여 수업 중에 있으며, ‘KBS 국악한마당’에《님이여 가시옵니까》라는 작품을 올려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는 불교음악 무용을 작품화해서 중앙무대에 올린 것으로, 앞으로도 많은 내실 있는 작품들이 기대된다.

(2) 노인복지시설에의 활용

노인복지 시설의 활용방안으로는 ‘제4회 국제민속페스티발’이 2001년 8월 2일부터 8월 7일까지 유럽 벨기에에서 있었다. 8개국 10개 팀이 참가했는데, 동양에서 참가한 팀은 우리 영산재 뿐이었다. 공연에서는 불교무용을 선보였는데, 조직위원회에서 요청이 왔다.

공연은 저녁시간에 이루어지니 낮 시간에는 양로원을 방문하여 공연을 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몇 번의 경험은 있었으나 외국에서는 처음이라 생소했지만 흔쾌히 허락하고 로즈마리아 양로원을 방문하여 공연하였다. 유럽 노인들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은 했지만 기우였다. “원더풀!”을 외치며 불편한 몸으로 박수를 연신 치는 것이다. 우리 단원들은 내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공연을 마치자 또 다시 조직위원회의 요청으로 양로원 두 곳을 더 방문하여 공연하게 되었는데, “멀리 동양의 문화를 접한 이곳 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하고 생각해 보면, 한국에 계신 어르신들께도 우리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 드림으로써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노인들의 정서에 잘 맞는 불교무용은 노인복지시설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5. 결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언과 다라니는 고대 인도의 베다신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의 초기에는 세속적인 주문들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대승불교 후기 이후 밀교의 성립과 함께 발달하게 되었다. 진언과 다라니의 특성상 독송과 송주(誦呪)를 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율동이 동반되어 이를 체계화․정형화한 것이 바로 불교무용이라 할 수 있다.

또 “부처님의 이름을 얻으면 기뻐 춤추고, 이에 일념에 이르면 마땅히 큰 이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여 범무(梵舞), 즉 불교무용의 기원을 환희용약(歡喜踊躍)에 두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무용을 정확하게 언제부터 추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한국 불교사에서 불교무용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원효대사의 무애무와 그의 스승인 대안대사의 동발무는 동발을 치며 “대안대안(大安大安)!”을 외치면서 시장과 골목에서 교화의 방편으로 춤을 춘 것을 그 기원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불교무용 가운데 바라춤은 바라를 든 오른손이 몸쪽으로 모여 올 때는 부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손을 다시 펼칠 때는 “그 진리를 널리 펼치겠습니다”라고 하는 서원의 춤이 된다. 바라라고 할 수 있는 동발(銅鈸) 󰠏󰠏󰠏 혹은 제금 󰠏󰠏󰠏 이 682년경에 조성된 감은사 사리탑 사리기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모형 가운데 최초라 할 수 있다.

 바라춤의 춤사위가 그림으로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1589년 선조 22년에 그려진 감로(甘露)탱화로써 현재는 일본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수탈해 간 것으로 보여진다. 바라는 음색의 강렬함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겸비한 악기인데, 여기에 진언과 다라니, 그리고 춤까지 겸비함으로써 바라춤은 포교에 활용되는 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진언과 다라니의 참뜻을 드높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신행할 수 있도록 불교무용을 바라춤과 함께 보급한다면, 문화예술과 공연예술로서도 손색이 없고, 이를 통한 포교의 효과는 크리라고 기대된다. 다만 예술성과 포교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은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능화 스님
동국대학교 박사과정수료, 인천시 무형문화재 10-가호 범패와 작법무 보유자. 현재 한국불교무용연구소(www.buddhistdancing.or.kr) 소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